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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 있는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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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빛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
들의 교류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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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우리 우주의 진리는 영과 사랑입니다.

 

만일 사랑이 우리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우주의 '백성'이 아니니
그는 다른 우주로 가야 할것입니다.

 

영과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는 우주가 기계시스템들의 우주인것입니다.
거기에는 진화라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위의 꽉짜여진 계획대로만 틀대로만 돌아간다면 처음부터 나중까지 신 하나만 존재하면 되지 왜 개체를 만들었겠습니까.그것의 기계들이 우주이지 영과 사랑의 우주가 아닙니다. 체험과 겸험을 무시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실패를 통해 배우지 않는 기계들에겐 영이 필요없고 사랑이 필요가 없습니다. 개체는 신의 들숨과 날쉼, 숨쉼입니다.


개체의 저마다 다양성과 색깔이 없는, 개미나 벌쯤으로 개체를 취급하는 것은 그만큼 신의 수를 죽이는  것임을 아십시요. 개미나 벌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백에서 백을 더해도 '무'이며 도리어 수에 수를 더하는 일에 비례해서 그 수만큼 개체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아십시요. 그것은 살아 잇다고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스스로 가 된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어려워하며 불평부당한 짐쯤으로 생각합니까.
그렇게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인색해서 단 한평의 자기 자신의 발판 조차 받아들일 힘조차 얻지 못하는 겁니까.
자기 존재조차도 끔직하게 여깁니까.자기 자신조차 받드는 것이 싫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고 의탁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우리들이 불러야할 진정한 악이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창조된 바대로 스스로 창조물임을 거부함으로서 창조자에대한 죄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를 비우는다는 것은 나를 송두리째 없애고 부정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주체대로 주권을 세우고 줏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위영혼 자체는 삶의 무대로서 선과 악이 없으며 가치중립적입니다.)
나를 세운다는 것 입니다. 종교나 물질과학의 권위등 권력 인기 물질적 부따위 모든 인위적이 관념이나 거짓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고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나를 버린다는 진정한 뜻인것입니다. 내가 없다면 당신은 수동적이 될것이며 외부이 권력에 자동으로 끌려가는 인형이 될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를 버린다는 미명하에 당신들이 하는 짓은 이것이며,이것을 거꾸로 편하다고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없는게 아니라 빙의인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스승만 찾아서야 되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자기 할일을 남이 해주길만을 바라는 부르조아 의식은 영적 성장의 적입니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스스로 발로 걸어 가는 것을(마치 봉건제 사회에서 귀족이 스스로 일하는 농민들을 멸시하듯이) 허접이라 부르며 천상의 길에 어린아이처럼 투정으로 일삼고 있습니다.

 

'스스로' 셀프(self)하십시요.

 

당신은 부루주아의 응성쟁이 도련님들처럼 '허접'이라고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 한다는 것을 불편 부당한 어리석은 고생이며 철없는 아이처럼 하급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천하다고 여깁니까. 병든 부르조아 귀족들보다 한참 건강한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멸시하는 '재투성이 아가씨(신데렐라)'가 위대한 것입니다.당신은 의존적인 응석쟁이들이지만 그들은 '스스로'라는 힘의 부와 권능을 가진자들입니다. 당신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어린애와 같은 의존성에 비하면 그들이 가진 스스로가 바로 권능입니다. 남이 물고기를 잡아 상을 차려주길 바라는게 아닌 물고기를 스스로 잡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자존은 바로 자립이며 자생의 힘인것입니다.

 

기계들은 삶을 통한 배움의 가치와 의미를 용납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실패없이 완벽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 서 있는 곳에 자신의 한계를 고정화하며 진화를 이룰수 없다.

 

반면 영혼은 실패를 통해, 실패를 포용함으로서 배움을 통해  무한히 진화하는 능력이 있다.

 

당신이 스스로의 힘을 포기하고 의존하는 것은 어떤 외부에서 주어지는 틀이며 당신에겐 종교와 기계가 그것입니다. 당신이 부처로 부르는 형이상학적인 모든 종교의 세계는 당신 스스로의 힘이 빠진 기계들의 세계입니다. 당신에겐 스스로 자신이 되길 수고를 포기함으로서 그것을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봇 시녀들이나 영적 성장의 자동 프로그램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응석쟁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편의 적인것에는 이기적일뿐 스스로는 물론 타인 대한 사랑이 없고 희생이 없습니다.

 

5차원은 영적으로 자립한 자들이 자립한 상태에서 자기 안에 신이 부분임을 당당하게 깨닫고 신을 동등하게 모시는 멤버들의 사회이며 남 뒤치닥 거리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고귀한자들의 멤버쉽입니다. 의존적인 사람은 그 사회의 빛의 속도에 결코 따라갈수가 없어 도태되고 죽음을 맞게 될것입니다.


