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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말하는 ‘정의’의 의미 -창세기 38: 24-26의 문맥에서-


작성자 킹덤빌더



이런 분위기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있는 가운데 하버드대의 20년 연속 최고의 명 강의록이라고 선전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2010년의 한국 독서계에 도도하게 등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膾炙)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한국사회 만큼 이토록 국가존립을 위협할 정도로까지 지독한 이념대립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나 하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더욱 좌절케 하는 것은 흔히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일컫는 법조계의 현실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개탄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그 점입니다. 즉 2006년 4월 26일자의 한 일간신문에「나는 고발한다, 법조계를!」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던 한림대 김인규 경제학 교수가 5년이나 지난 뒤인 금년(2011) 2월 14일자 신문을 통하여서는「나는 다시 고발한다, 법조계를!」이라는 글을 통해서 피에 맺힌 절규를 다시 하고 있었다는 데서 그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인 민사소송의 80%는 가난한 민중들의 ‘나 홀로 소송’이고 나머지 20%의 대부분은 ‘전관예우의 악한 관행을 이용한 돈 많은 자들의 자명한 무죄보장 전제의 소송’이라는데, 이런 절망적인 ‘정의부재’의 한국 법조계를 보고서도 이 사회를 여전히 공정한 사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대통령, 국회의원 그리고 법조인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정의부재’의 사회로 만드는 바로 그 주범들”이라고 비장하게 성토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실로, 시간 또는 세월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인간세계를 통치하고 계시는 역사의 유일한 주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의(義)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을 찾기 위하여 우선 창세기 38장에 나타난「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관한 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성서가 말하는 ‘정의와 그 현실’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더 논의해 보는 것도 시의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관한 증언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族長)이었던 유다는 가나안 복지를 향한 이주과정 중에서 야훼의 이스라엘 구원사의 중심 역할을 하는, 이른 바, 가문의 대(代) 잇기가 위기에 직면하자, 즉 첫 아들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되자, 족장 유다는 후사를 남기지 못하는 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레비리트 법에 따라, 대(代)를 잇지 못하고 죽은 맏아들을 대신하여 둘째 아들을 며느리 다말에게 남편으로 내어주지만, --Levirate law는 형이 대(代)를 잇지 못하고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주는 관습법임, 신 25:5-10; 마 22:23-33; 막 12:18-27; 눅 20:27-40 참조-- 그러나 유다의 둘째 아들마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창 38:9 참조). 그러자 유다는 남은 셋째 아들마저 며느리 다말에게 주었다가는 그도 형들처럼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을까 염려하여 ‘셋째 아들이 성인(成人)으로 장성할 때까지’라는 조건을 붙여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냅니다(창 38:11). 



