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끝내는 말

 

 

10대 후반의 시기에 ‘내가 누구인가?’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이 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후 거북이처럼 느리게, 그러나 나름대로는 꾸준히 그러한 화두를 가슴에 안고 살아온 지 30여년이 지났다. 처음 그 답을 찾기 위해 몇 년을 씩씩거리다가. 아직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와 경험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마땅히 ‘이제는 마음을 열고 배우며 살겠다!’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나는 작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으며, 당시에 많이 들었었던 ‘ 문은 두드리면 열린다!’라는 지혜로웠던 이의 가르침을 신뢰와 함께 등짐에 넣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뜻이 있는 곳에 역시 길은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저런 자료들이 내게 나타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90년대의 시작이 내게 새벽 6시와 같았다면 지금은 오전 10시쯤 된듯하다. 한동안 이방인들 속에서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누느라 진땀을 흘렸었는데, 지금은 시끌벅적한 고향의 장바닥을 걷는 것 같다. 역시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고 삶에 기쁨과 웃음을 가져다준다.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여행길에서 내가 줍고 모아온 귀한 보석들이 있어서 지금부터 펼쳐놓고 함께 보고 즐기고 싶고, 또 자랑하고도 싶어서 지금부터 늘어놓는다. 사람마다 취미와 관심사가 같지 않으니 별반 신통치 않게 느껴지실지 는 모르겠으나. 여러분과 나는 같은 조상과 역사를 가지고 지구라는 별 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지구촌의 한 가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잠시 멈춰서 살펴보아주기 바란다. 나는 이것들을 보며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를 느끼기 때문이다. ^__^

 

 

 

내가 모아 온 보석들

 

 

神의 단편(斷片)인 靈.

 

나(우리)는 이 우주-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자인 최고 창조주(神)의 단편(斷片)인 영(靈)으로 아버지 어머니 神과 함께 태초로부터 영겁의 시간 동안 존재해 왔다. 우리(나)는 스스로 존재한 어버이 창조주의 분신으로 그와 나(우리) 사이에 분리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어버이 신의 모든 속성을 이어 받아 창조주의 손과 발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었다.

 

 

 

전체의 일부이며 개별적 인격체인 神

 

인간의 몸을 가지고 존재하며, 독립된 자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개체의식은 스스로 존재한 ‘나는 나’일 뿐인 어버이 신과 하나이면서 또한 그-그녀의 확장된 자아임과 동시에 독립된 개체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이는 신비로운 神의 일면이다.

 

 

 

도약의 발판

 

이곳 지구는 제 1의 창조계가 어느 시점에서 그 고유한 본성인 진화와 확장에 어떤 정체가 있었을 때, 이를 타개할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하기 위한 목적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창조된, 제 2의 창조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었으며, 지금 이 시기에 우리들 모두의 노력과 봉사로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인간이 창조한 환상

 

창조주는 존재하는 모든 것 그 자체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내재하는 생명이며, 그것의 원인인 靈-의식이다. 神은 우리가 그 형상대로 창조된 멋진 수염을 가진 위엄 있는 할아버지와 같은 전지전능한 개체적인 인격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의 계획과 의지에 우리 인간이 따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하는지를 지켜보며 판단하고 심판하는 분이 아니다. 우주 만물에 충만한 생명은 지극한 사랑과 기쁨이며, 사랑이 아닌 두려움은 오로지 기쁨이며 사랑인 신이 스스로를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창조한 거울이다.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일관되어 작용하는 우주적 법칙과 원리에 의해 그의 의지를 펼친다. 인간과 우주 만물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신이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망각한 신의 단편인 인간들이 창조한 환상일 뿐이다.

 

 

 

인간이 된 神

 

인간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 속으로 뛰어 든 신이며, 자신의 체험을 무한히 낮은 곳까지 확장하고, 자신이 아닌 것을 통해 자신을 체험적으로 알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망각상태에 있게 한 게임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게임의 당사자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 되어보지 아니한 천사-靈보다 하나의 고귀한 체험을 더 가지고 있는 神이다.

