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이루기 위해 가장 빠른 길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일에 있습니다. 우리의 갈길이 다양하다는 것은 특정 수련이 아니라 이 있기에 가능한겁니다

.
불교계열의 종교적 지식들은 그런것에는 현학적인 과학적인 논리로만 되어 있어서 정작 그 대상 우주(그것이 나온 목적_에 대한 경외심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빨리 말아먹고 벗어날 것으로 생각하죠. )이것은 우연히 저절로 나와 저희들끼리 진화한 자연원리가 아닙니다.

근원자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목적없이 저희들끼리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그럼으로 얼마든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고 말이죠. 생명도 말입니다.

 

불교 추종자들은 창조에 대한 경외없습니다.

내가 그나마 인정하는 것이 티벳불교이죠. 그 창조자가 '색계'를 만든 것근원자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을 만들도록 허락한것이 최고정점의 근원자의 절대자 뜻인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만을 위한 무가 되었을때,  당장은 편하지만 님들을 옭아매는 아주 피곤한겁니다...최고정점을 신체적으로 실질적인 차원에서 지금 당장 얻을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요.

인간은 인간 수준의 것만을 얻을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신과 연결하는 것하고 진정 신이 있는 곳에 그의 위치가 도달하는 것 다르다고 내가 수없이 이야기 했으며, 거기엔 실질적인 일들 신체 몸 삶 다양한 겸험 상차원 행성들의 거주민으로서 우리세계와 마찬가지로 거쳐야 올라가야할 차원과 밀도들의 신들의 위계질서 우주 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당장 얻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혼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착각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얻을수 있는 경지만을 얻을수 있을 뿐입니다.


최고 경지라는 것은 실상을 이야기 하자면 무가 아니며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주체로서 생각과 마음을 품을 줄도 아는 그 자신 개인으로서 절대 초월의 무극 무한의 입니다.

최고 정점에 도달하는 일이란 실질적인 신체의 진화를 통해서(희생-참여댓가를 통해서) 그 위치에 서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순준에 서 도달했다고 무따위의 최고경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님덜의 말을 빌리자면 혼 수준에서의 착각입니다.(정확히는 육체의 기반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육체 수준에서의 착각이죠-그런식으로 결코 육체를 벗어날수가 없죠) 설령 그가 진짜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가 실질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통해 신체가 진화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맛배기에 불과합니다. 신체가 거기로 가는 것이 진짜배기이며 그것은 다양한 밀도와 차원의 거주의 삶을 거치는 일이며 장구한 여정이라는 것을 아십시요. 그것이 님들이 추구하는 그 초월자에 대한 사랑이 표현이고 봉사입니다.


'불'색추종자들(여기에도 파벌이 많은데)에겐 최고정점 그것외에는 모두가 경계하고 버려야할 대상이죠. 이것이야말로 이원성입니다.

최고를 위해 정진하기 위해선 나머지것은 경계해야 배타하고 멀리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러기 전에 님덜이 최고목적이라는 것이

그 길로 가는 길에 대한 하나의 도피처로 생각하는게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요.

왜냐하면 그게 지나치게 서둘러 후다닥 갈수 있는양 과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길로 가는 길이 이기 때문이죠. 그길로 가는 길은 장구한 길이며 그런식의 태도로 해서 한번에 도달할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끝이 있어서 한번에 하고 말것이라면 그런태도도 얻어볼만하지만 그게 아니고 오랜 겸험이 걸리니 그런 과욕으로는 버틸수 없다는 거죠. 쓸데 없는 과욕 가만히 앉어서 최고가 되겠다고 하다가 불교 승려들이 다 그렇지만 일본의 모 승려도 여기에 좌절한 자입니다.  자기만 피곤하게 할뿐 결코 도달할수 없습니다. 너무 먼 목표 이상은 오히려 당면 과제로서의 앞에 촛점을 흐리게 합니다.


님덜이 최고 정점을 사랑한다면 그로부터 나온 이유 부여받은 일 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님덜의 말처럼 그것들은(님들이 최고목적을 위해 저급하고 여기는 것과 님덜이 추구하는 최고목표 둘은) 융합해야 합니다.