그러나 유다의 이런 조처가 한 지파의 족장으로서는 전혀 올바르지 않은 처사라는 것이 곧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셋째 아들이 다 장성하였음에도 그는 며느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셋째 아들을 남편으로 짝지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아무 죄도 없는 며느리를 마치 살(煞)이 낀 재수 없는 여인처럼 생각하여 셋째 아들이 다 장성하여 성년이 된 후인데도(창 38:12a) 며느리를 시가(媤家)로 불러오는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또 가문의 대(代)가 끊어질 이런 구원사적 위기를 아무 대책도 없이 방치(직무유기)한 채 오히려 그는 전혀 딴전만 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는 아내가 죽자 곡(哭)하는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문의 대(代)를 잇게 하는 이 중대한 일에는 조금도 관심 없이, 단지 딤나로 가는 길 가에 앉은 한 여인(cf. 렘 3:2; 겔 16:25b)에게로 접근하여, 그를 창녀로 잘못 알고(창 8:15), 탐욕스러운 수작을 거는 부끄러운 사내(창 38:23)가 되었고, 또 길가에 앉은 그 변장한 여인이 다름 아니라 가나안 종교의 ‘신전 여인’(가나안 신전[神殿]에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제의[祭儀]에 종사하는 성창[聖娼]; 창 38:14-22 참조)으로 위장해서라도 가문의 대를 이어 줄 속량자(‘꼬엘’)를 찾는 자(룻 3:9)가 되려고, 즉, 기울어져가는 시가(媤家)의 가문을 일으켜주기 위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레 20:10; 신 22:22-24)까지도 감수하고 변복(變服)하여 길거리에 나선 자기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은 이스라엘 족장으로서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범법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는, ①레 18:15에 의하면, 며느리를 범한 ‘성결법전의 위반자’가 되었고 또 ②출 21:7,14; 22:22에 의하면, 창녀와의 성관계를 금하는 ‘계약법전의 법도 어긴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야훼 신(神)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출 33:19 참조).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성관계라는 그 수치스러운 행위를 감내함으로 오히려 이스라엘 가문을 살리는 주역--가문의 대를 이어줄 속량자(꼬엘)를 발굴해낸 사람--이 되었고 또 유다 가문의 대를 출산하는 의(義)를, 즉 유다의 건장한 두 아들이 연쇄적으로 죽음을 당하면서 까지도 성취해내지 못한 그 일을 며느리 다말은 비록 이방인 여인의 몸이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창 38: 18-19) 성취해낸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이러한 의거(義擧)를 간음행각으로 오해하고 정죄하며(창 38:24), 또 마치 자신의 부끄러움(창녀와 관계를 가진 것)은 감추기라도 하듯이,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어깃장을 놓으며, 제사장의 딸이 간음할 때에나 벌을 내리는 화형의 극형(레위기 21:9)으로 다스리려 하는 그런 그 뻔뻔스러운 시아버지의 면전에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로부터 받은 몸값, 그러나! 그것은 결코 화대(花代; 해웃값)가 아닌! 단지 ‘꼬엘’(속량자, 대속자)의 신분증인 시아버지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창 38:18,25)를 꺼내보였던 것입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신분증으로 사용하는 관습은 고대 바빌로니아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전수된 것인데, 비록 시아버지 유다는 그것들을 지불해야 할 화대(花代)의 차용증서로서 내놓았지만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가 잊고 있는 가문의 대(代)를 잇게 해주는 ‘꼬엘’(대를 이어 줄 속량자)의 신분증으로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승리는 시아버지 유다의 것이 아니라 이방인 며느리 다말의 것이었습니다. 족장 유다는 그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밝혀주는 확실한 증거물인 것을 곧 알아차리고 즉시 저 이방인 여인 다말에게 항복하고 며느리의 의(義)가 승리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맙니다. “차드카 밈멘니!”(축자적 번역: 그녀는 나보다 의롭도다! 창 38:26a)



