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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 천문학으로 고조선사 증명했다 >

[시사저널] 205.206 함병호 93/9/30.10/7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 기법으로 시각화했다.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 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단군조선시대의 천문 현상 기록

시기
기록 내용
문헌
BC 2183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
세기, 고사
BC 1733 13세 단군 홀달 50년
五星聚婁
세기, 고사
BC 1533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
日蝕
고사
BC  935 29세 단군 마휴 9년
南海潮水退三倜
세기, 고사
BC  918  6세 기자 2년 7월
七月 日蝕
고사 (기자)
BC  837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
三月 日蝕
세기, 고사
BC  765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
四月 日蝕
고사
BC  579 19세 기자 1년 봄
日蝕
고사 (기자)
BC  423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
二月 日蝕
고사
BC  248 47세 단군 고열가 48년10월
十月朔日 日蝕
세기
BC  241 36세 기자 인한 35년
日蝕
고사 (기자)









<한민족의 뿌리 사상>  송호수(宋鎬洙)

        미국 S.Baylor 대학 박사과정졸업, 철학박사
        동아대, 부산대, 고려대, 한성대 전임 및 강사
        미국 S.Baylor 대학 명예교수 및 연구교수
        저서 : '종교단체의 재무행정에 관한 비교연구'
               '민족정통사상의 탐구'
               '한민족의 뿌리사상'
               '겨레얼 삼대원전(三大原典)'

최근 일본 학자 오향청언 (吾鄕淸彦) 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 (衛滿) 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 (桓雄天皇) 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 (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 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 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 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기'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 (安含老)는 서기 600 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 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 천 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9 천 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몇년 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한동 〈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 년 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 (少昊氏) 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 년 전 것" 이라고 합니다. 5785 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 (少昊金天氏) 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입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라" 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호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 천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 년이나 더 이후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습니까?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5 천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 세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 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식자우환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동기 개시 년도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의 상한을 3 천년밖에 안보고 있죠. 그러니까 3 천년 이전에는 국가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한강 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이 3 천년 이상 소급을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단군 조선의 근거지는 도대체 어딥니까? 백두산 아래 아사달입니다. 아사달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빈인데, 그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북한의 학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봅시다.

지난 78 년 8.14 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 천 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 천 년 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 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은 4 천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상한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 천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사상의 원형 홍익인간(弘益人間) - 우리가 일찍이 남북 5 만리 동서 2 만리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한웅천황 시대가 1565 년 동안 단군 조선 시대가 2096 년 동안 지속되면서 통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예사로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웅천황 시대까지는 그만두고라도, 단군조선 시대만 해도 2096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아니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한 개의 왕조가 2 천년간 지속된 그러한 역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하 은 주는 동이족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로 300 년 이상 지속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 왕조는 300 년도 채 못 가 전부 망해 버렸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위대한 철학, 그 철학은 바로 홍익인간 (弘益人間) 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법 제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법 제 1조가 뭐냐 고 하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글픈 일입니다. 3~40 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 이념이 무엇인지,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환인이 환웅을 불러 놓고 삼위산과 태백산 그 일대가 홍익인간할 수 있는 곳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 천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삼인 (天符三印)을 주어서 보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옵니다. 이렇듯 홍익인간이란 용어의 출처는 환인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지만, 실은 환인으로부터 홍익인간이 나와서 환웅 이후 단군이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법 제 1조가 홍익인간입니다. 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헌법 전문을 살펴볼까요? 제일 먼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로 시작은 잘했는데 맨 끝이 좋지 않아요. 1980 년이 뭡니까?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 년밖에 안되었다는 얘깁니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 년이라고 쓰며 기독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하장을 보내는데 서기를 쓰지 않고 이스라엘 년도 5700 년 이렇게 쓰는데 우리 나라는 왜, 국통이 없습니까? 1980 년이 왜 들어갑니까?