최고정점외에 모두가 환영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존중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것이 실체와 환영,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최고정점과 이곳 이순간 하나입니다.

무, 유 따위는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로서 신일뿐입니다.

설령 삶  존재 겸험에서 오는 교훈들 그것이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위치에 따라

님들을 오랫토록 하나 하나를 최고 정점으로 밀고 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탑을 쌓는 일과 비슷하죠. 하나의 돌을 놓고 그위 에 돌을 놓았을때 지나간 돌 혹은 돌들은 지난간 돌로서 환영이지만 그 돌이 그 다음의 위의 돌을 쌓게 해주는 디딤돌인 것입니다.

수영선수가 앞으로 나가는것은 외부의 물의 밀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나가는 것은 물을 밀고 나가는 힘때문입니다.

비행기가 뜨는 것은 공기가 딱딱해지기(양력) 때문입니다.

물이나 공기 그것을 모두 무로 환상으로 공의 관념으로 봐선 안됩니다.

붓다는 결코 공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색즉시공을 깨달았지만 또 그것에 얽매이는 일이 없도록 공즉시색이라고 말한것입니다.

모두가 공이고 무두가 색이라는게 아니라 그것은 상황이 주는 메시지 교훈에 따라 어떤것은 것은 공이고 어떤 것은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중간 콘크라스가없을때 그것은 파괴가 됩니다.


하나 하나 단계를 그것 자체로 실질적으로 보고 존중해야 합니다.

한번에 없어지지도 않지만 한번에 없앨 정신적 현상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이 존재함 봉사로서 인데 그것을 하지 않고 한번에 없애려 했을때 아다무스가 말한 그런 무지각에 빠지는 것이죠.그 의도와 동기 있어 하나 다를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깨달음' 후에도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함께 장구한 여정이며, 한번에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것의 작은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더 끝없이 있습니다. 창조된 밀도와 차원에 따른 신체가 있기 때문이죠.

무로 가면 유로 가서 다시 내려와 자신의 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근원을 향해 가는 일로서 장대한 진화의 여정을 거쳐야 합니다.

당신은 생명을 배우고, 창조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것에 중도 포기했을때 공연히 그 진화의 과정을 욕해대는 저기 저 일본의 모 요사스런 승려와 같이 되는 겁니다. 그러고도 진화의 여정 각 차원마다 삶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자리에서 관념따위의  겸험으로 여기는 것이 정말 최고의 경지라고 여긴다면 또 그것이 라면 그것이야말로 님덜의 말을 빌리자면 아다무스가 말한, 혼적인(육체안에서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착각입니다.

 

신이 창조한 세계가 그렇게 불교색 추종자들에겐 만만한게 아닙니다.

공간 속을 구신들처럼 맴돌지 마십시요. 확실히 발을 땅에 딛고 자기가 설정한 목표만큼 소화시키는 단계를 거쳐 하나 하나 올라가야 합니다.

깨달음을 체화시키는 것, 소화시키는 단계는 한번 훑는 경지가 아니라

직접 삶을 살아보는 일이고 그만큼 겸험이 필요하고 시공간이 걸린다는 것이죠.


창조들은 님들이오만하게 치부해버릴만한 환상이 아니며

님들이 실질적으로 딛고 넘어야 가야 할것들입니다.
당면 과제 충실해야 하는데 너무 먼 목표 혹은 아예 실질로 있지도 않은  목표는 여기에 촛점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힌트나 컨닝이 아닌것이 최고정점은 정말로 어떻게 이룹니까

최고정점에 이르는 것은 바로 님덜이 간과하거나 배타하는

내면 우주 각 차원과 밀도들 조직과 사회, 창조자상위영혼과 같은 실질적인 조직과 구조의 사회를 경계마다 거지치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각 차원과 밀도마다 살아가는 은하문명의 우주의 한 거주자로서 생명체의 겸험들을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봉사이기 때문이죠. 그 과정중의 하나로서 현재 우리 육체의 삶도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색계'라는 것도 근원자의 뜻 없이 창조된게 아닙니다.

창조자는 근원으로부터 인가를 받은것이고 창조자를 낳은게 근원의 뜻이며.

