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진동수(우주 질료의 빛의 밀도)문제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건데,


화학분자에 대해서 대부분 배웠을껍니다.

모든 물질은 분자들로 이루어졌죠. 그 분자를 이루는게 원자로 알려져있고 원자를 이루는게 전자 중성자 양성자라는 것들로 알려져 있고요. 이것들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운동합니다.회전이 빨라서 파르르 진동하며 떨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보면 됩니다. 이러한 떨림 정도를 진동수라고 보면 됩니다. 냉장고 콘크리트벽 세탁기등등 우리 눈에 보이는 풍경을 이루는 고체 사물은 확고부동하게 정지되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끊임없이 움직이며 진동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이러한 분자의 움직임이 아주 고도로 빨라서 육체 주파수대역을 넘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는 육체의 진동수는 전체 빛의 밀도 영역에 있어서 그러한 하나의 층이며 일부에 불과하죠. 일단 분자 진동수, 회전 속도를 빛의 속도 이상으로 끌어올리면 그 물제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진동수로 이루어진 영역이 존재하는데 우리 또한 우리 육체의 분자 진동수를 같이 따라서 올리면 우리 눈 앞에서 사라진 그 사라진 물체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겟쬬. 그 영역에는 더 이상 시간이나 물리적 거리의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 바로 쉽게 말해서 옛 신선들이나 도인들의 도술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물리적 시간과 거리를 초월해 시공간을 여행하는 유에프오의 비행원리이기도 합니다. 유에프오는 물리적 거리나 시간의 장벽이 완화된 정신공간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의 힘을 통해서 시공간을 여행합니다. 이 빛의 속도로 진동하는 신체가 우리 육체와도 겹쳐져 있는데 그게 바로 유체-에테르체입니다. 고도로 진보한 유에프오는 그 자체가 유체로된 생명체입니다. 육체는 두가닥 디엔에이로 이루어져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디엔에이는 이 유체와 다차원 영혼에 까지 뻗어 있는 것이며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겁니다.


주류과학자들도 얼마든지 현재 이것을 알아낼수 있고 밝혀낼수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둠의 지배하에 통제되고 있죠.  일반 대중들 일반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진실에는 한계가 있는 겁니다. 룰을 자기들에 맞게 짜놓고 그런상태에서 증명하지 못한다고 비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태권도와 권투가 두 손만 사용하는 권투의 룰때로 시합을 해서 권투가 태권도를 이긴다고 태권도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먼저 대중적으로 진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의 사태의 실상부터 바로 알아야 할것입니다. 무엇이 누가 우리의 실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를 아는 것 그것이 '깨어남'입니다.


이 정신공간의 세계가 소위말하는 에테르, 아스트랄세계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영계이죠. 이러한 영계 조차도 다차원 세계에서 비교적 하나의 하급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 몸에는 육체 진동수 말고도 보다 높은 진동수를 가진 신체가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빛의 신체, 유체-에테르체라고 하는 겁니다.


상위영혼에서 내려오는 고도의 진동수로 하강하는 빛을 받으면 주위의 풍광이 형태가 맑고 생글거리며 생동하고 약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것은 진동하는 빛을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높은 진동수 상태의 빛을 현재 상태에서 인간이 받게 된다면 어둠에 절여저 둔중하게 육체는 견디지 못합니다. 다소 와전되었으나 깨달음을 얻으면 육체가 파괴되고 죽는 다는 말이 그말일것입니다. 높은 주파수대의 빛을 받으면 현재 인간의 육체는 보다 유연하게 변화되게 됩니다. 준비운동없이 경직된 육체는 충격을 받겠죠. 이게 준비과정이 없다면 충격으로 다가올수는 있습니다. '깨달음'은 차원 연결이고 해탈은 그러한 하느님의 차원 연금술 과정 상에 있는 차원들을 단계에 따라 승천 상승 승격하는 일인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그리스도도 와같은 높은 진동수의 빛을 받는 다면 여러분은 견디지 못합니다. 거기엔 절차와 준비운동이 필요한데 심신을 정화 시키고서 유체를 복귀시키고 상위 차원과 하위 차원을 중간에서 연결시키는 영혼을 통합하는 것들이 그 것입니다.불교론 추종자들이 좋아하는 마음 비우기라는 것은 빛의 명상에 있어선 초급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부나 최고의 경지가 아닌데 기성 종교로서 불교는 거기에서 더 이상 진보하지는 않고 있죠. 그들은 그 상태에만 머물러 상위 영혼 차원과의 소통을 거부합니다. 위로도 아래로도 탈출구가 없는 삼차원에서 최고의 경지라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되며 그 이상의 나아갈 것들이 더 더 있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영혼이나 영혼의 신체가 아니라 어둠이며, 사라지는 것도 어둠이며, 소멸하는 것도 어둠입니다. 어둠은 실체가 없습니다. 오로지 만물을 창조하는 질료인 빛(광자)이 실체입니다.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벰파이어들에겐 자신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햇빛마져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받아들여야할 숙명일것입니다.


