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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람타

 

 

1. 머리말

 

2장. 나는 람타이다 [4p]

3장. 당신들이 내 백성이었을 때 [14p]

4장. 하나님은 누구인가 [18p]

5장. 하나님을 보라 [27p]

6장. 삶 뒤의 또 삶 [33p]

7장. 죽음과 초탈 [45p]

8장. 창조와 진화 [50p]

9장. 천사보다 더 높은 [59p]

10장. 찾을 수 있는 하나님 [63p]

11장. 사랑이라는 선물 [66p]

12장. 오직 진실만을 [67p]

13장. 삶에 법칙은 없다 [76p]

14장. 삶의 목적 [84p]

15장. 잊혀진 신성 [90p]

16장. 환생 [99p]

17장. 앎의 과학 [107p]

18장. 닫힌 마음 [113p]

19장. 마음열기 [117p]

20장. 경험의 가치 [128p]

21장. 어느 갠날 아침에... [135p]

 

 

 

 

 

 

 

 

 

 

 

 

 

 

 

 

 

 

1. 머리말

 

 

인간이 자신의 신성함을 깨닫는 것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당신들은 그것을 실현하는 씨앗이다.

 

 

나는 람타이다. 지구라고 부르는 이 대지 위에 오래 전에 살았던 독존적 존재이다. 지구에 살았을 때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초탈했을 따름이다. 마음의 힘을 이용하고 내 몸을 생명의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가지고 가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기쁨, 무한한 생명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지상에 살면서 나를 따랐던 이들도 또한 초탈하였다.

 

나는 이제 보이지 않는 형제들과 함께 인류를 사랑하는 모임의 일원이 되어 있다. 우리는 당신의 형제로서 당신의 기도와 명상을 듣고 당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았었고 당신들이 알고 있는 실망과 슬픔, 기쁨, 그 모든 것을 경험했다. 이미 우리는 존재의 더 위대한 상태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경험 한계를 통달하고 초월하는 것을 배웠다.

 

나는 당신이 매우 소중하며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리러 왔다. 당신을 통하여 흐르는 생명과 당신들 모두에게 와 닿는 생각은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상관없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지성 자체이며 생명의 힘이다. 이것이 우리를 함께 묶어 주는 근본이다. 이 지구상에 있는 이들은 물론 당신이 볼 수 없는 저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묶을 수 있는 근본이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당신들 대부분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유산이 있다는 것을 꺠우쳐 주기 위함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더 고매한 안목을 틔워 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것을 통해 당신은 만물의 근원인 이른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지원을 받아온 실로 신성한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당신이 자신의 고귀한 지성으로 당신 삶의 모든 현실을 창조하여 왔고, 또한 당신이 원하는 어떤 실체라도 창조하여 경험해 볼 수 있는 선택권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려고 이곳에 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다른 이들도 당신들에게 왔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당신의 위대함과 힘, 생명의 영원성을 깨우쳐 주려고 하였다. 당신은 왕이었고, 정복자였으며, 노예였고, 영웅이었으며, 순교자였고, 스승이었고, 안내자였으며, 친구였고, 철학자였다. 이 모든 것은 지식을 얻는 방편으로 취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들은 당신들이 스스로를 파멸하지 않도록 당신들의 관심사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당신들이 많은 경험을 쌓으며 기쁨을 늘려 나가는 진화를 하기 위한 터전을 이 생이 계속 마련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민 그들을 하나하나 쫓아냈다. 쫓아내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들의 형상을 따라서 조상(彫像)을 만들고 받들었다. 그리고 당신들의 취향에 따라 그들의 말을 왜곡하고 변형하였다. 그들의 가르침을 활용하는 대신에 많은 사람들이 결국엔 가르침을 섬기게 되었다.

 

나를 섬기는 일이 없도록 나는 몸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대신에 내가 이 지구에 살았을 때, 내 사랑스런 딸이었던 실체를 통해서 당신들과 대화를 하기로 하였다. 내 딸은 내가 그녀의 육체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녀는 나라는 근본과 연결되는 순수한 채널(역주 : 채널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실체나 원천으로부터 전달되는 사념을 글이나 말로써 다시 창출하는 것 - C. Ruechert의 『A Channeling Handbook』에서)일 뿐이다. 내가 당신들과 얘기를 할 때면, 그녀는 몸안에 있지 않는다. 그녀의 영혼과 영성은 완전히 몸을 떠나 버리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대지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려고 한다. 나 자신과 또 나와 함께 있는 이들은 인류로 하여금 장엄한 이벤트를 준비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 위대하고 눈부신 일을 스스로 목격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활짝 열어, 지식과 사랑이 흘러 들어오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구상의 온 인류를 하나로 묶어 주려고 한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사랑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랑보다도 더 큰 것이다. 인간을 어둠 속에 가둔 채 자유를 앗아가고,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증오를 일으키고 국가간에 전쟁을 일으키던 그러한 지식보다 더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살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와 같은 과거를 끝낼 때가 된 것이다. 인간이 이 지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비천하게 사는 것을 끝내고 자신의 신성함과 존재의 영원함을 깨닫고 살아갈 때가 되었다.

 

이제 곧 그러한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형제인 경이로운 실체들이 위대한 지식을 이 지상에 펼칠 것이다. 그날이 되면 과학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위대한 꽃을 피울 것이다. 이제 다가오는 시대는 하나님의 시대다. 때맞추어 시간의 가치가 서서히 변화하면서 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질병도 고통도 증오도 전쟁도 더 이상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이라든가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오로지 계속되는 생명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일들은 지식과 이해, 그리고 심오한 사랑을 통해서 모든 이들의 삶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신성함을 깨닫는 것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당신들은 그것을 실현하는 씨앗이다. 각자가 자신의 가치와 생명의 영원함을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그것을 하나하나 무한한 사고와 무한한 자유, 무한한 사랑의 의식에 더할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엇을 깨닫게 되든지, 어느 곳에서나 의식을 고양하고 확장한다. 당신이 이해한 바 그대로 살아간다면, 그리고 자신의 뚜렷한 목표를 따라 오로지 그것만을 따라 살아간다면, 지금까지 주변에서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사고방식과 더 위대한 이해, 더 뚜렷한 삶의 가치를 지닌 존재를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는 당신이 지나온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비록 어려운 도전의 시간들일지라도, 이 시대가 당신에게 가져다줄 충족을 얻기 위하여 당신은 이 시간에 이곳에 있기로 선택하였다. 당신들 모두는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오래 전에 약속 받았다. 많은 생을 살았어도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이번 생에 이르러서 당신들 대부분은 진실로 그러한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당신들은 이곳에 위대한 왕국이 일어서는 것을 볼 것이며,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명이 실현될 것이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사랑과 평화, 존재의 기쁨이 우주의 에메랄드이자 하나님의 집인 이 축복 받은 장소를 영광되게 할 것이다.

 

내 말들을 깊이 숙고하라. 이 말들을 당신 존재 안에 허용하라. 이렇게 할 때, 생각이 더해지고, 느낌이 깊어지며, 순간이 이어져, 당신은 당신의 위대함과 당신의 힘과 당신의 영광을 다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람타] 2장. 나는 람타이다 [4p]

 

2. 나는 람타이다

 

나는 정복자 ‘람’이었다. 나는 이제 ‘람’이자 신이다.

나는 야만인이었으되 삼라만상의 가장 단순하고도 근원적인 면을 깨달아

신이 되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다.

 

나는 람타(역주 : 사람의 이름에 ‘타’를 붙이는 것은 인도의 전통이다.)이다. ‘람’이라는 말은 내가 살았던 시대의 고대어로 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힌두인의 위대한 람(역주 : 인도의 고대 서사시 문학으로 『라마야나』가 있으며 이 중에서 『발미키 라마야나』가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람은 왕자로 태어나 영웅적인 삶을 살고 나중에 신이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보서의 람과는 다른 인물이다. 다만, 라마야나 중에서 과거에 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웅적인 인물이 실존했다는 기록이 있다.)이었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으로서 나는 맨 처음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에 이른 인간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초탈하는 법을 터득했다.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하나님은 만물에 살아 있다는 그 심오한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나도 한 인간으로서 증오하고 멸시하고 죽이고 정복했으며 지배했다.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렀다.

 

나는 이 세상에 알려진 최초의 정복자였다. 처음 징벌을 시작한 이후 63년 동안 계속하였고 알려진 전세계의 4분의 3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승리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것을 배우고 난 뒤에, 나는 바람처럼 영원으로 초탈하였다.

 

나는 인더스라 부르는 산의 동북쪽에서 내 백성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초탈하였다. 내 백성은 그때 200만 명을 넘었으며, 레무리아(역주 : 호주의 북쪽 동경 150°부근에서 서경 100°근처까지 걸쳐 태평양상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고대 대륙)인과 이오니아인, 아틀라시아에서 망명해온 종족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아틀라시아는 아틀란티스(역주 : 대서양상에 있었다는 고대의 대륙. 남쪽과 북쪽의 큰 두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자연의 힘을 잘못 사용하여 대양 속에 가라앉았다고 전해진다. 매우 발달된 문명이 있었으며, 멸망할 당시에 남아있던 문명의 일부가 이집트와 중남미에 전해져서 인류 고대문명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남미 브라질은 그때에 바다였으며 이곳을 통하여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 사이에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를 말한다. 지금의 인도와 네팔, 티베트, 그리고 몽고 남부 사람들이 내 백성의 자손들이다.

 

이 지구상에서 나는 단 한 번의 생을 살았다. 지금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35,000년 전의 일이다. 내가 태어났던 곳은 남반 아틀라시아의 가장 큰 항구도시인 오나이의 빈민가였다. 레무리아에서 그곳으로 망명해 온 불행한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대홍수가 아틀라시아 대륙을 삼켜 버리기 전인 '최후의 일백년'이라는 기간중에 나는 아틀라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때에 아틀라시아는 지극히 발달된 문명국이었으며, 과학적인 이해력을 지닌 그들의 이지(理智)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과학은 당신들이 지금껏 축적해 놓은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었다. 아틀라시아인은 빛의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빛을 순수한 에너지로 바꿀 수 있었고, 빛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이 있었다. 다른 항성계에 있는 실체와 상호통신을 하고 그들로부터 발전된 과학을 받아들였다. 아틀라시아인은 기술에 너무 몰입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지를 숭배하였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아틀라시아인의 종교가 되었다.

 

레무리아인들은 아틀라시아인과 많이 달랐다. 그들의 사회체계는 생각으로 통하는 교신에 근거를 두고 세워져 있었다. 기술이 많이 발전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영적으로는 대단히 진보해 있었다. 내 선조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의 저편에 있는, 별들의 저편에 있는 것을 숭배했다. 그들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없는 근본, 즉 미지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힘을 사랑하였다. 레무리아인들이 이러한 하나님만 섬겼기 때문에, 아틀라시아인들은 그들을 멸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하찮게 여겼으므로.

 

 

내가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삶은 매우 힘들고 궁핍했다. 한 순간에 아틀라시아인들은 그들의 기술을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북 아틀라시아에 있던 과학센터가 오래 전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빛으로 이동하는 실험을 하던 중에, 지금 금성의 대기처럼 지구를 두껍게 감싸고 있는 구름막을 뚫어 버리게 되었다. 구름막을 뚫었을 때 많은 물이 쏟아졌고, 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레무리아의 대부분과 아틀라시아의 북쪽 지역이 깊은 대양 밑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하여 레무리아인과 북쪽 아틀라시아인이 아틀라시아의 남쪽으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북쪽에서 기술을 잃어버리게 되자 남쪽의 삶은 점점 원시상태로 되어갔다. 아틀라시아 전체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 일백 년 동안에 아틀라시아 최남단은 폭군들의 지배하에 황폐해졌고, 그들은 무지막지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폭군들의 지긋지긋한 법에 의하면, 레무리아인들은 지구의 오물로 간주되었고 길가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상상을 해보라. 그자들이 침을 뱉고 오줌을 누고 해도, 그것이 눈물로 씻기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그 처지를, 길거리에 다니는 개보다도 더 굶주린 뱃속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무엇이든지 저지를 수 있는 그러한 삶이었다.

 

오나이 대로에서 아이들이 폭행을 당하고 여자들이 구타와 강간을 당하는 일은 예사였다. 아트라시아인이 길에서 굶주린 레무리아인을 지나칠 때면 자스민과 장미향이 묻은 수건으로 코를 잡고 지나갔다. 우리를 냄새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무가치하고 영혼도 없는 이지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간주되었다. 가스나 빛과 같은 것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지적인 소양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한 삶을 안고 내가 이 지상에 태어났다. 그것이 나의 시대였다. 나에게 무슨 꿈이 있었겠는가? 인간의 이지가 오만하고 어리석은 때에 태어나서.

 

내가 내 생부를 모른다고 해서 모친을 욕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부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내 형제들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난했어도 내 모친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나는 모친이 길거리로 끌려나가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약탈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모친이 끌려갔다 오고 나서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친이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 이 '약소의 땅'에서 우리처럼 고통을 받은 아이가 또 있었겠는가?

 

모친은 혼자서 그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누이를 낳는 것을 내가 도왔다. 나는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개를 죽이거나 야생 조수를 잡았으며, 늦은 저녁이면 지주의 집에서 쌀을 훔쳤다. 내 발이 매우 빨랐던 덕분이다. 모친의 배를 채워서 어리디 어린 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게 했다.

 

사랑하는 모친이 죽었어도 내 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내 누이가 모친의 모든 힘을 빨아가 버렸고, 누이마저도 설사를 하면서, 몸에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 생명을 잃었다.

 

나무를 모아 놓고 모친과 누이의 시체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불을 지피기 위해 밤까지 기다렸다. 나는 사랑하는 모친과 누이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장작에 재빠르게 불을 붙였다. 시체타는 냄새가 아틀라시아인들을 방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아틀라시아인들은 시체를 하이에나가 뜯어먹게 사막에 내다버리곤 했다.

 

모친과 누이가 타는 것을 보면서 아틀라시아인에 대한 증오가 내 존재 안에서 끓어올랐다. 그것은 독사의 맹독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화염에서 나는 냄새와 그을음이 계곡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을 때에 우리 민족이 믿는 미지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부당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그 괴물들을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모친과 누이는 그토록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가?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미지의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모친과 누이의 죽음 때문에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를 증오했다!

 

나는 홀로 남았다. 내 다른 동생은 태수에 의해 끌려가 나중에 페르시아라 부르는 땅으로 보내어지고 그곳에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동생은 태수의 즐거움과 아랫도리의 만족을 위해 학대받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열네 살짜리 어린 소년으로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 조상들이 섬겨온 미지의 하나님과 싸우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이 나에게는 죽을 값어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명예롭게 죽기로 했다. 사람 손에 죽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고 여겼다.

 

나는 먼 지평선까지 뻗쳐 있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산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땅을 지배하는 자들이 우리 위에서 군림하는 것처럼 모든 것의 위인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내가 그곳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미지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민족을 부당하게 대우해 온 데 대해 내가 얼마나 그를 증오하는지를 분명히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두막집을 떠나 그 높은 산으로 향하였다. 수많은 날이 걸렸다. 그 동안에 메뚜기와 개미로 배를 채웠다. 그 산에 도착한 뒤에, 구름 위에까지 올라갔다. 미지의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려고 하얀 산정에 올랐다. 그를 부르며 소리쳤다. "나는 인간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가?" 나는 그에게 얼굴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무시했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가슴 깊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하얗게 얼어붙을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내가 위를 쳐다보았을 때, 한 경이로운 여성이 보검을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 람, 영성에 상처입은 이여, 네 기도를 들었다. 이 검을 가지고 너 자신을 정복하거라." 눈 깜짝하는 사이에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나 자신을 정복하라고? 칼날을 돌려서 내 목을 벨 수는 없었다 - 내 팔은 손잡이까지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보검이 영예로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심한 추위에도 떨리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눈물이 흘러내린 곳을 다시 쳐다보았을 때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그것이 희망의 꽃임을 깨달았다.

 

그 보검을 들고 산을 내려왔다. 힌두인들에게 그 날은 람의 기적의 날로 기록되었다. 한 소년이 산에 올라가서, 성인이 되어 내려왔다. 몸이 더 이상 연약하지도 않으며, 모든 면에서 틀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 환한 빛이 주위에 빛나고 몸보다도 더 긴 칼을 들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좀 둔감한 편이었다고 생각된다. 왜 그 경이로운 보검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 칼은 너무나 커서 아홉 손으로 잡아야 칼자루를 다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산에서 내려와 오나이 시로 돌아왔다. 시 외곽의 들판에 한 할머니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기 위하여 눈 위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곧 모든 이가 하던 일을 멈추었고, 지나가던 마차도 섰다. 원숭이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 주위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모두들 감명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농기구를 들고 나를 따라서 도시에 함께 들어왔다.

 

우리 민족에게 먹일 수 있도록 곡물창고를 열라고 내가 요구했을 때 아틀라시아인들은 내 눈에 침을 뱉었고, 그래서 우리는 오나이 시를 멸망시켰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고 아트라시아인들은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전투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백성들에게 곡물창고를 열어 준 다음 아틀라시아인들을 학살하고 오나이 시를 깡그리 태워 버렸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죽거나 사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육과 방화가 끝났지만 깊은 상처는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내 증오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떠나서 깊은 산 속에 은둔하려고 그들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따라왔다. 그들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고, 침을 뱉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람, 람, 람, 람."하며 그들은 소리쳤다. 농기구를 들고 곡식 보따리를 멘 채로 양과 염소를 앞세우고 나를 좇아왔다. 그 사람들에게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왔다. 그들에게는 이제 집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의 집이었다!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그들은 끝내 나를 따라왔으므로 종교가 다른 이 '영혼이 없는' 무리들을 한데 모았다. 그들은 내 군대가 되고 내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훌륭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는 어떠했는가? 군인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람의 위대한 군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 숫자는 만 명을 헤아렸다.

 

그때부터 폭군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돌진하였고, 내 피부색은 더 존경받게 되었다. 공격하고 전투를 벌인 모든 곳에서, 우리가 지나간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찾았고, 내 군대는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리하여 람과 그 군대의 전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나는 폭정을 일삼는 인간들을 경멸하는 야만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간을 증오했고, 그래서 죽기를 바라면서 싸웠다. 백성들은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저 명예롭게 죽고 싶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증오만 있을 따름이었다.

 

당신이 책임을 맡아 앞장을 섰는데 주위에 원군이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미쳐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은 증오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처럼, 내가 바로 적에게 목이 잘려질 구경거리가 될 판이었다(그들이 나에게 이런 명예를 베풀어 준다면). 내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하여 가장 강한 적을 골랐다. 그러나 아는가, 두려움이 없으면 곧바로 정복을 눈앞에 두게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위대한 정복자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정복자 따위는 없었다. 오직 폭군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나는 세상에 알려진 첫 번째 정복자였다. 그때까지 오만한 아틀라시아인들에 대항해서 전쟁을 일으킨 무리들은 없었다. 분노와 정의, 그리고 나 자신이 느끼기에 영예롭게 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소위 사람들이 일컫는 위대한 실체가 되었다. 영웅이란 어떤 이인가? 내가 그 중 하나였다. 영웅이란 생명을 구하고 잘못을 없애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이다. 나는 폭군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했다. 결국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바로 그것이 되었다.

 

나는 무지한 실체였으며,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운 자였다. 징벌을 하고 다닌 수십 년 동안 죄 없는 이들과 전쟁을 하고, 목을 베고, 방화를 하면서 여러 대륙을 건너 다녔다. 그러던 중 긴 칼이 내 몸을 관통하였다. 그 칼이 내 몸에 박혀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끝났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내가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꽂힌 칼을 빼냈다.

 

나는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티없이 눈처럼 하얀 대리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대리석은 매끈하여 아무런 틈도 없는 것 같았다. 붉은 핏물이 강물처럼 흐르다가 대리석 사이에 있는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차가운 대리석 위에 누운 채로 생명의 강물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일어나라!" 또 들렸다. "일어나라!"

 

머리를 끌어올리고 손을 바닥에 댔다. 무릎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였다. 몸을 들어올리면서 머리를 곧바로 세우고 왼쪽 발을 끌어당겨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전신의 힘을 다해 손을 무릎에 얹고 주먹으로 상처를 막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상처에서 내뿜는 피가 무릎으로 흘러내리는 채로 내가 일어서 있자, 그때 나를 찌른 자는 내가 불사신이라고 확신하고 도망가 버렸다. 내 군대는 그 도시를 공격하고 깡그리 태워 버렸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죽지 않게 해준 그 소리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나는 그 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정벌중이었지만 나는 치료받기 위하여 여성들만이 있는 안뜰에 머물게 되었다. 정말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경험은 없을 것이다. 그 여자들이 나를 돌보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눈앞에서 내 옷이 모두 벗겨져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오줌도 똥도 눌 수가 없었고 그들의 보살펴 주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독수리 기름을 묻힌 찐득찐득한 습포를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로 견디어야 했다(지금도 그 독수리 기름이 나를 치료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에 숨을 쉴 때마다 온 몸이 몹시 뒤틀려서, 목숨을 지탱해 주기는 했다). 치료받고 있는 동안 내 자존심과 증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상처가 너무 심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나는 한 노파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엉성하게 짠 천을 움켜쥔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아들은 오래 전에 죽었다. 그 노파가 햇살 아래에서 오그라들면서 그녀의 입은 무엇인가에 놀란 것같이 벌여졌고, 그녀의 눈은 대낮인데도 빛났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풍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잠깐 움직였다.

 

사라져 버린 그녀와 그 아들의 고귀한 지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노파가 오두막집에서 태어날 때도 있었으며 그녀가 마지막 떠날 때도 있었던 바로 그 태양이다.

 

다시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죽은 것은 쉽게 잊혀질 것이다. 내 백성들이 노파를 강가의 미루나무 아래에 묻을 때에도 태양을 쳐다보았다.

 

그날 저녁 해가 지자 나는 태양을 저주하였다. 다음날 태양이 빨갛게 빛나는 보석처럼 붉은 눈을 하고 산정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붉게 물든 산과 안개 속에 묻힌 계곡을 쳐다보고 태양의 빛줄기가 모든 것을 황금빛으로 수놓으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해 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파랗게 창백했던 구름을 선홍색으로, 붉은 장밋빛으로, 핑크색으로 물들이면서 생생한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이 산을 넘어가는 동안에도 쳐다보았다. 지평선을 이빨로 뜯어버린 것처럼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잔영을 내뿜다가 스며드는 어둠에 길을 내주고 있었다. 바로 위에서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하늘 귀퉁이에서 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미풍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만지며 눈물을 말려 주었고, 나는 내면에서 커다란 아픔을 느꼈다.

 

그때 나는 훌륭한 전사였다. 순식간에 칼로 사람의 몸을 두 동강 낼 수 있었다. 목을 자르고 몸뚱이를 베어 조각을 냈다. 피 냄새를 맡으며 사람을 불태웠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러한 짓들을 했던가? 태양은 황홀한 아름다움을 빛내며 진다. 여전히 새들은 하늘에서 지저귀고, 달은 또다시 떠오른다.

 

이때부터 나는 미지의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진실로 원한 것은 예사롭지 않으면서, 신비롭고, 인간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보이지 않는 근본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인간은 태양보다 위대하지 않은가? 왜 그 노파는 죽어야 했는가? 인간은 이 지상에 그렇게 많은 수가 있고, 창조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왜 피조물 중에 가장 약한 것일까? 우리 민족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그가 죽을 때 태양이 잠시 서서 슬퍼하지도 않는가? 달은 붉게 변하지 않는가? 왜 새들은 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가? 인간은 전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죽어가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나는 알고 싶었다.

 

나에게는 미지의 하나님을 가르쳐 줄 스승이 없었다. 나는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악함을 많이 보았고 또 그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다. 인간이 인간을 멸시하고 마치 그에게 영혼이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도 보았다. 순진한 이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보았고 두려움 때문에 탈진하는 이들도 보았다. 변태적인 영혼을 가진 이들이 노예들의 거주지에서 어린애를 발가벗겨 훑어보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이 강간하던 순간의 어린애를 기념할 수 있도록 사춘기의 털을 뽑아서 모아 놓는 것도 보았다. 성직자와 예언자라는 이들이 인간에 대한 증오 때문에 지독한 고문도구와 추악한 창조물을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으로 종교를 빙자한 계율을 만들어 인간을 다스리고 노예화했다.

 

내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살아 있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도 변형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순수하고 순진한 생각을 가졌다고 해도 자신의 제한된 이해수준으로 그것을 변형시켜 버렸다. 나는 인간의 이해수준에서 창조한 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면 그 신도 또한 잘못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미지의 하나님을 가르친 것은 생명의 여러 요소들이었다. 흘러가는 낮에게서 배우고 밤에게서 배웠다. 파괴와 전쟁에도 아랑곳없이 아직 건재해 있는 약하고 하찮은 생명에게서 배웠다.

