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달러짜리 거짓말, 홀로코스트 Part II.



악명높은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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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17일 :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라인베르크[Rheinberg Camp] 수용소를 개설했습니다. 이 곳은 길이 6마일 정도에 이르는 수용소로, 어떤 음식도, 거처도,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거대 수용소인 “라인 메도우[Rhein meadow]” 수용소 역시 4월 중순경에 만들어 졌는데, 이 수용소에는 애초부터 화장실이나 물이 아예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수용소들의 경우는 너무나 많은 수용인원들로 인해 아무도 자리에 누울 수 조차 없었습니다.
한편, 레마겐[Remagen] 근처, 크리프 수용소[Camp Kripp]에서는, 미국계 독일인이었던 찰스 폰 루티샤우[charles von Luttichau]라는 자가 “자신의 동료 독일인들이, 수용소 관리인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에 비해 채 5%도 안되는 음식만을 공급받고 있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는 수용소 담당 지휘관에게 이러한 불평을 털어 놓았으나, 그가 듣게 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
“제네바 협약 따윈 잊어라. 당신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


1945년 4월 하순 : 라인베르크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하인츠 얀셴[Heinz Janssen]은 당시 수용소의 상황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팔다리가 잘려져 나간 사람들이 마치 양서류처럼 진흙탕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떨었다. 밤낮 노천에서 벌거벗겨진 채로 있던 그들은 라인베르크 모래밭에 필사적으로 가서 누울려고 애썼다. 혹은 어떤 이들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구덩이들 속으로 쓰러져 들어가 영원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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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8일 : 독일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했습니다. 미 국무부는 스위스가 독일 포로들의 보호를 위한 공식적인 중재기관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이는 제네바 협약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어떠한 포로 보호 권한도 부여하지 않은 채, 미 국무부는 국제 적십자사[The International Red Cross]에게도 중재 사절단을 보내야 할 포로 수용소는 한 군데도 없다고 알렸습니다. 이날 이후로, 미 육군의 통제 하에 놓여 있던 포로들에게는 어떠한 중립적 관찰자의 접근도 차단되었습니다. 영국과 캐나다 군대도 마찬가지로, 스위스가 보호자들을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적어도 전쟁 포로들에게만큼은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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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15일 : 아이젠하워와 처칠은 독일 전쟁포로들[POW’s]에게 지급되는 배급량을 더 줄이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처칠은 POW들에게 하루 2,000칼로리의 음식이 공급된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는데(미군 병사들에게는 4,000칼로리가 제공되었습니다.), 일정한 거처에 정주해 있는 성인 남성에게, 필요한 절대 최소량으로 간주되는 영양분은 2,150칼로리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는, 미 육군이 ‘무장해제 적 병력들(DEF’s)’에게는 아예 아무것도 먹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외에도 다수의 수감자들에게는 하루 2,000칼로리에도 훨씬 못 미치는 음식만이 제공된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1945년 5월 중순 : 라인란트[Rheinland]에 있는 바트 드로이츠나흐[bad Dreuznach] 근처, 빙젠[Bingen] 수용소에는, 20만명에서 40만명에 이르는 독일 전쟁포로들이 수용되었지만, 거처도, 음식도, 물도, 의약품도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의료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수용소들에서 수감자들의 사망률은 연간 30%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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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중순 : 영국 “육군[Tommies]”은 거대한 라인베르크 수용소를 미국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수천명의 독일인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양키들[Yanks]”이 영국인들에게 수용소를 넘겨 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이란, 땅 속 구덩이들 속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의 한 쪽 면을 완전히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 생각에는, “어떠한 포로들도 잡지 말 것”이라는 명령 아래, 12,000명에 이르는 이라크 병사들이 아직 참호 속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누가 그 위를 흙으로 아예 덮어버렸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러는 동안, 미 육군 의료단의 한 의사팀은 라인란트 지역에 걸쳐, 8만여명의 POW’s(DEF’s가 아닙니다.)를 수감하고 있던, 소규모 수용소들에 대한 조사를 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확인하게 된 사망률은, 자신들이 직업 의료인들로서 전 생애에 걸쳐 보아온 그 어떠한 사망률보다도, 무려 80배정도나 더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1945년 7월 : 아이젠하워는 독일내 미국 관리 지역의 군사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위스, 미국,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구호 및 봉사 활동팀들을 모조리 거절하고 되돌려 보냈습니다.


