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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연재49] 악질친일주구 이도선부대 전멸한 대사하로 출발
항일독립주투쟁의 성지 연변조서족자치주를 가다(49)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09/07 [06:54]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9)

 

 

사진1. 토기점골 등판에서 바라본 광활한 백두대지

▲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한 안도현 토기점골 등판에서 바라본 광활한 백두대지. 바로 저 산발을 넘고 넘으면서 혈전만리 눈보라 만리를 헤치면서 피어린 항일무장투쟁을 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패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지난 장까지 동북만과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혁명투사들의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사령부인반일일민유격대》 창건에 대한 그 준비과정과 창건에 대해 수십여 차에 걸쳐 다루었다.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룬 것은 1932년 4월 25일 창건한 반일일민유격대는 항일혁명투쟁사 뿐 아니라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본 글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1926년 10월 17일 독립군간부 양성학교인 화전의 화성의숙 재학시절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한 한계성을 절감하고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높은 단계의 항일투쟁을 벌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8명의 동지들과 토의결정하고 조직한 《ㅌ · ㄷ》 이래 5년간에 걸친 피타는 노력의 결과로 드디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역사적인 반일일민유격대를 창건하였다.

 

반일일민유격대의 창건은 단순히 한 개의 유격부대가 창건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따라서 우리겨레 구성원들이 1930년 이후의 항일무장투쟁과정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사상적 토대는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하는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1926년말부터 1932년 4월 25일까지의 행적을 알아야만 한다해당 5년여 간에 걸친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행적은 곧 반일일민유격대》 창건 후 벌어진 항일혁명투쟁의 사상적토대가 되었으며,투쟁과정의 전략전술의 근본이 되었다.

 

이를 토대로 당시 세계 최강의 무력을 가졌다고 하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에 맞서 간고했던 항일무쟁을 가열 차게 벌일 수 있었으며 전투마다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다또 대사하전투와 로진창전투에서 다루겠지만 1930년 이후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벌인 반일일민유격대의 항일무장투쟁은 세계 공산주의혁명과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동아공연권의 망상에 사로잡혀있던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 한 다음에 만주를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대륙과 몽고시베리아를 침략하여 점령함으로서 대동아공연권의 완수를 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북아시아와 남아시아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바로 9 · 18만주사변을 빌미로 만주에 대하여 전격적인 침략을 단행하여 전광석화처럼 전 만주를 점령하였다일제는 여세를 몰아 몽고와 시베리아에 대한 침략책동을 벌였다.

 

바로 이와 같은 몽고와 중국내륙 그리고 소련의 영토인 시베리아에 대한 일제의 침략야욕을 저지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은 1932년 4월 25일 창건한 반일일민유격대를 사령부로 하여 가열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의 항일무장투쟁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몽고와 시베리아 침략야욕을 산산조각내고 말았으며 결국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패망으로 이끌었다이로 인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대동아공연권 실현의 야욕은 파탄이 나고 말았다.

 

당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나 단체 그리고 세계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의 혁명의 진지인 구소련을 보위하는데 있어 반일인민유격대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물론 소련이1917년 10월 혁명으로 사회주의체제를 세우고 공산주의 혁명완수에 전진을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의 집요한 방해책동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또 이전 독일의 파쇼히틀러집단에 의해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은 동쪽전선에 전력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따라서 당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에게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발목을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소련은 시베리아지대에서 곤경에 처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창건한 반일인민유격대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사 뿐 아니라 세계 공산주의혁명과 국제주의전사로서의 커다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독자들은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2015년 10월 16일부터 동만지역에 수없이 존재하는 항일무장투쟁전적지에 대한 답사노정을 따라 답사기를 연재하기로 한다또 해당 답사 유적지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들을 심층 비교분석하여 연재하도록 한다.

 

사진2. 1932년 당시의 소사하 무주촌과 현재

▲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하던 시기의 안도현 소사하 무주촌 전경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안도현 소사하 무주촌 현재의 모습이다.무주촌의 모습은 1932년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던 때나 현재나 거의 같은 모습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무주촌 김일성주석 가족들이 살고 있던 집터와 강반석 여사묘에 대한 답사

 

이창기 기자와 필자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한 유적지를 답사를 끝냈다그런데 현재 유격대 창건을 선포한 지역이 우리 민족의 강역이 아니다 보니 유적지에 대한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사실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비석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을 뿐 그 곳이 우리민족에게 역사적으로 어떤 큰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한 장소 바로 아래까지 개간되어 강냉이 밭과 인삼 밭으로 변해있었다한 발 더 나아가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데 사용하다 남은 용품들이나 수많은 농약병들 그리고 비닐봉지들이 널려있었다그 광경을 본 우리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창기 기자와 필자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마대자루 하나를 구해 사적지 주위에 수 없이 널려있는 쓰레기들을 주워 담았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없었다하지만 역부족인 걸 어찌 하겠는가마대자루 하나 가득 쓰레기를 주워 담는 것 이외 더 이상 쓰레기를 어쩌지 못하고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사진3사적지 주위의 쓰레기를 줍고 있는 필자

▲ 우리민족에게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으며, 민족사에서 위대한 의의를 가지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식을 선포한 안도현 토기점골 등판은 현재 우리민족의 지배력이 미치는 땅이 아니다 보니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이 창건을 선포한 바로 그 자리에 비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형편이다. 근처에는 중국인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쓰다 남은 각종 폐비닐, 비닐 자루, 종이, 종이상자(박스), 농약병 등 쓰레기가 무더기로 쌓여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산을 내려오면서도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길을 몰라 쉽게 내려오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헤매던 끝에 바로 아래 인삼 밭을 톺아 내려오기 시작했다다행히도 인삼은 이미 다 거두어들인 후라서 마음 편히 인삼 밭 가운데를 통해 하산하였다비록 밭으로 개간이 되기는 했어도 가파르기 이를 데 없었다또 인삼을 다 거두어들였다 해도 밭 두럭이 너무 높고 울퉁불퉁해서 내로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산 아래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인삼밭은 제법 넓었다인삼밭을 다 내려오니 바로 아래에 트랙터 길이 나 있었다길에서 멀리 떨어진 인삼밭 위에서 볼 때 그 길이 고르게 잘 닦여진 듯 보여 그 길까지만 가면 쉽게 산 아래로 내려가리라고 생각을 했었다하지만 막상 길에 도착하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트랙터가 다닌 길이라고 해도 움푹 움푹 파여진 곳이 얼마나 많던지 길을 따라 가는 길이 수월치가 않았다그래도 일단 길에 접어들었다고 하니 비록 우리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몰랐다고 하나 길만 따라가면 아래로 갈 수 있다는 마음의 안정은 찾을 수가 있었다.