그렇다면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며느리 다말의 이 행위가 어찌하여 의(義)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또 메시아 예수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는 첫 번째 여성으로서(마 1:3) 도도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구약성서는 단호하게 다말의 이 행위를 의로운 행위라고 말하고, 뿐만 아니라, 그 의(義)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족장 유다를 이겼다고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를 다루던 그 문맥과는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딜레마의 현실은 사실 정의에 대한 개념정의가 갖고 있는 바의 본질이요 그 진정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현실이 그러하고 또 마이클 샌델의 정의이론의 현실이 또한 그러합니다. 말하자면 ‘의(義)’는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지! 결코 단순한 흑백논리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성서의 현실이 갖고 있는 그 고유한 특징인 것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에 대한 해석은 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추구, ② 개인의 자유와 권리 존중, 그리고 ③ 도덕적 이상(理想)을 충족시키는 미덕 추구, 이 세 가지 모두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충족될 수 있는 정의이론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 다소 복잡하고도 변증법적인 작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러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행복추구, 마이클 조던의 자유시장 철학이 추구하는 것, 임마누엘 칸트의 최선의 도덕적 동기, 등등의 각 정의이론들에 대하여 마이클 샌델은 시시비비를 장시간 토의하게 하여 그 복잡한 토론들 속에 나타난 딜레마들을 헤쳐 나가게 한 후에야 비로소 최선의 해석을 도출해 내도록 하는 그런 방법으로 정의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진지한 토의와 대화를 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우리의 결론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에서는 의견을 같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첫째로① 정의는 적어도 정적(靜的)인 논리개념이나 도덕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역동적(力動的)인 성격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말 기사에서처럼 정의는 통속적이고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범주에서는 분명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째로② 정의는 결코 더 이상 흑백논리의 이분법으로서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국회(國會)가 보여주는 바, 합(合)을 결사 거부하는 정(正)과 반(反)의 목숨 건 이전투구는 분명 정의구현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정의(正義) 이해를 결코 어떤 개연성에 맡겨 두거나 또는 그 어떤 극단적 흑백논리에 맡겨 두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많은 법 자료들, 역사 자료들, 예언 자료들, 시와 지혜의 자료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일관되게 정의에 관하여 증언해온 바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정의는 성서에서는 철저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초로 한 관계개념으로만 설명되어 왔습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철저히 유한한 존재(‘땅의 먼지’;창 2:7; 3:19; 시 90:3)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즉 더불어 살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창 2;18; 레 19:17-18→눅 10:25-27), 독자적인 한 개인 개체의 도덕성 만으로서는 결코 의(義)를 일구어낼 수는 없다고 성서는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4:3; 53:3; 롬 3:10-18; 7:18 등등 성서 도처에서는 분명한 언어로 “의인은 없다!”라고 단언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단호한 어조로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막 10:18)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의(義)를 교육하는 하나님의 법의지(法意志)인 그 ‘토라’를 ‘주시는 분’과 그리고 그 토라를 통하여 의(義)로 교육(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의 관계라는 ‘관계맥락’에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義)를 가르침 받는 인간의 경우는 의를 가르치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mimesis를 통하여!)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의(義)는, 이런 의미에서 볼 때는, 불확정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의(義) 개념도, 다말의 의(義) 개념도, 율법자료(律法資料)들의 의(義) 개념도 그리고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의 사건(눅 23:47 cf. 마 27:54; 막 15;39)이 지닌 의(義) 개념도 모두가 다 의(義)를 어디까지나 관계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를 보고 한 이방인 백부장이 “그는 참으로 ‘의인’이셨다.”(눅 23:47)라고 증언한 것은 바로 이 사실, 즉 인류를 구원키 위한 대속의 죽음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의(義)의 요구에 복종하신 예수의 그 복종사실(빌 2:18)을 두고서 증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의(義)는 그 인간본성의 도덕성만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고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모방의 복종(Imitatio Dei, cf. 마 5:48)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의로 인정받는[義認받는] 것일 뿐입니다. 다말의 의(義)도 바로 이 때문에 의(義)인 것입니다. 다말의 의는 일반적 성(性) 모럴의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서 공동체(유다 가문)의 절박한 구원 요구에 성실히 응답하였다는 그 공동체와의 관계의 맥락에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마이클 샌델의 경우, 여기서도, 그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나?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성서는 매우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의는 태초의 인간창조 때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의(義)의 길을 간단없이 ‘가르쳐 오신 하나님과 가르침 받아온 인간’ 사이의 ‘구원자와 피(被)구원자’ 사이의 관계라는 맥락(救援史 神學) 안에서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인간구원의 역사(救援史)라는 맥락 안에 어김없이 붙박이처럼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는 그러므로 줄곧 인류와의 구원사적(救援史的) 관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의가 고백되고 찬양되어 왔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義)조차도!! 관계의 맥락 안에서만 의(義)라고 고백되어 왔던 것입니다. ‘구원’을 일구어내지 않는 것은 성서에서는 그 어느 것도 결단코 의(義)라고 칭(稱)해지지를 않습니다. 소위,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는 것은 그러므로 구원사의 맥락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의(義)는 전적으로 ‘구원 지향적(salvation-oriented)인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48:9-11은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역사를 통하여 “구원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는 기필코 성실하게 구원을 베풀어 오셨기 때문에”(출 33:19) 그의 오른 손에는 정의가 가득 차 있었다고 고백되었고 또 주의 “공의 때문에! 시온, 즉 선민(選民)의 예배 공동체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찬양되었던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선택-출애굽 구원-출바벨론 구원-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교회의 구원선교에 이르는 ‘야훼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성서의 응답은 전적으로 그분 하나님의 의(義)의 역사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문맥에서는, ‘정의’란 이러한 구원관계의 현실을 떠나서는 결코 의(義)라고 말해지지는 않습니다. 즉 성서의 의(義)는 결코 그 어떤 절대적 규범이나 윤리-모럴로서 말하는 의(義)는 아닙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의(義)는 단지 공동체 윤리의 관계 맥락 안에서만 비로소 의(義)라고 말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취(Delitzsch)라는 현대 성서주석가는 이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행위를 칭송하면서 “구약성서의 기준을 따르면 그녀는 분명 성녀(聖女)이다.”라고 결론지었던 것입니다. 구원 지향적이 아닌 그 어떤 흑백논리도 성서의 맥락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의가 아닌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앞에서는 쉿! 흑백논리는 물러가라! 며느리 다말의 의(義)가 시아버지 유다의 불의(不義)를 이겼도다! 그러므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의(義)는 찬양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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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릭

