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브라이디 머피!

만약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콜로라도 푸에블로시에 거주하는 성공
적인 젊은 사업가 모리 번스타인은 몇 해 동안 취미 삼아 최면
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의 최면술은 기술적으로 상당한 수준
에 있었다. 그는 푸에블로시의 여러 의사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
는데,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말더듬, 편두통, 불면증, 과도한
흡연, 발작적 마비와 같은 심인성(心因性)질환은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50년 누군가가 그에게 "강이 있다"와 "윤회의 비밀"이라는 책을 주었다. 그는 매우 흥미롭게 그 책을 읽었고 마침내 그 책들이 최면술을 통한 병의 치료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윤회의 증거까지도 다루고 있음을 알고 놀라고 있었다. 이것이 허위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서 그는 그 사실이 사기라는 것을 폭로할 목적으로 버지니아 비치에 있는 에드가 케이시의 아들 휴린과 케이시와 면담, 기록의 검토, 리딩을 경험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케이시의 자료가 비록 터무니없이 보이기는 하나 적어도 정직하다는 것이었다.

번스타인은 푸에블로로 돌와와서 대부분 심리학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이른바 연령퇴행(年齡退行, Age-regression)기술을 이용해서 실험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그는 대담하게도 어떤 여자에게 그녀의 출생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정말 출생 이전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19세기에 자신이 살았던 아일랜드의 일생에 대해 말했다. 19세기 그녀 이름은 "브라이디 머피"였으며, 그녀가 처음 기억해 낸 것은 어린아이 였을 때 철제 침대의 페인트칠을 긁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듭되는 최면 실험을 통해서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가 일관성 있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최면에 걸린 그 여인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전혀 모르는 낱말을 썼으며, 그 당시의 장소와 때를 가리키는 낱말들은 정확했다. 그녀는 정확히 행커치프 handkerchief 라는 말 대신에 리넨 linen을, 쿠킹 유텐실 cooking utensil 대신 플랫쓰 flats 라는 말을, 그리고 파밍 farming 대신 크로핑 cropping을, 베리 bury 라는 의미로 디치 ditch 를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 표현들은 현대의 미국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말들이었고, 심지어는 현대 아일랜드인들조차 모르고 있는 낱말도 있었다. 그녀는 또 어떤 장소나 사건, 화폐제도, 농작물, 문화, 서적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그것도 나중에 번스타인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임에 입증했다.

번스타인이 사업차 뉴욕에 가게 되었을 때, 그는 그곳의 몇몇 출판업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중 더블데이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그 실험과 중요성에 대해 번스타인이 느낀 것만큼이나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주제에 관한 책을 만들기로 약속하였다. 더블데이 계획은 최면에 걸린 여인의 이야기에 대한 좀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에 조사반을 보내는 것이었다. 번스타인은 객관성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그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책의 처음 부분은 번스타인 자신의 평가였고, 두 번째 부분은 그 자료에 관한 편집자의 개별적인 검토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전화와 우편으로 아일랜드 조사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참고 자료를 통해서 미쳐 밝혀지지 않았던 몇몇 항목이 이런 방법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업무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았고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출판을 위해서 기계들이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출판 마감 일이 설정되었고, 이미 거의 만 건에 달하는 책의 주문이나 질의가 있었다. (그것은 브라이디 머피에 관한 기사가 덴버 포스트 일요 보충판에 네 번이나 게재되었고, 독자들의 굉장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원래의 계획이 수정되어야 하고 그들이 지금까지 알아낼 수 없었던 자료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인쇄해야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렇게 서둘러 인쇄된 그 책은 번스타인이 너무나도 비과학적인 절차를 거쳤다고 해서 각계의 신랄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진짜 과학자들도 자료를 수집하고 결론을 도달하는데는 일생을 소비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지적은 확실히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잊지 않아야 했다.