그것은 창조자를 통해서 근원창조할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한것입니다.

 

창조자는 피조물인 여러분에 대한 근원의 사랑을 뜻하고 증거하죠.

'색계'를 벗어나려면

역설적으로 '색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몸 담가 본 자만 벗어날 자격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근원자 뜻을 이어받은 창조신이 여러분을 위한 만든 창조이자 학교와 같은데 몸 담가 본자만이 거기에서도 벗어날수 있으며 그것이 근원자의 뜻이 담긴것인데 그것을 몰라보고 근원자만을 찾는다고 거기서 후닥닥 빠져나오려고만 한다면 나중에 근원자를 만났을때(만나지도 못할테지만) 숙제 안 해왔으니까 다시 빠꾸되어 오라고 할것입니다.

 

불교 색 추종자들은 창조자가 근원자의 뜻 관계 없이 우연히 나와서 저희들끼리 독단적으로 창조한것이니 내가 상관안해도 된다 나는 빨리 그것을 무시하고 벗어나고(거치는게 아니라 뚫고 올라가)'무색계'의 지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으로 오만한 생각입니다. 철부지의 욕망이고 천둥벌거숭이 같은 야망이죠.

여러분을 낳은게 창조자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자기를 낳았는지 모르는양 창조자와 그가 창조한 세계를 무시하는 여러분은 생명에 대한 사랑없이 자연의 마음을 무시한체 자연원리로만을 자연을 따지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도 몰라보고 단지 생물학적 고기덩이로 보는 냉혈 과학자의 태도 그것과 다름없습니다. 그것이 어둠이며, 여러분이 이곳에 온것은 바로 그 윤리와 경외하는 마음을 배우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이기도한것입니다.


깨달았다인간스승이라는 존재들 가만히 앉어서 모든 것을 무색 무지각으로 보는 경지가 몸으로 상위영혼을 만났습니까. 창조자를 만났습니까.(만났다면 그것을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로, 최고경지와는 상관없는 경지로 보지 않을 것이고 경외감을 가질것입니다) 그 이상의 위치에 실질적으로 선다는 것은  장대한 진화의 여정입니다. 실질적으로 있음 인정하고 신체적으로 정직하게 걸어 최고정점에 이르는 일은 삶을 통한 봉사와 함께 하며 여러 단계 경계밀도와 차원들을 거치는 일도 우주 나이 만큼이나 많은, 어떤 자들은 수백면년의 진화가 걸릴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엉덩이를 깔고 앉어서 뚫고 도달 한다고 도달한것이 아닙니다.육체가 변형되어 다른 차원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실로 그러한 '있음'을 정직하게 있음으로 직시하는 다루어야 하는데, 오랜 삶을 고통으로 여기고 도망가는 착각이이라면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이죠. 정직한 방법으로 육체를 소거시켜야 합니다.

정확히는 육체의 에텔화 변형이죠.


설령 육체안에서 진짜 최고 정점을 만나 하나가 된 기쁨을 느꼈다 해도 그것은 맛배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위치는 여전히 육체안에 있고 인간입니다.실질로 신체가 거기로 가는 경지가 있는데, 실질로 그것을 체화 시키는 것은 그 이후로도 오랜 여정입니다. 그것을 진화라고 합니다. 그렇게 체화의 높고 낮음(높고 낮음은 없습니다) 정도에 따라서 각 밀도와 차원에 여러분이 먼저간 선배의 영적존재들과 신들의 존재들이 분포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계질서이고(권력구조가 아님)그들이 성취한것에 비하면 육체수준에서 최고정점과 하나가 되었다고 최고가 되었다고 착각하는자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 모든 우주들에는 육체 안에서가 아니라 위치적으로 신체적으로 근원에 가까이 나아가 근원에 도달한 존재들도 있다는 것을 아십시요. 그들이 각종 물질계 및 천상의 구조와 신들인것입니다.

 

각 밀도와 차원을 동양식 한자 이름으로 풀이한 설명이 흥미롭습니다.

 

>>색계는 감각적 욕망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물질에 얽매인 존재 영역이다.

