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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독립문과 서재필동상은  
매국노와 부왜역적의 상징물 !!


광복6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 4거리에 있는 소위 독립공원을 찾았었다.
거기에는 친일파거두이며 매국노의 수괴인 이완용이가
“독립협회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기공식을 거행하였었고 /“독립협회회장”으로써 준공식 행사를 하였었으며 / 또 자신이 친히 썼다는 “독립문”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어, 청일전쟁에서 승전한 대일본제국주의를 경축하고 기념하였었다는 “청일전쟁대일본제국의 승전개선문”이, 「항일독립운동의 의지를 모은 “독립문”」이나 되는 것처럼 온 국민을 속이며 서있고..
부왜역적의 대표적인 살인반란수괴이며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최초국적이탈자가 되었던 민족배신자로써.. 일본대사관과 일본해군의 보호를 받으며 조국을 도망쳤다가, 일본과 미국을 거쳐 가짜박사 1호가 되어 돌아온 바가 있었던 미국국적을 가진 미국인 돈 벌래 ‘필립 제이슨’(舊名 서재필)이란 자의 동상이 손을 번쩍 들고 버티어 서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 버렸던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원혼들이 어두컴컴한 서대문형무소의 감방으로부터 나오지 못하도록 지금도 지키고 있음을 보았다.

                                        - 한민족정통사상사연구소장 김정권


머리말

용서를 전제로 하는 과거사의 정리는 역사의 진실을 확인한 후에라야 가능하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면서 적당히 꾸며대는 화해는 국민을 조롱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정치적 기만에 불과하며 국가기반을 사상누각으로 변질시켜 허물어뜨리는 미봉책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반민족 반국가적 배신의 상징물을 애국적 의미의 역사현장에 끼워 넣어 얼버무려 놓고, 역사의식이 어린 후손들에게 매국노와 부왜역적들을 조국광복을 위해서 산화하신 애국자인 냥 착각하게 하면서 단순한 공원의 구경꺼리로 만들어버린 독립공원을 진정한 역사교육의 체험교육장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실역사를 기반으로 재정비하고 그 명칭도 “광복공원”으로 개칭한다면 광복60년이 지나서라도 이제 역사광복의 시발이 되어 질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하고자 한다.


독립공원조성의 숭고한 목적

   독립공원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의 침략과 강점에 맞서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구속당하고 고문당하였으며 기꺼이 순국하셨던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면서 후손들로 하여금 견학을 통하여 애국심과 자주독립정신을 되새겨보도록 하기 위해..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 터의 현장을 보전하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국에 대한 애착이나 연민의 정마저도 없었던 사사욕망(死士慾望)의 부왜역적(附倭逆賊)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과,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게 하였던 자들과, 방방곡곡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항일의병들을 신고체제를 통하여 제거하고 의병을 비도(떼도적)로 매도하면서 친일민심을 오도하였던 독립신문관계자들과..
급기야는 명성황후까지 살해하여 국정혼란을 가중시킨 국모살해연루자들이 중심이 되어, 청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에 대하여 경하하면서 제2의 갑신반란(戰略的韓日合邦)을 꾸미기위한 민중조직화작업으로 출범하였었던 110년 전의 친일 ”독립협회기념공원”으로 기획되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다 공원의 이름마저 청일전쟁일본승전기념개선문을 세웠던 친일“독립협회”의 명칭을 딴 “독립”을 넣어서 “독립공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로는 독립협회회장 이완용이가 한일합방의 주인공이며 매국노였다는 사실과 필립제이슨(舊名서재필)이 부왜역적이며 살인수괴였다는 사실을 슬쩍 감추고는 오히려 조국광복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3.1독립선언서낭독사건의 민족대표들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게 함으로써..
숭고한 항일독립투사들의 정체성까지 일본을 위한 독립, 일본에 의한 독립, 일본을 중심으로 한청일(大韓+靑+日本)의 3국이 하나 되게 하려했던 독립운동으로 왜곡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치에는 정치적 권모술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교육을 시키고자하는 서대문형무소의 현장에서 선열들의 넋을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기만하는 이런 짓거리로 테마공원을 꾸몄다고 하는 것은 서울의 부끄러움이며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될 대국민속임수인 것이다.


왜, 독립과 광복이 다른가?

   국어사전은 독립(獨立)이란 “다른 것에 굴복 또는 의존하지 않는 것”/ “동료 또는 원조가 없어서 단독인 일”/  “한 나라가 완전히 독립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일”/  “개인이 완전한 사권의 행사능력을 가지는 일”이라 했다.

따라서 당시대의 독립이라는 용어해석은

   ①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이 엄존하는 당시에 조정이 아닌 반체제친일정치집단이 사용한 독립협회의 용어는 당시의 정서로도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반역이었고 역모를 선동하는 것이었다.

   ②  개화, 혁신, 자주 그리고 자유평등의 미사구어와 함께 사용한 독립이라는 용어는 반체제친일정치집단이 일본당(日本黨)을 창당하고 나서 국민적 거부감이 드러나자 “일본당”이라는 당명을 가리기 위하여 “독립당”이라고 선전했던 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민중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선동목적이 있었다.

   ③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독립이라는 용어사용은 1910년 이완용이라는 독립협회회장과 독립협회의 임원출신들이 나라를 일본에 넘기기로 하고 “한일합방”이 되었음을 허위로 선포한 후부터 국권회복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일어선 항일애국지사들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고, 국치(1910. 8. 29일)사건 이전의 “독립”용어는 친일정치세력이 抗淸(항청)과 사대외세(事大外勢)거부의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변명하였었으나
“독립신문”의 논설에 의하면 청나라는 이미 일본에 패전하였으므로 항청(抗靑)의 의미가 없고, “서양(프랑스와 독일과 영국과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본과 청나라와 조선이 하나로 뭉쳐서 독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과/  이때에 우리정부의 외교권을 일본에 맡기게 되었던 것으로 보아서 “독립협회의” “독립”의의는 순수한 자주독립의 의지와는 별개의 저의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④  친일독립협회의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는 “세계인민중에서 제일 불상한 백성은 조선백성인데”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되게 한 까닭에 일본이 이김으로서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  “일본서 조선을 대하여 할 정책 책재는 조선독립을 어떻게 하던지 보존하게 하여야 하겠고”/ “우리가 청국을 이긴 까닭에 조선이 처음으로 자주독립국이 되었고, 우리군사들이 조선서 행신을 잘 한 까닭에 조선백성들이 감사하게 여겼고, 세계에 자주독립국 된 것을 즐거워하였는지라”/ “일본이 청나라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그 후로 조선은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조선인민은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도 조선인민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조선에는 선생노릇 할 사람이 없는지라”했고
또 고종황제를 폐위시키려는 운동을 할 때는 “문명개화한 법으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조선에 큰 역적이니, 그런 일(일본을 배제하는 자주독립이나 항일투쟁 또는 왜군이 들어오는 통로의 반대를 주장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곧 역적 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우리가 아노라”하고
외교권을 넘겼을 때는 “서양은 적이니 조선과 청나라는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서 하나로 독립하여야 한다.”는 논설을 쓰거나 보도를 함으로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노렸던 「대동화경영작전」에 도움이 되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1896년부터 본격화 하였던 것과
우리대한의 독립은 일본의 전승덕분에 얻어지는 것이니 일본에 고마워해야 하는데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야만국민을 계몽하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볼 때, 친일독립협회의 독립의 의의는 일본을 위한 독립, 일본에 의한 독립, 일본의 독립으로 인식하였던 집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당시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독립이란 용어의 중독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또다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불행이 되풀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는 역사의 윤회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불행했던 것은 일제와 친일세력이 광복 후 “점령군  미군정”과 합의하여 친미정부를 수립하려하는 미국의 전략에 협조하면서 〝임시정부요인과 광복군의 귀국을 봉쇄〞해 놓고, 가급적 지명도는 있으나 민중 속에 뿌리내릴 수 없는 꼭두각시 친미지도자를 내세워서 광복을 두려웠던 친일파들의 입지를 굳혀가는 로비를 서둘렀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친미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하지중장에게 떠오르는 적임자는 부왜역적출신으로 망명자가 되어 해외에서 육성된 미국인이나 친미정치인 중에서 찾는 것이 일 순위일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친일파들은 하지중장이 공수해왔던 미국인‘필립 제이슨(舊名 서재필)’과 함께 친미정권의 기조요직을 점거하게 됨으로서 사실상 광복군과 임시정부를 배제한 “친미+친일”정치구도로 편제되기 시작하였었던 것이고..
필립제이슨에게 밀리는 위기감을 느꼈던 이승만 측은 ‘필립제이슨(舊名 서재필)’이 어떤 자라는 것(부왜역적이었으며 해외독립기구를 통해서도 돈벌레노릇을 하였던 사실 등)이 노출되게끔 함으로서 제압하려하였던 것이고, 본색이 들어난 ‘필립제이슨’은 불안에 떨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옛날처럼 세 번째로 자기나라 미국을 향해서 가버렸던 것이나..
이미 “필립제이슨”을 중심으로 운집하였던 자들은 이승만에게로 옮겨 붙거나 다른 당에 소속됨으로써 결국은 이승만정권도 기성친일파들의 보호막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되었기 때문에 친일독립협회의 “독립”이라는 용어가 오늘날까지도 우국지사들의 독립투쟁과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을 연상하도록 얼버무리며 혼용하여 오게 되었던 것이다.

