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은 집착에 인해 고통스럽게 됩니다
깊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집착을 끊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손자와 함께 단둘이 살아가는 어떠한 노인이 손자 걱정에 늘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는데 그것 또한 집착일까요, 그것을 집착이라 칭하고 집착을 끊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가혹할 것입니다.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차원상승에 몰두해 현실세계를 망각하고 고차원 영적 존재와 만나려고 애쓴다면 그것 또한 집착이겠지요.
만약 그 존재를 만난다고 하면 허상일까요, 모든 것이 집착이긴 하지만 그것을 집착이라 칭하고 단절하기가 정말 애매모호 합니다. 지금 이런 생각에 얽매여 있는 것도 집착일수 있겠지요..

정말 집착이란 난해하군요...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집착의 경계란 무엇이고 차원상승에 관한 것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네요. 이야기의 연결이 매끄럽지는 않지만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_ _)

On Style 님의 위 글 잘 읽었습니다.



인간의 집착은 집착이고, 차원상승은 차원상승입니다.
그 두 가지는 같은 차원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차원입니다.

인간 세상에 인정(人情)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도 그랬고, 부처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산물이기에 그 양상을 깨닫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고통으로 자리잡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그 인정을 집착이라 하여 놓았다 한들, 그것은 놓은 것이 아니며, 놓아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매사 집착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소위 집착이라는 것의 집중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이러한 불규칙적이고 비선형적(非線型的)인 경향 모두를 人情[에고]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물질적인 안정]와 [人格陶冶]라 할 때,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집착은 손자의 생에 무관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손자의 인격성장(차원상승)과 전적인 관련이 있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아버지의 집착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의미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걱정한다 하더라도 손자의 인생 전반을 관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재, 누구에겐가 그런 집착의 대상이 생겼다면, 누구든 그것을 주시하면서 직면(直面)하면 되는 것입니다.

직면이라는 의미는 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그 집착의 대상이 누구에게나 노이로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의든 타의든 현실을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그 현실은 때때로 가시덤불일 수도 있습니다. 가시덤불을 품에 안고 가는 것을 인간의 숙명이라 하지만, 그 덤불을 등쪽으로 돌려 등에 짊어지는 행위를 지혜라 합니다.

적어도 가시가 눈을 찌르지는 않을 것이고, 시야가 확보되어 또다시 넘어지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비록, 등짝은 가시에 찔려 고통이 여전하다 하여도, 정면[現實]을 주시하며 걸을 수 있기에 인생을 겪으며 진보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나아가 신(神)이 이 특별한 행성을 통해 가르쳐 주고자 하는 차원상승의 해법입니다.



같은 차원에 존재하면서도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 그것은 허상이 아니며, 명백한 실상입니다.

그러나,
[사물과 이치에 대한 인간적 혼돈]은 차원상승이라는 [궁극의 성향]에 인간의 발목을 잡고있는 가장 경계해야 할 [관념체계]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아주 명료하며, 진리 또한 명료한 것입니다. 다만 각 상황을 동일한 차원(次元)에 놓고 보았을 때 혼선이 빚어지는 것뿐입니다. 그 둘은 분명 입체 교차로(立體 交叉路)상에서 주행(周行) 중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식의 상(像)으로는 동일 차선에서 마주보고 오는 차가 서로 교차될 때 충돌하는 것과 같은 시각적 착각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어떠한 관념이든 동일 선[同一 次元]상에서 대립[比較, 解析, 思惟]되어지는 한, 운전자[에고]는 늘 긴장하여야 하고, 운전자의 특별한 주의 없이는 충돌하는 일이 다반삽니다. 결과는 양자 모두가 불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치열한 현실 속에 영성을 함께 추구하는 자에게 종종 나타나고 발견되는 혼란의 관념체계입니다.

그러나, 차원 상승한 관점에서 사물[現狀]과 이치[原理]를 견지(見地)한다면 두 개의 대립이 한 지향점[關心事]을 향해 마주보고 달린다 하더라도 입체 교차로의 상황과 같이 서로간 충돌[分裂]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두 개의 원소는 자신의 갈 길에 자유롭습니다. 운전자는 긴장할 이유가 없으며 동일시[混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혼돈의 관념체계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애써 발견한 진리를 진흙탕 속으로 밀어 넣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동반추락을 모색하려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혼재한 [마야]의 전형적인 방해 공작 방식입니다. 그것은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도, 부처마저도 성도(成道)의 최후까지 겪었던 바입니다.



고차원적 영적 존재와 만나려는 노력.. 고차원적 영적 존재란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天下本無事)"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직관과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지혜로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조우할 수 있는 자아(自我)를 말합니다. 그 자아는 어느 정도 차원상승이 된 자아로 진아(眞我)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진아는 타인이 아닌 바로 나의 주인공이며, 우주와 연결이 되어 있고, 신과도 연결이 되어있는 존재이니, 그것 외 다른 존재를 찾으려는 것은 자신의 보물은 까맣게 잊고 방치해 둔 채, 남의 때묻은 광석이나 어루만지며 대리 만족하려는 행위이며, 정체 모를 존재에게 자신의 숭고한 운명을 의탁하고자 하는 가엾은 자의 자기 포기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시간(진아와의 조우)을 준비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의 안(內面)으로만 들어가(명상) 스스로에게 자문을 구하는 자입니다. 내 몸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진아를 흔들어 깨우세요. 그 지극함으로..


그것은 가능합니다.




허적..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16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