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증언 동기

  저는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공헌해 보려고 소외되고 병든자, 전과자 심지어 정신 이상되어 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까지 데려다 먹여주고 치료해 주며 선도하고, 죽으면 장사를 치루어 주었으며 종교에나 사회에 흠 없이 하겠다는 뜻에서, 저를 따르는 자의 허물은 곧 저의 허물이고 책임이기에 저를 선생이라고 따르는 목사 중 이면에 말 못할 허물이 있다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때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공산주의 아닌가?' 의심을 받게되자 매를 맞은 목사 분 역시, 저와 같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폭력으로 고소하게 되어 교도소에 가게 되고 경찰들은 저희 교회에 와서 갈 곳 없어 모여온 자들을 갈 곳도 마련해 주지 않고, 못된 집단이며 공산당, 간첩의 집이라고 발로 차고 때리고 끌어내어 흩어지게 했으며
언론인들 역시, 그 당시 상황을 보지도 않고 저를 한 번 찾아와 인터뷰나 뜻을 알아 본 일도 없이, 저를 이해 못하시고 오해하신 종교 지도자들과 정신 이상되어 옷을 벗고 부르짖는 자들의 말만 듣고 왜곡하여, 흥미 위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충동, 유혹, 격분할 수 있도록 이단자, 사이비, 자칭 만왕의 왕, 심판주, 삭발종교 교주, 벌거벗고 여신도들과 나체춤을 추면서 천국댄스라고 했다며, 저 역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섹스교라며, 잘못을 권면하러 간 목사를 때리고 쇠고랑 차고 철장 신세가 된 교주라고 하여 서로 경쟁하듯이 각종 신문, 잡지, T.V.에서 대서 특필하여 해외 토픽거리를 만들어 혼란한 가운데 더욱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군사정권, 유신체제 때 대통령 긴급조치법이 발동됐는데 저의 종교세력이 너무 커지는것 같아 종교지도자들과 정부의 사주를 받아서 그렁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말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기에 기독교에서, 마귀, 사상범, 간첩이라고까지 하였던가?! 하는 것을 간추려, 보시는 이로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변명이요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고 할 지 모르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탓이라고 여겨집니다.
배움이 짧아 문장도 어색하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다 보니 차례가 바뀌고 반복된 면도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여기에 기록한 것으로 다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였으나 더 보태고 꾸미지는 않았으며 저의 양심에 한 점도 가책 받지 않고 당당하며 떳떳하게 살았던 것이기에 이 글로 더 한 지탄을 받는다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만일 언론에 보도된대로 잘못되었다면 온 인류는 저를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교부 드림


2.  소년기 성장과정

  저는 1940년 음력 4월28일 생으로 전북 익산시 왕궁면 흥암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농부였습니다.
  저는 어려서 어머님의 젖이 부족하여 다른 분의 젖을 얻어 먹고 암죽으로 자라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정 말기에 기억나는 것은, 왕궁 초등학교 창시자의 기념동상이 동(銅)이라고 떼어 갔으며, 집집마다 구리, 놋쇠그릇, 수저까지도 거두어 가고 공출로 거두기 위해 일본 순사들이 칼을 차고 면서기들과 가택수색하여 벼가 있으면 빼앗아 가는 것을 뒤따라 다니며 구경을 했고, 저의 집에도 신을 신고 들어와 수색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당시 맏형은 일본 순사가 한국 노인을 잡아다 때리며 조사하는 것을 보고 분히 여겨 '
" 너희들은 부무도 없느냐?!"며  일본 순사를 때린 동기로 폭도가 되어 은둔생활을 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온통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맏형은 일장기와 일본 책들을 모아 불을 지르곤 했습니다.

  그 후 다시 불행한 일은, 왜정시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소실까지 두고 호의 호식하던 친일파였던 분이 다시 국가 기관에서 세력을 누리는 것을 보고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때리고 가두는 것을 본 맏형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분히 여겨 그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투쟁하다가 폭도 또는 좌익, 공산당으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형님을 앉혀 놓고 방바닥을 치고 가슴을 치시면서 "왜인과도 그러더니 또 다시 그러느냐?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느냐?  벙어리되고 벙신되어야 산다."고 하셨으나 맏형은 불응하면서  "아들 하나 없는 폭 잡으시오. 그들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너만 죽느냐? 네 부모, 동생들도 죽게하는 것이다."고 한탄하셨습니다.