또 한가지, "3 1 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면 년도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조선건국 4252 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에는 1980 년이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화경 (造化經), 교화경 (敎化經), 치화경 (治化經), 이 삼화개천경 (三化思想開天經) 이 바로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조화경을 '천부경'(天符經), 교화경을 '삼일신고' (三一神誥) 라 하며 치화경을 ‘참전계경' (參佺戒經) 이라고 하는데 이 3대 경서가 그 기본입니다. 우리나라 1 만년 역사의 뿌리가 곧 이 3 대 경전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유교 사상 도교 사상이 파생되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반증을 제시할까요? '맹자'에 나오는 유교의 5륜은 아무리 유교에서 썼다고 해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듯, 그 출처는 동이족입니다. 말씀드리죠.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 (司徒:문교장관) 를 명하고 인간에게 윤리를 가르치라고 해서 글이 만든 게 바로 5륜입니다. 글은 동이족이입니다. 그리고 순임금도 '맹자' 에 보면 "저풍 (諸馮) 에서 태어나 부하 (負夏) 땅에 옮겨 살다가 명조에서 죽었는데 그는 동이족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륜을 선포한 글(契) 이나 오륜을 선포케 명령한 임금 순 역시 동이족입니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삼강오륜의 출처는 동이 문화입니다.

공자는 어떤가요.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 (宋微子)의 후손인데, 현재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대만 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하였고 '고사변' 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공자 자신도 '논어' 에서 말하기를 "술이부작" (術而不作) 이라 하여 "나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해서 서술했을 뿐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고 밝혔고 중국의 고전 '초사' 를 보면 "황제 (黃帝)는 백민 (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황제의 5세손인 요임금이 동이족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 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동이계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파생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 (老子)가 황제의 사상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황노지교 (黃老之敎) 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동이족인 황제의 사상, 즉 동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노자의 도교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변질되어 고구려 시대 때 역수입되어 들어왔다고 해도 역시 그 뿌리는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불교 사상은 또 어떤가 살펴보기로 하죠. 석가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불시대 (前佛時代)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 (指空禪師) 의 천보산 희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석가 자신도 '대방광 불화엄경' 보살 주척품에서 말하기를, "해동 금강산에 법기 (法起) 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는데 그 불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 (從昔己來)" 고 증언하고 있으니, 이는 석가 출현 이전에 우리 나라에 이미 전불시대 즉 가섭불 (迦舌佛)시대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섭불이 앉아 법을 설한 연좌석 (宴坐石) 이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옥룡집' (玉龍集) 과 '자장전' (慈藏傳) 에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되겠습니다. 4700 년전에 나온 '황제내경소문' (黃帝內經素問) 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 (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거죠.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씀드리자면 법률학자인 동경 대학의 나까다 (中田薰) 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 (文化東源論考)' 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 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메르의 역사 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 년 전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학자 크래머 (Kraemer, 1897-) 와 일본의 우에노 (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 (八卦符號) 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 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 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 (Enril) 영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5500 년 전에 복희문화를 가지고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리' 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고 부릅니다. 소머리강이다 이거죠.

뿐만 아니라 '삼일신고' 신훈 (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 (在無上一位) 하사 유대덕대혜대력 (有大德大慧大力) 하사 생천(生天) 하시며 주무수세계 (主無數世界) 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상 그대로입니다. 또 '참전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 (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고 꼭 같습니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희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 제단에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동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너가 전해 내려온 거죠.