1945년 7월 10일 : 루소 장군[Gen. Rousseau] 지휘하에 있던 한 프랑스 육군 부대는 디터샤임[Dietersheim] 수용소(마인츠[Mainz] 근처)를 미국인들로부터 넘겨 받았습니다. 그런데 루소 장군은 전 연령층에 걸친 남자와 여자들이 다 포함된 32,000명의 사람들이 모두 죽어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7일 후 지휘권을 넘겨 받은, 또다른 프랑스 장교, 줄리앙 대장[Capt. Julien]은 거대한 진흙더미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해골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젖은 판지들을 이어 붙인 더미 속에 떼지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경악한 줄리앙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이 모습들은 마치 부헨발트[Buchenwald]와 다하우[Dachau]의 사진들을 보는 것 같다.”

*** [이제 당신들은, 바로 그 똑같은 사진들이, 당신들의 “홀로코스트 주간[Holocaust Weeks]”이 돌아올 때면, 독일 강제 수용소를 대표하는 사진들로 가장 자주 전시되는, 바로 그 사진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독일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들??  아니올시다!!  바로 그들은 당신들의 사랑스러운 시오니스트 미국인들의 손 아래 죽어가던 독일인들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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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4일 : 아이젠하워는 모든 남아 있는 독일 POW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의 지위를 DEF로 바꿀 것을 명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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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30일 : 국제 적십자사의 장, 막스 후버[Max Huber]는 굶주리는 독일인들을 도우려는 노력을 차단하는 미국의 개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편지를 미 국무부에 보냈습니다. 몇 달 뒤, “아이젠하워”가 사인한, 즉답을 회피하는 답장이 도착했는데, 이 편지에는 국제 적십자사가 적대국의 사람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거짓된 주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차로 수천대 분량에 이르는 음식물들이 이미 부패한 채로, 원래의 발송지였던 제네바, 파리, 브뤼셀등지로 되돌려 보내졌습니다. 후버는 미국측으로부터 되돌려 보내진 음식물들 때문에, 프랑스 철도 운영에 불편을 야기한 문제로 프랑스측에 사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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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늦여름 : 국제 적십자사 프랑스 본부장, 장-삐에르 프라더방[Jean-Pierre Pradervand]은 미국 국제 적십자사 고위 관료였던 헨리 W. 더닝[Henry W. Dunning]에게, 프랑스가 관리하고 있는 수용소들의 상태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견주어 봤을 때, 오히려 이전 나치의 수용소들의 상태보다도 더 악화되어 있다고 알렸습니다. 프라더방은 살아있는 해골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더닝에게 보여줬습니다.

더닝은 이 모든 사실들을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제 적십자사에 알렸고, 미국 국제 적십자사는 이를 다시 미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속임은 계속되었습니다. 프라더방은 또한 미국측으로부터 넘겨받은 포로들 가운데 3분의 1이 당장에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1890-1970, 군인, 정치가. 1945-46년 프랑스 총리, 국방장관, 59-69년 프랑스 대통령—역주)에게도 알렸습니다.
하지만 드골은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포로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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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30일 – 10월 1일 : 프랑스 신문, 르몽드[Le Monde]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는 기사를 하나 실었습니다 : “오늘날 사람들이 다하우[Dachau]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10년 뒤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생 폴 데지오[Saint Paul d’Egiaux]와 같은 수용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글쎄요, 어쨌거나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군요.
—왜냐하면 당신들 눈 앞에 보여지는 그 많은 사진들이 사실상 독일의 강제 수용소들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당신들은 당신들의 적들에게 바로 그 사진들을 고스란히 공급해 주고는, 그들이 홀로코스트라는 광대극을 계속해서 펼쳐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한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는데, 사람이 해골이 될 정도로 수축되게 되면—그들 모두가 전부다 똑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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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연합국의 전쟁범죄[ALLIIERERTE KRIEGSVERBRECHEN]’라는 책의 독일어판 초판이 발간되었습니다. 결코 영어로 번역된 적은 없었던 이 책에는, 미국인들의 수용소들에 만연했던 참상을 밝히는 목격자들의 진술이 들어 있었습니다.

1960년대 – 1972년 : 빌리 브란트[Willy Brandt](1913-1992, 1966년 서독 외무장관, 69-74년 서독 수상 역임, 1971년 노벨평화상 수상—역주) 정부하의 서독 외무성[The West German Foreign Office]은, 미군 통제하의 전쟁 포로 수용소들에서의 학살과 높은 사망률 문제를 부인하는 책들의 출판에 보조금을 댔습니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당신들의 친구들을 두고 있다니! 정말로 멋진 일이군요!