 

길은 아래로 나 있지 않고 골짜기 서쪽에서 동쪽 끝 방향으로 수평으로 나 있었다얼마간 길을 따라 가니 그 곳에서 다시 아래로 쭉 뻗은 가파른 길로 변한다아래로 쭉 뻗은 길 양 옆으로는 수령(樹齡-나무의 나이)은 그다지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이깔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비록 수령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 광경이 장관이었다.

 

이깔나무 숲을 내려오면서 이창기 기자와 필자는 기념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4사적지 아래 이깔나무 숲 사이로 나 있는 길

▲ 토기점골 등판에서 조금 내려오니 울창한 이깔나무 숲이 시작된다. 기록을 보면 1932년 당시에는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등판 주위가 이깔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숲이었다고 한다. 울창하던 그 숲이 이제는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강냉이와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이깔나무 숲을 내려오고 있는 이창기 기자     © 이용섭 역사연구가

 

 

이깔나무 숲을 지나오니 또 다른 밭이 나온다역시 내려오기 쉽지 않은 길이다하지만 그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아서 크게 고생하지는 않았다곧바로 쭉 뻗은 평평하면서 곧게 뻗은 길이 나왔다우리가 그 길을 따라 백두대지의 기()를 받으면서 30여분 가량 내려오니 평지가 시작된다평지를 따라 약 15분 정도 오니 강냉이 밭이 나온다참고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필자가 어림잡아 추측한 바로는 약 90%정도는 강냉이 밭이었다밭의 강냉이들은 푸르름을 잊은지 오래되었고 산에 나뭇잎이나 풀잎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항일혁명사적지 답사를 갔을 때 10월 16일부터 10월 22일 사이였는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미 초겨울의 기온과 풍경이었다아침에 일어나면 거리의 물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쌀쌀했다같은 시기 조선반도 남쪽은 가을이 한창이거나 심지어 조선반도 남단은 늦여름의 기온과 풍경을 보였다조선반도 남쪽에서 우리가 답사를 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안도왕청등과는 기온과 계절 차이가 그렇게 크게 날 정도로 직선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하지만 그리 먼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두대지와 조선반도 남쪽은 기온과 계철이 뚜렷하게 구별이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그 강냉이 밭에서 토기점골 사적지로 오를 때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던 동남아시아계인 듯 한 젊은 부인이 땀을 흘리면서 강냉이 수확에 여념이 없다이미 본 연재 시작부분에 그 부인을 소개했는데 무척이나 친절하였다오를 때 비록 우리와 같은 겨레는 아니지만 조선족자치주에 살다보니 우리겨레가 지니고 있는 수준의 친절함과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뿌듯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 젊은 부인은 우리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낫으로 강냉이 대를 베어내리면서 우리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모른다동시에 현재 남쪽의 젊은이들을 대비시켜 보면서 가슴 한쪽이 무척이나 아프다남쪽에 사는 젊은 세대들은 우리민족의 친절하면서도 곱고 아름답고 순수했던 고유의 민족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필자가 수많은 나라들을 다녀왔지만 가장 만족스러운 여행이 바로 연변조선족자치주였다물론 같은 동북삼성이라고 하는 요녕성 심양대련을 포함하여 이곳저곳을 수십여 차례 다녀왔지만 그 곳에서는 그다지 친근감을 느꼈다거나 안온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하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여타 지역과 확실하게 달랐다그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필자가 다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곳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유일하다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솔직히 말 하면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비록 순간이지만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젊은 부인은 한 발 더 나아가 처음 보는 우리들을 자기의 집에 가서 물을 마시고 가라고 권한다괜찮다고 하는데도 기어이 가서 물을 마시고 가라고 강냉이 밭 바로 옆에 있는 자기의 집을 알려준다얼마나 고마움을 느꼈는지 모른다마치나 우리네 60년대의 친절함을 보여주는 듯 했다그건 바로 모든 사람은 나와 하나라는 사고가 아니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언행이다.

 

솔직히 당시 필자도 그렇지만 이창기 기자 역시 목이 전혀 마르지 않았기에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우리는 그 젊은 부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들러 물을 마시지 않고 그냥 내려왔다지나온 후 생각해보니 마시는 척이라도 해주는 것이 그 부인이 우리에게 배푼 친절과 호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사진5우리에게 친절함과 인간미를 보인 젊은 부인