 

지평선에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을 생각했다. 천상을 지나가면서 서쪽 하늘에 다다르고 그리고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비록 아무 말이 없으나 드러나지 않게 생명을 보살피고 있음을 알았다. 서로 싸우던 사람들도 해가 지면 멈추기 마련이었다.

 

창백한 빛을 발하는 달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가로지르면서 춤을 추고 신비하고 경이롭게 밤을 밝히는 것을 보았다. 천막에서 나오는 불빛이 어떻게 밤하늘을 밝히는지 보았다. 물새가 물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새들이 밤에 자기네 둥지로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들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밤새가 날아오르는 것과 잎사귀에 매달린 이슬도 보았다. 은빛 눈으로 덮여 또 다른 세상을 연출하는 호수도 보았다. 여자들이 강물에 서서 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을 보았으며 옷을 무릎까지 걷어 올려 백설처럼 하얀 무릎을 드러내 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여자들이 재담거리를 가지고 소란스럽게 수다 떨며 장난치고 웃는 소리도 들었다. 먼 곳에서 흘러 들어오는 불에서 나는 연기, 남자들이 숨을 쉴 때 뿜어져 나오는 마늘과 술 냄새를 맡기도 했다.

 

미지의 하나님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내가 알게 된 것은 생명을 관찰하고 그 지속성을 깊이 생각했을 때였다. 미지의 하나님은 변형된 사고를 가진 인간이 창조한 그러한 신은 아닐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인간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은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가장 존경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자로 꾸며 냈다는 것을 알았다. 진실한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환영을 만들어 내고 실연해 볼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인간이 다시 돌아와도 그곳에 다시 봄이 오게 하고 생명이 솟아나게 하는 지속적인 근원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지의 하나님은 진실로 생명력과 지속성에 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지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밤에 둥지에 앉아 있는 새이고 잎사귀에 매달린 이슬이며, 새벽이며 저녁노을이었다. 그것은 태양이고 달이며 아이들이고 그 웃음소리이며, 백설같이 하얀 무릎이고 흐르는 물이며 마늘과 가죽, 청동 냄새였다. 그것들이 모두 내 앞에 있어 왔던 것이지만 이렇게 이해하기까지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미지의 하나님은 달이나 태양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추론에 따라서 나는 생명을 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었다. 피보다 죽음보다 전쟁의 악취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과는 다른 위대한 것이 있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하여, 나중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인간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 인간이 죽어가도 태양이 영속하는 유일한 이유는 태양은 죽음을 전혀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양이 아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미지의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며 깨달아 가고 있을 때, 그 노파의 죽음처럼 시들지도 말고 죽지 않기를 바랐다. 태양처럼 지속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 몸의 심한 상처가 거의 나을 즈음에도 할 일은 거의 없이 그저 평지에 앉아 내 군사들이 비대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지평선을 쳐다보면서 산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때 미지의 하나님 곧 생명력이 되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지속되는 이 본질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것일까?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것은 어떤 내 무기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길고 무거운 내 외투를 날리더니 내 머리 위에다 뒤집어 씌웠다. 정복자에게 명예롭지 못한 대우였다! 그 바람은 붉은 먼지를 일으켜 내 옆에서 기둥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저 하늘 높이까지 세웠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에 바람은 잦아들고 그 먼지는 내 위로 수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바람은 소리를 내면서 계곡으로 내려가서 흐르는 강물을 지나 올리브 과수원을 거쳐 에메랄드 색의 나뭇잎을 은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름다운 여인네의 치맛자락을 허리위로 걷어 올리더니 킬킬거리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조그만 어린애의 모자를 벗겨서 날려 버리자 그 애는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좇아가고 있었다.

 

나는 바람에게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으나, 그 바람은 계곡에서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나는 고함을 지르느라고 얼굴이 퍼렇게 되어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바람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것은 자유였다!

 

나의 이상으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바람을 관찰하면서 바람 이상의 놀라운 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았다. 바람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바람이 화를 내고 당신한테 오면 당신은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리 위대하고 힘이 있다 해도 바람에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긴 칼로 둘로 나누겠는가?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그랬다면 당신 얼굴에 되돌려줄 뿐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처럼 자유로운 움직임과 힘을 가질 수 없는가?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도 잡을 수도 없고, 한 순간에 여러 곳에 있으면서 또 인간처럼 죽지도 않는 이러한 능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나에게 바람은 궁극적인 본질이었다. 왜냐하면 바람은 영속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어디든지 스며드니까. 경계도 없고 형태도 없으니까. 마술 같고, 탐구적이며 모험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실로, 생명의 하나님 본성에 가장 가깝다. 바람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 바람은 결코 인간을 용서하지도 않는다. 부르기만 하면, 바람은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사랑으로. 내 이상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바람을 수년 동안 숙고하였다. 그것이 내 이상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내 모든 생각이 그렇게 되는 것에만 모아졌다. 바람을 생각하였다. 그처럼 붙잡을 수 없고, 가벼우며, 분명하게 윤곽을 그릴 수도 없는 것에 나를 조율해 갔다. 바람이 되는 것을 숙고함에 따라 그 바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맨 처음 그 일이 일어난 것은 6년 동안이나 몰입하고 난 후였다. 그때 나는 매일 저녁 아무도 없는 장소에 앉아 창백한 달을 쳐다보면서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어느 날 나는 바람처럼 하늘 높이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다음 순간에 지상에 앉아 있는 내 몸이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을 내려다보았을 때, 내가 빠져 나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비로소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이 나를 다시 몸으로 데려갔다.

 

눈을 떴을 때, 내 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딴 곳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낙원에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칭송하였다. 하나님은 근원이자 힘이고, 원인이며, 바람이라고. 내가 바람이 갖는 우아함과 아름다움, 풍요로운 생명이 되었던 놀라운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비전을 항상 분명하게 마음속에 간직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저녁에 그 바위에 앉아 황홀한 기쁨에 잠기면서 바람을 숙고하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또 시도해 보고 또 시도해 보았으나 허탕이었다. 예전의 그 경험이 내 상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분명히 다른 조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둘기나 독수리처럼 공중에 있으면서 저 밑에 있는 내 신체를 내려다보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그 자유를 얻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리 많은 땀을 흘려도(그로 인해 아무리 저주를 퍼부어도),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첫 경험 후에 이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바람이 되었다. 이번엔 바람을 숙고하여 된 것이 아니라 편하게 잠자는 중에 일어났다. 잠자기 전에 나는 태양, 생명, 붉은 먼지, 달, 별, 자스민의 향기, 그 모든 근원을 칭송하였다!

 

점점 신체를 떠나는 능력을 완전하게 다듬어 갔다.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공간이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내 부하 한 사람이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말안장에 발이 끼인 채 말에서 떨어졌다. 내 생각이 그에게 미치자 나는 이미 그와 함께 있었다. 그의 발을 빼내 주고, 그를 내려다보며 그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본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순간이동으로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였다. 생각이 있는 곳이면 그 생각하는 주체도 거기에 있게 되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정복하는 법이 달라졌다. 나는 두려운 적이 되었다. 내 적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알고 그 의표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제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생각으로 여러 왕국을 여행하고 여러 실체들을 만났다. 미래에 태어날 문명을 둘러보고 아직은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을 만났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이상으로 삼은 생각은 천천히 내 몸에서 생명력이 되었다. 내 영혼은 점점 모든 세포 내부의 진동률을 증가시켰다. 내 욕구가 그만큼 강했다! 점점 더 나를 바람에 일치시켜 가자, 그 느낌은 내 전체 육체 배열에 더욱더 분명히 실려졌다. 나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말했다. "아! 마스터의 주위에 광채가 빛난다." 사실이 그러하였다! 내 몸은 더 빠르게 진동하였기 떄문이다. 물질의 속도에서 빛의 속도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육체는 달빛처럼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달빛이 되었다! 더 이상 생각만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체의 진동을 빛의 수준까지 올려놓았으므로 내 신체 전체를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기쁘고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이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을 성취하였다. 나는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시 또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했다. 최종 초탈에 이르기까지 63회나 반복해 보았다.

 

바람이 되고 나서, 내가 얼마나 한계 안에 있었는지 또 원소들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깨닫게 되었다. 길들여지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게도 없고, 수단도 필요하지 않으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그러한 자유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근원이 되었다. 형태도 갖지 않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맥동(脈動)하는 빛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크고 작은 골짜기, 산맥과 바다, 강물을 건너다니면서 여행하였지만 아무도 나를 보지는 못했다. 또 바람처럼 나뭇잎을 에메랄드색에서 은색으로 바꾸고, 움직이지 않는 나무를 흔들 수 있었고 어린이의 허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구름위로 올라가 구름을 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바람이 되자 무게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시간에 얽매이지도 않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갖게 되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바람이 되자 자신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란 얼마나 왜소하고 무기력한지 알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지식을 확장한다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오랫동안 자기가 비천하고 힘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비천하고 힘이 없게 된다. 나 자신이 바람의 주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바람의 주인이 된 것처럼 자신이 바람의 주인이라 여긴다면 그들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터득하고 나서 오랫동안 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미지의 하나님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노인이 되고, 나라는 존재가 성취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성취한 날이 왔다. 인더스 산 근처에 있는 인더스 강을 건너서 여행을 했으며, 내 백성들과 일백이십 년간을 함께 살았다. 그들에게 내 가르침은 진실이고 신성한 안내를 담당하는 이는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라 우리 모두를 창조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것을 강조했다. 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약간 멋을 부리면서 나 자신의 몸을 그들 위로 띄워 올렸다. 그들은 놀랐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기겁을 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가지고 있던 넓은 칼을 떨어뜨렸다. 그들 모두에게 하직을 하며, 내가 배운 것을 배우고, 내가 이룬 것을 그들 자신이 스스로 이루라고 격려했다… 각자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생명 요소들이 인간보다 더 힘이 있고, 인간보다 더 지성이 있으며, 인간과 함께 있으면서도 인간에 상관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숙고하면서 나는 미지의 하나님을 발견했다.

 

만약에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다른 이에게 묻는다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가서 바람에게 요구하라. "지식을 내어놓아라, 바람이여. 나를 열어서 알게 하라." 그러면 바람은 올리브 나무를 은색으로 바꾸면서, 당신을 계곡 밑으로 데려가, 호탕하게 자유를 즐기며, 당신과 함께 껄껄 웃을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생명의 요소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태양은 나를 저주하지 않았고, 달은 나에게 정해진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훌륭한 점은 단순성과 항상성으로 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태양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람타,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섬겨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달이 또 아래를 내려다보며, "람타, 일어나라! 내 아름다움을 올려다 볼 때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쳐다 볼 때마다 그들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는 것에게서 있는 그대로를 판단하지 않고 배웠다. 인간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뒤틀린 생각을 가진 이들의 위선과 도그마, 미신에 놀아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을 이 지상에 한 번 살았으면서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교회의 계율에서, 누가 왜 썼는지도 모르는 서적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한다. 여러 생을 거치면서 실패라고 증명된 것을 인간은 자신의 믿음과 이해 - 자기 삶의 토대 - 로 삼고 있다. 아직도 인간은 자신의 뒤틀린 생각으로 자기 오만의 덫에 걸려 있고, 오직 죽음에 이르는 위선을 계속하고 있다.

 

초탈을 하고 난 뒤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모두 알았다. 나는 육신의 밀도 밖으로 나와 생각의 유연함 속에 있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인간의 근본은 진정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초탈하기 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알지 못했고, 육신을 초탈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나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것을 배웠다. 나는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였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생명과 천상에서 본 경이로움을 포용하였다. 내 삶은 그러하였다.

 

나를 바람의 힘이나 그 위용에 일치시켜 나가면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게 되고 나 자신에게만 초점을 모았을 때, 내 삶은 충족되었다. 이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더 많이 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바람이 된 것은 아니다. 바람이 나한테 의미하는 이상(理想)이 된 것이다. 나는 그 바람의 주인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원리로서 자유롭고, 어디에나 존재하며, 모든 생명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원리가 되고 나서 미지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확장하여 더 많이 이해하게 해주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나는 내 안에서 찾았다.

 

나는 정복자 람이었다. 나는 이제 람이자 신이다. 나는 야만인이었으되,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면을 깨달아 하나님이 되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다.

 

 

 

[람타] 3장. 당신들이 내 백성이었을 때 [14p]

 

3. 당신들이 내 백성이었을 때

 

 

숭배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숭배한다면 일생 동안

다른 이의 정체성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오래 전, 당신들 중에 많은 이들이 내 백성이었을 때, 우리는 다함께 광활한 대륙을 건너다니며 악명 높은 폭군들을 공격하였다. 격심한 전투를 치르고, 격랑과 폭풍우를 뚫고 장거리 원정을 하며,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을 돌아다닌 끝에, 당신들은 모두 함께 자유라는 보상을 얻었다. 행군 끝에 얻어진 자유, 그것은 온갖 종류의 위협을 겪고 마침내 살아서 새로운 고향에 안착하였기에 누리는 자유였다. 그곳에 다다랐을 때, 당신들은 참으로 용맹하였지만 너무나 지쳐 있었기에, 거기서 가정을 이루고 씨를 뿌리고 양식을 거두며 아이와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 평화야말로 가장 큰 두려움을 정복한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정 끝에 당신들이 얻은 것은 그 험난한 여정에 걸맞는 것이었다. 고향을 멀리 떠나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당신들을 떠나려 할 즈음에, 당신들은 농사를 짓고, 자식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거주할 집을 짓고, 땅을 일구며, 좋은 음식과 상쾌한 아침, 평화로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이 당신들의 운명이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들에게 주어진 보상이었다.

 

당신들은 새로운 삶을 꾸리기 시작하였고, 나는 내 삶을 찾아서 떠날 때가 되었다. 당신들이 평화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에게 꽤 흡족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고자 한 곳, 내 고향은 위대하면서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하나님, 곧 삼라만상이 생기게 한 장엄한 미스터리였던 것이었다.

 

내가 떠나는 날은 경이롭고 호화로웠으나 영원히 떠나 버리는 이별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는 내 하나님에게로 갔다. 내 전 생애에 걸쳐 찾았고 마침내 경이로운 이해의 차원에서 발견하게 된 그 하나님에게로.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 - 나는 그것 이외에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들 각자는 계속 이 지상으로 돌아와 살았다.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또 다음 생으로. 그리고 그러한 삶을 반복하면서 당신들은 많은 것을 이해하고 진보하였다. 이제 당신들 중 많은 이들이 알고 싶어한다. 이제 당신들은 내가 그토록 찾고자 했고, 그리하여 발견할 수 있었던 이해를 찾아 나섰다. 당신들은 가정을 가져 보았다. 귀한 자손을 세상에 남겼다. 그 모든 것을 배웠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보았다. 이제 당신들은 지금까지 배우지 못했던 것을 배울 준비가 되었다. 당신들의 우선 순위가 그때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들과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아주 오래 전에 내가 한 약속대로, 당신들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훌륭한 스승으로서 당신들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옳다고 느끼는 것만 하기 바란다. 그것뿐이다.

 

나는 저편의 경이로움을 가르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그것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돌아왔다 - 철학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신성 근본으로 되돌아가라고 당신의 내면에서부터 당신의 영혼이 재촉하는 그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당신이 지금과 같은 형상을 가진 인류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신성함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신성함을 깨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당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간의 위대함과 영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법을, 내 자신을 가르쳤던 것처럼, 내 존재의 힘으로 당신들을 가르칠 것이다. 당신들이 기뻐할 때, 나는 함께 웃을 것이며, 당신들이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말려 줄 바람을 보낼 것이다.

 

이 가르침을 통해, 당신은 멋진 여행을 시작하고 당신의 본 모습인 영광스러운 독존적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당신 내면의 목소리만을 듣고 오직 기쁨의 길만을 따라가는 것을 배울 것이다. 가슴 깊이 느끼는 법을 배워, 이 세상의 가장 진실한 보배인, 감성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 자신을 한없이 사랑함으로써, 당신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든지 상관없이, 당신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발견했던 것처럼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가슴 깊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스스로를 지극히 설득력 있게 가르쳤던 당신은 이 세상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될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자기 사랑의 훌륭한 모범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결코 종교적인 내용이 아니다. 종교란 교리가 있고, 구속하며, 비판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다. 종교는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많은 해악을 가져왔다. 이 가르침은 그저 지식을 뿐이다. 이것은 배움이고, 경험이며, 사랑이다. 나는 사랑으로 당신이 하나님을 깨치고, 하나님처럼 무한한 존재가 되어 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 가르침에 법칙은 없다. 아무런 법이 없다. 법이란 것은 자유를 구속하는 제약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오직 하나님과 그의 다양한 면들에 대해서만 가르칠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당신이 깨달을 수 있도록 지고한 지식의 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그리하여 당신은 당신 생명이 이 세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다른 세상에도 존재하고, 여러 다른 곳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을 도와주러 여기에 왔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당신이, 무한한 생각과 무한한 목표, 무한한 생명에 대해 가르쳐 줄 새로운 전망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지금은 당신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만큼, 살아가고자 원하는 만큼 가르쳐 줄 것이다. 갇혀 있는 당신이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위대함을 깨치도록 이끌어 주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신의 내면에 있는 내면의 등불이라고 하는 그것에 불을 밝혀 빛을 발하게 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 자신이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대부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자신을 재발견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겠다. 일단 찾기만 한다면, 당신은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아무도 당신을 가르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진실에 바탕을 둔 독존적 존재이며, 당신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존재다.

 

나는 한때 내 딸이었던 여성의 몸을 빌어 당신들에게 다가가기로 하였다. 내가 이 지상에 있었을 때에는 어느 여성과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원정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자식을 감사의 선물로 나에게 주었다. 치즈 제조업자는 치즈를, 창조업자는 술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정벌중에 자식을 낳은 이들은 그들을 내 집에 보내주었다. 한 여성과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많은 자식들을 데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나에게 큰 스승이었다. 영성이 순진하고 순수한 그들은 매우 단순한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내 딸은 그러한 아이들 중에 하나였다. 나는 이 아이를 무척 사랑하였다. 이 어린아이는 가녀린 소녀로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았다. 뜨개질 같은 여성스러운 일을 맡는 것은 그녀에게 탐탁치가 않았다. 그녀는 전사가 되고 싶어했다. 오랜 세월이 흐를 때까지 전쟁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배움만을 원했다. 나는 그런 점을 존중했다.

 

내가 초탈하는 날 나는 내 딸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내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투르크라는 땅으로 가라고 했으며, 그녀는 그곳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내 딸은 한 많은 생을 살았다. 태워진 적도 있었으며, 머리가 잘려 나간 적도 있었고 진실을 얻기 위하여 굶주린 적도 있었다. 그러한 생을 겪으면서 그녀는 고귀한 인품으로 바뀌었고,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겸손한 성품 때문에 나는 그녀를 통해서 그녀와 당신들이 오래 전에 잊어 버렸던 유산을 다시 깨우쳐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세상에 바치는 헌신이다. 그녀와 당신들에게 나는 이제 내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에, 나는 그녀의 생의 한가운데로 다가갔다. 그녀는 얌전하고 예의 바르며 순진했지만 특정한 믿음 같은 것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가르치기 위한 매개체로 그녀를 선택하였다. 지금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오랫동안 그녀에게 먼저 가르쳤다. 지식과 배움을 통하여 우리는 함께 이 일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이 지식이 하나씩 자라도록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방법을 택하여 당신들에게 말하려고 한다. 당신들은 남의 형체를 본떠서 그것을 숭배하고 자신들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이라고 찬양이나 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청중으로서 여기에 온 이들에게는 나를 숭배하기 위한 내 몸체도 없고 엎드려 입맞출 발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딸은 당신들이 그녀의 몸에 그러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를 떠나면 당신들은 내 형상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을 것이고, 목에 걸거나, 벽에 걸거나, 또는 돌에 조각해 놓을 내 사진도 없을 것이다. 내 가르침은 나를 숭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 본래 모습을, 당신 안에 잠재해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경이로운 근본을 전적으로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보이는 이나 보이지 않는 이나 당신보다 위대한 이는 없다. 그리고 또 당신보다 못한 이도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평등할 따름이다.

 

당신들 중에서, 누군가를 따른다든지 숭배하고 싶은 이들이나, 자신의 내면보다는 외면의 것에 대해 내가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나는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진실과 당신의 이해를 주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당신이 자신의 외적인 무엇을 숭배하고 그것에 몰두하는 한, 당신은 결코 당신 본래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당신 자신만이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 있다. 당신 자신만이 당신의 가장 위대한 친구이자 스승이 될 수 있다. 당신 내면의 목소리보다 더 당신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소리는 없다. 당신 자신의 말보다 더 당신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말은 없다. 현재의 당신 모습이 당신이 원했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 이외의 누군가를 숭배하려 하거나 따라야 할 길이라 여긴다면, 진실로 당신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 오직 당신 자신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사랑으로, 당신은 자신의 신성과 깨달음, 자아실현을 성취할 수 있다. 삶에서 평화와 행복, 완성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당신 자신을 숭배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니까 - 또한 그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인류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랑과 강인함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람타는 당신의 이상이 될 만한 좋은 표준이 되지 못한다. 결코 당신은 나를 통해서 당신 자아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오로지 지식으로서만 가능하다. 이 가르침의 목적은 미지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당신들에게 지식과 경험을 통해 확고한 앎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지의 하나님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것이 당신이 가야 할 길이다 - 그리고 그 길은 당신 홀로 가는 길이다 - 왜냐하면 당신 자신의 삶이자 당신 혼자만의 삶이기 때문이다. 스승으로서 나는 훌륭하다. 그러나 이상으로서 나는 바람직하지 않다. 당신이 여기까지 와서 이 가르침에 이르렀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기뻐한다. 그러나 결코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무엇을 가르치든, 당신이 무엇을 배우든, 당신의 삶에 발현되게 하라. 그때 당신은 당신이 이곳에서 배운 것이 철학이 아니라 장엄한 현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발현될 때마다 당신은 자라고 점점 더 강해지고 빛나고 더 고요해지고 단순해질 것이다. 이러한 단순함 가운데에서, 당신은 나에게 불어왔던 그 바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힘과 그 근원은 당신을 향상시킬 것이다.

 

당신은 모두 지배받던 실체들이다. 당신을 지배해 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당신은 항상 그래 왔다. 지식으로 당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제 다른 사람의 욕구에 구속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만의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지식을 가질 때, 당신은 언제나 자유로울 것이다. 언제나! 이 가르침을 더 많이 숙고하고, 적용하고, 경험할수록, 당신은 더 자유롭고 즐겁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이 생에서일 수도 있고 다음 생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이미 다 가져 보았으므로, 이 시장터가 더 이상 자신에게 제공할 것이 없을 때, 위대한 공허, 위대한 이끌림, 전체가 되고 싶다는 위대한 소망만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당신도 그 고원에서 일어났던 모든 순간들을 고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바람은 머리칼을 끌어올리는 강한 손가락이 되고, 새들은 둥지를 떠나 멀리 날아오르며, 태양은 밝게 빛을 내면서 황금빛 서광으로 하늘 위를 수놓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될 때 - 그것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일 테니까 - 나 람이 먼저 가 있는 곳에서 당신을 환영할 것이다. 지식이라고 하는 자유로 통하는 문은, 더 위대한 이해를 향해 자신의 사고방식을 개방하고, 그 이해를 따라 살아가게 될 - 당신 밖에서가 아니라, 당신 안에서 - 당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렇게 살고 나면, 당신은 이곳에서의 삶을 끝낸다. 그때 당신은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날 것이다. 이곳을 지나서 이어지는 모험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웅대하고 극적인 것이다. 빛 속의 당신은 유연하게 우주 밖이든 우주 안이든 가리지 않고 원하는 곳은 다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가슴 깊이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에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당신은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진실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그리하여 당신은 자신이 진정 위대한 존재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날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다.

 

 

 

[람타] 4장. 하나님은 누구인가 [18p]

 

4.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당신이 겪어 본 그 어느 사람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으로

당신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인 생명이며,

당신이 걸어다니고 있는 이 땅이고, 당신이 숨쉬는 공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여,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근본은 어둠침침하고, 두렵고, 심판하는 이라고 배워 왔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다. 따지고, 심판하며, 벌을 내리는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만 존재해 왔다. 어떤 이에게는 심판을 내리고, 또 다른 이는 추켜세우는 그러한 하나님을 창조한 이는 인간이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한 하나님이고, 인간의 피조물이며, 인간 의지의 산물일 따름이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나와 내 왕국에서 흘러나오는 힘이기도 한 하나님은, 완전하며 심판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겪어 본 그 어느 사랑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으로 당신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인 생명이며, 당신이 걸어다니고 있는 이 땅이고, 당신이 숨쉬는 공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부색이고, 아름다운 눈이며, 부드러운 감촉이다. 당신이 존재하는 모든 순간, 당신이 하는 모든 생각, 당신의 모든 행동, 심지어는 당신 영혼의 그림자에서조차도, 하나님이 바로 당신이다.

