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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백제.신라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빼버린 일제와 매국식민사학계
  
성훈 칼럼니스트  
  
필자가 백제에 대한 연재를 계속해 나가면서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논리를 펴자, 썩어빠진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음해성 댓글로 공격을 해왔고, 주위에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한반도에는 누가 있었느냐?”고 푸념어린 질문을 해왔다. 필자 귀에는 “살기 좋은 이 땅을 놔두고 역사를 왜 대륙으로 가져가려느냐?”는 항변으로 들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면 당연히 고구려와 신라도 대륙에 있었다는 말 아니냐? 그렇다면 한반도엔 아무도 없었단 얘기인데, 우린 도대체 누구의 자손이냐? 우린 애비 애미도 없는 호로 자식이냐?”라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다들 이 나라를 너무나 사랑하다 보니 나온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국심이 넘치는 한국인들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일부러 믿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애국심에 충족이 되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일제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인 반도사관은 이 나라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진한 우리 국민들은 반도사관이 얼마나 무서운 이론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얼빠진 이 나라 정부가 아직도 일제 때 조작된 역사 이론을 그대로 교과서에 실어 학교에서 교육했기 때문이요,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이 나라 사학계가 일제 때 만들어진 식민사학을 그대로 추종하고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그의 질손인 이병도는 조상의 역사를 팔아먹었다. 매국노 이완용이 팔아먹은 나라는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이병도가 팔아먹은 이 나라의 역사는 해방 62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병도는 매국노 이완용보다 더 나쁜 민족반역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나라가 역사 회복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로 이 나라 사학계가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 지킴을 위해 오히려 스승의 반도사관을 더욱 더 굳건히 사수한다. 심지어는 이병도가 죽기 전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한사군의 위치 비정은 잘못이라는 참회의 글을 발표하자 “우리 스승이 나이가 들어 노망을 한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역사의 진실 찾기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우봉이씨 이완용 가계도. 왼쪽부터 매국노 이완용, 질손자인 민족반역자 이병도, 이병도의 두 손자인 이장무 현 서울대총장, 이건무 현 문화재청장. 아직도 이 나라는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손을 정부 요직에 기용하고 있는 정신나간 정부이다.  이렇듯 정부가 역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으니 역사의 진실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이란?

반도사관의 핵심은 표면적으로 백제와 신라와 가야가 한반도 남부에 동서로 있었고,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이런 반도사관이 뭐 그리 잘못된 이론이라고 성훈이라는 사람은 글 쓸 때마다 매번 사학계를 매국이니 식민이니 하며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아래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 해소가 되리라 믿는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백제와 신라를 한반도 남부로 비정 해버리면 문제는 그 이전 역사도 당연히 한반도로 비정이 되어야 한다. 그 이전 역사란 바로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사군과 삼국의 전신인 삼한(마한,변한,진한)과 위만/기자 조선의 역사이다. (일제와 이병도는 위만 이전인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들어 버려 반도사관에 단군조선의 역사는 없다)  

결국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의 위치가 현 대동강 평양이 되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것이라 위만조선의 수도도 대동강 평양이 되는 것이다. 현 역사 이론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며, 기자조선은 중국인 기자가 와서 세운 나라라고 한다.(참고로 북한은 평양에 기자묘까지 만들었다)


▲  한국의 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 참으로 매국적인 이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이론 가지고 동북공정에 대응이 되겠는가?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일언방구 말 한마디도 없으며, 단군은 모친이 곰이라는 신화로 처리되어 있다. 배달국과 환국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다. 그저 교과서에 있는 문장이라고는 “B.C 2333년 단군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한다”에서  --> “~ ~ 건국되었다”로 바뀌면서 ‘고 한다’이 세 글자 떼는데 6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리고는 단군조선에 대해 설명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즉 한반도는 예로부터 기자라는 이민족에 의해 시작되어, 위만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되다가, 한사군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지배된 역사라는 것이다. 조선민족은 대대로 이민족에 의해 지배받은 민족이라는 것이 일제가 조작한 논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우매한 조선민족이 천황의 민족에게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반도사관을 편 일제의 논리였다.