(1). 출판업자들이 아일랜드에서 추후 조사를 하겠다는 것에 번스타인이 합의한 가운데 매우 신념 있게 행동했다는 것과 (2).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상업을 전공한 번스타인은 자신을 과학자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는 점. 번스타인은 자신을 다윈이나 루이 파스퇴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의 기이한 경험의 결과가 단지 진지하고 자격 있는 과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임을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고백했다. 그는 그 책 마지막 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확실한 증거를 기대할 수 없는 학문 분야이다. 오히려 여기서 다룬 내용이 보다 더 철저한 고려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중요성이 있다 하겠다"

앞으로 있을 브라이디 머피에 대한 엄청난 비판은 그 사례가 더 철저하게 조사될 때까지 출판업자들이 기다렸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번스타인의 관점에선 그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브라이디 머피 사건은 진지한 과학자들의 관심뿐 아니라 인쇄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발행된 지 2주일만에 그 책은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랐다. 서점들은 수요량을 확보하느라 애를 먹었다. 5개월 동안 그 책은 열 번에 걸친 인쇄를 통해 무려 205,500권이나 찍어냈다. 미국 내 51개의 신문사들은 그 책을 연재물로 내보냈고, 또 그 중 어떤 신문은 빗발치는 독자들의 요구 때문에 두 번이나 연재물을 내 보내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파라마운드 영화사는 그 사건을 기록 영화로 만들기 위해 판권을 사들였다. 네델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아크, 스웨덴, 스페인, 핀란드와 같은 나라에서도 그 책이 번역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은 시카고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인데, 그 사람은 크로크 Krock 와 브렌타노 Brentano 에 있는 서점까지 걸어가서 진열장에 전시된 책을 모두 사 버렸던 것이다. "브라이디 머피를 찾아서 The Scarch for Bridey Murphy" 166권을 모두.

사람들은 가면 무도회의 파티를 열기 시작했다. 택사스주 휴스턴의 어느 칵테일 라운지는 "윤회"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팔았고, 나이트 클럽 연기자는 연령퇴행 실험을 다룬 해학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대중가요 중에는 브라이디 머피에 관한 네 곡의 노래가 등장했는데, 제목은 "브라이디 머피의 사랑"과 " 브라이디 머피의 노래", 스탄 프리버그가 가사를 지은 "브라이디 해머슈라겐 탐구" 그리고 그 당시 유행하는 노래 형태인 "록큰롤"이었다. (록큰롤의 가사 첫 부분에는 다음과 같다. "브라이디 머피는 수백 년 전에 록큰롤을 불렀네. 이봐요 브라이디 머피!.............. . "

동시에 브라이디 머피는 끊임없는 농담과 재담의 소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브라이디 머피에 관한 책을 읽고 유서를 바꾼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즉 그는 유산을 자신을 위해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 그들은 또 아내를 17세기로 퇴행시킨 뒤 거기에 남겨두고 온 어떤 남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 어떤 만화가는 슈퍼마켓에 있는 두 여인을 만화로 그렸는데 그 속에서 한 여인이 다른 여인에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이가 날 브라이디 머피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단 한번의 인생으로 나처럼 서툰 요리솜씨를 배울 수 없었을 거라는 거야." 장사꾼들이 브라이디 머피의 고양이 사료--- . "아홉 번의 환생의 특효"라는 상품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요컨대 라이프지가 지적했듯이 점판이나 마작, 그리고 때때로 대중을 사로잡는 다른 일시적인 유행물에 비교될 만큼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열광케 했다. 말하자면 모리 번스타인은 윤회설 세계의 해방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브라이디 머피에 대해 경솔하고 경박스런 어조로 이야기하고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몰상식하거나 인기영합주의로 다루기는 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대화와 신중한 고찰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에 자극을 받고 있었다. 판매업자들은 최면술과 환생에 관련된 책들의 판매 실적이 상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버스, 술집, 사무실, 끽연실, 식당, 비행기, 차고, 이발소, 길모퉁이, 대학가, 그리고 가정, 파티, 저녁식사자리 등 켈리포니아와  아일렌드 어느 곳에든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윤회라는 말을 전에는 들을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비밀리에 항상 그것을 믿고는 있었지만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한 사람, 또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그것을 믿었으나 지금 그들에게 주는 정보만큼 알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매우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토론되고 있다. 일반 대중이 브라이디 머피에 관한 책을 읽을 뿐 아니라 그녀에 대해 노래하고 농담거리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진지한 토론을 하고 있기도 했다. 또 스스로 최면에 걸려 연령퇴행을 실험해 보고 있었다.