 

하나님은 전부이면서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힘이다. 물 위를 스쳐 가는 바람이고, 색깔이 달라지는 잎사귀이며, 그윽한 색조를 띤 한 송이 장미의 청순함이다. 부둥켜안은 연인이고, 깔깔대는 어린 아이들이며, 머리카락의 빛나는 윤기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고, 밤에 반짝이는 별이며, 밤 사이 뜨고 지는 달이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곤충이고, 날아다니는 조그만 새이며, 못생긴 고약한 벌레이다. 하나님은 움직임이자, 색깔이며, 소리이자, 빛이다. 하나님은 정열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기쁨이다. 하나님은 슬픔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일컫는, 생명 전체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이다.

 

하나님은 왕좌에 앉아 전체 생명을 심판하는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매순간 맥동하는 전체 생명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지속성이자, 영원성이다.

 

당신은 자신이 그에 의해 심판을 받아 왔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당신 자신인 하나님이 당신 또는 다른 누구를 심판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그 자신을 심판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지고의 지성이 그렇게 하겠는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생명력은 당신을 심판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생명은 자신을 선과 악, 옳고 그름,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 나누어 버리는 에고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원래부터, 선이나 악이라고는 전혀 없다. 긍정이나 부정도 전혀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완전이라는 것은, 지속적이고 늘 변화하며 왕성한 생명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저 존재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이 할 줄 아는 단 한 가지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인 생명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은 그릇됨을 모른다. 그는 자신만을 알 따름이다. 하나님은 실패를 모른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됨을 볼 따름이다. 당신은 생명을 꽃 피우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을 가치 없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결코 이 둘에서 낫고 못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그가 그렇게 해주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가 정말 인간이 창조한 그러한 신이라면, '진주의 문'(역주 : 천국)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한 그러한 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한량없고 지고한 존재이며, 있음의 나누어지지 않는 전체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러한 있음은 항상 당신이었고, 당신이 신성하고 탐구적인 당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생명의 무대였다. 그가 당신들 모두에게 독자적인 에고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인지하고 싶은 대로 하나님 자신인 생명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했던 일이 무엇이든지,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든지, 당신이 그것을 아무리 가치 없거나 비천하거나 훌륭하다고 인지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존재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간주한 적이 없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태도에 따라 그리고 남의 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당신 자신을 심판해 왔다. 당신만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결정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면이 전혀 없다. 삼라만상은 그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있음의 일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제까지 상상해 본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크고 더 깊이 당신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원하는 그대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해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 왔다. 그는 당신들을 인지하는 방법을 모른다. 당신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고상한 형태로서의 하나님은 무엇인가? 생각이다. 하나님은 크게 본다면 생각이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존재했던 모든 것, 존재할 모든 것의 궁극적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모든 것이 창조되는 바탕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맨 처음 생각에서 나왔고, 생각은 하나님 마음이라고 하는 지고의 지성이다.

 

만물을 결속하여 일정한 형태와 틀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해 보았는가? 그것은 생각이자, 사랑이라고 하는 '우주의 끈끈이'이다. 생각은 모든 물질을 결속하는 것이다. 가장 큰 규모로 볼 때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삼라만상은 생각 - 바로 하나님 - 에 의해 상상되어졌고, 만물을 제자리에 있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인 생각에 대한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당신 몸조차도, 하나님에 의해서 결속되어 있다. 몸을 구성하는 모든 분자와 세포 구조를 다같이 엮어 어울리게 하는 것은 위대하고 장엄한 생각 - 진정한 하나님 - 의 사랑이다. 생각이 없다면, 당신의 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물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전체 생명의 창조자이자 그것을 지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결속하는 생각, 즉 하나님을 음울하고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완전한 기쁨이다. 그는 달리 존재하는 법을 모른다. 그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진동하는 생명형태이다. 그 진동에 의해 커다란 웃음소리 같은 음향이 퍼져 나오게 된다. 당신이 귀기울여 듣는다면, 하나님의 음악 소리, 그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것은 지극히 즐거운 일이다. 나는 그가 흐느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라는 소중한 존재의 근원이자, 당신들 사이를 넘나들고, 당신들을 하나로 이어 주며, 이후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영원에 대한 약속이기도 한 경이로운 생명력인 하나님은 무엇인가? 이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생각이라는 있음이다. 영속되는 생명의 있음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있음이고, 생명이 사랑으로 엮어져 나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있음이다. 그것은 또 완전한 기쁨인 있음이다. 그것은 당신의 유산이자 - 당신의 운명이다.

 

 

마스터 (역주 : 람타는 청중으로 참여한 이들을 마스터라 불렀다.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고, 자기 생명의 설계자이며, 자기 왕국의 군주이기 때문이다) : 당신은 하나님을 모든 생명의 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 이외에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생명력인 지성을 말하였다. 그리고 왜 '그(he)'나 '아버지(Father)'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남성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거부감을 좀 느끼게 한다.

 

람타 : 전체 인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연계하기 위해서 있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비록 이러한 '있음'을 아버지라는 용어로 언급하였고 그리하여 남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버지 하나님은 결코 남성이 아니다. 그러나 남성은 하나님이다. 하지만 여성도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로,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성적 구별은 없다. 이는 '지고한 지성'을 뜻한다. '있음'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지고의 지성'을 이해 못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필요하다.

 

마스터, 누군가가 ‘하나님은 남성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의 진실이다. 어떤 여성들이 하나님을 남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분개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의 진실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대로 그렇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각 개인마다 다르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살아 있는 느낌이다. 하나님을 인식할 때 제한을 받지 않을수록,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감성을 더 많이 감싸안게 되면서 그 느낌은 더 커지고 기쁨이 넘칠 것이다.

 

 

람타 :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이든 여성에게) 은색 마차에 앉아 있는 사랑스런 여인이여, 어떠신가?

 

여성 :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죽는 것이 두렵다.

 

람타 : 왜 그런가?

 

여성 : 모르겠다. 뭐가 뭔지 분간이 안 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람타 : 지옥이 있다고 믿는가?

 

여성 : 그렇다, 믿는다.

 

람타 : 그것이 죽기가 싫어지는 이유이다. 그곳이 당신이 갈 곳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성 : 오, 글쎄… 내가 그곳에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 보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람타 : 여인이여! 여인이여! 당신이 당신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당신을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가?

 

여성 : 아니다… 그래도, 때때로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용서받고 있다고 느낀다.

 

람타 : 그렇게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여성 : 음… 몇 가지가 될 것 같다.

 

람타 : 그 몇 가지 때문에 못살겠던가?

 

여성 : 그렇지는 않다. 나는 살려고 했고, 살기를 원하며, 옳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람타 : 그것이 무슨 뜻인가?

 

여성 : 악마가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람타 : 정말인가?

 

여성 : 글쎄, 당신이 말해 달라, 제발, 부탁한다.

 

람타 : 내가 말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여성 : 믿을 것이다.

 

람타 :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면 어떤가?

 

여성 : 그러나 나는 지옥이 있다고 배웠다.

 

람타 : 나는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지옥이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나를 믿을 수 있는가?

 

여성 : 글쎄, 당신을 믿는다.

 

람타 : 그렇다면 받아들여라. 지옥 같은 것은 없으니까.

 

지옥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이 말은 유다 왕국에서 쓰던 단어로서 매장하는 데 드는 돈을 부담할 수 없는 사람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얕고 울타리도 없는 무덤터를 일컫는다. 얕은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저주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밤이 되면 하이에나와 들개들이 시체를 파내고 배를 채우기 때문이다. 그의 육신이 먹혀 버렸으므로 그들은 결코 유토피아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지옥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전부였으나, 나중에 와서 성직자나 목회자, 종교에 의하여 고문을 당하는 장소로 간주되어 버렸다.

 

여성 : 그렇지만 나는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다. 성경은 이 지옥을 매우 강조한다.

 

람타 : 누가 성경을 썼는가?

 

여성 : 여러 저자들이 있다.

 

람타 : 그들은 누구인가? 사람이 아니던가?

 

여성 : 모르겠다.

 

람타 : 그들은 사람들이다.

 

나는 이 세계를 깊은 곳까지 조사해 보았다. 온 세상 한 가운데까지 불의 호수를 찾아서 뒤져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고문의 장소를 찾기 위하여 가장 먼 곳까지 뒤져 보았으나 그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악마를 찾고자 했으나 그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악마와 지옥이 그를 믿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외의 어느 곳에도 없다.

 

여성 : 그렇게 생각해 주어서 기쁘다.

 

람타 : 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여성 : 알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우리가 아무리 비천한 짓을 한다 해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내던지는 일은 없다는 의미인 것 같다.

 

람타 :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고문하기 위하여 어떤 장소를 만들어 놓지 않았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지 않았던가?

 

여성 : 창조했다.

 

람타 : 그렇다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고 나서 당신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없는가?

 

여성 : 내 가슴속에 하나님이 있다 -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람타 :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닌가?

 

여성 : 내가 그렇다는 것인가?

 

람타 : 그러하다!

 

여성 : 글쎄, 그것은 나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람타 : 여인이여! 하나님은 모든 것이다. 당신을 그 자신으로부터 창조하지 않았다면 무엇으로부터 창조했겠는가? 당신이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자기 자신을 가두어 놓고 소위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잘못'이라는 것도 생명의 일부일진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하겠다. 인간은 형제들을 다스리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었다. 군대가 인간과 국가를 다스리는 데 실패하자 종교가 만들어졌다. 사람을 속박하기 위해서 두려움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사람에게서 신성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로부터 하나님을 뺏을 수 있다면, 그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쉽다.

 

하나님은 지옥이나 악마를 만들지 않았다. 이것은 형제를 고문하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한 창조물이다. 대중을 협박해서 통제 가능한 집단으로 만들 목적으로 종교적인 교리를 통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이다. 해별의 모래알 하나하나도, 봄볕에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나비들도, 밤하늘에 보이는 크고 작은 별들도, 모두가 다 하나님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다. 지옥과 같은 장소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마치 몸에 암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 암은 종국에 그를 다 삼켜 버릴 것이다.

 

천국에서 당신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보다 생명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한다. 그는 당신이 향하는 모든 방향이고 당신이 포용하는 그 모든 생각이기 때문이다.

 

여성 :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 -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안다.

 

람타 : 그러하다. 정말 그러하다. 그는 우리 모두이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경이로운 여인이여!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은 없다. 아무 것도!

 

여성 : 고맙기는 하지만, 왜 그런가?

 

람타 : 당신이 무엇인가를 했다고 해서 생명이 변형된 것은 아니다 당신이 행한 모든 일은 아무리 추하고 비천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으로 지혜를 얻어서 삶을 풍요롭게 했다.

 

이제, 이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종교와 신앙은 수세기 동안 문명을 파괴하였다. 마야와 아즈텍 문명이 교회가 하는 대로 믿지 않는다 하여, 교회 법에 따라 그들을 죽이고 파멸시켰다. 암흑시대에 있었던 종교전쟁이라는 것은 모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벌어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어미의 품에서 어린애를 빼앗았다. 그들이 교회를 따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달군 쇠꼬챙이로 여자들의 눈을 지지고 가슴에 낙인을 찍어 놓고서 그런 채로 다니게 만들었다. 도로는 피로 물들었다. 모두 신앙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개신도들은 지옥의 유황불과 악마라고 하는 것을 차용해서 사랑스러운 형제의 가슴속에 두려움을 일으켜 자신들의 집단을 존속시켰다 - 특정한 일을 하지 않거나 교회의 법과 계율에 따라 살지 않으면 지옥에서 영원히 태워지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여성 : 나는 그렇게 배우며 자랐다.

 

람타 : 여성이여! 크게 잘못되었다. 성경이 있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여성 :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옥이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오! 미안하다.(역주 : 람타는 성경 이전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람타 : 개의치 말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제 주목하라, 나이든 여성이여. 당신은 더 이상 젊지도 않고 열정적이지도 않으며, 이제 죽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다. 수세기 동안 프로그램된 불길한 가르침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지옥은 있는 것일까?" "내가 그곳에 가게 될까?" "그렇게까지 죄를 지었을까?"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데, 당신은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러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몸을 떠나는 것은 매우 짧은 순간이다. 당신은 몸 위에 있게 되고 다시 순수한 빛의 실체가 될 것이다. 그때 위대한 스승이 다가와서 당신을 더 나은 배움의 장소로 데려갈 것이다. 그곳에서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것들이 위대한 진리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아 벤 죠셉 - 나사렛 예수라고도 하는 - 은 위대한 신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신이다. 그러나, 그 혼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하나님이 된 인간이다. 바로 그렇게 당신들도 하나님이 될 것이다.

 

여성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중 하나라는 것을 믿는가?

 

람타 :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중 하나이다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여성 :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람타 : 여인이여.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들이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들 모두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여러 자식 중에 하나만 완벽하고 나머지는 모두 우둔한 자식들이라면 아버지한테 이로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손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예수는 당신의 형제이다. 구원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안에 있던 사람이었다 - 마치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것처럼.

 

다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예수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시대에 이 세상에서 살았다. 그때에는 인간이 인간의 노예가 되고 사랑의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을 누구에게나 실천하였다! 이것이 그의 존재를 위대하게 만들고 '구세주'라고 불리게 만든 그 사랑인 것이다. 사랑을 말하는 이가 거의 없을 때 이 땅에 사랑을 가져오고 많은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는 또 아버지는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비와 은총, 동정의 하나님이라는 가르침을 펼쳤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많이 변질되었다. 특히 이 순수한 영혼의 단순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경전을 만들게 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예수는 사랑했다. 그것은 인류에게 위대하고 값진 선물이었다. 그는 사랑의 근원이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이고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하였다. 예수가 가졌던, 모든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은 아버지와 자기가 하나이며 일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었다. 그는 위선으로 살아가게 하는 환영을 모두 벗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에게 있는 아버지 하나님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전체로 표현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완전하게 표현된 이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바이다. 신-인간이고 인간-신인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그 진실에 따라 사는 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당신과 예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랑하는 여인이여, 예수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에 따라 완전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는 진정 위대한 실체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될 수 있는 똑같은 고결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당신도 또한 위대한 실체이다.

 

예수에게는 당신을 구원한다거나 다른 이를 구원해야 할 책임이 없다. 자신이 지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자신을 구원하였고,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통해서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누구에게나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당신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왕국은 이곳이 아니다. 천상의 왕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는 지옥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생명과 그 아름다움을 말했다.

 

사랑하는 여성이여, 당신이라는 아름다운 실체와 본래 당신인 하나님을 사랑하라 - 그 음침한 의도가 들어 있는 책은 그만 읽어라!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음을 알라. 당신이 영생할 것임을 알라.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이것이 길이다. 그런데, 악마가 당신을 지배한다면 그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겠는가?

 

여성 : 고맙지만 알고 싶지 않다!

 

람타 : 여인이여. 도대체 어떤 아버지가 그러한 실체, 그러한 장소, 또 그러한 두려움을 창조하고 그 모든 것에 대해 당신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내 하나님이 아니고 나는 그를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삶 자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있음만을 인정할 따름이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이 있다면 누가 그것을 창조했는지 당장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만 한다. 만물은 하나님이다. 모든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밖에 모른다. 그는 당신이나 다른 누구도 심판한 적이 없다. 결코! 사랑이나 생명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자신을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여성 :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람타 : 그는 증오이기도 한가?

 

여성 :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람타 : 증오는 누구인가?

 

여성 : 나쁜 이일 것이다. 있다면 말이다.

 

람타 : 그런 이는 없다.

 

여성 : 글쎄,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벌을 받아야 하나?

 

람타 : 여인이여, 왜 벌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일생 동안 자신을 벌주어 왔다. 자신이 나쁘다고 믿고 언젠가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만든 지옥 속에서 살아 왔다. 그 지옥을 스스로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감옥은 없다. 그의 왕국에는 체벌을 가하는 이도 없다. 고문도구도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말 그대로 사랑이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여성 : 악마가 있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 나서 어떻게 없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람타 : 어떻게? 없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 있다고 배웠을 때와 똑같은 과정이 진행된다.

 

아름다운 실체여,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해 준 내용을 되새겨주기 바란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내면의 하나님을 만나라. 당신 자신과 함께 평화로워라, 여인이여.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면, 당신은 또 다시 밝게 살아가게 될 것이므로.

 

여성 : 아멘.

 

람타 : 그렇게 될지어다.

 

 

 

[람타] 5장. 하나님을 보라 [27p]

 

5.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가?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라 - 바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당신들은 하나님이 당신들의 세상 밖, 저 머나먼 우주 속 어딘가에 있다고 배워 왔다. 당신들 중 많은 이들이 이것을 믿었고 진실로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생명의 가장 중요한 근원은 당신 바깥에 있어 본 적이 없다 - 하나님은 바로 당신이다. 하나님은 경이로운 사고 작용이고, 침묵하며 인간 안에 항상 존재하는 지고 지성이다.

 

당신은 태어나서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살다가, 늙고, 그리고는 죽는다고 배웠다. 당신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은 이 지상의 삶에서 현실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수십억 년 동안 살아 온 불사의 근원, 당신이 사랑하는 아버지이며 생각 전체인 하나님 - 빛이 되었고 당신들 각자가 그 빛이 된 이래로 언제나 - 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왔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을 때는 당신들이 독자적이고 자주적이며, 동시에 하나님 마음의 영원한 일부가 되었을 때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손수 하늘과 땅을 만들었고 인간이라는 살아있는 피조물을 만든 유일한 분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모든 생명을 만든 그 위대한 창조자는 신성한 지성과 자유의지의 소유자인 바로 당신들이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 저녁 노을, 그리고 삼라만상의 사랑스러움을 창조한 이는 당신이다. 당신은, 실제로, 인간이라고 하는 뛰어난 피조물을 창조함으로써, 우주 공간의 밝은 빛이었던 당신이, 자신이 창조한 형상의 경이로움을 모두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현재 당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당신들이 수천 년 동안 살아 오면서 만들어 낸 환영의 집합일 따름이다. 당신은 단순한 인간 그 이상이다. 인간이라는 한정된 피조물보다는 훨씬, 훨씬 더 위대하다. 당신은 하나님이다. 지금까지 늘 하나님이었고 앞으로도 항상 하나님을 것이다. 당신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당신이 허용했던 이 위대한 이해를 깨닫기 위하여, 당신들은 생 다음의 생, 또 다음으로 이어지는 생을 거쳐 이곳에 돌아온 불사의 창조자들이다.

 

당신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창조된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신들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맨 처음이자 유일하게 직접 창조된 피조물이다. 당신은 생명을 탐구하는 모험을 떠나, 당신의 지고 지성을 세포물질과 통합시켜 신-인간이 되었다. 인간이라는 형태로 표현하는 하나님 마음이며,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피조물 안에 살고 있는 신들인 것이다. 남성, 여성, 인간 - 당신들은, 실로, 자신을 유한하고 보잘것없는 실체로 감쪽같이 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왜 이곳에 있는가? 무슨 목적으로 어떤 운명으로 태어났는가? 당신은 우연히 태어나서 짧은 시간 동안 살다가 사라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자신을 생각하는가? 정말 그런가?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곳에 산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왜 지금인가? 왜 당신인가?

 

당신은 이 지상에서 수천 번의 생을 살았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수많은 얼굴을 가져 보았으며, 여러 가지 피부색, 온갖 종류의 욕망, 여러 가지 종교를 다 가져 보았다.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침략을 당해 보기도 하였다. 왕이기도 하였고, 시종이기도 하였다. 선원이기도 하였고, 선장이기도 하였다. 정복자이기도 하였고, 정복당하기도 하였다. 당신은 역사에 나온 모든 것이었다. 왜? 느낌을 얻으려는 목적, 지혜를 얻고자 하는 목적,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미스터리 - 바로 당신 자신을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당신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저 단세포에서 진화한 세포들의 보잘것없는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눈빛을 통해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당신의 독특함과 개성, 당신의 성격과 인품, 사랑하고 포용하며 희망하고 꿈꾸는 능력, 그리고 창조할 수 있는 경외로운 능력을 당신에게 주는 그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에게서,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드러나는 그 모든 지성, 그 모든 지식, 그 모든 지혜를 어디에서 축적하였는가? 영원에서 보면 한 숨밖에 안 되는 한 생애 동안에 지금의 당신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당신의 모든 면은 생 다음의 생, 또 다음 생,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한 생을 살 때마다 지혜를 모아 당신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만들었던 것이다. 영원이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한 순간에 불과한 그 짧은 기간만을 위해서 창조되기에는 당신은 형언할 수 없이 소중하고 너무나 아름답다.

 

당신 부모가 당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부친과 모친은 유전적인 부모일 따름이다. 그들은 당신을 창조하지 않았다. 크게 본다면 그들은 당신의 형제이다 - 당신도 또한 그들만큼 나이를 먹었다. 왜냐하면 모든 실체는 같은 순간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장엄한 생각인 하나님이 자신을 숙고하고 밝은 빛으로 확장할 때, 모두가 함께 태어났다. 그때 당신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태어난 것이다. 당신의 진정한 부모는 모든 생명의 부모원리인 하나님이다.

 

당신 몸이 당신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거죽일 따름이다. 진정한 정체는 몸 안에 있는 개성적인 자아, 즉 느낌과 태도의 집합인 것이다.

 

다음을 잠시 생각해 보라. 다른 실체를 사랑한다면 그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 몸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그의 근본이며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개성적인 자아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 몸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본성이다 - 이것은 눈을 깜박이게 하고, 목소리를 감미롭게 해주며, 머리카락을 윤기 있게 해주고, 손의 촉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의 몸체는 경이롭고 섬세한 기계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당신이라는 이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당신이라는 이는 그 몸체가 아니라, 생각의 집합이고, 감성적인 태도로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자아로 표현되는 실체이다. 당신의 생각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개성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감성들 - 당신의 소망과 꿈, 당신의 두려움과 열망, 당신의 자존심과 열정은 어떤가? 내가 당신에게 수수께끼인 것처럼, 당신도 당신 자신에게 수수께끼다 - 수수께끼 중에서도 가장 불가해한 수수께끼다.

 

가식을 벗어 버린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 버린다면? 굳은 마음의 빗장을 열어 버린다면? 당신 존재의 중심 안에서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이다. 인류에게 가장 큰 미스터리인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바깥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신의 두 눈 뒤에, 깨끗한 옷깃 속에, 얼굴이라는 환영 너머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생각의 힘이다. 당신을 당신으로 만드는 개성적인 자아인 것이다.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은 당신에게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당신이 신뢰하는 지고 지성이다. 당신의 생명을 영원히, 영원토록 존속하게 하는 경이로운 생명력인 것이다.

 

당신들이 거하는 그 몸체는 신들 -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형제들 - 이 창조한 장엄한 창조물이다. 생각과 느낌의 보이지 않는 근본인 당신과, 이 세상에서 당신 자신이 창조해 놓은 생명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몸체가 창조되었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단지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창조되었다 - 그래서 몸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태초에 그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신들이 이 지상에 창조해 놓은 모든 피조물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몸은 본래 자기 실체를 구성하는 빛의 변수들로 이루어진 가장 복잡한 전기시스템을 수용할 수 있게 창조되었다. 당신의 본래 모양은 몸의 크기가 아니다. 당신은 빛의 조그마한 점이다! 그 조그마한 존재 안에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이후 수집된 모든 것을 담아 놓고 있다.

 

하나님-원리인 당신은 결코 육체적 실체가 아니다. 당신은 느낌이라고 하는, 창조적 생명이 얻게 될 보상을 받기 위해서 육신 안에 거하는, 둥글고 불같이 타오르며 순수한 에너지인 빛-원리이다. 당신의 본래 모습은 당신이 거하는 몸이 아니라, 당신의 감성으로 인식된다.

 

당신의 진실한 모습은 빛의 실체와 감성의 실체가 합쳐진 영성과 영혼이다. 당신의 영성 - 이 조그마한 광점(光點) - 은 당신 몸의 분자구조를 감싸고 있다. 이렇게 하여 영성은 당신 몸을 수용하고 지원한다. 당신의 영혼은 몸체 안에 있다. 가슴 근처 뼈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있으며 그곳에는 전기적 에너지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이제까지 포용한 모든 생각을 기록하고 저장한다 - 느낌이라는 형태로. 당신이 독특한 에고나 개성적 자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영혼 안에 저장된 감성의 집합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거하는 육신은 그저 수송수단, 이 물질계에서 살고 행동하기 위해 선택된 섬세한 탈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 탈것 속에서, 당신은 육신이 당신의 본래 모습이라는 환상 속에 빠져 있다. 틀렸다. 하나님이 형상이 없는 것처럼, 당신도 그렇다.