   시대적으로 역사정립의 기회를 망설이는 동안 민족은 이대오로기의 몸살을 겪는 6.25사변을 겪었고, 그 바람에 부왜역적을 식별하기보다는 붉은 색깔을 가려내는 것이 사회급선무가 되였었으며/  연달아서 4.19의거와 군부쿠데타정권과 신군부반란수괴들의 집권연장 등 실로 핍박과 혼란의 연속이었던 틈을 노려 친일세력들은 꾸준히 그리고 갖가지 이벤트를 통해서 언론 정치 경제 문화 교육재단 등 입지를 굳히고 점거하면서 사회적 실리를 챙기고 부왜역적변명의 사회적 구실을 각색하여 보통사람들로 하여금 착각하게 할 만큼 도색을 하였던 것인바, “독립”이라는 용어는 불안정구호로서 친일파인물을 보호하는 방패용어로 오용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명쾌하게 규명을 지어야하고, “독립협회”와 “독립운동”이 반대의 목적과 반대의 역할이었다는 것과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서 또는 미국에 의해서 독립된 신생국가가 아니며, “광복회”와 “광복운동”과 “광복군”이 “광복절”로 연결되어지는 것으로서 유구한 역사의 조국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것”이라는 “광복”이었음을 인식하여야하는 때”가 된 것이다.


“독립문”건립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일제강점 직전 독립문의 건립목적은 친일독립협회가 일본의 청일전쟁에서 승전하였음을 기념하고 정치지망의 신인엘리트들을 대거 몰리게 하려는 친일정치집단의 이벤트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국사사전의 대강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은 민족국가독립운동을 말하며, 최초로 AD1910년(경술국치)부터 시작하여 AD1945년(광복)까지 만35년 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서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민족자주독립을 꾀하고자 일어났던 민족운동을 말 한다”로 요약되어 있다.

   다만 1910년 이전의 독립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저들은 항청(抗淸)의 구실로 변명을 붙이고 있으나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하여 친일하던 당시는 청일전쟁에서 이미 일본이 승전하였던 때이고 항청(抗淸)의 의미 자체가 소멸되어버렸던 것이며, 오히려 독립협회의 세력이 국정을 혼란시키면서 일본이 깊숙이 스며들어오도록 내란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음으로 항청(抗淸)은 구실의 가치가 못 될 뿐 아니라 친일독립협회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논설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항청(抗淸)의 의미는 전혀 없다고 하였으면서 “러시아와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양은 적이니, 우리는 일본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함께 삼국(日本+大韓+淸)이 하나로 독립하여야 한다.”하였으며,
“독립협회회원들은 이번에 승리를 얻은 것을 족하게 여기지 말고, 일본 덕천가강(德川家康)씨의 말을 따라서 먼 길을 가는 것 같이 급히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기 바라노라”<고종35년 7월 5일자 독립신문 논설>는 것으로 독립협회의 소속과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명백히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다.

   친일앞잡이들이 “일본당”이라는 정치집단을 창당해 놓고는 이에 대한 백성들의 거부감을 피하고 친일본색을 감추기 위해서 “개화라고 할까, 독립이라고 할까”하는 궁여지책의 위장용어를 사용하다가 친일의 대체용어로 이용하였던 용어가 “개화”와 “독립”이라는 것이었는데 두 개가 다 정착되었던 것이고,
결국 조국이 일본의 속국이 되도록 부왜역적노릇을 한 친일정치집단의 “독립협회”회장단 출신들은 허위선언의 감행으로 ‘한일합방’을 성공시킨 매국노들이 되었으며, 그들이 성공시킨 한일합방선언 3일 만인 1910년 9월 1일자로, 일본 왕으로부터 ‘백작’과 ‘남작’ 등 최고의 고관대작작위를 부여받았고 돈과 토지를 분배받았던 자들이다.

   결국 친일“독립협회”회장단 출신으로서 이완용, 안경수. 김가진. 민상호. 김종한. 이근호 등이었으니 독립협회가 부왜역적들의 소굴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길은 전혀 없는 것이다.

   1896년 일본은 작은 섬나라의 입장에서 “대륙의 청나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는 크고 엄청난 기쁨에 빠져있었고 승전기념구조물들이 일본전역에서 건립되는 붐이 일어났었으며, 심지어는 청일전쟁에 참전한 병사가 단 한사람만 있었던 마을에서도 참전자를 영웅시하면서 마을입구에 승전기념탑을 세워주는 시대적 분위기로 들끓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친일정치집단으로 결성된 일본당원출신들과 명성황후살해사건에 연루된 자들까지 합세한 “독립협회”가 ‘독립’이라는 협회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따서 건립하였던 것이 “독립문”인 것이고, 장안이 떠들썩하게 저『독립문』의 기공식을 거행하던 장면을 보면서 당시 조국과 온 민족은 끌어 오르는 울분과 비애를 삼키면서 아관파천(고종이 일본군을 피하여 러시아공관에서 집무를 봄)의 처지에서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자기네들이 우리나라에 청일전쟁승전개선문을 직접 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친일파들을 통해서라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땅에서 일본군이 청나라를 무찔렀다는 감격과 위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기뻐하고 경축하며,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하는 개선문건립을 기대하였다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지난 날 “필립제이슨“(舊名서재필) 등 부왜역적들은 제1갑신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1884년 10월 청나라가 월남문제로 프랑스와 싸우다가 패하였던 상황을 노려, 우리나라의 내정에 눈 돌릴 겨를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일본공사 ‘다께 조에’와 밀약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서 일으켰었는데, 이때에는 엘리트중심의 일본당원끼리 국왕(고종)을 인질로 끌고 다니면서 각료대신을 7명이나 살해하였으며 3일간이나 천하를 호령하였었지만 국민적 호응을 받지 못하고 결국은 실패하였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에, 요번 제2경술반란(韓日合邦) 때에는 청나라가 일본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청나라는 눈치 볼 것도 없지만, 서방국가들이 있기 때문에 걸림돌이 됨으로 그들을 배척하기 위하여 외교권은 일본에 위임함으로서 우리정부와의 접촉을 방해하고 일본과 국교상대하게 하면서, 자주독립의 명분과 자기네들을 지지해주는 군중세력을 충분히 확보하여야 한다는 전략을 갖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므로 청일전쟁의 일본승전기념구조물을 건립함과 동시에 젊은 세력의 대거영입을 과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획된 이벤트로 ”독립문기공식“을 거행하였었던 것이다.

