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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에는 예수가 12살 때에는 사원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서른 살 무렵에는 요르단 강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이의 17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흔히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라고 불리는, 이 17년 동안 예수는 ‘지혜와 정신적 능력을 키워왔다’고 『누가복음』에 쓰여 있을 뿐이다. 예수가 태어날 때 별을 띄우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오는 등 요란한데 비하면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 나이 13세면 결혼하는 나이라고 하는데 예수는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성경은 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  김기창 화백의 '요한에게 세례받는 예수" - 한국적인 화풍으로 그린 그림


그러나 그 동안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생활을 했으며 불교의 고승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1887년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고전학자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도 북부의 케시미르에 있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이 전해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두 권의 기록서(원본은 서기 2세기 이전의 팔리어로 기록되어 랏사[신들의 장소]근처의 한 사원에 보존되어 있다)의 연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홀거 케르스텐의 『인도에서 예수의 생애』, 엘리자베스.C.프로펫트의『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민희식의『법화경과 신약성서』등의 책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불문학 박사인 민희식 한양대 교수가 신문지상(주간중앙 1986. 10. 26)에 ‘예수는 한때 불교고승이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보면 그 내용을 대충 알 수 있다. 민희식 교수는 84년 펜번역 문학상, 8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등을 수여받은 바 있는 석학으로서 특정 종교의 신자(信者)가 아닌 학자로서 발표한 내용인 만큼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들은 그동안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비장(秘藏)된 채 공개되지 않던 것을 민교수가 지난 여름방학을 이용, 입수해 귀국한 것으로 ‘예수가 원효대사와 같은 불교의 고승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그는 13세때 유태법에 따라 가장권(家長權)을 갖고 결혼을 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당시 소년들 가운데 유난히 준수한 ‘이사’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인도 상인을 따라 인도지역으로 떠났다. 이사는 14세 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샤드 등을 공부하나, 4성 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사’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예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캐시미를 거쳐 라닥크의 레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이어 티벳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 멩그스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대사(大師)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 때 이루어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간음한 여인의 예)하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듯 불교적 연대기에 신라 원효, 혜일대사 등과 같이 이사대사의 자세한 활동기록이 소개돼 있는데 반해, 기독교계 문헌(누가복음)이 다만 ‘그때까지(30세) 예수는 사막에 있었다’고만 막연히 기록되고 있다.

민교수는 “불교측 문헌이 정확한 이유는 순교 당시의 견문기록임에 반해, 기독교측 무헌은 오랜 세월이 경과된 뒤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까닭”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제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확립을 위해 예수의 기록을 비교적 정확히 기술한 『토마스(도마)복음서』 등이 지나치게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어 바이블 편집에서 삭제했다는 것.

기독교의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불교의 법화경(法華經)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는 민교수는 장자궁자(長子窮子)와 기독교의 탕자의 비유 외에도 삼위일체의 삼신불에서의 유래 등 많은 부분을 예로 들었다.



▲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초상 - 부루나 존자가 생존의 석가모니를 그린 그림이다.석가모니는 벼농사를 짓던 동이족 출신이다. 부처님 생존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尊者>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그 초상화를 기준으로 상호를 보게되면 굵은선 의 부드러운 적당한 곱슬 머리에 수염도 적당히 있고 이마나 안면의 선이 아주 서구도 아니고 우리 쪽의 몽골리언 모습에 가까운 티베트인들과 의 중간 형이며 어깨 골격도 넓고 강하며 석굴암의 부처님 정도의 비율의 골격에 인간적인 굴곡이 강한 아주 호남형으로  앞가슴도 적당히 넓게 벌어진 모습 등으로 보아 키도 약 1.87~1m90cm정도로 짐작되는 형상이다.석가족은 현재 네팔(티벳남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지방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되었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난다(정반왕)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藁離族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고구려)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常盤大定의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藁離族,九黎族)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정한 모습은 그리이스의 화풍이 들어간 아테네식도 아니고 후에 전통을 이어간 아리안(현재의 이란 및 인도의 종족)계통의 심목고비가 아닌 몽고계 인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현대 네팔에 샤카족이라 하여 석가모니의 후손들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동쪽에서 이동해 온 고리(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고구려의 기원 =북경근처인 중국 난하지역에 위치)족이라면 당연히 단군조선의 후예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석가의 출생 및 사망 시기는 확실치 않다. 20세기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나,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기원전 410년에서 400년 무렵에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의 뜻인 메시아의 어원은 불교에서 말세중생을 구제하러 올 미래불인 미륵(마하트리아 혹은 메테아)에서 유래했다는 일화를 비롯,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의 이름은 한역불전(漢譯佛典)의 정반왕(석가모니의 부친)의 서양식 발음(이태리‘조바니’, 프랑스‘장’, 영국‘존’)에서 나왔다는 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고 민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 예수 생애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이들 불교적 자료는 한때 리처드 보크가 실제로 인도, 티벳 등을 답사, 다큐멘터리 필름(The Lost years of Jesus)에 담겨진 적도 있다고 한다. [ 주간중앙 1986. 10. 26 ]