1980년 : 적십자사 국제 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orss]는 연합국의 학살 행위를 조사하려는 제임스 바크[James Bacque]와 다른 조사자들에게 자신들의 서고를 개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프라더방[Pradervand]을 비롯한 적십자사의 사절들이 그렇게 많은 수용소들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적십자사 국제 위원회는 이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1989년 9월 : 미군들이 관리했던 죽음의 수용소들의 문제를 다룬, 제임스 바크[James Bacque]의 책 “기타 인명 손실[Other Losses]”은, 무려 30군데가 넘는 미국 출판사들로부터 모조리 출판을 거절당한 후에, 스토더드[Stoddard]사라는 한 캐나다 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문제에 관해 이견을 보이는 것만큼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적으로, 캐나다에서 가장 권위있는 잡지 가운데 하나인 ‘새러데이 나이트[Saturday Night]’는 이 책의 서두를 인용하여 책 줄거리를 실었는데, 불과 몇 일 안에 캐나다는 아이젠하워 장군의 전쟁 범죄에 대한 의문으로 술렁거렸습니다. 이처럼 잡지에 언급(그것이 비록 단 2일간이었지만)되기까지 했지만, 왜 당신들은 미국에서는 이 책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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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을 때, 각지로부터 목격자들의 보고가 날아 들었고, 지금 이미 한더미가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제발 비밀만은 보장해 달라고 부탁했었고, 동시에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격려해 주었습니다.

지금, 나의 서기와 이 문제에 관한 진술자들 모두는, 온 사방팔방으로부터 열려진 채, 저마다 가슴에 커다란 과녁 하나씩을 달고 있으며, 현재 이들은 그 부담감에 지쳐 있습니다. 당신들, 소중한 시민들에게 이에 대한 비밀이 계속해서 유지된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은 이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있어야 할까요?

나는 엄격한 허락이 없이는, 그들의 이름과 거처를 결코 누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에 관한 것들을 실제로 목격했고 또 이미 알고 있는 당신들이 앞에 나서지 않는다면, 과연 당신들은 어떻게 변화라는 걸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 가운데 수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바로 소위 전쟁 중에 있었던 ‘진짜 학살 행위들’에 대해 알고 있고, 봤으며, 경험했습니다.

당신들은 스러져간 당신들 동료들의 주검 앞에 결코 눈물을 흘리는 일을 멈춰서는 안될 것입니다—그러나 최소한 당신들은 그들의 죽음이 가치있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들의 집에서, 해병대에서, 공군에서, 육군에서, 해군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선은 바로 당신들의 집 앞마당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 당신들은 이 전쟁에서 머지않아 패배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이미 주요 “전투들”에서 죄다 패전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시오니스트의 선전물들[Zionist propaganda]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만이, 당신들로 하여금 가까스로 이 제 3차 세계 대전을, 현재 그 똑같은 단일 세계 정부주의자들에 의해 기획 중에 있는, 이 전쟁을 겨우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제 2차 세계 대전 중, 유태 “인종 박멸[racial extermination]” 정책의 희생자들이라고 주장되는, 학살의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만약 당신들이 다음 번에 다시 보게 되거든, 바로 그 사진들이 실은 미국 전쟁 범죄자들의 손 아래 죽어 나간 독일 민간인들의 사진임을 기억하십시오!
pp.15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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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


우리는 당신들에게 “사실들[facts]”만을 제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은, 소위 자칭 시오니스트들[Zionists]이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죽음의 협박아래 시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들은 스스로 시오니스트들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신분은 절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이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관련 논문과 서적들을 불태워버리고, ADL(Jewish Anti-Defamation League : 유태인들의 반인종주의 동맹)을 통해 협박용 소포들을 연루된 모든 TV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에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말하는 자유라는 겁니까?
당신들은 당신들의 정부가 동성애 장면이 담긴 사진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에 돈을 대는 일을 허락하고, 포르노그라피적 연극들이 국고보조금을 받아가며 공연되는 것도 용인하며, 기타의 온갖 외설적인 매체들이 국가의 보호아래 번성하는 일들은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봐요, 여기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통계 자료들이 좀 잘못되었다는 걸 입증해 줄만한 증거가 있어요.”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그는 곧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협은 바로 ‘공인된 스토리 라인[THE ORTHODOX VERSION]’만을 제시해 주는 바로 그 그룹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여! 당신들, 그 의도에 관해서 최소한의 의문이라도 품어볼 수 있을 정도만큼은 현명해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나마, 오늘날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합법”이기에, 우리는 우리들의 손가락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글을 써 내려갈 작정입니다—바로 당신들에게 축적된 “사실들”을 제공하여, 적어도 당신들이 ‘감정’이 아닌, 바로 ‘사실들’에 근거하여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듣는 것’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주어지는 진실들로부터 고무되어 자칫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면, 당신 주위에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하나님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그런 것입니다.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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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는 속임수입니다.


