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의식에 집중하라

 

의식(意識)

 

진짜 나와 가짜 나를 구별하라.

의식이라 함은 인간이 무엇을 지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마음의 아는 능력이다. 이 아는 능력이 모든 면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결정한다. 인간은 진실한 자를 지각하기도 하고 진실한 듯 하면서도 거짓인 것을 분별하는 의식감각을 가지기도 한다. 나의 상태가 거짓인지 참인지는 결국 본인의 자각 내지는 의식에 따라 결정된다.

 

신(神)의식에 서라.

의식의 상태는 존재물의 속성 중에서도 최고의 것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최고 속성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나의 의식을 신 의식에까지 확대하면 내 자신을 위시하여 모든 것이 최고의 상태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일체조건 일체 환경을 철견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때 비로소 성자들이 말한바와 같이 베일 즉 지금까지 죽을 것 내지 물적인 것과 영과의 사이에 개재한 줄로 생각하였던 베일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다. 벌써 거기에는 아무 한정도 없다. 지금까지 품고 있던 속된 형이상학적 관념은 완전히 파괴되고 참 영적인 것(완전실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실상각과 5관

이 영적의식(實相覺)은 감각의 활동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감각의 활동은 항상 최고의 의식중에 바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감각 활동이 바로 역사하고 있는 것이 참 영적 활동이다. 소위 5관은 바른 지휘하에 있지 않을 때는 그 활동이 한정되어 버린다. 그러나 실상에 의하여 지휘되어 활동할 때는 바르게 역사함으로 그와 같은 때를 5관이 열렸다고 하는 것이다.

 

삼매(三昧)란 부분 의식일 뿐

삼매에 들어간 때는 어떠한 의식 상태인가 하는 질물을 많이 받는다. 삼매란 감각 활동의 부분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자기의 의식을 언제나 참된 활동상태 즉 완전에 가져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의식의 부분적 표현이 이 참 활동과 하나가 되어버리면 삼매 같은데 들어갈 필요가 없고 하물며 파괴적인 최면상태 같은데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의식은 전일(全一)한 것 세별하지 말라

이 사실은 일반에 잘 구별되어 있는 여러가지 의식상태에도 적용된다. 의식을 분류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일된 의식인데 전일된 것을 세별한다든지 분류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환각적인 삼매의 경우와 같이 세별하는 것은 미망이다. 여러가지로 세별하면 일견 대단히 정밀하게 생각되므로 고도의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몹시 미혹되는 것이다. 세별은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인간은 세별된 것을 속성이라고 생각해 버리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교훈을 전하려 할 때 대개의 교사는 자기의 가르침을 똑똑히 전하려고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교훈은 항상 전일(全一)한 의식이 필요하다. 그것을 세밀하게 분별하면 대개는 그 분별한 것을 속성으로 생각하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은 다만 하나만을 주시하는 것이 좋다. 세별하기만 하면 사람은 소극적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세별한 것은 상징같은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상징이라는 것은 대개는 의식을 세별한 것을 의미한다. 상징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이유의 하나요, 이러한 점에도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상징을 졸업한 것이다. 우리는 상징이라는 애매한 것을 졸업하고 성자들이 말씀한 바와 같이 순백 햇빛 같은 전체가 명명 백백한 의식중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의식을 잘게 세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완전한 백광에 비할만한 전일된 의식을 자기의 목표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육체는 그 육체 속에 거주하고 있는 혼의 상징에 불과하다. 육체는 의식의 활동하는 심볼이기도 하다. 주의라는 통제 기능에 의하여 의식중에 들어갈 것을 보호하고 결정하기 위하여 의식의 전 과정이 단일조직으로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현재의식, 잠재의식, 초의식 등 개개 별별의 의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은 다만 실재라는 하나의 빛나는 의식 신의식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징 따라서 최면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영력(靈力)에 빠지지 말라

심령감각 즉 의식의 하층에 흥미를 가지는 나머지 모쪼록의 지상생활 전부를 거기에 걸고 결국 참된 의식을 나타내지 못하고 마는 사람이 많다. 그것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같은 것을 집어던지고 다만 전체와 하나이되는 일 뿐이다. 바울이 "당신들은 자기는 최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안에 산다고 생각하라." 한 것은 이런 의미를 말한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명석한 지혜와 타자의 영향을 받은 지식이라는데 있다. 영시(靈視)능력이 본래 전하게 된 것은 영어의 어원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명석한 비전이었는데 일반이 받은 의미는 부분적으로 따라서 흐린 시력 일부분만 보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상(靈像)은 실상 개현에 해가 된다.

영시력이나 영청력 기타 의식의 5분야 중의 어느 것을 통하여 어떤 상대적 현상이 나올 수도 있으나 그것은 결코 전체가 될 수 없고 또 전체가 되도록 할 수도 없다. 그같은 부분상은 결국 거짓이 될 수도 있고 그같은 상태하에서는 내가 말하는 소극관념 즉 순전히 허망관념의 포로가 되기 싶다. 그러나 우리가 전체와 하나이 되면 소극적이나 거짓으로 마쳐 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진리 자체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같은 아는 방법 혹 전일된 의식에는 영매 기타 최면같은 것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같은 것은 일체 참 실상 개현에 해다 된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전 감관이 본래 '하나', 전 세포가 본래 '하나',

그같은 고도의 의미에 있어 모든 감관은 하나이다. 감관 모두가 완전히 정돈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감관은 절대적으로 정돈되어 있고 우리 육체의 각 부분 각 세포도 정돈되고 조화되면서 파동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의 경우 이외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의 일부만이 그릇된 면에서 파동하게 되는 일로 그렇게 되면 새 세포는 그 부착할 기관에 부착하지 못하게 된다. 원래 창조된 자 세포는 그 부착할 기관을 대표하는 것인데 그 소속한 파동의 장소보다 벗어나면 따로 다른 기관에 부착하게 되어 그 결과 부조화의 상태를 가져온다.

 

의식은 전일에 향하라

그러나 육체의 여러가지 중추나 기관에 대하여 정신집중을 하는 종종의 신비적 방법을 수행한 때문에 이 부조화 자체가 극도로 증가하는 경우가 늘 있다. 이같은 행법은 최면 상태를 가중하여 더욱 그 상태를 고정시키고 더욱 더 큰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제일 최면이라 함은 의식 일부의 활동 즉 어떤 특정의 형태 혹은 뱡향으로만 활동하고 있는 특수 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잡다한 분야 혹은 부분이 세별되면 될수록 더욱 더 그것은 최면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완고하게 의식을 세별된 면에 활동시키면 그 받는 최면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항상 주의를 전체 완전이란 전일에 향할 것이오, 이렇게 하여서 비로소 약동하는 에너지가 육체의 경우와 같이 의식기구 전체를 막힘없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 조직 전체에 완전한 동시공동작업 즉 조화가 나타나 오는 것이다.

 

내부의식, 외부의식, 이라는 사고방식도 최면 상태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설은 분리감이나 구별감을 주는 까닭이다. 그러나 실체에는 내부의식, 외부의식, 개인의식, 보편의식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참나의 전일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초인생활 중에서 옮겨 씀

 

 

전환기 영성운동 신년대토론회

http://cafe.daum.net/sinmunmyung/plNr/77

 

진아 통합 명상과 빛의 지수 높이기

http://cafe.daum.net/sinmunmyung/oyjz/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