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의 10월

 

 

이 책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오래된 노트 몇 권을 보게 되었다. 내가 10대의 중반 이 후, 내가 누구인가? 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던 과정에서 쓰게 된 일기와 수필 등이, 중요한 부분만 요약되어 정리된 것이었다. 오랜 시간 이것에 대해 잊고 있었으며, 그나마 버려지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일기는 1966년 1월부터 1970년 8월까지의 내용 중의 일부였고, 수필은 1969년과 1970년에 쓴 것에서 추려 모아진 47개의 글이었다.

 

 

처음 이 책을 구상할 때는 이러한 기록들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다시 보면서 ‘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글을 보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되어 수필 중의 몇 개와, 발견된 노트와 함께 있었던, 대학 졸업 때 작성된(1978년 10월) 논문인 ‘역사철학(歷史哲學)과 현대문명(現代文明)에 대한 일고(一考)’ 란 제목의 글을 아래에 옮긴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적지 않은 분들이 지나 왔으리라고 생각 되며, 이 글들을 여러분의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마음으로 보아주시면 고맙겠다.

 

 

일기와 수필들을 정리하여 모으면서 작성된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했다. ‘큰 두 가지의 목적을 위하여 나는 이 책(글)을 쓴다. 첫째로 나는 나의 과거를 돌아보아 반성하고 현재의 내 인생, 우주에 대한 가치관을 정리하므로 앞으로 전개 될 나의 생을 좀 더 뜻있고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쓰는 것이며, 둘째로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에서 쓰는 것인데, 이것은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는 나의 방법이 일반 상식에 의한 선택과는 다르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1971년 12월 28일’

 

 

 

  수필 모음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1969.6.27.]

 

 

아 정말 우습구나. 똑 같은 인간들. 그러나 그 어는 하나도 같지 않은 인간들, 지금도 저 밖에서는 생존하기 위하여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서로 대치(對峙)하고 있다. 소위 생존경쟁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것이 무슨 가치를 갖고 있나?! 결국은 죽고 말 인간, 죽음을 향해 있는 길 위에서 싸우는 인간들, 죽음을 벗어나 죽음으로 달리는 인간들, 그렇게도 모순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 도대체 이 우주는 너무도 신비롭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완전한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며, 또한 사실 오르고 있다.

 

 

 

인간의 참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1969.7.17.]

 

 

내가 지금 찾으려 하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한갓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허무를 극복하고자 함인가?

 

인간. 이 인간이 죽음 이상의 그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이 인간이 타생물(他生物)의 ‘본능에 의한 생활’ 이상의 어떤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인간의 모든 것은 허무다. 인간은 부모에 의하여 번식과정을 통해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어떤 규칙과 질서 안에서 생활을 한다. 그리하여 일정한 세월이 지나면 신체의 노화로 혹은 그 전에 어떤 신체의 활동을 정지 시키게끔 만드는 작용에 의해서 그가 생존시 가졌던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활동이 정지되어 버린다. 물론 그 후의 세계가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한 인간의 전부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살고 있다. 이것이 보람 있는 것일까? 인간 자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럴 것 같지 않다. 만약 그 번식하고 생활하고 죽어가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 인간은 일반 생물과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두뇌를 가지고 자연을 이용한다는 것에 결코 가치가 있지 않다.

 

 

살고 있다. 분명히 사회가 있고 나라는 한 생물이 있다. 그러나 나라는 한 생물의 생명과 생활은 결코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명 및 생활은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선 무(無), 완전한 무(無)로 돌아간다. 나 홀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 그것이 전부라면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어야 할까?

 

높은 산이 있다. 끝이 없는 높이다. 아무도 그 산을 정복할 수는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그 산을 오른다. 결코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르는 인간들. 그것은 무지(無知)냐? 아니면 본능이냐? 또 그것이 아니라면 이성(理性)이냐? 그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살고는 있다. 그러면 계속 이렇게 살겠는가? 계속 이렇게 본능에 의한 피동적인 생활을 할 것인가? 이러한 피동적인 삶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능동적인 죽음을 택함이 낫다.

생물, 타 생물은 피동적인 생활을 갖는다. 본능에 의한 피동적인 생활이다. 그러므로 본능에 의해 살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죽음을 맞는다. 이것은 너무나 약한 생물의 생존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나에게는 그렇게만 살 수는 없는 그 어떤 의지가 있다. 살고 있으니까 살 수는 없다. 오직 살아야 하니까 사는 것이라는 능동적 의지에 의한 삶이 나에게는 있어야 한다.