   따라서 『독립문』은 결코 조국광복을 위한 조형물이거나 우리나라의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독립문이 아니고, 단순한 친일정치집단“독립협회”의 상징물 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승전기념조형물에 해당될 뿐이지 항일독립투쟁과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반민족 반국가적 유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이라면 이 잡듯이 찾아내어 살해하고 태극기가 발견되면 온 마을 사람들을 고문하였던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극기가 그려진 ”독립문“을 헐어버리지도 않고 오히려 직접 나서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가며 토목부에 지시하여 보수를 하고 문화제로서 <고적 제58호>에 등록하였으며 영구보존토록 하였을까?”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했을 뿐 독립문에 숨은 진실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이완용은 누구인가?

   1858년생 1926년(68세)사망. 구한말 판중추부사 호준의 양자(養子)로 입적하여 엘리트로 자라 사대주의자가 되었다.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빙빙 돌다가 민족의식과 조국에 대한 사명감 보다는 자신의 입신출세와 안일만을 생각했던 관계로 역사는 그를 큰 죄인인 “매국노(나라를 팔아먹은 놈)”라 부른다.

   혹자는 총리대신으로서 불가항력적인 입장에서 매국노가 된 것이라고도 변명해주지만, 그가 일본당과 독립협회와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내용을 보면 매국노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일진회회장 송병준과 무장한 왜인을 대리고 황실에 들어가서 고종을 협박한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주 간교하고 무자비한 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친일독립협회위원장으로서 독립협회의 조형물인 독립문의 기공식을 하였고 친일독립협회회장으로서 현판을 직접 쓰고 준공식을 한 독립문건립자이다.
   1910년 8월 29일 고종의 승인도 없이 한일합방을 채결하고 선포하였으며 3일후에는 고종을 중심으로한 대한제국의 왕족을 모두 일본왕족의 소속으로 흡수시켰으며, 한일합방과 그 공로로 독립협회회원인 김가진. 김종한. 이근호와 함께 토지와 일본 돈을 많이 받았으며, 일본 최고의 백작이 되었고 조선총독부중추원 고문으로 취임하였던 자이다.

   그 외의 독립회원 김가진 이근호 민상호 김종한은 남작이 되었으며 죽은 안경수는 그 유족에게 대신 상속후상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도 독립만세운동을 못하게 하기위하여 동포를 공갈하는 경고문을 3차례나 발표했었고 그 뒤로 죽는 날까지 매국노의 최고영예인 일본의 후작(侯爵)으로 봉직하였던 매국의 영웅이었다.

   흔히 항일운동 또는 애국지사모임이나 대한독립운동단체로 착각하기 쉬우나 “독립협회”는 1896.7월 조직한 부왜역적들의 모임체이며, 과거(1884년)에 일본의 사주와 지원을 받고 성장했던 “일본당원”들이 “혁신당” 또는 계몽개화의 명분으로 위장하고 친일정권을 수립코자 쿠데타갑신반란까지 일으켰다가 흩어졌던 반란수괴들이 청일전쟁에서 승전하고 친일세력이 조정을 일본세력으로 완전장악한 후 재 결집했던 조직이다.

   독립협회의 활동 중에 자랑꺼리로 내세우는 것이 공개토론회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8년 6월 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내가 일본사람으로서 대한독립협회 회원에 들어왔으니 여러 회원들이 의심할까하여 설명하는 것이니 그리들 아시요. 내가 근본은 일본사람인데 대한에 들어와 사오년 되었으니 일본은 나의 제일 고향이요. 대한은 곧 나의 제2고향이라 내 어찌 대한을 한갓 남의 나라로 여긴다는 말이요  -중략-  지금 서양의 호랑이들이 서양고기 다 먹고 더 먹을 것이 없는 고로, 우리 동양으로 와서 큰 고기 덩어리를 보고 욕심을 내여 삼켜먹으려고 입에 침을 질질 흘리는 모양이니, 동양형세가 어찌 위급하지 아니 하리요. 대한 일본 청국은 동양에 가장 중요한 나라로 인종이 또한 같은 동포형제라, 청국이 망할 지경이면 대한과 일본이 협력하여 구원하겠고, 일본이 망할 터이면 대한과 청국이 구원하겠으니 비유컨대 한 동리에 세 사람의 집이 있는데, 한 사람의 집에 불이 나거나, 도적이 들게 되면 그 이웃에 사는 두 사람의 집에서 어찌 무심히 문만 닫히고 있어 그 한 사람의 집에서 화재와 적환을 혼자 당하게 하리요. 그러한즉 불가불 한. 일. 청 삼국인민이 이제는 잠들을 깨고 모두 동심(同心)합력(合力)하여 서양호랑이의 환될 것을 방비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이오.”라고 “일본인회원 ‘고하송시조’씨가 연설하였는데 어찌 대한신민이 되고야 추호인들 소홀히 할 수 있으리오”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서도 당시의 독립의미는 항청(抗靑)이나 항일(抗日)도 아닌 일본중심의 합심단결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서 일본제국주의가 꿈꾸어왔던 대동화전의 결집이었음을 확인하게 되고 대체적인 토론이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일본의 보호를 받으면서 개화되는 세상을 만들고 출세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 당시의 독립협회는 대한독립투사들과 원수지간의 적대적 친일 집단 대명사이다. 독립협회회장 이완용을 중심으로 독립협회회원출신들이 고종황제의 명령에 따라 해산된 뒤에는 친일파를 양성하는 “유신유람단”과 “일진회”를 조직하여 온갖 만행을 통해 대한제국의 국기를 흔들었으며 급기야는 나라를 일본에 넘겼던 것이고, 저들의 매국행위에 의해서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국치일을 맞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이나 독립단체들은 나라를 빼앗긴 후에야 민족의식의 지성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합방된 조국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독립선언서”를 탑골공원에서 처음으로 낭독하게 되었던 것인 바, 전국으로 독립만세의 물결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협회는 매국협회가 되었고 조국광복의 독립운동과는 유사명칭일 뿐 정반대의 역사관이 숨겨져 있는 부왜역적들의 매국노집단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재필은 누구인가?

  1863생 1951년(88세) 사망. 충남 논산 은진(미륵)면 출신으로 서재필 역시 김옥균과 이완용이처럼 친부모가 아닌 출세한 부모에게로 양자입적한 사람이다. 서광하의 양자(養子)로 입적하여 엘리트로 교육받았으나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친일파로서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를 나온 무관이다.
   사전(역사사전)에는 경북 대구출생으로 되어 있으나 실재로는 충남 논산출신이다. 부왜역적이라서 고향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되자 “나에게는 고향도 조국도 없다”고 했다가 미군정시대에 하지중장을 따라와서는 “나는 외삼촌댁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것이 근거가 되어 전남 보성의 외가주소를 서재필의 생가가 있는 고향이라고 부각시키면서 그곳을 성역화 하려는 부류도 생겨났다. 임진왜란이후 일제강점기와 광주학생사건까지 항일의병사가 화려했던 호국호남이 부왜역적 하나의 외가라는 바람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다.