영혼이 중간에서 근원과 여려분을 연결해 준다면 유체는 영혼과 우리의 육체를 이어줍니다. 유체는 육체와 중첩되어 바로 상위에서 육체를 관장하고 콘트롤합니다. 유체가 빠져나간 육체는 단순히 주인이 없는 물질적 집에 불과하죠.


본래 우리의  모습은 근원과 연결된 이러한 에테르 신체였습니다. 상고시절 신들과 함께 살아가던 시절에  명상을 즐기며 순수한 창조가 이루어지던 에테르성문명이 존재했습니다. 소위 전설속에서 나오는 이상향 무릉도원이나 우리나라에서 신선들이 푸른학을 타고 노닌다는 청학동이 그러한 것드의 잔존 기억이죠. 이런 문명은 오늘날 아갈타 샴발라와 같은 5차원 지저세계로 존재합니다.


근원은 아니고 근원으로 부터 갈라져 나오되,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이죠.  이 상태는 창조주에 합당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소위 말하는 인간의 추락, 타락이 아닙니다. 근원과 뻗어 나와 영혼이 하강하는 것 자체를 추락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신데 근원에서 나온다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는 추락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창조의 과정과 신의 확장 과정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은 정확히 지상에서 두발로 걸었던 인간에게 벌어진 일이지 근원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추락은 근원에서 나오돼 근원과 연결이 끊어져 육체에만 갇혀진 상태를 말하죠. 우리의 육체 유전자 디엔에이는 원래 에테르체-빛의 신체 상태 다차원까지 뻗어진 안테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신에 반대하는, 우리 은하의 막가는 '불량배', '양아치'들의 불법적 유전자 조작을 통해 단절된 것입니다.

 
에테르체와 육체가 단절되어 현재 상태로 된것은 소위 마왕들과 그들을 추종 자들이라 부를수 있는 존재들의 계략에 의해서 였습니다. 레무리어의 자연적 영성에 적절한 창조를 가미해 한때 영광스런 낙원을 이루어지만, 외계로부터 부정적 공포의 에너지에 이끌린 아틀란티스 는 파국을 맞았습니다. 그들의 후예들이 지구를 지배해 왔고 지금도 그들의 잔당들이 현재 실질적 시스템으로 지구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중인겁니다. 이것이 지구가 유래없는 지상천국에서 감옥행성으로 전락한 배경입니다. 불경에 나오는, 부처를 유혹했다는 예수를 시험했다는 그 숱한 마신이나 마귀들이 바로 이 존재들입니다.


우리 문명이 앞으로, 나가고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에테르 진동세계로 진입하게 되고 에테르성 문명으로 진화하게 될거라고 합니다. 앞으로 30년에서 50년 안에  모든 의학이나 과학 경제 시스템 산업 교통 통신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에테르 기술들이 활용될 겁니다.  유체의 진동만으로  모든 악성 질병 병원균들이 신체에서 떨져 나가게 될겁니다. 손상된 신체는 불가사리처럼 다시 재생되고 궁극적으로는 죽지도 늙지도 않을 겁니다. 그게 단순히 좋다는 게 아니라 그게 옳은 상태이며 그게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마왕과 그들의 부하들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그들은 그길을 방해하고 막고 있죠.


