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무엇이었을까...

그냥 가득차면서도 비어있다는...영원한 휴식같은 느낌일까...



두려움이 왜 생기게 되었는가..

죽음을 왜 두려워하는가... 삶을 왜 두려워하는가...


영원한 흐름속에 태어난 삶과 죽음...




우리가 최초로 드러나고 창조를 하였을때..

우리가 각 각이 "나"와 "가"의 중심체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을때..

우리는 두려움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픔이 무엇이지도 몰랐다.

고통이 무엇인지,, 또한 기쁨이 무엇인지..행복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나의 창조세계로 들어오게 될때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드러오기에,,

자연스럽게 잊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함께 존재했을때,, 언제나 우린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언제나 다시 기억하였고, 그것은 너와 나의 분리보다는

전체적인 우리안에서의 하나의 개체성이란 느낌이었다.


즉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었고, 기쁨을 느끼면 모든 존재가 함께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창조계안에 수많은 창조계의 설계 또 그 안의 창조의 반복속에..

우리는 분리될 수 있었다.



각 각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을만큼의 자존이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칼로 찔러도 죽지도 않았다.

고통조차 어떠한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즉 영원했기에 어떻게든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존재하질 않았다.

즉 그 안에 다시 창조계속으로 들어갈 수는 있어도,,

그전의 창조계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리 후에는 끊없는 여정많이 존재했지,, 뒤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억은 할 수 있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억을 그 창조계안에서 살렸을때,, 스스로 체를 버리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육신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졌다.

그것이 모든 존재가 그렇게 각자가 그렇게 선택했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전공간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더 깊숙한 곳으로 또는 더 얕은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처음에는..



그렇게 창조게가 각 각이 분리가 완전히 된 후에는 즉 개별생명이 된 이후로는

서로의 단절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자신이 가는 길이 길이 되었다.

어느 정도 들어갔을까.. 함께 존재하지만 어느 정도로 깊숙이


자신의 창조계안으로 들어간것일까...



서로간의 사랑이 다시 싹트게 되었고, 서로간의 나눔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만큼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체가 그 모든 것이 되었을만큼 서로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각 각의 명확한 아름다움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 공간안에서의 죽음은 더이상 의미를 잃게 되었고,

상대적인 관계에서의 죽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상대의 아름다움의 파괴도 아니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단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가 죽여달라고 한다.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표현되어진 아름다움과 사랑과 함께 동반된 흐름이었다.

그리고 죽여도 상대적으로 죽여도 죽지 않았다.

즉 체가 망가지얼정 전혀 죽지 않는 것이었다.

즉 피가 흘러도 살이 떨어져 나아가도 그 상태로 영원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치유가 안될 만큼 마법이 사라지고, 서로의 관계안에서 행복을 극대화 할 무렵

이었다. 체가 죽게 되니 슬픔이 찾아왔고, 고통이 찾아왔다. 그것은

체가 사라지는 아픔이기보다는 이별의 아픔이었다.



모든 고통과 모든 두려움은 이별 즉 관계성안에서의 그 헤어짐에 대한 마음이었다.

그것이 더 깊은 창조계로 내려오게 되었을때..

죽음은 체의 사라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죽음은 두려움과 함게 길을 가게 되었다.


그것이 자연스런 우리의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존재들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언제나 영원함을 안다. 죽음도 삶도 영원속에서 하나의 드러난 생명의 흐름이다.

우리에게 죽음이 있었기는 한것이었을까?

언제나 영원했는데..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고...




창조계가 왜 탄생했을까....

고통 두려움 기쁨 행복 등이  그 창조계가 존재함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모든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표현되어지지 않았을뿐이고,


그 표현의 흐름의 순서.. 즉 무엇을 먼저 드러내는가의 순서에 따라서,,

창조계가 각각이 사랑이 먼저일수도,  두려움이 먼저일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밟는 개미가 아픔을 느끼는 것일까?

개미는 "나"보다도 "가"의 창조계이다.

즉 스스로 죽고 내어주는 그런 공간중심체 이다. 즉 자신은 비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개미의 군집의식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창조계에서의 선택이 전부가 될 수가 없다.

개미의 이름이 그것 하나로 불리워지지 않기 대문이다.


그 모든 이름이 각 자의 드러나지 않은 표현속에 이미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있다. 하나를 선택했어도 그 모든 것을 표현한것이다.



그러나 창조계안에서는 그럴지라도,,

모든 존재는 하나 하나 고유의 생명이다....

개미가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않더라도,, 감사하고 미안하고 눈물나는 것이다.