그리고 예수가 이렇게 동양으로 구도의 여행을 다닌 사실은 리바이 도우링이라는 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방법인 아카샤(akasha)라는, 우주심(宇宙心)에 의해서만 전달되는 기록(아카식 레코드)을 그대로 베껴 썼다는 제3의 복음서 『보병궁 복음서』에도 나와 있다.

1884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8세에 목사가 되었고, 20세에 종군목사(종군목사)로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목사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천재적인 목사 리바이 도우링(1911. 69세 사망)이 쓴 『보병궁 복음서』(성약성서)에는 4대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출생과 세례요한의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 등 4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병궁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인도에 가게 된 동기는 인도의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했다가 총명한 예수를 보고 인도로 데려간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당시 예수는 12살이었고, 인도의 쟈간나스 사원에 승려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인도의 최고가는 명의(名醫) 우도라카의 제자가 되어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치료법을 배우며 베다 및 불경을 공부한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승려들의 정죄에 걸려, 죽음을 피해 라마스의 도움으로 네팔로 피신하였다. 그 뒤 성인 피자빠찌의 소개로 밀교(密敎)의 대성자인 멩그스테에게 찾아가서 제자가 된다. 여기서 이 절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고전(古典)의 필사본을 그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읽었으며 이 곳을 떠날 때 광명의 부처라는 찬사를 받은 예수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24년 전에 자신을 찾아준 동방박사 3인의 마기교 승려를 찾아 뵈었다. 이윽고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 예수는 어머니의 애정어린 환대를 받지만 다른 가족들로부터는 환대를 받지 못한다. 어머니 마리아와 여동생 미리암에게만 지난 날 구도의 과정에서 겪었던 사연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희랍으로 떠났다. 희랍의 교사 중에서 아폴로라는 성자와 함께 교사들을 가르치며 희랍의 정신세계를 들었다.

25세에 다시 이집트 조안에 가서 ‘헬리오폴리스’(해의 도시)로 가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이라는 신전에 입회하기를 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여기서 6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 극복하고 거룩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애굽 밀교의 비밀, 생사의 문제, 또한 태양계 바깥의 비밀을 배웠다. 그리고 사자의 방에서 일을 마친 뒤에 ‘보랏빛 방’에서 일곱 번째의 시험을 이겨내어 ‘그리스도’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상이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것인데 인도에서의 행적 등 학자들의 연구내용과 많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jc80/HFuF/278?docid=ge8g|HFuF|278|200809131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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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십자가 처형을 전후한 예수의 알려지지 않는 생애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 홀거 케르스텐 / 고려원 (1987)

           머   리   말

1973년 나는 예수가 인도에서 살았다고 가정하는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예기치 않는 우연한 기회였다. 그때 나로서는 그 문제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면서도 다소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 기회에 예수의 실제 생애를 탐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곧 학술적으로 밝힐 만한 자료나 예수의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 사람은 정말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가? 왜 그는 동시대인들의 눈에 그토록 이상하고 신비롭게 비쳤는가? 그리고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탐사를 진행해 가면서 마침내 인도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나는 “인도에서의 예수”라는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해 온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값진 후원은 물론 놀랄만한 정보도 얻게 되었다.

이 책을 출판하는 형식에 있어서 나는 이 책의 간결하고도 논리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그리고 세세한 내용들이 소홀하게 넘어가지 않도록, 너무 학술적인 형식으로 기술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많은 내용이 대담하게 보이거나 어떤 것들은 있을 법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책은 여러 관련 분야에 있어서 보다 넓은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사실 이 연구 작업은 어느 한 사람이 혼자서 추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다. 모든 불합리한 주장들을 밝히는 일이나 거기에 상반되는 것들을 입증한다는 것은 기존 교회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종교관을 손상시키거나 일반 독자들의 순수한 믿음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표나 의도는 아니다. 그리스도 메시지의 영원하고도 중심적인 진리, 그것을 밝혀 주는 길을 다시 한번 찾아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종교적인 권위를 남용하는 다분히 세속화 된 기관의 야심에 의하여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흔들려 왔다. 그러므로 이 책은 새로운 믿음의 선포가 아니다. 다만 이 시도는 참으로 영적이고 종교적인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하겠다.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 일어나 반론을 펴라.
   전(全)교회의 역사는
   오류와 권세의 뒤범벅이니.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983년 3월 프라이 브르크에서.
                                                     홀거 케르스텐