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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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수님 가문의 족보에 오른 다말
 
 
  창38:·1-30
 
 
     서 론
   “다말”은 “유다”의 장자 “엘”의 아내입니다.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니 자연히 다말은 무자한 청춘과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자가 슬하에 아들이 없이 죽을 경우 처자로 하여금 아들을 얻게 하는 고대 관혼법에 따라 유다는 시동생 “오난”으로 하여금 다말의 아들을 얻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은 다말에게서 자식이 나면 호적상 죽은 형의 아들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녀와의 정사를 회피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난 역시 죽게 되었으며 아직 나이 어린 셋째 아들 “셀라”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셀라 역시 장성한 후 형들처럼 죽을까 하여 다말을 꺼려 했습니다. 
   유다의 대를 잇기 위해서 다말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어느날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인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말이 임신한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유다는 자신을 유혹한 자부 다말을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다말은 지혜로운 여인인지라 정을 통할 때 유다에게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약조물로 받아 간직했다가 이것을 제시함으로 유익한 자는 자부편이 아니라 시아버지 편임을 밝혔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사였더라” (26절) 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왜 이러한 수치스러운 불륜의 사건을 에서의 족보와 비교하면서 수록해 놓았을까?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 역시 무슨 이유로 이러한 불륜의 여인을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족보에 삽입시켜 놓았단 말인가?
   물론 다말의 행위는 영원히 불문에 붙여야할 스캔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사의 측면에서 볼 때 섭리는 윤리를 초월하며 장차 오실 메시야는 죄를 덮어 주실 권리가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말은 유다의 끊어진 혈맥을 이은 공로자이며 구원사를 위하여 헌신한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찌하던지 본론으로 그의 행위를 더 살펴 보려고 하니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한 것을 논할 때에 많은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신혼초부터 불행한 여인 (창 38:6-11)
   유다가 장차 “엘”을 위하여 “다말”이라는 자부를 맞았는데 엘이 무슨 죄인인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함으로 여호와께서 벌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풍속대로 차자 “오난”은 형수 다말을 취하여 형의 계대(繼代)를 하게 해야 했습니다. 
   이 계대 결혼은 모세가 법에 의하여 확정되었던 것입니다(신25:5-10).  이것은 당시에 공인된 관습이었으며 지금도 인디언, 페르시아인,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관습입니다.  오난이 자식을 낳아도 자기의 대를 잇지 못할 줄 알고 아비의 뜻을 거역하여 피임법(避妊法)을 사용하다가 또 벌받아 죽었습니다.  이제 셋째 “셀라”는 어리기도 하지만 또 죽을까 두려워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이로써 다말은 참으로 저는 유다가에서 완전히 희생을 당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는 한 여인의 과거사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과거에서 매여있지 아니하고 자기 나름대로 계획적인 행동을 함으로 예수의 조상의 족보에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도 주안에서 무엇인가 하여서 교회에서 기리 남을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기억되고 교회에서 기억이 될만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2. 시아버지와 불륜으로 임신한 다말 (창38:12-23)
   다말은 유다 집의 맏며느리로서 자기 권리에 대해서만 전적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당할 위험을 (음행한 자를 끌어 내어 불사르는 것) 알면서도 이제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서라도 혈손을 얻어야겠다는 모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도덕적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본문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유다는 두 아들이 죽고 자부도 친정에 보냈는데 설상가상 격으로 아내 마져 죽었습니다.  얼마 지낸 후 그가 자기의 친구 “하라”와 함께 자기 양털 깎는 곳에 가기 위해서 딤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때 이 소문을 들은 유다의 자부 다말이 창녀로 가장을 하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딤나성문 곁에 앉아 있었는데 유다가 그리로 지나가다가 다말을 창녀로 보고 가까이 가서 동침하기를 청했을 때 다말은 자기 계획대로 담보를 청구하여 동침했습니다. 
   유다는 상처 후 일시적인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창녀와 동침한 것이 천추에 씻지 못한 불륜의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순간의 과실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인륜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처사들인데 이 불륜의 관계가 되어서 저는 임신을 하게 되고 그로써 저가 목적하고 고대하던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인가 성취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아니한가 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말이 다윗의 가문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갖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쌍둥이 아들을 출생한 다말 (출38:25-30)
   시부 유다가 노하여 잉태한 자부 다말을 불사르라고 명령했을 때 자부 다말은 자기에게 잉태케 한 사람의 약조물을 내보였습니다.  그것은 곧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였습니다.  그 약조물을 보자 유다는 마음에 가책을 느껴 자부 다말은 나보다 옳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장한 “셀라”를 주지 아니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다말은 해산하여 쌍둥이를 낳았으니 “베레스”와 “세라” 였습니다.  다말이 낳은 베레스는 다윗의 조상이 되어 메시야의 혈통을 잇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말도 메시야 족보에 들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야곱의 장자권을 얻었는데 유다의 장자권이 바로 쌍둥이 베레스에게 넘겨 짐으로 다말에게 난 베레스가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 계통을 잇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족보를 조금만 살펴보면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헤스론-람-암미나담-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이 불륜의 자식이 어찌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이 되었을까 입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다말이 시아버지를 택한 것은 음란해서가 아니요, 다만 자기의 남편이 죽은 것이 자기의 허물이 아님과 셋째 아들 셀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보다 더 큰 목적은 유다의 맏며느리로서 그 혈통을 계승할 책임과 만일 이 일을 이행치 못할 경우에는 자기가 축복 받은 민족에게서 끊어질 것을 두려워 함에서 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말의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의 신앙을 보시고 그를 성군 다윗의 조상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하게 하시고 천주에 기념케 하심이라고 볼 때에 오늘날 우리의 구원도 확신을 가진 후에는 행위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4. 유다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내민 도장과 끈, 지팡이를 알아보고 (26절)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가 잠깐의 향락을 즐긴 것이 상상치 못할 결과를 초래했음을 깨닫게 합니다.  만일 죄악을 저지른 인간에게 양심의 가책이 없다면 자신의 불의를 깨닫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다윗은 범죄 후 “나단” 선지의 준엄한 책망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이 저지른 간음죄와 충신 “우리야”를 전장에서 고의로 죽게 한 죄가 얼마나 엄청난 범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삼하12:13)
   빛이 비치기 전에는 자신이 있는 곳의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듯이 양심의 가책이 없으면 불의를 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계속적으로 들려오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면 불의에 대한 감각마저 상실됩니다. 
   “헤롯왕”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을 때에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습니다(막6:20).  양심의 가책을 깨닫게 해 주는 그 음성을 애써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불의를 깨달았으면 이제 조용히 그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하며 마음을 찌르는 양심의 소리를 그대로 수용한 오순절 날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행2:5-42).
 