 

 

 

죽음과 삶 - 내가 믿어야할 것 [1969.7.18.]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결코 죽음을 떠나서 삶의 가치를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소한 현재 우리가 번민하는 삶에 대한 회의는 죽음 이전의 삶이다. 죽음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삶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만약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에 대한 회의는 없었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나는 나의 삶에 대한 회의에 해결을 갖기 위해 먼저 죽음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

 

 

죽는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종교 즉 기독교에서는 그 죽음이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히 행복한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불교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맞으므로 그가 세상에서 행한 악과 선의 정도에 따라 더욱 좋은 환경의 인간으로 혹은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떠한 것이든 분명한 것은 결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모든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전혀 다른 세계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어느 누군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아니다.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선 직접 들어가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세계는 현재 우리가 존재하고, 생활하고 있는 세계와는 엄격한 경계선으로 구분되어, 결코 그 안을 넘겨다 볼 수도, 그곳에 가 본 과거 어떤 인간의 경험담이나 기록으로도 알아볼 수 없다. 그 세계는 완전히 현실과는 절연된 세계다. 우리 인간은 그곳을 넘겨다 볼 수 없다. 그 세계에서 다시 나올 수도 없는 전혀 알 길이 없는 다른 세계이다.

 

 

그러면 그러한 인간에게 주어진, 그 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은 무엇인가? 과학적인 경험이나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 했다. 그러면 비과학적 방법으로는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 비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비과학적으로, 즉 보지 못한 것. 듣지 못한 것, 혹은 만지지 못한 것을 있는 것으로 또는 없는 것으로 확신하는 믿음 즉 신앙! 그것으로 우리는 그 죽음의 세계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방법은 어떻든 죽음에 대한 해결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제시됐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삶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죽음에 대한 해결 방법은 신앙 즉 믿음에 의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삶에 대한 해결 방법은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죽음을 아는 길은 어떤 과학적 사고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즉 보지는 못했으나 있는 것으로 믿는 그 믿음뿐인 것을 감안할 때 역시 삶에 대한 해결은 죽음에 대해 어떤 미지의 사실을, 미지의 세계를 믿을 때에 만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으로 지금의 나는 결론을 내린다. 삶에 대한 회의는 오직 죽음을 해결하는데서 해결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어떤 미지의 가정을 믿지 않고서는 도저히 인생에 대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자신의 생명과 생존에 대하여 해결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나의 신념으로 삼아야 하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나의 하나님 아버지,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장하시는 나의 창조주, 나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하나님 가까이로 가치를 높여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나는 오직 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으로 나의 삶에 대한 회의, 죽음에 대한 의문, 결코 우리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나는 창조를 받은 존재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나를 그의 천한 창조물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셔서 나를 하나의 영원한 영으로서 그 가치를 한 없이 높여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과 하나님 나의 아버지를 바로 깨달아 내 본분에 합당한 생활과 생각을 이루어 가야 하겠다.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생명은 위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한 나 스스로의 것이 아니다. 물론 나에게는 신의 의사를 거역할 능력까지도 주어져 있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할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존재에 관한 한 아무것도 나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 나는 오직 내게 주어진 것만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인간은 갖지 못한다. [1969.8.]

 

 

인생 문제에 대해서, 사는 것이 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제 더 논할 여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모든 자연과 천체, 그것들이 존재함을 우리는 본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은 그 모든 실존물의 존재 의의와 그 스스로 갖고 있을 것 만 같은 어떤 의지, 목적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찾으려는 무엇인가 그 현존(現存) 배후의 어떤, 소위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의지를 찾는다는 것이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믿어야만 될 자리에 서 있다. 과거의 모든 위인들,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 모두는 그 어떤 것이라는 그들이 찾고자 한 어떤 의지를 보지 못한 채 단순히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을 믿는다.’라는 가정 하에 결코 그것의 어떤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외롭게 죽어 갔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현존하는 사물의 실체를 인정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물의 배후에 있을 그 어떤 틀림없고 가장 진실한 의미는 결코 인간에게 그 흔적조차 보여 주지를 않는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들의 본성의 요구와 또한 결코 찾아지지 않는 그 어떤 진실, 참 과의 중간에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인간은 어떤 자세로 이 자신의 깊은 속에서 울부짖는 외침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수 넌 여 년을 지배해 온 하나의 불변의 사실,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려 한다는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아마 그 모든 존재의 의의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어떠한 대 이변(異變)이 생기지 않는 한 결코 조금이라도 감소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큰 모순이며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요구하는 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인간은 그러한 모순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많은 철인들이 사상가들이 부르짖고 사라졌다. ‘인생은 하나의 괴로움이요 병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일 뿐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기독교, 그것은 이 절대 알 수 없는 무한의 우주를 인간이 어떤 가정(假定) 하에 한계지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믿으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경기 [1969.11.5.]