대범천(大梵天최고의 존재인 브라마가 있는 곳)·

무량광천(無量光天:빛에 휩싸인 신들이 있는 곳)·

복생천(福生天:축복을 주는 신들이 있는 곳)·

광과천(廣果天:큰 결실을 맺게 하는 신들이 있는 곳)으로 나누어진다.

 --이것을 얽매였다고 말하는데 이런 단계들을 보는 이해와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존재들과 그 존재들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어울림 그 사회로 보지 않고 단지 자연원리 기능원리로만 보는 병폐인것입니다. 물질적인것을 해학하다고 보는 혐의가 심어져 있으며 이것은 균형을 잃었다는 면에서 어둠에 대해 상대적으로 나온 또 다른 어둠입니다.

불교추종자들 그들은 생명에 대한 경외가 없고 마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저 위에 신들은  얽매여 있는게 아니라, 각 해당 상급자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자기 위치에서 봉사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 발전을 위해 우주에 봉사한다는 기쁨을 느끼고 사랑으로 충심하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상급자를 사랑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한 충성심얽매임으로 한다면 참으로 그는 딴나라에서 온 존재이며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느 우주에서 온 존재인지를 알길이 없는 것입니다.


특히 창조자는 근원으로부터, 근원이 보낸 존재로서 창조 임무를 부여받고 직강한 존재이지 우리와 같이 진화하면서 상승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근원으로부터 하강한 존재로서 윤회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바로 우리의 모습으로 배움을 얻어가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의 부분 부분들로서 분신들입니다. 장구한 여정 이후 아주 고도로 진보하여 우리와 같은 상승하는 존재들로부터도 창조자가 나올수 있습니다. 창조자를 거쳐야 물질계를 졸업합니다.


창조 우주를 경외하지 않은 무리들 사람들의 삶존중하지 않는 소극적 배타적 불교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오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이 조선시대때 유교가 불교를 탄압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마음을 경배하지 않은 그런 존재들은 우리 우주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다 버리고 떠나 최고가 될 야망으로만 가득차 있죠. 저 문구가 붓다로부터 나왔는지는 모르나 수련에만 정진해서 생명의 근원을 깨달은 붓다는 어떻게 보면 참으로 지독한 욕망을 가진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스타일이지 근원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찾아 오라고 나와 같이 되라'   본능을 심어주고 명령한것도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근원을 향한 그 열망은 대단한 것이고 고무적이긴 하나 문제는 그 방식이고 절차입니다.


이깨달음의 정진을 유란티아서에 의하면 근원에서 나와 근원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고 했으나, 유란티아서가 합리적으로 균형과 이해가 잡혀있는 것은 가만히 앉어서 하는 깨달음 따위로 무색계(지역우주이상 초우주) 뛰어넘을수 있다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체의 위치를 갱신(우주공간의 거주민의 삶들)하는 진화의 여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죠.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번에 더 높은 깨달음 따위로 뛰어넘을수는 없습니다. 창조된 신체가 있기 때문이죠. 캔더이시의 밀도와 차원의 설명에 의하면 물질세계최고 창조주 크라이스 마이클이 있는곳이 지역우주로 6차밀도라고 합니다. 이 크라이스트 마이클이 대범천신인 물질계의 최고 창조자 브라마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겨우 2차밀안의 3차원에 있다것을 아십시요.

 

>>물질적·정신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무색계에서 존재는 선정(禪定)에 의존한다.

선정에는 4가지 단계,

공무변처(無邊處공간의 무한함)·

식무변처(識無邊處사고의 무한함)·

무소유처(無所有處비존재의 무한함)·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意識도 아니고 의식이 아닌 것도 아님의 무한함)가 있다.


--이것은 물질세계(지역우주)를 뛰어넘은 순수 영들의 세계로 유란티아서의 초우주 이상의 세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거대 우주가 있으며 그것은 중앙우주하보나 그리고 파라다이스 섬으로 구성됩니다. 그 파라다이스 섬에 절대 완전 초월자 무한자 무극자가 존재합니다.


여기로 가기위해서 소위 말하는 '깨달음정진'은 어떻게 합니까...

깨달음은 이러한 단계 각 밀도와 차원마다 있습니다. 한번에 깨달음이 아닙니다.