▲ 등판에 올라갈 때에도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었던 동남아시아계인 듯 한 젊은 부인이 낫으로 강냉이를 거두어들이고 있다. 우리를 보더니 반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강냉이 밭 바로 옆에 있는 자기의 집에 가서 물을 마시고 가라고 권하였다. 참으로 친절하고 순수한 여인이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강냉이 밭을 지나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니 그 곳에 집이 몇 채가 있는데 그 동네 아주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마치나 우리 고향의 옛 풍경을 보는 듯 하여 얼마나 정겹게 느껴졌는지 모른다게 중에 아까 우리가 사적지를 갈 때 올라가는 길을 가장 먼저 물어본 아주머니도 있다그 아주머니는 조선족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그 아주머니 역시 우리를 보자 사적지를 잘 찾았으며 답사를 잘 했느냐고 물어본다우리는 아주머니에게 덕택에 잘 찾아가서 답사하고 내려온다고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우리가 사적지에 올라갈 때 연세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고 아래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했던 이송덕 선생님이 안계셨다하긴 우리가 헤어진 자리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 시간 이상이 흘렀으니 혼자서 그 곳에 기다리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송덕 선생님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우리가 하룻밤 묵었던 무주촌 동네로 내려왔다우리가 하룻밤 묵었던 김명규씨댁에 들르니 그 곳에도 역시 이송덕 선생님이 안계신다다시 동네 아래 큰 길로 오니 그 곳에 계신다이송덕 선생님은 우리가 사적지에 다녀오는 동안 무주촌에 거주를 하고 있는 조선족 어느 가정을 들리셨다고 한다그런데 이송덕 선생이 들렸던 집에 노인들이 사시는데 그 분들이 실제 전라북도 무주에서 일제강점기 안도현 무주촌으로 이주를 해온 분들이라고 알려주신다그리고 현재 무주촌에는 조선족 세 가구만 살고 있는데 모두 나이가 많아 늙은이들이라고 한다참고로 안도현 무주촌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무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송덕 선생님은 이제 소사하(송강)로 나가 차를 타고 대사하(영경)로 가자고 하신다이에 대해 이창기 기자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와 철주영주 두 동생 거주하던 집터를 답사하고 가겠다고 하였다이에 대해 이송덕 선생은 가봐야 집 자리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집터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그냥 가자고 하신다하지만 고집 하면 한 고집 하는 이창기 기자가 아닌가이송덕 선생의 권유에도 기어이 집터를 답사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이송덕 선생이 물러서고 말았다대신 이송덕 선생은 가지 않고 먼저 소사하로 가 있겠다고 하신다서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창기 기자와 필자는 무주촌 아래 조그마한 시내가 흐르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역시 이송덕 선생이 말 했던 대로 집터가 어디에 있었는지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아니 집터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어디에 있었는지 감도 잡을 수가 없다물론 대략 어느 곳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집터 바로 그 자리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집터가 있었던 자리로 보이는 곳 역시 강냉이 밭으로 변해있었다강냉이 밭 주인이 강냉이를 심고 가꾸기 위해 수십 년 간을 갈아엎었을 터이니 집터를 찾기는커녕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창기 기자와 필자는 이곳저곳을 한 30여분 찾아다니면서 이곳이 아닐까여기 돌들을 보니 여기인 것 같다느니 아니라느니 하였다그 중에서 구들돌들에 쓰여진 듯한 돌들이 약간 놓여있는 곳을 사진을 찍고 아쉬움을 안고 그 곳을 떠났다.

 

우리는 또 김일성 주석이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우리민족이라면 그가 누구이던 항일투쟁의 길에 함께 나서자는 반일민족통일전선》 실현을 위해 민족주의계열의 독립군지휘자인 양세봉 사령과 합작을 하기 위해 남만 원정을 떠난 사이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 강반석 여사의 묘역도 답사하기로 하였지만 현장의 사정이 허락지 않아 그 역시 이루지 못하였다결국 우리는 집터와 묘()터를 답사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이송덕 선생이 들려준 전설(傳說같은 이야기를 간단히 올려준다.

 

❝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고 새조국건설에 여념이 없었던 김일성 주석은 이제 조국도 해방이 되었으니 아버지 어머니의 묘도 조국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제의에도 그럴 여력이 있으면 이역 땅에서 항일혁명의 길에 희생된 동지들 하나라도 더 조국의 땅에 안장해야한다.”고 하면서 이장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1950년대 중반에야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 선생과 어머니 강반석 여사의 유해를 평양에 모셨다이 송덕 선생의 해설에 의하면 이때 안도현 소사하 무주촌에 있던 강반석 여사의 묘를 이장하고 난 후 묘 봉분 자리에 갑자기 개미떼가 엄청나게 모여들었다고 한다그 개미떼들은 이장해간 묘역 자리의 봉분을 이전전과 똑같이 만들었다무주촌 마을 사람들은 이를 신비(신성)하게 여겨 혹시 하늘의 뜻이 아닌가 하면서 그 묘 자리를 잘 가꾸고 보살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북에서 어차피 유해는 이장해갔고 묘역은 하나만 존재를 하는 것이니 이전의 묘 봉분에 대해서 더 이상 보살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 이후부터 그 봉분을 헐고 더 이상 보살피지 않았다고 한다.(2015년 10월 19일 연변조선족 항일무장투쟁사학자 이송덕 선생 증언록)

 

집터는 한 삼십 여분 이상을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대략 강냉이 밭 어디 정도에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만 하였으며 강반석 여사의 묘 자리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낮은 구릉에 있었다는 것만 짐작하면서 무주촌 답사를 모두 마치었다.

 

 

사진6강반석 여사와 두 동생이 거주하던 집과 현재 집터

▲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와 철주, 영주 두 동생이 1932년 초 흥륭촌에서 이사를 와 소사하 토기점골에 정착을 하여 살고 있던 당시의 집과 현재 집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는 곳. 지금은 개간이 되어 강냉이를 심는 밭으로 변해있다. 안타깝고 씁쓸하기 그지 없는 현실이다. 비록 초라하기는 하나 항일의 일념에 불타는 반일부녀회원들이 유격대 창건 후방사업과 반일지하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던 곳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와 철주, 영주 두 동생이 거주하던 소사하 옛 집자리로 추측되는 곳. 현재는 개간되어 강냉이를 재배하고 있다. 정확한 집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이용섭 역사연구가

 

 

여기서 강반석 여사가 거주하였던 가옥과 묘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간략히 보도록 한다본 내용에 대해서는 북측 자료에만 나와 있다.

 

❝ 유격대의 군복은 가둑나무 물을 들인 록색천으로 지었다왼쪽가슴에는 다섯모가 난 붉은천을 오려붙이고 거기에 중대번호를 써넣었다군모에는 붉은별을 달기로 하였으며 다리에는 흰 행전을 치기로 하였다유격대창건의 마지막세부작업이라고 할수 있는 복장제도를 하나하나 마무리지어나가기란 참으로 가슴흐뭇한 일이였다.

우리가 진지하게 토의하고 결정한 복장제도에 따라 부녀회원들이 떨쳐나서 군복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부녀회원들과 함께 온갖 정성을 기울여 군복을 마르기도 하고 재봉침을 돌리기도 하였다.(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

나는 집에 나와 길떠날 차비를 하였다.