한방이나 한의학에서는 이미 이 기술들의 흔적을 미미한 수준에서 응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경락이나 경혈이라 부는 겁니다. 경락이나 경혈이 에테르체의 일부분입니다. 이러한 경혈이나 경락은 육체보다는 정묘하지만 에테르체 보다는 매우 낮은 수준이죠. 지금의 경락이나 경혈지도 보다 엄청나게 미세하고 섬세하며 정교한 회로의 빛을 발하는 신체가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유체입니다. 유체는 원자단위를 넘어선 세계에서 육체를 관장하고 콘트롤합니다.


이 유체와 육체를 이어주고 있는 것을 혼줄-실버코드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뇌의 송과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육체에서는 각 차크라를 통해서 기능하죠. 따라서 영혼이 어디 있냐고 누가 묻는 다면 두뇌 송과선에 있다고 하십시요.


여기서 우리 본래을 찾자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의 본래 모습을 찾자는 것은 이러한 반半 에테르성 문명으로의 귀한을 말합니다. 내가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고 창조하고 건설해야한다고 한것은 이러한 창조주의 법칙에 맞는 영적상태로의 귀환을 말하지 지금의 물질적 욕망의 세계를 계속해서 건설하자는게 아닙니다. 퇴화는 실체가 아닌 허상을 숭배하는 어둠에만 안주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상태며 자연의 순리가 아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자는 반드시 복귀가 필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겠죠. 현재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되 그 것을 이룬자는 이제 그 다음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깨닫고 그 상태에서 변화를 위해 한발짝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겁니다. 어떤 자가 어떤것에 얽매여 있는데 우리는 현재 이순간에서 완전하며 변화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그에게는 변화입니다. 아러니칼 하게도 내부에 들어가라는 가르침도 최초는 동료나 스승의 가르침과 같은 다른이와의 교류 문화의 교류 즉 외부에서 오는 겁니다.


사랑하고 자족하고 감사하되 현재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되 그것이 이루어지면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도 알게 될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변화를 위해 차츰 이끌어 가는 작업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족이나 버림을 단순히 안주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재의 모습을 옹호하기 위해 저항수단으로 자신을 내팽겨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그것은 어둠의 잔존 역적패당을 도와주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신과 연결된 본래의 모습이라고 했지 근원과 합일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근원과 합일은 근원에서 나온 개체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인데 그것은 우주의 나이만큼이나 많은 영겁의 세월과 삶과 겸험 속에 천천히 영체가 인체가 차원마다 진화하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할것은 없고, 대부분 면적을 이루는 것은 각자 근원에서 나온 상태에서 근원과의 연결된 상태가 주류입니다.


여기서 칼융의 집단 무의식을 들어 영혼 관련 영적현상들을 환상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는데,칼 융의 집단 무의식이나 프로이트의 꿈 이론 자체는 추상적으로만 이론적으로만 이런것들의 일부를 추측하고 있지만 이런것은 물리적 실체입니다.  문제는 무얼 믿는냐 안 믿는냐 거기에 따른 선택이고 두려움이고 책임감이죠.


대부분 채널링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인정하는 상태에서 무엇이 선이나 악이냐를 놓고 따지는데
여기 계시는 분중들 중에는 아예 채널링 자체 마져 존재 하는 냐 아니냐 갖고 따지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가시 세계를 뛰어넘는 영역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만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선인가 악인가는 나중으로 하고 채널링 그 자체에 대한 상당부분 해소될거라고 봅니다.