다양한 비망록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있다면, 그건 나치즘의 악령에 사로잡힌 갸날픈 유태인 소녀의 사진이 담긴 책, ‘안네 프랑크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진실을 말하자면, 이 책은 오직 조작된 선전물들의 전설 가운데 가장 소름끼치는 일례일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조작임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이 입증되었지만, 언론 매체들과 시오니스트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진실 전달자들을 묵살시켜 왔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예를 하나 든 것 뿐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이 책이 조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차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란, 설령 어떠한 모순점들이 지적된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내용이 당신들의 언론매체나 출판물들을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는 일은 결코 허락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실을 담은 책들은 추방되고, 빅매치 축구 경기는 실시간으로 생중계 되는 것입니다. 바로 누군가 당신들에게 진실을 알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1952년 처음 출판되자마자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이 후로 이 책은 40쇄에 이를 정도로 끊임없이 재간행되었으며, 성공적인 헐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소녀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Otto Frank]는, 로열티 하나 만으로도, 딸아이가 겪은 비극이라고 주장되는 이 책의 판매로부터 거금을 벌어 들였습니다.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력으로 인해, 이 책과 영화는 말 그대로 전세계에 걸쳐 수백만명의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런 류의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그 영향력은 단연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 첫 출판이 있고 불과 7년 후에, 이 책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뉴욕 대법원 판결에 따라 결국 조작임이 이미 판명되었던 것입니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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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패턴의 조작된 책들로는, 이야기도 거짓이지만, 저자마저도 가공인물인, 미클로스 니스즐리[Miklos Nyiszli]의 ‘아우슈비츠의 의사[DOCTOR AT AUSCHWITZ]’, 그리고 필립 프리드만[Philip Friedman]의 ‘이것이 아우슈비츠였다 ; 학살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THIS WAS AUSCHWITZ ; THE STORY OF A MURDER CAMP]’ 기타 등등 무수히도 많습니다.


이런 류의 책들로 하나 정도 더 소개하자면, 마르틴 그레이[Martin Gray]의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서[FOR THOSE I LOVED]’(보들리 헤드[Bodley Head] 출판사, 1973)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폴란드의 트레블링카[Treblinka] 수용소에서 저자의 실제 경험담을 기록한 내용이라고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레이는 강제 수용소에 대한 비망록을 쓰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허구의 고대 역사물을 만들어 팔아온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 비망록이 출판되었을 때, 주변 상황이 꽤나 특이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책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거의 최초로, 그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태인들 조차도 그의 책이 거짓일 것이라 여겨 비난하고, 이것이 홀로코스트의 실제성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정말로 그가 트레블링카에 있긴 있었던 건지를 따져 물었습니다. B.B.C.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왜 그가 자신의 경험담을 쓰기까지 28년 동안이나 기다렸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당신들 모두가 반드시 깨달아야 될 사항이 있다면, 이러한 거짓말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라는 것입니다. 강제 수용소에서 나온 뒤 자신의 가족 구성원들을 모두 찾은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이 모두 행방불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만큼,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수용소 안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심지어 옆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이 같은 상황들 속에 있었기에,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 당신들이, 당신들의 정부는 순수하게 당신들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들의 ‘느낌’은 분명히 다른 말을 전해 주고 있지만, 그냥 “공인된[orthodox]” 이야기들을 믿고 넘어가 버리는 편이, 보다 쉽고 안정적인 것입니다.수용소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에게 아우슈비츠에서 찍은 것들이라고 주장되는 사진들을 보여주었을 때,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그 사진들이 실은 아이젠하워의 죽음의 포로 수용소에서 찍힌 사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당신들이 분별력을 되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당신들은 명확한 “사실들[facts]”만을 접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 오직 그런 연후에만[THEN, ONLY THEN],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로는 어떠했던 것일까라는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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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된 사망자 수


