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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독립문과 관련된 독립신문 기사   조회(315)


사진으로 보는 국사.. | 2006/10/04 (수) 22:12   추천하기(0)  | 스크랩하기(0)  


   1896년 7월 9일에 진사 졍성우(鄭惺愚)가 왕에게 소를 올렸다. 내용인즉 <흉칙한 무리 재필이가 만들고 있는 독립신문은 나라가 넘어지도록 도모하는 신문입니다>라는 것이었다.(고종실록2) 그 으뜸 글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개화하자는 무리들이 다른 말 쓰기를 일로 삼고 갑신년 10월 그 역적 무리들을 놓쳤더니만, 갑오년 6월에 란동을 만들고 을미년 8월에 대역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흉칙한 재필로 말하면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본국에 들어왔으니...그 녀석이 만들어 내는 독립신문이라는 것은 나라가 넘어지도록 꾀하는 것 뿐입니다. 흉칙한 재필로 말하면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진사 졍성우가 독립신문 40호까지를 읽어 본 연후에 왕에게 올렸던 소(疏)였다. 여기에 대하여 독립산문 사장 필립은 독립신문 47호 론설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대조선국 진사 졍성우와 미국의사 서재필씨 소송판결서는 왼편과 같음. 한성 서부 대정동에 머무는 미국의사 원고 서재필 나이 삼십이(32), 피고 진사 졍성우 나이 오십삼(53)이라>(독립신문1 1896년 7월 23일 쪽185)

   필립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를 내고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회원을 모집해서 7월에 <독립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독립협회>를 만든 주동자인 필립 자신은 고문이 되고, 초대회장에 안경수를 앉치고, 초대 위원장에 리완용을 앉쳤다.
   조금 뒤 안경수가 사형되자, 리완용이 제2대 독립협회장이 되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돈만 내면 독립협회원이 된다고 했다. 일본사람 고하송시조가 독립협회 회원이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독립신문 기사가 이렇게 되어 있다.

   <도라간 토요일(1898. 6. 5) 독립협회 회원들이 모여 토론하는데, 본회에 명예회원 일본의사 고하송시조씨가 영설하기를 <내가 일본사람으로 대한독립협회 회원에 들었으니 여러 회원네가 혹 나를 의심하실 듯 하기에 설명하오니 그리들 아시오....> (독립신문 3. 1898년 6월 7일 잡보. 쪽259)
   일본사람이 <조선국 독립협회 회원이>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해괴한 일이라고 하겠다.

6장 일본간첩 필립이 독립문을 세웠다

   일본간첩 필립이 독립문을 세우기로 했다. 조선시대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 문을 세워서 이름하기를 독립문이라고 했다. <청국과 인연을 끊고 일본에 붙자>는 뜻으로 세운 것이 독립문이었다. 1896년 7월 4일에 <독립문 기공식>을 가졌다.
   <모화관에 새로 독립문을 짓고, 그 안을 공원디로 꾸며 천추만세에 자주독립한 공원디라하고 젼할 뜻이라....이 일에 발긔인은 안경수,리완용,김가진,리윤용,김죵한,권재형,고영희,민샹호,리채연,리샹재,현흥택.김각현,리근호,남궁억 씨들이 시작하였고,

   회계장은 안경수씨가 되고,위원장은 리완용씨가 되고, 위원은 김가진,김죵한,민샹호,리채연,권재형,현흥택,리샹재,리근호씨가 되고, 간사원은 숑헌빈,남궁억,심의셕,졍현철,팽한쥬,오셰창,현졔복,리계필,박승죠,홍우관씨가 되고, 이달 초잇흔날 보죠금 낸 사람들은 안경수 사십원, 권재형 삼십원, 독립신문사 삼십원, 고영희 이십원, 리채연 이십원, 현흥택 오십원, 리샹재 십원, 김각현 십원, 리근호 이십원, 남궁억 십원, 죠셩협 십원, 도합이 오백십원이라(독립신문 1 1896년 7월 4일ː쪽153~154).

   광복 후 필립은 자서전(을유문화사)을 썼다. <독립문 세우기 경비가...나 개인의 출자로 된 것이라>고 했다. 거짓말을 했다.

   오늘 대죠선 독립협회 회원들이 독립문 쥬추돌을 독립공원디에셔 례식과 연설하며 학교 학도들이 애국가를 노래할 터이요, 죠션노래는 배재학당 학원이 하고 회장 안경수씨가 하고, 독립가는 배재학당 학원이 하고, 우리나라 젼졍이 엇더한 연설은 외부대신 리완용씨가 하고 죠션에 잇는 외국사람 죠션말은 독립신문사장 제손씨가 하고, 진보가는 배재학당 학원이 하고 (독립신문1. 1896 6월6일 쪽106. 27호 잡보)

   이때 리승만이 배재학당 학생이었다. 리승만이 참석하여 노래를 불렀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독립문 준공식 행사는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다.