 

 

 

빛의 대천사였던 루시퍼

 

많은 종교에서 가지고 있는 사탄(루시퍼)―마귀(魔鬼)는 원래 빛의 대천사 중에서도 뛰어났던 빛과 사랑의 대 천사였다. 그는 오로지 빛과 사랑이었던 원초(原初)의 창조계를 빛과 어둠으로 분리시켜 이원성의 세계를 창조할 때 어둠의 역할을 하기로 자청한 존재로, 그의 이러한 선택은 창조계를 더욱 크게 확장하고 넓히기 위한 계획에 자신을 내어준 지극한 사랑과 헌신-봉사의 행위였으며 이보다 더 큰 희생과 사랑을 우리는 찾을 수 없다. 자신이 아닌 두려움과 분노 속에 머문다는 것은 순간적인 희열의 순간을 가질지언정 대부분은 불안과 고통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는 불이 물 속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들었다.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모든 것을 뜻대로 즉각 창조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당신은 사탄이 창조주에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창조주가 한 순간에 사탄을 빛의 대천사로 바꾸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확신하는바 창조된 존재인 사탄은 한 순간도 창조주를 대적 할 수 없다! 창조주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면 빛의 대천사인 미카엘과 어둠의 천사인 루시퍼의 대결은 있을 수 없는 환상일 뿐이다!

 

이제 이원성의 게임을 끝내고 제2의 창조계로 확장하는 시점에서 루시퍼를 다시 예전의 그로 되돌리는 유일한 길은, 그의 크나 큰 희생과 봉사를 이해하고 아직 빛 속에 머물러 온 빛의 천사들이 지극한 감사와 사랑 속에서 루시퍼를 껴안고 흘리는 눈물뿐이다. 그 때에 루시퍼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다시 기억할 것이다!

 

 

 

지옥은 없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후(死後)의 지옥이다! 죽음은 한 순간이지만 죽음 후에 오는 지옥은 영원하다! 한 순간의 고통은 곧 잊혀지지만, 영원한 지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사탄이 사후세계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맞는 드라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모든 신은 선하고 착하다고, 모든 빛과 어둠의 싸움은 빛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우리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하나님이 루시퍼보다 더 강하니 당연한 일이다.

위대한 스승, 창조주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 함께 걸었던 예수께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쳤으며 ‘네 이웃의 잘못은 일곱 번씩 일흔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확신하건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의 아들 예수의 사랑보다 절대 작지 않다! 그런데 누가 창조주이며 최고의 神인지 알지 못하여 우상을 섬긴다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버린다고 들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이 벽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벽을 허물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지옥은 없다! 보통의 인간도 살인을 한 자식이라도 불 속에 넣어 태워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대신하여 죽음을 감수할 부모는 많을 것이다!!

 

예수가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듯이 부모가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한 솥 밥을 먹고 있는 말 잘 듣고 순종하는 자식이 아니라, 길 잃은 자식이며 방탕하여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자식이며, 한 밤중의 작은 소리에 깨어나 대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믿는 신이 있다면 직접 대면하여 이것을 물어보라! 남이 하는 이야기를 분별없이 그냥 믿지 말고…. 그들도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냥 전해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백번 들은 것이 한번 본(체험한)것만 같지 않다’고 나는 알 고 있다!

 

 

 

죄 - 빗나간 화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인간이 된 천사(神)이다. 자신이 인간이 될 때 모든 기억과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상실한 상태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위대한 희생과 봉사의 선택이었으며, 그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우주-창조계가 어떤 시점에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게 되었으며,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시점이라 함은 창조계가 이원성의 세계로 변형된 후 많은 시간이 지나자 빛과 어둠 사이에 충돌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양대 세력간의 어마어마한 우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수 백 만년 이상의 죽고 죽이는 전쟁이 계속되자 드디어 쌍방이 모두 지치게 되었고, 진화와 역동적인 생명력의 발현을 그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우주가 정체상태에 이르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지구가 선택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하기 위하여 천사-神중에서도 강력한 힘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들이 자원에 의해 이곳 지구로 오게 된 것이다.