다하우[Dachau]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추정되는 사망자들의 수는 전형적인 과장의 일종으로, 이후 광범위한 수정이 가해져 왔습니다. 1946년, 바바리아주 정부[Bavarian Government] 유태계 내무장관이었던 필립 아우어바흐[Philip Auerbach]는 다하우에서 유태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명판[memorial plaque] 제막식을 가졌습니다.—그는 나중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태인들에 대한 보상금 횡령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한 자였습니다. 어쨌거나, 그날의 추모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습니다 :
“이 수용소에서 화장된 238,000명의 영령들이 여기 잠들다.” 그런데 그 명판의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어 지금은 20,600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그들 중 대다수는 전쟁 말미에 창궐했던 장티푸스[typhus]와 기아로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최초 기재 숫자의 10%로까지 줄어든, 이 같은 축소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계속 이어질 것이고, 언젠가 6백만명이라는 이 전설적인 숫자에 대해서도 대규모의 손질이 가해질 것입니다.


왜 시오니스트들이, 홀로코스트에 관해 그들이 제시하는 공식적인 이야기[ORTHODOX ZIONIST TALE]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조차도 불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십니까? 진실을 잠재워 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를 막무가내로 덮어 버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아예 불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피닉스 저널과 관련 출판물들[The Phoenix material]에 대해 이견을 보이는 자들이, 당신들로 하여금 이에 아주 접근조차 못하도록 막아서는 이유도, 이 책들을 불태워 버리고, 금서로 만들어 버리는 이유도, 다 마찬가지입니다.—바로 당신들, 국민들이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p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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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혼란


질서정연하게 유지되던 독일의 수용소들도, 1945년, 마지막 공포의 몇 달 동안은 서서히 안정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적십자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연합군들의 집중 포화는, 제국[the Reich]의 교통 수단도, 통신 시스템도 모조리 마비시켰다고 합니다. 어떠한 음식물도 수용소에 공급되지 못했기에 아사자가 급증하였으며, 이 같은 상황은 비단 수용소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일반 국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수용소들 안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수용인원들이 있었기에 그에 따른 결과로 장티푸스와 같은 질병들까지 만연하게 되어,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과잉 수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러시아가 진군해 오기 이전에, 독일 동부 지역의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들의 수감자들을 서부 지역의 수용소로 이송시켜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벨젠[Belsen] 수용소나 부헨발트[Buchenwald] 수용소와 같은 서부지역 수용소들은 이미 그들 나름의 고충을 겪고 있던 중이었지만, 기진맥진한 사람들의 행렬이 연이어 도착하였습니다. 브레멘[Bremen] 근처에 위치한 벨젠 수용소의 경우는, 특히나 이 몇 달간 더 큰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힘믈러[Himmler]의 주치의이자, 반나치주의자인 펠릭스 케르스텐[Felix Kersten]은 이 수용소가 “죽음의 수용소[death camp]”라는 오명을 갖게 된 데에는, 불행히도, 1945년 3월 그곳을 휩쓸었던 혹독한 장티푸스가 그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설명합니다(‘비망록 1940-1945[MEMOIRS 1940-1945]’, 런던, 1956년). 의심할 나위도 없이 이같이 공포스런 상황들은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었고, 이 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메마른 사람들과 쌓인 시체 더미를 찍은 사진들은 나중에 시오니스트 선전꾼들의 손에 넘어간 후엔, 이 사진 속 사람들이 바로 “대량 학살”의 희생자들이라는 주장 아래 얼마든지 흔쾌히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의 정부는 이라크 국민들이 끝없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어 나가는 상황을 계속해서 방치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변명을 하겠습니까? 당신들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 나라,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과 생필품과 구호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를 상대로, 구호물자들을 보내주길 끝없이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이 문제를 역사의 증언아래 앞으로 어떻게 다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아, 그렇군요, 내가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이번에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불법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겠군요!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pp.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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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진실이.. : 폴 라시니에[PAUL RASSINIER]의 연구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유태인 학살 문제에 관해서 진실로 신뢰할만한 연구 결과를 남기는데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폴 라시니에[Paul Rassinier] 교수입니다. 그의 연구가 높은 가치를 지니는 데에는, 우선적으로 라시니에 본인이 독일 강제 수용소를 실제로 경험해 봤기 때문이며, 또한 좌파 지식인이자, 반나치주의자로서, 히틀러와 나치즘을 변호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공정성과 역사적 진실성만큼은 잃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그는 종전 후 1966년 사망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의 남은 전 생애를 이 연구에 바친 끝에, 6백만명의 희생자라는 신화와 나치즘을 악마화시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거짓된 주장임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당신들의 적은 나치 독일이 아니었습니다.—당신들의 진짜 적은 늘 그래왔듯, 하자리안 시오니스트들[KHAZARIAN ZIONISTS]을 구성하는 소비에트 하자리안들[SOVIET KHAZARIANS]인 것입니다. 이들 소비에트인들은 이미 당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당신들(미국)을 점령시킬 것이다!” 그리고 레닌[Leni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목 매달게 될텐데, 이 때 당신들을 목 매달 밧줄은 바로 당신들이 우리에게 제공해 줄 것이다.”