내가 신발끈을 매고있을 때 어머니는 고리짝밑에서 5원짜리 지전 넉장을 꺼내여 나에게 주었다.

객지생활을 하느라면 돈을 써야 할 때가 많겠는데 이걸 건사해라남자의 주머니에는 정 급할 때 쓸 돈이 있어야 한다청나라말기에 손중산선생이 외국대사관감옥에 갇혔을 때에 두 소제부한테 돈을 몇잎 쥐여주고 빠진 일이 있었다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지 않더냐.

정작 돈을 받아들었지만 손이 떨려서 주머니에 집어넣지 못하고 어떻게 할바를 몰라 망설이였다그 돈 20원에 얼마나 큰 어머니의 로고가 깃들어있는가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손가락끝이 모지라지도록 삯빨래도 하고 삯바느질도 해서 푼푼히 저축해둔 20원의 돈소 한짝에 한 50원정도씩 할 때였으니 그만한 돈이면 중소 한마리는 살수도 있었고 쌀을 사서 세 식구가 일년은 살아갈수도 있었다.

나는 마치 그 돈의 무게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기나 한것처럼 비척거리면서 토방밑에 내려선 다음 어머니다녀오겠습니다안녕히 계십시오.라고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를 하였다그 순간에 내가 명심한것은 나의 인사가 다른 때와 류다른 점이 있어서 어머니를 울리게 해서는 안되겠다는것이였다그래서 될수록 표가 나지 않게 보통때와 다름없이 범상하게 인사를 하였다.

어서 떠나거라아무래도 갈길인데.

어머니는 병색이 짙은 얼굴에 미소를 애써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내가 걸음을 내디디였을 때 뒤에서 방문 닫기는 소리가 났다나는 걸음을 내짚었다그러나 나의 걸음은 동구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둘레를 돌기 시작하였다손에는 돈 20원이 그대로 쥐여져있었다한바퀴를 돌고 두바퀴를 돌고 세바퀴를 돌고

그 길지 않은 시간에 내 머리에는 온밤 내 마음을 휘여잡고 놓아주지 않던 복잡한 상념의 쪼각들이 구름처럼 피여올랐다내가 이 마당에 다시 들어서게 되는 날은 언제쯤 될가?과연 내가 지금 승산이 내다보이는 길을 가려고 하는가내가 가는 앞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있을것인가그사이 어머니의 병이 호전될 가망은 있을가?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 집둘레를 속절없이 돌고있을 때 어머니가 문을 열어제끼며 준렬하게 나를 꾸짖는것이였다.

상기두 무엇이 걱정돼서 그렇게 떠나지 못하구 우물쭈물하느냐나라를 찾겠다구 결심품구 나선 사람이 그렇게도 마음이 예리고 집걱정이 많아서야 어떻게 대사를 치르겠니.너는 집안일을 걱정하기전에 먼저 감옥에 계시는 삼촌을 생각하구 외삼촌을 생각해야 한다빼앗긴 나라를 생각하구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왜놈들이 나라를 강탈한지도 벌써 스물두해가 되여오는데 너두 조선의 사내라면 맘을 크게 먹구 걸음을 크게 떼야 할게 아니냐네가 장차로도 이 에미걱정때문에 집으로 찾아올 생각이라면 아예 이 문앞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나는 그런 아들은 만나지 않겠다.

어머니의 말씀은 마치 천둥소리처럼 내 가슴을 세차게 울리였다.

어머니는 그 몇마디의 말씀에 기력을 다 소모해버린것처럼 문설주에 머리를 기대고 정과 열과 노여움이 엇바뀌는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계시였다어쩌면 천리를 걸어 팔도구에 도착한 날 밤 하루도 재우지 않고 그달음으로 림강에 가라고 떠밀어보내던 때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그런 모습같기도 하였다.

나는 아들로서 그처럼 의에 불타고 열로 빛나는 강직하고 숭고한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어머니는 온몸에 불붙는 그 의와 열로 하여 순식간에 재가 될것 같은 형상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에 대하여 잘 알고있다고만 생각하였다그러나 어머니의 기개와 넋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할 그런 경지에서 나를 굽어보고있었다.

그때의 모습은 차라리 어머니라기보다도 스승에 가까운 모습이였다참으로 훌륭한 어머니고마운 어머니를 모시고있다는 자랑으로 하여 나는 가슴이 터져나갈것만 같은 행복감을 느끼였다.

어머니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깊숙이 숙이였다그런 다음 동구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래목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느고나서 고개를 돌리니 흰옷을 입은 어머니가 문설주를 짚고 나를 지켜보고계시였다그것이 내 눈에 비쳐든 어머니의 마지막모습이였다저 섬약한 육체의 어느 구석에 이 아들의 가슴을 그렇게도 드세게 흔들어준 고결하고 강의한 넋이 깃들어있을가저렇게 훌륭한 어머니의 몸이 병마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이 아들은 지금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고있겠는가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십수백번 체험하게 되는 그런 범상한 작별이 아니라 내 한생에 가슴아픈 추억을 남겨놓은 두번다시 돌아오지 못할 영별이였다나는 그후로 어머니를 다시 만나뵙지 못했다.

몇달이 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였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머리에 맨 처음으로 떠오른것은 마지막작별의 순간에 더 따뜻한 말을 해드리지 못한 회한의 감정이였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런 감상적인 리별은 바라지 않았으니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은것만은 사실이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그 준엄하고도 시련에 찬 길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검열하는 그런 곡경에 처할 때마다 나는 그 어떤 리념이나 철학적명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를 남만으로 떠밀어보내면서 어머니가 하던 말씀과 흰옷을 입고 나를 바래주던 어머니의 마지막모습을 회고하며 의지를 가다듬군 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은 탄생마지막 모습 중에서

 

위 사진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혁명가들의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와 철주영주 두 동생이 거주하던 집은 당시 가난에 찌들어 살던 조선의 일반 백성들이 살고 있던 집보다도 더 초라하다.