 

망각 상태로 생활한다는 것은 손과 발이 묶이고 눈과 귀가 가려진 상태로 살아가는 것에 비유될 수 있겠는데, 지구에 태어난다는 것이 그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자청하여 이곳에 온 우리들에게 베일 저편에서 이러한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모든 천사- 대천사들이 항상 큰 감사와 존경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 지구상의 많은 종교에서는 인간을 비천한 존재나 죄인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데 이는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죄’로 번역된 단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을 상징했고, 조화와 화합이 아닌 분리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하여 큰 용기를 가지고 이곳 지구로 온 모든 존재는 참으로 위대한 봉사와 도전의 길을 선택했던 용사요 영웅들일 뿐이다.

 

 

 

윤회(輪廻)의 목적

 

요즈음 공영방송에서 종종 인간 영혼의 윤회(輪廻)를 다룬다. 동양의 전통적인 개념에 윤회는 당연시 되었고, 초기 기독교도 윤회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AD5세기경 성직자들의 회의에서 제거되어 사라졌다. (성경-마태복음 11장 14절에는 예수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윤회를 반복하며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영(靈)―神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얻는 많은 체험이 영을 크게 성숙시키기 때문이며, 원래 사랑과 기쁨과 감사, 영원한 삶이 근본 속성인 神이 그러한 본성에 반대되는 죽음. 두려움. 고통, 원망, 분노 등을 체험하는 것은, 神의 체험을 더욱 확장시키고 성숙시키는 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게임의 끝

 

지금 우리가 지구에서 진행하고 있는 게임은 모두가 함께 상승하는 게임이다. 이번의 삶은 무수히 많았던 전생의 나와, 과거의 모든 조상들과 개개인의 삶의 카르마들을 해소해야 하는 생(生)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어렵다. 또한 이번 지구 인류의 각성과 상승은 전 우주의 상승을 이끌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제2의 창조계로 도약시키는 거대한 작업이기에 그만큼 더욱 어려운 것이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의해 바뀐다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가족 중의 한사람이 다른 가족 하나를 죽였다고 하자. 이것은 용서할 수 없이 큰 죄인데 나중에 그 내막을 알고 보니 그 한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모든 가족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할 것을 알고도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른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단죄(斷罪)가 감사와 연민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이번 생의 우리가 모든 진실의 내막을 알게 되므로, 과거의 나와 다른 모든 이들의 카르마와 업이 해소되어지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베일 저편의 형제들, 천사-대천사, 다른 행성의 형제들이 전해주는 소식은, 우리 인류의 성공적인 노력의 결과로 그러한 우주적 목표가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것은 영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결과가 우리의 3차원 물질계에 현현되기까지의 몇 년 정도의 기간인데, 그것은 지구의 시간 기준으로 2012년 이전이며, 2007년 9월 정도에 인류 의식의 양자적 도약이 기대된다고 한다.

 

 

상상력(想像力)

 

모든 창조는 영(靈-의식)의 생각과 상상(想像)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집을 지을 때 먼저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과 같은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어떤 것을 창조할 때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무지하고 무력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모든 제한된 의식을 놓아 보낼 때 우리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神의 신비하고 독특한 능력이며 모든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다. 神이 상상할 때 이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적 요소들, 극미한 모든 의식을 가진 미립자들이 이에 즉각 반응하여 형태를 이루는 것이 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스스로 존재하는 神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다.

 

 

 

  가장 큰 신비

 

가장 작은 씨앗이라는 겨자씨가 싹을 틔우고 거대한 나무로 커가는 것이 신비롭지 않은가? 산과 들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무수히 많은 꽃들이 드러내는 신묘(神妙)한 아름다움과 향기가 신비롭지 않은가? 벌레가 껍질을 벗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이 신비롭지 않은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온갖 동물과 새들이 뛰고 나는 것이 신비롭지 않은가?!

