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 편 종교의 사회적인 문제

 

 

 

종교는 그것이 최소한 사회의 세속적 제도들과 관계를 가질 때 가장 높은 사회적 역할을 성취할 수 있다. 과거의 시대들에 있어서는, 사회적인 개혁들이 도덕적인 영역을 크게 제한시켰기 때문에, 종교는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광대한 변화들에 자신의 태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종교의 주요 과제는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화의 실재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선으로 악을 대치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는 사회의 기존 질서를 간접적으로 영구화시키려는, 문명의 현재 유형이 유지되도록 돌보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종교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창조 또는 옛 질서들의 보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못한다. 참된 종교는 하나의 사회적 진화 기법이 되어 충돌되는 것은 반대하지만, 새로운 경제적 조건들과 문화적 요청들에 대해 그것의 제도들을 적응시키고 관습들을 조화시키려는 사회의 지적(知的) 노력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종교는 과거 여러 세기들의 간헐적인 사회적 개혁들을 인정하였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광범위하면서도 계속적인 사회 재건에 대한 조정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요구되고 있다. 삶의 상황들이 너무나 빨리 바뀌기 때문에 제도적인 개선들은 크게 가속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종교는 이러한 새롭고도 계속 변화하는 사회 질서에 맞추어 재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종교와 사회적 재건

 

 

기계적인 발명과 지식의 보급이 문명을 변형시키고 있으며 어떤 경제적 적응들과 사회적 변화들은 문화적 재앙을 피할 수만 있다면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그리고 도래하고 있는 사회 질서는 1,000년이 지나도 만족스럽게 정착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종족은 변화와 적응과 재 적응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야만 한다. 인류는 새롭고도 계시되지 않은 행성 운명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종교는 이러한 영원히 변화하는 상황들과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제적 적응들 속에서 역동적 (力動的)으로 기능하는 도덕적 안정성과 영적 진보를 위해 강력하게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유란시아 사회는 과거의 시대들처럼 안정을 찾게 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사회를 이루는 증기선(蒸氣船)이 증기를 내뿜으면서 기존의 전통이라는 안정된 항구를 떠났으며 진화의 운명 이라는 공해(公海) 위에서 항해를 시작하였으며 사람의 혼(魂)은, 세계 역사상 전례(前例) 없이, 도덕성에 대한 그것의 도표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종교적 안내의 나침반을 정성스럽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사회적인 영향력으로서의 종교의 탁월한 영향력은, 문명이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어떤 문화 차원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이러한 위험한 시기 동안에 인류의 이상(理想)들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종교가 수행해야 할 새로운 임무들은 없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명한 안내자로 활동하도록 그리고 새롭고도 재빠르게 변화하는 이러한 인류의 상황들 전체 속에서 노련한 조언자로 활동하도록 긴급한 소명(召命)을 받고 있다. 사회는 더욱 기계적이고 더욱 밀집되고 더욱 복잡하고 더욱 위태롭게 상호 의존적인 상태로 변해가고 있다. 종교는 이러한 새롭고도 긴밀한 상호 관계들이 공동으로 역행하거나 심지어는 파괴적인 것으로 되어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종교는 진보의 발효로 하여금 문명의 문화적인 맛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는 조화우주 소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과 경제적 격변은 오직 종교의 사명활동에 의해서만 영구적인 형제신분을 가져올 수 있다.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도주의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고상한 태도로 보이겠지만, 다른 집단들의 필요와 고난에 대해 사회적 집단의 반응을 영구적으로 증대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오직 참된 종교뿐이다. 과거에 있어서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무력한 하류 계층의 고난당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동안 제도적인 종교가 수동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하류의 이 사회 계층들이 더 이상 그토록 비천하게 무지한 상태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무력하지 않다.

 

종교는 사회적 재건과 경제적 재조직이라는 세속적인 일에 근본적으로 개입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도덕적 명령들과 영적 교훈들에 대해, 인간적 삶과 초월적인 생존에 대한 그것의 진보적 사상에 대해 분명하고도 활기 있게 다시 진술함으로써 문명에 있어서의 이러한 모든 진보들과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의 영은 영원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형태는 인간 언어 사전이 개편될 때마다 다시 진술되어야만 한다.