개체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개체를 먼저 존중하십시요. 당신이 당신 자신을 부정하면 부정하는 만큼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며 그 전 단계 부분을 수학하지 않으면 개체에서 벗어날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개체를 벗어난 존재들은 개체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가 무의 영역에서 유를 바라보지 않을때 그것은 없음일뿐입니다.

 

무만을 위한 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없음'이니까요.

 

수백에 수백의 무, 수천에 수천의 무를 더한다해도 '없음'일뿐입니다.

 

수백에 수백 수천에 수천 세대가 흘러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발언권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없음'이니까요. 없는 것을 탐닉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가 무를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무가 아니라  유입니다. 유가 없으면 무도 없습니다.

 

무는 무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사랑하면서,  그가 어떻게 한 사람으로 탄생한 어엿한 존재로서 기능을 할수 있을 까요.

 

인간이 어린애처럼 무분별하게 빠지는 '사도'라는게 있는 겁니다.

 

사랑에는 선악도 없고 이원성도 없지만

 

이곳에서 실질적 사랑은 분별이 뒤받침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사랑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배우고 그럼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기 위함입니다.

 

마냥 감상적인 어린아이 상태로만 남아서는 뭔가 다리 하나가 없는 것 처럼 장애가 있는 것이지요.

 

 

첫째가는 빛은 참본성으로 사랑입니다.둘째가는 빛이 참생명으로 지혜입니다. 셋째가는 빛이 그것의 기틀을 이루는 신체(의지)입니다.

이것은 각자 따로 따로 일때 작용하지 않지만 서로 하나가되었을때 작용합니다. 그 하나가 된것이 인간이고 그리스도(창조자)이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또는 환인으로 불리는 이 우주의 원인자는 여러분에 대한, 여러분들이 사랑한다는 그 절대자 근원자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은 삼위일체로서 이미 그 안에 지혜와 의지(신체)가 포함됩니다.

(천-지-지-성부
지-체--용-성령
인-덕--인-성자를 말합니다)

 

이것을 성 삼위일체 혹은 삼신일체라 하는 것입니다.

 

 

진리 또한 창조된 것입니다. 근원자가 거느리는 우주는 우리 우주만이 존재하는게 아니며 저 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은 우주가 존재합니다. 각 우주마다 창조된 진리는 우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 우주의 창조자가 창조한 우리 우주의 진리는 '사랑'입니다. 그럼으로 님들이 정말 최고 자리에 올라앉고 싶거든(그런것은 없습니다) 먼저 우리 우주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님들이 바로 우리 우주에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우주는 다른 우주대로 가더라도, 우리는 우리 우주의 방식으로 근원 절대자에 도달합니다.

 

기계들로 가득한 우주도 존재하는데 그런 우주는 완성이 실패했습니다.
우리 우주의 진리는 그러한 실패의 교훈으로 나온 영과 사랑의 시스템입니다.


 

쉬운것만을 택하지 마십시요. 쉬운것만으로 결코 깨닫고 알지 못하는 의미의 세계가 있습니다.

 

쪼꼬만한 코흘리기 어린애도 대학에서 배우는 고차방정식과 같은 수학을 할수가 있습니다.
소위 영재나 천재라고 하는...그러나 그들도 대학에서 같은 학우들에 비하면 여전히 뭔가 정서적성장하지 못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린애입니다.

 

뉴스에 반짝 나왔던 영재나 천재라고 하는 아이들이 대학에 가 그 무리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한사람의 어른 어렷한 성인이 된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가정과 학교는 삶을 통해서 서로 어울리며 학원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배웁니다. 부모와 형제와 선생님과 친구들과 이웃과 교류하며 어울리고 자연속에서 놀면서 살아가는 법 그곳에서 자신을 거울처럼 자각하고 성숙하며 인성을 완성시키며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공자가 말한 전인교육이지요.

 

그것은 삶의 실질적 겸험을 필요하고 영혼의 나이를 필요로합니다.


지능은 누군가 획일적으로 일률적으로 주입해줄수 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예수나 붓다등 스승들이 가르침을 줄때, 비유로 주는 것도, 직설적으로 말해도 여러분들은 소위 말하면 '사고조절자'라는 것-영혼에 축적된 겸험이 없으면 알아듣지 못하지만, 영혼을 통해 '스스로' 깨닫고 느끼라는 겁니다. 스스로 생각의 참여를 통해 님들은 님들이 영혼의 지분만큼 살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차원자들의깨달음은 말이나 논리가 필요없는데 그것은 우주가 탄생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느낌이라는 것 감정이라는 것 체험이라는 것 정서는 다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수학 고차 방정식 보다도 백배 어려워도 경이로운 일이 살아있다는 일, 살아간다는 일입니다.