서양 사상을 종합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둘인데 소급해 올라가면 이 두 가지 사상이, 수메르 문화에서 나왔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러한 신본과 인본사상은 우리의 신인사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지요. 이렇듯 지구상 모든 사상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빛은 동방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적으로 보아서 9 천년이 되는 역사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서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메르족이 5500 년밖에 안됐는데... 이런 역사가 없죠.
제 4빙하기 이전의 역사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억년 전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인류하고는 관련지을 수 없습니다. 제 4빙하기가 이 지구를 휩쓸고 간 뒤에 살아 남았던 우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최초에 천하(天河)의 동서에 있다가 칠월 칠석날 만나 가지고 오색 인종을 낳았다" 는 것이고,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 갑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갑자가 60 년이니까 즉 21960 년 전에 제 4빙하기가 물러가고 제일 생명력이 강한 한 남성과 여인,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판도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방 지역은 천지지 소시생야라" 우리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점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면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폄石亦從東方 來)" 라고 했듯이 한의학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한의학의 한자를 "漢"에서 " 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진작 바꿨어야 했어요.
한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니까 중국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이 漢나라 라는 국호를 정할 때 이 한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지, 없었다면 어떻게 漢나라 라는 국호가 생깁니까? 그러니까 한나라가 있기 전에, 이미 이 글자 한문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글이라는 사람하고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둘 다 동이족이지 않습니까?. 동이족이 만들었으면 동이족 글이지 왜 중국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사상의 원천은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 홍익인간 사상의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화경, 교화경, 치화경이 이 원리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 게오르규 (Gheorghiu 1916~) 가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 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 이라고 지난 1986 년 4월 18 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 지를 통해 발표한 겁니다. 신부 옷을 입고 성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세의 10 계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한국 민족이 낳은 홍익 인간 사상은 미래 21 세기의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 사상이다" 고 역설했습니다. 그 이상 얼마나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등하불명이라고, 지금 주걱 들고 주걱을 찾고 있습니다. 칸트, 헤겔을 찾고 독일철학 어쩌니 하고 아까운 시간만 다 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보배는 왜 하나도 개발 못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이다" 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그걸 모르고 외국 사상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하고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은 실로 홍익인간 사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결코 홍익인간 사상하고 대립된 사상이 아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라는 것은 홍익 인간 사상과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홍익 인간 사상의 내재적인 사상이다"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이 대단히 여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와 달리 적어도 2 천년 동안 외래 세력에 밀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기록에 담겨져 있는 우리 민족 사상사적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게 오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중국적인 사대주의 사관 (事大主義史觀) 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구 문화의 홍수에 밀려서 바른 사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만, 분통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기약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현재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일제 하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그 밑에서 배운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각 중고등학교에서 그러한 사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고 계신 분들이, 과연 우리 국민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죠.



















한민족의 일만년 역사

우리 역사의 맥과 우리 민족의 또다른 맥


      한국    7세 3301년 B.C 7199
      배달국 18세 1565년 B.C 5885
      조선   47세 2096년 B.C 2333
      북부여  6세 182년 B.C 239 -  낙랑국, 중삼한, 위만, 동부여(가섭원 부여)
      고구려 34세 846년 B.C 178 -  백제,신라,가야: 사국시대
      대진   15세 259년 A.D 668 -  신라(통일신라):남북조시대
      고려   34세 475년 A.D 918 -  요, 금
      조선   26세 528년 A.D 1392 - 청

이 표는 생소한 점이 많을 것이다. 왼쪽은 우리역사의 맥이고 오른쪽은 우리 민족의 또다른 나라이다. 여기서 여진, 거란이 나오는데 여진족은 우리 민족에게서 갈라진지 2000년 경이고 거란은 그보다 오래 되었는데 우리에게는 형제나 다름없는 핏줄을 가지고 있다.
동이족으로부터 거란, 흉노, 선비, 몽고, 여진족이 갈라졌음이 또한 한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

(1) 한인의 한국시대:
        
한국은 천산 동방으로 [동서가 2만리, 남북이 5만리] 의 방대한 문명의 대국으로 파내류국으로도 불리웠다. 당시 천산에 거하며 듣도하여 덕이 높던 성자가 천왕으로 추대되어 한국을 통치하였는데 그 이름을 안파견이라고 하였다. '만인의 아버지' 라는 뜻의 안파견 한인은 초대 한인으로서 한국을 다스렸는데 한인이란 통치자와 제사장의 관직명이다. 당시 한국은 12 한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파견 한인은 자신의 형제 9인으로 하여금 각 한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광명의 제국]이라 불렀다 (삼성기하, 태백일사, 규원사화] 제1변의 남, 북 문명의 정통을 계승하여 중앙 아시아에서 태동한 이 한국문명은 제2변의 동, 서문명으로 맥이 이어졌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는 최근 120년 동안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약 5,500년 전에 현서양문화의 뿌리인 슈메르문명이 있었으며 이 문명을 건설한 슈메르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김상일,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국) 또 북미의 오리건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가 동이족의 짚신과 흡사한데 방사성 탄소의 측정에 의하면 이는 약 9천년전의 것이라 한다. 미국 워싱톤 박물관(스미소니언)에는 이외에도 나무절구, 소쿠리, 광주리, 베틀, 어망, 물레 등 우리 선조들이 쓰던 생활 도구와 동일한 것이 많다고 한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천산 산맥은 그 주맥이 동북쪽으로 뻗어 나가 소련과 캐나다의 국경인 베링해협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붙어 있었던 약 25,000 년 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던 동방족의 이동은 1만년 전까지만 해도 육교의 역할을 하던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진행되었다.
        