 
     5. 시부 유다가 바른 판단을 하는 기사입니다. 
   26절에서 유다가 며느리 다말이 자기보다 옳다는 고백을 합니다.  만일 양심의 가책이 없다면 죄악으로 어두워진 심령이 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침반이 방향을 가르쳐 주듯이 이처럼 양심의 가책은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다윗이 왕궁에서 나와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고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끝까지 압살롬에 대해 대적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해 징계를 받는다는 것을 양심의 가책을 받고 바른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삼하16:11-12).
   바울은 마지막 때의 징조로서 사람들이 마음에 허망한 것을 많이 행하고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무지함이 있다고 말씀합니다(엡4:17-18).  또한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자신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다한 이야기를 쫓을 것을 예언했습니다(딤후4:3-4).
   단적으로 말해 마지막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아니함으로써 바른 판단을 못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나 자신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바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도 스스로 옳다고 속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양심의 가책이 지시해 주는 대로 바른 판단을 하며 삽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따라 솔직히 시인하고 이제는 바른 판단을 합시다.  그럴 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6. 다시 죄 짓는 행위를 막아 준 다말
   26절에 “유다는 다시는 며느리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양심의 가책은 사람이 한번 지었던 죄를 또 다시 짓지 못하도록 해줍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통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눅22:61-62).  그는 그 후에 다시는 주님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진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때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동일한 죄악을 또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죄악의 무서운 결과를 적날하게 깨닫게 해 주기 때문에 다시금 같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을 때 베드로를 통해 각 사람에게 들려진, 양심의 가책은 죄악의 무서운 결과를 적날하게 깨닫게 해 주기 때문에 다시금 같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끊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까?  양심의 가책 소리를 듣고 속히 그 죄를 끊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7.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행운의 다말
   과부로 처신하던 다말이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시부 유다는 대노하여 그 행음함을 인하여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하였으나 결국은 자기 책임인 것을 깨닫고 처벌은 단념하였으나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임신하여 보니 쌍태(雙胎)라 먼저 난자를 “베레스”라 불렀고 나중에 나온 자를 “세라”라 불렀습니다.  이로써 유다는 자부 다말로 인하여 자손을 후계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구약에 축복의 여인들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다말 외 여인을 살펴보면,
   첫째, “라합”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 여호수아가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 그들을 숨겨준 기생(妓生)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여리고성이 멸망하고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할 때 여호수아는 기생 라합을 구출해 주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살몬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증조부인 “보아스”를 낳았습니다(수2:1-21, 룻4:21).
    둘째, “룻” 이방 모압의 여자로서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며느리입니다.  룻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시어머니와 고난을 같이 하였습니다.  후에 라합이 낳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룻4:13-17).
   셋째, “밧세바”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을 행한 여인이었으나 후에 다윗의 처가 되어 “솔로몬”을 낳았습니다(삼하12:24-25).
   넷째, “마리아” 갈리리 나사렛에 살던 처녀로서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습니다(마1:18-25).  이상의 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대단한 명예를 얻은 것이니, 이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살게 되면 훗날에 이들과 같이 되지는 아니해도 하나님의 큰 사역에 한 면에서 공헌도가 빛나게 되는 장본인이 될 것입니다. 
 