 

 

나는 하나의 인간.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히 넓은 황야를 헤매는 들짐승. 시작도 끝도 없는 황야를 나는 헤매야만 할까? 나 스스로 그 방황을 끝맺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방황이 무(無)로 전환되든 아니면 영원한 정신의 세계로 전개되든 그 무가치한 활극은 중지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하나의 인간. 한 큰 무대에 서있는 배우. 내가 나온 문은 안다. 그리고 들어갈 문도 안다. 그러나 나온 문 또 들어갈 문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있을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나온 문 그것은 결코 다시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갈 문 그곳은 한번은 꼭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 문만은 내 의지로 일찍 들어갈 수도 있다. 물론 들어가기 싫어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들어가고야 만다.

 

 

시작 없는 경기, 끝도 없는 경기 그래도 잘들 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한 인간의 완성이다. [1970.1.7.]

 

 

내가 원하는 것은 한 인간의 완성이다. 인간은 잠시 왔다가 사라진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사라질 것인지 그것을 알고 싶다. 이 무한히 넓은 우주 그것은 무엇인지?!

 

우주는 무한히 존재할 것이고. 한 인간은 잠시 왔다 사라진다. 그가 죽고 난 후 그가 생전에 누리던 권력 명예 영광 그것이 가지는 가치는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쾌락 즐거움 명예 권력이 아니라, 그러한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의 가치, 생존 그 자체의 의의, 영원한 진리 그러한 것이다.

 

 

 

나는 왜 공부를 하지 않았는가? [1970.1.19.]

 

 

나는 시험을 안 보기로 생각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실력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게는 공부를 하기에 앞서, 그것을 해야 할 목적을 찾고자 하는 열의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왜 네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는가?

 

나는 사회의 흐름에, 주위의 분위기에 나 자신을 잃고 있었다. 어쩌면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르며, 남의 이목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며, 나 스스로의 판단력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1970.1.31.]

 

 

나는 알 수 없다. 이 우주는 무엇이며 나는 어떠한 의의를 가진 생명체인가를.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현실뿐이다. 현실 외에는, 현실 한 가운데의 내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은 알 수 있으나 그 밖의 어떠한 가치도 도저히 규정지을 수 없다.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도 없다. 목적 없는 방법과 수단.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그렇다! 요사이 나는 너무나 나 스스로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어쩌면 나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인간들과 너무나 많은 접촉을 가졌기에 이렇게 엉거주춤 갈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도 다른 인간들과는 모든 면에서 구별되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능력을 기르기 전에 사회에 뛰어 드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혹은 적은 지혜를 갖고 있는가를 깨달으려 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규정짓기를 잘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우선 내가 가진 것의 크기를 알고자 한다.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알고, 그 다음에 사회의 모든 현상을 판단, 분석하겠다.

 

 

모든 현실은 인간의 사고 및 행동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즉 모든 현실은 인간에 의해 성립된다. 그러므로 나는 현 사회의 모든 기준에 대하여 도전한다. 나는 도저히 현 사회를 긍정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의지에 모든 사회를 순종시켜야 한다.

 

나는 결코 현 사회에 순응하지 않겠다.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나는 가장 앞에 서서 사회를 내가 가려는 곳으로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온 인류 -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불성실한 모든 인간들에게 선언한다. 나와 성실치 못한 인간들 사이에는 단 두 가지의 길 밖에는 없다고. 그 하나는 내가 쓰러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내 앞에 그들 모두가 굴복하는 길이라고.

 

 

 

길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1970.2.6.]

 

 

길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남들 모두가 가는 넓은 길을 떠나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을 돌았다고 보는 사람은 그 넓은 길만이 옳은 길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일반적인 사고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남을 이상하다고, 돌았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독선적인 생각이다.

 

 

나는 결코 이상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나는 창조하려는 것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것일 뿐이다. 나는 단지 여러 가지의 길 중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취하는 것이 아닌 다른 길을 취하려 할 뿐이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로써 내게 충고하는 것은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나는 그러한 모든 염려와 나를 안전한 곳에 서게 하려는 모든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러나 나의 한 곳을 향한 마음, 그것에 대한 열의는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한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왜 모두들 결사적으로 그것을 반대하는가? 왜 격려는 못해줄망정 가려는 길을 막으려 하는가? 나는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나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야 만다. 어찌 평범한 생활 안락한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보람 있는 일을 찾을 수 있겠는가? 고통이 크면 클수록 얻어지는 결과(보람) 역시 크리라 믿는다.