지금 그 지위를 얻기 위해서 그 아래 과정을 거치며 거기에 따른 그 과정 자체로부터 오는 윤리들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것은 그때가 아니면 못 배우는 것이 있는데 그래서 윤회를 하는 이고 배워야할 때 배우지 않는 사람 그런것없이 저 단계만을 얻으려하는 사람은 오히려 거기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최고 목표만을 믿고 자기가 거기에 해당이라도 된양 남이 아닌  무슨 자신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자나 된양, 아무렇게도 살아도 된양 사람들 치뤄야할 댓가가 많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많은 겸험과 진화를 통한 여정이 필요하죠.

최고 높은 경지를 한번에 깨닫는 것그 이후 실질적으로 그것을 체화시키기 위해(신체를 변형시키기 위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다릅니다.

우리가 창조된 존재이고 신체를 가지고 있기때문이죠. 후자에 촛점을 모으십시요. 후자는 우리 모두가 신의 부분으로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신체적으로 그 과정을 살아 가야 합니다. 즉 살아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불멸불사로서 오래 여정이죠.아다무스 또한 무지각에 빠진자 도망간자를 온상적인 삶으로 생명의 세계 끌어내오기 위해 그런말을 한것입니다.

이런 오랜 여정이 아니면 도대체 불명불사인 영혼이 어떤식으로 자신이 불멸임을 들어낼까요. 그 모두가 불멸불사의 영혼이 불멸불사로서 하는 일입니다. 삶이 곧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런식으로 실질적으로 삶을 통해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선 그 중의 하나의 단계 혹은 경계로서 가만히 앉어서 끝에 도달할것처럼 하는 쓸데없는 최고경지아니라 당면한 단계로서 목표지로서 오차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욕계 격이 낮은 신이 사는 육천계(六天界)를 비롯해

인간·아수라(阿修羅)·아귀(餓鬼)·축생(畜生지옥(地獄)의 5도(五道)로 나누어진다.

 

더 높은 세계에서는 좀더 나은 존재로 태어나지만, 그것 역시 일시적이고 윤회의 굴레에 갇힌 존재로서 근본적인 갈등을 겪는다. 더 높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이 굴레를 깨뜨리고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루시퍼 사탄 아눈나키 휴먼노이드의 일부 변절자들 악성 파충류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윤회와 환생을 다루는 영계의 영역입니다. 4차원에 해당합니다.

이것에서 벗어난 세계오차원입니다...


님덜이 최고단계만을 꿈꾸고 자신이 거기라도 올라간양

그 이하 과정을 올라가면서 배워야 할것을 소홀히 한다면 님은 이런 존재들이 됩니다.

 

님들은 윤회를 관장하는 영역인 계의 사차원도 넘지 못하죠.

 

즉 완전한 물질을 넘어선 순수한 영들의 무색계에 가기 위해선

생각마음의 올바른 사용,

보편적 우주적 윤리봉사의 배움

님이 그 무색계를 향해 가기 위해 님을 밀어주는 것이란것을 알아야 합니다.

님은 그것을 배우기 위해 여기에 와 있고,

근원으로부터 뻗어나온 절대자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창조를 위한 창조된 세계에 대한 희생-참여최고정점의 순수어느 한쪽으로 강박으로 쏠리지 않고 균형을 이룰때 매순간 참된 자유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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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라

 

스승은 완전무결 최고 완벽하고 이 우주를 완전 초탈해서 우주로 밖으로 벗어나 있어야하는데 고타마 붓다가 이 작은 지구의 로고스(영왕靈王)직을 맡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도 신과 연결된 상태에서 그리고 창조안에서 배우며 진화해 가는 중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진화하려면 의 우주 세계를 우리 사회와 같은 하나의 실질적 조직이나 실질적 구조로 보지 않고, 있음을 있음의 절차보지않고 우주를 깨달음 따위의 한번에 단박에  초월할만한 실체가 없는 막연한 정신현상의 결과나 지나쳐야 할 쓸모없는 것들로 관념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말은 결코 없음은 있음을 넘을수가 없다는 거죠. 그는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아직 삶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통해서 존재함을 통해서 정직하게 신체를 변형시켜가는 그것을 하지 않고 창조된 영혼의 구조창조한 존재를 만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설령 완전 초탈했어도 그는 그 위치가 되어 그 공간의 기능만을 본것이며 그 기능을 창조한 존재본게 아닙니다. (만났다면 창조자를 허투로 보지 않고 경외감을 가졌을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체가 거기에 맞게 진화한게 아닙니다.