 
     결 론
   다말은 유다의 가문에 출가하여서 가문의 대를 이어준 여성이었습니다.  즉 출가한 여인으로서의 책임을 완수했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이 나에게 주어진 소임이 있나니 그 사명을 꼭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명에 충성하시기를 바라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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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과 유다의 약속 ( 도장, 끈, 지팡이)


성경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

일단 무슨 내용들인지?찾아본 정보를 게시했습니다.


제가 투사를 통해서  본 장면을 전합니다.

성경 내용들은 그냥 사건들 중 하나로 해석해야 하며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면 안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도장은 임대업이며, 끈은 매트릭스라는 해석은 모두 렙틸세계의 입장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거짓 해석법입니다.

그리고 지팡이는 일종의 권위를 상징하며 그 권위는 최고의 우주창조자들로부터 시작되었고  비롯된것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세계에서 발생하는 권위의 의미는 빛의 천상계의 형태와 존재방식을 닮았다고 합니다.  즉 공정과 정의가 살아있는 권위를 의미하며, 그 반대적인 의미의 폭압과 압제를 뜻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계시가 왔습니다.


1) 도장


첫번째장면 :  

검정색 진회색 렙틸리언 악어무늬가 전체화면으로 등장했습니다.

즉 '도장 =임대업'이라는 뜻은 어둠세력들이 그들의 하는 일을 합리화하기위해서 성경구절을 빙자한다는 뜻입니다.


두번째 장면 : 

둥근 백색빛이 등장했으며 빛을 덮은것은 백색 그믈망입니다.

그런데 그믈의 교차지점마다 작은 구슬들이 매달려 있어서 여성들 머리 장신구 느낌들이 들었는데 구슬들마다  서로 다른 색상들입니다.

노랑색 하늘색 연두색 초록색 빨강색 등등 보석을 연상하는 색상들입니다.