 

 

당신이라는 위대한 창조의 신이여, 누가 당신의 생명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지고의 존재 또는 힘이 당신의 삶을 통제해 왔다고 믿고 있는가? 그에 대한 진실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 왔고, 되어 보았고, 경험해 본 모든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이는 당신이라는 것이다. 장엄한 별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당신은 당신 삶의 매순간과 모든 환경을 창조해 왔다. 현재의 당신은 당신 자신이 선택했다. 당신의 모습 또한 당신 자신이 창조했다. 어떻게 살아가든지, 전적으로 당신 자신이 설계하고 운명지었다. 그것은, 당신이 하려고 한다면, 신-인간으로서의 훈련이며 특권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사고 과정을 통해 -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 당신 삶을 스스로 창조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느끼게 될 것이고,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발현하여 당신 삶의 환경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다음을 깊이 생각해 보라. 행복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데는 한 순간이면 족하다. 그러면, 당신 몸 전체가 기쁨을 느낄 것이다. 누구도 친구로 삼기 싫어하는 비천한 피조물의 역할을 하는 데도 한 순간밖에 안 걸린다. 그러면 당신은 슬픔과 처량함을 느낄 것이다. 오직 한 순간이다! 흐느낌을 멈추고 기쁘게 웃게 되는 것도 오직 한 순간이다. 비판을 멈추고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한 순간이다. 자, 이렇게 하는 것이 누구인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 존재 안에서 그러한 느낌을 만드는 동안, 당신 주위에 있는 어떤 것이 변했는가?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전체가 변했다.

 

당신은 자신이 현재 생각하고 있는 꼭 그대로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당신 안에서 느끼고, 당신은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애의 환상을 마음속에 그린다면, 당신 존재는 그 쪽으로 유인될 것이다. 불행을 생각하면, 불행이 오게 될 것이다. 기쁨을 생각하면,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재능을 생각하면, 재능은 이미 그곳에 있다.

 

당신의 미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각에 따라서 만들어진다. 당신들의 내일은 모두 오늘 당신들의 생각에 따라서 설계된다. 당신이 포용하는 모든 생각과 당신이 즐기는 모든 환상은, 어떤 감성을 얻으려는 목적이든지 간에, 몸 안에 특정한 느낌을 형성하게 되고, 그것이 영혼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당신의 삶 안에 일정한 조건을 만드는 선도자의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느낌을 창조하고 그에 일치하는 상황들을 당신에게 끌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가올 내일을 창조하고 있음을 알라.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생각에 의하여 생겨나서 당신 영혼에 기록된 그 느낌을 표현하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생기는 일들이 그저 우연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돌발사건이나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 그리고 아무도 다른 사람의 의지나 구상에 의한 '희생자'가 아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당신이 생각하고 느낌으로써 삶에 받아들였던 것들이다. 만약을 가정했던가 아니면 두려워하면서 어떤 일을 생각했거나, 또는 누군가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당신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였을 경우인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생각과 감성을 통해 결정된 의도된 행동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일어난다!

 

이제까지 당신이 받아들인 모든 생각, 상상해 보았던 모든 환상, 그리고 지금까지 말한 모든 말은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이야말로 결코 죽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 진실로 생명을 주는 자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생각을 사용하여 당신 삶의 매순간을 창조하여 왔다. 왜냐하면 생각이 당신과 하나님 마음 사이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선각자가 이 진실을 당신에게 가르치려고 하였다 - 속담과 노래, 그리고 문헌을 통해서 - 그러나 당신들 대다수는 깨치기를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지워 놓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취하는 모든 태도 그대로, 하나님, 즉 생명이 그렇게 되어 주는 것이다 - 미천하고 누추한 것에서부터 가장 오묘한 최상의 것에까지. 왜냐하면 당신만이 구별하여 다르게 보고 있을 뿐, 하나님은 오직 생명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얻는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존재다.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결정짓는 대로 그렇게 된다.

 

당신 자신을 못하다고 여길수록, 당신은 못하게 된다. 당신의 지성을 신뢰하지 않을수록, 당신은 더 우둔해지게 된다.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당신은 더 추하게 된다. 더 가난하다고 생각할수록, 더 궁핍해지게 된다 - 당신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정했기 때문이다.

 

당신으로 하여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창조할 수 있게 허용하면서도 당신을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해 보라. 품고 있는 생각이나 내뱉은 말은 그대로 당신에게 발현되도록 만든 당신에 대한 그 사랑을 숙고해 보라. 깊이 숙고해 보라.

 

그렇다면, 누가 당신 삶의 창조자인가? 바로 당신 자신이다! 누가 당신 삶의 실재자인가? 당신 자신이다! 지금 당신의 모든 것,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이 겪어 본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집합적 추론을 통해서 창조해온 것이다 - 하나님인 생각을 통해서. 당신은 당신 삶에 꼭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만 골라서 받아들였고, 당신이 받아들인 가치에 따라서 삶을 경험하여 왔다. 당시에게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받아들일지, 무엇을 경험할지를 결정하는 이는 당신이다. 바로 당신이다 - 당신 자신의 생각에 의해.

 

당신은 당신이 애쓰는 모습을 관망하고 있는 신의 노예도 하수인도 꼭두각시도 아니다. 당신은 오묘한 자유를 가지고 경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당신들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바에 따라 생각을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 경외로운 힘을 가지고 당신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해 온 것이다. 당신이 하는 모든 생각이 당신 앞에 있는 운명을 결정한다. 당신이 갖는 모든 느낌이 삶이라는 길을 만들어 나간다.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 삶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말한 바와 같이 "감성에 따라, 그렇게 될지어다."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침묵하고 있는 당신 존재 안에,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창조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당신이 선택했던 꼭 그대로이며, 아무도 당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가로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법제가이자 당신 삶과 그 환경의 창조자이다. 당신은 지금 생에서도 또 다른 생에서도 충분히 깨닫지 못했지만, 당신이야말로 현명한 지성을 가진 최고의 지배자이다.

 

 

한때, 당신은 꽃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스스로 무엇을 창조하는가? 당신의 위대한 창조물이란 불행, 걱정, 연민, 괴로움, 증오, 불화, 자기부정, 노화, 질병, 죽음 등이다. 제한하는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신 스스로 제한된 삶을 창조하고, 그 믿음이 당신 존재 안에 확고한 진실로 자리잡은 다음 당신 삶의 현실이 된다. 모든 것, 모든 사람, 심지어 당신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판단을 내림으로써, 당신은 자신을 삶과 분리하고 있다. 당신은 아름다움을 좇는 유행의 틀에 따라 살고, 또 제한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들로만 당신 자신을 에워싼다 - 그런데 제한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만을 받아들인다. 당신들은 어린아이로 태어나 자라서 성인이 되고, 점점 육신의 활력을 잃어가다가, 나이를 먹고는 마침내 사멸한다고 믿는다.

 

당신들, 한때 자유로운 바람이었던 위대한 창조의 신들은 이제 대도시에 떼지어 몰려 있으면서 문을 닫아걸고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실체가 되어 버렸다. 높은 산과 경이로운 바람 대신에, 고층 빌딩과 소름끼치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무엇을 믿어야 될지,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자신이 어떻게 보여야 될지, 그 모든 것을 규정해 주는 사회를 당신들이 창조해 온 것이다.

 

당신들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전쟁에 관한 소문도 두려워한다. 질병을 두려워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사랑이라는 애정에 굶주려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에 대해 이의를 달고 그리고 다시 또 일어날 것인가 하고 의심을 한다. 성공과 명성, 황금과 돈을 위해서 시장 바닥을 기어다닌다. 아아! 참으로 보잘것없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생각으로 자신을 절망에 빠뜨렸다. 생각으로 자신을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생각으로 자신을 실패하게 했다. 생각으로 자신을 병들게 했다. 또 생각으로 자신을 죽음에 몰아 넣었다. 이 모든 것을 당신이 창조해 왔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같은 내면에 있는 창조자, 한 생각을 품어 우주를 창조하고 천상의 별들을 영원히 타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믿음과 교리, 유행과 전통같은 제한된 생각에 자신을 가두어 버린 것이다 - 제한된 생각에 의한, 제한된 생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진정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된 것은 당신이 가진 불신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불신하는가? 당신이 신체감감으로 감지할 수 없는 모든 것 -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만질 수도 없고, 맛볼 수 없으며, 냄새맡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한테 믿음을 보여 보라! 내 손에다 놓아 보라. 감성을 보여 보라! 그것을 만져보고 싶다! 생각을 보여 달라.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태도를 보여 달라. 그것은 어떠한 모습인가? 바람의 형상을 보여 보라. 그리고 당신 삶의 귀중한 순간들을 앗아가는 그 '시간'을 보여 달라.

 

당신은 삶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불신해 왔다. 또한 그 때문에 당신은 더 무한한 이해가 생겨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삶 다음의 삶, 생 다음의 생을 거치는 동안, 당신은 이 세상의 환영에 너무 빠져 들어가서 당신을 통하여 흐르는 경이로운 불꽃을 잊어버렸다. 당신은 독존적이고 전능한 실체였지만 일천오십만 년 동안 물질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교리와 법, 유행과 전통을 창조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었다. 국가와 신념, 성별과 인종에 의해 분열되었다. 질시와 비탄, 죄악과 두려움에 빠져 버렸다. 당신은 자신을 육체와 완전히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를 생존에만 매달리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진정한 본성 -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꿈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면의 하나님 - 을 잊어버린 것이다. 불사라는 것을 당신은 공공연히 거부하였다. 그 때문에, 당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리고는 이곳에 돌아왔다. 또 다시, 또 다시. 그리하여, 당신은 다시 이곳에 있다. 일천오십만 년 동안을 그렇게 살아 왔다… 그럼에도 당신은 아직 그 불신을 계속 가지고 있다.

 

하나님, 생각 전체인 하나님은 정말로 웅장한 무대이다. 그는 당신이 스스로 대본을 쓰고 출연하여, 한 편 한 편씩 무대에 올려놓는 것을 허용한다. 막이 내리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면, 당신은 죽는다. 왜 그럴까? 최고의 법제가인 당신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삶은 모두 하나의 게임이다. 하나의 환영인 것이다. 모든 생이 그러하다! 그러나, 출연자인 당신은 그것만이 현실이라고 믿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유일한 현실은 생명이다 - 당신이 원하는 역할이면 어떤 것이든 그에 어울리는 게임을 창조하도록 허용하는 자유롭고 영원한 존재의 근원인 것이다.

 

생각으로 자신을 무지와 질병, 죽음에 빠뜨릴 능력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 위대해질 수 있는 능력 또한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단지 더 무한한 생각이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놓음으로써. 그리하여 당신은 더 천재적이고 더 창조적이 되며,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맨 처음 몸을 창조한 신은 당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당신의 육신은 노화하거나 질병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영원토록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매달려 당신의 사고를 제한하는 한, 아침 해를 영광스럽게 하고 저녁 하늘을 신비롭게 해주는 무한을 당신은 결코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글쎄, 육신은 죽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생각하는 당신은 항상 살아 있다. 만약에 당신이 죽는 것을 선택해서, 당신이 이곳을 떠난다면, 당신이 죽는 것을 선택할지라도, 진정한 당신은 땅속에 묻혀 벌레에 먹히고 마침내 한 줌의 재로 되지는 않는다. 당신은 바람처럼 지속적이다. 당신이 가는 곳은 당신이 온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모험으로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 결정한다 - 그렇게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신은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얼마나 많은 횟수가 될지 모른다. 당신의 본성을 하나님으로 파악할 때까지. 그러고 나면, 당신은 다른 하늘, 다른 곳에서 더 멋진 새로운 모험을 즐기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 받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걱정을 하는가? 왜 싸워야 하는가? 왜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가? 왜 스스로를 슬프게 하는가? 왜 당신 자신을 한계 속에 구속하는가? 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의 광휘를 즐기지 못하며, 왜 바람의 자유나 아이들의 웃음을 즐기지 못하는가? 왜 투쟁 대신에 삶을 선택하지 못하는가?

 

당신의 생은 자꾸자꾸 반복한다. 당신의 씨앗은 항구적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불신이 깊어도, 아무리 당신의 왕국을 제한해도, 걱정과 실망이 많다 해도,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 그것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무리 당신이 눈을 가리고 배척해도, 당신은 언제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꿈이다. 웅대한 꿈이며, 말하자면 허울일 따름이다. 이 삶은 물질과 함께 노니는 생각이다. 이 삶은 당신의 감성을 이 세상에 얽매이게 하는 견고한 현실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꿈을 꾸고 있는 당신이 깨어날 때까지, 그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다.

 

 

한 번도 진정으로 자신을 들여다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결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가?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라 - 바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가치 있음을 알라. 당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묘사할 이미지는 없다. 또한 당신의 왕국에는 끝이 없다.

 

설법 중에 가장 위대한 설법은 산상에서 위대한 마스터가 행한 것이다. 그곳에 서서, 그의 말을 들으려고 온 많은 대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보라." 그것이 그가 말할 필요가 있는 전부였다. 하나님을 보라. 왜냐하면 각자가 자신의 한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욕망, 질병, 빈부, 기쁨과 슬픔, 삶 그리고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보라. 이 말을 기억하라. 모든 것 안에 살아 있는 이는 바로 당신이니까. 어느 날 당신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참 나에 가 닿아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람타] 6장. 삶 뒤의 또 삶 [33p]

 

6. 삶 뒤에 또 삶

 

 

죽음이라는 것은 크나큰 환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직

육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거하는 개성적 자아는 영원히 지속한다.

 

 

당신은 한 송이 꽃보다도 못한가? 꽃의 생명은 무엇인가? 꽃은 꽃봉오리가 따뜻한 햇볕을 받아 활짝 피어난 것이다. 경이로운 꽃 향기는 주위에 가득 퍼져, 모든 것이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기뻐하게 만든다. 새들은 더욱 높이 하늘을 날고, 벌들은 부지런히 꿀을 따며, 인간들은 즐겁게 사랑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경이로운 꽃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씨를 맺는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열린다. 아! 이를 '지혜'라고 한다. 이는 삶의 결실이다. 그리고 과실을 수확하며, 가을의 풍취가 만연한 온 땅에서 추수를 한다. 그러고 나면 나무는 그 화창하던 일을 잃어버리고 북풍에 떨며 앙상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다.

 

거대하고 하얀 침묵이 내려오면 나무 가지는 두텁고 눈부신 빛으로 덮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추위에 떠는 황량한 대지가 펼쳐진다. 이제 그 꽃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혜 속에 남아 있다. 지난 봄에 자라던 그 모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다시 나오게 된다.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가고 나면, 봉오리는 다시 나온다. 보라! 새로운 꽃이 다시 핀다.

 

생명의 지속성을 한 송이 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왜 당신은 자신을 꽃의 생명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자신이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과실을 맺고,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고, 그리고 겨울에 죽어 버릴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의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사실이 그러하다. 꽃이 봄마다 다시 피는 것처럼, 당신도 생 다음 생 또 다음 생으로 이어져 계속 살 것이다.

 

당신이 겪어 왔던 그 긴 세월 동안 쌓여온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스터 : 내 모친은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녀가 지금도 살아 있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살아 있다면, 그녀가 행복한지도 알고 싶다.

 

람타 : 죽음을 믿는가? 마스터.

 

마스터 : 때로는 죽음을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계속해서 살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아이가 셋이다. 내가 그 애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갓 태어날 때부터 각자가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라면서도 그 성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양이나 개도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이 한 생에서만 그 성격이 모두 형성된다고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도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람타 : 훌륭한 관찰이다. 중요한 진실을 말하겠는데,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말기 바란다. 생명에 결코 종말은 없다. 몸을 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목을 따고 내장을 꺼내고 어떤 짓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몸체 안에 있던 개성적 자아는 결코 파멸시킬 수 없다. 어떻게 생각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며, 칼로 베고 멸할 수 있는지 잠시라도 생각해 보라. 그럴 수는 없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력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각과 감성의 보이지 않는 집합으로서 개성적 자아라고 하며 신체 모습의 내면에 살아 있다.

 

덕성, 활기, 성격을 만드는 것은 생각의 보이지 않는 본성이고, 그것은 에너지다. 이것이 입을 움직이게 하고 눈을 움직이게 하고 팔다리를 움직이게 한다 - 말하자면, 이 신기한 에너지가 가느다란 끈을 당겨 움직임이 가능해진다. 아무 것도 에너지를 파괴하지 못한다. 아무 것도 다른 것에서 생명력을 빼앗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커다란 환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직 육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거하면서 육신을 움직이는 그 본성은 다시 돌아오고, 원하면 새로운 신체를 구성한다. 몸 안에 살아있는 생명력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해 두라.

 

이제 이 세상을 떠나는 실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겠다. 육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으면, 에너지 - 영혼 - 는 그 실체의 영성에 의해 빠져나온다. 모든 것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와 창조성을 가질 수 없다.

 

영성이 영혼을 불러일으켜 영혼이 자리하던 공간에서 풀어 주면,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평화롭게 된다. 당신의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요람에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더 이상 없도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 세상을 떠나면 육신의 본능과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더 이상 두려움, 아픔, 고통, 육신의 배고픔, 걱정을 일으키는 '시간'이라는 환영을 경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과 관련되었던 모든 것은 더 이상 지니지 않은 채, 유토피아라고 하는 곳에 머물게 된다. 그곳이 '하나님의 요람'인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휴지기에 드는 것과 같다. 영성이 영혼을 불러일으키면, 영혼은 몸 안에 있는 마지막 센터를 통하여 위로 이동한다. 이 센터를 차크라(역주 : 회전하는 바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서 인체의 주요 신경총 근처에 위치한 에너지 저장소다. 회음부, 배꼽, 태양총, 가슴, 후두부, 이마, 정수리의 일곱 차크라가 있으며, 쿤달리니(영적 에너지)가 터질 때 차크라는 생기를 띠고 활성화된다. 정수리 차크라(뇌하수체)가 완전히 열리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한다) 또는 막이라고 한다. 기억의 집합인 영혼은 뇌의 한가운데 있는 뇌하수체라는 마지막 일곱째 막을 통하여 몸의 세포체를 빠져나간다. 이 과정은 종종 바람소리가 들리면서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경험으로 느껴진다. (역주 : 죽음을 경험했다가 다시 살아났던 사람들의 경우에 대한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대상의 60% 가량은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30% 가량은 다리를 건너는 느낌을 가졌으며, 나중에 빛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 터널을 지나고 나서 보이는 빛이 당신 존재의 빛, 당신 존재의 영성이다. 일단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면, 육신은 죽고, 당신은 다시 자유로운 영혼체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한 순간이고, 고통도 없다.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은 빛을 내고 눈부시게 밝아진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당신은 물질의 밀도를 벗어나 빛의 존재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당신은 강력한 마음이자 감성이며, 당신의 몸은 빛의 몸(光體)으로서, 빛의 형상을 하고 있는 당신이 받아들이는 생각에 따라 자신의 전기적 형상을 바꾼다. 그 지점에서부터, 당신은 일곱 세상 중의 하나로 가게 된다. 당신이 어느 세상으로 가는지는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감성적으로 표현했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삶이며 그것의 다른 수준들을 말한다. 예수아 벤 조셉은 일곱 하늘나라를 말했다. 사실상 일곱 세상이 있다. 그곳은 실제의 장소이고 실존하는 세상이며, 이 세상은 그 중 하나이다. 그 세상들 중의 어느 곳에도 인간을 고문하고 벌하는 지옥 같은 곳은 없다. 인간이 그런 짓을 잘 하는 것이다. 당신이 육체를 떠나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표현한 의식-이해, 또는 축적된 감성적 태도에 따라, 당신은 항상 그에 걸맞은 세상, 또는 진동 수준으로 가게 된다.

 

일곱 가지의 깨침, 또는 일곱 단계의 의식-이해 수준이 있다. 일곱 단계의 이해란 번식과 생존, / 두려움과 고통, / 힘, / 느끼는 사랑, / 드러내는 사랑, / 모든 생명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 내가 곧 하나님 이렇게 일곱 단계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이해를 얻기 위해 당신이 숙고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생각은 그에 고유한 진동률을 가지고, 이것은 느낌으로 경험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고통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중이라면, 당신은 고통과 관련된 더 한정된 생각을 숙고하고 있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고통이라는 감성으로 경험되는 낮은 진동률이 발생한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이해하고 또 표현하는 것을 숙고하고 터득하고 있으면, 사랑의 나눔과 표현에 해당되는 더 높은 진동률이 고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의 의식이 초점을 두고 있는 그 이해는 당신이 가게 될 세상이 된다. 왜냐하면 당신 존재의 영성은 당신을 알맞은 진동률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의 모친은 이 세상을 떠나, 큰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다. 이는 그녀가 간절히 원했고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녀가 얻은 의식-이해 정도에 맞는 수준의 세상으로 이끌려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현재 자기에게 맞는 수준의 상태에 있다 - 당신이 지금 이 상태에 있는 것처럼. 그녀가 있는 곳은 네 번째 수준으로서, 느끼면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랑의 감성적인 태도에 맞추어져 있다. 당신의 모친은 느낌이 큰 실체이지만, 그러나 종종 그녀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기의 느낌 대부분을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과 그녀의 남편은 종종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의 모친은 고귀한 수준에 있으며, 그녀가 원하는 동안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진보를 생각하게 되면, 그때 빛의 존재로서 생각의 다른 차원으로 확장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또는, 그녀가 선택한다면, 그녀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유전형질을 빌어, 물질의 세상인 이 이승에서 그녀는 일곱 번째 수준의 이해를 향한 진보를 계속할 수 있다.

 

이승, 이 현세는 '본보기 세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실체는 자신의 창조력을 물질에서 목격할 수 있고, 감성을 어떤 식으로든 실제로 표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곱 중에 어둠이 있는 유일한 곳이자, 빛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유일한 곳이다. 실체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사회의식이라는 프로그래밍을 통하여, 무지로 돌아서 버리는 곳이다. 이러한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 그래서 이곳에서 진보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힘든 것이다.

 

당신의 모친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다면, 당신의 아이의 자식으로 태어나든가 당신 아이의 자식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녀가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돌아온다면, 당신의 딸이 아이를 가지고자 할 때에 그 딸의 아이로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허용한다면 모친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쳐다보고 있을 때, 뚜렷한 얼굴과 겉모습을 초월하는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 당신의 느낌으로.

 

이곳을 떠난 당신의 모친도 당신을 알 수 있을까? 아주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육신을 업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식하고 있는 모든 수준에 맞추어 자신을 조율할 수 있다. 더 이상 물질 밀도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가벼운 밀도, 더 높은 진동 수준에 있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사는 세상과 나란히 존재하는, 사고체(思考體)나 광체(光體)로 나타나는 다른 수준의 진동률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당신의 모친은 당신을 잘 알 수 있다 - 이처럼 당신도 이곳을 떠난 뒤에, 원하기만 한다면, 여기에 있는 이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친은 행복한가? 당신이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그 불행은 당신이 이곳을 떠났을 때 증폭이 된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면, 당신은 순수한 느낌과 감성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신의 감성은 증폭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증폭되는 덕분에 당신이 계속해서 기쁨을 더 잘 이해해 나가는 데 필요한 수준이 어디인지를 빨리 알 수 있게 된다.

 

한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해 주겠다. 만약에 당신이 그곳을 보게 된다면 당신의 존재에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곳은 의식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의 수준에서 표현되는 곳으로 많은 실체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평원 같은 곳으로 평평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들의 광체로는 산이나 들, 초원과 꽃, 하늘을 볼 수 없다. 빛의 실체로서 수십억의 실체가 끊임없이 줄을 지어서 누워있다. 그곳에 누워 자신은 죽어 있다는 환상을 가진 채로 잠을 자고 있다. 생명은 무덤 너머까지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생생하고 관심도 있으며 강박관념에 싸여 있기도 하고 변덕을 부리기도 하나, 그의 에너지 측면에서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살아 있는데도 그러하다. 기억하라. 어떤 것이라도 굳게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진실이라고 확신시킬 수 있다. 우리가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은 그대로 현실로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창조성과 의지는 강력하다.

 

그곳에 있는 많은 실체들은 그들이 죽으면 구세주가 그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죽은 채로 있게 된다고 배웠다.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신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 때문에 그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부활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여러 실체가 줄에 줄을 맞추어 그들보다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에 의해 부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깨우려고 했으나 - 매우 적은 수만이 깨어 일어났다 - 그 이전에 그들 대부분은 어떤 악마가 나타나서 그들을 깨우려 할 것이라고 배웠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누가 그들을 깨우려고 시도해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치고 그 잠에서 깨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릴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르침이다.

 

지금 이야기한 이곳이 유일하게 고통스러운 곳이다 - 그와 같은 이해를 절대적인 앎이라고 믿고 있는 실체들이 있는 곳이다. 혹 당신이 가서 본다면 당신의 형제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곳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세상은 장엄하다.

 

마스터 : 람타, 죽은 이를 만나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가능한가?

