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계(三界)의

우리가 보통 '삼계를 떠난다' 또는 '삼계에 머물러 있다'하는 말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마는, 삼계(三界)는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경계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삼계를 벗어나야 하고삼계를 벗어 나는 것은 이른바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전생의 선근에 따라 비약적으로 빨리 벗어나는 분도 있기는 하나 보통은 점차로 공부 정진 따라서 닦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정에 들어가는 초선정(初禪定), 2선

정, 3선정, 4선정 이런 선정은 모두가 다 각 천인(天人)의 선근 정도와 상응되는 것입니다. 가령, 초선천(初禪天)에 나기 위해서는 초선정을 닦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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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초선천에 있지 않더라도 마음 정도가 초선정에 들어갔다면 벌써 초선천에 있는 존재, 그런 천인들과 정도가 같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2선정(二禪定)에 들어가면 2선천에 있는천인들과 똑같은 능력과 선근이 되는 것입니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하고 욕계는 6욕천(六欲天)으로 되었는데 우선 지거천(地居天)과 공거천(空居天)으로 나눕니다. 지거천은 소위 각 원소의 단계인 지진(地塵) 곧, 지구나 토성이나 다른 별들이나 질료(質料)를 의지해 사는 중생들이 지거천입니다. 공거천은 업장이 좀 가벼워서 지거천을 떠나 있는 허공 가운데 사는 중생입니다. 이런 천인들은 몸뚱이가 우리 몸뚱이 같지가 않기 때문에 허공에서 마음대로 공간을 집으로 알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거천에는 사대왕천(四大王天) 즉 사왕천(四王天)과 도리천(宧利天) 수야마천(須夜摩天) 즉 야마천의 셋이 있고 다시 사왕천 밑에는 동쪽에 지국천(持國天), 남쪽에 증장천(增長天), 서쪽에 광목천(廣目天), 북쪽에 다문천(多聞天)으로구분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곳은 욕계의 4왕천 가운데 남쪽 증장천(增長天)에 딸린 남섬부주(南贍浮洲) 곧 염부제(閻浮提)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재가, 출가를 불문하고 사실은 벌써 그 업장이 상당한정도로 정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욕계에 있다 할지라도 얼마만치 욕심을 떠나 있는가? 번뇌를 떠나 있는가?에 따라서 그에 상응한 높은 경계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거천은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榮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셋인데 다 천상이니까 천상 나름대로 통력(通力)도 있습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같은 원래 법성에 갖추고 있는 통력은 못하더라도 그대로 그 업력에 따른 보통(報通)이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Maha-maay摩耶) 부인은 세연(世緣)을 마치고 도리천에 태어 났습니다. 역시 그 어머니가 청정하였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세존(世尊)을 낳았겠지요.흔히 세간에서 알기는 불교는 자기 부모도 모르고 윤리를 무시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님을 위해서 3개월 동안 도리천에 올라 가셔서 어머님과 도리천의 천상인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도 역시 아들을 낳고 7일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아들에 대해서 두고두고 안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도리천에 올라가서 세상은 허망하고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법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모자(母子)의 정이라는 게그렇게 두터운 것입니다. 우리가 출가할 때 '은애불능단(恩愛不能斷)이나' 은혜와 사랑을 끊기가 어렵지만 '기은입무위(奈恩入無爲)면' 은혜와 사랑을 버리고 상(相)을 여읜 무위법에 들어가면 '진실보은자(眞實報恩者)라' 진정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로다. 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는 어머니 마야 부인이 내려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비감(悲感)에 잠겨 관을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불현듯이 관문이 열리고 세존께서는 가부좌한 채로 어머니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시여! 제행착상이니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시생멸법(是生滅法)입니다. 세상 일은다 무상하여 만나면은 꼭 헤어지는 것이요, 낳는 것은 필시 죽기 마련이니 슬퍼하지 말으시고 이별과 생사를 초월한 부처님 법을 생각하소서"라고 하시니 어머니께서 그제야 슬픔을 진정하고 안위(妾慰)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도리천도 중생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훌륭한 곳입니다. 도리천에만 가도 음식을 먹고 싶으면 저절로 음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천상들은 분단식(分段食)을 먹는 것이 아니고 향기만 맡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야마천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이렇게 올라갈수록 받는 안락이나 능력이 더욱더 수승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화락천(化樂天)은 문자 그대로 가령, 괴로운 경계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시켜서 기쁘고 즐거운 경계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타화자재천은 욕계천의 가장 위층인데 마왕(魔王) 파순(波旬)은 여기에 삽니다. 따라서 마왕은 보통 밑에 있는 친상보다도 훨씬 더 능력을 잘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앉아 있으면 더러는 이상한 모양을 내어 나투기도 하고 또 꿈속에 현몽하여 우리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마왕은 하여튼 우리가 욕계를 벗어날세라 친구 모습으로 오기도 하고 이성의 모양으로 오기도 해서 가지가지로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그 다음, 초선천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를 닦아서 욕계번뇌를 떠나야 비로소 초선천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입정(入定)이라, 선정에 든다는 것은 욕계번뇌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욕계번뇌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식욕(食慾), 잠욕〔睡眼欲), 음욕(游欲)입니다. 욕계서도 식욕과 잠욕과 음욕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사, 음욕에 있어서도 사대왕천과 도리천까지는 남녀 이성의 결합이 있는 셈이지만 야마천에 올라가면 이성 결합이 없이 단순히 서로 포옹할 정도이고 그 다음 도솔천은 악수만 하는 정도고 화락천은 서로 피차 바라보고 미소만 띄우는 정도이며 그리고 마지막 타화자재천에 오르면 그 음욕이 눈으로만 눈웃음짓는 정도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참으로 미묘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그와 같이 욕심을 다 떠나면 초선정에 들어 천상으로는 초선천에 납니다. 중생들이 정진하여 공부가 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점검해서 욕심이 남아 있다면아직 욕계정(欲界定)이라, 욕계에서의 정신통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른바 명상법이나 닦아서 조금 더 맑아진 것이지 선정(禪定)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공부하는 분들은 자기 점검에 엄격해야 합니다.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이 초선천의 세 하늘입니다. 이것은 역시 점차로 번뇌가 희박해져 가는 정도에 따라서 층별(層別)의 차이가 있습니다.

2선천에 들어가서는 온전히, 그야말로 광명이 훤히 빛나서 광명뿐입니다. 본래가 광명인데 삼독(三毒) 오욕심(五欲心)에 가려 있다가 선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근차근 빛나는 것입니다. 처음 소광천(少光天)에서는 조금 덜 빛나고 그 다음에는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 훤히 한량없이 빛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광음천(光音天)에는 광명으로 해서 조금도 막힘이 없이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도 마음만 먹으면 광명으로 서로 상통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영통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집이 세고 강강(强剛)한 천인(天人)이 허물을 범할 때 옆에서 충고하여도 듣지 않는 천인들에게는 상대하지 않는 벌을 주는 범단지법(梵壇 brahma-danda)이라 하여 서로 말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묵빈대치(默擴對治)법이 있습니다.

좁게 보면 초선천만 범천(梵天)이고 넓게는 초선천 2선천 3선천 4선천을 모두 범천이라고 말합니다. 브라만(Brahman)이 범천에 소속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범천, 곧 4선천에 있는 중생들은 아직도 중생인지라 서로 그릇된 짓도 하는데 그 가운데 말을 안 들으면 그 벌칙이 상대를 안해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 들으시려 하자 아란존자가 '차익(車匿)비구와 같이 고집 센 강강(剛剛)한 비구는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하고 여쭈니까 '범단지법으로 대처하라' 하셨습니다. 충고를 하여 들으면 좋은데 안 들으면 우리 출가사문이 서로 싸울 수는 없는 것이고 말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묵빈대치(默壙對治)의 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3선천의 소정천(少淨天)은 청청하기는 하나 아직은 번뇌의 때가 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휠씬 더 맑아져서 한량없이 맑은 경계를 얻음은 무량정천(無量淨天)이고, 그 다음은 변정천(遍淨天)이라, 끝도 가도 없이 삼천대천 세계 구석구석까지 맑은 경계입니다. 부처님 나라는 한 삼천대천 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삼천대천 세계가 무량으로 있는 것입니

다.

4선천은 번뇌의 그림자가 없는 무운천(無雲天), 그리고 번뇌의 구름이 없기 때문에 복이 저절로 오는 복생천(福生天), 그리고 넓이가 삼천대천 세계와 같이 광대무변한 광과천(廣果天)입니다.

4선천을 의지해서 정범지(淨梵地)가 있는데 보통 4선천의 광과천까지는 일반 외도나 천중들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정범지는 청정한 곳이므로 성자만 가는 곳입니다.

정범지에 있는 무번천(無煩天)은 번뇌가 없는 천상경계요, 무열천(無熱天)은 번뇌가 없으니 항시 청량미를 맛보는 경계요, 선현천(善現天)은 모두가 다 좋게만 광명으로 보이는 경계로서 우리 중생들은 기분이 좀 나쁘면 다 나쁘게 보이고 밉게 보이겠지만 여기서는 벌써 애증(愛憎)을 떠난 경계라는 말입니다. 또는 선견천(善見天)은 모두가 좋게만 보이니 우리의 견해도 응당히 선량하게 되는 경계요, 색구경천(色究竟天)은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 즉 모든 광명의 본질로서 가장 청청한 광명을 음미하고 생활하는 하늘의 경계입니다.