 

그의 신체가 있는한 즉 창조된 존재인 이상 아무리 높은 단계 경지의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것은 맛배기고 이제 거기에 맞게 살아가는 삶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도 그 이후로 실질적 삶을 통해 진화하고 배워가는 존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체는 창조물이기때문에 그렇게해야 소거할수가 있습니다.

진화는 배움이고 배움이 봉사입니다. 기능은 여러분 모습으로 존재하며 그러니까 님들도 신이고 누구나 얻을수 있지만 얻을수 있는 것만을 얻을수 있을 뿐이고 그것을 창조한 존재를 만나는 것은 또 다릅니다.

그것은 장구한 진화의 여정인데, 왜 이런 일을 해야 할까요.

왜 우주의 각 밀도와 차원들 은하 생명체로서의 삶을 거쳐야 하는 걸까요.

창조가 있기때문입니다. 창조된 존재(몸)가 있고 우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관념따위로 한껏번에 없앨수는 없습니다. 없는 무가 있는 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것이 창조이고 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교계열의 없음있음을 넘어설수 없습니다. 없음은 없음일뿐이기 때문이죠.

유는 창조적 힘이 있지만 무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원자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 여러분이 도달해야할 근원의 섬 그 자신 개인이면서도

지금 이순간에서 여러분 모두 입니다.

이 둘중 하나를 놓쳤을때 자신을 옭아매고 갇히는 지옥이 발생하는 것이며...

그 최고정점을 잊지않고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신이 창조한 세계를 겸험하며 삶을 통한 봉사가 양쪽이 균형이 맞었을때 비로소 행복이오고 천국될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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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아젠다'에서 벗어나려면 스승을 찾는게 아니라 자립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랑치유입니다.

자기 사랑이 자기 자신에 대한 치유입니다.

신은 저기에도 있지만 여기에도 있습니다. 신은 님덜 자신이기도 합니다.

님덜이 영혼의 생명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면서 최고정점을 해야 가야 그 일이 고행이 아니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수 있는겁니다.

 

자기 신뢰가 없다면 이 기나긴 여정을 못 견딜것입니다.

한번에 최고정점에 도달하려 하는 식으로 그길에서 도망가려 하겠죠.

이순간과 함께 하지 않고 그것을 배타하며 여긴다면 수만년일수도 있는 그 여정이 고행이되고 버틸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행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최고정점에 대한 봉사이고 기여입니다. 최고정점을 사랑한다면 그가 하는 일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님들은 님들의 상위자아 소속이고 상위영혼 상위자아의 나툼이고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상위자아가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것입니다.

님들은 목적없이 나온게 아닙니다.
상위영혼이 바로 그 신과 님을 연결해 줄수있는 중간자이데 그것 또한 공간 상의 기능이 아니며 님처럼 하나의 존재입니다. 실질적 구조로서 그것을 거치지 않고 최고 정점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다면 거짓이라는 거죠.

 

어떤 깨달았다는 불교 계열의 인간 스승도 최고정점을 이야기하면서 그 중간에 거쳐었어야할 자기 영혼의 빛을 만나본적도 없고 모릅니다.

겸험한적도 만나본적이 없으니까 영혼에 대한 경외심도 없습니다.