   정한론(조선정벌기획논문)에 의한 부왜역적으로 일본이 양성했던 70여명의 친일결사대원출신으로서 일찍이 일본군사학교를 나왔으며 신군부의 조련사관장이 되었고, 일본당에 창당발기인으로서 가입하였으며 갑신반란군수괴로서 일본공사의 밀약을 믿고 3일천하시에 무장한 채 고종을 감금하고 또 인질로 끌고 경희궁으로 갔으며 고종을 거짓으로 속여 일본을 경계하는 각료대신(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들을 왕으로 하여금 불러들이도록 해놓고 입궁하는 순서대로 7명이나 살해 하면서 날뛴 자다.
일본이 후원한 갑신반란이 실패로 끝나자 후퇴하는 일본군의 뒤를 따라 일본공사에 숨어들었다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이 곳 인천항에 정박해 있었던 일본해군의 은익과 보호를 받으면서 일본으로 망명했던 살인자이며 반란군수괴다.

   그의 고향 논산 생가에 살던 아버지와 형제들은 역적의 가문으로서 처형당했으며 생가는 불타버렸고 아내는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친정이 있는 보성으로 갔었으나 역적가문으로 시집간 출가외인이라 하여 문전박대를 받고 동구 밖에서 자살하였는데 아이는 젖을 주는 사람이 없음으로 울다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처자식은 처가가 있는 보성에서 죽었으며, 고향 논산 생가의 가족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서재필은 일본으로 자기를 잡으려는 자객들이 들어왔으며, 일본정부에 외교채널을 통하여 살인자를 내놓으라는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고 하니 일본에 숨어있는 것도 불안하였기 때문에 제2의 망명지 미국으로 도망하였으며, 미련 없이 국적을 버리고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미국인으로서의 신변보호를 받으면서 필라델피아에서 공부(국어사전에는 ‘시카코’대학 의과대학으로 기록되어있고. 대백과사전에는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인 ‘콜럼비아’의과대학 야간부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집에서는 컬럼비안대학교의 부설 ‘코크란’대학 야간3년제를 공부한 후 1년간 인턴생활을 거쳐 의사가 되었다고 되어있으므로 존스홉킨스대학에는 들어간 적도 없고 펜실베니아주 ‘라파예트’대학도 졸업하지 않았으며 박사학위와는 거리가 먼 한국최초의 가짜박사라고 한다. 다만 의사예우로 불러주었던 “닥터”가 박사로 오인되었을 것이라는 변명도 있다)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철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삶을 살았다.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결혼하고 미국인답게 살았다. ‘필립 제이슨’은 조선인을 무시하며 경멸하고 조선을 향해서는 소변도 보지 않는다면서 살았는데, 유길준과 김홍집 박영효 등이 이제는 조정을 우리가 장악하였고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전하였기 때문에 청나라가 철수하였으므로 친청파도 없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다가 연봉을 10년간 보장해 줄 것과 함께 국고로 신문사를 차려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니까 이를 수락하여 1896년 입국하였으며, 거액4000환의 국고를 받아 친일독립협회의 재무를 보면서 친일독립협회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게 되었으며 독립문의 디자인을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따 독립협회의 개선과 대일본제국의 청일전쟁승전기념개선문으로 스케치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원모집에 대해서도 국적 따지지 말고 회비만 낸다면 다 받아들이자 하여 돈을 많이 낸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인의 가입도 제안하여 받아들인 자였으며, “독립신문”사를 일본공사에 15만元에 매각하려다 실패하고 추방설이 나돌자 2년 6개월을 근무하였으나 계약기간이 10년이라는 조건으로 7년6개월분의 연봉을 포함한 공금34,000元 정도를 착취 및 횡령하여 자기나라 미국으로 가버린 돈벌레 ‘필립 제이슨’이란 자다.

   3.1운동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려는 미국의 교민회가 회원대부분이 문맹자이면서 일당 80센트를 받는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이었으므로.. 우리말은 물론 영어도 잘하고 의과대학을 나온 엘리트 ‘필립 제이슨’이므로 우리를 도와달라고 애걸하였을 때도 유급제로 흥정을 하고나서 고용계약을 한 후 돈벌이로 참여하였던 자였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친우회의 경리를 보면서도 “한국친우회” “한인연합대회”에서도 3년 동안 재무중심의 리더가 되었었는데 교포회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모금액을 인쇄물 등 홍보용으로 썼으나 모두 자기의 인쇄공장으로 들어갔다. 개인의 고용보수는 별개로 하더라도 홍보사업비만 12,969달러를 가져갔다.

   “한인연합대회”에서도 우리 애국가를 부르거나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마늘냄새가 나지 않도록 김치를 먹는 야만을 버려라 고 강요하였으며, 미국국가를 부르고 영어로만 회의를 하도록 하면서 “나는 미국인이고 여기는 미국이므로 여러분은 미국에 대한 예의를 준수하면서 미국의 선처를 바래야 한다. 만약 행사진행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을 시 즉시 사임 하겠다”는 배짱으로 돈벌이를 했다.

   대한민국의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헌납한 어른 운운하는 것은 전후행적과 모순 되는 신화로 띠우기에 불과한 것이며 그가 1924년 전 재산을 날린 것은 독립자금으로 헌납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신문에서 착취한 거금과 미국에서의 각종독립운동행사 등의 이벤트나 교민단체의 재정을 맡은 고급고용급여자로 벌어들이면서 병원을 청산하고 각종홍보물의 제작비를 흡수하여 가꾸어왔던 인쇄소(종업원70여명규모)가 1924년 세계적인 대공황(大恐慌)을 견디지 못하여 기업이 줄 도산하는 상황에서 도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바와 같다.

   돈벌레 ‘필립제이슨(서재필)’이 철저한 돈벌레였다는 것이 확실한 것은 독립신문의 후계 사장을 했던 윤치호씨의 일기첩을 보면 “만일 봉급을 두 배로 올려주었으면 남아있을 생각이 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일제가 미군의 보호(保護)하에 물러나고 광복군과 임시정부요인을 입국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놓고 확실한 친미정권을 구성하고자 미군정이 3년간 고심할 때 하지중장이 ‘제이슨(서재필)’을 불러 들여 초대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분위기의 과정에서 풋내기 정치인들이 물 묻은 바가지 에 참깨가 들어붙듯이 ‘제이슨(서재필)’을 영웅시하며 소문을 퍼트린 것이 그러한 때에 입문한 정치인들에 의해서는 또 하나의 신화로 포장될 수 있었다고 이해는 한다.

   그러나 1947년 광복 후에 미국인으로 입국했던 ‘필립 제이슨(舊名 서재필)’은 우리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두개의 정부로 분단되게 되자 “자주평화통일을 우리 손으로!”라고 염원하는 동포들의 구호를 비난하면서 “저 구호는 미국을 당황하게 하고 스타린을 웃게 만든다.”라 하였고, 1896년 청일전쟁일본승전개선경축 시기에 입국하여 소위 독립신문의 논설을 쓰면서도 “조선이 그나마 독립국으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의 힘 때문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갈등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강대국들의 갈등을 잘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을 뿐 그 이상의 독립의지나 철학이 없었다.