이런한 다층 다차원의 동시성은 하나에 한번씩 이해가 가능한 일직선상의 기계논리로만으로는 전혀 이해할수가 없는 세계입니다. 적어도 직감을 통해 연결되바야 하거나 육체를 벗어나 신체가 직접 그 차원으로 가봐야 눈에 보이지 않던 세계가 눈에 보이고 압니다. 성장 가능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죠. 컴퓨터 연산 능력으로 비유하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게 영입니다. 하지만 눈에보이는 기계 논리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딱정벌레처럼 미로 사이를 기어가는  2 메가 바이트 연산능력에 불과한겁니다. 진리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이 없고 약하고 소외된 것입니까? 그러나 순수하고 영원하게 그모든 것을 밑에서 떠 받들고 위에서 들어올리고 있는게 진리이죠. 이러한 고차원을 현수준에서 이해하기 위해선 기계논리만으로 불가능하며 직감 예술 감각 감성 통찰력 다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성이라는 것은 기계들에겐  불쾌한 겁니다. 감성이란 당장 무슨 눈에 보여 의지할만한 직선적 틀과  딱 이거다 딲딱맞어 떨어지는 룰도 없고 흐물흐물 물만두같이 힘이 없고 시시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거든요. 기계논리나 틀을 주류과학의 권위를 힘을 좋아하는 우리는 이 파충류 지성체와 금속 기계들이 심어놓은 호전성 전투성에 스트레스 외상증후군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입니다.


자연의 생명체나 인간의 뿌리가 되는 마음이나 영혼을 존중하지 않고 그 생명체나 사람을 존중한다는 말은 사상누각과 같으며 근본없는 말입니다.


이러한 무감각한 이론 과학의 논리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정연해도 그것이 자연에 과연 맞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릅니다. 구체적인 자연과 맞지 않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소설불과합니다.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정교한 소설을 쓸수 있어도 그것은 구체가 실체가 되지 못한 우리현실에선 추상적인 허구인것과 같습니다. 소설또한 우리 구체화된 현실에선 허구이지만 하급 아스트랄상에선 엄연히 진동수를 가지고 존재하는 현실이죠. 아스트랄이란게 뭘 구체화 하지 못한 잠재적 안들이 존재하는 추상적 세계이거든요. 꿈도 정신분열증환자의 환상도 그 나름의 수준에서 아스트랄 현실이고 실체입니다. 다만 그것이 대다수가 공통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현실이 아니라는 것일뿐이죠. 똑 같이 허구이지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에 따라서 어떤 것은 현실(물질)이 되고 실체가 됩기도 하며 어떤 것은 꿈이나 허구로 남습니다. 허구라 할지라도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면 그것은 더 이상 허구가 아닙니다. 밀도가 같다면 같은 현실이 됩니다. 밀도가 다르다면 어떤 것은 어떤것에 대해 추상적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가 이 밀도를 여지것 추상적이다 하는 것 영혼이라는 것에 맞게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죠. 게중의 여러안에서 자연이 선택하고 구체화한 것이 진리입니다. 이 기존 현실의 밀도에 맞지 않아 우리는 소설을 허구하고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론 과학 논리 과학과 수학은 아무리 논리정연해도 현재 '자연'이 선택하지 않는(진리가 아닌한) 추상적인 소설일수있습니다. 현재 이 자연이 선택한 것과 현 기계문명이 선택한 것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연은 진리로서 영혼을 선택했지만 인간과학자들은 마음을 베제한 주류이론과학선택했죠.  자연이 선택한게, 창조주가 선택한게,  주류의 이론 과학이 아닌  영이고 영혼입니다.  여러 다차원을 거쳐 이렇게 실체로 구체적으로 현실로 자연으로 만들고 있는것이 바로 창조이고 창조주이며 그에 봉사하는 디자이너들입니다. 거짓일지라도 우리가 선택하면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되고 구체가 되며 실체가 됩니다. 이것이 진리에서 멀어져 있고, 현재 창조주의 법칙에서 동떨어져 있습니다. 진리와 창조의 법칙(다차원 영혼의 연금술)에 따라 삶을 환경을 선택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선택한것은 스스로 콘트롤이 되지 못한상태에서 무의식중에 창조하는 일이며 그것은 창조의 법도에서 벗어나 있고 진리가 아닙니다, 이 선택을 진리에 맞게 하자는 거죠.다차원 연혼의 연금술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다만 일부 허무주의 자들은 원점으로만 기어 들어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상태 일뿐입니다. 용기가 없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들어앉은 자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뭘 해보는자 보다 우월하다고 그들을 어리석다고 할 자격은 없습니다. 설령 실패라 하다더라도 거기서 교훈들이 있고 최선을 다하는한 그것은 후회없는 겁니다.  가제(가상현실로서 실체)와 공제(공)와 중제(중용)가 합일을 이루어야만이 진정한 도입니다.