 

 

 

 

2. 제도적인 종교의 취약점

 

 

제도적인 종교는 지금 절박한 전 세계적 사회 재건과 경제적 재조직에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없고 지도력도 제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그것은 많거나 적거나 다소간, 반드시 재건을 겪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그 사회 계층과 경제 체계에서의 유기적인 부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품성체의 영적 경험의 참 종교만이 문명의 현재 위기에서, 유용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제도적인 종교는 현재 타락의 올가미 속에 붙잡혀 있다. 그것은 먼저 그 자신을 재건하지 않고서는 사회를 재건시킬 수 없으며 기존 질서에 없어서는 안 될 그토록 중요한 부분이 되어있는 한, 그것은 사회가 급진적으로 재건될 때까지 그 자신을 재건시킬 수 없다.

 

종교인들은 사회와 산업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 집단들이나 당파들 또는 학파(學派)들로서가 아니라 개인들로서 활동해야만 한다. 그렇게 활동하려는 종교 집단은, 종교적인 활동들과는 상관없이, 곧 정치적 정당이나 경제적 조직 또는 사회적 제도로 바뀐다. 종교적인 집산주의(集産主義)는 그 노력을 종교적인 목적 추진으로 국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 재건의 임무에 있어서 종교인들이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천국에서의 형제로 사랑하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그 뛰어난 사회적 지혜를 그들에게 부여하고 증진된 조화우주 선견지명을 그들에게 주는 한에 있어서 비종교인들도 예외가 아닌 것과 같다. 이상적인 사회계층은 그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교회가 과거에는 기존의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질서들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조속히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의 유일한 본연의 태도는 비폭력에 대한 가르침, 격렬한 혁명 대신 평화로운 진화 -이 세상에 평화가 임하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선한 뜻이 이루어짐- 에 대한 교리 속에 있다.

 

현대 종교는 신속하게 바뀌는 사회적 변화들을 향하여 자신의 태도를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이 너무나도 속속들이 전통화 되고 교리화 되며 제도화 되도록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경험의 종교는 이 모든 사회적 발전들과 경제적 격변들을 계속 앞서도록 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그것은 도덕적인 안정 장치와 사회적인 안내자 그리고 영적인 조종사로 계속 활동한다. 참된 종교는 하느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고 분투하는 경험으로부터 태어나는 그 지혜와 훌륭한 문화를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준다.

 

 

 

3. 종교와 종교인

 

 

초기의 기독교는 시민 사회의 모든 장애물들과 사회적인 약속들 그리고 경제적인 동맹관계 들로부터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 오직 후대의 제도화된 기독교만이 서방 문명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구조의 근본적인 한 부분이 되었다.

 

천국은 사회적인 계층도 경제적인 계층도 아니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을 아는 개인들의 영적인 형제신분일 뿐이다. 정말로, 그러한 형제신분은 원래 몹시 놀라게 하는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반향(反響)들에 수반되는 새롭고도 놀라운 사회적 현상이다.

 

종교인은 사회적인 고난에 냉담하지 않고, 시민 사회의 부정에 대해 관심이 없지 않으며, 경제적인 의견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지 않고, 정치적인 횡포에 무감각하지도 않다. 종교는 사회 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이 시민 개인들을 영적으로 만들고 이상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는, 이러한 개인적 종교인들이 다양한 사회적, 도덕적, 경제적 정치적 집단들의 활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구성원들이 될 때 문화적 문명이 그들의 태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고도의 문화적 문명의 달성은 처음에는 시민의 이상적인 유형을 요구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러한 시민이 그것을 가지고 그러한 진보된 인간 사회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제도들을 조정할 수 있는 이상적이고 적절한 사회적 기능구조들을 요구한다.

 

교회는, 과다하게 잘못된 감정적 생각 때문에,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돌보아 왔으며, 이것이 모두 잘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바로 이 감정적 생각이, 문명의 진보를 엄청나게 퇴보시켜 온 인종적 퇴화 혈통들을 어리석게 영존 시키도록 유도하였다.