"좀더 깊이 잠들어라 좀더 깊이. 좀더 깊이 .............. . "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녹음기의 테이프가 천천히 돌아가는 가운데 자신이 남북전쟁의 병사가 되고, 인도차이나의 무희가 되고, 프랑스의 매춘부가 되고, 스페인의 농부가 되고 있었다. 죤 그로버라는 이름을 가진 로스엔젤레스 미러뉴스의 한 의심 많은 기자는 연령퇴행 실험을 스스로 해 보았는데 놀라웁게도 자신이 14세기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살았음을 알게 되었고, 깨어났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몇 마디 독일어도 지껼였던 것이다.

그로버의 말에 따르면 그 실험에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무게의 단위로 퍼드 pud 라는 낱말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조사결과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그 말은 그 당시 러시아의 무게 단위로써 유럽의 항구에서 무역업자들이 사용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로버가 매우 인상 깊었다는 한 또다른 면은 마치 그가 함부르크의 삶을 다시 체험하고 있는 것처럼 엘베강가의 독특한 진흙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로버의 경우는 대표적인 예이다. 윤회설을 믿는 사람뿐 아니라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그 사건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이상과열은 본래 흥미로운 심리학적 현상이다. 그것은 첫째 사후세계에 관해 가지게 되는 어떤 끊임없는 관심의 표시이다. 둘째는 최면술이 사람의 상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매력의 표시라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시대의 불확실성의 표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확실성에 대한 강력한 욕구의 표시라는 것이다. 넷째로는 수소폭탄, 비행접시, 초음속, 레이다 조절차량, 텔레비젼, 우주로켓, 인공위성 등과 같이 지난 20년 동안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을 수 없는 신념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던 사실에 깜짝 놀랐던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윤회설이 부드럽게 해준 표시라는 것이다.

물론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는 그 시작에서부터 각계의 공격을 받았다. 이 문제에 있어 번스타인의 정직과 성실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지만 (성공적인 사업가로서 헛소리를 한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순진하고 서투르며 눈이 휘둥그런 아마추어로서 별로 잘 알려지지 못하는 분야에 뛰어들어 자기보다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 뭔가 숨가쁘게 지껄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번스타인의 이야기는 종교계와 과학계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몇몇 신학자들은 격분해서 브라이디 이야기를 "악마의 행위" 또는 "사탄의 행위"라고 불렀다. 즉, 종교적 정설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된다는 이유 때문에 분노하게 되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오랫동안 그것이 거짓임을 뻔히 알고 있었고 또 이단으로 배척해온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과학계에서는 정신과 의사들이 다음과 같은 논리적 이유를 들어 브라이디의 이야기를 공격했다.

(1). 최면술에 걸린 대상은 암시에 걸리기 쉬우며 실험자를 즐겁게 하고 싶어하므로 자신에게 기대되는 것을 거짓으로 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2).아일랜드에서 입증된 사실은 우연일 뿐이며 다른 세부사항들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해낸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쉬넥크 박사 (전 최면술 임상실험 협의회 회장)와 루이스 올베르크 박사 (뉴욕의 심리요법 대학원 의학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일랜드에서 행해진 브라이디의 이야기의 진실성에 관한 검토는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 여인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과정을 조사하는 것이다....  . 그것이 아일랜드에 가서 오래된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줄 것이다.

1956년 2월에 월리엄 바커 (수개월 전 포스트지에 브라이디의 이야기를 네 번이나 연재한 기자)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세부 사항들을 입증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갔다. 번스타인은 출판업자들에 행해졌던 원정조사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던 터였고, 덴버 포스트지 편집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바커가 아일랜드에 체류하는 3주일 동안 그를 후원해주기로 결정했다.