 

그리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이지만 그 안에서는 반일 · 항일의 굳은 신념을 가진 조선여성들의 투쟁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소사하 무주촌 집에서는 강반석 여사가 조직하고 지도하던 반일부녀회원들이 모여서 반일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인용문에는 짧게 인용되었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 당시 반일부녀회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없는 조국사랑과 반일감정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사실 요즈음 같이 옷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는 기계들이 발달되어 있는 세상에서도 수백 여벌의 군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재단사재봉사다림질사,완성 등의 흐름식으로 옷 만들기를 해도 수백 벌의 군복을 만들자면 적어도 20여 명의 재봉사가 있는 공장에서도 한 달 가까이 걸린다그런데 1932년 초 당시 가장 좋은 재봉기라 해도 손으로 돌리면서 옷을 꿰 메는 정도의 재봉기밖에 없었다추측하건데 인용문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유격대원들을 입히기 위해 군복을 만들 당시 수동식 재봉기는 한 대 정도 많아야 두 대를 넘지 못하였을 것이다비록 손으로 돌려가면서 꿰 메는 재봉기라고 할지라도 당시에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였다.

 

결국 수백 벌의 유격대군복을 대부분 손으로 작업을 해서 만들었던 것이다또 당시 무주촌의 사정을 감안하면 군복을 만드는데 참여한 부녀회원들 많아야 2~30여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2~30명 정도의 인원이 수작업으로 수백 벌의 군복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즉 군복을 만드는데 참여한 부녀회원들은 하루에 적어도 20시간 이상 작업을 해야 유격대창건일까지 작업을 마칠 수가 있다이것은 단순히 군복을 마름질(재단)하고 꿰 메고 다림질 하여 완성하는 작업과정만을 본 것 이다.

 

그런데 인용문을 보면 군복을 만들 천에 가둑나무 물을 퍼렇게 들였다고 나온다결국 당시 유격대원들 군복을 만들기 위해 염색이 다 된 천을 사다가 만든 것이 아니고 흰 천을 구입해서 퍼런색의 가둑나무 물을 들여 군복지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필자 개인적인 소개를 한다면 역사를 연구하기 전까지 의류를 수출하는 회사 해외영업부에서 미국과 유렵담당으로 오랫동안 근무를 했다그래서 전문기술자는 아니지만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전 과정 즉 방적(실을 만들어내는 것)부터 마지막 옷을 만들어 포장을 하는 부분까지 훤히 꿰고 있다옷을 만든다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쉽지 않다최첨단 현대화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 옷을 만드는 것이다자동화도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재봉기를 사용해서 바느질을 한다좀 주제가 다른 것 같지만 필자가 비록 옷 만드는 업계를 떠났지만 힘들게 일을 하고 있을 노동자들을 생각하면서 바느질부분에 자동화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본다하지만 재단부분이나 완성부분 또는 부속품 제작에서는 자동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나 바느질 전부분에 대한 자동화는 아직까지 어려울 것으로 본다현대사회 공업에서 자동화가 가장 뒤쳐진 부분이 바로 옷을 만드는 분야이다그건 그만큼 옷을 만드는 과정이 간단한 것 같지만 가장 어렵다는 걸 말 해주는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1932년 초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시 유격대원들이 입을 군복 수백 여벌을 부녀회원들이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요즈음 시절 같으면 그 짧은 시간에 수작업으로 군복지 염색과정부터 시작해서 그 많은 군복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필자가 주제와 벗어난 듯한 글을 올렸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1932년초 당시 부녀회원들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서 군복을 만들었는지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이건 결국 당시 반일부녀회원들의 투철한 혁명정신과 반일독립정신이 있었기에 그 짧은 기간에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시 유격대가 입을 군복 만들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투철한 혁명정신과 반일독립정신이 바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즉 강반석 여사가 거주하고 있던 초라한 집은 그 어떤 대궐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혁명과 항일의 꽃을 피워낸 역사상 화려하기 그지없는 집이었다.

 

인용문에서 또 하나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극히 인간적인 효성(孝誠)과 조국과 인민을 위한 조국해방투쟁과 혁명의 길에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흔히 혁명을 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사적 감정을 앞세워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한다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개인적인 사적 감정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필자가 보기에 그들은 이분법적 논리의 모순에 빠져있기에 그런 주장들을 한다고 본다필자는 인간 삶이 결코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인간의 사적 감정과 사회적인 공적 활동은 결코 선차를 따질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이다사적감정이 앞이냐 사회적 혁명성이 앞이냐의 문제는 결국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아래에서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분석하면서 또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나의 사적 욕구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 그것은 결코 사적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범죄이다이를 오도하거나 혼동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인용문에서 말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하면 될 것이다즉 범죄가 아닌 지극히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심(孝心그건 곧 혁명의 불길을 더욱더 활활 타오르게 하는 정신적 토대가 된다혁명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사랑하는 우리 가족우리나라 백성들 모두를 위해 외세와의 투쟁도 하고 내적 혁명화도 하는 것이다우리는 인용문에서 이러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즉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적 감정과 혁명과 항일투쟁은 절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문의 내용 중에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그 어떤 효를 다해도 갚지 못할 어머니의 은혜가 뼈 속 깊이 새겨져 있기에 수척해진 어머니를 남겨 두고 가야할 혁명의 길이지만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초가집 주위를 십여 차례나 빙빙 돌면서 선뜻 떠나지 못하고 있다이 부분만 보면 혁명가의 나약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혁명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혁명가가 아니다집안 일을 위해 갓 창건한 반일인민유격대의 남만원정을 어떻게 일분일초라도 머뭇거리겠는가라는 것이 혁명가에 대한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극적 반전을 이루고 있다수척하신 어머니를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지도자의 행위에 대해 어머니께서 아래와 같이 준열히 꾸짖고 계신다.

