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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4661...전두환 그리고 광주사태에 대해
kimi추천 14조회 2,21121.02.20 06:47댓글 128

두환이를 살려둔 이유?

그리고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자 전두환.

두환이가 CIA를 이용 광주를 밀어버리라 조처한 상황에 대한 

모든 사실은 미국 CIA 파일에 모두 증거가 있답니다.

두환이가 광주를 밀어버리고 싶어 

CIA에 도움을 청했고 

CIA 는 두환이의 청을 들어주었고

두환이는 북한군을 이용 광주를 밀어버린 증거와

그당시 일어났던 모든 증거가 이곳 미국 CIA 파일에 있답니다.

광주사태에 대해 모든 사실이 폭로될겁니다.

먼저 한국의 딥스테이트 정리가 끝나게 될거랍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뿐만이 아닌 전세계에서 그동안 미국의 CIA가

횡포를 저지른 모든 사건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증거를 각국에 보낼예정입니다.

그동안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이 모두 해결될거랍니다.

80건에서 100건이 넘는 전세계 쿠데타의 증거가 CIA 파일에

있다 합니다.

고로 우리님들이 알고 싶어하는 광주사태의 진실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문통에게로 건네질 겁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국민앞에서 정식으로

사형이 될것같단 저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광주사태가 국민앞에서 증명될때까지 두환이는 살아있을거

같단 생각입니다.

일단 한국 딥스청소 먼저 하고 나서의 일이니 

팝콘 준비하시고 기다리셔요.

 
분류 :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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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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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릭

2021.02.21
16:51:44
(*.100.11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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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 5 18 사태가 났고, 뉴스에서는 광주지역이 패쇄되어서 들어갈수도 없고 나올수도 없고 온갖 유언비어가 돈다는 내용이고 자세한 내용 언급은 없었지요.(시민군 폭동과 계엄군이 대치중이라나 어쩐다나???)


2) 1980년 사태 이전에 1979년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다가

부하 김재규에게 총탄맞은 일이 생겼는데 이사건을 10 . 26 사건으로 부릅니다.

ㅡㅡㅡㅡㅡ

10·26 사태

결국 핵심권력층 구성원들의 상호견제를 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그의 용병책은 유신체제에 항거한 1979년 '부마사태'에 직면해 오히려 측근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다. 1979년 10월 26일 사석에서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싼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의 언쟁 도중 그는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사망했다(10·26사태)

베릭

2021.02.21
16:58:52
(*.100.11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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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당시 박통 떠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대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12 12사태가 터집니다.

박정희는 70년대 독재로 악명을 떨친 악인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의미없으며 그의 악행들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자로 인해서 수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당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하며, 박정희의 군사구데타를 흉내낸

전두환과 노태우도 같은 부류의 도적들 수준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 등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군사 반란 사건.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했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베릭

2021.02.21
17:39:16
(*.100.11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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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1년 전두환은 대통령 7년을 하기로 하고 주변세력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면서 정권을 누리면서 재산강탈작업을  하면서 숱한 악행들을 자행합니다.(국제기업 공중분해와 도산 사건!!!)

그자의 정체를 알게된것은  광주사태의 사진들이 비공개적으로 모임들을 통해서 정보가 전파되면서 실상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트럼프와 기사이야기 카페의 댓글 본즉, 그당시 실상과 진상들은

당해본 광주시민들과 목격자들만 알수 있을뿐, 진실은 역시나 많이 은페되고 허위사실들이 역시 많다는 것에 분노가 터집니다. 솔직히 댓글 주고받는 사람들의 대화흐름들을 보고서 실망이 컸습니다. 거기 댓글창 대화에서 당시 광주시민으로 살았다는 회원만이 정확한 진실을 말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당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것이 북한군소행인냥 취급하는데, 한국군을 투입해서 지휘를 한것이 진실입니다.

전두환은 공수부대 군인들을 3일 굶기고 술에 약타서 먹게한후에, 광주시민 학살극을 벌이도록 했다고 거기 참가한 군인의 실토로 증언되었습니다.


최초 시작은 김대중씨의 자택연금을 시작해서 광주시 대학생들이 그에 대한 항의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군인들은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잡으러 캠퍼스안까지 침투후 연행시작했는데 포승줄로 굴비 엮듯이 묶어서 대량으로 끌고가서 가두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이 학생들을 풀어주자고 항의를 시작했습니다.

ㅡㅡㅡㅡㅡㅡ

계엄군은 공수부대 비행기 헬리곱타까지 동원해서 저항하는 시민들과 건물들을 향해서 무기공격을 먼저 시작했으며 그런 증거는 광주시내 거주했던 외국인 기자가 모두다 증거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공수부대 군인들이 한국인기자들은 철수시키고 통제했으나 외국인기자들은 통제를 할 수 없었기에 광주사태 증거들이 남았습니다.

