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와 우주가 펼쳐놓는 역사적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모든 사건[事件]의 진실을 찾기 이전에, 그대의 질문은 [관찰자의 눈에 보인 상(像)에 대한 신념은 진실한가]에 관한 질문으로 대치될 수 있다.

모든 [信念]은 [名分]에서 출발한다.

이 말은 진실의 여부가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건은 오직 관찰자[보는 자]의 의도(意圖)에 의존할 뿐이다.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기 이전에 왜 그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이 필요하다.

단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사건의 진위(眞僞) 여부는 관찰자 자신이 본인의 감정을 결정지으려는 [습관]에서 비롯된다.
뭔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정신이 처해있는 관념의 체계이자 육신이 겪고 있는 체질화된 지향성이다.
그것은 마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처럼 치열하게 오랜 세월 인간의 현실 앞에 놓여 있었고, 유전자에 각인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상 그 어느 사건도, 상에 대한 신념 외 보여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절대적 진실이나 거짓을 인간의 역사 속에 찾아볼 수 없다. 다만 [名分]과 [名色]이 관찰자의 의도 속에 지속적으로 변모하고 평가 받고 있을 뿐이다.

명분과 명색은 진실도 거짓도 아닌 허구[虛像]란 것이 진실임을 대변하다.

[虛構: 사실(事實)에 없는 일을 얽어서 꾸밈. 작가(作家)가 상상(想像)을 통하여 실제(實際)로 있을 수 있는 일처럼 꾸며낸 작품(作品)이나 그 구성(構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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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벌어지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스타시스, 차원 상승]도 명분과 명색 인가?

그렇다.

그 사건의 주체는 누구인가? 외계의 발상인가?

외계와 지구의 공동 작품이다.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반 반이다.

무엇을 위한 명분과 명색인가?

그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신념이 그들에 소속된 모두에게 안정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체성 지향은 늘 그랬듯이 습관적[遺傳的]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그들에게만은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그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그것 외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모두 창조하는 신인가?

그들은 스스로 창조하는 신이면서도 신이 되고픈 존재들이다.

그럼, 그들에게 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명분과 명색이다.


그대에게는 성년한 두 자식이 있다.
그들은 그대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아버지로써 자상하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본인들도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 성숙한 자식이 되고 싶은 의지가 있을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아버지[통치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낳아준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 보다는 더 스케일이 클 것이다.
개인의 성공을 넘어 모든 백성이 잘 살 수 있는 보다 폭넓은 대임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본인들은 이왕이면 조국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인물이 되길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아버지[神]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온 세상의 극락정토가 아니겠는가?
그 즈음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좀 더 성(聖)스러워져야 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겠는가?

극락정토는 명분이요. 자신도 더불어 성스러워져야 된다는 생각은 명색이다.

명분과 명색이라는 거대한 허구가 三界 안 우주의 창조의 힘이다.



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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