 

람타 : 당신의 모친을 보고 싶은가?

 

마스터 : 그렇다. 매우 보고 싶다.

 

람타 : 그렇게 될지어다. 그러기를 모친이 동의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이 모친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신은 나중에 그것이 상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당신의 모친을 빛으로 보게 되는 것은 그녀가 당신보다 고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빛은 그녀의 원질이 진동하는 매우 빠른 속도에 의해서 나온다. 그 속도에 의해서 빛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 실체의 빛을 본다면, 그것은 단지 그녀가 높은 진동률로 낮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세상에 있으면서 여기 이 청중 사이에 모여 있는 이들도 많다. 그들이 사랑하는 실체가 이 청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미하게 빛나는 빛이며 당신이 그들을 보려고 한다면 시선의 초점을 벗어난 바깥 부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직접 보려고 하면, 원추세포로 이루어진 당신들의 눈으로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역주 : 오라를 보기 위해서는 간상세포를 이용한다. 어떤 물체의 오라를 보기 위해서는 그 물체의 주위에 있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초점의 바깥 부분을 통해 그 물체를 보는 방식으로 오라 읽기 훈련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있다. 알겠는가?

 

마스터 : 알았다. 고맙다.

 

람타 : 좋다.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무 것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결코! 믿는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당신 자신에게 억지로 주입시켜 버리는 일이다. 믿음은 매우 위험하다. 믿어 버림으로써, 당신의 존재에 진리로 정립되지 않은 것을 쫓아 살고, 행동하고, 믿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당신은 매우 연약하게 된다. 이처럼 연약한 상태에서, 당신은 조종당하고, 저주받고, 비난을 받으며, 그리고 생명마저도 잃을 수 있다 - 모두 믿음 때문에.

 

무엇이든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을 알라. 그저 이해하기를 원하고 당신 존재 안에서 우러나는 느낌에 귀기울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의 느낌이 지혜롭다는 것을 항상 신뢰하다. 느낌을 거스르지 말고, 내면에서 좋게 느끼지 않으면 억지로 믿으려 하지 말라.

 

또 살인자와 살육자를 동정하는 것을 배워라. 그들은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겪어야 할 엄청난 감성적 부담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일에 수천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자는 곧바로 육신을 갖게 된다. 살인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

 

 

마스터 : 이 지상의 삶을 떠나면 자신의 삶을 평가하거나 그 다음 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어디로 가는가?

 

람타 : 이해의 과정 중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태도에 걸맞은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

 

예를 들자면 당신은 '제한 속의 생존' 단계에서부터 고통의 단계, 힘의 단계, 그리고 말없는 사랑의 단계까지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리고 사랑을 실현하고, 사랑을 말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다섯 번째 의식의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 생을 지나게 되면 낙원이라고 하는 다섯 번째 세상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은 당신이 현재 인식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이해 수준이다.

 

달리 말하면, 마스터,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이해하게 된 것들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가치와, 당신의 소중함, 당신이 터득한 진리의 독자성, 당신의 사고과정이 갖는 힘을 배우고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위에 있는 생명 가운데서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하였다. 다른 이를 동정하고 모든 생명의 고귀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모든 진실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하고 깊이 숙고함으로써,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존재의 이상으로서 또한 자아왕국에 실현될 진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더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남아 있고, 존재의 한없는 상태는 아직 보지도, 경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한 지금 현재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먼저 알고 이해할 때까지는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거나 이상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지혜가 쌓이고 쌓여야만 더욱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먼저 당신 자신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알고 난 뒤 당신 자신에 대해 사랑과 동정심을 표현해 보지 않고서는, 당신은 모든 생명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거나 알 수 없고 또 다른 이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없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 실제로 이해가 되면,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 이외의 생명까지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의 이해가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당신 밖에 있다고 느껴지는 생명마저도 바로 당신 자신임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알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당신은 당신의 사고방식과 감성을 표현하는 태도에 걸맞은 의식-이해의 세상으로 가게 된다. 당신은 더 무한한 이해가 가능한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직 당신 자신의 현실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이해의 경지가 실재한다는 것을 당신이 아직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스터 : 그러면 이곳을 떠날 때 이 세상으로 돌아오건 다른 세상으로 가건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것이다.

 

람타 : 정확하게 이해하였다. 그것이 당신의 사고방식에서 더 무한해지는 법을 내가 당신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유이다. 당신의 생각이 더 무한해질수록, 당신 삶도 그렇게 된다 -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당신이 이곳, 생각과 감성이라는 당신의 왕국에 창조하는 세계가 더 클수록, 이곳을 떠날 때나 당신이 선택하여 다시 돌아왔을 때, 당신은 더 큰 세상을 경험할 것이다. 죄책감,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한 비판, 형제에 대한 비꼼과 증오 따위에 젖어 있는 이들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 경험을 계속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 그러한 것들로 그들 자신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그들이 가야 할 더 바람직한 길이나 경험해야 할 더 큰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깨닫게 될 때까지.

 

마스터 : 일곱 세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세상들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특히 일곱 번째 세상에 대해서.

 

람타 : 당신이 있는 이곳은 첫 번째 세상이다. 3차원 지각이 가능한 곳이다. 이곳에서 실체는 하나님을 물질이라는 형태로 이해한다. 이곳에서 얻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탄생의 과정을 겪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육신의 한계와 본능을 견디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모든 수준의 의식과 이해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표현되는 하나님' 또는 본보기 세상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감성적 이해를 넓히기 위하여 물질적 형태로 의식을 나타내고 목격할 수 있는 곳이다. 수많은 세상이 있지만 당신이 있는 이 지구라는 곳은 본보기 세상으로서 실체가 육체를 빌려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두 번째 세상은 고통과 후회, 죄책감을 이해하는 경험을 쌓는 곳이다. 세 번째 세상은 힘을 실현하는 세계이다. 이곳에서는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고자 한다.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이나 육체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마음속의 생각'으로 그렇게 하며 남들을 자기의 관점으로 보게 만들려고 한다. 네 번째는 사랑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 사는 이들은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깊이를 표현하지 못한다. 빛의 존재로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만, 그러나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다.

 

다섯 번째는 낙원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황금빛'이라고 하는 것으로 둘러싸인 첫 번째 세상이다. 생각해 보라,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같은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다섯 번째 세상에서는 그 빛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모든 것들은 고유한 색을 가지고 그 싱그러움을 드러낸다. 그곳엔 또 밤이 없이 황금빛만이 있다. 그리고 음악, 아름다운 음악이 항상 들린다. 모든 것을 감싸는 빛은 그 색상에 따라 경이롭고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진동을 한다. 이 조화로운 운동이 '생명의 숨'이다. 공기를 호흡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낙원의 세상에서는 소리와 음악으로 숨을 쉬고 빛 속에 산다.

 

알다시피, 첫 번째 세상인 당신들이 사는 이 세상에도 육욕과 고통, 그리고 힘을 이해하고 통달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현실세계에 사랑을 가져왔다. 그들은 이곳에서 사랑의 표현을 비교적 쉽게 성취할 수 있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단계의 이해는 이 본보기 세상에서 쉽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여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첫 번째 세상에 있으면서 사랑을 베푸는 이들,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밖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은 이 세상을 떠나면 다섯 번째로 간다. 낙원이라는 세상에는 수십억 년이나 나이를 먹은 이들도 있으며, 이들은 이 낙원이 너무나 멋진 곳이어서 그 위에 다른 세상이 더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섯 번째 세상에서 사는 이들은 사랑을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한 순간에 원하는 것은 바로 나타나게 된다. 고기 잡는 것을 좋아하는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자 원하기만 하면, 그 순간 그는 바로 앞에호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호수에는 사이프러스와 포플러 같이 그가 좋아하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 호수의 가을 모습을 좋아하면 포플러는 이제 계피 색깔이 되고 사이프러스는 짙은 에메랄드빛으로 물든다. 낚싯줄을 던지면서 신선한 바람을 원하면 시원한 미풍이 호수를 가로지르면서 불어온다. 그 풍치 좋은 호수 한가운데로 작고 연약한 지렁이 미끼를 던지고 어떤 고기를 잡고 싶다고 원하면 그것을 잡게 된다. 그 고기는 이 지구의 고기와 같은 모습이다. 이제 그 고기를 자신이 꿈꾸던 집으로 가지고 가서 조리를 한다. 그는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한다.

 

이곳에 사는 실체들은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그곳을 낙원이라고 부른다. 사랑을 깨닫고 표현하지 않는 이들은 도달하기 어려운 곳이다.

 

다섯 번째 세상에서 한동안 머물고 나면 모든 것을 둘러싸는 빛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자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곳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많은 이들은 왜 자신이 그곳에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하지 않는다. 그저 단순히 받아들인다. 그러다 결국 곰곰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빛과 음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러면 그때 눈부신 생명력의 에너지를 보게 된다. 이것은 평등함을 가지고 있는 에너지로서 빛과 꽃과 고기와 호수와 가을의 계피색 포플러, 모두가 대등하게 보인다. 이때부터 만물의 평등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고, 아무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기 시작한다. 이것을 보기 시작하면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이해하고 알게 되었던 그 모든 사랑을 가지고 온갖 사물, 온갖 실체의 하나됨을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섯 번째 세상으로 진보한다.

 

여섯 번째 세상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나무나 바람,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과 별개라고 믿고 있는 이에게, 다른 모든 것과 완전한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그것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여섯 번째 세상도 일곱 번째의 입구일 따름이다. 일곱 번째에서는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당신의 실체는 완전하게 그렇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나됨 안의 하나님'만을 보고 그 하나됨의 세상에 살 때, 그는 자신이 보는 그것이 되며, 또 그것과 더불어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치의 초상관성(超相關性)과 무상(無上)은 일곱 번째 세상의 특징이다.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은 여섯 번째 수준을 이해하는 것, 즉 당신의 본래 모습을 아는 것이다. 당신의 본모습은 순수한 하나님, 순수한 논리, 순수한 생각, 순수한 생명, 순수한 빛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체로서 본질이며 토대이다.

 

이제 일곱 번째이다. 눈부신 것보다 더 눈부신 것을 상상해 보라. 그 밝음의 진화하는 핵심은 색깔이 더 이상 밝음을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빛의 근원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눈부신 빛을 낸다. 밝음의 핵심에선 이러한 경이로움이 번쩍인다. 핵심이 있는 바다는 움직이고 팽창하며 위로 굽이쳐 오른다. 핵심이 굽이쳐 오르면 핵심에서 나오는 밝음은 빛의 열병식을 만들어 낸다. 빛의 다발이 외곽으로 퍼져 나가면서 그 핵심부는 계속 진화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그 핵심에 다다르는 이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라고 하는, 그 핵심에 다다라 밝음을 더하며 장관을 만들어 내는 이는 핵심에 대한 생각을 숙고하며 독특한 형태로 그 핵심이 되어 지속해 온 존재다.

 

핵심을 숙고하고 그와 하나가 된 당신은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근원이 된다. 핵심이 밝게 빛날 때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생각이다. 독특한 형태로 지속되는 당신의 생각에서부터 모든 생명의 의식이 양육되고 확장된다.

 

내 설명은 매우 모자란 것이다. 이 일곱 번째에 대한 비전은 공간과 시간, 측정의 한계를 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 감성적인 이해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마스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진화하고 이해를 넓히고, 한 순간 한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깨달음에 깨달음을 더함에 따라, 당신의 미래는 점점 더 확장이 되고 마침내 당신의 감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쌀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가 당신이 기쁨을 느낄 때이다. 이것이 일곱 번째 세상이고 하나님인 것이다. 여기가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다다르게 될 종착점이다.

 

 

마스터 : 왜 사람들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지 알고 싶다.

 

람타 : 마스터, 그 이유는 이곳에 있는 사람만큼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여러 번 살았고 이곳이 익숙하기 때문에 이곳에 돌아온다. 그들한테 이곳은 고향과 같은 곳이고, 말하자면 '뿌리'인 셈이다. 이곳을 떠날 때, 그들은 많은 이들에 대한 감성적인 애착을 가지고 떠난다. 그러한 애착은 죄의식이나 증오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도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졌던 이곳과 다른 실체들에 대한 애착은 감성적인 끈이 되어 생 다음의 생 또 다음 생으로 이어가며 그들을 다시 이곳으로 이끌게 된다.

 

그리고 여러 다른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경험을 쌓고, 그런 다음 그 이해와 경험을 가지고 이 세상에 돌아오는 모험가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경험을 완성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리기도 한다.

 

마스터 : 당신은 사람이 죽으면 그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세상 중의 한 곳으로 가고,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람타 : 그렇다. 말한 그대로이다.

 

마스터 : 그 결정은 어떻게 내려지는가? 누가 그 결정을 내리는가? 각자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인가?

 

람타 : 마스터, 각 실체가 살아온 전생에 상관없이, 누군가 저 높은 곳에 앉아서, 그에게 특정한 세상 또는 장소로 가라고 지시하거나 감독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지구에 오래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의 경우를 얘기해 주겠다. 그 사람이 이곳을 떠날 때, 그는 힘과 고통을 경험하고 이해하였다. 그는 또 사랑의 감미로움과 안온함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그의 이해가 다섯 번째 세상에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가게 된 곳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는 휴양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세상이란 실체들이 그들의 생각 - 생각은 그들의 소리이기도 하다 - 을 통해 그들이 상상하고 원하는 것을 쉽게 발현시키는 곳, 그것도 순식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곳이다. 그들은 색깔과 형상과 환상,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원하는 동안만큼 그들의 모든 꿈들을 계속하여 경험한다 - 무엇인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때까지. 그리고 실제로 더 있다. 그들이 볼 수 없는 두 곳의 세상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해는 그들의 사고방식 안에 들어있지 않으며, 또 그들의 삶에서 표현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 세상을 경험하려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 비록 그들이 미숙하게나마 사랑을 표현해 왔지만, 그들은 아직 모든 생명인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은 낙원의 세상에서 잠시 동안 지내고 난 뒤, 무엇인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다(도움은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 보라, 그 앞에 지극히 놀라운 실체가 나타났다. 빛 가운데 비단을 휘두른 눈부신 옷을 입고 있었다. 다가온 그이에게 물었다. "오 현자여, 제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이 낙원에서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내가 그토록 소원했으나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고기가 있고, 항상 꿈꾸어 왔으나 가져 보지 못한 그러한 집도 있습니다. 정원사가 필요하지 않은 꽃들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곳입니까! 내 옷을 보십시오. 이전에 입어 본 적이 없는 옷을 지금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많은 친구가 여기에 있으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여기에 나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 경이로운 것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혜로운 이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한껏 즐기고 있는 이에게, 그리고 무엇인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는 이에게, 자신에게 그렇게 베풀어 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고 있는 이에게 축복이 함께 하기를."

 

"사실 그것이 제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놀라운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을 약간 두려워하기는 했으나 이제 그분께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 마스터, 나와 함께 가세.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한 연못가에 도달했다. 아무 데로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마스터, 내 옆에 와서 앉아 저 연못을 들여다보게."

 

그 사람은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는 이 지상에서 살았던 삶을 보게 된 것이다 - 아기로 태어나서 모친의 젖을 빨고… 예쁜 엉덩이를 내놓고 뒤뚱거리던 시기를 지나고…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공깃돌 놀이도 하고… 젊어서는 이성에 끌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결혼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또 자식과 출세, 일과 친구, 그리고 재물까지.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는 그 자신을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생에서 자신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힘있는 사람이었으나 그 힘으로 누구도 노예로 만들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러한 것을 말하는 데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절에 그는 가르치고 터득하고 사랑하며, 겸손하고 영성이 순수한 이로 평판이 자자했다.

 

자신의 삶이 연못에 비치는 것을 다 보고 난 후, 그가 본 것을 깊이 생각하고 나서 지혜로운 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꽤 잘 했군요."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잘 했네. 매우 잘 했네… 하나를 빼고 말일세. 자네는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그 하나님을 자신과 모든 생명에게서 언제나 분리시켰다네."

 

"자네 부인을 돌아보게. 부인에 대한 자네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었지. 그러한 면에서 자네는 꽤 잘 했다고 보네… 한 가지를 빼고는. 자네 부인이 자네가 준 그 모든 것에 관계 없이 자네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할 만큼 자네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네. 그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자신이 정말이지 얼마나 위대한지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기지 않았네."

 

"그래서, 자네의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자네에게 제안하네. 다시 돌아가게. 자네가 표현해 놓은 것들이 그곳에 있고, 자네가 얻은 것이 그곳에 있네. 지금 자네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 존재 안에 있는 사랑을 표현하고, 모든 것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스스로 터득해야 하네."

 

"돌아가기로 결정했다면 한 마디를 더 해 두겠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주의하여 선택해야 하네. 자네 앞에 주어진 역할에 따라 자네 본연의 자아가 되어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일세."

 

"잠시 혼자 내버려두겠네. 잘 생각해 보게.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갖게. 돌아가기로 결정하면, 나에게 알려 주게. 가장 바람직한 길을 알려줄 수 있을 거네."

 

그 사람은 그곳에 앉아 조금은 지칠 정도로 생각을 했다. 그는 그전에 가져 보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가 돌아가면 그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그는 고민스러웠다. 그를 낙원에 있게 한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실체를 청해 그에게 말했다. "지혜로운 이여.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말했다. "필요한 것은 언제 자신으로 하여금 알게할까라는 결정이네. 언제든, 어디서든 괜찮다네. 지금 자네의 욕구에 따라 실행하려는 것은, 선택한 시간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자네에게 필요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네. 그러나 자네의 가족과 다시 함께 있고 싶다는 특별한 욕구가 있다면, 권하건데 - 이것은 단지 권하는 것일 뿐이네만 - 그들과 함께 지네게.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네가 가장 많은 배움을 성취했기 때문이네."

 

이 말을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하오나 지혜로운 이여, 질문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떻게 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혜로운 이가 대답했다. "자네가 자신을 알면, 그를 알게 되네."

 

그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의 가슴은 환해졌다. 존재하고 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그 자신과 똑같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신과 하나님을 연관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물었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내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연못을 들여다보게. 무엇이 보이는가?" 그 사람은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그가 두고 온 어린 아들이 이제 장성하여 사랑스런 여인과 사귀며 구혼하고 있었다. 서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의 행위가 막 시작되었다.

 

"기회가 왔네. 자네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네 - 자네 아들의 자식으로."

 

"내 아들에게? 내 아들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인지? 아버지인 내가 내 아들의 아들이 된단 말입니까? 그가 내 부친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 살았을 때에도 그는 자네의 부친이었고, 자네는 그의 아들이었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한번 반복할 따름이네."

 

그 사람은 생각을 해 보더니 지혜로운 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어떻게 내 아내의 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릴 때는 할머니를 몹시 따르게 될 것이네. 자네가 성인이 될 때쯤엔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가게 되네. 그리하여 자네 가슴속에 있는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도와주던 무엇인가는 할 일을 다 마치게 되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될 것일세."

 

그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여. 모든 것이 준비되면, 나는 내 아들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그에게 말했다. "곧 씨앗이 나오게 되네. 그것을 보는 순간에, 자신을 자네 아들의 빛의 일부가 되도록 하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가 돌아다보았을 때, 놀랍게도 그 실체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에 그는 그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이미 아들의 빛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그가 거기에 있는지 모르지만, 부친에 대한 느낌이 요사이 마음속에 자주 떠올랐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지금 나를 볼 수만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부친은 그러고 있었다.

 

어린애가 자궁 안에 들어서는 순간이 왔다. 그 사람은 이 어린애의 신체 구조 일부분이 되려고 했다 - 그가 원하는 삶에 따라 생각으로 그렇게 한다. 그는 수정하는 순간에 몸을 점유할 수도 있고, 태어나고 나서 일년 후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그 사람은 매우 민첩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그 어린애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밀어 넣었고,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고 한 순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다. 처음 그가 알게 된 것은 목에서 나오는 기침이고, 누군가 눈을 닦아 주고 포근한 무엇으로 그를 감싸 준다는 것이었다…

 

그 삶에서 비록 어린 아기였어도, 이 실체는 이미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는 방법이며 또 그가 터득해야만 되는 하나님이 되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 실체의 이름은… '붓다'이다.

 

항상 당신이 선택한다. 항상 당신한테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만약에 낙원에 있던 그가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그 다섯 번째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세상은 그의 지혜와 빛으로 축복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람타] 7장. 죽음과 초탈 [45p]

 

7. 죽음과 초탈

 

 

죽음은 꼭 따라야 하는 법칙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러면, 이곳에 돌아오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도 없고,

마음대로 오갈 수 있게 된다.

 

 

마스터 : 최근에 내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왜 이 아이는 나에게 오기로 하였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는가?

 

람타 : 표현하는 데 필요한 육신을 얻으려 할 때, 그 부모를 어떻게 선택하는가? 수많은 이유, 수많은 대답이 있다. 한때 이 지상을 떠났으나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는 이들은 아기를 낳을 실체를 기다리고 있다. 과거 이곳에서 자식을 낳고 살았으므로 이들은 생명의 유전형질 - '부모'라고 하는 - 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대부분 자신에게 친근한 이들 - 다른 생에서 자신의 부모이기도 하고 자식이기도 했던 이들을 부모로 선택한다. 그리고 전혀 낯선 부모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단지 그 부모가 이 지상에서의 표현 수단을 제공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있는 매개체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자신에 맞는 몸을 얻기 위하여 수백 년을 기다려야 한다.

 

아무도 실제로는 누군가의 부친이나 모친이라 할 수 없다. 모두가 생명의 양친 원리인 하나님의 아들이며 딸이다. 모두가 서로의 아들이며 딸이고 서로가 형제자매이기도 하다. 당신의 자식이나 부모는 형제자매이며 하나님 마음의 동등한 일부이다.

 

각 실체는 출중한 미모나 부를 얻거나,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곳으로 오기 전에 알고 있다. 그들은 이곳에 살고 싶기 때문에 오는 것이고 이 수준에서 감성적인 배움의 안에 감성적 이해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진정한 보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안에 감성적 이해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진정한 보배이기 때문이다. 이곳이든 다른 세상이든, 아니면 다른 차원이든, 그 보배는 당신에게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당신을 선택한 실체는, 마스터, 당신의 증조부였던 이이다. 그는 일 세기 후에 자신의 혈통을 통해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식을 가지고자 하는 당신의 욕구가 그를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제 돌아올 수 있는 매개체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실체는 당신이 영글게 해줄 열매를 위하여 '대기하고' 있다. 여기 청중 가운데에도 그들의 빛의 장(場)에 실체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 실체들은 '줄을 서서' 수정(授精)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스터 : 그 아이는 사내라고 생각해도 되는가? - 그가 내 증조부라면?

 

람타 : 그렇다. 그래도 좋은가?

 

마스터 : 그렇다. 매우 좋다! 람타, 나에게 또 다른 질문이 있다. 우리는 모두 이곳에 오기 위하여 출생이라는 방법을 이용해야만 하는가?

 

람타 :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먼저 이 지상은 삼차원 인지(認知)가 가능한 곳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지상은 물질이라는 삼차원 형상으로만 생각이 보이게 된다. 이 지상은 물질의 밀도이다. 생각이 빛이라는 진동률로 확장하고 나서 진동률을 줄여 전기단위가 되고 전기 단위에서부터 더 거친 물질이 되고 이 거친 물질에서 이 지상의 고형체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물질은 진동률을 낮추어 가장 조밀한 형태를 가지게 된 빛인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들이 모두 같은 밀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모두 같은 진동률로 진동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당신의 몸도 앉아 있는 의자와 같은 진동률로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의 감각이 빛의 가장 낮은 진동률인 물질을 인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이 물질 수준이 당신에게 실재한다.

 

당신은, 당신의 근본은, 물질보다 더 높은 진동률을 가진 빛 에너지이기 때문에, 물질로 된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지상의 물질을 통과해 버릴 것이다. 몸이 물질 밀도를 가지고 있고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이 지상의 물질을 자각하고 경험하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물질 진동률의 일부가 되고 싶다면, 당신은 발현된 몸에 거하고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 몸을 가지는 방법 중에 하나는 출생을 통하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 경험을 쌓기 위한 몸을 가지는 나머지 방법은 '초탈(超脫)'을 통하는 길이다. 초탈하기 위해서, 당신은 먼저 탄생 과정을 거쳐 태어나고, 자아의 통합성을 전체적으로 유지하며, 뇌라는 기관을 완전히 활성화시켜야 한다. 뇌의 기능을 일단 완전하게 활성화하면, 당신은 마음대로 몸의 진동률을 올려서 물질 진동률을 벗어나 빛의 진동률에까지 갈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릴 수가 있다.

 

초탈은 단지 당신 존재의 완전한 전체를 빛의 수준에까지 가져가는 방법이다. 죽음도 또한 그곳에 가는 분명한 한 방법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육체가 나이를 먹고 노쇠하여 더 이상 그 몸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은 몸이 없이 떠나게 된다. 초탈은 몸을 함께 가지고 가는 방법이다.