하물며 이 우주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는 우리 인간은 그 모든 것보다 특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새로운 고향

 

우리는 고향을 떠나 이곳 지구로 왔다. 어버이 신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그분들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더욱 빛내기 위해, 우리는 창조의 선봉에 선 귀한 창조주의 아들이며 딸이다.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모든 것에 일관되게 작용하며 흐르는 많은 우주의 원리. 원칙들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모든 부모가 자식이 자신보다 더욱 큰 힘과 지혜를 가지는 것에 기뻐 춤을 추듯, 우리의 어버이 신의 최대의 기쁨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이 새로운 창조의 일선에서 이 창조계를 빛내는 일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식이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control)하고 심판하는 것은 불신과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어버이 신은 두려움을 알지 못하시는 분이다. 그-그녀는 오로지 기쁨과 사랑 속에서 존재하시는 영원한 생명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며 ‘나는 나다 - I am that I am'로 자신을 표현하시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며, 그 피를 이어받은 우리 역시 그러하다.

 

우리의 귀한 벗 토비아스(Tobias)는 우리가 새로운 고향을 창조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몸을 벗을 때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제2의 창조계를 열어가는 이 시점에서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새로운 고향이 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나는 그를 신뢰하며, 참된 영은 거짓을 모르기에 이것이 사실이라 믿는다. 우리가 모든 기억을 다시 되찾을 때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일을 이루는데 앞장을 선 어버이 신과 고향에 머물고 있는 많은 형제, 자매들의 극진한 사랑과 존경과 지원을 받고 있는 귀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밝히고 싶었던 느렸지만 꾸준히 방향을 잃지 않고 계속했던 30여년의 인생길에서 모은 중요한 진실들이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활용된 도구들은 많은 선각자들의 가르침과, 동 서양의 경전, 책들, 그리고 최근 몇 년 간 접하게 된 많은 채널메시지들이며, 이것들에 더하여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나의 직관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공명-공감으로부터 오는 신뢰다. 같은 내용의 글과 정보를 접하여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같은 내용의 글이라도 1년 전과 지금 볼 때 그 느낌이 많이 다를 수 있고, 내가 준비가 안 되었을 때에는 전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진리는 느낌으로 전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백합꽃의 향기,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말로, 글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오감(五感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가지고 사물을 인식-분별하고, 오감에 더하여 육감(六感)이 있는데 이것은 ‘분석적인 사고에 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정신작용’이다.

 

진리에 대한 이해는 논리적 사고-이론도 한 역할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우리는 머리(논리적 사고)로 사물을 인식하지만 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 긍정 부정의 분별은 가슴으로 느낀다. 큰 기쁨이나 슬픔을 맞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다.’거나 ‘가슴이 터질 정도로 기쁘다.’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깨달음은 잊었던 기억을 되찾는 작업이다.

 

또한 느낌이란 것은 체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가 체험했던 것은 기억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그와 같은 것이 나타날 때 잠재되었던 기억을 자극하면서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의 진리에 대한 이해와 공명은 사실 기억을 찾는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 모두는 예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았었고, 지금은 망각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전에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잊었던 기억을 되찾는 작업이다.

우리가 새로운 정보와 체험을 얻을 때 그것은 하나의 지식으로 모아져 입력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자료를 망각한 상태에서 다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걸어 나갈 때 다시 나타나는 정보들이 우리에게 큰 기쁨과 공명, 확신을 가져오는 것은 그것이 각자의 내면에서 깊이 잠자고 있던 지난날의 기억과 체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큰 깨달음은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문을 두드리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멍멍이가 노력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는가?

곰이 열 바퀴 천 바퀴를 구른다고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神인것은, 우리가 부처인 것은 원래 우리가 신이고 부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기 시작하는 것을 상징한다.

 

 

우물 안에서 나오라! 쳇바퀴에서 내려오라!

 

우물 안 개구리가 보는 것은 손바닥만한 하늘뿐이다.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열린 문을 통하여 과감하게 뛰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들어온 것, 배워온 것에 안주(安住)하는 것은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정보가 직접적인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달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교과서를 만든 이들의 생각이 모아져 전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진실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진리를 꿰뚫어 알았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나마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다르다. 현실세계의 권력자들은 두려움을 이용하여 지배하려 하며, 지배하려는 마음 그 자체가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두려움은 또한 진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치장하기를 잘한다. 두려움은 오로지 생존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생존이 제 1의 가치이기에 거짓도 필요하다면 옳은 것이 된다.