 

개인적으로 사회 재건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제도화된 종교를 맹렬히 거부하는 반면, 자기들의 사회 개혁들을 선전하는 데 있어서 결국에는 열광적인 종교적 속성을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이면서 다소 인식되지 않은 종교적인 자극이 오늘날의 사회 재건 계획에 있어서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인식되지 않고 무의식적인 이러한 모든 유형의 종교 활동의 큰 약점은 그것이 공개적인 종교 비판으로부터 유익을 얻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수정하는 유익한 차원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가 건설적인 비판에 의해 단련되지 않고, 철학에 의해 확대되지 않고, 과학에 의해 정화 되지 않고, 충성스러운 교제에 의해서 양육되지 않는다면, 종교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참여한 각 나라가 자신의 종교를 군사적인 선전물로 악용할 때에는, 종교가 왜곡되고 비뚤어져서 잘못된 목적을 추구하는 상태로 빠지는 큰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사랑이 결여된 열의는 항상 종교에 해로운 반면, 박해는 종교 활동들을 전환시켜서 어느 정도 사회적이거나 신학적인 추진력을 성취하게 한다.

 

종교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것들에 의해서만 부정(不淨)한 세속적 연합들로부터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


1. 비판적으로 교정(矯正)하는 사상.


2. 모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연합들로부터의 해방.


3. 창조적이고 위안을 주며 사랑으로 확대되는 연대감.


4. 영적인 통찰력에 대한 진보적인 향상과 조화우주 가치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


5. 과학적인 정신적 태도의 보상에 의한, 광신적 태도 예방.

 

비록 한 개인적 시민으로서 그러한 한 사람의 종교인이 어떤 사회적이거나 경제적 또는 정치적 재건 운동에서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라도, 어떤 집단으로서의 종교인들은 종교 이외의 어떤 것에도 결코 자신들을 관련시키지 않아야 한다.

어렵지만 바람직한 모든 사회적 업무들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서 성공을 거두도록 개별적인 시민을 인도하게 될 때 그의 속에 그러한 조화우주 충성심을 조성하고 유지하며 영감을 주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4. 과도기적 곤경

 

 

참된 종교는 그 종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향기를 품게 하며 인간 동료관계 속에 통찰력 을 조성한다. 그러나 종교 집단들을 형식화시키는 것은 그 집단의 조직을 촉진시켰던 바로 그 가치들을 여러 번 파괴시킨다. 인간적인 우정과 신성한 종교는 각각의 성장이 균등하고 합동을 이룬다면 서로 도움을 주는 것들이고 밝은 빛을 발하게 된다. 종교는 모든 집단적 연합체들 -가정들, 학교들, 모임들- 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들이 적용되게 하고 참된 모든 유머를 고양시킨다.

사회적인 지도력은 영적 통찰력에 의해 변환되며 종교는 모든 집단적 활동들로 하여금 그들의 참된 목표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막아준다. 어린이들과 더불어, 종교는 가정생활의 결합을 이룩하는 위대한 역할을 하는데, 생생하고도 성장하는 신앙이 그렇게 한다. 가정생활은 자녀들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종교 없이 유지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부족함은 긴밀한 이 인간 연합체의 어려움들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20세기의 초기에는 수십 년 동안 가정생활이 개인적 종교 경험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데 그 고난은 옛날의 종교적 충성으로부터, 출현 하는 새로운 의미들과 가치들로의 전환에 따른 타락으로 인한 것이었다.