 

너는 언제 어른이 되느냐.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날 너는 어른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받아들여 주며

자신에게 사랑의 웃음을 보내는 날 어른이 될것입니다.

 

남들 보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고 최고 정점만을 바라보고 최고가 되려하는 가
불행히도 이 세계에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할수 없게 하는 많은 것 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나를 없애는데 있는 게 아니라 이웃과 살아가며 동시에 나를 찾는데 있는 것이다. 목표는 설정하되 그 목표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의미를 두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때 그 목표 또한 비로소 살게 됩니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이 그러한 뜻입니다. 이렇게 배움을 통해 외부의 서로 어울리는 윤리를 말한 공자와 내면의 우주를 말한 노자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도 신이지만 당신만이 유일한 신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신체의 모든 대역에 걸쳐 주파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 후엔 더 큰 진동수의 깨달음이 있고 더 큰 진동수의 깨달음 후엔 더 더 큰 진동수의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 단계마다 삶과 함께 하는 과정과 여정이 있다. 오랜 부침의 삶은 우리의 신체에 대한 자극이고 오랜 무두질이다. 그렇게 해서 신체는 한꺼풀씩 딱딱한 각질을 벗고 보다 더 연해재고 옅해지며 종국에는 영에 다다른다. 삶이란 당장은 당신을 경직되게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을 좀더 부드럽게 해주는 촉매이다. 삶이란 무두질의 연마를 통해서. 이 무두질을 영혼의 진화라 한다.

 

오래 숙성된 술일수록 맛이 좋은 것입입니다. 오래 숙성된 장일수록 맛이 좋은 것입니다. 수백만년의 장인의 혼이 서리지 않는 클론이나 로봇과 같은 인조 합성 가죽은 질(생명력)이 떨어진다. 그들은 영혼을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깨달은 자들도 미래는 알지 못합니다. 개체들의 참된 '의지'가 존재하는 만큼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보트가 아닌 만큼 그것은 신들도 그 의지를 존중하고 직접 몸소 겪고 실험을 해봐야 압니다. 이것이 정상적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프로그램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기계들을 숭배하는 유태의 카자르나 어둠의 일류미나티입니다.

 

깨달은 자들도 핵심은 알지만 그 핵심이 실제로 펼쳐지는 대부분의 무대에 대한 면적은 그들도 스스로 몸소 가보지 않는 이상 다 알지 못하며 그것에 대하 존중이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완성되고 이미 이루어졌고 그곳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직 님들에게 오지 않은 미래 입니다. 그것이 님에게 오는 것은 님들의 의지, 스스로 힘씀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아니면 그 미래는 당신으로부터 다른 시간선으로 비껴 갑니다. 상위에서 모든 프로그램은 이루어졌을지라도 그것이 하부로 내려오는 과정은 또 다른 완성되지 않은 수직선의 미래입니다. 상위는 하나의 공상속의 원인자이고 아이디어 이며 당신들이 있는 것은 그것이 실질적으로 표현된느 곳입니다. 당신들은 공동창조자입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수평적 미래와 맞물려 있습니다. 깨달은 자도 그것을 알수는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 발현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아닙니다.이렇게 생각과 생각이 실질적으로 표현화된 이루어진 행동은 똑 같이 중요합니다.


 

조종사들에게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눈에 보이는 영상은 가짜이지만 그 영상들의 움직임(물리역학)은 무형으로 가짜가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무형이었으니까 그렇다. 거기서 조종사는 스스 자신에 대해 무엇을 얻어가고 배운다.


당신에게 이 환상의 세계를 통해 영원한 배움을 얻는 조종사는 영혼이다.

외부환경은 가짜라 해도 그 배움의 총체인 영혼은 가짜가 아니다. 영혼은 근원과 하나이며 근원으로부터 나온 끈을 가지고 있다. 영혼이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영혼이 주인이기에 단지 영혼이 배움을 얻기 위한 현실이기에 그것이 환상인가 실제인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중요한것은 영혼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거울은 당신 자신의 자각과 배움을 위해 존재한다.

 

이 모든 게 환상이라면 당신은 그 보다 더 한 환상이다.

 

영혼이 환상이라면 당신은 그 보다 더 한 환상이다.

 

이 모두가 다 같은 환상놀음이라면 도리어 환상이야말로 중요해진다.실체나 환상따위는 없다. 다만 진동수의 높고 낮음, 급이 있을 뿐이다. 어느 수위든 진동수가 높은 것에 대해 진동수가 낮은 것은 환상이다. 진동수가 낮은 것에 대해 진동수가 높은 것은 상대적으로 진동수가 낮은 환상이 이길수 없는 실체이다. 절대 최고 정점에 존재하는 실체만을 찾지 마라. 당신은 아직 영혼의 진동수조차 이길수 없는 최고의 환상이다. 당신에게 실체는 그 절대자에게 이르는 끈을 가진 영혼이다. 그러니까 어데 먼데 보지 말고 이곳을 바라. 역설적으로 환상에게 환상이 하는 일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당신이 깨달아야하는 것은 당신이 환상이라고 경시하는 것에 대한 존중의 자세이다. 당신은 도달해야 하는 것은 환상의 그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통해 배우는 무형의 자세이다.