 

이 지상에서 초탈한 이들은 궁극의 것, 즉 죽음을 넘어선 이들이다. 생각의 힘을 사용하여 신체를 구성하는 분자 구조체의 진동률을 높이고, 그 몸을 빛의 존재에까지 가지고 가며, 그리하여 영원히 죽음을 초월하는 방법을 배운 이들이다.

 

마스터 : 초탈한 이인 당신이 어떻게 이 지상에 돌아오는지 궁금하다.

 

람타 : 마스터, 몸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면, 당신은 원하는 어떠한 진동률로도 올리고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의 진동률로 내려오고자 한다면, 다른 생, 다른 가족, 다른 나라에서 살기 위해 다른 신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생각이 제한된 지상에 다시 태어나 사회의식이라는 프로그래밍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당신이 진실로 누구인지에 관한 앎을 다시 얻기 위해서 자아를 표현하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육신은 자기가 온 곳인 순수한 빛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배울 필요도 없다. 이것이 환영이고 게임이라는 것을 다시 배울 필요가 없다.

 

한번 초탈을 터득하고 나면, 당신은 몸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고, 당신의 몸을 가지고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이 지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할 때마다, 몸의 진동률을 낮추고 이 지상과 같은 진동률로 바꿔주기만 하면 된다 - 그러면 당신은 이곳에 있다!

 

여기에 있는 이들 누구나 초탈할 수 있다. 당신들은 육신이라는 환영 뒤에 가려져 있는 전 우주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선택한다면, 제한 없는 생각으로, 당신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을 거스르는 판단을 극복하는 것을 배우고 모든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스스로를 허용할 때, 당신은 당신이 지향하는 어떤 이상(理想)도 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생각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생각을 몸에다 집중하고 그 몸으로 하여금 더 빠르게 진동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러면 몸은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理想)으로 고양되어 간다. 몸 전체가 더 빠른 속도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몸의 온도가 올라가고 몸은 빛을 내기 시작한다. 점점 더 진동이 빨라질수록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순수한 빛이 되고 순수한 생각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 보이던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마스터 : 초탈이 그렇게 쉬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초탈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람타 : 그 반대로 초탈은 지극히 쉬운 것이다. 마스터, 사실상 죽는 것보다 더 쉽다. 어려운 것은 자신의 생각을 거스르는 판단을 극복하는 것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자신이 그 일을 하는 인내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간의 환영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만 성공한다면 초탈은 이제 생각 하나로 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항상 자신의 몸을 유지한 채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마스터 : 당신은 죽음이라는 것을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람타 : 전혀, 그것을 초월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알다시피, 죽음이라는 것은 커다란 환영이다. 죽음은 이 세상이 받아들인 현실일 뿐이다. 모두가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현실이 된 것이다. 실체, 즉 유일한 현실은 생명뿐이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환영일 따름이다. 환영은 생각이고… 환영은 게임이며… 이것이 현실이 된다.

 

죽음은 이 왕국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 몸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훨씬 쉽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다시 자궁을 빠져 나오는 일을 경험하고 또 불행하게도 당신의 기억이 차단된 의식 속에 놓이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마스터 : 그러면 우리는 꼭 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인가?

 

람타 : 죽어야만 될 사람은 없다. 자신이 죽는다고 믿을 때에만 죽게 된다. 아무튼 몸은 꼭 죽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몸을 설계한 신들은 그토록 짧은 순간 동안만 살도록 설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몸을 기관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내분비선에 의존하여 존속하게 만들었다. 내분비선에서 나오는 호르몬에 의하여 몸은 수십만 년을 존속할 수 있고 결코 늙지 않고 살 수 있다. 이것이 세포구조에 프로그램된 내용이다. 지구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전에도 이 지구상의 실체들은 수천 살이 되도록 살았다.

 

죽음은 몸이 종말을 맞이하는 것일 뿐이지, 개성을 가진 자아가 종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몸의 생명력이 소진되고 몸에 죽음이라는 것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은 개성을 가진 자아의 태도이다.

 

당신의 몸은 시키는 대로 반응한다. 심장 근처에 있는 영혼은 감성체를 통해 전체의 몸을 다스린다. 이 영혼에 의해 몸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호르몬이 몸 전체로 분배된다. 영혼이 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태도와 사고방식에 따른다. 이 지상에서 당신들이 굳게 지니는 태도 때문에 호르몬은 사춘기가 지나면 생산이 중단되어 버리고 있다. 그 호르몬이 생산되지 않으면 죽음의 호르몬이 몸 안에서 활성화되고 몸 전체가 고장나기 시작하며 노화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음의 호르몬이 몸 안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당신이 죄책감과 자기 비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아름다움이란 젊은 시절의 용모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 존재의 인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자신을 묻어 줄 보험을 들어 두고 죽음을 기다린다. 당신이 아프거나 병들어 누워 있을 때를 대비하여 재산을 지키기 위한 보험을 들어둔다. 이렇게 몸체의 노화와 죽음을 가속하기 위하여 가능한 여러 가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신이 전적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몸은 단지 하인이자, 축적된 생각의 도구일 뿐이다. 장엄한 창조물이며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섬세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몸은 그 자체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창조되지는 않았다. 하인의 역할을 위해서 특별히 창조되었고 당신이 허용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존속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당신이 몸이 시들고 죽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노화'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사랑과 행복, 기쁨을 스스로 부정한다면, 몸은 점점 쇠퇴하여 죽음이라는 와해과정을 겪게 된다.

 

마스터, 당신이 선택하기만 하면, 바로 이 순간 당신은 시간을 완전히 멈추고, 지금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은 환영이 아니던가? 누가 시간을 보았는가? 커다란 허구가 여기에 있다. 이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거부하고 그리고 시간을 전적으로 숭배하며 시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바로 당신의 내면에,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에서, 몸의 나이를 젊게 되돌리고 계속해서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단지 당신의 태도에 달렸다. 몸이 나이를 먹거나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당신의 태도를 바꾸어라. 몸에게 말하라. 몸은 영원히 살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몸의 종말을 인정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삶에서 제거하라. 몸은 결코 종말을 맞지 않는다. 결코 늙음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아는 단어에 포함하지 말라. 영원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라. 생일 축하는 그만두어라. 이것은 오직 노화 과정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자신의 탄생을 인정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나이를 거꾸로 세라. 그리고 점점 젊어져라. 죽음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음을 모르게 될 것이다.

 

항상 현재 속에서 살아가라. 지금 현재 이외의 어떠한 미래도 인정하지 말라. 당신이 그러하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당신의 지금은 영원이 될 것이다. 당신이 얼마 동안 살 것인가에 대해서 결코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항상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영원하다고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 그렇게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이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마스터. 당신의 몸을 축복하라. 당신 존재의 주인인 영혼에게 말하라. 젊음의 효소를 분비하도록 명령을 내려라. 그러면 그렇게 할 것이다. 몸은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라. 몸이 어떻게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가? 몸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함으로써 할 수 있다!

 

불사는 필사에 대한 이해를 지워 버릴 때에만 가능하다. 미래나 과거 속에 살지 말고 현재의 연속으로 살고, 삶에 대한 태도가 죽음에 대한 기대보다 더 클 때 죽음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인간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제 지워져 버려야 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야 된다. 이러한 이해가 지상에 있는 모든 이에게 살아 있는 현실이 될 것이다. 그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마스터 : 초탈에 대한 의문이 하나 더 있다. 예수가 부활하여 다시 나타났을 때 그가 한 것이 초탈인가?

 

람타 : 바로 그것이 예수아 벤 죠셉이 그 일을 해냈던 방법이다. 나 자신이 했던 것이고, 붓다가 했던 것이며, 오시리스, 오메카, 유카드, 라카비아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이도 수천이 넘는다.

 

마스터 : 여기 있는 많은 이들이 지금 생에서 초탈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보는가?

 

람타 : 적은 수의 사람이 이 생에서 초탈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몇 안 되는 사람만이 여기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진심으로 깨닫고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죽을 것이다. 나이 먹고 노화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이 훌륭한 기계를 쓸만하다고 여길 때까지만 돌본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 것이고 몸은 늙게 되어 죽어 가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영성과 영혼은 몸에서부터 떨어져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질의 밀도로 다시 돌아오려면 표현할 매개체가 필요하고… 그래서 당신은 다시 태어난다.

 

여기에 있는 대부분은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몸이라는 겉치레가 제거되고 다른 몸으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다면, 머지않아 초탈을 이해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들은 초탈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마스터 : 태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몸을 위해서 섭취해야 할 것이 있는가?

 

람타 : 몸에 관하여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걱정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 몸은 항상 아름답다는 것을 알라. 그러면 아기가 태어날 때도 똑 같이 느낄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배불뚝이가 되어도, 그 아이는 행복한 영혼이 될 것이다. 도움이 된 게 있는가?

 

마스터 : 아주 많다. 고맙다.

 

람타 : 그리고 마스터, 자식을 양육할 때, 성장하면 삶이 더 달콤할 것이라고 결코 말하지 말라. 그것은 다른 실체를 매우 제한하는 행위이다. 생명의 모든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끔 해 주어라. 아이가 천천히 자라서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허용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하는 형제에게 경이로운 축복이 될 것이고, 이 지상의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지어다!

 

 

 

 

 

 

 

 

 

 

 

[람타] 8장. 창조와 진화 [50p]

 

8. 창조와 진화

 

 

당신만이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창조되었다.

다른 모든 것은 생각과 느낌으로 당신이 창조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빛을 밝혀 놓았는가? 누가 꽃의 아름다움과 나무의 장엄함을 만들었는가? 누가 인간이라는 이 수수께끼와 경이로움을 만들었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한 이는 생명 전체인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당신들, 신들이자, 모든 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아들들이었다. 당신들 모두! 하나님은 원질이며,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는 생각 덩어리이다. 그렇지만 당신들,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이 있으며, 자유의지라는 신성한 근본을 가지고 있는 당신이야말로 생명의 숭고한 창조자들이다.

 

하나님은, 진실로, 생각 전체 -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인 그 생각으로부터 장엄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이는 바로 당신들이다. 당신은 자신의 창조적인 힘과 자주적인 신격으로 생각을 받아들이고, 붙잡고, 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지성을 가지고 당신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듬어 냈다.

 

잠시 한 가지를 상상해 보라. 당신 존재에게 재미있고, 감격적이며, 활기차게 느껴지는 그러한 상상을 해 보라. 그리고 그 상상의 감성을 전부 느껴 보라. 그렇게 이 우주는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창조된다.

 

내 사랑하는 마스터여, 모든 생명의 진정한 창조자는 당신들이다. 밤하늘에 보이는 빛의 장관을 만든 이는 바로 당신들이다. 색상과 디자인, 감촉, 냄새가 있는 현실을 창조한 이는 바로 당신들이다. 당신들은 진정 존재하는 모든 것인 위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피조물이다. 당신들은 우주의 사생아가 아니다 - 우주의 창조자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지고 지성이면서 인간이라는 피조물로써 표현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당신의 생각, 느낌, 현신을 기다리고 있다.

 

존경하는 내 형제여, 당신은 신성함을 갖춘 빼어난 피조물이다. 당신 존재 안에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지성과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육신만이 전부가 아니다. 당신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창조 능력을 물질에까지 확장하기 위해서 형상을 통하여 표현하는 지극히 경이로운 실체이다.

 

당신의 창조적 사고작용이나, 그 지고 지성, 영혼 안에 있는 근원적인 감성이 없다면 - 당신에게서 이런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없다면 -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당신의 창조적 능력이 없다면, 삶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스스로를 넓혀 나가 고귀한 생명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까지 살아보지 못한 영원으로 퍼져 나갈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없이는, 아무 것도 그 존재가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한송이 꽃이 그 사랑스러움에 반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꽃의 생명이나 아름다움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신이 없이는, 그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없다면, 이 세상은 창조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형체없는 행성에 불과할 것이다. 당신이 없었다면, 계절이란 것도 없고 꽃이 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태양은 결코 떠오르지 않고 바람은 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의도적인 계획에 따라 이 왕국을 창조하였고, 모든 것은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흔쾌히 나왔기 때문이다.

 

누가 이 장엄한 곳을 구상하여 당신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겠는가? 바로 당신이 그랬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실로, 지고 지성을 가진 피조물이니까. 당신이 지고 지성을 가진 피조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 당신은 처음부터 항상 그랬다!

 

지금 나는 당신들에게 실제로 무한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그러나 먼저 당신 자신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도록 해 주어야 되겠다. 당신이 신성하다는 것을 알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고 지성과 전능한 힘을 먼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의 유산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태초에 어떻게 당신이 전능한 힘을 가진 한 줄기 빛이 되었는지 그리고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로 진화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책 중의 책에 이렇게 쓰여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노라. 모든 것이 그 말씀에 따라 생기게 되었느니라." 이 얼마나 부적절한가! 말이란 생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생각이 근본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당신이 태초라 하는 때에), 생각의 무한함만이 전부였다. 여기서 생각의 무한함을 나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 아버지라 일컫는다. 당신들이 말하는 하나님이란 더 제한되지 않은 이해로 본다면 생각이다 -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원인이며 기반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 존재해 왔던 모든 것, 존재할 모든 것은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이 생각인 지성을 하나님 마음이라 한다.

 

그래서 태초에 생각의 무한 공간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방향을 바꾸어 안으로 들어가 그 자신을 숙고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생각으로서 항상 그렇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에 대한 생각을 숙고하자, 자신을 특정한 형상으로 확장시켰다. 한 생각을 숙고하게 되면, 순수한 추론행위가 그 생각을 확장한다. 그러므로 생각은 커지고, 더 위대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확장을 해보지 않았던 하나님은 그 자신을 숙고하여 더욱 위대하게 된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인식하여 더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했을까? 사랑이다! 그 숙고하는 생각의 목적과 근본은 사랑이다. 자신을 숙고하여 독자적이고 확장된 형상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킨 것은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움직임으로부터 당신들 모두가 태어났다. 하나님이 자신을 포용하고 사랑하여 더 위대해질 때, 당신들 모두 하나님이 자신을 확장한 그것이 되었다. 당신들은 모두 그 경이로운 순간에, 최초로 숙고하고 확장한 생각의 빛나는 일부분이 되었다.

 

하나님이 최초로 창조한 개체로서, 당신들 모두는 하나님, 곧 신(神)이자, 그의 아들이자, 마음이라는 신성한 지성의 일부가 되었다. 당신들, 신들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한 유일무이한 피조물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복제한 유일한 피조물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확장된 형태로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인 모든 것은 그의 사랑하는 분신들의 집합으로 무한하게 존재한다.

 

하나님은 억제할 수 없는 숙고하는 생각이다. 이를 생명이라 한다 - 당신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지하는 일이 없는 그 지속성이다. 생명인 생각이 지금처럼 확장을 영원히 지속하려면 그렇게 지속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당신이다. 당신들 모두가 하나님 마음의 일부가 되었고 그리하여 당신에 의해서 생명은 확장을 영원히 지속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시간으로 잴 수가 없다. 영원이라는 것이 이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은 현재가 지속하는 것이고, 현재가 영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들 각자에게 지금까지 그래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한 가지를 주었다. 그것은 생각 전체이자, 하나님 전체이다. 하나님 자신은 당신들 모두에게 신성한 지성과 독존적이며 창조적인 의지를 주었다. 당신들의 존재 전체인 하나님을 위해서인 것이다. 당신은 지성과 자유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인 그 생각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얻었고, 당신이 숙고하는 사고작용에 따라 자신을 확장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신성한 마음인 하나님은 자신을 계속 확장하고 있으며, 당신에 의해서 더 커지고 있다. 당신이 어떤 방향으로 확장을 해도 하나님은 바로 그것이 된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분신들 모두가 확장함에 따라 하나님도 변화하며, 하나님이 또 무엇이 되든 당신들은 바로 그것이 될 수 있다.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숙고하는 생각에 의하여 항상 이 하나님이라는 지위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확장하며, 비할 데 없이 경이로운 왕국이다.

 

태초에 생각이 자신에 대하여 숙고할 때, 그 자신은 빛이라고 하는 생각원(原)으로 확장하였다. 빛이 먼저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생각이 숙고되고 확장될 때마다 빛을 발하는 낮은 진동률로 내려졌기 때문이다. 빛은 그래서 숙고하며 확장하는 생각이 그 진동률을 낮춘 첫 번째 형태이다.

 

당신의 기원은 빛의 탄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숙고하는 생각에 따라 태어난 빛의 입자는 한 개체, 신,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는 창조의 순간에 바로 빛의 존재가 된 것이다.

 

모두가 일순간에 동시에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모든 실체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숙고하는 순간, 생각에서부터 빛으로 창조되었다. 생각의 공간에서부터 발산되는 빛은 모든 생각의 흐름, 곧 '생각의 강'이라 하는 하나님 마음에 가까워져서 그의 일부가 되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지만, 당신이라는 빛은 지성이다. 이것이 당신이고 하나님이 확장된 형태로서의 빛이다. 당신 본래의 모습이고 영구한 본체인 이 신성한 빛은 당신 존재의 영성이다 - 나는 이를 당신 존재의 신이라 부르고 있다. 당신의 영성이 하나님이고 하나님 마음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당신은 본래의 영성, 본래의 신격, 본래의 광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숙고하고 빛으로 확장해 나가던 그 태초의 순간에 빛의 몸체가 된 채로.

 

당신이 태어난 그때, 하나님 자체인 생각은 당신 존재의 영성을 스쳐 갔으며,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감성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당신의 창조력에 의해서 영혼이 탄생되었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흐름을 붙들어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혼은 지속적으로 흐르는 이 생각의 흐름을 붙들어 감성의 형태로 가만히 저장해 둘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생각을 느낌의 형태로 기억하는 것이다.

 

영성 안에 거주하는 영혼은 당신이 창조원(創造原)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창조하려면 생각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 분명하고 단단하게 붙들어 둘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그 생각을 숙고할 수 있고, 창조적 가치로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확장된 것을 현실이라 한다.

 

예를 들어 새롭고 독특한 꽃을 창조한다고 해보자. 먼저 그 꽃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야 한다. 꽃에 대한 생각은, 당신의 영성 또는 당신 존재의 빛과 하나가 되어 있는 지속적인 생각의 흐름으로부터 가져온다. 그러면 그 생각은 영혼 안에 감성이라는 형태로, 하나의 이미지로서 분명하게 자리잡게 된다. 욕구에 따라 당신은 그 '꽃'의 이미지를 회상하고 숙고하며 독특한 형상과 색조, 그리고 높이 등등 원하는 대로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자기만의 꽃을 창조할 수 있다. 그 생각을 기억 속에 완전하게 꾸준히 지님으로써, 당신은 그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 낼 수 있다.

 

영혼이 없으면, 당신은 하나님을 창조된 형태로 확장할 수 없다. 숙고하고 확장하며 창조하기 위해서 생각을 가만히 붙잡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항상 생명의 진정한 가치이다. 창조에 시작도 없으며, 또 분명히 끝도 없다. 생각이라는 근원에서부터 나온 창조자는 당신들 전체이다. 빛의 실체이고 신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인 생각에서부터 나온 분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분신이 무엇을 창조하든지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확장된 자아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질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 물질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물질의 창조자이자 설계자는 예술가 중의 예술가이다. 그가 바로 당신들 모두이며, 당신이 신인 것이다. 태초부터 당신들은 생각을 통하여 바라보는 어떠한 이상이라도 물질로 창조할 수 있는 지성을 의도적으로 부여받았으며 지금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생각에서 나온다. 모든 것이! 물질로 된 어떤 것도 창조하려는 이상을 형상화하기 위해 먼저 감성으로 감싸 안았던 생각에서부터 나왔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전에, 먼저 영혼이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하나의 이상으로 그려보아야 한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신들이 생각-이상으로 상념하고, 하나님인 물질을 그것에 맞게 맞추어 놓음으로써 창조한 것이다.

 

모든 물질은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과학자들은 빛을 붙잡고 그 진동률을 낮춘다면 물질로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이 의구심은 옳다). 그런데 그 빛은 어디에서 올 것일까? 생각이다. 생각인 하나님이다.

 

한 생각을 깊이 숙고하고 감성으로 감싼다면, 그 생각은 빛의 진동률로 확장한다. 그 빛의 입자 운동을 느리게 하고 농축하면 전기 단위가 창조된다. 이 전기단위는 음극과 양극을 가진 전자기장이다. 이것을 전기라 한다. 그 생각을 더 느리게 하고 좀더 농축하면 전자기장을 지나 그 전기단위는 물질로 결집된다. 물질은 분자구조와 세포 구조체로 더욱 결집되어 형상을 만든다. 이제 그 형상은 영혼이 창조이상으로서 상념한 그 생각에 의해서 유지된다.

 

모든 것은 무한 속도의 생각에서 나와 속도를 줄인 빛이 되고 그러고 나서 그 빛의 속도를 줄여 주위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사랑하는 마스터여, 사고작용을 통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광휘를 창조한 이는 바로 당신이다. 생각에서부터 빛으로, 전기단위에서 물질로, 그리고 형상으로 모든 것을 창조한 이는 바로 당신이다. 그저 생각하고 느낌으로써 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였다. 생각이었으나 진동률을 낮추어 빛이 된 당신은 그 빛이 된 자신을 숙고하였고, 자신인 그 빛을 사랑하였다. 또 그렇게 빛을 한 단계 더 낮추어 전기단위를 만들었다. 하나님이 그 전기단위로 낮아진 것이다. 당신의 사고작용을 통하여 그 낮아진 전기단위를 숙고하면서 전기단위가 거친 모습의 물질 수준으로 낮추어졌다. 물질은 '결집된 생각'으로서 생각의 가장 낮은 형태이나 '하나님이 그 자신으로'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맨 처음 시작해야 할 것은 소위 '생각에서 물질로의 변환과학'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과학은 결코 가르쳐지지 않았다. 단순히 이해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미 개입되어 있는 생명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과학, 이러한 이해로부터 형상이 창조되기 시작하였다.

 

창조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태초에, 신들은 자기 자신을(빛으로서의 자신을) 숙고하고 빛의 이상을 물질로 만들어 항성들을 창조하였다 - 수십억 단위의 수조 배만큼 많이. 모든 항성은 이미 전기단위의 진동률을 낮추어 얻어진 가스 성분 물질들이 응축되면서 창조되었다. 달리 말하면 융합반응을 일으켜서 창조된 것이다. 생명의 중심이 되는 불꼴인 거대한 항성으로부터 행성이라고 하는 회전 구체가 창조되었고 일정한 궤도로 밀려 나갔다. 이 행성에서 신들은 한 가지 계획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 신인 당신이 계획을 실행하는 데 영겁이 걸렸다.

 

누가 이 태양계, 그리고 태양계가 모여 돌아가는 항성계 전체를 창조했는가? 그것은 당신이다. 정말이다! 당신이 계획하였다, 간단히. 생각을 숙고하면서 당신이 창조한 그 모든 것은 당신의 경험을 확장했으며, 그 경험은 당신의 영혼 안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느낌이 생겨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바로 이 느낌을 통하여 물질세계가 창조되었다.

 

당신이 신성하다고 하는 이유는 당신이 맨 처음 생겨난 빛의 불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주적 의지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 그는 우주 자체이다. 우주를 창조한 이는 바로 당신이다. 사고작용으로 그 우주를 그려 내고 영혼으로 그 우주를 느끼는 방식으로 창조하였다.

 

 

당신들 대부분은 오래 전에 지구라는 세상에 내려와, 여기에서 모든 생명을 창조하고 진화하게 한 신들이었다. 이 세상의 시간으로 수백만 년도 더 걸려, 당신은 하나님 자신인 생각에서 취하고, 당신의 지고 지성과 창조력을 이용하여, 이상적인 창조를 구상하였다.

 

빛의 실체인 당신은 물 속에서 가스 성분의 상호작용에 따라 형성된 박테리아로부터 유기체를 구성하였다. 이것에 기초하여 당신은 다양한 생명체를 창조하였다. 초기에 당신들이 창조한 것은 단지 물질의 덩어리로서 '어떤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때 당신의 창조성은 단순하였다. 당신은 비로소 물질계를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며 덩어리로부터 창조하는 방법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억 년이 걸려서 당신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이 지상의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였다.

 

당신에 의해 피조물이 고안되었다. 피조물들은 당신의 창조적 감성의 표현으로서, 창조적 생명력 - 움직일 수 있고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생명형태이기도 하다 - 으로서 고안되었다. 꽃은 당신들 중의 한 집단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색조가 들어가고 향기가 첨가되었다. 그러고 나서, 꽃의 다양한 모양새가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탄생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힘들여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빛의 실체로서 당신은 노동을 할 수 있는 몸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창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그것이 되었다. 당신은 물질에 본질이 있게 하고, 물질에 개성을 부여하고, 지성과 모양새를 갖춰 주기 위하여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의 일부가 되었다. 일단 피조물이 그 창조자의 지성을 가진 살아 있는 것이 되면, 당신은 그 피조물에게서 물러나서 더 위대한 창조를 찾아 나섰다.