(2)한웅의 배달국시대

한국의 정통 정신을 계승한 분은 후기 한국 말경에 당시 '자식들의 마을(서자부)' 의 수장이었던 성자 한웅으로, 한웅은 야만 생활을 하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한인께서 중국의 감숙성(돈황현)에 있는 삼위산(삼위산)과 동방의 태백산을 살펴보고 태백산으로 가고 싶다는 한웅의 뜻을 허락하여 태백산으로 파견하였다. (6천년전) 이 때 한인천제께서는 제세 핵랑군이라 불린 문명 개척단 3천명과, 천부인 3개를 주고 개천입교,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만세 자손의 홍법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한웅께서는 이를 배달국을 여는 개국의 창시 이념으로 하셨다.
당시 한웅의 동방 백두산 문명 개창시에 송화강-백두산 일대에는 토착민인 웅족과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원주민은 호족이었고, 이주민은 웅족이었다. 호족은 사납고 약탈에 능했으나 점차 이들은 웅씨족에 의해서 융합되었다. 웅의 음은 검이며 검은 곧 신으로 불리었다. 또한 호는 불로, 불은 시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두 민족의 협력 건국으로 인하여 한웅께서 수도를 신시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

(3)단군 조선시대

동아문명의 선도 역할을 하셨던 신시 배달국 시대의 통치자인 한웅은 큰 스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이라 아는데 이는 거룩한 스승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다. 한웅이란 당시 우리 광명 민족을 이끌어 주신 거룩한 스승 (한:크다, 밝다 웅:수컷, 스승) 이라는 뜻이다.
배달국의 말기 단웅께서 웅씨 왕녀와 결혼하여 낳은 분이 초대 단국 성조이시다. 단군 성조께서는 신묘년 (BC 2370) 5월 2일에 탄생하셨다.
신인의 덕으로 원근에서 외경하여 14세 되는 갑진년에 웅씨왕으로부터 비왕으로 임명받아 24년간 대읍국의 국사를 섭정하였다. 38세 되는 무진년에 단국으로부터 돌아와 마지막 거불단 한웅천황께서 돌아가시자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임한다는 의미의 관명이다. 단군 성조께서는 한인과 한웅 천황의 정통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옛 신교 정신을 부흥시켰고, 동방 문명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의 대홍수는 단군성조께서 87세 되던 정사년 2월 17일에 단군 조선의 대영 토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홍수가 범람한 다음해인 88세 되던 무오년 7월 5일에는 운사 배달신으로 하여금 강화의 전등산에 삼랑성을, 마리산에는 제천단(참성단)을 쌓게 하였다.
105세 되던 갑술년 (BC 2217) 에는 태자 부루를 도산에 보내시어 <도산회의> 를 소집하고 순임금이 특파한 우에게 오행 치수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초대 단군 성조께서는 세계 문명의 시원 국가인 한국과 한웅천황의 대도 정신의 법통을 정통으로 전수 받으시고 황하, 양자강 유역, 만주 등의 동아시아 대부분을 통치하셨다. 전 영토를 삼한으로 나누어 부단군 격인 왕(한)을 두어 다스렸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관할하던 진한은 단군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중국 동부는 번한, 한반도와 일본은 마한이 통치하였다.