1. 회장연설.............................안경수
2. 독립을 영구 보존.....................리채연(한성판윤)
3. 우리나라 장래.........................리완용(외부대신)
4. 외국사람 연설 통역(조선말로)..........필립재슨


조선사람연설(영어로) (독립신문사장)

   <청국에서 독립하여 일본에 붙자>고 외쳤던 일본간첩 필립이 했던말 그대로 나라가 일본에 넘겨졌다. 일본간첩 필립이 외친 그대로된 것이다. 리완용이 일본돈을 받고 경술년 국치문서에 도장을 찍어서 일본에 넘겨 주었던 것이다. 매국노 리완용에게 산 것은 완용이 가지고 있는 논밭일 뿐 나라땅이 아니라고 했다.
   광복 후 초대대통령에 리승만이 되었다. 리승만은 필립의 제자로 완용놈이 이끄는 독립협회 청년당원이었다. 그 더러운 <독립문>을 리승만이 헐어버릴 사람이 아니다. 리승만은 15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지난날에 리완용 부하였음이 탄로날까 전전긍긍했다. 탄로를 막으려고 북배달을 보고 <호시탐탐>이라는 연설만을 하다가 쫓겨났다. 폐주로 되었다.
http://blog.empas.com/jukbuin/16062367

‘이등박문’도, 한국의 ‘독립협회’회원으로서 자금을 지원해주었던 일본인 ‘고하송시조 ’, 그리고 역사 날조의 원흉노릇을 했던 ‘금서룡’과 다시 오면서는 총독이 되었던 ‘ 데라우찌’까지, 침투일인들의 넋이 모두 되살아나고 있다. ...www.honammaeil.co.kr/skin/blue/read.htm?uid=471284§ion=기획 - 43k -저장된 페이지 -


<독도 뒤에 숨은 진실- ③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연구하는 정치집단’ 없었다.

   사학계의 고질병폐는 왜식실증사학과 반도사관에 있다. 실증사학이라는 논증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실증 가능한 사료는 일본이 평가하고 지정해 준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왜식사관의 창고에서 갇혀서 벗어나지 못한 불구학문체계로 박제되어왔다.

   지금 일본에서는 대전(大戰) 후 60년이 지나면서 다시 ‘풍신수길’이가 살아나고 있다. ‘이등박문’도, 한국의 ‘독립협회’회원으로서 자금을 지원해주었던 일본인 ‘고하송시조’, 그리고 역사 날조의 원흉노릇을 했던 ‘금서룡’과 다시 오면서는 총독이 되었던 ‘데라우찌’까지, 침투일인들의 넋이 모두 되살아나고 있다.

   유네스코 한독위원회(韓獨委員會)의 주관으로 ‘21세기 역사교과서 국제포럼’을 유럽에서처럼 이웃나라 사이의 역사적 인식과 갈등차이를 해소하고 선린 증진을 함으로서 왜인에 대한 혐오와 경계, 종교적 비관용 그리고 호전적 국수주의를 제거하게 된다는 것과, 오늘의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유네스코(UNESCO)는 이미 40년 전인 1965년 말경 일본의 ‘가영삼랑(家永三郞)교수가 역사교과서 소송’을 제기하던 해에 한일 양국의 참여로 역사교육에 관한 한일공동협의회를 갖도록 권고한 일이 있었음을 과시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아시아의 주류(主流)동방민족을 이(夷)라 칭한다. 이는 대인을 의미한다. 이(夷)는 인(仁)자의 옛(古)자로서 동방민족을 부르는 자(字)이다.
   그러므로 인(仁)자는 동방예의지국의 명칭이며, 동방민족이 어질다하여 이(夷)로 표시하는데 이(夷:어진민족 이)는 민족임으로 어진사람 개인을 표시하기 위하여 인(仁:어질 인)자로 孔子가 만들었다.(옛 옥편 : 설문고문소증)

   중화민국 근대의 대표적인 학자 임해상박사는 " ‘동이문(東夷文)’을 왜 한국인들은 ‘한문(漢文)’이라고 하면서 중국에 떠넘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인들이 겸손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상들의 넋과 위업까지도 포기하려하는 것은 지나치다”라면서 고려이후 조선왕조가 사대주의의식(事大主義意識)에서 ‘진서(眞書)’를 ‘대국문자(大國文字)’라하고 명(明)나라에 진서상납(眞書上納) 한 것을 탓한바 있다.