전두환은 사적 욕망과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일에서 미국 군부의 허락을 받고서 그짓을 했으니 미국 군부도 역시 범죄자 집단이 맞습니다.


북한군이 설령 개입했어도 지만원은 거짓소설을 추가로 써서 떠들었고 진실을 은폐하는 어둠세력의 끄나풀이었을 뿐입니다. 그자가 사진조작으로 광주시민을 북한군으로 둔갑시킨 뻘짓은 제가 토론게시판에 이미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카페회원들은 지만원의 거짓말질도  모르고 박정희의  경제업적은 두둔하면서 박정희가 행한 일부분 시민들에게 간첩누명 씌워서 죽이기 작전들을 행한  사실들을 언급을 않하더군요.


아무튼 수많은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연행하고 고문한것은 그당시 신군부패거리들의 약행들이었으며, 북한군은 끼어들어봤자 결코 선두적인 주동자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일제시대의 일본군이 그렇게 악질이었다해도 캠퍼스안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잡아가고 폭력을 행사하는 짓들은 안했다는데, 광주사태때는 그야말로 6.25 동족상잔 사건을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5.18  사건이전에 이미 12 12  하극상 군사 반란사건이 있었으니

전두환 노태우 악인들에 대해서 관용을 갖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당시 군인들이 행한 악행들은 무차별 살상, 어린 여고생들 강간살해후 가슴을 도려낸일부터 악행이라는 온갖 악행들을 저질러서 6.25시절 북한군보다 더 심했다고 혀를 찹니다. 당시 광주살다가 광주사태 겪은 목격자를 개인적으로 알았기에 전해들은 이야기이며, 그사건으로 지인의 어머니는 정신병까지 생겼는데 걸핏하면 총든 군인들이 보인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지인은 친구가 도청에서 모이는데 같이 가자고 했는데 자기는 가기싫다고 안갔다고 합니다.

지인의 친구가 도청에서 군인들에게 살상을 당했는데, 신원확인을 하러 갔는데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얼굴을 알아볼수 없도록 짓이기고 뭉갰다고 합니다. 자신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것은 둘이서 같은 운동화를 산적이 있었는데, 그신발을 보고서 자기친구라고 신원확인 했다는 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

그때 일 겪은 광주시민들은 정신고통과 트라우마가 엄청나게 큽니다

너무 괴로와서 잊고싶어하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극소수의 지배계층 어둠형 권력추구자들때문에

다수의 피지배계층들의 무고한 고통받는 사건들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승만의 보도연맹사건부터 계속된  그동안의 어둠의 권력자들이 너무 판을 친 한국현대사는 비극의 역사입니다.


베릭

2021.03.17
1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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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v.daum.net/v/20210317134502387?x_trkm=t


cp_newsis.gif

5·18 계엄군, 자신이 쏜 총에 숨진 희생자 유가족 앞 사죄

변재훈입력 2021.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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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21031755507





이재명 "전두환 씨는 호의호식하고 있는 독재자"


    

입력2021.03.17 21:29

"한 평생 떵떵거리며 살았을지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반쪽도 안되는 남루한 삶"
사진=이재명 페이스북

사진=이재명 페이스북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호의호식하고 있는 독재자"라고 비판했다.

17일 이 지사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소속이었던 한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사망한 희생자 유족과 이날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한 소식을 전했다.

이날 이 지사는 '전두환씨는 끝끝내 알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기사를 보고 종일 먹먹했다. 유족 앞에 엎드려 오열하고,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우는 모습을 보며 모질었던 우리 근현대사를 책망하게 된다"고 운을 뗐다.


이어 "눈물로 용서를 구한 이는 '저의 사죄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았다'고 했지만 유족께서는 '늦게라도 사과해줘 고맙다'며 서럽게 울었다"고 전했다.





이 지사는 "저 넓은 품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려 41년의 나이테이다. 매해 고인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보내온 세월.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그는 "사죄와 용서, 그리고 치유의 길이 얼마나 아득한 길인지 새삼 절감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 그리고 당시 발포했던 공수부대원들. 또 얼마나 많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 오늘도 숨죽여 지난날의 악몽을 마주하고 있을까"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전두환 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죄는커녕 진실을 가리고 호의호식하고 있는 독재자. 전 씨는 끝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사죄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저 숭고한 삶의 장면들을 끝끝내 이해도 느끼지도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재명 지사는 "한 평생 떵떵거리며 살았을지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반쪽도 안되는 남루한 삶"이라는 인물평도 남겼다.