 

그 자세는 영혼이 배우는 무형의 것으로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라도 다 같은 환상이 아니며 급이 있다.

 

진동수가 낮은 육체자아가 진동수가 높은 상위자아, 영혼을 이길수 없다.

 

이기려고도 말고 저항하려고도 마라 그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과 분리되어
당신 자신과 싸우는 것 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아무리 잘란 스승을 만나 무엇을 추구 하든

 

이곳에 온 목적

 

정직한 영혼의 바램에 따르지 않는 이상

 

영혼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영혼에 고속 승진은 없다.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삼차원을 벗어나는 순간

 

영혼은 묻는다 그 환상을 통해 무엇을 배워왔냐고. 그 배움을 통해 무엇을 무두질 해왔으며 무엇을 연하게 연마 해왔냐고

 

당신은 감정이나 집착에서 떠나 스스로 살아왔던 인생을 영화 필름이나 파노라마 처럼 객관적으로 보는데

 

자신의 진짜 모습 자신이 놓치고 간과한 부분이 있음을 깨닫는다 4차원 윤회를 다루는 존재들(당신보다 진동수가 높은 이들)을 만나 상담을 받고

 

한생을 살면서 자신이 넋 놓고 놓친 부분(혹은 고의적으로 멸시한 부분)을 얻기 위해 다시 내려와야 한다. 당신과 사물은 환상이지만 그 사물이 자아내는 무형의 숙제(생애)들은 환상이 아니다.(당신이 멸시한 부분이 당신의 각질 부분을 드러내주는 자극이 될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내려오는 것 그것은 당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는 정직한 심판이다.(세상에서 벗어나 아무일도 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불교계 수행자들도 죽었을때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동성만으로는 되지 않는 다 빛과 사랑에 능동적이어야 한다)

 

영혼은 당신들의 어떤 스승들보다 진동수가 높다. 그것은 어떤 진동수가 높은 자들이라도 터치할수 없는 무형의 룰이며 시스템이다. 영혼은 그것이 나온 근원자만이 터치할수 있다.


당신이 진동수가 높은 이들을 이기려면 당신 자신이 고차원의 빛과 사랑으로 진동수를 높여야 한다. (그것은 내면이든 외면이든 빛과 사랑과 생명과 영혼을 '만나는' 일이고 커뮤니케이션이고 체험이다. 빛과 사랑을 만나려면 그것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이 선택하는 일이다)그것은 올바른 절차를 거쳐 영적 성장, 공덕을 쌓는 일과 함께 한다. 절차를 거치는게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 자세이다.

 

배움또한 무형이고 높은 진동수 또한 무형의 세상이다. 모두가 무형이 하는 일이다. 무형에게 그 무형의 일은 무형이 아니다. 무형이 바로 당신이 하는 일의 본론이며 당신을 좌지 우지 한다.

 

그랬봤자 모두가 어차피 무형인데  무슨 소용이냐고 항변해봤자 소용없다. 좀 봐주면 안돼냐. 남들은 당신을 봐줄수 있어도 당신 스스로에게 홀로 정직한 대면에서는 그럴수 없다. 그런 불성실한 자세로는 자신보다 진동수가 높은 4차원 영계의 문턱을 넘을수 없다. 무형이더라도 무형에게 무형이 하는 일(생애의 교훈)은 무형이 아니다.  무형이지만 봉사 사랑 성실함과 같은 무형의 도덕적 가치를 배움은 영적 성장 그 무형이 하는 일로 환상이 아니다.  성실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무형에게 무형은 환상이 아니라 실체이다.자기 본분을 알고 성실함을 지키는 자세같은 것은 무형의  일로 환상이 아니다. 정직한 배움 그것을 우리는 영이라고

영적 성장이라 한다.


(불행히도 당신의 높은 어느 하나에만 매달려 환상을 물리고, 배움의 기회를 놓지고, 어느 날 한시에 뭘 이루어보려는 죄의 수행은 당신이 환상이라 멸시하고 멀리하는  그 환상에 대해 당신의 입지를 더욱 좁히며 당신의 각질을 더욱 경직시킨다.)

 

전기 중기 아틀란티스는 레무리어를 자연의 영성의 이어받아 적절히 창조를 가미하고 응용시키고 성대한 꽃을 피웠으나

이 사랑과 영혼의 배움을 천시하는 철없는 자들이 '후기' 아틀란티스의 파국을 불렀다는 것을 아십시요. 그들은 엘리트 귀족들 기계들을 권력으로 숭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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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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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자

2010.06.26
22:27:03
(*.85.196.96)

나마스테.