그 다음 화음천(和音天)은 신묘한 음률(音律)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경계입니다. 우리가 금강경에 색(色)이나 소리로는 여래(如來)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색은 별것이 아니고 광명이 별것인가? 극락세계나 영원의 세계는 소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주란 것은 세간적인 때묻은 색이나 소리를 초월한 영원한 묘색(妙色)과 묘음(妙音)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정확한 수리로써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고 잘못 살면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앞서 언급한 광명은 태양 빛같이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 적광(寂光), 정광(淨光)입니다. 그런 적광은 영생으로 항시 상주부동한 것이고, 음향이나 하나의 리듬(rhythm)도 화명애아(和明哀雅)라고 하여 법화경이나 또는 화엄경을 보면 천상의 음률 표현을 하고 있는데 보통 우리가 느끼는 명곡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한결 청정하고 무상한 오욕(五慾) 경계를 떠나버린 청정하고 평온하며 신묘한 음악인 것입니다. 그런 묘음이 우주에는 항시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사, 광명진언(光明眞言)이나 또는 어떤 진언이나 모든 진언이란 우주에 있는 신묘한 리듬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로 풀이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주에는 그와 같이 신묘한 리듬이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명곡을 들으면 좋아하는 것도 가장 신묘한 리듬이 우리 불성 가운데 원래 존재하기 때문에 명곡을 들으면 그만치 우리 마음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무색계는 색을 떠나버린 하나의 심식(心識) 곧, 마음만 있는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공이 끝도 가도 없는 무량무변의 세계를 다 수용할 수 있는 경계이고 또 식(識)무변처는 일체가 유심조(唯心造)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찰해 보이는 경계입니다. 처음에는 텅텅 비어 보였지만 업장이 더 녹아지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 곧 의식인 생명이 충만해 있음을 깨닫는 경계요,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식(識)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엇이라 이름지을 수도 없는, 이름과 상(相)을 여읜 경계입니다. 또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번뇌가 거의 다 스러져서 번뇌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번뇌가 있는 것을 지각(知覺)하지 못할 정도로 청청한 경계이며 3계 가운데 최상의 천상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하시기 전 6년 고행 때도 육사외도(六師外道)한테 가서 여러 가지로 많이 배웠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도 3외도 한테 배웠다는 사실은 주목해하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공부와 관계가 있고 우리에게도 아주 훌륭한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고행외도(苦行外道)인 발가바(Bha.java) 선인한테 가서 가지가지의 심각한 고행을 했는데, 어떤 기록에서는 발가바외도한테 배운 고행은 별것이 아니라고 폄하하는 사람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그 당시 싯달타(Siddhartha 悉達多) 태자가 부처님같은 분을 만났으면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고행을 별로 않고서도 깨달음을 성취했겠지요. 그러나 고행으로서 미처 해탈을 못했다 할지라도 욕계 번뇌는 초월하여 범천(梵天)에 날 수 있는 능력은 얻었던 것입니다. 3아승지겁을 닦아온 부처님인지라 고행을 해도 느낌과 얻음이 다르겠지요.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고행을 하면 그것에만 집착해서 고행을 할려고 하지마는 선량하고 총명한 사람은 고행을 해도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부처님께서 물었을 때에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라고 함으로 '그러면 하늘에 나는 것은 영생(永生)을 하고 인생고를 다 벗어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되물으니까 '범천에 난다 하더라도 역시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복이 다하면 다시 타락한다고 대답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생로병사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요, 그런 하늘에 태어나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하고 발가바 선인을 버리고서 다시 스승을 찾아간 것이 아라라칼마입니다.

아라라칼마(Alarakalma)는 이른바 수정주의(修定主義)자로서 선정에 드는 공부를 하는 외도의 스승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 '대체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무색계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닦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소유처는 무색계의 셋째번 하늘이니 상당히 높은 경계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인도에는 벌써 선정에 깊이 들어간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을 가리켜 신선, 바라문선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벌써 욕심을 떠난 단계이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자기 스승과 같은 정도로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삼매(三昧)를 발득(發得)했습니다. 무소유처에 들어가 보니 재미가 있고 쾌락도 있으며 분별망상은 거의 가셨으나 아직은 삼계내(三界內)이기 때문에 해탈의 법락(法樂)은 못되어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정도 같으면 되겠다 싶어 멈추어 버리겠지요. 수승한 근기와 수승하지 않는 사람의 근기와의 차이는 이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수승한 근기는 보통 웬만한 것에 절대로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라라칼마한테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까 '무소유처정을 닦는 것은 모든 괴로움을 떠나 안락스럽고, 5신통(五神通)을 얻으며 사후에는 무소유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라' '그러면 생로병사를 해탈하고 영생을 합니까?' '영생은 하지 못하고 다만 오백대겁(五百大劫)까지는 살고 그 뒤에는 다시 떨어지게 된다'고 대답함으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영생 해탈이 목적이라'시며 떠나려 하자 자기 아들로서 자기보다 공부가 한 차원 높은 웃다카라마풋타(Uddaka Ramaputta)에게 찾아가라고 하여 그에게 갔습니다.

웃다카라마풋타에게 가서 '스승님은 대체로 어떤 공부를 하십니까?''나는 무소유처를 지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증득(證得)하는 공부를 한다 '고 하여 세존께서는 그곳에서 순식간에 비상비비상처정을 증득(證得)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비상비비상처를 닦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서 오랜 세월 동안 천상묘락을 누리기 위함이라 ' '그러면 그곳에서는 영생을 할 수 있습니까' '영생을 할 수는 없고 팔만대겁(八萬大劫)을 살다가 선정의 복이 다하면 떨어진다 ' 팔만대겁은 그야말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보다도 훨씬 더 많겠습니다마는 다시 또 떨어져서 잘못하면 지옥에도 간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생로병사를 해탈함인데 여기도 머물 데가 아니구나. 이제는 스스로 혼자 닦아 나가야겠구나'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세 선인(仙人)들은 그 당시 인도의 위대한 스승이지만 그들의 법은 삼계를 벗어나는 생사 해탈의 법은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신명을 걸고 좌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교(顯敎)에는 없으나 밀교(密敎)에 있는 법문인데 보리수하에서 싯달타 태자가 공부를 할 때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경각(警覺)을 시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밀교도 공부를 하다 보면 참고 할 대문이 많습니다. 그것은 뭣인고 하면,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 자성불(自性佛)의 기운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서로 화합되어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이 부처가 아니라면 제 아무리 두드리고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는 몰라도 사실은 자성불이 부처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것을 우리 중생들이 욕심과 진심과 치심으로써 억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 애써서 차근차근 거둔다면 자생적으로 본래 자성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자성불은 꼭 내 몸뚱이의 머리나 심장이나 어디에 갇혀 있는 것인가? 자성불(自性佛)은 바로 무장무애한 우주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침투가 안된 곳이 없습니다. 자성불은 자기 몸이 되고 우주 만유가 다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스승이 없다 하더라도 정말로 바르게만 닦는다면 꼭 자성불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계행 지키고 한사코 공부하려고 정진해 보십시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바른 스승이 생기고 공부할 처소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지 신명은 심심미묘한 것입니다. 한탄할 것은 자기 번뇌요,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시킬 아무런 것도 없습니다.

보리수하에서 싯달타가 그와 같이 '이체제다른 이에 의지하지 않고 내 스스로가 깨달아야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할 때,선정(禪定)도 벌써 삼계내의 가장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까지올라갔다고 할 때 정말로 신묘한 지혜가 발동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삼세제불이 감응(感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밀교 경전의 표현을 보면 삼세제불이 경각을 시켜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는 오상성신법(五相成身法)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 복잡한 것은 생략하기로 합시다.

2. 구해탈(俱解脫)

俱解脫

慧解脫…一切法이 本來淸淨하고 平等一味하여 一切功德을 具足함을 信解함.

定解脫…禪定解脫

그러면 우리가 삼계(三界)에서 어떻게 해탈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지상 명제가 되는 셈 아니겠습니까?

해탈(解脫)에는 지혜해탈(慧解脫)과 선정해탈(定解脫)이 있는데 두 가지 해탈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합하여 구해탈(俱解說)이라 합니다. 따라서 참다운 성자는 지혜에 걸림이 있는 즉, 견혹(見惑)을 타파하고 또는 우리가 선정에 들어서

사혹(思惑) 또는 수혹(修惑) 즉, 일체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번뇌를 여의는 정해탈(定解脫)을 성취하여야만 합니다.

사혹 즉, 수혹은 참선이든 기도이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어떻게 여읠래야 여읠 길이 없습니다. 지혜로서는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바로 번연히 깨달아서 '본래 내가 부처구나'하는 확신이 오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만사에 자재(自在)하는 해탈의 경계에 달하려고 할때는 꼭 선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선정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혹 즉, 수혹을 여의고 우리의 심리와 더불어 생리가 맑아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환골탈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혜해탈(慧解脫)은 일체제법이 본래 청정하고 평등일미하여 일체 공덕을 구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탈이 못되면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을 닦지 못해서 습기가 녹지않으면 참다운 선정해탈(禪定解脫)이 못됩니다.

그래서 정해탈이 되려면 꼭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하는 출가사문들은 한사코 혜해탈의 근거 위에서 선정해탈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옮길 정도지 자기 스스로 우러나와서 부처님의 무량 법문과 자재신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2절 해탈(解脫)의 과정(過程)

그 다음에는 4가행, 4선정, 멸진정 등 앞에서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해탈에 있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물론 누차 말씀했듯이 근기에 따라 점차로 가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뛰어넘기도 합니다.