 

 

나의 꿈은, 이상은 아름답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나의 마음 속 깊은데서 솟아 나오는 힘찬 물줄기를 억누르지 않겠다. 수 십 억의 모든 인간이 반대하더라도 나는 결단코 내 뜻을 관철시킬 것이다.

 

나는 정신의 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기꺼이 버리겠다. 생명은 완전한 내 것이 아니지만 정신만은 어느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생명을 버릴 것이다.

 

 

 

그들은 나를, 나는 그들을 비웃는다. [1970.2.12.]

 

 

정말 시간은 빨리 흐른다. 그러나 나는 무엇 하나 발견한 것이 없구나. 모든 사람들, 단 한사람도 나를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은 없다. 단지 나 혼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다. 다른 모든 인간을 경멸할 뿐이다. 대학이 결코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생활의 일부로 그것을 거치려고 한다.

 

나는 이제 어느 누구와도 말을 않겠다. 그들은 나를 비웃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멸시한다. 구태여 그들에게 내가 옳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알지 못 할 것이기 때문에…. 오직 시간이 가르쳐 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이상사회(理想社會) [1970.3.12.]

 

 

나는 이상(理想)사회를 건설하겠다. 내가 바라는, 내가 꿈꾸는 사회를. 나는 결코 타인의 칭송을 받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권력을 쥐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나로서 할 수 있는, 나로서 하고 싶은 일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 밖에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 한없이 광대한 우주. 그리고 영원히 신비할 것 같은 우주. 이 우주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기 때문에 나는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너무나 조그만 생물, 귀여울 수 있는 생물에 불과하다. 나는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고 나는 너무 작다. 그러니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나로선 지금 느낄 수 있는 나 자신 만으로 겸손히 눈을 감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모든 내 능력 밖의 것을 얻으려 방황해서는 안 된다. 겸손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성실히 관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오직 이상적(理想的)인 사회를 건설하겠다. 그 밖엔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악(惡)은 그 정도에 합당하게 제재를 받는 사회 ‘나’라는 개인의식보다는 ‘우리’라는 범(凡)인류적인 사고에서 울어 나오는 봉사-협동-희생-사랑, 평화의 정신. 자신을 위해 남을 해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남을 위하는 사회. 노력에 대한 적당한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사회.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궁핍함을 모르게 되는 사회. 서로 속이지 않는 사회. 불의(不義)가 의 앞에 엎드리는 사회. ‘우리’라는 전체의식 가운데서 ‘나’를 찾는 사회.

 

사랑의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 사랑과 평화가 넘치고 질서가 잡힌 사회. 인간 한 사람의 생명이 모든 물질을 합한 것 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사회.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사회.

조용한 미소, 다정한 사랑의 눈빛만이 존재하는 사회.

 

 

현재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사회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사회는 더욱 더 부패해 갈 뿐이다. 개인을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인류 전체를 한 단위로 수긍할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의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 남을 쓰러뜨리는 사회는 이제 그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나를 위해 남을 일으켜 주는 상호 협조의 의로운 사회가 이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생명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중요하다.

 

 

 

현실을 지배하는 인간과 현실의 지배를 받는 인간 [1970.10.23.]

 

 

남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며 주저하는 인간은 이미 자유인이 아니다.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고 떳떳이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것은 좋은 태도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제 자신의 주장에 도취되는 것보다도 더욱 나쁜 것이다.

 

사람은 외적 환경의 영향을 예외 없이 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현실적 환경을 통하여 모든 것을 보는 인간들이고 다른 하나는 수 천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현실을 살피는 인간이다.

 

 

남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회의를 느끼는 인간.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이 없는 인간은 자기 자신 하나조차 감당할 수가 없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있고, 또 그중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능력과 두뇌를 믿고 거드름을 피운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들은 극소수의 집단과 그 나머지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집단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는데.

 

그 후자는 시대적, 사회적 추세-흐름에 밀려가는 인간들이요, 전자는 그 흐름 가운데 굳게 버티어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끌고 가는 인간, 적어도 그 전체적 흐름에 동요됨이 없이 스스로 제 길을 찾아 걸어 나가는 외로우나 지혜롭고 강한 인간들이다.

 

 

내가 사는 데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단지 내가 가진 것은 너무나 맥없이, 틀에 박힌 듯 흘러가는 무미건조한 생활과 사회적 역사적 흐름 그것에 생기를 불어 넣고 싶어 하는 투쟁을 열망하는 의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