라시니에는 1933년부터 1943년까지 브장송 아카데미[Académie de Besançon], 벨포흐[Belfort] 일반 교육 대학, 역사학 교수였습니다. 전쟁 중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는데, 1943년 10월 30일 마침내 게슈타포[the Gestapo]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 후, 부헨발트[Buchenwald]와 도라[Dora]의 강제 수용소에 1945년이 될 때까지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말미, 부헨발트에서 그는 장티푸스에 감염되었는데, 너무나도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다시 교편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라시니에 교수는 ‘레지스탕스 운동 메달[Médaille de la Résistance]’과 ‘프랑스 감사패[Reconnaissance Française]’를 받았으며, 프랑스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1946년 11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 후, 그는 자신의 일생의 역작이 될, 소위 독일의 전쟁 중 학살행위, 그 중에서도 특히 유태인 “학살”이라고 주장되는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그의 저술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불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이 거의 없고, 특히 영어로 번역된 것은 단 한 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오딧세이의 거짓말[LE MENSONGE D’ULYSSE]’(The Lies of Odysseus, 파리[Paris], 1949년)은 독일 강제 수용소에 관한 선전꾼들의 주장을 부인하는 내용으로 앞서 다른 저서의 속편 격이었습니다.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은 마지막에 출간된 두 권으로 하나는 ‘아이히만의 진짜 소송[LE VERITABLE PROCES EICHMANN]’(1962년), 다른 하나는 ‘유태인들의 유럽 참극[LE DRAME DES JUIFS EUROPEEN]’(1964년)이란 책들로, 여기서 그는 주의깊은 통계자료들을 바탕으로 유태인들의 운명과 관련된, 부정직하고 무모한 왜곡 사항들을 낱낱이 밝혀 냈습니다.

특히 이 마지막 두 권에서, 그는 유태인 학살이라는 전설이 갖는 정치적, 재정적 함의와 더불어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 공산주의 세력들이 어떠한 이득을 편취해 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석해 냈습니다.


당신들 생각에 누가 U.N.을 설립하는데 도구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보십니까? 이스라엘 건국은 어떻습니까? 누가 유엔 군병력 통제를 책임지는 자리에 소비에트 지휘관을 갖다 앉혔습니까?

아하! 이제 머리에 불이 좀 들어오기 시작하십니까??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실상 대부분 문제들의 정치적 측면과는 전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당신들, 미국과 세계 시민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유태인들”이라고 잘못 이름 붙여진, 소비에트 하자리안들(당신들 행성의 엘리트 은행가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들이 소위 “유태 핏줄[SEMITIC]” 넌센스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실은 전혀 헛다리[SHADOW-BOXING]를 짚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유태인 문제란 그저 훼방꾼들이 만들어 놓은 현혹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부시[BUSH]입니까? 왜냐하면, 그는 범죄 행위들의 역사적 기록들과 관련하여 완전히 매수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 국가의 어떠한 정당도, 행정부도, 의회도, 이 범죄적 행위들을 공개적으로 밝혀낼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매수와 교묘한 침투행위들로 이미 ‘코뚜레가 꿰인 당신들의 정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라시니에의 연구가 갖는 여러가지 장점들 가운데 한가지는, 독일인들의 “사악함”이라는 엉터리 신화를 완전히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요란한 선전물들이 자아내는 짙은 안개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 진실[historical truth]이 그처럼 말소될 수 있었던 건지를 밝혀 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의 연구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들의 운명과 관련된 내용들이, 처음 한 때는 전혀 왜곡되지도 않고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허풍에 찬 “범죄행위들”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더니, 급기야 보다 더 거대하고 광범위한 비극 속에서 오직 단 한가지 측면만 부각된 채 묘사되어져 버렸음을 밝혀냈던 것입니다.