“조선인이 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 특명으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중국과 조선에 있던 고대 사서를 전부 거두어들인다. 중요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고, 20만권이 넘는 사서를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는 <조선사 35권>이란 새로운 역사서를 창작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조작되어 조선인을 세뇌교육 시키던 역사 이론이,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된 지 6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 이론이 바뀌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이 나라의 통치권자들의 역사인식이 친일적이었거나 아예 역사개념조차 없었던 통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충견이 되어 민족정신을 말살하던 이병도는 6.25 후 친일파를 중용하던 이승만에 의해 다시 이 나라 사학계를 맡게 된다. 일제에 역사를 팔아먹은 조선사편수회의 매국노 멤버들인 홍희/신석호 등이 대한민국 사학계의 핵심이 되어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그 후학들이 대학의 강단으로 펴져 나가면서 이 나라의 사학계는 더욱 매국식민사학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아직도 일제치하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이 엉터리 역사이론인 동북공정을 앞세워 북한 땅을 노리고 있음에도 이 나라 사학계는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항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밝히면 된다. 그러나 그리 되면 지금까지의 자기들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누가 자기 목줄을 걸고 그렇게 하겠는가!

대한민국 사학계가 이 모양 이 꼴이니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무풍지대이다. 아무런 저항도 안받고 그 엉터리 이론을 마구 떠들고 있는데도 대한민국 사학계는 입도 뻥끗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간혹 입바른 소리가 나오면 이번에는 정부에서 중국과 외교상 문제가 된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도 되찾기 운동이다.

간도는 조선의 외교권을 불법으로 강탈한 을사늑약에 의해 일제가 청나라와 맺은 제3자 조약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고, 이미 일본이 을사늑약 자체를 무효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간도에 대한 이의신청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년이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해이건만 이의신청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게 대한민국 정부인지? 아니면 중국의 제후국 정부인지, 일본의 식민정부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잃어버린 북방영토 간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와 청나라간에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으로 넘어간다.


삼한의 진실 (삼한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아래와 같이 알아보기로 하자.
단군조선은 44세 구물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천왕이 진조선을 직접 다스렸다. 번조선에서는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이것이 기자조선의 실체로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기자의 후손 6명이 번조선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것이 단재 신채호선생의 이론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기준은 해대(海岱)로 남하하여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해대는 해(海) 지방과 대(岱)지방을 합한 말로 대(岱) 지방은 산동성 태산 일대를 말함이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거기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뛰어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가다’의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Let's go'의 뜻이다.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 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  일제는 평양에 있던 낙랑국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조작하기 위해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점재현신사비를 평남 온천군으로 옮겼으나 나중에 조작임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밝혀진다.  


따라서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 25사인 <사기>와 <한서>의 기록을 보아도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그 영역은 하북성 일대인 것이다. (아래 사진참조)

한무제와 위만국 우거왕의 전쟁을 직접 참전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한나라는 이 전쟁 후 참전 장수들을 처벌하는데 극형인 기시(찢어 죽임)라는 형벌을 가하는 것으로 보아 무참히 패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한4군이 아닌 조선4군을 설치했다 하며, 낙랑.임둔.현토.대방이라는 기록이 없다. 한사군은 분명 후에 누군가에 의해 조작(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의 사서에 하북성으로 나와잇는 한사군이 매국식민사학계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진다.  


낙랑국은 어떤 나라이고 어디 있었나?

나머지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단군조선의 정통인 진조선을 계승하여 나중에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이어지며, 영역은 내몽고와 하북성 일대로 보인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간 가섭원(동)부여는 북만주 일대가 그 영역이 된다. 나머지는 최씨의 낙랑국으로 이어져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를 그 강역으로 한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의 흐름이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대대로 평양에 있었다는 이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바다로 들어가 자살했고, 한반도 남부에 삼한(마한.진한.변한)이 생겨났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  기준이 남하한 곳은 대륙 동부 海지방으로 선조인 기자가 살던 땅이고, 최씨의 낙랑국은 한반도에서 세워진다. 식민사학계는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낙랑군을 그 위치로 가지고 간다.