 

쪼꼬만한 코흘리기 어린애도 대학에서 배우는 고차방정식과 같은 수학을 할수가 있습니다.
소위 영재나 천재라고 하는...그러나 그들도 대학에서 같은 학우들에 비하면 여전히 뭔가 정서적성장하지 못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린애입니다.

=>전생을 기억해내면 그 당시의 정서적 느낌과 모든 경험의 상태에 있게됩니다. 그러나 이는 위험할수가 있다는데

부작용이 만만치않기때문입니다. 현생 부적응...하지만 엄청난 앎이 생긴다는건 틀림없습니다.

베릭

2010.06.27
11:32:13
(*.100.85.39)
profile

영혼의 학습...

글쓴이 : 네라

 

< 우리 우주의 진리사랑>

 

 

영과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는 우주가 기계시스템들의 우주이다.
거기에는 진화, 생명이라는 것이 없다.

그것의 기계들이 우주이지 영과 사랑의 우주가 아니다.

체험과 겸험을 무시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실패를 통해 배우지 않는 기계들에겐

영이 필요없고 사랑이 필요가 없다.

 

개체는 신의 들숨과 날쉼, 숨쉼이>


개체의 수는 저마다 다양성과 색깔이 있는 살아있는 신의 수와 같다.

스스로 가 된다는 것은 편안하고 쉽고 감사할수 있는 선물로 생각할 수 있다..
강하고 이타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힘을 채워야 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감은 죄와 악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된 바대로 스스로 창조물임을 수긍함으로서 창조자에 대한 자발적 헌신이다

 


 < 마음을 비우고 나를 비우는다는 것은

나를 송두리째 없애고 부정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주체대로 주권을 세우고 줏대 있게 된다는 것이다. > 

(상위영혼 자체는 삶의 무대로서 선과 악이 없으며 가치중립적입니다.)나를 세운다는 것 입니다.

종교나 물질과학의 권위등 권력 인기 물질적 부따위

모든 인위적이 관념이나 거짓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고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나를 버린다는 진정한 뜻인 것입니다.

 

내가 없다면 당신은 수동적이 될것이며 외부이 권력에 자동으로 끌려가는 인형이 될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를 버린다는 미명하에 당신들이 하는 짓은 이것이며,이것을 거꾸로 편하다고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없는게 아니라 빙의인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스승만 찾아서야 되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자기 할일을 남이 해주길만을 바라는 부르조아 의식은 영적 성장의 적입니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스스로 발로 걸어 가는 것을(마치 봉건제 사회에서 귀족이 스스로 일하는

농민들을 멸시하듯이) 허접이라 부르며 천상의 길에 어린아이처럼 투정으로 일삼고 있습니다.

 

'스스로' 셀프(self)하십시요.

 

당신은 스스로 한다는 것을 불편 부당한 어리석은 고생이며

철없는 아이처럼 하급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천하다고 여깁니까.

병든 부르조아 귀족들보다 한참 건강한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멸시하는 '재투성이 아가씨(신데렐라)'가 위대한 것입니다.

당신은 의존적인 응석쟁이들이지만 그들은 '스스로'라는 힘의 부와 권능을 가진자들입니다.

당신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어린애와 같은 의존성에 비하면

그들이 가진 스스로가 바로 권능입니다.

남이 물고기를 잡아 상을 차려주길 바라는게 아닌 물고기를 스스로 잡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자존은 바로 자립이며 자생의 힘인것입니다.

 

기계들은 삶을 통한 배움의 가치와 의미를 용납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실패없이 완벽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 서 있는 곳에 자신의 한계를 고정화하며 진화를 이룰수 없다.

 

반면 영혼은 실패를 통해, 실패포용함으로서

배움 통해  무한히 진화하는 능력 있다.

 

당신이 스스로의 힘을 포기하고 의존하는 것은 어떤 외부에서 주어지는 틀이며

당신에겐 종교와 기계가 그것입니다.

당신이 부처로 부르는 형이상학적인 모든 종교의 세계는

당신 스스로의 힘이 빠진 기계들의 세계입니다.

당신에겐 스스로 자신이 되길 수고를 포기함으로서 그것을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봇 시녀들이나 영적 성장의 자동 프로그램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응석쟁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편의적인것에는 이기적일뿐 스스로는 물론 타인 대한 사랑이 없고 희생이 없습니다.

 

5차원 영적으로 자립한 자들이 자립한 상태에서

자기 안에 신이 부분임을 당당하게 깨닫고

신을 동등하게 모시는 멤버들의 사회이며

남 뒤치닥 거리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고귀한자들의 멤버쉽입니다.