 

참된 종교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의 진부한 실체들과 역동적으로 직면하며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넘쳐나는 길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가 성격의 개별적 발전을 자극하여 품성의 집대성을 증대시키고자 한다면, 종교는 결코 표준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종교가 경험의 평가를 자극하여 가치-유혹물로 봉사하려면, 결코 틀에 박혀서는 안 된다. 만약에 종교가 최극 충성심을 촉진하려면, 그것은 결코 정형화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종류의 격변이 문명의 사회적 성장과 경제적 성장 속에 일어나더라도, 종교는 만일 그것이 그 속에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에 대한 주권이 우세한 어떤 경험을 각 개인 속에 조성하는 한 참되고 가치가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최극 실체의 참된 영적 개념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과 경배를 통하여 사람사이의 동료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아들관계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아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이 품행을 결정하고 그리고 품성적 성과를 지배한다. 순전히 사실적 지식은 만일 그것이 감정으로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보통사람에게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의 활성화는 감정을 초월하는데, 그것은 필사자의 삶 속에서 영적 에너지들과 접촉하고 그것을 풀어줌으로써 초월 차원에서 전체적인 인간 경험을 통합시킨다.

 

심리학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인 20세기 동안에, 경제적 격변들과 도덕적 역류들 그리고 과학 시대의 격렬한 변화에 따른 거센 사회적 물결들 속에서, 수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인간적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그들은 초조, 불안, 두려움, 불확실성, 그리고 불안정성 속에 있으며, 이 세상의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은 확실한 종교가 주는 위로와 안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전례 없는 과학적 성취와 기계적 발달에 직면하여 영적인 침체와 사상적인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만약에 종교가 이타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적 봉사를 향한 그것의 동기를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종교가 점점 더 사적(私的)인 문제 -개인적인 경험- 가 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종교는 많은 2차 영향들 즉, 문화들의 갑작스러운 혼합, 신조들의 뒤섞임, 성직(聖職) 권한의 축소, 가정생활의 변화, 그리고 도시화와 기계화 때문에 고생을 하였다.

 

사람의 가장 큰 영적 위험은 부분적인 진보, 완성되지 않은 궁지의 상태에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계시 종교를 즉각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두려움의 진화 종교를 버리는 것이다. 현대 과학 특히 심리학은 두려움과 미신 그리고 감정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그 종교들만을 약화시켜 왔다.

변화는 항상 혼란을 동반하며, 그리고 다음과 같은 종교의 세 가지 투쟁 사상들 사이에 있는 큰 갈등이 끝나기 전에는 종교적 세계에 평온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 여러 종교들의 (신(神)의 섭리에 있어서의) 심령적 믿음.


2. 여러 사상들의 인본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인 믿음.


3. 여러 과학들의 기계론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개념(槪念)들.

 

우주의 실체에 대한 이 세 가지 부분적 접근 방법들은 낙원의 삼위일체로부터 나오고 최극자 신(神) 안에서 시-공간의 통일을 달성하는 영과 마음과 에너지라는 삼원일체(三元一體)적 실재를 묘사하는 종교와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계시적 소개를 통하여 결국에는 반드시 합동을 이루게 되어야 한다.

 

 

 

5.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들

 

 

종교가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적 경험 -하느님을 아버지로 아는- 인 반면 이 경험의 필연적 결과 -사람을 형제로 아는- 는 자신의 자아를 조정하여 다른 자아들에게 맞추게 하며, 그것은 종교적 삶의 사회적 또는 집단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종교는 먼저 내적(內的) 또는 개인적 조정이며, 그 다음에는 사회적 봉사 또는 집단적 조정의 문제가 된다. 사람에게 사교성이 있다는 사실은 종교적 집단들이 실재하도록 필연적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종교 집단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하는 것은 지능적 지도력에 의해 매우 많이 영향을 받는다. 원시적인 공동체에 있어서 종교적 집단은 경제적 또는 정치적 집단들과 항상 매우 다르지는 않았다. 종교는 항상 도덕을 보존하고 사회를 안정화시키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현대 사회학자들과 인본주의자들의 반대되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참된 종교는 하느님을 너희 아버지로 알고 사람을 너희 형제로 아는 것이다. 종교는 형벌의 위협 또는 미래의 신비스러운 보상들의 마술적 약속들에 대한 노예 근성적 믿음이 아니다.

 

예수의 종교는 지금까지 인류를 활성화시킨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영향을 준다. 예수께서는 전통을 무너뜨렸고, 교리를 파기하였으며, 인류로 하여금 시간과 영원 속에서 가장 높은 이상들을 성취하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게 되도록- 부르셨다.