대동강평양은 대대로 기자/위만조선의 수도였으며, 한무제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쓰러뜨리고 현 북한 땅 일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허무맹랑한 이론을 지껄이고 있다. 평양근처에서 발굴된 유물은 바로 최씨 낙랑국의 유물이었음에도 낙랑국을 역사에서 지움으로서 이걸 한사군인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시켰다.

낙랑군과 낙랑국은 공교롭게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같이 쓰기 때문에 혼돈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도 명확한 구분이 없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의 경우 ‘낙랑태수’라는 것은 낙랑군을 의미하고, ‘낙랑왕’이라는 것은 최씨의 낙랑국을 의미한다고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참고로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봐야 한다.

한반도는 단군조선의 막조선에 이어 최씨 낙랑국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3대 대무신왕 15년(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 망함으로서 한반도 전체는 고구려의 강역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호동왕자와 자명고와 낙랑국왕 최리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왕자 호동이 옥저 지방을 구경다닐 때 낙랑왕 최리가 마침 순행하다가 호동을 보고는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오?”하고 데리고 돌아와 사위를 삼았다. 그 뒤 호동이 환국한 다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최씨녀에게 알리기를 “그대가 그대 나라 병기고에 들어가 고각을 부셔버린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두겠다.”하였다.

전부터 낙랑국에는 고각이 있어 만약 적병이 침입해올 경우 북이 저절로 울리기 때문에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녀는 날선 칼을 가지고 병기고 속으로 들어가 고면과 각구를 부수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을 왕(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케 하였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아니하므로 방비하고 있지 않다가 군사가 엄습하여 성안에 당도한 후에야 북과 호각이 다 부숴진 줄을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그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

호동과의 사랑에 빠져 조국을 배반하는 낙랑공주의 낙랑은 한사군 낙랑군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손인 낙랑국이다. 이렇듯 엄연히 정사서인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낙랑국을 매국식민사학자들은 아예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는 낙랑군으로 대체해 버린다. 그래서 중국 하북성에 있어야 할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들어오게 되고,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국의 유물이 모조리 낙랑군의 유물로 둔갑 변조되는 것이다.


▲   한반도 낙랑국과 하북성에 있던 낙랑군과 그 위에 잇었던 고구려.  


낙랑국 이후 한반도는 누구의 땅?

한반도는 낙랑국에 이어 AD 32년부터는 고구려의 영역이 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것임에도 한반도 중남부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물이 백제와 신라의 것으로 둔갑된다.

대표적인 것이 풍납동 몽촌토성의 피라밋이 백제 근초고왕의 것이라고 하는 희한한 이론이다. 분명 풍납토성의 피라밋은 집안지역의 피라밋과 그 양식이 같고, 공주의 무녕왕릉과는 그 양식이 완연히 다르다. 어떻게 한 왕조에서 두 가지 무덤 양식을 쓸 수가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대부(大夫)라는 고구려의 관직명이 엄연히 적혀 있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의 유물은 전부 AD 450년 이전의 유물이고, 그 이후에는 고구려 유물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즉 대략 450년 이전의 한반도 전체는 확실한 고구려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  풍납토성에 있는 대형 피라밋. 식민사학계는 이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이 피라밋은 분명 고구려 무덤양식이다. 사학계는 왜 공주의 무녕왕릉과 그 양식이 다른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같은 나라에서 이렇듯 다른 무덤 양식으로 왕릉을 조성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고구려 이후에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라의 유물로는 진흥왕순수비를 들 수 있다.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즉 지증왕 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역에서 벗어나 한반도 동신라가 자립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24대 진흥왕 때 순수비를 세워 그 영역을 표시하며, 나중에는 만주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  561년 세워진 창녕진흥왕순수비는 4개의 비 중 가장 남쪽에 있다. 그 서쪽엔 백제의 뭔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백제의 도읍지는 분명 산동성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백제의 유물이 간혹 발견되는 것은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의 담로 형태로 뭔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상으로 보아 분명 한반도에도 뭔가를 세웠을 것으로 본다. 아마 그 시기는 AD 500년 전후로 동성대왕 ~ 무녕왕 사이가 아닌가 싶다.