 

이곳에서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이 그 창조자의 '생명의 숨결'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아름답고 고상하지도 않고, 의도적인 의미를 가지지도 못할 것이다. 피조물에 유전기억의 틀인 본능이라는 지성을 주어 숨을 쉴 수 있게 한 이가 바로 당신이다. 본능은 피조물에게 존재하는 목적과 수단을 마련해 주었다. 피조물이 생식과정과 유전인자의 공유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종은 아직도 본능이라는 지성을 지니고 있다. 이 본능은 진화를 계속하는 형질을 부여했던 그 위대한 창조의 신들이 불어 넣어준 생명의 숨결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그 자체 안에 창조자이며, 신인 당신들이 부여한 생명의 불꽃이라는 신성한 근본을 가지게 되었다.

 

먹이 사슬이 분명하게 구축되고 나서 신들은 자신이 직접 피조물을 경험하고 창조성을 계속 표현할 수 있는 물질적 매개체를 창조해야겠다는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피조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경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몸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침투하는 진동률로서 물질을 통과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빛의 형체를 한 생각인 신들은 꽃이 될 수는 있었으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속성을 알 수 없었다. 신들은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서 나무를 느낄 수도 없고 감쌀 수도 없었다. 돌멩이를 통과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느낄 수는 없었다. 생각은 돌멩이라는 물질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이라는 낮은 진동률의 속성을 감지할 수 있는 감도는 가지지 않았다.

 

신들이 꽃을 냄새맡고 만져 보고 꽃으로 자신을 장식해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고 그 생생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꽃과 같은 진동률로 진동하는 물질적 매개체를 창조해야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고 나서 인간이라고 하는, 육신을 창조하였다. 자신들이 창조한 피조물을 경험하고, 거친 물질, 또는 소위 말하는 '물질의 견고성' - 가장 낮은 형태를 한 생각 - 을 통하여 창조능력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들이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움직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이상에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신으로서 완전한 몸체였다. 영혼을 보전할 수 있고 신의 영성으로 감싸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육신을 통하여 신들은 꽃을 만질 수 있고 그 향기를 냄새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경험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가장 귀한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으로 영혼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이제 신들은 나무를 쳐다볼 수 있고, 숙고할 수 있으며, 냄새를 즐기고 아름다움을 만져 볼 수 있게 되었다. 신들은 서로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포용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가 돌보아 줄 수 있으며, 관찰할 수 있고, 그리고 지독하게 변덕스러운 관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들은 이제 인간으로서, 느낌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속성을 물질에서 다루는 전혀 새로운 모험을 하게 된 것이다.

 

빛의 존재로서 물질의 밀도를 가지지 않았던 신들은 이제 자신의 이상에 적합한 밀도를 창조하였다. 그들은 육체의 물질을 통하여 전혀 다른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었다. 생각이 물질이라는 형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인류라고 하는 세포덩어리의 지성으로 발현된 신성한 생각의 하나님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인간, 인간-신이 된 것이다. 인간 형상의 경이로움 안에서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확장을 영원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자신 안에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인간인 것이다.

 

 

맨 처음 인간은 일부 신들의 모임에서 많은 실험을 거쳐 생겨났다. 처음에는 남성만이 창조되었다. 그때엔 생식기조차도 없었다. 생식기는 몸 안에 있어서 소위 무성생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복제하였다. 그래서, 처음 태어날 때 모든 인간의 몸체는 비슷하였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어서, 지금 당신들 모습에 비하면 기괴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의 신들에게는 그 인간들이 정말 아름다웠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발은 빠르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 있는 동물들의 먹이감이 되었다. 그래서 신들은 오랫동안 시도해 보고 검증하고 변형시켜 나갔다. 마침내 자신들이 소유해도 좋을 만큼 완전하게 되었다. 육체가 완전히 다듬어지고 나자, 신들은 환호하였고 그 몸을 소유하여 새로운 모험을 찾아 생명을 탐구해 나갔다.

 

신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육체는 처음 설계에서부터 빛의 존재가 계속하여 그 몸을 개선해 갈 수 있는 강력한 구조체를 지니도록 만들어졌다. 매우 위험한 환경에서도 살아남고, 공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육체는 신이 감성으로 포용하는 모든 생각의 기억을 각각의 세포에 담아 둘 수 있고, 무성생식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나중에 '자궁을 가진 인간' 즉 여성이 더 완전한 형태의 인간으로 창조되었을 때, 유전자 배분이라는 방법으로 육체는 더 독특하고 섬세해졌다. 남성은 교접하는 시점까지 획득한 그의 모든 이해가 들어 있는 형질을 정자에 담아 여성의 난자에 넘겨주었다. 성교라는 행위로 두 사람의 유전 형질은 함께 모여 그들의 배움과 깨달음에 근거한 더 위대한 실체를 자식으로 창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더 나은 몸을 창조할 따름이지, 더 나은 영성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이해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 생존이라는 환경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 몸은 원시적인 형태에서부터 계속하여 완전하게 다듬어졌다. 소위 '진화'라는 과정이 당신의 연대기로 일천오십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금의 모습이 되는 데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당신의 몸은 아직 어리다. 인간이 직립 자세로 움직이기 시작한지 불과 일천오십만 년이 지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빛의 존재인 당신은 그 이전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어떻게 시간에 근거하여 숙고하는 생각의 시초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렇게 오래 되었다. 당신들 방식으로 시간을 말하자면 수십억 년에 걸쳐서 전기단위로부터 창조하였다. 그러고 나서 전기단위를 거친 물질로 낮추게 되면서 새롭고 다양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계획하고 탐구해 온 수십억 년이 지나 인간은 응축된 생각과 농축된 물질로 이루어진 숨쉬고 살아 있는 창조물이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당신이 창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현실이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면 그 현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은 사랑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조자인 당신을 통해 생명의 숨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꽃도 사랑 받고 있다. 꽃 또한 당신이 가진 아름다움의 형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그렇다. 또한 이는 모두 당신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위대한 빛의 신이고, 모든 생명의 위대한 창조자이다. 당신은 창조적인 물질로 확장되고 낮추어진 웅장하고 무한한 생각이다. 당신은 생각의 확장을 영원까지 지속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현신한 신이다.

 

 

마스터 : 나 자신은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믿고 배워나가야 할지 어떨지를 결정해야만 되는 입장에 놓여 있다. 당신이 말한 모든 내용은 나를 기쁘게 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가르친 모든 내용이 다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이 가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당신이 말한 모든 내용은 나를 기쁘게 한다. 당신이 말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나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있는가?

 

람타 :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하겠다.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를 말해 달라.

 

마스터 : 무엇이 사실이 아닌가? 글쎄, 예를 들자면, 청중이 가지고 있는 테이프 녹음 (역주 : 이 책의 내용은 여러 강연 테이프를 토대로 정리되었다. 앞의 설명 부분과 이 부분이 연속하여 정리되어 있지만 시간적으로 연속하여 진행된 것이 아니다.)을 들어 보니 당신은 창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말 아름답게 묘사해 주었다. 내가 들었던 다른 설명에 비해 매우 시원하고 상세하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그대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람타 : 그렇다면 어떻게 일어났는가?

 

마스터 : 내가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더 나은 설명을 찾을 따름이다.

 

람타 : 창조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마스터 : 두세 가지를 들어 보았다. 그러나, 당신의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다.

 

람타 : 왜 그런가?

 

마스터 : 글쎄, 더 상세한 것 같다.

 

람타 : 어떻게 그렇게 상세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을까?

 

마스터 : 경험.

 

람타 : 그렇다!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는 것은 내 경험에 의해서이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바이다.

 

마스터 : 그렇지만 내가 의심하는 바를 이해하는가?

 

람타 : 그렇다. 당신은 자신이 스스로 기억해 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마디 해 두겠다.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들어보라. 다른 설명들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당신을 확신시키라고?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 나는 결코 당신을 확신시키지 않을 것이다. 당신 자신만이 확신이 생기도록 허용한다.

 

마스터 : 그렇다면,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람타 : 좋다.

 

마스터 :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확장한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성심(聖心)이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창조하는 것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의미인가?

 

람타 : 그렇다. 태초에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허공이었고, 빛이 없는 진공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고 그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항상 그렇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그 자신은 빛으로 확장하였다. 생각이 처음으로 확장해서 된 것이 빛이다. 그 빛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태어났다. 왜? 하나님이 영원히 확장을 계속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빛의 형상으로 태어날 때 했던 것과 똑같은 숙고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탄생한 경이로운 순간부터 우리들 각자는 진화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확장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붙잡을 수 있고 감성이라는 형태로 간직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으로 들어가 생각을 숙고하고, 그 생각을 다시 창조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이 생겨나게 되었고,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동물은 자라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은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으로서, 자체로는 미발현된 감성이다. 생각이 영혼 안에서 감성으로 발현될 때까지는 그 생각은 신빙성이 없다. 생각이 일단 영혼에 받아들여지고 기록되면 그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그때서야 생각은 계획을 가지고, 구조를 가지며 타당성을 가진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누가 창조했는가?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생각일 뿐이다. 바로 당신, 생각을 붙잡아 그것을 물질이라는 낮은 형태로 느낀 신이자, 감성을 가진 인간인 당신들인 것이다. 당신이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한 생각이 영혼 안에서 느껴지고, 창조하고자 하는 이상이 생겨나 비로소 창조된 형태로 표현되기까지는 현실이 되지 않는다. 생각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당신이 현실이라고 하는 형상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느낌과 감성적 가치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매순간 성장한다.

 

창조된 형상은 그러므로 생각이 감성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물질이 창조된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창조하고, 진화하고, 구체화하고, 표현한다 - 당신이 선택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현재의 자신이 되도록 허용한 그 생명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 본래의 존재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 마음을 확장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하여 일할 뿐만 아니라 당신을 통해서 느끼기도 하고 존재하기도 한다. 당신이 바로 그가 존재하는 모습이다 - 그리고 그의 모습은 당신 삶의 매순간 다시 창조되고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신이 지금까지 해 놓은 모든 것과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항상 받아들여진 것이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은 생각과 빛에 의하여 태어난 것으로 당신이 창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천국, 하나님의 왕국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들인 당신, 결국 그 자신을 통하여 확장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당신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해 온 아름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스터 : 고맙다. 람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당신은 인간이 일천오십만 년 (역주 : 20세기 최고의 영능력자라는 에드가 케이시도 인간이 지구에 나타난 것이 일천오십만 년 전이라 했다.) 전에 이곳에 나타났다고 했다. 내가 이해하고 있기로는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증거에 의하면 인간은 일백만 년 전에, 기껏해야 이백만 년 전에 나타났다고 한다.

 

람타 : 이해를 도와주기 위해서 설명하겠다. 고고학자들은 발견된 물질의 방사능에 근거하여 연도를 추정해 나가는 방법을 쓴다. 방사선이 나오게 하는 것은 태양 빛의 원리이다. 그러나 태양에서 나오는 빛은 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이 지상에 직접 쪼여지지 않았다. 지구 행성은 오랜 기간 동안 물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이 대양이 된 것인데 그때는 물이 아직 대기중에 있었다. 태양으로부터 나온 빛이 대기중에 있는 물에 부딪치자 물은 빛을 산란시켰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산란된 빛만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빛에 노출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인간의 출현을 그들이 발견한 방사능만을 가지고 추정한다. 태양 광선이 실제로 비춰진 것보다 더 오랫동안 이 지상에 직접 비추어졌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신들은 일천오십만 년 전에 인간으로 출현하여, 여러 형태의 몸을 취했고 완전하게 다듬어 나갔다. 내가 당신에게 제시한 내용들은 당신이 깊이 생각하고 나서 이제 내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추론해 낼 수 있도록 해주는 단서이다.

 

자, 마스터, 내가 한 이야기가 왜 다른 창세기보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지 말할 수 있는가? 왜 그런지 아는가?

 

마스터 : 단순히 설명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람타 : 그러나 왜 당신 마음에 드는가?

 

마스터 : "우리 모두가 완전하고, 아무도 다른 이보다 못한 것이 없고, 또한 생명은… 영원히 지속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람타 : 그렇다! 그것은 또한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많은 내용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내 가르침에서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악마나 지옥, 죄악, 천벌, 두려운 하나님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 종교적인 가르침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실이 그러하다.

 

 

 

[람타] 9장. 천사보다 더 높은 [59p]

 

9. 천사보다 더 높은

 

 

인간이 되는 것은 신성한 경험이다. 인간이 되어 보았을 때,

당신은 하나님을 전체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진정 눈부신 존재이다. 당신들 모두 그렇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활기차고, 창조적이며, 독특하고, 정말로 신성하다. 지금까지 당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배워왔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삶이라고 하는 이해 속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 마음이 영원한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당신 자신이 진정 얼마나 귀중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나의 사랑하는 형제다 - 나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실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이 모든 우주와 모든 삶의 단계에 있는 모든 실체에게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은총과 지성으로, 그리고 그보다는 훨씬 더 위대한, 하나님이라는 사랑으로 연계되어 있다 - 경이로운 생각인 하나님은 아무리 터무니없는 짓을 한다고 해도 그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나 영원히 당신을 지지하고 유지한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장엄한 존재이다. 당신들 중에서 한 사람만 없었더라도 생명이나 우주, 분자 구조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 때문에, 삶은 지성과 드라마가 펼쳐지는 광장, 당신이 그러하고자 한다면, 생각의 형질이 밝은 색조를 띤 현실로 지속되고 있는 그 광장이 되었다. 당신은 진실로 소중한 존재이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웅장한 무대에 기여해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눈부신 존재이다. 인간이라고 분류되는 당신들을 보라. 용모가 비슷하여도 서로 같은 이는 없다. 당신들은 훌륭한 정원에 피어 있는 꽃들과 같다. 꽃가루의 수분(受粉)으로 더 아름답고, 색조가 깊어지면서 더 풍성한 꽃이 창조된다. 당신들 각자는 아름다우면서도 서로 다르다. 모두가 자신의 의지와 창의적인 계획으로 독특한 표현을 만들어 가고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당신들 모두는 한때 빛을 발하는 한줌의 생각이었다가, 영원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지속성이 되었다. 탐구하기 위한 더 위대한 왕국을 세우기 위해, 당신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 물질로 된 육신을 설계하였다. 달리 보면 생각의 결집체를 설계한 것이다. 그 육신으로 실재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의 정형 전체를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형상이 없는 빛이었던 당신이 무한한 창조성을 지향하는 모험을 하면서, 자신을 인간이라고 하는 세포물질로 변형시켰다. 그리하여 당신은 신-인간이 되었다. 하나님 마음이라고 하는 지성이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당신은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자신의 세포구조체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 수단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신성한 목적을 위하여 당신의 지고 지성을 육체의 물질에 통합시킴으로써 스스로 몸을 다듬고 진화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들이 설계한 진화과학에 따라 당신 자신을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종족에서 호모 사피엔스인으로 진화시켰다. 이렇게 하여 인류가 이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 억겁의 세월과, 수많은 시행착오, 진화, 허다한 상처를 거쳐 - 이제 직립인으로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당신들 모두는, 당신의 창조지성의 힘을 지금 단계의 삶 - 위대한 삶 - 에 드러내기 위하여 물질 세상이라고 하는 이곳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인 생각은 이곳에서 자신의 모든 형상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빛에서부터 밀도를 가진 물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걸쳐서.

 

지성은 어디에서나 번성하는 것을 아는가? 사실상 그러하다. 그러나 당신이 있는 지구라고 하는 이곳은, 생각과 물질의 결합체인 인류가 최고로 진화한 곳이다.

 

인간으로서 당신이 퇴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은 끝없는 생각의 과정 전체를 이해하려는 장대한 모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궁극까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왕국은 빛에서부터 전기단위로 물질로 형상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생각의 높은 진동률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가장 낮고 가장 조밀한 진동률로서 거친 물질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되어야만 당신은 생각의 모든 형태를 취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당신이 신-인간일 때, 당신 자신은 생각이고 감성이고 진화하는 의지일 뿐만 아니라, 빛이고 전기단위이며, 피와 살이라는 형상을 한 물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왕국 전체를 다 표현하지 못한다.

 

생각의 과정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당신의 본래 모습 즉 당신 자신인 하나님을 전체로 포용하기 위해서는 - 당신은 충분히 유연해야 되고 또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세상을 포함하여 실재하는 모든 세상에 출입이 가능해진다. 거친 물질계에서 살아 보고 표현해 보았을 때에만, 당신은 하나님을 물질의 형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신-인간이 되어 보지 않은 이들은 전체 생명에 대한 이해와 지혜를 얻기 위해서 돌이켜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완전히 갖지 못했다. 이 세상을 여행해 보고, 이 세상의 경이로운 일부분이 되어 본 이들만이 - 이 세상을 진보시키고, 산을 움직이며, 색조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신성한 기념비를 세워 본 이들만이 - 사랑과 기쁨, 그리고 창조의 복잡함과 그 얽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여행자들, 즉 당신들만이 영원을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 그들은 모든 생명을 위하여 영원을 창조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물질계가 존재하는 한, 그 물질계는 무한한 창조로 이어지는 생명의 지속성을 허용한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되는 것, 집합적인 인간이 되어 보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자, 영예이다. 그것은, 진실로, 신성한 삶이다.

 

'천사'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신성한 피조물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천사들은 커다란 약점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살아 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합리적 중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에너지이며, 결국에 신-인간이 될 신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나 자비심은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전혀 보이지도 않는 이가 당신이 되어 보지도 않고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류는 천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천사는 인간이라고 하는 제한된 형상으로 하나님을 이해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인간이나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단언컨대 인류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은 신성한 경험이다. 인간이 되었을 때, 당신은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이 되었을 때에만 천국 전체를 포함하는 그 끝단에까지 여행을 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 됨으로써 자신을 강등시킨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라는 실체가 되어 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 왕국으로 완전하게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상의 삶으로 전혀 내려와 보지 않은 이가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겠는가?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자신 속에 있는 불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보는 것은 값지고, 가치 있는 일이며, 현명한 결단이다. 모든 생명은 이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거친 물질의 지고 지성으로 이 불꽃을 경험하면, 하나님이 무엇인지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전체 - 내면과 외면, 물질, 피와 살, 사랑과 기쁨과 슬픔 - 를 완전하게 이해하였을 때,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 전체가 될 것이다.

 

당신이 지금 이 지상에 있는 이유는 현재 살고 있는 그 육신으로 하나님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려는 것이다. 당신의 창조적인 진화를 지원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며, 원자를 결속하고 지구를 우주의 특정한 위치에 유지시켜 주는 것과 동일한 생명력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하나의 우주적인 원리만을 갖는다. 항상 진화하고, 항상 확장하고, 그리고 항상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가는 목적은 언제나 생명을 경험하고, 생명으로부터 배우며, 그리고 배운 것을 다듬고 통합시켜서 다시 생명이라는 원리에 되돌려주는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창조'라 한다. 지혜와 이해를 얻고 자신이라는 최고의 미스터리를 찾기 위한 목적을 추구하면서 당신은 창조적인 생각을 하고 물질을 통하여 그것을 표현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거대한 환영이다. 모두들 삼차원 세상을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이 즐기고 있는 모든 게임은 환영이고 꿈이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이러한 현실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진정한 세계는 당신의 내면에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매순간 느낌과의 만남에 있다. 진정한 세계는 오직 감성의 관점에서만 실재하고, 논리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사랑에 지배된다.

 

당신이 당신 영혼의 느낌을 통해 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현실'이라는 이 세계는 실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물질의 낙원에 있는 모든 것은, 한마디로 말해, 창조의 경이로움에 참여하는 영혼들 안에 있는 느낌을 불러내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왜? 지혜라고 하는 삶의 가장 위대한 포상(褒賞)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지혜는 지적인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삶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감성적인 이해이다.

 

삶이라는 이 웅장한 무대는 당신의 왕국이다. 이곳은 당신이 당신의 환상, 당신의 상상, 당신의 꿈을 창조하는 무대이다. 이 경이로운 무대는 당신이 원하는 어떠한 꿈이라도 현실로 실재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당신이라는 하나님은 어떠한 생각도 꿈꾸고, 그 생각의 느낌을 받아들이고, 그 꿈을 현실로 발현시킬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중에도 원하면 언제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인간이 되라고 명령받았다. 하나님이 인간이 될 때에만 이 지상의 생명은 창조되고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정말 눈부신 존재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힘있는 존재이다. 당신이 갖는 모든 감성과 모든 생각은 생명을 창조한다. 생명이 나타나는 것도 당신한테 달려 있고, 나타난 그 모든 생명을 지원해 주는 것도 당신한테 달려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한테 달려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존재는 단지 그 자신의 이해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왕국 중에서 가장 보배로운 이 물질왕국을 누가 지탱할 것인가? 당신이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가 바로 당신이다. 생명이라는 무대에 무엇인가를 더 보태는 이가 당신이다. 이 하나님의 왕국을 고귀하게 하고 영광되게 만드는 이가 당신이다. 당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을 천사보다 조금 낮은 존재라고 항상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당신이 지금은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삶과 무지개와 색조와 빛이 진실로 당신이 누구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음 시대라 한다. 그 시대가 오면 이곳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하나님은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경험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어떠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당신은 영원 전체를 다룰 수 있게 된다. 무한한 생각 전체를 가지게 됨으로써 여러 요소들 - 물질과 시간, 공간, 거리… 그리고 당신 - 을 다시 평가하고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눈부신 존재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당신이 되기 위해서 이 천체 속에서 긴 여정을 겪어 왔기 때문에. 그 여정은 존재하는 모든 것 - 생각에서 빛으로, 전기단위로 분열하고, 거친 물질로 그리고 이 세상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었다. 당신들 모두가 그 여정을 겪었다. 그것은 변화무쌍했을 뿐만 아니라 용기가 필요했고, 모험도 따랐다. 그런데 불사의 위대한 자아가 변신하여 물질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생존을 위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 그리고, 아아, 대부분의 인간이 정말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당신들은 왜 나라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말하는 낯선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아는가? 당신들은 지금 내가 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시작되게 한 최초의 그 신성한 앎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영혼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당신은 자신이 단순한 물질 덩어리보다 더 나은 무엇임을 알고 있다. 피와 살 이상의 무엇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신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사실이 그러하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그리고 신성 원리인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에 태초의 빛이 있음을 발견하기 위해서, 태초에 자신에게 생명을 넣어준 그 생각의 숨결을 알기 위해서, 당신은 이곳에 왔다.

 

사랑하는 마스터여, 저 바람에게 생명을 준 이는 당신이었고, 당신 때문에 태양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당신 때문에 먹구름은 비바람을 불러일으켜 이 지구의 목마름을 적시고 자양분을 제공한다. 당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진정한 하나님인 생명의 사랑을 받기에는 자신이 열등한 존재라고 항상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지극히 사랑한다. 내가 당신처럼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처럼 환영을 따라 살았었고 당신이 꿈꾸는 그것이 되었다. 내가 갔던 곳은 당신이 가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삶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포용하기 전에는 당신은 결코 그곳에 가지 못한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께 경배를 드린다. 당신은 정말로 장엄하다. 당신은 진정 사랑 받고 있다.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이다. 당신은 정말로 소중하다. 영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생명의 이유이다.

 

 

 

[람타] 10장. 찾을 수 있는 하나님 [63p]

 

10. 찾을 수 있는 하나님

 

 

하나님은 결코 당신 바깥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는 노력조차도

당신 자신에게 온당치 못하다. 당신 안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 존재의 바깥으로 나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들 각자가 이 지상에 태어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존엄한 이유는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미스터리 - 자아라고 하는 그것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더 적절하게 말하면 하나님, 즉 당신 안에 있는 아버지이다. 태초에 당신을 신임한 이가 그였고, 그를 통하여 당신이 창조하고 진화하며, 결국 당신은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갈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되고자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되어야 할 그 기준점으로서 하나님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제 그를 살펴보자.

 

내가 사랑하고, 내가 시중들고 있고, 그로 인해 모든 경이로움이 만들어지는 이 하나님은 생명 전체의 지속성이다. 생명왕국이 지속되는 것은 영겁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 이 순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지금 이 특정한 순간에 하나님은 현재 있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있음인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지금 순간들에서 하나님은, 그 자체로 지속하고… 약동하고, 느끼며, 확장하고, 진화하는 - 자신의 존재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 모든 생명의 맥동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귀착점이다. 그런데도 경계도 없고 시초도 없으며 종말도 없다. 하나님의 있음 자리는 현실 위의 현실, 차원 위의 차원, 우주 위의 우주이다.

 

당신이 있는 이곳은 조그마한 은하다. 당신들만이 이 은하계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꽤 오만한 생각이다. 이 은하계 하나에만 100억여 개의 항성이 있으며 그 모든 항성에 생명을 키우는 여러 행성이 돌고 있다.