 

상기두 무엇이 걱정돼서 그렇게 떠나지 못하구 우물쭈물하느냐나라를 찾겠다구 결심품구 나선 사람이 그렇게도 마음이 예리고 집걱정이 많아서야 어떻게 대사를 치르겠니.너는 집안일을 걱정하기전에 먼저 감옥에 계시는 삼촌을 생각하구 외삼촌을 생각해야 한다빼앗긴 나라를 생각하구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왜놈들이 나라를 강탈한지도 벌써 스물두해가 되여오는데 너두 조선의 사내라면 맘을 크게 먹구 걸음을 크게 떼야 할게 아니냐네가 장차로도 이 에미걱정때문에 집으로 찾아올 생각이라면 아예 이 문앞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나는 그런 아들은 만나지 않겠다.”

 

인용문을 보면 조화와 균제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논리적 모순이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그 논리가 대단히 정연하게 균형을 맞추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지극한 효성(孝誠)을 발휘하는 사적 감정과 그 아들을 준열히 꾸짖으면서 과감하게 조국해방투쟁과 혁명의 길에 나서라고 등을 떠밀어 주는 어머니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사랑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인용문을 이해하게 된다면 각자의 사람들에게는 왜 조국이 있어야 하며 혁명은 왜 해야 하는지를 짧지만 완벽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본다즉 모든 사람들이 귀중한 존재이기에 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필요하며그 삶의 터전에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주어져야 한다그건 곧 모든 이들에게는 조국이 있어야 하며 혁명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해주고 있는 인용문의 내용이다.

 

 

사진7강반석 여사의 무주촌(토기점골

▲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의 길에서 반일의 길에 나선 사람이나 단체라면 그가 누구이던 손잡고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해 양세봉 사령이 이끌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군과 반일민족통일전선을 맺을 목적으로 남만원정을 떠났다. 남만원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안도현 양강구에 돌아와 잠시의 여유를 가지고 소사하 무주촌 집을 찾아갔지만 그 사이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께서는 세상에 계시지 않으셨다. 남만원정 시 이미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를 모셨던 묘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이제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진정한 혁명가는 어떤 인간적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도록 하자.

 ❝ 우리 부대가 소사하를 떠나 남만원정의 길에 오르던 그때로부터 넉달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량강구의 강하와 산야에는 하루가 다르고 이틀이 다르게 가을빛이 짙어갔다밤을 자고 나면 여기저기에 락엽이 깔리고 그우에 서리가 내려 미구에 닥쳐올 대륙의 사나운 겨울을 예고해주었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차지니 은근히 병상에 계시는 어머니가 걱정되였다그러나 생각뿐이였지 소사하에 다녀올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나는 토기점골을 다녀오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어머니와의 상봉을 계속 뒤로 미루었다.

북만으로 출발할 날자가 박두해오자 차광수는 나에게 어디서 구해들였는지 알수 없는 첩약꾸레미를 가져다주면서 토기점골에 다녀오라고 권고하였다내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김성주답지 않다고 비난하면서 우리 대장이 자기 어머니도 몰라보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말도 걸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여 나는 소사하로 떠나게 되였다.

첩약을 들고 가면서도 걱정되는것은 어머니가 이 약을 보시면 또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쓴다고 꾸짖지나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그러나 차광수가 구해보내는 약이라고 하면 어머니도 기뻐하실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가 소사하에 있을 때 사가지고 간 좁쌀 한말은 벌써 거덜이 난지도 오랬을것이였다어머니가 일을 못하시는 형편이니 지금은 무슨 돈으로 어떻게 가계를 유지해가고있는지어머니는 산 사람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어머니나 동생들이 없었던 셈치고 집생각을 말라고 오금을 박았지만 사람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나 동생들을 잊고 집생각을 하지 않는다는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는것은 아니였다.

그리 무겁지도 않은 첩약꾸레미를 들고 덜렁덜렁 집으로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어째서인지 소사하가 가까와지자 점점 더 무거워지는것이였다.

……

나는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가슴을 조이는 불안스러운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토기점골의 낯익은 외나무다리를 건느면서도 그런 생각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내가 그 외나무다리를 건늘 때면 매번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문을 열어젖히군했었다어머니에게는 자식들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그것이 몇번째 아들인가를 가려내는 특별한 감각이 있었다그런데 그날만은 예상외로 문도 열리지 않았고 굴뚝에 저녁밥을 짓는 연기도 오르지 않았으며 땔나무나 구정물버치를 들고 부엌문으로 들락날락하는 동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심장의 피가 일시에 얼어드는것 같은 불안과 긴장감을 느끼며 가까스로 문고리를 잡아당기였다그리고 문을 열기 바쁘게 토방돌우에 그대로 주저앉을번하였다어머니의 침상이 있던 자리가 텅 비여있었던것이였다내가 그만 걸음이 늦었구나 하는 후회가 번개같이 머리를 치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철주가 소리없이 다가와 내 어깨에 왈칵 매여달리였다.

왜 인제야 오우?

동생은 몸부림을 치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나의 가슴에 마구 비비였다그리고는 목갈린 소리로 어린애들처럼 엉엉 울었다.

이번에는 영주동생이 돌덩어리처럼 난데없이 날아들어 나의 왼쪽옆구리에 매여달리였다.

나는 토방돌우에 첩약꾸레미를 떨어뜨리며 통곡하는 두 동생을 으스러지게 그러안았다.그들의 울음소리가 모든것을 죄다 설명해주고있었으니 어머니의 생사여부에 대해서는 더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어쩌면 내가 없을 때에 이런 불행이 생길수 있단말인가림종의 마지막순간에 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볼 모성의 마지막행복마저 우리 어머니에게는 차례질수 없었단 말인가가난속에 태여나 일생을 가난으로 살아오신 어머니수난당한 내 나라의 비운을 생각하여 남편의 희생앞에서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던 나의 어머니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의 행복을 위해서 한평생 온 넋과 육신을 깡그리 바치다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이 아들이 사사로운 인정에 빠져서 큰 일을 그르칠가봐 늘 념려하시더니 혁명하는 아들에게 짐이 된다고 어머니는 그렇게도 서둘러 눈을 감으신것이나 아닌가.

……

일생을 바쳐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오신 어머니인데 그 품에서 자라난 자식들에게는 림종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곁에서 머리를 빗어드릴 효성마저 없었단 말인가.

