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 신자건 이슬람 교도건 기독교도건
거기 아무런 차이가 없다.

힌두교 신자,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라는 그 가면 뒤에 있는 진짜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다.

오직 말만이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라는 옷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는 사람이나 사원에 가는 사람이나 모스크에 가는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다. 오직 그들의 얼굴만이 다를 뿐이다.

바보 같은 이 얼굴, 이 마스크만이 다를 뿐
그 마스크 뒤에는 똑 같은 사람이 서 있을 뿐이다. 똑 같은 분노,
똑같은 공격, 똑같은 반항, 질투, 그리고 욕망, 아아 모든것이 같을 뿐이다.

그대여 보라!
이슬람 교도의 성(性, sex)이 힌두교도의 성과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또 그대여 보라. 기독교의 저항심이 힌두교도의 저항심과 어떻게 다른가를.....

마찬가지다. 사람은 마찬가지인데 입고 있는 옷이 다를 뿐이다.
힌두교도라는 기독교도라는 이 옷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 옷에 관심을 두는게 아니라
그 옷 속에 있는
그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그대 자신을 볼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것이다.
이것이 질문의 이유이다. 눈먼 사람이 묻는다. 빛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빛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할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빛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것은 탄트라뿐이다.

빛이 무엇인가? 를 묻는 즉시 탄트라는 묻는 그 자신이
지금 눈먼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 다음 그를 변형시켜 그로 하여금 몸소 빛이 무엇이라는것을 체험시킨다.

그렇다. 탄트라는 결코 빛이 무엇이라는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빛의 내면에 도달할 수 잇는가 빛을 직접 체험할수 있는가를 말할것이다.

빛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그 대답을 직접 체험할수 있는 테크닉을 줄것이다.

이제 이 대답은 지적이 아니다. 눈먼 사람에게 빛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면
이것은 지적인것이다. 그러나 그 눈먼 사람 자신이 직접 빛을 볼수 있을 때
이것은 본질적이다. 탄트라를 지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라고 말하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쉬바는 데비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둘째 탄트라는 우리의 일상 언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언어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이 탄트라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할 점이 있다.
탄트라의 언어는 쉬바와 그의 연인 데비 사이의 대화이다.
데비의 물음과 쉬바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탄트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물음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문답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이다.
두 연인 사이의 대화이다. 이 중요한 암시를 이해할 깊은 가르침은
스승과 제자라는 두 연인의 사이가 되지 않으면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진한 사랑이 없을때 아아 그 가르침의 전달을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는 깊은 애인의 관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그럼으로써만 보다 높은 차원으로 개화(開花)될수 있는것이다.

                                                                 ㅡ 라즈니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