스스로 자립해서 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 집단이 그렇게 보기에 권위있고 유명하고 공인해주니까 권위 있다 생각하는 주류과학이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하는 것도 두려움이고 숫자의 규칙같은 것만 의지하려 하는 것도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이 '나약해서' 의지하고 매달릴 권위로서 권력으로서 숭배하는데 그러고서 오만하게도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진리에 사는 사람들을 환상이니 망상이니 하찮다고 조롱하고 무시합니다.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들은 순수하지가 못합니다. 그들은 일견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자기가 환경은 자기가 만든다는 창조의 법칙을 모르고 눈보이는 확실한 것 스스로 보기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권위에 맹종할뿐 스스로는  자기가 아님으로 자유가 없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신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오는 겁니다.혹은 자신이 그런 자유를 못 누리기에 그것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것이 아닌지요. 진정한 자유는 신의 법칙에 자기를 진정한 포기하고 '용기 있게' 자타의 영혼을 사랑하고 진리에 의거하여 행동하고 여행할 때만 가능한겁니다. 역으로 그들은 부처도 신조차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타인을 방해하기 위해 부처와 신의 권위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그의 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 이기적 목적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 용기있는 자는 참된것을 알고 복종하는 자입니다.


자기 결점을 직시하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대인이 되는 길인데. 자기 결점을 인정하면 변화를 위해 절반은 시작된겁니다. 그 다음으로 능력 껏 나가는 것죠. 능력이 있으면 있는 만큼 나가고 아예 없으면 안 나가도 됩니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자기 위치가 어딘가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꿈이나 비젼은 마법의 시작이며 연금술의 시작입니다. 사고가 생각이 물질을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물질의 이루는 질료는 생각입니다. 분자를 원자들을 미세하게 분해해 가다 보면 생각의 질료 즉 광자가 나옵니다. 옛 전설속의 티벳 고승들의 요기들이 텔레포트 텔레파시 순간소멸 공중부양등 이적중에서 가장 높은 경지의 이적으로 칭하는게 바로 생각만으로 그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창조주 또한 이 질료로서 여러가지 단계를 거쳐 영혼을 만들어냈습니다. 창조주가 만들어낸게 진리입니다. 죽음은 창조주가 창조한게 아닙니다.


본인은 잘 알지 못하지만 자본세계의 기독교 목사들 중 일부가 믿어라 그리하면 이루어질것이라는 말을 이용해 이 물질세계의 세속적 욕망으로 성공학 처세학으로 활용하는가 본데, 그 말 자체는 그 원리 자체는 사실입니다. 예수또한 구하라 그러하면 얻을것이고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것이라 했습니다. 명백한 영혼이 가지고있는 법칙, 창조의 원리입니다.  기독교 성공처세학 이것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돈만 밝히는' 유대인의 상술이 나옵니다. 이것은 생각이 같은 현실을 끌어당긴다는(창조한다는) 자력의 법칙, 유유상종의 원리 이상은 아닙니다. 이것을 마스터하고 지배할줄 안다면 거기서(카르마) 벗어나는 길에도 그렇지 못한 것보다는 한발짝 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마스터입니다. 마스터란 자기가 만든 현실은 자기가 만든다라는 다차원영혼의 연금술의 법칙을 알고 다룰줄 아는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다만 어둠에 봉헌하는 흑마술사가 될것이냐 신에 빛에 봉헌하는 백마술가 될것이냐죠. 최고의 마법사 중에 하나가 예수이며, 예수는 백마술의 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룬 이적에 대한 묘사들은 성경에서 대부분 삭제되었다고 하죠.그것을 갖다 속세에 돈이나 권력 이 물질적 세계에 차용하는 것도 사용자의 선택일뿐. 그 기법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없이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습니다. 지하철을 타는 것도 자동차를 타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할수가 없지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무엇해야 겠다는 심상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그리는 자기 이미지가 곧 현실이죠. 꿈이나 비젼 원하는 것이 없다면 걸어다니는 시체입니다.자동 로보트가 아닌이상 믿음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주어진 룰에 의해 산다고 하는 자는 그 주어진 룰을 믿고 있는 것일뿐입니다. 문제는 이 심상의 원리를 잘 다루고 어디에 사용할것인지 올바로 사용하는 능력이지 그 자체를 백안시하며 없애는데 있는게 아닙니다. 없앤다면 부정성을 겸험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거기에 따른 깨달음이나 기쁨을 알 기회조차 모를겁니다.