또한 근원자에 도달하려면

우리 우주 밖을 나가서 초우주에 도달해야고 중앙우주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전에 우리 우주의 뿌리로서 거쳐었야할 우리 우주의 창조자의 빛도 모릅니다.(그것을 그리스도 의식이라고 합니다. 예수 고타마 붓다그리스도 의식에 든자입니다) 그것은 그가 그 수준에 실질적으로 몸으로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백번 양보해도 근원자라고 해도 무에 신체적으로 도달했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라고 말할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는 무이니까요. 그가 무속에 들어가 무를 체험했다면 무에 닿는 즉시 그는 무가 되어 몸과 의식이 산산히 흩어져 버려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니까요. 그러니까 무로 들어가봤다 나온자여기 있을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려면 다시 육체와 신체 구조를 조직해야 하는데 그런일이 창조자 명령 없이 이루어질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따위는 수행과정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원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개인이라고합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 모두이죠. 무극입니다 무한입니다.  거기로 나온 존재들의 구술을 듣자면 우리는 창조된 존재지만 그는 창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그러한 하나의 존재가 우주에 있라고 생각하십시요. 존재는 존재일뿐입니다. 이상하다고 여기지도 말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요. 그냥 하나의 존재로서 그러한 존재를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은 현 수준에서 아무리 깨달아도 근원자를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가 된 기쁨 자기 사랑만을 깨달을수 있을 뿐입니다.그는 그 자신으로서 오롯히 개인이면서도 우리들 모두이며 무한이기때문이죠. 인간은 인간으로서 깨달을수 있는 만큼만(설령 그것이 근원과의 동질의 기쁨이라 하더라도 위치에서의 기쁨이며) 그가 근원자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신을 인간으로 깨달은 만큼만 깨달을수 있는 것입니다.


오차원만 되어도 삼사차원을 조망할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상위영혼과 하나가 되고 9차원 다차원통합할수 있는 '위치'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수가 있습니다.

위치로 가는 것은 실질적인 신체 변화로 가는 것이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최고로 도달할수 있는 영역이

순수한 백광의 빛기둥이 존재하는 9차원이라고 합니다.

 

상승마스터가 신체적으로 가장 높이 진보할수 있는 영역으로  9차원만 되어도 엄청난 수준인데, 8차원으로 내려와서 그 빛이 마치 프리즘을 통과하것처럼 다양한 색깔과 형태로 다채로워지죠...거기에도 그 진동수로 존재하는 행성들이 있고 거주민들이 있습니다.

붓다들의 거주영역도 이 9차원못 넘고 있습니다.

먼저 5차원 첫 관문으로서 그것을 딛고 그 다음 과정으로 나가도 나가는 것이죠.

최고정점으로의 진화의 여정이란 이런 과정중이 만날수 있는 하나 하나의 거주민 존재의 삶들을 거쳐가게 될것입니다.  진화는 유람이며 후다닥 해치울 비지니스가 아니기에 지구로 오는 존재가 있다면 토성 화성 목성등을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우리가 통상 말하는 '깨달음'이란  차원의 벽을 넘는 것을 말하며

개인 수준마다 다르고 반드시 최고 정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마다 용기있고 도전의식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다릅니다.


5차원은 이원성의 게임끝난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원성을 계속해서 고수하면 누가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요.

을 배타하해악한것으로 여기고 전통수행종교의 스승들보다 배타적인게 없습니다. 옳은 것은 있지만 그른 것은 없습니다. 어둠에 대한 경계 상황은 끝나가고 있고 이제 불교도 경계하고 신경을 곤두선체 옹송그리지 말고 세상 밖으로 삶으로 나와 합니다.

 

특히 이 사이트에 온 이상 말입니다. 무슨 놈의 명상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동의 영역에 대입해서 생각자체도 버려야 할것으로 저급하다고 여기는 그 자신입니다.  그것은 생각에 대한 피해의식인데  이 생각을 잘못사용해서 안 좋은 추억을 가진 과거에 일에 대한 무의식의 기억 때문입니다.

요는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인데 바른 윤리를 받아들이는데 있고 그것이 안된다고 용기가 없어 배타하고 편의주의로 없애버리려 한다면 그것이 파괴입니다.

혹은 생각할줄 모르니까 생각을 저급하다고 여기거나 앞으로 이런 식으로 균형을 찾지 못하는 전통수행종교는 5차원에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걸맞는 생각이 없이는 빛을 불러올수 없으며 4차원을 넘을수 없습니다. 그른것은 없지만 옳은 것은 있습니다. 악은 없지만 선은 있습니다. 다만  생각이 있기에 옳은것을 알아보기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을 알아보는 사고조절자이기도 합니다.이제 5차원 세계에서는 자아를 없앨필요가 없습니다. 에고라고 해서 음흉하게 볼필요가 없습니다. 옳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자아가 있고 신과 합일된 자아이기 때문이죠. 님덜의 말처럼 자아를 없애는게 아니라 자아를 더욱 신과 합일해서 건강하게는 것입니다. 생각은 광자로서 이기도 하고 신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생각없이는 창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최고정점을 만나는 것도 그에게는 생각으로 최고정점을 그 주위에 끌어들이는 그에게 있어선 하나의 창조입니다.