解說의 過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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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행(四加行)은 4선근(四善根)으로서 우리가 미처 견도(見道)를 못할 때는 아직 범부지이니까 수행을 애쓰고 한다고 해서 가행(加行)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름 결제(結制)하고 겨울 결제하고 또는 백일 동안 기도하는 것은 모두 다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없이 해야 가행이라고 합니다. 그런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했다 말았다 하는 것은 가행이 못됩니다. 참선 좀 했다고 나와서는 함부로 하고 그만 두어 버리면 바로 후퇴가 됩니다. 우리는 지속적인 가행정진을 해야 난법(煖法)에서 정법(頂法)으로 인법 (忍法)으로 공부가 깊어집니다.

마땅히 공부 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상(安詳)이라, 부처님이나 수도인의 거동을 안상으로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 탁발하고 오셔서 안상히 앉고 또는 선정에 드셨다가 안상히 일어서고 한다는 말씀이 경에 나옵니다. 안상이란 편안하고 조용하고 조금도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고 자상하게 하는 자세가 안상입니다. 이렇게 정진해야 명득정(明得定)을 빨리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애쓰고 공부해도 난법상에 미처 못 들어가는 분도 있는데 그것은 수행법이 근기에 맞지 않아 무리가 되어서 못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과거 업장이 무거운 소치이기도 함으로 법당에 가서 몇 천배 절을 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의상(義湘 625∼702) 대사는 중국에 들어가서 화엄종 삼대(三代) 현수(賢首 643∼712) 대사와 같이 동참 수학하고 또 화엄경을 통달하여 법성게(法性偈)를 지은 분이니까 굉장히 위대한분 아닙니까? 그렇게 했어도 결국은 선정 해탈은 미처 못했던가 보지요. 그래서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에서 관음 기도를 모시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라는 아(我)의 근본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자기라는 아(我)가 끊어지는데, 의상 대사도 자기를 점검해 보니 아상(我相)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덩어리인 몸뚱이 차라리 몸을 바꾸어야겠구나' 하고 홍련암 바위에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몸뚱이를 버리는 그 찰나 활연히 깨닫고 관세음 보살이 몸을 안아 안전하였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요, 부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무치면 반드시 부사의한 도움이 있습니다. 기도든 공부든 모든 정당한 소원은 꼭 성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4선근(四善根)의 행으로서 우선 닦아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비약적으로 가기가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난법상(煖法相) 닦아서 명득정(明得定)이라, 가슴도 머리도 온몸이 시원해 온다 하더라도, 나와서 번잡스러운 일들로 흔들어 버리면 결국은 어디에 간 곳이 없이 공부가 퇴타

(退墮)하게 됩니다.

정법상(頂法相) 곧 명증정(明增定)이라, 이는 밝음이 더 증장(增長)한 경계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앞이 컴컴하다가 난법상에서부터는 온몸이 맑아와서 정법상이 되면 뿌여니 달같은 것이 비쳐오는 것입니다. 이 경계를 욕계정천(欲界頂天)이라 하는데 벌써, 정법은 욕계의 꼭대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다시 파계무참(破戒無璃)한 짓을 한다거나 그렁저렁 방만하게 지내면 다시 후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닦아 나가야 비로소 인법(忍法) 경계가 옵니다.

인법(忍法)은 무엇인가 하면, 내 몸뚱이나 물질이나 또는 명예나 지위나 모두 다 허망하여 실다웁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깊이 박혀졌다는 말입니다. 인법상(忍法相)이 되면 함부로 행동을 못합니다. 물론 완전무결하게 계율을 다 지킬 수는 없겠지만 벌써 맑고 선량한 기운이 몸과 마음에 깊이 배어져 눈이 샛별같이 빛나오므로 망상이나 혼침이 어디에 붙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도 그만 두면 후퇴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 쉬고 지속적으로 나아간다면 이른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범부 세간에서는 여기가 제일 높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번뇌 때문에 시달리지 않고 분별시비가 안 나오니까 분별시비를 몰아내기 위해서 작위(作爲)로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번뇌가 사이에 끼일 수가 없어서 견도(見道) 곧 견성(見性)하는 그 자리와 간격이 없으므로 무간정(無間定)입니다. 이 자리에 머물게 되면 필연적으로 견도에 나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라, 맑은거울이나 고요한 물 같으니 모두를 보면 다 그립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간정에서 '내 마음을 반조(反照)해 보니 무간정이 되었구나, 공부가 이 정도 같으면 거의 다 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흔들어 버리면 결국은 또 견도에는못 들어갑니다.

따라서 이런 차서를 잘 모르면은 정진 중에 재미가 좋고 또는 무슨 빛이나 별난 경계가 나타나게 되면 공부가 다 되었다고 자만심을 느낍니다. 대체로 빨리 깨달아야겠다고 하는 성급한 분들은 이런 위험성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무간정에서는 가장 근원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완전히는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상사각(相似覺)이라 하여 거의 비슷하게 깨달은 단계입니다.

무간정에서 초선정에 들어갈 때는 벌써 욕계를 초월하니까 오염된 몸뚱이가 청정한 몸뚱이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소조사대(所造四大)가 능조사대(能造四大)로 바꿔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 몸뚱이는 오염된 지·수·화·풍인 소조(所造)사대입니다. 그러나 선정을 발득(發得)해서 초선정에 들어갈 때는 오염된 사대가 청정한 능조(能造)사대로 바뀌어지기 때문에, 바뀌어지는 가운데 2, 4는 8이라 8촉이 나옵니다.

8촉(八觸)은 무엇인고 하면, 그때에 경험되는 동(動)·양(痒)·경(輕)·중(重)·냉(冷)·난(煖)·삽(澁)·활(滑) 등의 여덟 가지 경계입니다.

처음에 몸이 떨리는 동(動)이라, 몸이 가려운 양(痒)이라,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경(輕)이라, 몸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중(重)이라, 몸이 써늘하게 느껴지는 냉(冷)이라, 몸이 뜨겁게 느껴지는 난(煖)이라, 몸이 상어 가죽같이 깔깔하게 느껴지는 삽(澁)이라, 몸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활(滑)이라, 이런 증상들이 그때그때 교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뿐만 아니라 선정의 공덕으로 열 가지가 생깁니다. 십공덕(十功德)이란, 공(空)·명(明)·정(定)·지(智)·선심(善心)·유연(柔軟)·회(喜)·락(樂)·해탈(解脫)·경계상응(境界相應)입니다. 처음에 공(空)이라, 몸이 가벼워서 자기 몸뚱이에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항시 공중에 뜬 기분이고 그 다음에는 명(明)이라, 마음이 밝아져서 경전에 대한 문제나 모든 의단(疑團)이 훤히 풀리게 되고 다음 정(定)이라, 마음이 고요하여 선정에 들어가며 또는 지(智)라, 성(性)과 상(相)과 체(體)와 용(用)에 대하여 걸림없는 지혜가 발동하고 선심(善心)이라, 마음이 그지없이 선량해지고 유연(柔軟)이라, 심신(心身)이 유순하여 모든 인연에 수순(隨順)하며 회(喜)라, 의식(意識)에 깨달음의 기쁨을 느끼고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5식(識)에 무분별의 즐거움을 느끼며 해탈(解脫)이라, 만사에 걸림이 없는 해탈을 느끼며 경계상응(境界相應)이라, 모든 경계에 막힘이 없이 수긍하게 되는 것 등이 이른바 초선정에 들어갈 때 증험하는 십공덕(十功德)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몸이 뜨겁던 차던 간에 텅텅 비어서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음이 훤히 밝아 별로 모르는 것이 없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보면 척척 풀리고, 이런 마음이 항시 기본적으로 따라야 초선에 들어가는 증상이 되겠지요. 그리고 2선부터는 이미 오염된 사대(四大)가 청정한 사대로 바뀌어져 버려서 뜨겁고 덥고 그런 증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욕계를 초월해서 초선정에 들어간다면 몸도 마음도 가볍고 부담이 없고 그지없는 행복감에 충만하게되니 회락지(喜樂地)라, 진정한 법락(法樂)을 느끼는 경계입니다. 이러한 법락을 느끼게 되면 세속적인 오욕락(五欲樂:재물·이성·음식·명예·수면)에 대한 마음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2선정에 들어가면 마음이 한결 청정해집니다. 왜그런고하면 회락지에서는 아직 욕계 번뇌의 뿌리는 여의지 못했으나 2선정에서는 욕계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렸기에 마음이 훨씬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초선정에서는 기쁨이 있다가 즐거움이 있다가 또는 더했다 덜했다가 하지만 그 다음은 그냥 잠잠하니 희락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법성(法性)에는 기쁨이나 즐거움의 희락도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선정이 더 깊어지면 마음은 더 총명해지고 더 맑아지면서 희락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선정 경계인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 기쁨을 떠나고 묘락을 경험하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4선정에서는 희락을 다 떠나서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모든 분별심을 여의고 청정한 마음만 지속되는 경계입니다.