   “영문판에 덧붙여”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의 영역판을 완성시키는 데 2년 이상이 걸렸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이 책의 7판이 나오고 있다. 이 번역은 요즘의 지식에 맞게 여러 번 개정되었다. 나는 영국 독자들에게 나의 필치가 약간 껄끄럽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나는 설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사실들을 가볍게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흔하지 않은 솔직함을 가지고 썼다. 나는 영국에서도 탁월하게 인내심이 있고 편견이 없는 독자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어쨌든 주교(더 햄의 데이빗 젠킨스)가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인의 견해와 관련된 그의 개인적인 의문점들에 대해 그의 부활절 메시지에서 설교한 만큼 용기가 있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가능하다. (데일리 델리그라프 1985년 3월 30일자)      
                                                  1986년 9월   H. K.


저자 : 홀커 케리스텐은 1951년 동독의 막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2년에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이주했다. 1973년과 74년에는 동양으로 첫 번째 여행을 떠나 터키, 이란, 아프카니스탄 등지를 여행했다. 1974년-79년까지 그는 종교 교육 교사가 되기 위해 프라이브르크에 있는 개신교 개통의 한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 후 비밀에 쌓인 예수의 생애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하기 위해 인도에 몇 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1982년까지 프라이브르크  근처의 직업학교에서 종교교육 교사로 있었다. 그 이후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각종신문에 자유 기고가로 일했다. 그의 여행 행선지는 대부분 동양이었다. 저자의 사무실은 현재 프라이브르크에 있다.


    “장성규 옮김 / 옮긴이의 말”

오래 전부터 역자는 인류 역사상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는 분들의 참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들의 참모습이라든가 그들이 펴고자 했던 가르침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색되어 온 것 같다. 사실 그들의 말을 기록한 원문은 접할 수가 없었고 어떤 것은 그들이 사용했던 말로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역자는 그 글들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에 싸여 있었으나 만족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말이라고 전해오는 글을 1차 자료로 하고 그 이외의 참고 서적을 2차 자료로 하여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역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의기투합할 수 있어 더 이상은 고독하지 않았다.

역자가 보기에 종교나 철학 분야에서의 우리나라 학문 발전은 더욱 많은 노력이 요구되어진다고 보며 각 종교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 또한 배가(倍加)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류 최고의 기록 중에서 네 개의 베다, 우빠니샤드, 잰드 아베스타, 라마야나, 마하바라따 등은 아직 국내에 재대로 번역되어 있지도 않는 실정이다. 사해문서라든가 폰 데니켄 가설 등은 외국에서 이미 10년 이상 된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검토와 비판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금기시 되어 온 듯한 인상이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은 이러한 세계적인 학문 발전 추세에 너무 소외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성인들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기존 종교의 가르침과 대치될 때 탄압 내지는 견제가 심하더라도 종교발생 이전의 성인들의 참모습을 우리는 그들의 말과 삶을 통해 직접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이하 생략)    

                                                               1987. 4.
                                                         신사동에서 옮긴이


                  차        례

머리말 / 개요

제 1 장  알려지지 않는 예수의 생애
니콜라이 노토비치의 발견 / 보병궁 복음서 / 세속적인 자료들 / 복음서 / 증인 바울 / 결론 / 나의 히말라야 여행

제 2 장  모세와 하느님의 자녀들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 마누-마네스-미노스-모세 / 모세는 누구인가? / 케시미르에 있는 모세의 무덤 / 정복에서 유수(幽囚)까지 / 이스라엘 자손들 / 케시미르에서 홍수가 났다 / 케시미르는 약속의 땅인가? /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부족 / 불교의 전파 / 예수는 정통 유태인인가? / 붓다와 예수의 비교 /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불교사상

제 3 장  서양에서의 동양의 지혜
동방박사의 별 / 동방박사는 누구인가 /  어떻게 신의 화신을 찾는가? / 이집트로 피난 / 나자렛파 예수 / 에세네파 / 예수 이전의 기독교 / 쿰란에서의 에세네파의 가르침