 

종교는 그 종교 집단들이 모든 다른 집단 -천국의 영적 회원들로 구성된 사회적 연합체- 들로부터 분리되기 전에는 활동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사람은 모든 이가 타락하였다는 교리는, 종교가 들어올려지는 본성과 영감을 주는 가치가 들어있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그 잠재의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선언하실 때 사람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믿는 자들을 영적으로 만드는 일에 효과가 있는 모든 종교적 믿음은 그러한 종교인의 사회생활 속에 강력한 영향을 반드시 주게 되어 있다. 종교적 경험은 영의 인도를 받는 필사자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 영의 열매들"을 틀림없이 맺는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들을 서로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공통적인 목표들을 결국에는 창출하는 어떤 종류의 종교 집단을 만들어 낸다. 종교인들이 언젠가는 함께 뭉치게 될 것이며 심리학적인 견해들과 신학적인 신념들의 토대 위에서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이상들과 목적들이 합일을 이룬 기초 위에서 실제적으로 협동을 이룩하고 함께 공존하게 될 것이다. 신조(信條)들보다는 목표들이 종교인들을 통합시켜야만 한다. 참된 종교가 개인적인 영적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종교인 각 개인은 영적 경험의 실현에 대한 자기 자신의 그리고 개인적인 해석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신앙"이라는 말이, 어떤 필사자들 집단이 하나의 공통적인 종교적 태도로 동의할 수 있는 공식화된 신경(信經)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의미하도록 허용하라. "너희에게 신앙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너희 자신에게 적용하라."

 

 

신앙이 오직 이상적인 가치들에 대한 파악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신앙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증거이고 바라는 것들의 실체라고 선언하는 신약 성서의 정의(正義)에 의해 잘 묘사되고 있다.

 

원시인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들을 말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종교는 생각보다는 춤으로 표출되었다. 현대인들은 여러 신조들을 생각해 내었고 종교적 신앙에 대한 많은 표준들을 만들어 내었다. 미래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실천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을 바쳐서 사람의 형제신분을 전심으로 따르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이 너무나 품성적이고 그리고 너무나 숭고한 종교 경험을 가졌기에 그래서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곳에 있는 느낌"으로만 인식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때가 무르익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모여서 그들의 공통적인 믿음들을 나타내는 어떤 형태의 말을 외워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는 그들이 서로 모여서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하라고 -유란시아에서 그의 증여 삶을 기억하는 것으로서 공동으로 함께 저녁을 같이 하라- 정했을 뿐이었다. 공통적인 믿음들을 나타내는 형태의 말들을 암송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가 유일하게 규정하신 것은 그들이 서로 모여서 실제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유란시아에게 증여된 자신의 삶을 기념하는 공동 만찬에 참여하는- 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적인 지도자관계에서의 최극의 이상이라고 제시하면서, 하느님을 의식하는 남녀들에게,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 지난 날 자신들의 특정한 국가적 그리고 민족적 계몽에 기여해왔던 하느님을 아는 그런 사람들이 지닌, 역사상의 지도자관계를 거부 하라고 무작정 요구할 때,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적인 지도자에 대한 최고의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지나간 시대들 동안 자신들의 특정한 국가 또는 인종적 해명을 위해 기여해 왔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의 역사적 지도력을 거부하라고 감히 요구하였을 때 그들이 얼마나 잘못을 범하였는지 모른다.

 

 

 

6. 제도적인 종교

 

 

분파주의(分派主義)는 제도적인 종교의 병폐이며, 교리주의는 영적 본성에 대한 노예화 (奴隸化)이다. 종교 없는 교회보다는 교회 없는 종교가 훨씬 더 낫다. 20세기의 종교적 혼란이, 그 자체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영적 퇴폐의 전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혼란은 파멸이 이루어지기 전과 마찬가지로 성장하기 전에 나타나는 것이다.