   고대로부터 우리의 동이문자(東夷文字)였으므로 ‘한문(韓文)’이라 하고 동북아시아 전체가 공유하면서 배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마땅한 것이지, 일부의 철부지 ‘한글학자”韓契學者)’들이 떠드는 망언처럼 한문(韓文)을 한문(漢文)으로 오인하며 못 배우게 하고 못 쓰게 하는 것은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결코 나쁜 짓이다.

   결국 ‘한글전용운동(韓契全用運動)’은 ‘뜻이 없는 소리만 골라서 지르자는 운동’이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는 친일정책일 뿐이다.
   또한 삼국유사나 신라왕들의 비문에 “신라의 역대 김씨왕조는 ‘알지’의 후예이고, 알지는 소호금천씨의 후예 김수로왕의 후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소호씨(少昊氏)”는 동이계야(東夷系也),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는 기록이 우리사서뿐 아니라 중국고전 고사변(古史辯)에도 기록되어 있는 대표적인 우리 동이족의 조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민족대백과사전’에서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상납하고 감히 우리민족의 인물로 넣기가 벅차서 제외시켰다”는 것이니 얼마나 소극적이고 무식한 사학계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토록 문자(韓文)의 주인공인 우리의 조상들을 중국에 넘겨주었으니 자연히 그분들의 문자인 한문(韓文)도 한문(漢文)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보면 조속히 우리민족사를 복원하는 것이 학문적 대안이다.

   정치권에서는 상고사연구재단, 대마도연구재단, 간도연구재단, 고대강역연구재단, 이어도해저자원연구재단, 그리고 독도관광연구재단을 설립하고 프로젝트진행을 한지가 벌써 50년은 지났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집권욕의 정상배만 있고 조국을 위한 미래를 위한 고뇌하는 정치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의 영토조항을 보자! 용어의 선택에서부터 소극적이며 반역사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서둘러서 실질적이면서도 자주적으로 민주의식을 고양하게하고 어느 나라의 헌법에 비추어보아도 손색없으며 국제법상으로도 긍정적 여건을 갖출 수 있도록 보완하지 않으면 국가 체제의 지배력이 미칠 수 있도록 영해법을 별도로 제정 보완하여야 할 만큼 허술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서둘러서 민생과 조국의 번영을 위하여 영토조항을 포함한 시대헌법으로 개정이 추진되어야한다.

   독도문제나 고구려역사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우리정부의 대응내용을 보면, 국익을 위한 현명한 대응은 없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외교용어로 책임을 떠밀거나 선거를 의식해서 정치적 선언으로 생색내는 그야말로 국내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역사까지 탐내는 중국의 발표에 발끈한 국회에서 여야가 하나 되어 ‘고구려문제특위’를 만들었고 북경까지 출장을 하였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슬그머니 되돌아 온 이유가 뭔가? 그것은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에 들어와서 ‘한일관계보다 독도가 상위계념’이라는 의지의 표현이 등장했고 4대 기조 5대 원칙이라는 대일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들은 사대근성을 못 버리고 미국의 눈치를 본다.

   한 단계 뛰어넘은 미국의 꼼수도 모르면서 일본과 미국이 가장 가까워진 때에 우리가 멀어져가는 꼴이 되었다는 위기감만 느끼면서 독도문재로 떠들지 말고 이러한 때일수록 미국에 좀더 가까이 붙으면서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힘을 억제하도록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더구나 언론공화국으로 알려진 신문들은 “할말조차도 못하던 참여정부가 국민여론의 압력으로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는 것이고, “만일 정부나 정치인이 과도한 목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독도의 정치적 이용을 노리는 국내용”일 수 있다는 주장으로 비하시키면 비하당하는 정치권이 되서야 조국의 비젼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스스로 공부하고 조국을 위해 고뇌하는 충심으로 거듭나는 것이 정치적 대안이다.<完>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둘째 일본 측의 일본-영국-미국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조약 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셋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회담 내용의 일부는 1905년 10월 일본 신문 ‘고쿠민(國民)’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의 전체 내용은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비밀조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전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밀약’이라는 표현은 데넷의 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루스벨트는 밀약에 동의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 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다.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그를 일컬어 ‘일인(一人) 국무성’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 >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김정기 연세대 교수
뉴스 :한겨레 미일동맹-안보와 밀약의 역사

소토카 히데토시·혼다 마사루·미우라 도시아키 지음 진창수·김철수 옮김. 한울아카데미 펴냄. 3만원 ... 이들이 특히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미-일 안보조약과 관련한 양국간 미공개 ‘밀약’ 진상규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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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약으로 추적한 미-일 동맹의 실체