꿈이나 비젼을 품는게 나쁜것은 아닌데,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봉헌하는냐 이죠. 꿈이나 비젼을 품지 않고 타율의 기계적 룰에 자신을 맞기고 살아가는 그 또한 신이 주신 자신의 주권을 포기한 것이며 그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꿈이나 비젼을 통한 영혼의 원리를 어둠에 봉헌하는 것만큼이나 나쁜것입니다. 현재 우리 자신이 타율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어둠입니다. 우리자신이 어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죠. 3차원에선 의식적으로 취하는 행위를, 즉 실질적 과정을 않는 이상 빛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먼저 자유의지를 갖되 그것을 창조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자유의지를 갖지 않으면 복종할수도 없습니다. 버려야 할것은 허상으로 두려움과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크기의 추종 권력의 숭배 증오나 시기심 분노 집착등 부정적 에너지들이지 빛의 실체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 변화를 위해 앞으로 나가는 것이 곧 복귀입니다.


전쟁에 나가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환경과 공포 속에 산 귄환 병사들은 고향이나 민간인의 평화로움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보통 생활에 돌아오는데 적응을 하지 못하죠. 나를 좀더 학대해주고 좀더 통제해줘 더 큰 자극을 줘 거기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들에게 어떤 틀이 없이 스스로 서야 하는 감성이란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불안한 감이 들것입니다. 그 불안은 또 다시 자립한 자들에게 시기와 파괴와 공격성으로 이어지죠. 자립한자가 그들 눈으로 보면 무형의 것처럼 실체가 없는 것 보이거든요. 그러나 실체가 없는것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자유가 없는 그들입니다. 영혼에 대하여 이성과 논리의 주류과학의 철틀의 힘을 추종하는 기분이란 이런 것과 같은 겁니다. 모든 것은 무르익으면 부드러워집니다. 그들은 성장을 불평부당하게 나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하는 것으로 여기고 거부하는 응석받이 나약한 어린애와 같습니다.  영의 영역 끝없는 미지의 영역이 없으면 발전도 성장도 없습니다. 기술과학만 끝까지 추구하면 결국 자신외엔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시점에 다달으죠..그들에겐 겸손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타인에 오만하게 굴림합니다. 그들의 자유와 사랑이란 이기심외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자기 조건에 안맞으면 수틀리면 언젠라도 서로를 배신하게 될것입니다. 신에게서 떨어진 그 공포감이 언젠간 일을 낼 것입니다.영혼이 존재한다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이 지배할수가 없습니다.오로지 영혼을 창조한 창조주만이 가능하죠.


남들 다 슬픔이라는 과정을 거쳐 겸험하고 기쁨의 경지 행복의 보람에 이르는데 그것을 보며 진정으로 감동해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다차원의 종족의 진화 자체가 바로 이것입니다.(진화란 아베마나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통해서 신에 도달한느 것이 진화입니다) 그길은 행복이고 평화이고 기쁨의 세계인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