그 다음에 멸진정(滅盡定)은 4선정을 다 통과해서 일체 번뇌의 습기(習氣) 곧 번뇌의 종자를 다 완전히 없애는 삼매(三昧)입니다. 바라문이나 또는 힌두교나 일반 외도도 4선정까지는 닦아 증득할 수 있으나, 외도는 원래 해탈을 구하는 근기가 못되고 천상에 올라가서 신묘한 안락을 맛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멸진정에까지는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해탈을 구하는 분들은 안락(安樂)이나 유위(有爲) 공덕은 문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기가 약하고 수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초선에 올라가서 희락만 느껴도 공부가 다 되었구나 하고 또는 2선에 올라가서 희락에 잠기게 되면 거기에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불경에 보면 3선정에 들어갈 때 기쁨의 정도가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초선의 희락이나 2선의 희락이나 아직은 거치른 희락이며 약간의 변동이 있으나 3선과 같이 동요를 떠난 묘락(妙樂)은 아주 신묘하기 때문에 불경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을 표현할 때는 3선정의 묘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멸진정은 기쁨이라든가 또는 즐거움, 모두를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며칠이고 몇 년이고 이 몸뚱이 죽어도 좋다 하고 정진을 해야 멸진정에 들어갑니다. 4선정은 정도(定道)와 외도(外道)가 다 같이 닦으나 멸진정은 정도에 한해 있습니다. 또 정도라 하더라도 비약적으로 멸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늦게 되었든 빨리 되었든, 중간 차서를 뛰어넘든 뛰어넘지 못하든 간에 4선정을 닦아야 갑니다. 업장이 가벼우면 더 빨리 갈 것이고 업장이 무거우면 더디 가는 차이 뿐입니다. 마땅히 신명(身命)을 걸지 않으면 안됩니다. 해탈 공부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공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일번에 대활현전(大死一番大活現前)이 아니겠습니까?

제3절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

오늘 마무리하려고 생각하니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심오(深奧)하고 범위가 넓어서 말씀하고자 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고 또는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이라,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줄이면 몇 말씀으로 줄일 수가 있는 것이고 퍼뜨리면 끝없이 확장하여 부연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마무리를 해보겠습니다.

수행의 위차(位次)인 해탈 십육지(解脫十六地)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어떤 과정을 밟아서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위차이기 때문에 실수(實修)하는 수행자로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위차를 모름으로서는 암중모색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아만심이 있는 사람들은 증상만(增上慢)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위차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옛부터 번쇄하게 논의가 많이 되어 왔습니다.

밀교(密敎)에서는 십지(十地)를 말하고 유가(瑜伽)는 십칠지(十七地)를 말하며 또는 성문승(聲聞乘)도 나름대로 십지(十地)를 말하고, 연각승(緣覺乘)도 역시 십지(十地)를 말하고 또는 보살승도 역시 화엄경에서 십지(十地)를 말하고 또한 그와 동시에 오십오위(五十五位), 오십일위(五十一位), 오십육위(五十六位)…… 등등의 여러 가진 수행론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서로 연관이 될 것인가?

달마(達磨) 대사께서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傅)을 말씀한 것도 무엇인고 하면, 복잡한 문제들을 따지다 보면 소중한 마음도 못 닦고 말아 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큰스님들이 '분별시비하지 말라, 경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지극히 노파심절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위차 문제만 해결하려고 해도 오랜 시일과 정력이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타 스님께 대해서 감사를 느끼는 것이 이런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또는 오십오위나 오십육위나 그런 여러가지 위차에 관해서 대비(對比)시켜 가지고 회통(會通)하여 하나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석존(釋尊) 이후에 그렇게 하신 분이 현대에까지 아직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저도 사실 젊어서는 상당히 교만한 편이었습니다마는 이런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다면 엉뚱하게도 '공부가 다 되었다'고 아만심에 젖어서 무거운 죄를 범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승려가 된 뒤 법화경(法華經)을 보고서 '내 공부가 이제 다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교학 공부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불교라는 것이 상대와 절대와 성상체용(性相體用)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본래 둘이 아닌 법을 알고 우주법계 그대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도리를 알았으면 앞으로 인연 따라 증오(證悟)를 위하여 닦아나가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수도의 위차(位次) 법문을 보고서 '우리 범부가 공부해 간다는 것이 지극히 멀고도 먼 길을 가야 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는 금타 스님께서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또는 오십오위라든가 여러 가지 밀교의 계위를 합해서 비교해 가면서 보살 10지를 근간으로 하여 회통을 시킨 수행 체계입니다. 물론 이 작업이 완전무결한 것인지 아닌지는 제가 그 경계가 못되기는 하나,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확실한 전거(典據)를 인용(引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수행자나 선지식들이 연구하고 검토할 소중한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삼보에 귀의하는 초삼귀지(三歸地)라, 그 다음 신심과 원력을 확립하는 신원지(信願地) , 다음은 선택한 수행법을 닦아서 익히는 습인지(習忍地), 거기에 따라서 자기의 수행을 보다 더 맹렬히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경지가 가행지(加行地)입니다. 이 4가행지까지는 범부지(凡夫地)입니다.

다음 5의 금강지(金剛地)는 금강불성(金剛佛性) 곧, 자성불성(自性佛性)을 직관적으로 견증(見證)할 때 이른바 증오(證悟)할 때요, 6은 희락지(喜樂地)라, 금강지를 성취해서 법락(法樂), 선정락(禪定樂)이 더욱 증장(增長)되어서 무한불멸의 희락을 느낄 때이고, 7에 리구지(離坵地)라, 금강지를 성취해서 욕계 번뇌를 대부분은 털어 버렸지만 아직도 제거되지 못한 욕계 번뇌의 습기를 완전히 제거할 경계입니다. 8에는 발광지(發光地)라, 진여 곧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의 광명이 현발(現發)할 때이고, 9에 정진지(精進地)라, 그래도 습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정진을 더욱 가속화하고, 10은 선정지(禪定地)라, 이른바 아(我)를 멸진(滅盡)하는 멸진정(滅盡定)이라,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의 4온(蘊)을 멸진해 버려야 누진통(漏盡通)을 하는데 그런 선정을 여기서 닦는 경지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닦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것은 못되었고 깊은 선정으로써 습기(習氣)를 떼어버리니 11에 현전지(現前地)로서 일진법계(一眞法界)의 현상이 앞에 나타나는 경계입니다.

12는 나한지(羅漢地)라,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13에 지불지(支佛地)라, 독각승(獨覺乘) 즉 연각승(緣覺乘)의 자리로 모든 인연 관계를 모두 통달해 버리는 자리입니다. 그 다음 14에 보살지(菩薩地)라, 자기도 깨달을 뿐 아니라 무량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는 경지요, 그리고 부동지(不動地)라, 번뇌의 습기가 없기 때문에 조금도 후퇴가 없고,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으로서 조작이 없이 자연적으로 모든 공덕을 할 수 있는 경계를 성취하였고, 15에 유여지(有餘地)라, 그래도 아직은 불지(佛地)와 같이 완전하지 못하나, 16에 무여지(無餘地)라, 부족함이 조금도 남지 않은 완전무결한 경지라, 따라서 우리 범부가 초삼귀지에서 삼보(三寶)에 들어가고, 차근차근 공부해서 무여지에서 정각묘각(正覺妙覺)을 성취하는 자리 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점차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분도 있고, 또는 비약적으로 뛰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분도 있고, 또는 중간에 2·3지를 뛰어 넘어서 가는 분도 있고, 근기 따라서 구구합니다. 근기가 수승한 분들은 과거 숙세 선근도 많이 있고 용맹정진할 정력도 수승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뛰어 넘을 수가 있으나, 그렇지 못한 분들은 올라 갔다가 내려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지를 성취하면 성자의 경계이기 때문에 범부로 내려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에 대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후퇴가 없는 완전한 부동지를 성취함은 14보살지입니다.

다음에 금타 스님의 해탈십육지 원문을 보겠습니다.

解脫十六地

初. 三歸地

一切의 佛陀는 佛寶, 佛陀께옵서 說하신 敎法은 法, 其 敎法에 依하야 修業하는 者는 僧寶라 云하니라 佛이란 覺知의 義요 法이란 法軌의 義요 僧이란 和合의 義며 寶란 其性의 明淨함과 勢力의 偉大함이 最上 無比하야 能히 世間을 莊嚴하되 永久不變하야 世界에 希有한 故라

三寶에 六種 義가 有하야

一에 同體三寶를 一體三寶 又는 同枏三寶라고도 云하니 三寶一一의 體에 三寶의 義가 有하야 佛의 體上에 覺照의 義가 有함은 佛寶, 軌則의 義가 有함은 法寶, 違諍의 過가 無함은 僧寶며 乃至 僧에 觀智가 有함은 佛寶, 軌則이 有함은 法寶, 和合함은 僧寶일새요

二에 別相三寶를 化相三寶 又는 別體三寶라고도 云하니 諸佛의 三身을 佛寶, 六度를 法寶, 十聖을 僧寶라 云함은 大乘三寶며 丈六의 化身을 佛寶, 四諦·十二因緣의 法을 法寶, 四果·緣覺을 僧寶라 云함은 小乘三寶요

三에 一乘三寶란 究竟의 法身을 佛寶, 一乘의 法을 法寶, 一乘의 菩薩衆을 僧寶라 云하니 「勝忦經」「法華經」 等의 義요 四에 三乘三寶란 三乘者를 爲하사 現하신 佛의 三身을 佛寶, 三乘의 法을 法寶, 三乘의 衆을 僧寶라 云함도 亦是 「勝忦經」과「攝論」等의 義요

五에 眞實三寶란 佛의 三身을 佛寶, 一切 無漏의 敎理行果를 法寶, 見諦 以上의 三乘聖衆을 僧寶라 云함이오

六에 住持三寶란 佛滅後 世間에 住하는 三寶로서 木佛·畵像 等을 佛寶, 三藏의 文句를 法寶, 剃髮染衣를 僧寶라 云함이니 一·三·五의 三種은 大乘에 局限하고 二·四·六의 三種은 大小乘에 通하니라

비록 三歸戒를 初受할지라도 解脫을 目的 할진댄 반다시 大乘三寶에 歸依할진져

戒란 入道方便이라 不可缺이니 戒相으론 律儀를 攝하고 戒德으론 大道에 通할새 五戒는 戒經의 首位로서 爲先 第一 不殺生戒에 있어 無生의 理를 證하면 大乘이오 不然하면 小乘이니라

일체의 불타(佛陀)는 불보(佛寶)요, 협소한 사람들은 부처님도 꼭 석가모니 부처님만 믿는다거나 또는 같은 정토신앙을 하더라도 꼭 아미타불만 숭상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 협소합니다. 역사적으로 필요하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경계가 어느 한 부처님이 있고, 두 가지 부처님이 있다면 참다운 불교가 못됩니다. 그야말로 무장무애(無障無碍)라, 조금도 거리낌이나 한계가 없는 것이고 천지 우주가 바로 불타이기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法界)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에 대해서 이부처 저부처로 따로 생각하면 대승적인 생각이 못되는 것입니다. 불타께서 설하신 교법은 법보(法寶), 그 교법에 의하여 수업하는 자는 승보(僧寶)라 말합니다.