미군의 일본내 핵반입 용인 유사시 주일미군기지 자유 사용
미군 손안에서 놀아나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한승동 기자  

» 미일동맹-안보와 밀약의 역사
소토카 히데토시·혼다 마사루·미우라 도시아키 지음
진창수·김철수 옮김. 한울아카데미 펴냄. 3만원


   미-일동맹을 추적해보면 한국 여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이해타산과 편의주의에 젖은 정치가나 군부 및 관료들 물밑 뒷거래에 국가이익이 얼마나 쉽게 농락당할 수 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월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 뒤 나온 공동성명은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면서 한가지를 덧붙였다. “전략적 유연성 이행에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흔히 거론되듯, 대만 독립문제를 둘러싸고 미-중 또는 미·일-중 간에 분쟁이 발생하고 미국이 주한미군을 분쟁현장에 투입하거나 병참기지로 활용할 경우 우리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중국과의 무력대결을 포함한 국제분쟁에 휘말려 생존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막연한 가능성보다 훨씬 더 가까이 포진해 있다. 대만해협에 실제 분쟁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한국이 주한미군 유연성을 사실상 인정한다는 확신만 서더라도 중국은 그렇지 않을 경우와는 판이한 대한국 및 동북아 군사안보전략을 세워야 하며 주변관계를 비롯한 국가 장기전략도 바꿔야 한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새로운 동북아 열전의 당사자가 되거나, 한-미-일 대 중-러-북의 새로운 냉전구도의 최전선으로 다시 내몰리며 민족분단 고착화와 전쟁의 위험속에 21세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배테랑 기자들 3명이 미-일 안보동맹 반세기를 맞아 지난 2000년 구성된 미-일안보 특별취재반의 일원으로 참여해 취재한 내용과 이전의 ‘한반도 위기’ ‘오키나와 기지’ 문제 특별취재 결과 등을 집대성한 “미-일동맹 반세기의 통사” <미일동맹-안보와 밀약의 역사>(한울아카데미 펴냄)를 보면 그런 우려는 불필요한 과장이나 기우가 아니다.

   21세기 일본의 진로를 어디로 정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 아래 기자들은 기밀해제된 방대한 미국 외교문서를 뒤지고 40여명의 미 고위관리들을 인터뷰하면서 지난 50년간의 미국 전략 추이, 동맹역할 변화, 일본의 대응 등을 추적했다. 이들이 특히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미-일 안보조약과 관련한 양국간 미공개 ‘밀약’ 진상규명이었다.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돼온 밀약 문제의 핵심은 양국이 미군 핵무기 일본 반입과 한반도 유사시 사전협약 없는 주일미군기지 자유사용을 별도로 몰래 합의했는지의 여부였다.

   핵 반입 문제는, 일본 정부가 누누히 공개 부인했고, 국제적 야유를 받긴 했지만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핵의 보유와 제조, 반입을 하지 않는다’는 비핵3원칙 견지를 이유로 노벨 평화상까지 안긴 예민한 사안이다. 기자들이 미국 민간연구기관인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 자료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일본 정치인·관료들은 ‘핵을 비치한 미 함선의 일본영해 통과, 기항 등은 반입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위의 구멍을 만들어 놓고 사실상 핵반입을 용인하고 있었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닮은 꼴인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기자 자유 사용문제도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와 유사한 단서들을 잔뜩 달았지만 주변사태법 등 한반도유사 관련 법 제정을 비롯한 그 뒤의 현실 추이를 보건대 그런 단서들은 있으나마나한 껍데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요컨대 국민에겐 딴말하면서 사실상 미국 요구를 다 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미-일안보 재정의에 대해 말레이시아 전략국제문제연구소 노르딘 소피 소장은 “미일안보 재정의가 세계에 표방한 메시지는 명쾌하다. 그것은 냉전 후에도 일본이 미국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취재기자들 역시 노르딘 소장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것은 일본에 단연코 위함한 길이다. 자국의 미래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자국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통행증을 가지고 새로운 일본의 역할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서 미일 안보의 방향을 미국과 함께 협의해야 한다. 동맹 반세기를 맞이한 지금 일본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미일 안보 재정의를 위한 재출발일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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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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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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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2008.12.01
23:30:54
(*.15.192.68)
이른바 조선과 대한제국말에 국내에들어와 개화사상을 전파했던 무리중 일루미나티들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개화나 개방을 목적으로한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유입을 사전정비하는 목적이었던듯하고 거기에 놀아난꼴이 친일이나, 친미, 친러로 대별되며 결과적으로 제한제국의 근간을 흔들어 일본의 먹이가되게하고 세계대전을 달성하는데 성공한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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