 

예수와 같은, 석가모니와 같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 수 천 년 동안 이 지구 위에서 전달되어 왔음에도, 아직 한 혈통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손바닥만한 지구위에서 어떤 곳에서는 남아 버려지는 음식물이 산을 이루는데, 다른 곳에서는 한 조각의 빵이 없어 눈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연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간다는 것이 이 지구의 현실이다. 부모의 마음으로 가장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심각한 망각 속에 있는 神일 뿐이다. 예수와 같은 존재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음에도 아직까지 수 백, 수 천 만 명의 사람들이 형제들의 손에 버려지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전 인류가 수 천 년 간 전쟁을 계속하여 왔으며 이제는 한 순간에 자멸할 수 있는 핵무기로 무장하고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여 온 권력자들과 엘리트들이 눈 뜬 장님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는 당신 스스로 지금까지 듣고 배워온 여러 가지 진실들을 다시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대한 선각자들의 가르침은 많이 왜곡되고 심지어는 교묘한 속임수까지 더해졌다.

이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 더 이상 남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만약 가르치는 이들이 눈 뜬 장님이라면 당신은 평생을 헛되게 소모할 뿐이기 때문이다.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밟는 일을 기대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 분별하기 시작하라!

 

당신에게는 위대한 잠재력이 있으며, 당신은 잠시 망각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든 인류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전과 후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큰 두려움이 인간을 사로잡는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생존이 제1의 목표가 되고, 그 밖의 진실, 정의(正義), 상호존중은 그 뒤에 곧잘 숨는다. 이것이 계속되는 한 다람쥐 쳇바퀴 돌기는 끝나지 않는다.

 

다람쥐가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매일 거듭해서 뛰고 있었던 쳇바퀴를 벗어나는 길 뿐이다. 또한 그 문은 닫혀져 있지 않다. 쳇바퀴에는 원래 문이 있지도 않았으며, 단지 우리가 환상 속에서 문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적은 것이며,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수 백 배, 수 천 배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져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착각하고 마음 문을 잠그는 것은, 멋진 옷을 입었다고 믿고 벌거벗은 채 활보하는 임금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진리의 문은 뒤따라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몇 가지의 진실은 내가 가슴으로 느끼고, 그로부터 오는 명료성과 기쁨을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목적에서 쓴 것이다.

그것들과 관련하여 나를 괴롭히던 여러 가지의 의문들 때문에, 삶이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으며, 그 답답함과 고통을 풀어버리기 위해 보따리를 쌌었고, 그렇게 떠난 여행길에서 소중하게 모아진 것이 위의 몇몇 이해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완전한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으로 크게 또는 작게 달라질 수 있는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것의 줄기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은 내게 큰 기쁨 속에서 나타난 것들이며, 강한 확신과 신뢰 가운데 전체적으로 점점 더 명확하게 맞추어지는 큰 그림으로 보여 진 것이기 때문이다.

 

큰 기쁨을 가져다 준 것은 새롭기 때문이라기보다 희미했던, 또는 잊혀졌던 기억들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새로운 것도 큰 기쁨을 줄 수 있지만 잃었던 가장 큰 보물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크지 않겠는가?!

 

한편 이러한 진실에 대하여 여러분이 단순히 믿거나, 당신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스스로 체험적으로 확인하여 얻은 지식이 아니면 백가지의 지식도 한번의 체험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단지 ‘나’라는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미로를 헤매다가 열린 문을 찾아 나와서 보게 된 빛이며, 오랜 갈증을 충만히 해소시켜 준 맑고 시원한 샘이었다고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그 과정을 밟아보시기 바란다. 스스로 판 샘이 아니면 언제든 바닥날 수 있는 독안의 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이 이러한 진실들에서 기쁨과 밝음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충분히 준비된 분이다. 내가 30년 이상 걸어온 길을 당신은 3년, 혹은 3개월, 또는 3일 만에 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진실이 당신에게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환상과 같이 보인다면, 그 또한 문제될 것이 없다! 산의 정상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은 나와 다른 코스로 정상에 접근하고 있을 수 도 있으며, 그 누구도 ‘나’나 혹은 당신이 먼저 정상에 도착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같은 의문과 문제를 가지고 살아왔거나 그러한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또한 당신의 삶에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슬픔이 있다면, ‘나’의 진실을 신중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나’의 경험이 좋은 참고자료가 되리라 믿어지며,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해결해야만 될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문제라고 나는 알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것들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확신하고 신뢰하는 진실이며, 내가 느끼는 기쁨과 확신을 지금 수준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이다.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100% 온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아직 과정 중에 있는 神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아직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함께 정상에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는 이 책을 쓰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서로 분리됨이 없는 하나의 나무에 매달린 각각의 나뭇잎과 같은 존재라는 것과, 나만의 행복, 나만의 깨달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앎이기에, 미력하나마 나의 경험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문은 열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문을 두드릴 사람은 당신과 나, 그리고 모든 인류 전체다.