즉 도장의 본래 뜻은 선의와 공의로서 서로서로를 이롭게 하기위해서 사용되는 순수한 물품이며 남녀 모두에게 자신들의 필요성들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라고 해석됩니다.



2) 끈 ㅡ 매트릭스가 맞는 해석인가?


첫번째 장면 :

도장과 같은 방식으로 렙틸무늬가 전체가 검정색 화면위에 전개됨으노서 끈이 매트릭스라는 해석은 어둠세력들이 그들의 아젠다와 생존전략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악의적인 해석이다!라는 뜻입니다.


두번째 장면 :

새끼 고양이들이 스쳐갔습니다.

이유는 말그대로 끈은 현실의 일상 생활용품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유는 새끼고양이들은 긴 끈을 굉장히 좋아하며 갖고 놀기 좋아합니다. 끈을 가지고 놀때 끈이 움직이는 선의 흐름들의 변화를 재미있게 관찰하는데, 성경구절의 끈은 일상현실의 물품들 중 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3) 지팡이 


첫번째 장면:

검정색 미세한 입자들이 공간에 떠있는데 이는 사념들이면서 부정적인 사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백색빛입자도 같이 섞여 있습니다.

즉 지팡이가 위원회라는 뜻은 맞는 해석이지만 본의가 어둠세력들에게 악용될 수도 있다는 뜻이며, 긍정적인 방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즉 권위는 빛으로부터 시작했으나 어둠들이 빛의 질서를 모방하고 흉내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번째 장면:

백색화면이 등장했습니다.

순백색 화면위에 백색 공이 등장했는데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데 다이아몬드빛 광채입니다.

공의 둘레를 순백색 격자문양들이 전체를 에워쌓았으며, 지구 하늘위에 격자가 설치되었다는 것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잠시후에 격자가 에워싸인 공자체가 형태가 순간적으로 변하는데, 민들레 꽃씨의 공형태로  바뀌면서 다이아몬드 빛입자들이 발산합니다.

긴 꽃씨들이 하나 하나 주변으로 퍼져나가자 꽃씨들은 순식간에 본체의 공모양과 같이 변하면서 본체 공형태 주변에 많은 닮은꼴 공들이 생겨났습니다.


이후에 보인 장면들은 순백색 수정느낌 보석들이 등장합니다.

다이아몬드 빛입자를 발산하는 투명한 보석들의 개체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거대한 그룹형태를 장식했는데 테두리는 금빛의 띠입니다.

전체 모양으로 보아서 지팡이 형태를 추상적으로 디자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인간세상의 권위는 빛의 천상계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인간세상에서 권위를  얻게 된다면 공의와 정의를  위해서 주변을 이롭게 해야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4) 지구인은 갇혀있는가?


이 문제는 혼의 성향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어둠화가 심한 혼은 갇혀있다고 느끼는 것이며

빛을 추구하는 혼은 갇혀있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빛의 영들은 갇혀있지 않으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많은 혼들은 갇혀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지구위의 격자는 악의적인  의도가 절대 없으며 애초에 빛의 에너지로 설계를 했으며, 천상계 존재들과 빛의 에너지들이 지구와 지구인들에게 얼마든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지구는 어둠계 에너지들도  동시에 공존하는 형태이므로

영적인 진실을 구분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혼선과 정신적인 불안감들만 가중시킬뿐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빛의지구 회원들 중 한분이 천상계출신이라고 했는데 맞는것 같습니다. 천상계의 에너지(빛의 공 ㅡ민들레꽃씨 형태)를 가지고 육화한 분이 맞습니다. 천상계에서 지구에 파견된 존재들은 레인보우휴먼님 이외 다른 많은 빛의 영혼들을 파견했으며 이런 이들에 의해서 하나님과 우주의 진실들이 올바르게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혼들이 갇혀있다고 느끼지 않으려면

빛의 영 출신이라면 자신의 영과 통합하면 됩니다.


만일 4차원계 출신이라서 사후의 길이 걱정이라면

수련을 하면서 영혼의 길을 개척하면  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예수그리스도와 성령하나님을 영접후에

빛지수 51% 이상을 달성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지구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벗어나서 윤회환생 굴레를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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