자신이 그러면 다른 존재도 그런것이다. 이유가 어덯든..


삶도 있고 죽음도 있다. 영원하지만, 영원하지 않음도 있다.

영원하지 않음은 휴식이다..

두려움은 있다. 그리고 사랑도 있다.

나는 사랑이 소중한만큼 두려움도 소중하다.

그럼으로써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단지 이젠 이해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시작했을때...

스스로 독립으로인한 분리로써 고통을 먼저 느낀 존재도 있었고,

스스로 하나라는 느낌으로 기쁨을 먼저 느낀 존재도 있었다.

반대로 독립으로 기쁨을 느낀존재도 있었고,

하나로 고통을 느낀 존재도 있었다.


처음은 하나도 분리도 하나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은 전체적인 하나였기도 하였지만 하나적인 전체였기도 하였다.

최초로 선택했을때. 그 마음으로 창조하게 되고,

서로 역전되게 되고, 반대 방향으로 창조하게 되어 끝을 이루게 된다.

전체로 시작해도 후에는 하나가 되었고,

하나로 시작해도 후에는 전체가 되었다.



삶과 죽음.... 삶이 희망일까? 죽음이 희망일까?..

희망은 그냥 희망이지만,, 우리가 스스로 독립하고 함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에 희망을 가지고 싶다. 단지 그 모든것이 표현되었고 드러났고,,

함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이유중 하나이다.



드러나지 않았어도 이미 드러난 것. 자연스런운것...



두려움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 탄생한 것일 수도 있고,

체로 부터 시작되어 탄생한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을 붙이든 자신이 그렇게 믿고 세상을 바라보고 창조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진다. 각 각 독립적이면서도 길을 연결만 시키면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 길을 연결하는 것이 우리이고 연결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것은 연결되어있다.



연결되었어도 연결되지 않은것이고, 연결되지 않아도 연결된것.



무엇을 어떤 의미를 갖다붙여도 그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이고 관점이라는 것.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정답이 있는가?  없다.



자신이 가는 길이 정답인것이다. 그것이 고통이 일어나도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모든 흐름이 소중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나"라고 자기 중심을 부른다.

"가","마",""사","카","하"도 있고 등 등 수없이 많은 중심체를 지닌 창조계가 있다.

"나"라는 중심은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 이미 내가 존재하고 있기에

내가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미 그렇게 쓰고 있었다.


두려움은 마음의 변화를 통해 두려움도 아름다워질 수가 있다.

즉 모든 것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두려움이 휴식상태로 간다는 것이다.



즉 꼭 모든 것이 다 존재하더라도, 표현해도 표현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선택에 의해서 모든 것은 소멸이 아닌 휴식상태로 돌아가고,

자신이 선택한 것 흐름만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린 기쁨을 기쁨 그대로 몰랐었고,

우린 고통을 고통 그대로 몰랐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였던 기억을 어느 창조계안까지 깊숙히 안까지 계속

반복하고 들어왔을때 독립이 겨우 일어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우린 우리가 원하는 독립을 이루었고, 우리가 이미 하나였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존재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선택할 수가 있다.

이미 알고서 선택할 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선택이 우리 모두의 선택이 되므로,

더이상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강요 할 수 있는가?

더이상 상대방에게 어떤 방식이든 상처를 줄 수 있는가?

더이상 상대방에게 어떤 계획을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랳다. 그렇게 지금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할 수도 있다. 그렇다. 그렇게 지금도 안할 수도 있다.



그렇게 그대는 그냥 할 수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도 없다. 그냥 그대나 나나 단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것에 어떤 판단도 어떤 잘못도 없다. 단지 그렇게 할 수 있기때문에 한것이기에..



우리의 희망은 우리 모두라는 데 있다.

그것이면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가 정말 진정으로 조화롭게

생명으로써 아름답게 감사하며 사랑하며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각 각 하나 하나의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의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아픔을 아픔 그대로 몰랐었고,

사랑을 사랑 그대로 몰랐었고,

사랑은 사랑인 줄만 알았을때도 있었고,

아픔은 아픔인 줄만 알았을때도 있었다.


명확하지 않았던 옛시절이 있기도 하였고, 명확했던 옛시절이 있기도 하였고,,


모든 흐름이나 존재상태 존재나 행위나 의식이나 빛이나 형체나 어떤 그 무엇도,,

그 하나 하나가 하나를 표현했지만, 반대로 그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표현했다.



즉 그 무엇도 생명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 각 역할로써 분담으로써 전체적인 생명을 표현했다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각 각이 그 순간 모든 것을 이미 표현하고 있었고 항상 그렇다.

그것은 언제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