의존적인 사람은 그 사회의 빛의 속도에 결코 따라갈수가 없어

도태되고 죽음을 맞게 될것입니다.


개체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개체를 먼저 존중하십시요.

당신이 당신 자신을 부정하면 부정하는 만큼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며

그 전 단계 부분을 수학하지 않으면 개체에서 벗어날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개체를 벗어난 존재들은 개체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가 무의 영역에서 유를 바라보지 않을때 그것은 없음일 뿐입니다.

 

무만을 위한 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없음'이니까요.

 

수백에 수백의 무, 수천에 수천의 무를 더한다해도 '없음'일뿐입니다.

수백에 수백 수천에 수천 세대가 흘러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발언권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없음'이니까요. 없는 것을 탐닉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가 무를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무가 아니라  유입니다.

 

유가 없으면 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어린애처럼 무분별하게 빠지는 '사도'라는게 있는 겁니다.

 

사랑에는 선악도 없고 이원성도 없지만 이곳에서 실질적

사랑은 분별이 뒤받침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사랑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배우고 그럼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기 위함입니다. 마냥 감상적인 어린아이 상태로만

남아서는 뭔가 다리 하나가 없는 것 처럼 장애가 있는 것이지요.

 

첫째가는 빛은 참본성으로 사랑입니다.

둘째가는 빛이 생명으로 지혜입니다.

셋째가는 빛이 그것의 기틀을 이루는 신체(의지)입니다.

 

이것은 각자 따로 따로 일때 작용하지 않지만 서로 하나가되었을때 작용합니다.

그 하나가 된것이 인간이고

그리스도(창조자)이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또는 환인으로 불리는 이 우주의 원인자는

여러분에 대한, 여러분들이 사랑한다는 그 절대자 근원자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은 삼위일체로서 이미 그 안에 지혜와 의지(신체)가 포함됩니다.

(천-지--성부
지-체---성령
인-덕---성자를 말합니다)

이것을 삼위일체 혹은 삼신일체라 하는 것입니다.

 

 

진리 또한 창조된 것입니다.

근원자가 거느리는 우주는 우리 우주만이 존재하는게 아니며

저 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은 우주가 존재합니다.

우주마다 창조된 진리는 우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 우주의 창조자가 창조한 우리 우주의 진리는 '사랑'입니다.

그럼으로 님들이 정말 최고 자리에 올라앉고 싶거든(그런것은 없습니다) 

먼저 우리 우주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님들이 바로 우리 우주에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우주는 다른 우주대로 가더라도,

우리는 우리 우주방식으로 근원 절대자에 도달합니다.

 

기계들로 가득한 우주도 존재하는데 그런 우주는 완성이 실패했습니다.
우리 우주의 진리는 그러한 실패의 교훈으로 나온 영과 사랑의 시스템입니다.


 

쉬운것만을 택하지 마십시요. 쉬운것만으로 결코 깨닫고 알지 못하는 의미의 세계가 있습니다.

 

쪼꼬만한 코흘리기 어린애도 대학에서 배우는 고차방정식과 같은 수학을 할수가 있습니다.
소위 영재나 천재라고 하는...그러나 그들도 대학에서 같은 학우들에 비하면

여전히 뭔가 정서적 성장하지 못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린애입니다.

 

뉴스에 반짝 나왔던 영재나 천재라고 하는 아이들이 대학에 가 그 무리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한사람의 어른 어렷한 성인이 된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가정과 학교는 삶을 통해서 서로 어울리며 학원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배웁니다.

부모와 형제와 선생님과 친구들과 이웃과 교류하며 어울리고 자연속에서 놀면서 살아가는 법

그곳에서 자신을 거울처럼 자각하고 성숙하며 인성을 완성시키며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공자가 말한 전인교육이지요.

그것은 삶의 실질적 겸험을 필요하고 영혼의 나이를 필요로합니다.

지능은 누군가 획일적으로 일률적으로 주입해줄수 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예수나 붓다등 스승들이 가르침을 줄때, 비유로 주는 것도, 직설적으로 말해도

여러분들은 소위 말하면 '사고조절자'라는 것-영혼에 축적된 겸험이 없으면 알아듣지 못하지만, 영혼을 통해 '스스로' 깨닫고 느끼라는 겁니다.

 

스스로 생각의 참여를 통해

님들은 님들이 영혼의 지분만큼 살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차원자들의 깨달음은 말이나 논리가 필요없는데 그것은 우주가 탄생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느낌이라는 것, 감정이라는 것,

체험이라는 것, 정서는 다릅니다.

살아있다는 은 다릅니다.

 

수학 고차 방정식 보다도 백배 어려워도 경이로운 일이

살아있다는 일, 살아간다는 일입니다.