 

종교의 사회화에는 참된 목적이 있다.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을 향한 이끌림을 확대하여 보여주고, 최극 가치의 인력을 자라게 하고, 이기적이 아닌 동료관계에서의 봉사를 강화하고, 가족생활의 잠재성을 찬미하고, 종교 교육을 증진시키고, 지혜로운 조언과 영적 안내를 제공하고, 집단경배를 장려하는 것이 집단적 종교 활동의 목적이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종교는 인간 친구관계를 북돋우고, 도덕을 보존하며, 이웃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그리고 그들 각각에게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본질적 복음이 퍼져 나가도록 조성한다.

 

그러나 종교가 제도화될 때에는, 선(善)에 대한 힘이 삭감되는 반면 악에 대한 가능성은 엄청나게 증대된다. 형태화된 종교의 위험성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신앙의 고정과 정서의 결정화(結晶化), 세속화에 따른 기존의 호기심들의 누적, 진리를 규격화시키고 고정화시키려는 경향, 하느님께 대한 경배로부터 교회의 경배로 바꾸려는 종교적 전환, 성직자보다는 행정가가 되려는 지도자들의 성향, 파벌을 조성하고 경쟁적인 분파들을 만들려는 경향, 압제적인 성직자 권한을 세움, 배타적인 "선민(選民)"의 태도를 취함, 신성함에 대한 잘못되고 과장된 개념들을 조성함, 종교를 관례화 시키고 경배를 딱딱하게 만듬, 현재의 요구들을 무시하면서 과거를 경배 하려는 경향, 종교에 대한 최신의 해석을 내리지 못함, 세속적인 제도들의 기능상의 혼란, 그것은 종교적인 계급들이라는 악한 차별 제도를 만들며, 관행에 따른 편협한 판결을 내리게 되며, 모험적 인 젊은이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영원한 구원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를 점차 잃어간다.

 

형식에 사로잡힌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을 건축자들로서 고상한 봉사를 하도록 풀어주는 대신에 그들의 개인적인 영적 활동들 속에 제한시킨다.

 

 

 

7. 종교의 공헌

 

 

교회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종교 집단들은 모든 세속적 활동들로부터 초연해야만 하며, 동시에 종교는 인간적 제도들의 사회적 합동 체제를 방해하거나 저지시키는 어떤 일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의미심장한 가운데에 계속 자라가야만 한다. 사람은 반드시 종교에 대한 자신의 해명과 철학에 대한 자신의 개혁과 함께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정치학은 반드시 종교적 생활에 의해 공급되는 통찰력과 동기들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학으로부터 배운 기법을 가지고 경제와 산업의 재구성에 영향을 미쳐야만 한다. 모든 사회적 재구성에서, 종교는 초월적 목적에 대한 안정된 충성심, 즉각적이고 현세적인 목적들을 넘어서고 그리고 그 위에 있는 확고한 목표를 제공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오는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필사자 사람은 멀리 미치는 조화우주 전망의 식량이 필요하다.

 

종교는 사람에게 땅을 마주하고 그 위에서 용기 있게 그리고 기쁨이 넘치게 살아가도록 영감을 주며 그것은 인내가 열정과, 통찰력이 열렬한 헌신과, 동정심이 힘과, 그리고 이상이 에너지와 서로 만나 합쳐지게 한다.

 

사람은 만일 자신이 하느님의 주권적 현존 앞에서 명상하고 신성한 의미들과 영적인 가치들의 실체들을 헤아리지 않는 한 현세적인 문제들을 현명하게 결정하거나 품성적 흥미에서의 이기심을 전혀 초월할 수가 없다.

 

경제적인 상호 의존과 사회적인 동료성은 결국 형제신분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공상가이지만, 과학은 그를 침착하게 만듬으로써 종교가 마침내 그로 하여금 광신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위험성을 훨씬 줄여주도록 만들 수 있게 한다. 경제적인 필요성이 사람을 실체성과 묶어주고, 개인적인 종교경험이 바로 그 사람을 영원히 확대되고 진보하는 조화우주 시민 관계에 대면하도록 이끌어 준다.

 

 


[네바돈의 멜기세덱에 의해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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