필립제이슨과 독립문

   공사기간 1896.11.21일-1897.11.20일로서 준공까지 만1년 간 공사를 하였으며 총공사비용은 3825원(국사사전의 기록)을 모금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필립 제이슨‘은 자서전에서 “그 경비가 다른 책에는 그 때 여러 사람에게 의연금을 모은 듯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단순히 나 개인의 출자로 된 것이다”라고 상습적인 거짓말을 했다.
   실재로는 ’필립 제이슨‘이 모금한 금액3825元에서도 2305元을 착복했으며 독립문의 공사비용은 공사를 맡은 심(沈)목수에게 보너스를 포함하여 1520元지불하는 것으로서 마감을 지었으면서도 독립신문 광고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추가모금을 하는 등 모금횡령의 규모를 알 수 없는 돈벌레였었다.

   국어사전은 “건양 원년에 독립협회에서 세운 문으로 서울 서대문밖 교북동에 있음”이라 했다.  실제로는 1884년에 일본당으로 창당하여 갑신반란을 실패한 후 10여년을 암약해오던 친일정치집단인 독립당(개화독립당)은 우리나라의 정부요직을 완전장악하고 내정개혁을 단행하던 1894년 6월, 이를 항거하여 일어난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을 대거 불러들인 다음 결국은 병권까지 일본에 내어주었고, 항일의병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봉쇄조치를 감행하면서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도와 아산. 성화. 평양 등 곳곳에서 청나라를 물리치고 일본군이 승전을 거듭하도록 협조한 세력들의 중심에 4흉이 있었고 그 4흉의 하나가 미국으로 도망갔던 서재필이였다.

   일본군은 조선을 기반으로 조선인을 정보원으로 하여 급기야는 여세를 몰아 요동까지 공격하였고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의 화의를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거기다 전쟁배상금까지 2억 냥(兩)을 받으면서 시모노세끼조약을 성립하게 되었는데, 전쟁배상금으로 군비증강을 하고 조선을 독점하는데 걸림돌인 러시아를 공격할 준비단계로 진입한 일본군은 국제적 위치확보와 동시에 이 땅을 완전장악하려는 정한론목적달성을 위해 친일파를 앞세워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 친일파조직의 중심에 ‘필립제이슨’이 있었다.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라는 자료, 224쪽의 기록에 의하면 “독립문을 준공해놓고 독립협회회장은 독립문을 새긴 은 찻잔을 만들어서 일본총리대신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바치었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선전포고였을까? 아니면 일본정부에 독립을 배려해달라는 아첨이었을까?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확인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외교관계를 다 차단하게하고 외교권까지 일본에 바친 자들이 독립협회출신자들이었고,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로 러시아와 충돌을 하여 러일전쟁을 이끌어내려고 하였던 일본의 음모에 협조하면서 청일전쟁이후 러일전쟁까지 일본승리로 이끌어내게끔 공헌했던 전공수훈자들도 독립협회회원들이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독립문의 건립추진은 물론 자금모금 역시 우리정부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었으며 일본인과 친일정치인의 모금으로 건립한 친일독립협회의 개선문이기 때문에 영은문과 다를 바 없는 사대교린주의의 방향만 바꾼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1895년 친일파의 계략과 신고에 의하여 전봉준이 처형을 당함으로서 동학혁명군은 대패하였으나, 동학혁명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계획된 계산에 의해서 대거 밀려들어왔던 일본군대가 항일투쟁을 벌이던 의병들을 토벌하였고 이에 걸림돌이었던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이긴 전쟁이었던 것인바, 친일독립협회는 정부의 예산을 빼내어 친일조직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고 독립신문보급조직을 통해서 일본인들의 거점 확보를 도우며 신고체제로 활용하여 지방 어느 곳에서나 의병활동의 조짐이 나타나는 대로 즉시 신고를 받아 일본군대에 역할로 처리되는 기관에 넘기고는 의병들을 비적(산적과 유사) 또는 비도(떼도둑)로 몰아가면서 항일운동에 동요하지 말도록 독립신문을 통해서 여론조작을 하였는데, 당시 우리사회는 쑥밭이 되어있었고 이미 조정에는 친일각료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기고만장한 친일독립협회는 패전한 청나라의 영은문을 헐은 자리에 대신 친일독립협회의 이름을 넣어서 “독립문”이라는 현판으로 청일전쟁일본승전기념개선문 겸 독립협회의 세를 과시하는 구조물을 보란 듯이 세우는데 전담한 자도 ‘필립제이슨’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재필과 이완용이가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여론을 조작해 가면서 친일세력을 구축할 때가 1896년부터였으며, 이때에 호남지방에서는 독립신문의 보급기지도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항일왜인토벌사상이 완고하다하여 동학농민군의 잔당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장성 담양 순창까지 마을의 젊은 남자들을 잡아가고 무차별양민학살을 자행하였었다는 것인바, 사실 일본은 친일파들의 암약에 의해서 국권을 빼앗기 전에도 악랄하게 살상만행을 자행했었다는 것을 상기하여야 한다.

   서기2005년 8월16일자 조선일보 문화면(보도자료)을 보았는데, 프랑스의 ‘륄리스트라시옹’이라는 주간지(1907년 8월 10일자)에 보도된 자료에 의하면 일본군대가 전남담양에서는 양민들을 도적으로 몰아 처형하면서 구덩이를 파고 십자가를 세운다음에 흰옷을 입은 대한사람들을 십자가에 양팔을 벌려 묶어놓고 총기로 쏘아 죽이는데, 특이한 내용은 50M 떨어진 곳에서 쏘아 죽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을 하기위해서 동원하였다는 것이다. 많은 군중들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군대는 각반을 두른 채 당당하게 사격실습을 하는 장면의 사진까지 게재되었었는데, 이와 같은 사진이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 등과 학계의 역사자료에서는 그보다도 13년 후인 3.1운동 관련자들의 처형장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분개할 일이고 국가적으로 수치스런 일이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사진기자는 3.1운동보다도 13년 전의 신문발행을 하면서 어떻게 13년 후의 사건을 미리 내다보고 촬영하였다는 것인지? 그것은 그만큼 독립협회와 독립문에 관련된 시대적 사건을 미화왜곡하기 위해서 일제의 만행은 한일합방이라는 국치일 이전에는 없었고, 고종의 장례식 이후 1919년 3.1운동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던 데서부터 잘못되어졌다는 증거의 사례에 불과한 것이고 부왜역적‘필립제이슨’의 독립신문이 바로 철저하게 반국가적이었으며, 사회의 요술거울 노릇을 하는 친일곡필신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막연하게 독립신문이라는 이름만 생각하지 말고 직접 독립신문의 기사내용을 읽어보기 바란다.


필립제이슨 동상의 건립목적

   “친일독립협회의 기념공원”을 표방하여 “독립공원”으로 이름 한 것이 어떻게 조국광복을 위해서 산화하신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민족혼의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다는 것 일까? 하는 걱정이 생기면서 등골이 오싹하는 소름이 끼쳤다.
   독립공원의 독립문과 서재필의 동상은 “젊은이들이여! 반란군수괴 서재필을 통해서 부왜역적질을 본받고, 조국이 피해를 보더라도 강대국에 붙어서 협력하는 것이 국가안보라는 사대주의의 지혜를 독립문에서 배우며, 매국노들의 기회주의를 생활철학으로 배워서 이완용이와 같이 조국을 팔아서라도 출세하면 일신의 부귀영화로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반역사적 시설에 속하는 조형물들이다.