1960년 봄, 보다 널리 책을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서독을 들렀다가, 라시니에 교수는 독일 청중들을 향해, 이제야말로 유태인 학살의 전설과 관련된 진실이 밝혀져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인 자신들이 직접 나서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왜곡된 추정들이 계속 남아 있게 된다면, 이는 세계인들의 눈을 통해서 볼 때, 결코 전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는 국가적 얼룩으로서 독일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게 될 것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반드시 주목해야 될 사항이 있다면, 이 때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공인된 이야기[the orthodox Jewish expression of the Holocaust]’라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 논의를 일삼는 행위 자체가 중죄로 다스려지는 법안이 통과되어, 독일인들을 탄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이여, 당신은 다음 차례입니다. 당신들의 의회와 UN의 회의 석상에서 이 법안은 지금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pp.2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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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각된 “6백만명”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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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페이지에 달하는 교차 검증 통계 자료[cross-checked statistics]를 바탕으로, 라시니에 교수는 자신의 책 ‘유태인들의 유럽 참극[LE DRAME DES JUIFS EUROPEEN]’에서 제 2차 세계 대전 중 유태인 사망자들의 수는 결코 1,200,000명을 넘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사실이 파리에 있는, ‘현대 유태인 관련 문서 국제 보관 센터[the World Center of Contemporary Jewish Documentation]’를 통해서도 유효한 것으로 마침내 받아들여졌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그러한 인정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그 같은 수치가 ‘최대값[maximum limit]’으로 간주되며, 추정 하한선은 896,892명으로, 이는, 같은 문제를 연구한 라울 힐버거[Raul Hilberg]라는 유태인 통계학자가 그의 연구를 통해 제시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개인당 5000마르크씩을 책정하여, 6백만명분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청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라시니에는 지적했습니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어 돌아가는 상황인지에 대한 보다 나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에, 초등학교 학생들도, 단지 896,892명일지도 모르는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한 사람당 5000마르크씩 6백만명분을 청구한다는 것은, 너무 욕심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통제하고 있는 이 하자리안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Khazarian Communist (Soviet)]은 항상 돈 문제만 나오면, 그게 자신들과 관련되었건 관련되지 않았건 간에, 앞에 나서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돈은 당신들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이긴 합니다만.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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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이쯤 해서, 전쟁기간 중 유태인 사망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뉘른베르크, 아이히만 재판에서, 독일 점령지에는 9백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있었다는 주장과는 달리, 대규모 이주가 있은 이후, 유럽 지역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은, 소련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제외했을 때, 대략 3백만명 정도였습니다.
독일이 관할했던 러시아 땅의 유태인들을 포함시킨다손 치더라도(대다수의 러시아계 유태인들은 독일 통제 범위 밖으로 철수했었습니다.), 전체 규모는 4백만명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힘믈러 휘하의 통계학자, 리샤르트 코헤어 박사[Dr. Richard Korherr]와 ‘현대 유태인 관련 문서 국제 보관 센터[the World Center of Contemporary Jewish Documentation]’에서는 독일 점령지역 유태인 수를 각각 5,550,000명과 5,294,000명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모두 독일의 영역이 가장 넓었을 때의 통계로, 발트해 인근 지역과 러시아 서부 지역에 살던 2백만명의 유태인을 포함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가 독일 진주 이전에 이미 철수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던 상황에서 나온 수치인 것입니다.