그 근거로는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에서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지석이 발견되었고, 부여에서 위덕왕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 백제 사마왕능의 주인공이 무녕왕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분명한 것은 황제가 죽을 때 쓰는 용어인 붕(崩)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정식 왕인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식 왕의 부부 합장묘로 보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하고, 왕릉 바로 옆에 다른 묘 2개가 붙어있고, 지석에 적혀있는 斯麻의‘麻’자가 정사의 기록인 ‘摩’자와 다르고, 사마라는 왕의 휘(이름)를 함부로 쓴 것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된 것은 사실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무녕왕은 대륙 동부를 호령하던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21년간 재위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왕이었는데 그런 왕의 무덤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만큼이나 위상이 강했던 백제왕의 무덤이 덕흥리 고분(주인공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보다도 작고 초라하니 이상한 일 아닌가? 일국의 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글씨체도 너무 조잡하고 초라하다. 여하튼 공주에서 발견된 무녕왕릉은 아직도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의 지석. 백제 사마왕(百濟斯麻王)이 붕(崩)했다고 적혀있다.  

  
백제 무녕왕릉에 대해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일본의 왕실서고에서 일하던 남당 박창화선생이 필사본으로 남긴 고구려 사략 23대 안원대제 편에 보면 백제왕 사마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사마>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聖王}>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이에 <고노>와 <복정>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서, <한{漢}수>를 건너 <쌍현>을 무너뜨리고, <지충>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이 <연희>를 보내서, 명마와 미녀를 바쳤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죄하였다. <명농>에게 입조하라 명을 내렸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乃命<高老>・<卜正>問罪渡<漢水>壊<雙峴>大破<志忠>於<金川>, 虜獲男女万余口. <明穠>, 遣<燕喜>献名馬・美女, 以謝失臣之禮. 乃命<明穠>入朝.)

이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왕비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녕왕이 독살을 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유배 형식으로 한반도로 옮겨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 남당의 고구려사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의 의견이다.

그래서 감히 선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녕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남당이 남긴 고구려 사초의 내용이 맞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  부부합장된 백제의 본왕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백제사마왕릉


여하튼 의혹은 많으나 523년 붕(崩)한 백제 무녕왕의 능이 공주에 있고, 그 후 신라 진흥왕의 남쪽 순수비는 창녕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진흥왕 이전에 창녕 서쪽에는 백제가 분국이나 담로 형태로든 뭔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후에 동신라가 만주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보아 확실치는 않으나 600년 경 한반도의 백제 담로는 소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 25사에도 백제의 수도가 동.서 두 군데가 있었다고 했다. 해서 혹자는 동쪽 수도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나, 필자는 동쪽 수도라는 개념보다는 백제의 담로나 분국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다. 백제의 동쪽 수도는 산동성, 서쪽 수도는 호남성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 역사상 한반도에는 어느 나라가 있었는지 아래와 같이 정리가 된다 하겠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는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행정력을 가진 국가로서의 형태는 구리시대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 구리시대 (한웅, 신시시대) : B.C 3898 ~ B.C 2333

2. 고조선 : B.C 2333 ~ B.C 238

3. 낙랑국 : B.C  238 ~ A.D  32

4. 고구려 : A.D   32 ~ A.D 500년 전후

5. 백제담로와 동신라 : A.D 500년 전후 ~ A.D 918년

6. 고려와 근세조선과 대한민국/북조선 : A.D 918 ~ 현재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수도는 다 대륙에 있었고 주 활동무대도 대륙이었지만, 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땅인 한반도에도 삼국이 영역으로 가지고 있었다. 옛부터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이 거의 없는 평화지대로 말 그대로 소도(蘇塗)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라와 한반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반도사관을 믿으려고 하는 선량한 우리 국민들이여! 이제는 역사에 대한 눈을 제대로 뜨고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며 마음의 창을 열어야 할 것이다. 반도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인정하면 결국 북한 땅은 낙랑군 때문에 중국 땅이라는 이론적 결과가 나와 동북공정이 옳다고 인정하는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현재 식민사학계가 지껄이고 있는 반도사관은 국가를 망칠 무서운 매국적인 이론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망국의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대륙을 지배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역사가 밝혀지는 날 이 땅에는 희망이라는 찬란한 빛이 도래할 것이다.


▲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도. 최적관측지는 그 나라의 수도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는 787년 이후에 신라의 도읍이 들어선 것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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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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