   떳떳하지 못한 인물들의 주변사람들이 불안한 만큼 안정을 찾으려는 데서 유형적조형물에 의지하게 된다. 즉 자발적으로 존경하는 인물들의 동상이 세워지는 경우는 다행이다. 그러나 주체측에서 의도적으로 구실을 붙여 동상을 만들려는 OO사업회 등의 대부분은 추진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이속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친일파인물들이 경쟁적으로 동상을 세우는 것은 결사적으로 부끄러운 행적에 대해서 변명하는 행위에 속한다. 친일파OOO은 동상이 세워졌던데, 우리OO도 동상을 세우자하는 것이고, 또 연대하여 우후죽순처럼 동상벨트를 형성하게 된다면 공동방어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윤치호의 동상도 세우자는 단계에 진입해 있는 것이다.

  특히 독립공원에 있는 ‘필립제이슨’ 동상의 경우에는 계획적이고 폭력적으로 역사를 왜곡시키고자하는 막강한 세력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언론기관과 방송사와 언론협회 그리고 언론재단 및 기자협회를 총 망라한 언론기념탑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국민을 무시하고 사회를 휘두르는 언론공화국의 폭력일 뿐 진실한 언론으로서의 철학이나 역사사상이 없는 오물이다. 필자가 관련자 개개인을 만나본 바에 의하면 돈과 권력이 어느새 세워놓고 제막식을 한다고 해서 가봤더니 우리단체의 이름도 있더라는 정도였다.


독립신문의 내용에 나타난 독립협회의 성격

   부왜역적집단으로서 친일독립협회의 기관지“독립신문”과 광복투쟁을 하였던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또는 독립운동당시의 “獨立新聞”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국정신문으로서 서재필의 독립신문보다 59년 전 서기1837년 4월 5일부터 발행하였던 일간신문(筵說)이 있었으며, 기별군사(奇別軍使)와 기별서사(奇別書士)가 전국지방에 기별청(奇別廳: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날마다 아침에 적어서 반포하던 곳)을 두고 지역보급체계까지 갖추었던 “연설(筵說)”이라는 표제의 신문이 있었다.

   최초의 한글신문도 역시 “독립신문”이 아니고 일본인들이 여론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1886년에 항성순보를 부활시켜 “한성주보”로 했을 때 순 한글신문과 한문(東夷文字)신문을 병행하였었고 1895년 초에 창간했던 순 한글신문“한성순보”가 또 있었고 후에 “독립신문”과 다투는 때에도 “제국신문”이 순 한글판으로 발행하였었다.

   한성순보는 1년 내내 일본과 친일파들의 활동에 유리하도록 여론을 유도하다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는 주도적으로 사건초점의 방향을 흐리게 하면서 서민들에게는 일본을 이해시키고 홍보할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가 고약한 짓을 한 나쁜 황후였던 것처럼 조작보도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므로 한글판 “독립신문”은 한글판 “한성순보”보다 약 1년쯤 늦게 발행하였던 것이며 “연설”신문에 비하여 59년이나 늦게 발행하였기 때문에 그동안 한국최초의 신문이며 한국최초의 한글신문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언론이 친일행보를 감추려는 수작으로 그동안 국민을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시키는 속임수를 써 왔었을 뿐이다.  다만 독립신문이 갖는 특징이 있다면 한성순보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던 연령층의 반일세력계층까지를 흡수하려는 여론제조용 언론기관으로서 적당히 개화분위기를 살려가면서 일본관광코스를 활용한 친일유신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한 업적으로 후일 매국노집단을 양성하는데 공헌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는 것이다.

   “필립 제이슨”의 “독립신문”은 달콤한 사설을 혼용하면서 적당히 신천지의 서양바람도 가미하여 독자를 선동하고 기만하였던 또 하나의 일본앞잡이 일본당기관지로서의 부왜역적역할을 담당하게 하였기 때문에 당시 한문세대지성인들의 저항을 피하여야 했던 것이고 신진세대에는 한글보급을 하고 진보세력으로 확보해 나가려하였었던 일본한성순보의 본색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조선침투공작신문 제2중대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또한 독립신문의 제호를 보면 <명치29년9월14일 일체신성인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독립신문을 우리나라조정이 아닌 일본의 체신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것인바, 그 뿌리가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가?
   보급루트를 보면 일제가 조선침략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침투교두보로 삼았던 인천. 원산. 부산을 거점으로 하였으며 파주. 개성. 평양. 수원. 강화를 추가하여 독립신문8분국을 설치하였었고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에는 보급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고종임금을 도우려는 근왕병과 왜군을 토벌하려는 의병활동이 유난히 많으므로 우선 그곳을 피하면서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부터 정착하여 친일군중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독립신문의 내용으로 본 독립신문정신

   ①  “우리나라에 군사는 삼사천 명이면 황실보호와 인민보호에 족족 유여할지니 다시 군대를 늘리려하지 말라 군대 늘리는데 쓸 예산으로 학교확장에 쓸 지경이면 큰 학교를 짓고서도 돈이 남을지라.” “각국에 보내는 대사일행에게 드는 돈과 육군확장하는데 들 돈을 큰 학교 세우는데 쓰게 하였으면 외국어학교만 다행이 아니라 전국이 다행할 것이요 후세가 역시 다행하겠다.” (고종35년 7월8일자 논설) 국방과 외교권은 일본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독립신문정신이었다.

   ②  “전라도에 유진하였던 이겸제씨가 전라도의 도적떼를 평정하고 진주로 향하였는데” “전전 담양군수 민종열이를 잡아 법부로 보낸다하였으니, 외론에는 민가가 비도들과 한통속이 되어” “비도수괴 서상열이가 여덟 고을 비도를 모집한 것이 3천여 명이라 서가가 3천여 명의 비도를 함창태봉에 가서 일본병정과 싸웠는데 일시에 비도들이 사면으로 흩어져서 서가가 크게 패하여 예천과 풍기로 들어가“ (고종33년 4월 9일자. 28일자. 30일자 보도) 의병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미봉하고 일본병정을 선전하는 것이 독립신문정신이었다.

   ③  “수원 영통리에 지금 한성관찰사 유기환씨 집에 비도들이 들어와서 개화한 사람집이라고 그 형님을 뚜다려 죽을 지경이고, 제천비도들이 아산군 둔포에 가서 숨어 있다가 공주서 올라오는 경군들에게 잡혀서 넷은 총에 맞아죽고 여섯은 산 채 잡히고 그 나머지는 다 도망하였다 하더라” “중대장 김명환씨가 군부에 한 보고에는 김화군 대성산에 숨었던 비도수괴 신창손을 잡아 사문하고 이달 아흐렛날 큰 길거리에서 총으로 노아 죽였다고하더라. 함흥부 학포사에서 관동비도 1,700여명이 모였는데 본부에 유하던 일본병정들이 총과 불을 노아 쫓아내니  사면으로 도망하거늘” “전주부순검 박준섭이가 보성에 가서 비도수괴 김창균 김석현 부자를 잡아 왔는데 사문을 한 후에 그 아비는 본진에서 포살하고 그 아들은 장성에서 포살하여 경중하였다 하더라” “장성군 진위대에서 비도 한윤화와 중 응운을 잡고 금주에서 비도 김순여 황준삼 박락중 리경태 등 여섯 놈을 잡아 재판소로 보내였기로 사문하여 본즉, 그놈들의 구초에 비도괴수와 같은 당이라고 적절히 말한고로 교에 처하였다고 하였더라. 비도괴수 민룡호 민동식 성익현 차윤옥 권대형 등이 강릉영서로 패하여 달아나다가 소대장 유성원씨에게 쫓긴바 되어 회양 금성으로 달아났다.”  (고종33년 5월 16일자. 19일자. 6월 2일자. 8월20일자 보도) 항일투사와 의병들을 토벌하려는 일본병정의 종군기자노릇이 독립신문정신이었다.