 

너는 언제 어른이 되느냐.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날 너는 어른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받아들여 주며

자신에게 사랑의 웃음을 보내는 날 어른이 될것입니다.

 

남들 보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고 최고 정점만을 바라보고 최고가 되려 하는가
불행히도 이 세계에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할수 없게 하는 많은 것 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나를 없애는데 있는 게 아니라

이웃과 살아가며 동시에 나를 찾는데 있는 것이다.

 

목표는 설정하되 그 목표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 자체 즐기고 의미를 두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때 그 목표 또한 비로소 살게 됩니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이 그러한 뜻입니다.

이렇게 배움을 통해 외부의 서로 어울리는 윤리를 말한 공자내면의 우주를 말한 노자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도 신이지만 당신만유일한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신체의 모든 대역에 걸쳐 주파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 후엔 더 큰 진동수의 깨달음이 있고

더 큰 진동수의 깨달음 후엔 더 더 큰 진동수의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 단계마다 삶과 함께 하는 과정과 여정이 있다.

오랜 부침의 삶은 우리의 신체에 대한 자극이고 오랜 무두질이다.

그렇게 해서 신체는 한꺼풀씩 딱딱한 각질을 벗고 보다 더 연해재고 옅해지며

종국에는 영에 다다른다.

삶이란 당장은 당신을 경직되게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을 좀더 부드럽게 해주는 촉매이다.

삶이란 무두질의 연마를 통해서. 이 무두질을 영혼의 진화라 한다.

 

오래 숙성된 술일수록 맛이 좋은 것입입니다.

오래 숙성된 장일수록 맛이 좋은 것입니다.

수백만년의 장인의 혼이 서리지 않는 클론이나 로봇과 같은 인조 합성 가죽은

질(생명력)이 떨어진다. 그들은 영혼을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깨달은 자들도 미래는 알지 못합니다.

개체들의 참된 '의지'가 존재하는 만큼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보트가 아닌 만큼

것은 신들도 그 의지를 존중하고 직접 몸소 겪고 실험을 해봐야 압니다.

이것이 정상적이며 우주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프로그램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기계들을 숭배하는 유태의 카자르나 어둠의 일류미나티입니다.

 

깨달은 자들도 핵심은 알지만 그 핵심이 실제로 펼쳐지는 대부분의 무대에 대한 면적은 그들도 스스로 몸소 가보지 않는 이상 다 알지 못하며 그것에 대하 존중이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완성되고 이미 이루어졌고 그곳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직 님들에게 오지 않은 미래 입니다.

그것이 님에게 오는 것은 님들의 의지, 스스로 힘씀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아니면 그 미래는 당신으로부터 다른 시간선으로 비껴 갑니다.

 

상위에서 모든 프로그램은 이루어졌을지라도

그것이 하부로 내려오는 과정은 또 다른 완성되지 않은 수직선의 미래입니다.

상위는 하나의 공상속의 원인자이고 아이디어이며

당신들이 있는 것은 그것이 실질적으로 표현되는 곳입니다.

당신들은 공동창조자입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수평적 미래와 맞물려 있습니다. 깨달은 자도 그것을 알수는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 발현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과 생각이 실질적으로 표현화된 이루어진 행동은 똑 같이 중요합니다.


 

조종사들에게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눈에 보이는 영상은 가짜이지만

그 영상들의 움직임(물리역학)은 무형으로 가짜가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무형이었으니까 그렇다.

거기서 조종사는 스스 자신에 대해 무엇을 얻어가고 배운다.


당신에게 이 환상의 세계를 통해 영원한 배움을 얻는 조종사는 영혼이다.

외부환경은 가짜라 해도 그 배움의 총체인 영혼은 가짜가 아니다.

영혼은 근원과 하나이며 근원으로부터 나온 끈을 가지고 있다.

영혼이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영혼이 주인이기에 단지 영혼이 배움을 얻기 위한 현실이기에 그것이 환상인가 실제인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중요한것영혼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거울은 당신 자신의 자각과 배움을 위해 존재한다.

 

이 모든 게 환상이라면 당신은 그 보다 더 한 환상이다.

영혼이 환상이라면 당신은 그보다 더 한 환상이다.

 

이 모두가 다 같은 환상놀음이라면 도리어 환상이야말로 중요해진다.

실체나 환상따위는 없다. 다만 진동수의 높고 낮음, 급이 있을 뿐이다.

어느 수위든 진동수가 높은 것에 대해 진동수가 낮은 것은 환상이다.

진동수가 낮은 것에 대해 진동수가 높은 것은 상대적으로 진동수가 낮은 환상이 이길수 없는

실체이다. 절대 최고 정점에 존재하는 실체만을 찾지 마라.

당신은 아직 영혼의 진동수조차 이길수 없는 최고의 환상이다.

당신에게 실체는 그 절대자에게 이르는 끈을 가진 영혼이다.