불(佛)이란 각지(覺知)의 뜻 즉, 깨닫는다는 뜻이요, 법(法)'이란 법궤(法軌) 곧 우주의 규범이란 뜻이요, 승(僧)이란 화합의 뜻이며, 보(寶)란 기성(其性)이 밝고 청정함과 동시에 그 세력의 위대함이 최상무비(最上無比)하여 능히 세간을 장엄하되 영구불변하여 세계에 희유(希有)한 때문이라.

삼보에 6종의 뜻이 있어서 1에 동체삼보(同體三寶)를 일체삼보 또는 동상(同相)삼보라고도 말하니 삼보 일일의 체에 삼보의 뜻이 있어 불(佛)의 체상(體上)에 각조(覺照) 곧 깨닫고 비춘다는 뜻이 있음은 불보(佛寶)요, 궤칙(軌則)의 뜻이 있음은 법보(法寶), 또는 다투는 허물이 없음은 승보(僧寶)며, 내지 승(僧)에 관찰하는 지혜가 있으면 불보요, 규범이 있음은 법보, 화합함은 승보입니다.

2에 별상삼보(別相三寶)를 화상(化相)삼보 또는 별체(別體)삼보라고도 말하니 제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육도(六度)를 법보, 십성(十聖)을 승보라 말함은 대승삼보며 장육(丈六)의 화신을 불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의 법을 법보, 사과(四果) 연각(緣覺)을 승보라 말함은 소승삼보요.

3에 일승삼보(一乘三寶)란 구경(究竟)의 법신을 불보 일승의 법을 법보, 일승의 보살중을 승보라 말하니 이는 승만경,법화경 등의 뜻이요,

4에 삼승삼보(三乘三寶)란 삼승자를 위하여 현(現)하신 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삼승(三乘)의 법을 법보, 삼승의 중을 승보라 말함도 역시 승만경, 섭론 등의 뜻이요,

5에 진실삼보(眞實三寶)란 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일체 무루(無漏)의 교리행과(敎理行果)를 법보, 견체(見諦) 이상의 삼승성중(三乘聖衆)을 승보라 말함이요,

6에 주지삼보(住持三寶)란 불멸후(佛滅後) 세간에 주(住)하는 삼보로서 목불·화상 등을 불보 삼장(三藏)의 문구를 법보, 체발염의(剃髮染衣)를 승보라 말함이니 1, 3, 5의 삼종은 대승에 국한하고 2, 4, 6의 삼종은 대소승에 통(通)하니라.

비록 삼귀계를 초수(初受)할지라도 해탈을 목적할진댄 반드시 대승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

계(戒)란 입도방편(入道方便)이라 불가결이니, 우리가 방편이라 하면 안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세간적인 방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경론(一切經論)은 따지고 보면 다 방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방편은 꼭 지켜야 합니다. 방편에 의지해서 통하고 방편에 의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계상(戒相)으로는 율의(律儀)를 섭(攝)하고 계덕(戒德)으로는 대도(大道)에 통할새 5계(五戒)는 계경(戒經)의 수위로서 위선 제일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있어 무생(無生)의 리(理)를 증하면 대승이요, 그렇지 않으면 소승이니라, 진여불성 자리에 입각해서 계를 지키면 대승인 것이고, 불쌍하니까 안 죽인다는 정도는 계를 지켜도 소승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보(三寶)를 풀이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불경에 있는 것이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승만경이나 법화경이나 경론을 보면 되겠습니다마는 아무튼 이와 같이 육종삼보(六種三寶) 곧 여섯 종류로 삼보를 말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소승삼보는 일차 참고로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결국은 대승삼보를 의지해야만이 대승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삼보의 요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이고, 법보는 천지우주의 도리라, 따라서 어떤 것도 불보 가운데 안 들어가 있는 것이 없고, 어떤 도리도 법보 가운데 안들어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승보는 바로 현상계 모두가 승보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부처님 도리 곧 우주의 법칙대로 바로 믿을 때입니다. 바로 못 믿으면 필요 없는 갈등과 정력의 소모를 많이 합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공산주의나 따지고 보면 법보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네들은 법보를 제대로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서 집착하는 것이지 그것이 법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진실된 법보로 인도하면 되는 것이지 적으로 몰아세워서 싸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二. 信 願 地

證前엔 迷信이오 證後엔 正信이니 願도 迷信에 根據하면 俗人의 願이오 正信에 立脚하면 道人의 願이며 비록 正信의 發願이라도 小法 에 止하면 小乘이오 다시 大願을 發하야 動搖가 無하면 大乘이니 信과 願에 있어 其 宜를 得하야 거듭 成就할지니라

聲聞十地에 있어 初受三歸地가 곧 初 三歸地며 二 信地와 三 信法地가 곧 信願地와 等하나 信法에 있어 生滅四諦나 無生四諦에 局하지 않고 無量四諦 又는 無作四諦를 信하야 藏·通·別·圓의 四敎義를 會通하야 벌써 此地에서 會三歸一의 理를 達하고 究竟 成就를 目的하야 먼저 信心과 願力을 成流하니라 ,

2에 신원지(信願地)라, 신심과 원력을 세우는 경지입니다.

증전(證前)에는 미신(迷信)이요, 증후(證後)에는 정신 (正信)이니, 사실 견성오도를 못할 때는 항시 회의가 남습니다. 자기 스스로 불성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안다고 해도 마음속에는 의심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원(願)도 미신에 근거하면 속인의 원이오, 정신에 입각하면 도인의 원이며, 비록 정신(正信)의 발원이라도 소법(小法)에 그치면 소승이요, 다시 대원을 발하여 동요가 없으면 대승이니, 신과 원에 있어 그 참뜻을 터득하여 거듭 성취해야 합니다.

성문 10지에 있어 초수삼귀지(初受三歸地)가 곧 초 삼귀지며, 2. 신지(信地)와 3. 신법지(信法地)가 곧 신원지(信願地)와 등(等)하나, 이것은 각 계위를 회통하여 대비한 것입니다. 신법(信法)에 있어서 생멸사제(生滅四諦)나 무생사제(無生四諦)에 국집하지 않고 무량사제(無量四諦) 또는 무작사제(無作四諦)를 신(信)하여 장·통·별·원(藏通別圓)의 사교의(四敎義)를 회통(會通)하여 이 자리에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리(理)를 달하고, 구경성취를 목적하여 먼저 신심과 원력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三. 習 忍 地

伏忍·信忍·順忍·無生忍·寂滅忍 等 五忍 中 前 四忍에 各有上·中·下 三品하고 後 一忍에 有 上·下 二品하니 特히 伏忍에 있어 上을 道種忍, 中을 性忍, 下를 習忍이라 稱하는 바 聲聞乘의 四內凡夫地(五停心觀을 修하는 位) 五 學信戒地(三學 成就의 位)에 屬하고 緣覺乘의 一苦行具足地(戒行을 修하는 位) 二 自覺甚深十二因緣地(十二因緣의 觀法을 修하는 位) 三 覺了四聖諦地(四諦觀을 修하는 位) 等에 屬하나 三 習忍地란 小乘의 修法에 局하지 않고 無量法門으로써 隨機應量하야 修習安忍을 成就함이니라

제3은 습인지(習忍地)라,

복인(伏忍), 신인(信忍), 순인(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 등 5인(忍) 중 전 4인에 각각 상, 중, 하 삼품(三品)이 있고 후 일인(一忍)에 있어 상, 하 이품(二品)이 있으니 특히 복인(伏忍)에 있어, 복인은 번뇌를 다 끊은 것이 아니라 번뇌를 눌러 억제하는 경지입니다. 따라서 범부지에서는 강인하게 번뇌를 억제해야 합니다. 요사이 개방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보는대로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만 그래버리면 수행도 못하고 불교가 안되어 버립니다. 마땅히 부당한 것은 버리고 눌러야 합니다.

복인에 있어 상(上)을 도종인(道種忍), 중(中)을 성인(性忍), 하(下)를 습인(習忍)이라 칭하는 바, 복인을 이렇게 셋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상품은 도종인으로서 이미 도(道)의 종자가 심어져서 범하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으려해도 먹을 수 없습니다. 중품은 성인(性忍)이라, 성품에 종자가 깊어가는 것이고 하품은 습인(習忍)이라, 습인은 강한 의지로 공부를 익혀가는 것입니다.