   ④  “부산에 있는 일본사람들이 먹는 우물에 조선 사람이 독약을 넣어서 일본사람들이 그 물을 먹고 병이 많이 들었다니, 그 말이 분명 할진대 조선 사람들이 한일이 야만에 일이라” “이달 4일에 남대문 위에서 리련회라는 놈이 일본사람의 집에 돌질한 죄로 경무청에 잡혀가서 중치를 당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불상한 백성은 조선백성들인데, 그 중에도 조선시골백성이 제일 더 불상하더라.” “진고개 일본사람 집에서 호피 돌라간 도적놈 모화관 김용득을 일본순사 한분과 일본인 둘이 이달 20일에 잡아서 그 이튿날 조선경무청으로 보냈다 하더라.” “요사이에 외국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니 심히 기쁜 말이라.” “일본신문을 보니, 대한 사람들은 외국을 가서도 협잡을 하려고 하니, 나라에 부끄러운 일이요. 남을 속이려고 하는 사람은 일생 남에게 속나니라” 전의출신 대신으로서 곽종석 신채호를 고종임금에게 추천하였던 분이 일본을 경계하라는 상소문을 냈다는 이유로 독립신문은 비난을 일삼았다. (고종33년 4월 18일자. 6월 6일자. 6월 9일자. 9원 1일자. 고종35년 4월 9일자 보도) 조선을 비하하고 조선 사람을 야만시하고 일본을 동경하도록 홍보하는 것이 독립신문정신이었다.

   ⑤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 “일본 외무대신 백작 오구마씨가 일본하의원에서 한 연설인데 …… 청국과 싸움 시작한 후에 조선이 일본과 합맹하여 청국을 같이 쳤고 우리가 청국을 이긴 까닭에 조선이 처음으로 자주독립국이 되었고, 우리군사들이 조선서 행신을 잘한 까닭에 조선백성들이 감사하게 여겼고, 세계에 자주독립국 된 것을 즐거워하였는지라.” “크고 장하고 귀한 자주독립권리를 공히 남에게 기대여서 얻었으니, 그 귀한 것을 알 수도 없고 귀한 줄을 모르는 즉” “남이 억지로 자주독립이라고 시켜주어 오늘날 조선이 말로는 세계 각국과 동등이라 하나, 실상을 보고 들면 조선이 어찌 자주독립국이리요.” “일본정부와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던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하려는 뜻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라.” “병자년 이후에 처음으로 일본과 교섭한 뒤로 차차 안목이 열리더니 갑오경장 이후로부터 각부에 외국 사람들을 고립하여 모르는 사무를 맡기니 이 일이 비록 나라권리에 큰 관계는 없다 하나” (고종33년 6월 20일자. 고종34년 3월 27일자. 고종35년 3월 17일자. 고종34년 7월 27일자. 고종33년 7월 16일자. 고종35년 3월 31일자 논설)
정한론에 의해서 일본이 침투하기 시작한 병자년으로부터 일본의 농간으로 촉발된 임오군란과 갑신반란 그리고 명성황후의 살해를 통해서 능동적인 개화를 봉쇄하면서 외교권까지 박탈하였던 교활한 일제침략을 고마워하고 일본이 배려해준 자주독립의 큰 가치도 모르는 조선을 개탄하는 논설이 독립신문정신이었다.

   ⑥  “어느 나라를 의지하던지, 의지할 생각이 있는 고로 타국과 교제하는데 변덕스런 일이 많이 있는지라.” “비유하여 말하기를 조선을 죽을 병든 사람과 같은지라 어느 때에 죽을 런지 모르는데, 일본공사는 상의하는 의원과 같은지라, 의원이 병인의 집에서 오래 떠나 있는 것이 가치 않다.” “일본 황제께서 거기 중추원관원들을 금잔 한 개씩 주었는데, 그 사람들이 일본이 청국과 싸움할 때에 황제를 도와 좋은 말을 많이 한 연고였더라.” “일본 황제 탄신 날 각국공사가 폐현하는데, 조선공사 이하연씨도 폐현하였는데, 일본유학생 리준용씨가 같이 폐현하였더라.”
“1월19일 일본 황태후 죽으신 부음을 들은지 7일이라. … 오는 27일까지(전국각지에 16개소의 분향소 설치) … 빈전에 행을 나누는 택일을 정하여 공고” “일본 황태후 장사에 드는 부비를 80만원에 작정하였고, 장사인즉, 이달 25일에 지내기로 작정하고 궁내부에서 거상을 25일을 입게 마련한다.” “일본 황제와 황후께서 이번에 황태후 장사지내는 날, 전국에 있는 경수죄인들을 모두 내보냈는데, 황후께서 돈40만원을 국중에 간랍한 사람들에게 폐여 주어 황태후의 높은 덕을 생각게 하였더라. 조선대사 이하영씨는 서경 숫막에 유하여 일본 황태후 장사장례를 하였더라.” 는 등의 기사와 논설을 통하여 아무에게나 의지하여야만 살 수 있는 죽을 병 걸린 조선인이 일본의 배려와 황실의 사랑에 보답하고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이 독립신문정신이었다.

   독립신문의 보도내용(고종 33년 5월 12일자)은 일본병사들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고 보호하기 위하여 “이달 열흘날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짐바리는 일본에서 새로 나온 300명 군사들의 짐인데, 그 속에 세간과 총과 탄알이 있으나 그 나라 보호병이니, 조선 백성들은 조금도 놀라지 말라”는 보도를 했으며, 한편으로는 동요하지 못하게 군중을 짓누르기 위하여 억압적보도(고종 33년 10월 3일자)로서 “여항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일본병사들이 나온다고 공연히 무근지언을 하야 인심을 소동케 하니, 알지도 못하고 이런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 경무청에 붙들려가게 되기가 쉬울 것이다.”를 통해서 유언비어유포금지 경고를 했던 것이다.

   독립신문은 대담하게 일본공사를 환영하면서 자주적 외교권을 포기하고 일본에 의지할 것을 동의하였는데 “일본 관리공사 ‘소촌’씨는 근일에 전권공사가 되었다니, 우리가 듣기에 매우 즐겁고, 조선에 주찰한 각국공사들이 다 전권공사가 되기를 바라노라”(고종 33년 4월 18일자 논설)하였고 “일본공사 ‘하라’씨가 일간에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만일 이 말이 참말이면, ‘하라’공사가 가는 것을 섭섭히 여기는 사람이 많을 듯 하다하더라”(고종 33년 10월 1일자자) 면서 일본인들에게 아첨하고 “일본정부에서 조선에 주찰하여 있는 대리공사 ‘가등웅’씨를 파리공사로 명하고 공사관. 서기관 ‘추월’씨를 서울 주찰한 영사 겸 공사관. 서기관을 명하였으니, 우리는 새 공사와 새 영사의 승차한 것을 치하하고 아무쪼록 양국 간에 교재와 상무가 흥하기를 바라노라. ‘가등’씨는 구라파 각국에 여러 해 주찰한고로 외국학문이 넉넉하고 불란서. 독일. 러시아. 영국 말들을 잘하며 조선에도 부산. 서울 등지에서 여러 해 영사로 있어 조선 물정을 자세히 아는 이라, 이런 공평하고 학문있는 이가 공사가 되었으니 양국 간에 다행한 일이더라”(고종 34년 2월 27일자)는 아첨기사의 보도로서 일관하는 친일정치신문이었다.