그러니까 어데 먼데 보지 말고 이곳을 바라.

역설적으로 환상에게 환상이 하는 일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당신이 깨달아야하는 것은

당신이 환상이라고 경시하는 것에 대한 존중의 자세이다.

당신은 도달해야 하는 것은 환상의 그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통해 배우는 무형의 자세이다.

 

그 자세는 영혼이 배우는 무형의 것으로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라도 다 같은 환상이 아니며 급이 있다.

진동수가 낮은 육체자아가 진동수가 높은 상위자아, 영혼을 이길수 없다.

 

이기려고도 말고 저항하려고도 마라

그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과 분리되어, 당신 자신과 싸우는 것 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아무리 잘난 스승을 만나 무엇을 추구 하든

이곳에 온 목적 정직한 영혼의 바램에 따르지 않는 이상 영혼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영혼에 고속 승진은 없다.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삼차원을 벗어나는 순간

영혼은 묻는다 환상을 통해 무엇 배워왔냐.

그 배움을 통해 무엇을 무두질 해왔으며 무엇을 연하게 연마 해왔냐고

 

당신은 감정이나 집착에서 떠나 스스로 살아왔던 인생을

영화 필름이나 파노라마 처럼 객관적으로 보는데 자신의

진짜 모습 자신이 놓치고 간과한 부분이 있음을 깨닫는다

 

4차원 윤회다루는 존재들(당신보다 진동수가 높은 이들)을 만나 상담받고 한생을 살면서 자신이 넋 놓고 놓친

부분(혹은 고의적으로 멸시한 부분)을 얻기 위해 다시 내려와야 한다.

 

당신과 사물은 환상이지만

그 사물이 자아내는 무형의 숙제(생애)은 환상이 아니다.

(당신이 멸시한 부분이 당신의 각질 부분을 드러내주는 자극이 될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내려오는 것

그것은 당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는 정직한 심판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무일도 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불교계 수행자들도

죽었을때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동성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과 사랑에 능동적이어야 )

 

영혼은 당신들의 어떤 스승들보다 진동수가 높다.

그것은 어떤 진동수가 높은 자들이라도 터치할수 없는

무형의 룰이며 시스템이다.

영혼은 그것이 나온 근원자만이 터치할수 있다.


당신이 진동수가 높은 이들을 이기려면

당신 자신이 고차원사랑 진동수를 높여야 한다.

 

(그것은 내면이든 외면이든 빛과 사랑과 생명과 영혼을 '만나는' 일이고 커뮤니케이션이고 체험이다. 빛과 사랑을 만나려면 그것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이 선택하는 일이다)그것은 올바른 절차를 거쳐 영적 성장, 공덕을 쌓는 일과 함께 한다. 절차를 거치는게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 자세이다.

 

배움 또한 무형이고 높은 진동수 또한 무형의 세상이다. 모두가 무형이 하는 일이다.

무형에게 그 무형의 일은 무형이 아니다.

무형이 바로 당신이 하는 일의 본론이며 당신을 좌지 우지 한다.

 

그랬봤자 모두가 어차피 무형인데  무슨 소용이냐고 항변해봤자 소용없다.

좀 봐주면 안돼냐.

남들은 당신을 봐줄수 있어도 당신 스스로에게 홀로 정직한 대면에서는 그럴수 없다.

그런 불성실한 자세로는

자신보다 진동수가 높은 4차원 영계의 문턱을 넘을수 없다.

 

무형이더라도 무형에게 무형이 하는 일(생애의 교훈)은 무형이 아니다. 

무형이지만 봉사 사랑 성실함과 같은

무형의 도덕적 가치배움

영적 성장 그 무형이 하는 일로 환상아니다

성실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형에게 무형은 환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자기 본분을 알고 성실함을 지키는 자세같은 것은 무형의  일로 환상이 아니다.

정직한 배움 그것을 우리는 영이라고 영적 성장이라 한다.


 

(불행히도 당신의 높은 어느 하나에만 매달려 환상을 물리고, 배움의 기회를 놓지고,

어느 날 한시에 뭘 이루어보려는 죄의 수행은 당신이 환상이라 멸시하고 멀리하는 

그 환상에 대해 당신의 입지를 더욱 좁히며 당신의 각질을 더욱 경직시킨다.)

 

전기 중기 아틀란티스는 레무리어를 자연의 영성의 이어받아

적절히 창조를 가미하고 응용시키고 성대한 꽃을 피웠으나

사랑과 영혼의 배움을 천시하는 철없는 자들이

 '후기' 아틀란티스의 파국을 불렀다는 것을 아십시요.

그들은 엘리트 귀족들 기계들을 권력으로 숭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http://blog.daum.net/kjh927/2554911

http://blog.daum.net/wildflower/1375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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