……

나는 불효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내가 도대체 스무살이 넘을 때까지 어머니를 위해 해드린것이 무엇인가어렸을적에는 어머니에게 따뜻한 아래목도 권하고 우물터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언손을 입김으로 녹여드리기도 하였다아침이면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고 하면서 닭모이도 주고 초롱으로 물을 퍼다 드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혁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머니를 위해 해드린것이 별로 없었다내리사랑은 있어도 올리사랑은 없다고 한 옛 사람들의 말은 바로 나를 념두에 두고 지어낸 명제일지도 모르겠다올리사랑이 없다고 한 말은 참으로 현명한 말이다나는 아직 자식들에게 바치는 부모들의 사랑을 릉가하는 그런 효성으로 부모들을 섬기고 모신 자식들이 있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그달음으로 어머니의 묘소에 찾아갔다.

느릅나무고목이 외따로 서있는 언덕받이 한옆에 수박무늬 모양으로 떼장을 덮은 어머니의 묘소가 있었다.

나는 군모를 벗어쥐고 두 동생과 함께 묘앞에 절을 드리였다.

(어머니성주가 왔습니다불효막심한 이 아들을 용서해주십시오남만에 갔던 걸음이 늦어져서 이제야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땅우에 주저앉아 이런 속대사를 하고있을 때 철주가 느닷없이 묘우에 엎드려 손으로 떼장을 우벼내였다.

뭘 그러고있느냐?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주는 대답대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량강구에서 내가 가지고 온 첩약봉지들을 봉분밑에 무데기로 파묻는것이였다.

동생의 그 말없는 행동이 그만 내 가슴에 연기처럼 서려있던 비애를 사정없이 건드려놓고야 말았다나는 봉분우에 엎드려 오래도록 서럽게 울었다혁명가로부터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온것이다.

지상만물이 그 무덤 하나로 응결되고 세상만사가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하나의 비극으로 압축된것같은 순간이였다그러나 머리우에서는 푸르디푸른 가을하늘이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명랑하게 대지를 굽어보고있었다어쩌면 저 하늘이 우리의 슬픔앞에서 저렇게도 태연할수 있을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그것은 망국의 년륜이 스물두돌기나 감긴 1932년의 음산한 여름에 있었던 비극이다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좀더 오래 이 세상에 살아있었을것이다어머니의 병은 고생끝에 생긴것이였으며 그 고생은 망국의 시운이 빚어낸것이였다.

자식들을 위해 바친 어머니의 로고는 참으로 헤아릴수 없었다내가 어머니를 위해 기울인 효성이 열이라면 어머니가 나를 위해 부은 사랑은 천이나 만으로도 헤아릴수 없을 것이다.

……

내가 무장투쟁을 할 때 적들은 우리 부모들의 묘소를 파헤치려고 무던히도 검질기게 돌아쳤다그러나 무송과 안도의 인민들은 해방되는 날까지 적들의 눈을 속여가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묘를 성실하게 지키고 관리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소사하의 가을 중에서

 

 

인용문에 나와 있는 양강구 역시 안도현에 있는 고장이다양강구 하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우사령과 담판을 극적으로 성공시킨 것으로 유명한 중국 민족주의계열의 반일 구국군부대 우사령부대가 주두하고 있던 곳이다.양강은 소사하에서도 갈 수 있지만 현재 나 있는 도로를 따라가자면 많이 애 돌아 가야한다반면 대사하(영경)에서는 애돌지 않고 직접 갈 수 있어 소사하에서 가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

 

남만원정을 마친 반일인민유격대는 바로 그 양강에 도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다혁명동지들은 그 잠깐의 휴식기를 이용하여 조선의 젊은 지도자를 어머니에게 가라고 떠밀어 준다그것도 병고로 시달리고 있는 지도자의 어머니를 위해 몰래 첩약(우리 전통약재를 얇은 종이에 싸서 넣은 것)을 준비해주면서 그 어려운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길에 나선 지도자의 마음을 헤아려 떠밀어준 것이다그렇다 바로 이러한 마음들이 바로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혁명정신인 것이다이러한 정신은 필자가 우리역사 이야기에서 다루었던 우리겨레의 사상정신적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용문의 내용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 어떤 비바람 천지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항일투쟁과 혁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항일의 길에 나선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의 지도자이면서 당시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조국해방염원에 대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지도자가 가져야 할 인성과 품성이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항일투쟁을 한다하여혁명을 한다하여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건 절대로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용문은 말 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인용문의 내용은 꾸며진 가상의 내용도 아니고 각색된 소설을 극화한 것도 아니다당시 항일투사요 혁명가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실재 겪었던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지극한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 바로 투철한 항일투사로 혁명가로 나갈 수 있는 힘인 것이다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핍된 영웅호걸은 깊은 의미에서 진정한 영웅이 아니다.

 

필자가 우리역사 이야기에서도 끊임 없이 다루었지만 우리겨레에게는 삼신사상(三神思想즉 부모에게 끝없이 효도하고(), 스승을 한 없이 높이 받들고(), 임금(나라)께 무한이 충성()하라는 얼과 넋이 유전적으로 물려져 내려오고 있다()와 존(그리고 충()은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이 되며 국가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토대가 된다이는 모든 사회변혁과 굳은 혁명정신을 가져올 수 있는 근본이기도 하다바로 인용문은 이와 같은 지도자의 얼과 넋이 발휘되고 있는 최상의 상태를 전해주고 있다.

 

아래 인용문을 보면 인간이 가져야 할 근본이 무엇인지를 말 해주고 있다아래와 같은 인간품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혁명을 부르짖고 사회변혁을 부르짖는다 해도 그건 가식일 뿐이라고 필자는 받아들이고 있다아래와 같은 인간본성은 바로 혁명의 씨앗이라고 본다.

 

일생을 바쳐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오신 어머니인데 그 품에서 자라난 자식들에게는 림종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곁에서 머리를 빗어드릴 효성마저 없었단 말인가.

……

나는 불효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내가 도대체 스무살이 넘을 때까지 어머니를 위해 해드린것이 무엇인가어렸을적에는 어머니에게 따뜻한 아래목도 권하고 우물터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언손을 입김으로 녹여드리기도 하였다아침이면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고 하면서 닭모이도 주고 초롱으로 물을 퍼다 드리기도 하였다.”