바커의 조사는 나중에 그가 "브라이디 머피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Bridey Murphy"이라는 제목으로 덴버 포스트지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흥미롭긴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못되었다. 그가 수집한 많은 통계자료는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다분히 협조적이며 많은 진실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깊은 종교적 확신 때문에 브라이디의 이야기가 진실일 수 있다는 데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조사의 결과가 입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브라이디 머피의 실존에 관한 증거를 부정적이고 회의적으로 보는 것이 그들의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커는 다른 사람들이 입증하지 못했던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를 몇 가지 입증할 수 있었다.

3월에는 발행 부수가 많은 미국의 어떤 잡지가 바커의 보고서에 대한 이상하게 왜곡된 기사를 실었다. 예를 들면 "데어트르의 슬픔"이라는 브라이디의 말에 대해 그 데어드르라는 이름은 1905년 이전에 나온 어느 책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커는 그 잡지가 표현한 그대로 이미 1808년에 "데어드로의 슬픔"이라고 영어와 게일어로 인쇄된 고서목록을 발견해냈다.

또 그 잡지는 1850년 이전에는 아일랜드에서 철제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브라이디는 분명히 어린 시절에 그 침대의 페인트를 긁어서 벗겨낼 수도 없었다고 단정적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바커는 그 당시에 이미 철제 침대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브리테니커의 백과사전의 설명과 그 당시 영국 소설가였던 댁커리의 노우트북을 참조하였다) 이런 종류의 그릇된 해석이 잡지를 통해 보도되어 일반대중으로 하여금 이 브라이디의 이야기를 불신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가장 큰 공격이 있었다. 즉 시카고 아메리컨지에서 "브라이디 머피는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라는 제목 하에 연재물을 실었다. 시카고 교회의 월리 화이트라는 목사는 신분보호를 위해 루스 시몬스라는 이름이 주어졌던 번스타인의 실험대상이 자신의 교회에 나오던 주일학교 학생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정신병리학자의 연구서 한 장을 읽고 루스 시몬스의 어린 시절을 철저히 연구하면 소위 브라이디 머피의 모든 기억은 그녀의 현세의 기억들을 옮겨 놓은 것임을 밝혀지리라고 생각했다. 브라이디 머피의

그는 브라이디 머피의 사이사이에 끼어 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월리엄 바커가 지적했듯이 최면에 걸린 피험자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며 그의 기억이 완전 무결하지도 않으며 그가 기억하는 것은 여러 다른 시기에서 이끌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경솔한 기사를 쓴 신문기자에 의해서 고의로 간과되었던 것으로써, 루스가 어릴 적에 암송했던 아일랜드의 해학적 독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독백 속에는 19세기 벨피스트에 파르라고 불리는 식료품 상인과 죤 카리건이라는 채소장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나 도비라는 장소와 베일리 크로스라는 길이 있었다는 역사적으로 매우 세세한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도비와 베일리 크로스라는 길은 어느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카반 지방에 있었다는 아일랜드 농부와 카톨릭 사제에 의해 실제로 그런 이름의 지역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또 그 독백 속에는 그 당시에 아일랜드에서 통용된 "타펜스 tuppance"라는 동전이 있었다는 내용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소위 전문가들이 처음에 주장한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들은 면밀한 조사를 통해 자기들의 주장이 잘못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했다) 이 밖에도 다른 많은 사항들이 아일랜드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증명되었다.

브라이디 머피 사건에 관한 모든 증거가 수집되고 철저히 조사되려면 아마 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즉 어린 시절의 잠재의식에서 나온 기억과 전생의 기억들을 가려내려면 정직하고 주의 깊은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조사는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를 비난하려는 어떤 종교적 강박관념이나 편견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일에 관해 객관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한다.

또한, 만약 루스 시몬스가 다른 최면술사를 통해 최면에 걸리는 일에 찬성한다면, 그리고 현재의 생활 이야기는 기독교의 정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위험한 것이므로 그 이야기를 뒤엎어 무효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솔직하게 진술했다. 시카코에서 온 기자들과 함께 화이트씨는 그가 주장하는 바를 계속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주장은

(1). 루스 시몬스는 어렸을 때 철제 침대의 페인트를 긁어낸 적이 있다.      