최고 경지니 뭐니 그 이상의 쓸데 없는 목표는 그리고 그 이하것들에  외계문명에 대해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은 5차원같은 그 길로 가는 길에 정작 분산시키고 촛점을 맺기 어렵게 한다는 겁니다...그것은 최고정점으로 가는 길을 오히려 정체시키는 겁니다.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최고정점에 도달하는 편법 아무것도 되지 않게 만들고 오히려 정체를 만듭니다.

 

5차원에 간다고 해서 거기에 머물고 최고 경지를 잊어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거치지 않고는 못 갑니다...

토끼가 아닌 거북이처럼 한발 한발 착실히 가십시요.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그것이 더 빠른 길일수 있습니다....이 중간 절차들을 나를 미혹하는 세계들이라고 삶으로서 행성의 거주민으로 거치지 않고서 건너뛰어서 막바로 최고정점에 도달할수 있는게 아닙니다. 최고의 경지에 들면 자아마저도 무시할수 있어?

근원은 그 자신이면서도 우리 모두입니다. 그 자신으로 있으면서도 우리 모두의 저급하던 신성하던 자아을 체험합니다.

이원성을 끝내지 못하는 원인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오히려 5차원그 이상 상차원으로 가는 것최고목적지로 가기 위해 먼저 가야할 길입니다. 그것을 하급하다고 보지 마십시요. 그것은 신촐나기들의 권력추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최고경지로 가기 위해 먼저 받들어야할 목표입니다. 중간 실질적 단계 건너뛰고 가만히 앉어서 하는 무따위의 최고경지 따위는 최고경지가 아닙니다.이 실질적인들을 오랜 배움의 여정의 것을 거치지 않고 최고정점을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은 헛것입니다.

 

최고 경지깨달았다 5차원의 자기 유체모르고 빛의 몸모르고 영혼창조자하찮은 것으로 무시합니다.

그것은 느끼고 감동하지 만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났다면 그는 창조(자)에 대한 경의를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그런것들이 이 바로 존재의 근본이요 존재의 본질인것입니다.

 
악은 없지만 선은 있습니다 선을 향한 진화는 있습니다.

이것을 가만히 앉어서 하는 따위가 해결해 줄수 없습니다. 무는 무일뿐이니까요.

있음을 있음으로 정직하게 보고 해결할 생각을 해뭐가 되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내가 불색 계열의 전통수행종교 추종자에게

자기 사랑자기 용서 용납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자기 용서이고 자비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용하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되

그것을 (그 최고 정점으로) 발전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겁니다.

자기 사랑을 했을때 치유가 되는 것이며 오히려 행동을 교정하고 고치기도 수월합니다.

거기에 (최고경지를 위한) 진전이 있고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안그럼 계속 정체입니다. 계속 그짓이고. 발전이 없습니다.

무는 무일뿐이니까요. 알아차려야만 합니다...이것 본질을 중간 사태를 보지 못한다면 굉장한 위선자기 기만일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얻을수 있는 경지만을 얻을수 있을 뿐입니다.

설령 그것이 근원의 것과 동질이라 하더라도 그 위치는 여전히 이곳입니다.

위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 있는가를 망각하면 그것이 어둠의 시작인것입니다. 이것을 실질적 신체의 진화로 영혼의 여정으로 옮겨가는것이 진짜입니다.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은 또한 모두가 배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설령 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교훈이 되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얻는 '배움'이기 때문이죠...그랬을때 그것은 더 이상 악이 아닙니다.

선악이 없다는 것이 잘못을 잘못대로, 사물을 사물대로 직시하고 인정하지 말라는게 아닙니다....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실질적인 변화니다.

그랬을때 그것은 더 이상 악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