하지만, 설령 그 정도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유럽과 서부 러시아를 통틀어도 결코 6백만명이 넘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현대 유태인 관련 문서 국제 보관 센터’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과정 상에서, 기소측이 의도적으로 희생자들의 숫자만큼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6백만명의 학살에 대한 신빙성을, 실상 스스로 부인한 것임을 잘 웅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사망자 수에 대한 공식적인 유태계 통계 자료들은 조용히 하향 축소 조정되었습니다. 스위스의 ‘바젤러 나흐리히텐[Baseler Nachrichten]’지 기사내용이나 라시니에 교수의 연구 뿐만 아니라, 인구와 이주 현황에 대한 통계 자료들을 살펴 보더라도, 유태인 사망자 수가 150만명을 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며,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저 얼간이 같은 일임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이를 세상에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파리의 ‘현대 유태인 관련 문서 국제 보관 센터’에서 오늘날, 전쟁 중에 있었던 모든 원인들로 죽은 유태인 사망자들의 수를 전부다 합치더라도 그 수는 1,485,292명에 이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명백히 그 수치가 여전히 너무나 높지만, 적어도 이것이 어떠한 면에서 견주어 보더라도, 결코 전설적인 6백만명에는 매치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유태인 통계학자 라울 힐버거는 심지어 이보다 훨씬 더 낮게, 869,892명으로 평가합니다. 보다 실제적인 수치에 접근해 가는 것이며, 분명히 이 같은 숫자 문제 정정에 관련한 소송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수천명도 넘는 유태인들이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전쟁이라는 맥락 아래에서 평가되어져야만 할 문제로, 양쪽 진영 모두에 걸쳐 수백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조망해 볼만한 자료가 있다면,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 공습[the siege of Leningrad] 동안 700,000명에 이르는 러시아 시민들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연합군의 공중 폭격만으로 사망한 독일 시민들의 숫자는 도합 2,050,000명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독일인들은 전쟁 후에 본국으로 강제송환 되었습니다. 1955년, 중립국 스위스에서 나온 또 다른 자료를 하나 살펴 보자면, 취리히의 ‘디 타트[Die Tat]’지(1955년 1월 19일자)는 국제 적십자사 통계 자료에 근거하여 제 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희생자 수에 대한 조사에서,
“1939년에서 1949년 사이,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박해의 일환으로 감옥이나 수용소에 감금된 자들 가운데 사망에 이른 희생자 수”는 총 300,000명이라고 밝혔습니다.—물론 그들 모두가 다 유태인들은 아니었습니다.—이 수치는 가장 정확한 평가에 가까워 보입니다.



상상 속의 학살


유태인 학살의 전설과 관련하여 가장 적절히 제기해 볼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독일 통제하에 있던 3백만명의 유럽 유태인들 가운데 1945년 이후 몇 명이나 살아 남았는가? 유태 연합 분포 위원회[the Jewish Joint Distribution Committee]는 생존자들의 수를 150만명 정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수치입니다. 왜냐하면, 1939년에서 1945년 사이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서독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유태인들의 숫자가 희한하게도 점점 더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1965년까지, 서독 정부에 등록된 보상 요구자들의 수는, 지난 10년간 세 배로 뛰어서, 결국 3,375,000명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우프바우[AUFBAU]’지 1965년 6월 30일자.) 6백만명의 학살이라는 뻔뻔스러운 환상에 대해, 이보다도 더 아연실색할만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보상 요구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유태인들입니다.

말하자면, 유럽에서 나치 치하에 있었던 3백만명의 유태인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이런저런 통계나 연구결과에 따른 추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다 잘 살아 있었다는 뜻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제 2차 세계 대전 중 유태인 희생자들의 수가 사실상 단지 수천명에 불과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평가에 대한 놀라운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는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퍽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요? 도대체 누가 이 엄청난 상상 속의 학살에 대한 보상권을 갖고 있단 말입니까? 유럽의 한 대국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치감을 안겨 준 채, 그들로부터 이 기만적인 보상금을 쥐어 짜낼 권리를 도대체 누가 가졌다는 겁니까?

이러한 수치감은 비단 한 국가에게만 안겨질 문제는 아닙니다—이러한 수치심은 세상 모든 국가 모든 국민들의 가슴과 어깨 위에 지워져야 할 것입니다. 이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가공할만한 사기극에 대한 진실을 우리가 당신들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바로 당신들의 양심을 교정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오, 당신들, 기만과 거짓말 속을 살아가는 세계 시민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기만으로부터 깨어나기 전까지는, 끝없이 증대되어 가기만 하는 혼란들 속에서 고문당할 것입니다.

하나의 단일 세계 정부 아래, 전 세계 모든 국가 국민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2000년도에는 시행에 옮기려는 목표 아래, 본 궤도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의 사악한 의도의 발로인 것입니다.
pp.211-213.
……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40권, “THE TRILLION DOLLAR LIE, THE HOLOCAUST. Vol. II — The lies of the “Death Camps”, the deliberate lies of the “numbers”. THE MYTH OF THE SIX MILLION”, 제6-15장, pp.86-213에서 발췌.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