성문승의 4. 내범부지(內凡夫地) 곧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닦는 자리나, 5. 학신계지(學信戒地) 곧 삼학(三學) 성취의 자리에 속하고, 연각승의 1. 고행구족지(苦行具足地) 곧 계행을 닦는 자리 2. 자각심심십이인연지(自覺甚深十二因緣地) 곧 십이인연의 관법을 닦는 자리 3. 각료사성제지(覺了四聖諦地) 곧 사제관을 닦는 자리 등에 속하나, 습인지란 소승의 수법(修法)에 국집하지 않고 무량법문으로써 근기에 따라서 잘 익혀 편안하게 감내하는 경즉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보통 초심 수행자는 습인지에 있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근본불교도 공부하고 율장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승이 말했다고 해서 꼭 한 가지만 생각하고 말아버리면 그만치 국량이 좁아져서 법집(法執)하기 쉽습니다. 불교란 천치 우주를 통섭(通攝)한'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확 열어서 좋은 것은 모조리 받아들여 조도(助道)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이조(李朝) 때는 불교가 중국과 교류되지 못하고 고려말(高麗末) 불교 그대로 산중에서 국집하게 되였습니다. 또한 8·15 해방 뒤에도 제대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四. 加 行 地

어느 修法이든지 得正하면 可하니 習忍을 成就한 後 依法 結制하고(冬安居가 絶好함) 親驗者의 外護指導下에서 一心不亂하야 三密을 守하며 勇猛精進으로써 間斷없이 加行하면 반다시 煖位에서 明得定, 頂位에서 明增定, 忍位에서 印順定, 世第一法位에서 無間定을 次第 成就하나니 이를 五相成身位에 配하면 明得定은 通達心의 前相이오 明增定은 곧 第一通達菩提心位며 印順定은 第二修菩提心位며 無間定은 第三 成金剛心位니 곧 四禪을 通貫한 一心支로서 그 極點이 滅盡定일새 無間道의 直後가 解脫道니라

그리고 明得定과 明增定에서 性忍을 成就하나니 이가 共十地의 第二 性地요 印順定에서 道鐘忍을 成就하나니 이가 共十地의 第三 八忍地인 同時에 聲聞乘의 第六 八忍地(聲聞見道의 位며) 性忍과 道種忍이 아울러 緣覺乘의 第四 甚深利智地(甚深의 無相智를 生하는 位)와 第五 八聖道地(八聖道를 修하는 位)와 第六 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이의 三界를 覺了하는 位) 等에 該當하니라

4에 가행지(加行地)라, 어느 수법(修法)이든지 득정(得正)하면 곧 본체를 여의지 않고 정당성을 얻으면 되는 것이며, 습인을 성취한 후 법대로 결제(結制)하고, 동안거(冬安居)가 절호(絶好)합니다. 인도 지방은 우기(雨期)가 있으므로 하안거(夏安居)이지만 동북아시아 지방은 겨울이 되어야 훨씬 긴장도 되고 잡연(雜緣)도 적게 됩니다.

경험자의 외호(外護) 지도 하에서 정진하는데, 역시 스승이 있어야겠지요. 마장 때문에 공부가 막히거나 무슨 경계가 나와서 산란할 때는 적절한 지도를 못 받으면 안됩니다.

일심불란(一心不亂)하여 삼밀(三密)을 지키며,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본질적으로 삼밀이라 합니다. 용맹정진으로써 간단없이, 꼭 수행은 간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습인도 성취가 되고 업장의 습기가 녹아지는 것이지 하다말다 하면조금 나갔다가도 다시 후퇴해버립니다. 한철 공부하고 나서 해제철에 그렁저렁 방만해 버리면 공부 기운이 간 곳이 없게 됩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하면 반드시 난위(煖位)에서 명득정(明得定) 곧 마음이 밝아오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정위(頂位)에서 명증정(明增定)으로 밝음의 정도가 증가되고 또 안 쉬고 닦아나가면 참으로 '모두가 비었구나 이 몸뚱이도 별것이 아니구나' 나도 공(空)하고 만법이 무상함을 사무치게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느끼면 함부로 망동할 수가 없겠지요 이 자리가 인순정(印順定)입니다.

인위(忍位)에서 인순정(印順定), 다시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에서 무간정(無間定)인데 이 자리는 세간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입니다. 번뇌가 낄 간격이 없고 오직 청정한 정념만 지속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차례로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오상성신위(五相成身位) 곧 단계로 공부해가는 밀교의 법상인 오상성신위에 배치한다면 명득정은 통달심(通達心)의 전상(前相)이요, 명증정(明增定)은 곧 제1 통달보리심위(通達菩提心位)라, 명증정을 얻으면 마음이 밝아져서 무슨 경전이든 문자 해석만 되면 그 뜻이 술술 풀이가 되므로 통달보리심위라 합니다. 따라서 강원 교육을 받고도 참선을 못하면 제대로 소화를 못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되려는 분은 더욱 꼭 참선과 같이 병행해야, 견성오도는 미처 못한다 하더라도 통달보리심이 되어 경전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순정(印順定)은 제2 수보리심위(修菩提心位), 곧 통달보리심을 더욱 닦아 익혀지는 자리입니다.

무간정(無間定)은 제3성금강심위(成金剛心位)니, 아직 금강심을 확실히는 못 증(證)한다 하더라도 금강심을 어렴풋이 증(證)하니 곧 4선(四禪)을 통관한 일심지(一心支)로서, 일심지는 4선정을 통관합니다. 일심지(一心支)란 동요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초선 들어가나 2선, 3선, 4선 들어가나 일심지는 그대로 지속이 되는 것입니다. 일심지가 안되면 선정이 못되는 것입니다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흐트러뜨리지 않는 경계입니다. 지금 세간에서 주체의식(主體意識)이라는 말을 하지마는 사실은 일심지(一心支)가 되어야 참다운 주체의식이 됩니다. 그전에는 항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마음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극점이 멸진정(滅盡定)이며 무간도(無間道)의 직후가 해탈(解說)입니다. 따라서 금강지(金剛地)부터는 모두가 해탈도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명득정과 명증정에서 성인(性忍)을 성취하는데 이자리가 공십지(共十地)의, 공십지는 성문·연각·보살 등의 계위(階位)를 다 합하여 이루어진 계위를 말합니다. 제2 성지(性地)요 인순정에서 도종인을 성취하닌 이가 공십지의 제3 팔인지(八忍地)인 동시에 성문승의 제6 팔인지 곧 성문 견도(見道)의 자리인데, 성문 견도(見道)는 대승의 참 견도(견성)가 아니며 수자(修者)가 인순정(印順定)에 들어가면 마음이 밝아서 기분이 쇄락하고 지견(知見)이 발하여 일체법을 헤아려 알 듯한 경계이므로 아만심을 내어 참 견성했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인(性忍)과 도종인이 아울러 연각승의 제4 심심이지지(甚深利智地), 곧 심심의 무상지(無相智)를 생하는 자리와, 제5 팔성도지(八聖道地), 팔성도를 닦는 자리와, 제6 각료법계허공계중생계지(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 삼계를 각료(覺了)하는 자리 등에 해당합니다.

五. 金 剛 地

菩薩이 將登正覺할새 皆坐 金剛座라 說하신 金剛座란 곧 金剛地로서 五相成身位次의 第四 成金剛身位니 解脫道에 第一步를 印한지라 共十地의 第四 見地요 또 聲聞乘의 第七 須陀洹地(預流果의 位)며 緣覺乘의 第七 證寂滅地(緣覺 見道의 位)인 同時에 第八 六通地 (六神通을 得하는 位)의 初步니

換言하면 五 金剛地란 地層의 最低인 金剛輪이 獨露한 境地로서 ★★525의 去★함 같고 籠鳥의 說出함 같이 生死網을 出離하야 衆生身中의 金剛佛性을 見證한 者니 진실로 本格的 肉眼을 成就할새 漸次하야 天眼·法眼·慧眼·佛眼을 得할지라 修者는 此地를 成就하야사 비로소 金剛薩睶라 名하니라

5에 금강지(金剛地)라, 보살이 장차 정각(正覺)에 오르려 할때, 금강불성(金剛佛性) 곧 자기자성(自己自性), 우주의 실상(實相)을 깨닫는 것이므로 정각이라 하는데 온전한 정각은 습기를 다 없앤 보살십지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각의 초보인 셈입니다.

개좌(皆坐) 금강좌(金剛坐)라 설하신 금강좌란 곧 금강지 (金剛地)로서, 금강좌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명의 본질이 훤히 빛나서 금강불성으로 화(化)해 버린 경계입니다.

밀교의 수행차서인 오상성신위차(五相成身位次)의 제4 성금강신위(成金剛身位)니 해탈도에 제일보를 자리하였으며 그 자리가 공십지(共十地)의 제4견지(具地)요, 또 성문승의 제7 수다원지(須陀洹地) 곧 예류과의 자리며, 연각승의 제7 증적멸지(證寂滅地) 곧 연각 견도(見道)의 자리인 동시에 제8 육통지(六通地) 곧 육신통(六神通)을 얻는 자리의 초보니, 육신통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금강지를 먼저 성취해야 합니다.