      참고서적 : 한단고기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 서희건, 고려원
                 소설 한단고기 - 김태영
                 한민족과 증산도
                 민속문화론 - 임재해, 문학과 지성사



친일사학계 비판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지금도 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부분을 채워 가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흘러간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한 E.H 카아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있게 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것에 투영되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족의 역사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광, 시련과 애환이 깃들이어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 정신을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 존망을 결정하는 중지 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즉 민족의 자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민족의 올바른 역사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사대주의와 외래사상은 일 만년 역사 속에 찬연했던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왜곡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이 땅을 강제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 민족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 날조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서구의 퇴폐적 물질문명과 외래 사상의 폐해는 민족 역사와 정신의 근저까지 흔들어 놓았다. 이제 세계사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상처투성이의 억눌려 왔던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올바로 정립하고 계승, 발전하고 오늘에 재조명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달해야만 하는 과제가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1.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과 민족 역사의 왜곡

'먼저 조선 사람들의 자신의 일.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일제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 신앙들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동제를 중점적으로 탄압했는데 촌산지순의 연구에 의하면 동제는 일본의 신도와 공통성을 지니며, 여러 가지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현실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민중 심성을 개발하는 가장 으뜸가는 향토 오락이며, 성씨별 분열을 막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니고, 마을 사람들의 심신을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일제의 반일본화 작업에 있어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경찰국에서는 중추원 시정 연구회의 연구를 자문 받아 무녀 취체 법규를 제정하고 무당들을 경신 단체에 가입시키는 한편, 강력한 취체 행정으로 이를 금압하고, 학무국에서는 신사.신도 정책을 펴 나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사회과에서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미신(迷信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함) 으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사서 20 여만 권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당시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소위 '공명.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혀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즉 '공명.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1차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37년까지 이루어 졌고 압수 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 지리, 애국 충정을 고취하는 위인 전기.열전류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조선 세종때부터 단군관계 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들 사서 가운데는 귀중한 단군 관계 고사서가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권중현, 박용구, 이완용, 박영효 등이 있다. 다음에 다시 서술하겠으나 우리는 이병도 씨가 이 작업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선사의 성격과 구성 내용 등을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 사관을 성립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선사는 위의 요건을 충실히 따랐고 또 단군 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악질적인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류 (금서룡) 같은 자를 중추 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때 결의한 시대구분인 상고 삼한. 삼국. 통일 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 이전. 삼국 시대. 신라 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 때는 신라 통일 이전. 신라 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난다. 몇 가지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 (반도 북부--중국의 식민지, 반도 남부--임나 일본부) 조선 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다 (당쟁.반란의 의미 확대) 조선의 조정은 동학란 때문에 청나라를 불러 들여왔으나 일본이 처음 무찌르자 합방해 주기를 원하므로 합병하여 조선인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잘 살게 되었다라는 등이 있다.  


      2. 오늘날 우리의 사학계

위와 같이 일본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 고 망발을 늘어놓고 있고 당시 조선사 편찬에 참가한 이병도씨 (금서룡의 제자) 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 사학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 사학계의 실태와 문제점을 보자.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 1세대인 이병도 씨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신석호씨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제 2세대라고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 (한림대 한국사 교수),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용씨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 유원동, 변태섭씨 등이 있다. 제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씨가 있다. 우선 이들이 저서나 강연회 등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민족사학에 조금이라도 눈이 뜬 사람이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것이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 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씨는 몇 해전 타계하였고 죽기 전 친구의 설득으로 조금이나마 뉘우치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유명한 자는 이기백 교수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학문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 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까지 한국사를 그릇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8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의 "국사 교과서 개편 방향을 보고" 라는 제하의 그의 글을 보자 "....... 물론 필자 개인의 의견을 말한다면 불만스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데 고조선을 문화권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경우에, 초기에는 요령 지역이 그 중심지였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운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필자가 우둔한 탓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그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
이씨는 그의 종래의 주장대로 고조선의 영역이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진관수: 그런데 여기서 여러 선생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규원사화} 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기백: 한영우씨가 한국학보에 쓴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도가사학이라고 했어요.그런것이 걸리는데, {규원사화}의 선구적인 것은 고려말에 있었나 봐요.
진관수: {규원사화} 와 같은 계열이라고 하는 '단기고사'... 발해의 대야발이 만들었다는 것이 있다는데, 본다 본다 하면서 아직 못 보았읍니다만...
이우성: {단기고사}는 이조 말에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규원사화} 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만.
이기백: 이런 것들이 혹은 단재가 애기한 묘청이라든지 풍수도참과 연결된 그런 계통이 아닐까요?
이우성: 여기 도가는 도교적인 도가가 아니라 화랑 국선하는 선, 단군도 선인지후라 했지만 그 선에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도가라고 말하기보다는 선가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성싶어요. 그 선가는 약간 노장사상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노장사상의 그런 도가는 아니니까요.
이기백:그렇다면 잘 이해가 되는데, 여하튼 지금 사료적인 가치는 인정할 수 없는 책들이 아니겠읍니까?
이우성:단군 임금의 역대 임금이 다 나오니 그것을.....
진관수:환웅 밑에 고시가 한반도를 다스리고, 신지가 만주를 다스리고, 치우가 하북 산동을 다스리고 했다는 건데요.
이우성:요 임금 시대에도 직계가 다 나오고, 그리고 기자의 호동왕도 다 나오지 않습니까? 여하튼 단군의 이름까지 다 나오니 재미있어요