제 4 장  예수의 비밀
예수의 비밀 / 신약성서에서의 사후재생 / 예수의 기적과 인도에서의 기적 / 끄리슈나와 그리스도

제 5 장 예수의 죽음
재판과 처형 / 수의의 연대 / 수의의 과학적 분석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 역사적 관점에서 본 부활 / 바울,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를 만나다

제 6 장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예수 다시 동방으로 가다 / 이슬람의 진정한 예수 / 캐시미르에서의 예수 / 슈리나가르에 있는 예수의 무덤


끝맺는 말 / 옮긴이의 말    

(* 슈리나가르에 있는 예수의 무덤의 돌에 새겨진 “발자국”의 사진은 겔러리 / 기타란에 올립니다)

출처 : http://lightearth.net/zboard/zboard.php?id=good&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인도에서&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




     1)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독일사람 홀거 케르스텐이 쓴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은 지성인 다운 의욕이 엿보이는 책이다. 우선 종교적 고정관념을 깨고 종교의 배후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선견자 다운 자세가 엿보이고 또 그 열정으로 많은 연구를 했다는 점이 들어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연구결과 중에는 무리한 결론도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많은 유럽인들이 그렇듯이 그들의 전통적 종교인 기독교에 희의를 품고 동양의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낀 사람인 것 같다. 진정한 동양이 아니라 인도철학이나 그 사상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이며 그러한 기호(嗜好)적인 선입견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연구가 진행되었음을 알수 있다.

  인도의 북부지방인 캐시미르에서 예수님의 또 다른 생애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그는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청소년기가 그곳 인도에서 있었다는 사실은 캐시미르에서 가까운 라다크(캐시미르와 티벳의 국경지대)의 헤미스라는 사원에 기록으로 남아 있고, 예수님이 부활 후에 캐시미르 지방에서 남은 생을 살았다는 사실은 그 지방의 역사서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다.

우리 지구인들의 탁월한 스승이었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사실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런 중대한 과거의 역사들은 우매한 대중이나 아직 어린 성장기의 지구인들도 모두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미국인 베어드 스폴딩이라는 사람의 체험담인 '초인생할'이라는 책을 읽고서야 홀거케르스텐이 왜 캐시미르가 에덴동산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접촉자들' 33-34장에서 자세히 다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캐시미르의 배경인 히말라야 산악지대에서 베어드 스폴딩과 그 일행인 고고학 탐사대를 접촉한 예수님은 유대교의 배경인 구약성경의 기록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뉴에이져들이 여호와는 악한 외계인이었다 하고 또 그렇게 오해받을 만한 여러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인생활'이라는 책을 자세히 읽으면 거기에는 분명 많은 행간의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고 성경에 대한 불신은 옳지 않음을 묵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인은 '초인생활'을 읽기 전에 홀거 케르스텐의 저서를 만났기 때문에 많은 아쉬움을 느끼며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는 개인적인 기호(嗜好)성이 너무 짙다고 생각된 것이다. 기독교의 단순한 윤리적 교훈보다 인도 종교의 배경인 철학성에 심취한 나머지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역사연구에 임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홀거 케르스텐의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을 때의 본인의 의구심들을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우선 에덴동산이 캐시미르에 있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여러 모순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의 모든 연구는 에덴동산을 캐시미르에 고정시키고 그 가정하에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편향된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든 것 같다.

에덴에서 발원했다는 네 개의 강 중에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캐시미르가 에덴동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도를 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수천년의 역사 동안에 지형이 바뀌었다 해도,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다시 이란의 고원지대를 지나, 아라랏 산맥을 경유해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페르샤 만으로 흘렀을까?

또 성경에서는 분명 노아 이전의 아담의 계보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어떻게 히브리족이 노아 이전의 계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서 히브리 족이 인도의 노예족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히브리 족의 신화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관점인데, 그러면서 어떻게 인도나 이집트의 신화들은 인정해서 히브리족의 언어와 혈통도 그것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도의 캐시미르 지방에는 지명과 인명, 그리고 생활풍습이 유대인들의 그것과 같은 것들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그 지방 학자들의 연구결과이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인 것 같다. 그곳에는 유즈 아사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친 부활 후의 예수님의 족적도 분명히 남아 있다 한다. 유즈 아사프란 다름아닌 '예수 요셉'이란 뜻의 이름이다. 또 솔로몬이라는 이름으로 건축된 사원도 있다고 한다.

히브리 족은 캐시미르 뿐만 아니라 이웃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중국에까지 그 발길이 닿았다는 사실도 근래에 들어 밝혀지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홀거 케르스텐 자신도 말했듯이 히브리 족이 BC 7백년 경에 아씨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12부족 중 10부족이 고국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