다시 바꿔말하면 5 금강지란 지층(地層)의 최저인 금강륜(金剛輪)이 나타난 경지로서 무쇠의 녹을 제거함과 같고 새장에 갇혀있는 새가 새장을 탈출함과 같이 생사(生死)의 그물을 떠나야 합니다. 범부 중생은 새장의 새처럼 생사(生死)의 그물에 갇혀 있습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금강불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모두가 다 번뇌의 새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중생 몸의 실상인 금강불성을 깨달아 증명하였고 진실로 본격적인 육안(肉眼)을 성취하였으니, 우리 육안은 탐진치에 어두워져 바로 보지 못하니 온전한 육안이 못됩니다. 금강지를 성취해야 바로 보게 됩니다. 점차로 천안(天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佛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금강지를 성취하여야 비로소 금강살타(金剛薩睶) 곧 금강지를 성취한 보살이라 이름하게 됩니다.

六. 喜 樂 地


6에 희락지(喜樂地)란 삼계(三界)를 9지(九地)로 구분하여 욕계(欲界)는 5취(趣) 즉 지옥·아귀 ·축생·천상·인간이 같지 않으나 동일한 산란심의 경계이므로 다 합하여 산지(散地)라 하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각각 4지(地)로 구분합니다.

1에 욕계오취지(欲界五趣地)니, 욕계 내에 지옥·아귀·축생· 인(人)·천(天)의 오취(아수라는 천(天)에 포섭함)가 있는바 이를 합하여 일지(一地)를 이룬 것이며,

2에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니, 욕계의 생을 떠남으로 말미 맘아  곧 의식에 나오는 기쁨과, 락수(樂受) 곧 몸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생(生)하는 지(地)로서 안·이·신·의의 4식(識)만이 있고, 비·설(鼻舌) 2식(識)이 없으므로 무분별의 락수가 상응하며 의식에 유분별의 희수가 상응하니 곧 색계의 초선천이며, 초선에 들어가면 냄새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것입니다.

3에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니, 초선정의 희락(喜樂)을 인(因)으로 하고 다시 승묘(勝妙)한 희락이 생하는 경지로서 이 지(地) 이 상에는 모두 오식(五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을 여의고 곧 눈으로 봐도 안 보이고 귀로 들어도 안 들리고, 코로 냄새 맡아도 냄새가 안 나고, 입맛도 모르고, 몸에 촉감도 모르고 다만 의식(意識)만이 있으므로 2선천 이상은 의식뿐이고 5식은 없습니다. 혹 희수가 상응하고 혹 락수가 상응하니 곧 2선천이며, 희수나 락수가 서로 교차한다는 말입니다.

4에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니, 기쁨을 여의고 신묘한 안락인 묘락을 얻는 경지니 희수도 오히려 추심()이므로, 추심은 거치러운 마음으로 기쁨도 공부로 보아서는 거치러운 번뇌입니다. 2선의 희(喜)를 떠나고 오로지 정묘한 무분별의 안락에 머무는 경지로서 곧 3선천이며, 5에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니, 모든 번뇌 망상을 떠나 청

정한 경지니, 락수(樂受)도 오히려 거치러운 마음이므로 이를 떠나고 청정하고 조금도 조작이 없고 고나 락을 받는 것이 전혀 없는 생각에 머무는 경지로서 곧 4선천인데 이상 4지(地)는 색계입니단

6에 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니, 색지(색계)의 색을 싫어하여 공(空)을 생각하되 공에 한계가 없다고 관찰하는 지혜를 짓는 자가 생하는 경지로서 즉 무색계의 제 1천이며.

7에 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니, 앞의 외공(外空)을 싫어하여 내식(內識)을 생각하되 식(識)에 한계가 없다고 관찰하는 자가 생(生)한 경지로서 무색계의 제 2천이며,

8에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니, 앞의 내식(內識)을 싫어하고 무소유를 생각하여 무소유를 관찰하는 지혜있는 자가 생하는 경지로서 즉 무색계의 제 3천이며,

9에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니 앞의 경지와 같은 거치러운 추상(★想)이 없고〔非想〕, 극히 미세한 상념〔非非想〕만 있는 경지 곧, 삼계의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도 아직은 생각인가 아닌가 하는 미세한 생각은 남아 있다는 경지입니다. 이러한 경계가 무색계의 제 4천으로서 삼계 중 제일 수승(殊勝)한 과보(果報)입니다.

그런데 무색계를 식계(識界), 색계를 근계(根界), 욕계를 경(境:塵)계로 구분할 수 있으나 각계 (各界)가 각각 삼계(三界)를 갖추어서 다만 현상적인 상(相)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성품 차원에서는 다 일여평등(一如平等)합니다.

그래서, 횡(橫)으로는 구분할 수 없고, 횡으로는 하나가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주란 따로따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사, 김씨 박씨가 따로 따로 있다고 알지만 현대 물리학으로만 보더라도 산소나 수소 등의 원소로 구성된 몸이기에 산소나 수소 등의 원소 차원으로는 결국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원소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다 붙어 있는 것인데 하물며 원소를 구성한 근본 성품인 불성(佛性)차원에서는 나나 너나 공간이나 모두가 다 동일한 불성뿐입니다. 근래서 횡으로 보아서는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근본에서, 진여불성 자리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더욱 그럴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네 문중 내 문중, 네 종파 내 종파, 내 종교 네 종교로 부질없는 소모와 갈등만 할 뿐입니다.

종(縱)으로 나눈다면 욕경계(欲境界)를 추진삼계(추★530塞三界), 번뇌가 거치로운 경계, 색근계(色根界) 세진삼계(細塵三界) 번뇌가 좀 미세한 경계, 무색식계(無色識界)를 극미삼계(極微三界) , 번뇌가 아주 미세한 경계로 나눌 수 있겠으나, 하여튼, 삼계란 근(根), 경(境), 식(識)의 별칭으로서, 우리 마음의 번뇌로 본다면 6근, 6경, 6식이 맑아 들어가는 정도를 별칭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相)적으로는 경(境)이오, 성(性)적으로는 근(根)이며, 분별적으로는 식(識)일새, 오온(五蘊)이 각기 오온을 갖추어 구별하기 어려우나 평등일여한 가운데 성상(性相)이 분명하니 또한 구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금강지를 성취하여 공무변처를 관념(觀念)하면 리생희락지에 이르고, 식무변처를 관념하면 정생희락지에, 무소유처를 관념하면 리희묘락지에, 비상비비상처에 머물면 사념 청정지에 이르는 것인데, 6 희락지란 리생희락과 정생희락이 생하는 경지로서 성문승의 제8 사다함지(斯陀含地) 즉 일래과(一來果)로, 욕계 번뇌가 마저 녹지 못해서 욕계에 한번 오는 위(位)와 공십지(共十地)의 제5 박지(薄地)에 해당하구 5 금강지와 6 희락지를 합해서 보살승의 초환희지에 해당합니다. 여기까지가 보살초지에 해당합니다. 금타 스님께서는 보살십지를 표준하고 여러 가지 계위를 대비(對比) 회통(會通)시킨것입니다.

七. 離 垢 地

離喜妙樂의 境界를 거쳐 捨念淸淨地에 到하는 池니 聲聞乘의 九阿那含地(不還果의 位)에 當하고 菩薩乘의 第二地에 合하며 共十地의 第六 離欲地에 當하니라

7. 리구지(離垢地)라, 거치러운 희수(喜受)를 여의고 묘락(妙樂)을 얻는 경계를 거쳐서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에 이르는 경지니, 성문승의 9 아나함지 즉 불환과(不還果)의 위(位)로 욕계 번뇌를 떠났으니 욕계에 다시 오지 않는 자리에 해당하고, 보살승의 제 2지에 합(合)하며 공십지(共十地)의 제6 리욕지(離欲地)에 해당합니다.

八. 發 光 地

加行功德으로 一時的으로 三界를 出離하매 心光이 發하야 九次第定의 極位인 滅受想定(滅盡定)을 비로소 吟味하는 地니 菩薩乘의 第三地에 合하니라

8. 발광지(發光地)라, 수행자는 가행공덕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간단(間斷)없이 공부해야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게으름이라는 것이 수행자로서는 큰 원수입니다. 혼침(箌沈)과 도거(掉擧)도 가행공덕으로서 사라지는 것인데 가행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할 별도리가 없습니다. 정진을 않고서 말로만 알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가행공덕으로 일시적으로 삼계를 출리(出離)하니 심광(心

光)이, 마음의 광명이 발하여 구차제정(九次第定) 곧 4선정(四禪定), 4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이 구차제정입니다.

구차제정은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서 성도 하실 때도 구차제정에 의거하고, 열반드실 때도 구차제정에 의거했습니다. 아함경(阿含經)이나 성도기(成道記)에 다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지방의 도인들은 대체로 이와 같이 구차제정에 의거했고, 현재 우리도 공부하는데 있어서 이 4선정, 4공정, 멸진정의 한계를 알아야 자기 공부를 정확히 점검할 수가 있고 우리 번뇌 습기를 온전히 여읠 수가 있습니다.

현대 과학만능 시대에 있어서 구차제정(九次第定) 법문은 부처님께서 몸소 실천하시고 역설한 가장 합리적인 선정(禪定)의 차서이니 우리 수행자는 깊이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발광지(發光地)에서 삼계(三界) 번뇌를 소멸함에 따라 심광(心光)이 발하여 구차제정의 마지막 자리인 멸수상정(滅受想定) 곧 멸진정(滅盡定)을 비로소 음미하는 경지이니 보살승(菩薩乘)의 3지(三地)에 해당합니다.