베릭

2021.02.21
17:03:45
(*.100.11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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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구데타로서위법 불법입니다! 정당하지 않는 반역 반란 범죄자들의 작당 모의질을 도모후에 일어난 권력쟁취를 위한 음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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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 등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군사 반란 사건이다. 신군부는 12월 13일 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 사후 승인을 받은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이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으며, 1981년 개헌으로 제5공화국이 시작됐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은폐돼 있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야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 이를 계기로 계엄사령관에 취임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군 내부개혁을 진행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했으며 이에 따라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됐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신군부)는 이에 불만을 품고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감행해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했다.

전개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 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등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저녁 6시 50분 경 무장한 제33헌병대 병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했다.

약 20분이 지난 7시 10분경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 총으로 위협하며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했다. 이후 저녁 7시 30분경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끌고 나와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참모총장 부관이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합수부측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발사해 양측간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해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 같은 시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2. 12사태

12. 12사태 12·12 사태를 일으킨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쿠데타가 끝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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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부분에 대해 추후 대법원은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신군부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승화 참모총장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후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12·12 군사반란 다음날 아침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배경설명을 발표했으나,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 육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 하에 두었다. 또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했으며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 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와 달리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며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이 임명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 김복동, 유학성, 유병현, 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며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그후 십여년간 밝혀지지 못한 채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베릭

2021.02.21
17:10:56
(*.100.11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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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12군사반란

십이십이군사반란 , 十二十二軍事叛亂
요약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

시대
현대
발생
1979년 12월 12일
성격
군사충돌,
유형
사건
분야
정치·법제/정치
관련 인물/단체
전두환, 노태우
개설

이들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崔圭夏)의 재가도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반란 사건이다. 유혈충돌이 수반된 하극상 사건이었다.

12·12군사반란·12·12하극상·12·12쿠데타·12·12쿠데타적사건 등이라고도 한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17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였다.

5·17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로 간주될 수 있지만 12·12사건 당시에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목표가 아직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았으므로 12·12군사반란은 예비 쿠데타로 간주되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대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정승화는 군 장악을 위해 윤성민(尹誠敏, 참모차장),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 정병주(鄭炳周, 특전사령관) 등을 중용하여 지휘계통을 개편하였으며, 10·26사태에 직접 연루되었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축소 개편하였다.

이로써 정승화는 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자신이 정치 일정을 이끌어 가는 데 핵심역할을 담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가 4년제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기수인 11기의 지도 아래 하나의 배타적인 파벌집단을 형성하면서 군부내 세력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내용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격으로 10·26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부세력(신군부)이 기존의 육군지도부였던 정승화 세력과 갈등하게 되었던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게 한 대립의 쟁점은 사건수사와 군의 인사문제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金載圭)의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10·26사태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0·26사태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의 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에 대기하였으며 사건 이후 김재규를 구속할 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그 수사를 지연시킨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물론 정승화가 10·26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일 명백히 밝혀졌다).

정승화의 연행을 실행하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군단장 황영시(黃永時),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뒤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5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뒤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로 연행하였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지휘하의 육군 수뇌부는 이 사실을 확인하여 전군(全軍)에 비상을 발동하고 합동수사본부측에 정승화의 원상회복을 명령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미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였으며 9사단 병력 등은 중앙청으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이에 진압군 병력 출동을 추진하였던 육군수뇌부(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李建榮 3군사령관, 윤석민 참모차장, 文洪球 합참본부장)는 모두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되었다.

이와 같은 반란군의 정승화 연행과 병력이동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가 김재규와 연루된 새로운 사실(돈을 받는 등)을 발견하였으니 정승화를 연행 조사토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후일 김재규에게 받은 돈 300만 원은 단순한 추석 촌지로서 당시 전두환도 500만 원 수령 사실을 인정했었다고 주장하였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데 실패한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과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鄭鎬溶)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미국은 12·12사태를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들을 적절한 통고없이 사용한 데 대하여 한국 군부에 항의하였다.

12·12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건은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김영삼(金泳三)정부가 출범한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으므로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하였으며, 1994년 5월 13일 정동년(鄭東年) 등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관련자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하였다.

이에 같은 해 10월 29일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으나 1995년 1월 19일에 헌법재판소에서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계속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 공소권이 없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5·18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11월 16일 비자금관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에 5·18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국민들의 요구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로 부응하였던 것이다. 11월 30일 검찰은 12·12사건과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하였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12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12월 19일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으며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사건 및 5·18사건, 비자금 사건 관련 공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의 과정에서 전두환은 제5공화국 정부는 합헌정부이며, 내란정부로 단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노태우는 이 사건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에 재판부가 1997년 4월 17일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내란목적살인 행위였다고 단정함으로써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은 배척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 벌금 2626억 원 추징이 선고되었고,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위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즈음해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양인 등은 석방되었다. → 십이륙사태, 오일팔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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