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정이 깊어지면서,





자유로운 형태적 선택이 깊어지면서, 공간과 시간안에 자유가 드러나게 되었고,



형태적이 교류를 통해서, 우리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의 기쁨은 내가 너와 함게 존재한다는 기쁨이엇고,



그다음은 자유로운 형태적 변형에 있었고,



그다음은 서로간의 교류를 통한 기쁨이었다.





그것이 모두 가능했던것은 무지의 장벽에 의해서였다.



무지의 장벽은 잊는다는 것보다는 체험이 깊어지면서 그 체험에 모든것을 집중하면서



항상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면서 형태의 변화에 따라 교류도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전의 과거는 잊어지게 되었다.



즉 자신의 전의 모습의 과거는 항상 인식하기도 힘든 더 짧은 순간을 이루게 되었다.







무지의 장벽은 어느 존재가 만든것이 아니었고, 각자가 자신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게된 또다른 차원의 막이었다.







우리는 서로간의 교류를 통해서 배우는데에 기쁨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간의 교류를 통해서 가르치는데에 기쁨을 느꼈다.







가르치는것이 잘못된것이 아니다. 배우는 것도 잘못된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자신이 그 자체로 즐겁고 기쁨을 느낀다면



가르치는 것, 배우는 것 모두 다른 사람의 변형을 이끌기 보다는



자신의 자연스런 변형을 이끌게 된다.







그러기에 옳다는 사라지게 된다. 잘못됨또한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가장 높은 곳에 있을때보다 가장 낮은 곳에 있을때보다.



항상 배우고 가르치는 두가지 기쁨을 함께 누리는 상태에 있길 원했었던걸 기억하자.









가르침은 자신의 선택적 경험을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고,



배우는 것은 다른 존재의 내가 점점 잊혀져왔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들이 되어진



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것도 인위적인 것은 없었다.



인위적이란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문제로만 직결되는 선택적 경험일뿐이지,



또 그 사실을 서로 공유하여 서로가 그것을 받아들인것 일뿐...



그 경험은 그 집단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모두가 함께 선택하여 흘렀던 전체적인 모습이 우리의 창조 흐름이었다.









바람이 흘러가면 바람이 흘러가게 내어주라.



햇살이 빛출때면 햇살이 빛춤에 나의 가슴을 맡겨라.





부분 부분이 다 진실이었지만,



진정 우리가 계속 분리되었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로 나아가야 하는가?











자신의 모든 계획 모든 앎을 비우고 전체적인 인식안에서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이 순간의 선택이 나에게 정말 지금 순간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가?







미래를 위해서라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금 순간의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미래도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뿐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