九. 精 進 地

菩薩十地에서 十波羅蜜을 成就하고 十眞如를 證하니歡喜地에서 施波羅蜜을 成就하고 遍行眞如(我·法 二空의 所顯으로서 諸法에 通行함으로)를 證하며 離垢地에서 戒波羅蜜을 成就하고 最勝眞如(無邊의 德을 具足하야 一切法에서 最勝함으로)를 證하며 發光地에서 忍辱波羅蜜을 成就하고 勝流眞如(此 眞如 所流의 敎法이 至極히 殊勝함으로)를 證하며 檷慧地에서 精進波羅蜜을 成就하고 無攝受眞如(繫屬한 바 無하야 我執 等에 依하고 또 取하는 바 않임으로)를 證하며 難勝地에서 禪定(靜★532) 波羅蜜을 成就하고 無別眞如(差別의 類가 無하야 眼 等의 異類가 有함과 如함이 않임으로)를 證하며 現前地에서 般若波羅蜜을 成就하고 無染淨眞如(本性이 無染한지라 後에 다시 淨해진다고 說할 수 없음으로)를 證하며 遠行地에서 方便善巧(廻向方便善巧와 拔濟方便善巧)波羅蜜을 成就하고 法無別眞如(多數法에 種種으로 安立하되 別異가 無함으로)를 證하며 不動地에서 願(求菩提願과 利樂他願波羅蜜을 成就하고 不增減眞加(增減의執을 離하야 淨染에 따라 增減됨이 아님으로)를 證하는 同時에 또 相土在所依眞如를 證할 수 있으니 이를 證得已하면 身相을 現하고 國土를 示함에 自在하며 善慧地에서 力(修習力과 思擇力) 波羅蜜을 成就하고 智(受用法樂智와 成熟有情智)自在所依眞如를 證하니 이를 證得已하면 無得解에 自在를 得하며 法雲地에서 智波羅蜜을 成就하고 業自在等所依眞如를 證得已하면 普히 一切 神通의 作業陀羅尼定門에서 皆 自在를 得하니라

眞如性은 實로 差別이 無하나 勝德에 따라 十種을 假立하나니 菩薩初地 中에서 이미 一切에 達하야 能히 證行할 수 있지만 아직 圓滿치 못함으로 圓滿하기 爲함인져,

9에 정진지(精進地)라, 보살십지에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성취하고 십진여(十眞如)를 증험하게 되는데, 환회지(歡喜地)에서 시바라밀(施波羅蜜)을 성취하고 아(我) ,법(法), 이공(二空)의 경계에서 제법에 두루 통하므로 변행진여(遍行眞如)를 증험하며, 리구지(離垢地)에서 계바라밀(戒波羅蜜)을 성취하고, 리구지가 되어야 과거 지었던 죄를 소멸합니다. 단순히 참회한다고 해서 과거에 지었던 죄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녹아지나 이른바 4바라이(四波羅夷)죄는 리구지에 들어가야 없애는 것입니다. 리구지를 성취 못하고서는 파계의 습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무변(無邊)의 덕을 구족하여 일체법에서 최승함으료 최승진여(最勝眞如)를 증험하며, 발광지(發光地)에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성취하고, 이 진여(眞如)에서 유출(流出)되는 교법이 지극히 수승하므로 승류진여(勝流眞如)를 증험하며,

염혜지(檷慧地)에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을 성취하고, 걸리는 바 없어서 아집 등에 의하고 또 취하는 바 아니므로 무섭수진여 (無攝受眞如)를 증험하며,

난승지 (難勝地)에서 선정 (禪定: 靜★534) 바라밀(波羅蜜)을 성취하고, 차별의 종류가 없으니 안(眼)·이(耳) 등의 구별이 없으므로 무별진여(無別眞如)를 증험하며,

현전지(現前地)에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성취하고, 본성이 본래 오염됨이 아니니 후에 다시 맑힌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무염정진여(無染淨眞如)를 증험하며,

원행지(遠行地)에서 방편선교바라밀(方便善巧波羅蜜) 곧 모든 공덕을 회향(廻向)하는 방편과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바라밀을 성취하고, 다수법에 종종으로 안립(安立)하되 다름없으므로 법무별진여(法無別眞如)를 증험하며, 부동지(不動地)에서 원바라밀(願波羅蜜) 곧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바라밀을 성취하고, 증감(增減)의 집착을 떠나서 정염(淨染)에 따라 증감됨이 아니므로 부증감진여(不增減眞如)를 증험하는 동시에, 또 상토자재소의진여(相土自在所依眞如)를 증험할 수 있으니 이를 증득(證得)하게 되면 몸을 나타내고 국토 자연을 나타내는데 자재하며, 이 경지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작게도 크게도 할 수 있고 또는 다른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지혜입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재주를 부리고 있지만 그런 것은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능력의 일단에 불과합니다. 불상은 대소, 시비, 선악의 차별이 없는 무한공덕이기 때문에 크다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겨자씨 속에다 삼천대천 세계를 다 집어넣는다 해도 조금도 줄어지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선혜지(善慧地)에서 력바라밀(力波羅蜜) 곧,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 (思擇力)바라밀을 성취하고, 지(智:受用法樂智와 成熟有情智) 자재소의진여(自在所依眞如)를 증험하니 이를 증득(證得)하게 되면 거리낌없는 지혜에 자재하게 되며,

법운지(法雲地)에서 지바라밀(智波羅蜜)을 성취하고 모든 업(業)을 자유자재하는 진여를 증득하면 일체 신통 경계에 자재하게 됩니다.

진여성(眞如性)은 실로 차별이 없으나 원만하고 수승한 덕(德)에 따라 십종(十種)을 잠시 구분하여 세운 것인데 보살초지 중에서 이미 일체에 달(達)하여 능히 증험하고 행할 수 있으나 아직 원만치 못함으로 원만케 하기 위하여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解脫十六地에 있어 七·八·一 의 三地는 菩薩 十地의 二·三·六의 三地名 그대로, 九·十의 二地는 十波羅蜜 中 四·五의 冠詞를 引用하고 十二·十三·十四·十五·十六의 五地는 瑜伽七十地 中 十三 聲聞地 十四 獨覺地 十五 菩薩地 十六 有餘依地 十七 無餘依地 等과 共十地의 七 聲聞地 八 支佛地 九 菩薩地 佛地 等을 參酌한者니 對照할진져

해탈십육지에 있어 7, 8, 11의 3지(地)는 보살십지의 2, 3, 6의 3지명(地名) 그대로이고 9, 10의 2지는 십바라밀중 4, 5의 관사(冠詞: 머리말)를 인용하고 12, 13, 14, 15, 16의 5지는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 중(유가는 밀교의 유가사지론인데 굉장히 훌륭한 론장입니다. 유가사지론은 무착보살이 미륵보살의 감응을 받아서 저술한 것입니다.) 13 성문지, 14 독각지, 15 보살지, 16유 여의지, 17 무여의지 등과 공십지(共十地)의 7 성문지, 8 지불지, 9 보살지, 10 불지(佛地) 등을 참작한 것이니 대조하면 되겠습니다.

十. 禪 定 地

菩薩의 五 難勝地에 當함

十一. 現 前 地

菩薩乘의 六 現前地에 合함

十二. 羅 漢 地

聲聞乘의 極果인 十阿羅漢地 卽 無學果의 位와 緣覺乘의 九 徹和蜜地 卽 無學果를 證하는 位와 菩薩乘의 七 遠行地와 共+地의 七已辨地 卽 阿羅漢果의 位에 當할새니라

十三. 支 佛 地

緣覺乘의 極果인 十習氣漸薄地로서 習氣를 侵害하는 催저 共十地의 八 支佛地에 合하고 證理邊으론 菩薩乘의 八 不動地에 當하니라

十四. 菩 薩 地

菩薩乘의 九 善慧地와 共十地의 九 菩薩地에 合當하니라

十五. 有 餘 地

瑜伽十七地 中 第十六 有餘依地 略稱으론서 菩薩乘의 終地인 十法雲地에 當하고 共十地론 九 菩薩地에 攝하며 또 等覺位도 이에 含容되나 因位의 等覺이란 五十位의 總代名詞라 云謂 할 수 있음으로 이를 略함

10에 선정지(禪定地)라, 보살승의 5. 난승지에 해당하며,

11에 현전지(現前地)라, 보살승의 6. 현전지에 합당하고,

12에 나한지(羅漢地)라, 성문승(聲聞乘)의 마지막 자리인

10. 아라한지 즉 무학과(無學果)의 자리와 연각승(緣覺乘)의 9. 철화밀지(微和蜜地) 즉 무학과를 증득하는 자리와 보살승의 7. 원행지와 공십지(共十地)의 7. 이변지(已辨地) 즉 아라한과의 경지에 해당합니다.

13에 지불지(支佛地)라, 연각승의 마지막 끝자리인 10. 습기점박지(習氣漸薄地)로서 습기를 침해하는 경계니 공십지의 8.지불지에 합하고 원리를 증명하는 의미에서는 보살승의 8. 부동지에 해당합니다.

14에 보살지(菩薩地)라, 보살승의 9. 선혜지와 공십지의 9. 보살지에 합당합니다.

15에 유여지(有餘地)라,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 중 제 16. 유여의지(有餘依地)의 약칭으로서 보살승의 마지막 끝자리인

10. 법운지에 해당하고 공십지로는 9. 보살지에 들어가며 또 등각위(等覺位)도 이에 포함되나 인위(因位)의 등각이란 오십위 (五十位)의 총 대명사라 말할 수 있으므로 이를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