  맏형은 초등학교 다니는 저에게 말타기를 가르치고 겨울에 옷을 벗겨 맨발로 달리기를 시키면서 "우리니라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던 친일파들이 다시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선량한 백성을 탄압한다.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둘째 형은 부모님께 효도했으며, 내성적이라 동네 사람들이 "새색시"라고 놀려주기도 했습니다.  맏형은 둘째 형에게 말하기를 " 너는 선하고 용하다. 땅이나 파고 살다 죽어라."고 했습니다. " 3.8.선이 통일되고 자유와 평등,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그 당시로는 터무니 없는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저의 집은 밤낮으로 경찰들의 포위 상태에 있었으나 맏형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자재로 말을 타고 왕래하던 중 결국 이리 경찰서에서 동원된 분들에게 검거되어 구속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교부야 울지 말아라.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라. 곧 돌아오겠다."며 떠나셨습니다.  부모님은 "호랑이 입 같은 세상에 네가 무슨 힘으로 싸운다고... 바보 같은 자식"이라며 한숨을 쉬셨습니다.
  이리 경찰서에서 얼마 후에 군산 법원으로 넘어갔다고 하였는데 희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길이 없었으며 시신도 인수 받지 못한 참혹한 비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저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아 죽었다."  또는 "홍길동 같은 사람이니 총을 쏘아도 죽지 않고 살 사람이다."라고 갖은 말로 위로를 했으나 결국 27세 경에 사라졌습니다.

  그 후 6.25사변이 터져 아군들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죽은 시신을 보게 된 것은 아군과 경찰들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 가담자들이라 하여 잡아다 죽여 암매장한 것을 발굴해 놓은 토막난 시신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사촌 형도 있었습니다.
  공산 치하 때도 역시 원수를 갚기 위해 민주 인사였던 사람들을 잡아다 때리고 죽였으며, 다시 민주 사회로 회복되고 보니 역시 공산치하에 부역한 자들을 잡아다 죽이는 비극들이 겹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작은 형은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피신하지 않고 집에 있다가 지서에서 사람이 와서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하여 자기 발로 걸어갔으나  이리 경찰서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얼마 있다가 군산 법원에 넘겼다고 하여 군산에 가 보았으나 넘어오지 않았다고 했으며, 수 차 확인했으나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역시 맏형과 같이 희생시키고 시신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은 왕궁 지서에서 제일 가까운 담 밑에 있었기에  왜정 때, 해방 후 그리고 6.25동란으로 서로 잡아다 때리고 고문하는 비명 소리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듣지 않을까?!  부모님은 이불이나 요를 가지고 창문을 가리며 살아온 것을 보고 자란 저로써는 " 어른들이 왜 싸우고 죽이는가?!" 어느 누구를 미워하기 보다 사회가 싫어지고 증오감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선하신 분들이었습니다.  형 둘이 희생되었어도 조금도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시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 자식 하나 잘못 두어서 좋은 자식까지 죽고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고만 한탄하셨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지서 마당 뿐 아나라 순경들의 관사까지도 모두 눈을 치워 주시고, 저의 집이 초등학교 바로 옆이라 점심 시간이 되면 친구들을 데려 오라고 하시어 밥도 주시고 물도 끓여 주셨으며 부모 없는 고아 몇 사람을 길러 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은 "착한 사람이 되어라. 맏형 같이 잘난 체나 똑똑한 체 말아라.  가난하여 돈이나 양식을 빌려가서 못 갚으면 안준다고 싸우지 말아라. 그 사람이 양식보다 돈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는 것이다. 말로라도 고맙다고 할 것이며 마음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인심을 잃지 말고 살어라. 그것이 명예나 돈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셨으며 웃음 한 번 짓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이런 불행한 저의 가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저의 집을 마치 좌익,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저를 사상범으로 오해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형제도 사촌도 없으며 독신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참한 환경이었으며 부모님은 늙으셨고 저는 어렸으나 농번기가 되면 여러 사람들이 저의 집부터 모를 심어주시고 난 후 자기 집안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외롭거나 고독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형님들이 그렇게 잘못만은 하지 않고 사셨던 은덕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것이 저의 소년기 성장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06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