(2). 그녀에게 이웃에서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매우 다정스럽게 "플레쯔 아저씨"라고 부르곤 하였다.

(3). 그녀는 연기력이 뛰어났고 특히 흉내내는 재주가 있었으며 이따금 아일랜드 사투리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4). 그녀는 가끔 아일랜드 지그춤을 추었다.

(5). 루스 시몬스의 이웃 중에는 브라이디 머피 코르켈이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어렸을 적에  루스 시몬즈는 그녀의 아이들과 놀곤 했다. 그리고 코르겔 부인은 지금 시카고에 살고 있다. (다섯 번째 항목을 특히 의기양양하게 발표했다. "브라이디 머피 드디어 발견, 그녀는 항상 시카고에 있었다"는 머릿말과 함께 코르켈 부인의 사진이 여러 출판물에 실렸다.)

화아트씨의 표현을 빌린다면 최면상태에서 이 모든 세부적인 사실들이, 아일랜드에서 철  제 침대의 페인트를 긁어내고, 정확히 아일랜드 사투리를 구사하고, 지그춤을 추고 이웃에 플레쯔 아저씨를 둔 라브라이디 머피의 상상의 생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눈에는 이 사건이 끝난 것으로 보였다. 전국의 성직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은 더 이상 조롱 받지 않아도 되었다. 속죄, 지옥, 부활, 구세주는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그대로 안전하게 존재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더욱 기뻐했다. 뉴욕의 한 정신과 의사는 그 조사에 관해서 "멋집니다. 나는 누군가가 그렇게 해주길 바랬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루이스 올베르그 박사는 "허황된 윤회설을 사실인 것처럼 엮어낸 르스 시몬스의 그 특수한 사건을 폭로하는데 한없이 귀중한 공"을 그 증거들이 세웠다고 말했다 브라이디 머피의 유령은 이제 잠들었다. 이 브라이디 머피의 유령이란 말은 타블로이드판 신문에서 즐겨 쓰는 표현이었다. 정신의학계와 종교계는 승리의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안도의 한숨이나 승리감은 시기상조였다. 덴버 포스트의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루스 시몬스는 시카고 아메리칸지가 "발견"한 것들의 진실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예를 들어 루스 시몬스 말에 따르면  그녀는 일생동안 "플레쯔 아저씨"라고 불리 우는 사람을 안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 어렸을 때 자신이 철제 침대를 벗겨냈던 사건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흉내내는 재능이 없었다고 했다.(이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웅변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덴버 포스트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밝힌바와 일치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때 찰스톤 춤과 바텀 춤 이외의 다른 춤은 출 줄 몰랐고  아일랜드 지그춤은 추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코르켈 부인의 결혼전 성이 머피이고, 이름이 브라이디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어떤 아이도 어릴 적 소꼽동무 어머니의 이름과 처녀 때의 성을 안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시카고와 같은 큰 도시에 사는 어른들도 대개는 이웃에 사는 여자의 이름이나 처녀의 성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증거들 중 더러는 짜 맞춘 것처럼 보인다. 사실이지 두 삶을 나란히 비교한다는 것은 억지인 듯싶다. 예를 들어, 현세에서 그녀의 여동생이 어릴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었다는 이유로 브라이디 머피도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닮은 인생은 얼마든지 존재하며, 그렇다고 엄연한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20세기 시카고에서 어릴 적 기억들이 이따금 19세기기의 기억이나 아일랜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과거의 다른 시대나 다른 인생으로 돌아간다면 흥미 있고 또한 아마 매우 교훈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급하고 피상적이며, 한 차례의 돌풍과도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브라이디 머피의 증거를 완벽하게 없엘 수는 없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 할지라도 브라이디에 관해 증명해 보려는 실험이 여전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이미 너무나 많은 증거가 있다. 그리고 그 증거들은 브라이디 머피 사례에서보다 더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윤회에 관한 사례는 단지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에 그 성패가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의 가부(可否)가 저 유명한 테네시의 재판 결과에 좌우되지 않는 것처럼.

                   셀라맛 가준! (시리우스 말로 하나가 되세요!)

                                                윤회의 비밀(속편)/장경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