   독립신문(고종 33년 8월 4일자) 논설을 보면, “일본 군사가 조선. 청국 등지에서 백전백승하고 필경 북경을 범하게 되는 고로 청국정부에서 리홍장씨를 일본에 보내어 빌면서 싸움을 그쳐 달라 함으로, 일본정부에서 청국더러 배상8억8천만원을 바치고, 대만을 일본으로 붙이면 싸움을 그치겠노라 한즉, 청국이 너무 감지덕지하여 그렇게 약조하고 겨우 목숨을 도모하였으니”라고 하였으며, 6일자 논설에서는 “일본이 세계에 칭찬 듣는 일이 청국과 싸울 때에 자원하여 전장에 나가 나라를 위하여 죽겠노라는 사람이 매일 몇 천 명씩이요”하면서 일제전쟁선동을 하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4월14일자) “일본 내각에 대신자리 하나를 새로 설치하였는데 이름은 ‘식민대신’이라 그 직무인즉, 일본인이 바깥(점령국)지방에 가서 사는 사무를 관계하는 것이니 새 대신은 육군부장 ‘고도’씨란 이가 한다더라”하였고, 실제로 대만을 접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랑스럽게 선전보도(고종 34년 5월 18일자)를 “일본정부에서 대만에 있는 청국백성들을 내달 8일 전에 일본백성이 되겠노라고 청원한 사람들은 대만 내지에서 살게 하고, 일본백성과 같이 보호하여 주며, 청원서를 내지 아니한 청인들은 내지에서 모두 쫓아내어 항구에 가서 거류지속에 다른 청인과 같이 살게 하였다하더라”는 식으로 일본식민대신의 식민정책을 통한 압박을 하면서, 러시아공관의 신변보호(아관파천)를 받으며 집무를 하고 있는 고종에 대해서는 모든 국제관계의 외교는 일본에 맡기고(고종 34년 3월 4일자 논설) “아라사와 일본이 서로 합도하고 또 조선서는 조선 일만하여 갈 것 같으면, 아무 일도 없을 터이요, 삼국(한. 러. 일)이 다 평화하게 지낼 터이니, 조선서는 조선 일만하기를 바라노라” 손을 떼라는 권고를 감히 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독립신문”이라는 제목은 그동안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었던 이름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한 사대친일신문으로서 반민족적 망국언로이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독립협회회원들은 스스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전국방방곡곡에서 무장한 항일의병소를 신고하고 고발하여 비도로 몰아세워가며 토벌하게 하고 일본에는 이롭고 조국에는 해를 끼쳐왔던 “독립신문”을 임시정부가 발행했던 “독립”신문과 “獨立新聞”으로 혼동하게 하였던 것은 교육기관에서 책임져야 할 불고지죄인 것이다. 이제라도 시정하여야 한다.

   재론하지만 독립당은 1884년 친일정치집단으로 ‘일본당’을 창당하였었는데 대중적 거부감을 피하면서 젊은이들을 포섭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기위하여 ‘개화당’ ‘독립협회’등으로 부르다가 1896년 정부의 언론육성기금 5000환을 빼내어 자기네들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4400환이 들었다고 함)하면서 항일운동을 잠재우고 지방에서 일어나는 항일의병들을 비적으로 신고 받아 처형하는 첩자역할을 함으로서 자주독립의 기반을 제거하는 일을 했다.
  그와 동시에 일본메이지유신의 유신문화를 개화의 명분으로 선전하였으며 “독립문”을 세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을 축하하는 개선문으로 건립하고 이를 인식시키면서 세력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필립 제이슨’을 돈벌레라고 볼 수 있는 것은 100%정부예산을 빼내어 설립한 신문사를 미국인 필립 제이슨(서재필의 미국인이름)의 개인소유인 냥 일본공사에 15만환에 팔아넘기려다 실패하자 근무를 계획했었던 기간을 7년 6개월이나 못 채우고 가기 때문에 7년 6개월분의 월급까지 스스로 계산하여 챙기는 등 약3만4천환의 공금을 착취하여 미국으로 되돌아가서 병원을 개원하였던 바와 같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은 친일여론화를 위한 독립협회의 왜곡기관지였을 뿐이다. 그들은 1898년 종로와 마포 서대문일대에서 폭력으로 군중을 제압하려했던 독립협회사건 이후로는 강제해산을 당하자 유신회로 바꾸어 조선의 젊은 신진개화세력들을 집단일본관광을 통해 신사참배를 하고 특별교육을 시켜 친일정치인으로 양산하는 역할을 다하였었고 궁극에는 그 여세를 몰아 매국(강제한일합방)을 성공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마쳤던 것이다.
   과거사청산이라는 명제가 아니더라도 광복60년을 맞아 마땅히 국민에게 그 저의를 재검토해 보도록 일깨워주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에 광복60년에 붙여 이제는 “광복공원”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글을 바친다.


독립신문의 내용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

   그리고 독립신문의 내용을 통해서 보는 편집기준은,
첫째 항일애국지사들은 일단 사대수구파로 매도하였다.
둘째 왜군토벌의 의병들을 모두 집단도적패거리로 매도하였다.
셋째 동학군을 난동 꾼(폭도)으로 매도하면서 타지역의 동학들은 거기에 동요하지 않도록 왜곡 홍보하였었다.  
위와 같은 독립신문의 보도기준에 의해서 의병장이었거나 항일애국지사가 되어 활동하였던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거꾸로 난동 꾼이나 도적떼라는 누명을 쓴 채 순국하고 희생당하였었다,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오만방자한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일어난 애국지사로서 의병을 이끌었던 지방의 지도자들이 소위 친일독립협회기관지 독립신문의 농간에 의해서 더럽고 추잡한 도적떼로 몰리어 부끄러운 조상으로 보도되었던 선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상렬   기우만   신창손   김창균   김석현   최문환   민룡호   성익현
  정준경   최대집   리영순   리용권   류인석   리충익   리전재   승창기
  노학수   김한성   엄봉치   한윤화   승응운   김순여   황준삼   박락중
  리경태   민동식   차윤옥   권대형   리화영   박주상   림병주   류치배
  리재룡   김도근   리경보   리필곤   최용달   리감찰   신무섭   고석환
  리희두   김도화   류일영   죠상학   김용강   죠형식   리덕일   리잉영

  자료-   부왜역적 기관지 독립신문연구 려중동지음.  -국립 경상대학교 출판부-



" 서대문형무소의 정체 "  :   이하... 아래 부분은 따로 한편의 글로 올렸습니다.

                                      너무 장문의 글이되어 보시는 분이 지루할 것이기에..
                                     사실 여기까지도 너무나 긴 글입니다. ^^
  
분류 :
한민족
조회 수 :
4350
등록일 :
2008.11.30
08:56:34 (*.120.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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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만

2008.12.04
22:41:14
(*.154.102.19)
일제의 앞잡이로 나라를 팔아넘기는데 1등공신이라 할 서재필은
해방 이후 미군정 당시 미군정의 고문으로 들어왔으며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한 '대통령 추진위원회'가 결성될 때
추진위원회에 가담한 순서 1~3 순위 안에,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2인이 들어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서약을 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장교 '박정희'
해방 후 독립군으로 위장하여 귀국하였던 '박정희'
좌익할동중 고위 군사책임자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동지 1000여명의 명단을 넘겨준 대가로 목숨을 구한 기회주의자 '박정희'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대한민국 육군의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사람의 자녀인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우리나라!

이제는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를 다시 조사, 검토하여 새로 써야 할 때가 되었으며,
다시 정규교육기관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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