<삼성문고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자들은 어디서 온 작자들인가? 진정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할 만한 자들인가?  또 한사람 김원용씨가 있다. 이 자는 일본이 날조해 낸 황국 사관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다까마쓰 고분 발굴 장소에 가서 일본, 북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마당에 당나라 화풍이 보인다느니, 고분의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이라느니 하고 우겼던 자이다. 또 이 자는 을지문덕이 중국 사람이라고 우겼던 자이다.
마지막으로 혜성의 사나이 이기동씨가 있다. 87년 5월 29일, 30일에 있었던 역사학 대회에서 고대사 되찾기 운동을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70 년대와 유신 체제의 분위기의 연장" 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는 또 "실증 사학이 마치 식민 사관의 장본인 인양 단정되고 일부 민족 민중 사관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선 고대사 연구는 존립 기반이 질식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고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상 여러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성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자들이 주름잡고 있는 사학계의 현실 속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로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 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독교까지 이런 작업에 끼여들었다. 이들은 단군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국사 교과서에서 아예 빼 버리자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맹렬히 활동하고 있고 한국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갈래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 이것이 안되니까 한국의 국조를 단군으로 인정하고 이 단군 국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연세대 교수 김동길씨 (지금은 사퇴하고 정치일에 뛰어들었음) 의 단군성조에 관한 견해를 보자.

"곰과 인간의 염색체수가 다른데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또 불확실한 신화시대를 우리의 정사에 집어넣고자 힘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과 미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그 옛날의 일을 미국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그런 얼빠진 미국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들에게는 확실한 역사의 시작이다. 이 나라들이 출발이 대개 기원전 60년에서 20년 사이라는 말은 이 나라의 역사가 한 2천년쯤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소리들을 할까? 이 사람의 머리에는 일제가 그렇게 바라던 식민 사관으로 꽉꽉 들어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으로  일제가 저질러 온 민족문화와 민족 역사의 말살을 살펴보았고 민족 역사인 경우 해방후 우리 사학계의 실태까지 살펴보았다. 글의 초두에서 밝혔듯이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반일본화 시책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것은 민족 역사의 철저한 왜곡이라고 보고 교과서적인 조선사 편찬을 위해 (다른 어떤 교재보다 교과서가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류의 우리 민족 사서를 소각 내지 압수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들의 수십 년에 걸친 압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압수를 위한 발악이라 표현하고 싶다) 민족의 몇몇 선각자에 의해 민족사서가 오늘날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위 글중 식민 사학자들의 대화에서 비쳤던 규원사화, 단군세기외에 환단고기가 오늘날에 출토된 민족사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화나 환란속에서 사라져 간 민족사서의 고갈 속에서 그나마 이것들의 가치는 국보 급이라 아니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사서들이 '신빙성이 없다', '황당하다' 는 이유로 천시되고 따돌림받는 이유는 어인 일인가?
최근에 들어 고고학의 발달과 고적의 출토 등으로 이들 사서들의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러한 경향은 점점 뚜렷해질 것이라 믿고 환단고기를 처음 본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의 지보' 라 하였고 중국 사람은 '서역까지 밝혀 주는 주옥의 지보' 라 예찬했던 점을 상기시켜 본다.


윗 글은 나우누리 열린광장 게시판에 김완섭(pizory)님이 올리신 글을 제가 나름대로 정리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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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13:06:26 (*.137.27.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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