 

또한 문은 각자가 스스로 두드려 열어야만 한다. 뒤따라 들어갈 생각일랑 하지도 말자.

그 문은 스스로 여는 자에게만 열리는 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일 마지막으로 그 문을 통과하겠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친다.

 

 

 

두려움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오로지 사랑과 참된 앎이다.

 

끝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악과 고통을 주는 범죄행위에 대하여, 분노와 보복으로 대응하지 말고 사랑과 용서로 감싸 안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둠-악은 오로지 빛과 사랑인 신이 자신의 앎과 체험을 확장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한 하나의 거울이며 환상이기 때문인데,

우리가 인간으로 무수히 반복하였던 生과 死의 드라마는 하나의 연극에 불과할 뿐 영원히 죽음을 알지 못하는 神-靈은 결코 죽지 아니하며, 모든 무대 위의 살인과 죽음은 체험을 위한 드라마일 뿐 그 어떤 영혼도 죽임을 당하지 않으며 죽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이란 드라마를 연출하고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죽음을 모르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神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죽음이 두려움을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였기에 우리의 삶은 극도의 두려움과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처절한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벌인 모든 삶의 드라마가 모두 서로의 체험을 위한 처절한 학습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할 때, 우리는 모든 원망과 분노와 절망을 온전히 털어버리고 모두가 함께 서로의 역할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내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크게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윤회를 반복하며 필요한 체험을 얻을 필요가 있었기에 그러한 환경을 스스로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목적이 이 시대에 성취되었고, 이제는 망각에서 깨어나 다시 예전의 기억을 되찾을 때이다. 그러하기에 무수히 많은 천상의 천사, 대천사를 비롯하여 물질계의 형제들이 기쁨 속에서 게임의 성공적인 결말을 알려주기 위해 몰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게임판(운동장)에서 직접 뛴 선수들이었고, 그들 모두는 관람석에서 응원하고 가이드로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지원(응원)팀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우리는 우주적 게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게 된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모든 거짓과 악행에 대하여 맞서지 말고 사랑과 연민으로 감싸 안아야 하는 이유는 루시퍼로 알고 있는 어둠의 천사는 스스로 어둠의 역할을 자청하였던 빛의 대천사이기 때문이다. 루시퍼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하여 스스로 가장 어려운 일을 짊어졌다. 자신의 본성이 원래 어둠을 알지 못하는 빛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둠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몇 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는 그 일을 해 내었고, 그 역할에 너무나 충실하다 보니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고향을 잊은 사람들과 같이 항상 더욱 큰 공허와 추위 속에서 떨었고 드디어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이 루시퍼를 다시 빛과 사랑으로 되돌리는 것은 오로지 한 가족이며 형제인, 빛과 사랑 속에 머물러 왔던 존재들의 뜨거운 사랑과 감사의 눈물뿐이다.

죄(罪-惡)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며 루시퍼는 말 할 수 없이 큰 희생과 봉사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었던 것이다.

 

셋째로 우리 현실 삶에서 큰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무의식 가운데 생존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위해 큰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것이며, 권력과 물질적 富가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과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의 첫째가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두려움에 휩싸인 이들을 기쁨과 사랑, 평화로 되돌리는 것은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과 연민의 눈빛과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며, 분노와 단죄함으로 맞서는 것은 오리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려움을 놓아 보내고 사랑과 평화 속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두려워 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하며,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위(安危)에만 집착하는 이들은 망각의 깊은 늪에서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끌어안을 때 그들은 스스로 깊은 잠에서 깨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