 

인용문의 내용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을 연상해본다남측 사회도 60년대까지만 해도 인용문의 내용과 똑같이 지극히 인간적이고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살았었다.물론 잠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운 감정이 솟기도 하지만 그런 사악한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순간 봄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사회는 오로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 존재했었다위 내용을 보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일투쟁의 길에 나섰으며 간고한 혁명을 길을 걷기 시작한 지도자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이다필자가 우리민족사 뿐 아니라 세계사의 영웅호걸집을 수도 없이 접했지만 인용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대부분이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거나 뛰어났기에 보통 아이들과 다른 줄충한 삶을 살았다고 기술되어 있다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용문의 내용이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고 본다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그 깊은 내면에 담겨져 있는 본성 즉 인간 사랑을 담고 있다.

 

인용문을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혁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머니를 위해 해드린것이 별로 없었다내리사랑은 있어도 올리사랑은 없다고 한 옛 사람들의 말은 바로 나를 념두에 두고 지어낸 명제일지도 모르겠다올리사랑이 없다고 한 말은 참으로 현명한 말이다나는 아직 자식들에게 바치는 부모들의 사랑을 릉가하는 그런 효성으로 부모들을 섬기고 모신 자식들이 있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인용문의 내용은 우리민족 구성원들이라면 부모세대들로부터 안 들어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물론 요즈음 젊은 부모들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인용문과 같은 내용을 전해주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하지만 위 내용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우리민족이 존재하는 한 대대손손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진리이다결코 서양의 속담이나 구전들이 우리 조상들의 것보다 우수하지 않다.

 

부모에 대한 끝없는 효행(孝行)과 효도(孝道)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그 효(속에 자식사랑도 있고 이웃 사랑도 존재하는 것이다또 그로부터 사회와 나라에 사랑 즉 충()이 나오는 것이다(→ (→ ()은 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이다결국 인간 삶에 있어서 모든 행위는 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이는 근대사회 들어와서 불길처럼 타오른 혁명화의 근본이기도 하다.

 

필자가 인용문을 길게 인용해준 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바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혁명투사들의 지도자가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인간근본의 도덕품성을 갖추었기에 15년여에 걸친 간고했던 혈전만리(血戰萬里)》 《눈보라 만 리의 길을 헤치고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용문에서와 같은 인간의 기본이자 근본인 인간사랑의 도덕품성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혁명가라고 본다우리가 인용문의 내용을 읽으면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가 있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그 속에는 인간 삶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항일무장투쟁도 혁명도 모두 인용문에서 기술하고 있는 도덕품성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대사하 사적지 답사를 위해 대사하로 향하다

 

무주촌 답사를 마치고 우리는 차편이 없기에 걸어서 송강(소사하구 안도현성)까지 가기로 하였다필자 역시 마찬가지지만 요즈음 남쪽 사람들은 육체적인 움직임이 너무 없다 보니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우리도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십 여리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걸어 다니곤 했다아니 오히려 그 정도의 거리를 차를 타고 다니면 배부른 집 사람 행세한다고 소리를 듣곤 했었다하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이동수단에 의존하다보니 몸으로 움직이는 것을 너무나도 힘들어 한다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차를 타고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걸어서 나오니 무주촌에서 송강까지 보통 먼 거리가 아니었다아마도 3km는 족히 되는 듯 했다걸어 나오는 중에 우측 산 졀벽에 대규모 현무암층이 있었다예전에 무주촌 사람들이 이 곳에서 돌을 가져다가 구들을 놓았다고 한다.아무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조선반도 남쪽과 백두산 동북부지대인 안도현의 지형지세나 산세 등이 너무나도 다르다.

 

백두대지는 펑퍼짐한 들이 계속되면서도 산이 있고산이 깎아지른 듯 우뚝 우뚝 솟아있지는 않는 듯해도 어디를 가면 또 사람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수직으로 된 산세가 펼쳐져 있다반면 수직으로 된 깎아지른 산세 반대편은 펑퍼짐한 들이다그 곳은 산이 아니라 들판이기에 개간을 하여 강냉이를 심은 밭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이와 같은 대지는 필자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신비한 지세였다아마도 백두대지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약 20여 분 정도 송강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지프 한 대가 무주촌 방향에서 나온다우리가 손을 들어 태워달라고 하니 선뜻 태워준다운전자는 중국의 공안원복장을 한 젊은이였다차로 한 7~8분여 달리니 송강에 도착을 한다우리가 그 운전자에게 태워다 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차비를 주겠다고 하였다그 운전자는 곧바로 우리가 한국에서 온 사람들 같은데 기념으로 보관을 할 수 있도록 한국 돈이 있으면 액수에 상관없이 주는 것이 어떤가 하고 제안을 한다그 운전자는 눈치가 대단히 빠른 듯하였다우리가 한국 돈이 있나 봤더니 다행히도 나에게 천 원짜리 두 장이 있어서 그걸 주었더니 고맙다고즐거운 여행 되라고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아무튼 연변조선족자치주 사람들은 조선족이건 한족이건 아직까지는 매우 친절하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송강에 도착하니 이송덕 선생이 길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던지 몸 둘 바를 몰랐다우리가 송강에 도착한 시간은 벌써 오후 1시가 넘었다.이송덕 선생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대사하(영경)로 향하였다.

 

 

 

☞☞☞ 대사하(영경답사기 계속 된다☜☜☜

 

다음 회 차에는 최현 항일투사가 이끌던 조선인민혁명군이 벌인 흥미진진한 대사하 전투,악질 친일주구 이도선이 이끌던 신선대가 전멸한 로진창(로금창)전투 그리고 김정숙 여사가 김일성 주석을 일본군들의 총탄으로부터 구해낸 것으로 유명한 대사하치기 전투를 다룬다독자 여러분의 계속적인 지지와 많은 관심 바랍니다.

 

 

자료제공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이 창기 기자

 

2016년 9월 5

 

이용섭

 

분류 :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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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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