 

태양계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수로 셀 수 없다. 크고 작은 행성의 수, 생명이 존재하는 행성의 수는 더욱이 말할 필요도 없다. 수라는 것은 없다. 무한이라는 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당신 자신의 사고방식을 재조정하여 시간이나 거리, 계량을 넘어서 인식하여야 된다. 더 높은 현실계에서 보면 그러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이 존재하기 시작한 태초는 언제인가? 그런 것은 없었다. 하나님은 항상… 생각이었고, 공간이었다 - 텔스타에 생명을 주고 그것을 지탱하는 허공이었다. 텔스타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것은 빛을 물질로 변환하고 우주에 흩뿌려 놓아 별무리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텔스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생각, 하나님, 공간 - 하늘에 보이는 별과 영겁이 있는 그 거대한 허공이다. 만약 하나님을 무한하고 결점이 없는 형상으로 보고 싶다면, 공간이라는 열려진 무한을 상상해 보라. 왜냐하면 공간은 보이는 모든 것을 감싸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탱하고 신뢰하는 생각의 강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괘도를 가지고 항구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붙잡아 놓은 힘은 무엇인가? 이 공간상에 지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수백억 항성이 모여 있는 이 은하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태양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모든 물질의 흐름을 허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빛이 지나갈 수 있는 그 고속도로는 무엇일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그렇다면 수백억 항성과 그 항성계를 지탱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나에게 보여 보라.

 

한 수준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물질이다. 다른 수준에서 보면, 서로 다른 차원의 시간 흐름이고 평행우주를 창조하는 시간왜곡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물질이 생겨나게 되는 빛이라는 스펙트럼이다. 가장 위대한 수준에서 보면 당신을 제 위치에 있게 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생각이며, 공간의 영원함이다.

 

하나님은 맥동하고, 확장하고, 진화하며, 지금 현재가 영원으로 지속되는 생명 전체이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허용하는 있음이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펼침이며, 미래에 실현될 모든 약속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움직임이자, 실현해야 할 목적도 이상도 없지만 계속하여 생명을 창조하는 - 생각에서 빛으로 그리고 물질로 - 무한한 사고작용이다. 항상 변화하고, 항상 창조하며, 항상 확장하고, 항상 존재하는, 움직이는 힘으로서,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고, 전능하며, 항상 진화하고, 항상 움직이며, 항상 허용하고, 항상 존재하는 그러한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지금의 하나님은 그 다음 순간에는 같은 하나님이 아닌데 당신은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떻게 끝없이 열려 있는 우주를 인식하는가?

 

유한한 생각을 하는 마음으로는 시간과 거리, 공간, 물질을 초월하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유한한 마음을 가지고는 그렇게 먼데까지 도달하여 형용(形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이나 '아버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을지라도, 이것조차도 존재하고 있고, 존재했고, 존재할 모든 것 - 과거의 있음에서부터, 현재의 있음까지, 그리고 무한한 미래의 있음까지 - 을 언급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하나님이 되는 기준점을 찾을 수 있는가? 바로 당신 자신에게서다! 지금의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아버지와 똑같은 분신이다. 당신의 근본은 지속하고, 진화하고, 변화하며, 창조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생각이고, 빛이며, 전기단위이고, 형상이다. 순수한 에너지이고, 놀라운 힘이며, 맥동하는 감성이고, 지고의 생각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지성과 힘, 신성, 은총이라고 인식되는 이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야말로 바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 바깥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는 노력조차도 당신 자신에게 온당치 못하다. 당신 안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 존재의 바깥으로 나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신 안에 있는 아버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점이 꽤 근사하지 않은가? 당신이 무한한 창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번잡하게 노력해야 할 짐을 덜어 주고,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삶, 당신 자신의 사고 과정, 당신 자신의 있음에서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할 테니까.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감성적으로 아는 유일한 길은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감성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에 당신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안다. 나와 하나님이 하나이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처럼 되는 길은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단순히 당신 자신의 있음이 될 때, 당신은 끝없이 열리고, 무한하며, 창조적이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은 허용하고 있고, 당신은 움직임이며, 당신은 고요하고, 당신은 기쁨이다. 당신은 순수한 에너지이자, 강력한 지향점이며, 모든 느낌이고, 모든 생각이다. 존재하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 - 당신 존재의 전체로 그리고 당신의 온 숨결을 다하여 - 그리고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삶에 허용하는 것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단순히 당신 자신에게 허용하라… 있음이 되도록. 존재할 때, 당신은 모든 것이다. 하나님이 되는 길은…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람타] 11장. 사랑이라는 선물 [66]

 

11. 사랑이라는 선물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하나님이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이다.

생각의 차원들을 탐구할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 마음을 확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당신들 모두에게 부여한 그것이다.

 

 

당신의 신성한 의지와는 동떨어진 '하나님의 뜻' 따위는 없다. 만일 생명이 단 하나로만 표현되는 세상을 하나님이 원했다면, 당신을 창조하여 존재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 자신만의 의도와 독자성을 가지고 표현하는 의지를 당신에게 부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형제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이 그러한 가르침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의지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과 당신의 의지'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신이 무엇인가 확신하고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들 때, '하나님의 의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당신과 그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당신의 의지가 곧 그의 의지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신성한 의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결코 운명과 대치되지 않는다. 운명이란 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은 오로지 당신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순간을 창조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은 방금 전에 당신이 가졌던 생각의 산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과학이다. 하나님이 당신한테 바라는 유일한 것은, 당신 자신의 영혼 안에서 느끼는 바에 따라 하나님 자신인 생명 전체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왜? 당신이 기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하나님이 당신과 모든 생명에게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을 이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경하게 느낀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새로이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그와 싸워야 한다면, 그는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초에 아버지 하나님이 극히 찬란한 광휘인 자신을 숙고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을 찬란한 빛으로 확장했다. 바로 그러한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던 빛의 확장으로부터 당신들 모두가 독특하고 독자적인 움직임의 형태로 하나님이 되었다. 생각을 영원히 확장하고 지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이 숙고하는 생각을 통하여 확장하는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인 생각으로부터 독창적으로 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지라는 기능을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하였다. 의지의 원리가 당신 모두에게 부여되었다. 누구나 독자적이고 자주적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모두가 각자의 진실에 따라 창조하는 창조자가 되어 자신의 이해를 자주적으로 쌓아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람타] 12장. 오직 진실만을 [67p]

 

12. 오직 진실만을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진실 따위는 없다가 진실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없다 함은 모든 것이 진실임을 뜻한다.

 

 

마스터 : 나는 이 종교 저 종교로 옮겨 다니면서 전 생애를 허비했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는 이 스승에서 저 스승으로 바꿔가면서 생명과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람타, 정말로 혼란스럽다. 제각기 달리 말한다. 많은 것이 같은데도 그들은 모두 다르게 가르쳤다. 또 전혀 상반되게 가르치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옳고 그름 따위는 없으며 하나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사랑한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당신이 말한 것이 이해가 되지만, 다른 이들이 가르치는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 당신이 가르친 내용 중 일부는 내 전 생애 동안 배워 왔던 내용과 아주 다른 것이라서 좀 '거리가 먼' 듯하다.

 

혼란스럽다, 람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이 참된 진실인지 어떻게 가려 낼 수 있는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람타 : 먼저, '거리가 멀다'는 뜻은 무엇인가?

 

마스터 : 글쎄, 내가 의미하는 것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생각의 폭을 넓혀야 되겠다는 뜻이다.

 

람타 : 무한이나 영원은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

 

마스터 : 글쎄, 그렇다. 어떤 면으로는.

 

람타 : 그렇다면 내 가르침은 '거리가 먼'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은 당신을 멀리 멀리 데려가 마침내 영원의 영역까지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해 보라. 무엇이 진실이 아닌가?

 

마스터 : 글쎄, 예를 들자면, 상상이나 환상처럼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람타 : 그런가? 상상이나 환상은 무엇인가?

 

마스터 : 마음속에서 즐기는 생각이고, 생각 속에서 만드는 것들이다.

 

람타 : 당신이 그 생각을 즐기고 있을 때, 그것은 실재가 아니었나? 의식 속에서 그것른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 속에 있는 진실이 아닌가?

 

마스터 : 진실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오로지 마음속에서만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진실에 꼭 부합할 필요는 없다.

 

람타 : 알다시피, 누구나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이라면, 그 진실이 아닌 것으로 의식 속에 또한 실재하고 있는 나머지 모든 것은 무엇인가?

 

그 진실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진실 따위는 없다가 진실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없다 함은 모든 것이 진실임을 뜻한다.

 

모든 것이 진실이다. 마스터, 진실이 아닌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생각으로부터 나왔으며, 생각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형식화된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모든 생각으로서 실재이다.

 

모든 것이 현실이다. 모든 것이 생각에 의하여 신빙성을 얻고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상상과 환상도 분명히 현실이다. 의도된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스터 : 비록 바깥에 있는 현실세계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말인가?

 

람타 : '바깥'이라는 세계를, 마스터, 당신은 '현실'이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환상이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창조일 뿐이다. 즉, 보이지 않는 현실인 생각과 감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바깥'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상상과 환상에 따라서 창조되었다. 물질의 형상으로 현실화가 되고 나자, 이 바깥세계가 오히려 상상과 환상을 더욱 넓혀 나가도록 자극하였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고, 둘은 다함께 현실로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 속에 창조된 모든 것, 의식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 현실이라는 형상으로 발현되었거나 되지 않았거나 어느 경우에도 진실이다.

 

마스터 :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도 그렇다는 뜻인가?

 

람타 : 그렇다. 단지 태도에 따라서 이상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즐기는 모든 생각은 진실이다. 의식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 또한 모든 생명이 탄생되는 터전인 하나님 마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위대한 현실의 일부이다.

 

이제, 마스터, 당신이 혼동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하나님 아버지는 생각이다. 모든 생각의 진실이다. 하나님에 대해 놀라운 것은 그는 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한계를 갖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므로, 그는 무한한 진실과 무한한 생각에까지 선택을 허용한다. 어떠한 진실이라도 당신의 독자적 개성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이라면 생각으로부터 받아들여 창조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당신들 모두에게 부여하였다. 당신의 욕구에 따라 그리고 지혜로 나아가는 당신만의 독특한 행로에 따라 진실을 인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생각으로 어떠한 진실을 창조한다고 해도, 생명인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생각의 한 차원인 그 진실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준다.

 

진실은 단지 개인이 진실이라고 인지하는 것일 따름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창조적인 생각 중에서 절대적인 것이 되어 버린 어떤 것에 대한 견해이자 태도이고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사람마다 견해는 다른 법이다. 그것도 많이 다르다. 누구나 자신의 특정한 경험과 이해, 또는 오해에 기반을 두고 그러한 견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경험과 이해는 영혼으로부터 온 것으로 현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생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실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실체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되어 보지못했고 동일한 집합적 경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진실이 옳은 것인가? 둘 다 옳다. 둘 다 진실로 옳다. 둘 다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통해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한 실체가 그의 진실만이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이해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필요에 따라 그리고 자아를 충족할 목적으로 각 실체는 이 현실이라는 꿈속에서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면 어떠한 진실이라도 받아들이고 창조한다. 자신이 지혜를 얻고 진화하기 위해서이다(그러한 경험을 얻기 위하여 각자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지지해 주는 진실의 근원을 찾는다). 그러므로, 수많은 신들이 이 지상에 거주한다면, 그 수만큼 많은 독특한 진실들이 생겨난다. 개인마다 진리를 다르게 창조할 의지와 권리와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승으로부터 무엇을 읽거나 배워도 그것은 모두 진실로서 인지된다. 그가 어떻게 보든, 어떻게 배웠든, 어떻게 창조했든, 어떻게 경험하고 있든 모두 진실로서 인지된다. 그러므로, 열 사람의 스승으로부터 배웠다면 당신은 정말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에 대한 그 모든 인식이 그 순간에 당신이 필요로 했던 것에 부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분명히 밝히려면, 그 모두를 살펴보아야 될 것이고 그들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결정해야 되는 것은 특정한 진실을 자신이 어느 만큼 수용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떠한 진실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경험된 현실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는 위대한 스승이 많다. 그들은 마술사처럼 놀라운 존재이다. 경이롭고 놀라운 일을 수행하고 발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죽는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게 된다. 비록 배움에 있어서는 무척 진보했으나, 죽음이나 죽는다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 생명은 존재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들의 진실을 진실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당신도 마술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역시 죽게 된다. 알겠는가?

 

모든 이해에는 진실이 있다. 그리고 모든 이해는 그 정제된 정도를 달리 한다. 매순간 진실은 정제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이유이다. 모든 실체는 더 무한한 진실을 수용하기 위해서 이해의 진보를 계속하고 있다. 그의 이해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순간순간, 매순간, 그가 보는 대로 그가 아는 대로 진실이 된다.

 

꽃을 예로 들어 보자. 꽃을 봉오리라고 하면 진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꽃이 피어났다면 더 이상 꽃봉오리가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저 진행중인 진실일 뿐이다. 꽃잎이 떨어지고 이제 떨어질 꽃잎도 없다면 꽃이 거짓말쟁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을 보고 이제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진전된 진실의 상태이다.

 

법을 가르치는 곳에서 듣거나 읽은 가르침,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가르침, 있음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가르침, 하나님을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하지 않고 독립된 하나의 실체라고 하는 가르침,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그것만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세상에 강요하려는 무리에게서 나온다. 마스터, 그것은 그들의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위대하고 정제된 진실은,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한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이들은 다른 이들만큼 이해의 정도가 진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한되어 있는가? 그가 그렇다면, 생명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이 혼동할 수 있는 선택권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경이로운 진실이다. 누가 감히 법이 없는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는 다른 이들을 통제하거나 노예화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고 의식인 하나님은 사실상 법의 테두리나 심판, 종말을 넘어서 있다. 당신의 진실이 그 무한한 이해를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진보한다면 하나님 자체인 사랑과 기쁨, 그리고 그 지속됨을 경험하고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알기를 원하고 허용하는 만큼만 안다. 이 지상에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두려움과 생존, 그리고 상반된 이해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을 심판하고 분리하는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인간을 신성이 없는 '던져진'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다. 마스터, 그러므로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판하는 것이다. 인간을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인간을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신성을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신성을 빼앗아 버리는 것과 같다.

 

스승으로부터 듣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 당신의 사고작용을 제한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사고작용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라. 제한하고 분리하고 나누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무한한 이해로 계속 진보해야만 하는 자의 제한된 진실이다.

 

모든 스승으로부터 당신이 꼭 배워야 하는 것은 당신 자신만이 가장 훌륭한 당신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마스터, 오직 당신만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바쁘고, 그 자신의 관점에서 진실을 찾아 가기에도 바쁜 세상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충족을 얻으려면 어떤 경험이 필요한지 오직 당신만이 알고 있다. 오직 당신만이 자신에게 진실을 줄 수 있는 자이다. 진실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은 과학적이고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감성적인 이해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느낌이고 앎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당신이 안다는 것은 당신이 진실을 무엇이라고 느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마스터 : 그러나 람타, 어떤 것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더구나 과학이 발견한 사실과 대립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람타 : 마스터, 아무 것도 사실에 의해서 증명되지 못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인류의 이해가 진화하고 발전하면서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어림짐작이다. 현실은 생각과 감성에 의하여 계속 진화하고 창조되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집합의식이 현재 물질적으로 발현된 것일 따름이다. 집합의식이란 인류전체가 감성으로 포용하는 집합적 생각을 말한다.

 

마스터, 증명이라는 것은 느낌과 감성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맨 처음으로 사실에 현실성을 부여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현실, 가장 위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하나의 사실이 아니다. 마스터, 그것은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생각 속에 진실로서 인정하는 당신의 느낌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실이다. 가장 위대한 현실은 감성이다. 여기에 모든 진실이 들어 있다.

 

당신이 믿기로 선택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당신이 선택하면 된다. 믿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마스터 : 그러나 람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고 있던 시대라고 하자. 한 배에 타고 있는 선원의 반수가 지구는 둥글다고 믿고 있고 또 나머지 반수는 평평하다고 믿는다고 하자. 그리고 그들이 바다로 나아갔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람타 :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몸을 배 밖으로 던져 버린다(그렇게 하여 그들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게 만든다!). 평평하다고 생각한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지구의 가장자리로 여행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평하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둥글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한 바퀴, 두 바퀴, 계속하여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둥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지구는 다소 찌그러져 있다. 연결부위는 터져 나오고, 위는 평평하고 밑도 평평하며, 가운데는 비어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채워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제한된 수준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아직도 진실이다.

 

마스터, 진실은 제한이 없어야 한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라. 더 제한 없는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아래위가 평평하다는 것을 알라. 그리고 더 무한한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속이 비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 무한한 진실을 원한다면, 마스터, 지구의 가운데에 다른 실체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라. 과학자들에게 이것을 말해 주어라.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제한된 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진실이다. 당신은 옳고 정확하다. 제한이 없는 형상을 믿는다면, 그것도 또한 진실로서 옳고 정확하다. 그러나, 무엇인가 믿고 싶은 것을 찾는다면, 어느 것도 믿지를 말라. 당신을 믿어라! 당신보다 위대한 실체도 사물도 현실도 없다. 당신이 모든 진실을 부여하는 이이고 전체 현실의 창조자이며, 자신의 왕국에 법을 제정하는 법제가이다.

 

이제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스승이나 종교에서 배워 보라. 지루해질 때까지 또는 더 이상 맞지 않다고 여겨질 때가지만 배워라.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영혼에서 옳다고 느끼는 해답을 찾아 나서라. 당신의 영혼은 그 답을 알고 있다. 느낌을 통하여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이다. 진실이 옳게 느껴질 때, 그것은 당신 영혼의 즐거움이 된다.

 

진실이라는 것은 하나의 제한이다. 마스터,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위해한 이해는 진실도 진실 아닌 것도 없다는 것이다. 지속되는 있음뿐이요, 진화하는 생명만이 있을 따름이다. 생명이 유일한 현실이고 모든 진실은 여기에서부터 출현하게 된다. 진실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에 따라 매순간 진화하고 창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순간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무엇인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진실이다. 양쪽 다 진실된 현실 원리이며, 둘 다 감성적 이해를 위한 선택인 것이다.

 

생명과 선택 이외에 아무 것도 현실이 아니다.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며, 있음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진실이라는 것은 당신의 경험을 위하여 그렇게 되도록 당신이 정하는 것임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그렇게 인정하는 한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 진실을 정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창조적인 현실 세계'라고 하는 이유이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창조한 어떠한 진실도 또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라. 당신이 자주적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생각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할 때면 언제라도 당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당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당신이 기쁨을 생각하는 시간 만큼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기쁨을 발하기 시작한다. 절망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게 될까? 절망을 생각하는 데 사로잡혀 있다면 그 순간 그렇게 되어 버린다. 여기에 바탕이 되는 진실은 무엇인가? 당신이 원할 때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고, 원할 때는 언제라도 그저 당신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이러한 자유를 당신에게 주었다. 바로 이 진실을 당신의 존재 안에서 알게 되면, 당신은 한계를 넘어 신격(神格)으로 옮겨가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법과 도덕과 이상에게 지배당하도록 허용할 때도, 당신은 자유로운 실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 이외의 어느 진실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기억해 두라. 당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있게 된다. 당신이 무엇을 믿는 순간, 당신의 존재 안에 있는 감성적 현실에서 진실이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항상 진실의 정점에서 있는 것이다. 관점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다. 당신의 창조적 현실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항상 다르다. 다른 이들이 당신의 현실을 전혀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자신의 환영에 너무 열중해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존재하고 그 진실은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데 있어 자신을 제한하지 않게 된다. 기꺼이 모든 경험에 참여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때에 당신은 자유럽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이것은 이렇게 된 것이다."라는 개념이나 지적인 이해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이라고 할 때, 모든 것은 진실로 생각에서 그렇게 된다.

 

마스터, 내가 가르치는 이 진실은 존재 안에 무한함을 더해 줄 것이다. 그 내용이 모든 이의 진실을 포용하고 모든 진실이 함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표현하는 모든 진실은 다양한 측면을 가진다. 나는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모든 진실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창조적 흐름은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으며, 당신은 한 가지 형태의 삶과 존재로 고정되지 않는다.

 

당신 자신이 되어라. 람타의 가르침이나, 붓다, 예수, 그 누구의 가르침에도 따르지 말라. 아무도 당신의 하나님 본성을 가르쳐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다. 당신의 운명을 충족하기 위해서 당신은 당신 본래의 독특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이의 삶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 당신 안에 살아 있는 불꽃을 이해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당신 자신만의 감성적 이해로 얻는 진실을 통해서이다.

 

당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라, 지극히. 당신의 내면에서 아주 희미하게 속삭이는 하나님에게 귀 기울이라. 그것을 느낌이라 한다. 그 느낌은 당신이 그것을 듣고자 한다면, 진실을 말해 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줄 것이다.

 

당신 안에서 느끼는 진실에 따라서 살라. 당신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진실을 따라 살고 진실을 드러내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의 관점에서 생명을 평가하고 살아가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진실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은 모두 옳다. 당신 자신의 스승이 되고, 당신 자신의 구원자가 되고,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되고, 당신 자신의 하나님이 되라.

 

이 일이 얼마나 쉬운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당신이 자유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신을 풀어놓아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 무엇이 현실인지 아닌지 판정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종교적인 교리나 믿음을 당신에게서 제거하기 시작하고, 다른 이의 진실이 되어 보려고 애쓰던 것을 중단하게 되면, 당신을 표현하고 당신의 영혼이 요청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일이 자유로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에게 부족한 어떠한 지식이나 이해도 충족시킬 수 있다. 그때, 당신은 경험과 감성을 통해 당신들 개개인에게 맞는 속도로 매 순간순간 하나님이 되어 갈 것이다. 어디에서 자신의 실체는 끝날 것인가? 아무 곳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영원으로 지속되고 있을 따름이다.

 

당신이 살아가는 순간마다 당신의 완고한 자아를 순회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고, 죄의식이나 자기 비판이 없이 그 일을 당신 자신이 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어느 날 전체 생각의 진실이 된다 - 모든 생명이 샘솟는 근원이 된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인간의 집단 의식인 법, 이상, 대중성을 제거하고 자신만의 진실, 자신만의 목적의식이 있는 자아로 있을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 다면, 당신은 전체 생각의 진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인간은 자신의 선택권을 버리고 그 대신에 법을 창조하면서 신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왔다. 그러나 이 지상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들의 가치 기준이 바뀌고 있으며, 절대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 나는 당신이 그러한 역할을 분담하기 위하여 여기에 왔다는 것이 기쁘다. 당신의 삶은 오늘 이후부터는 훨씬 더 즐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대답하려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에게다. 무엇이 진실인가? 자신이 그러하도록 명령하는 그것이다. 당신이 믿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엇을 믿든 당신은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알라, 그러면 당신이 살아가는 바로 그 방식으로, 당신은 많은 이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결코 진실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 그저 존재하라. 존재함으로써 당신은 이미 무한한 우주와 하나이다.

 

마스터 :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

 

람타 : 실로 그러하다, 마스터. 있음! 그렇게 될지어다.

 

 

마스터 : 지금까지 수년 동안 점성술을 시행하여 왔다. 고객에게 더 효과적일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말이 있는지 알고 싶다.

 

람타 ; 우선, 마스터, 그 일을 하는 것이 왜 즐거운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마스터 : 별과 행성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연구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운명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람타 ; 마스터, 잘 알다시피 인간은 천상에 있는 별들의 조용한 미스터리를 쳐다보면서 항상 자신의 고향을 찾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자신이 태어난 오두막집보다 더 위대한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밤하늘에서 빛을 찾기 시작했을 때, 놀랍게도 그 빛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들의 움직임에 따라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왕국에 일어나는 행운과 불행이 틀림없이 별들의 운행 때문이라고 믿기 시작하였다.

 

별들에 관한 강한 믿음을 왕국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데 이용했던 현자와 예언자, 은둔자들이 많았다. 재난에 대한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었을 때, 누가 책임을 졌는가? 분명히 예언자들은 아니었다. 바로, 그것을 일으키게 만든 그 '저주받을 별들'이었다. 그러나, 침묵 속에 있는 별들은 결코 스스로 항변할 수 없었고 결백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마스터, 이것을 말해 두겠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아 창조된 신이다. 태초에 빛의 존재였던 당신은 독존적 존재로서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별들을 창조하고, 행성, 그리고 보이는 우주와 보이지 않는 우주 전체를 창조하였다. 당신은 지금 가지고 있는 당신의 육신을 창조한 신이기도 하다. 그 몸은 어느 우주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당신은 태초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강력한 창조력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신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에도 당신은 당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도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무엇인가가 자신을 다스린다고 믿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지금도 당신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단지 자신은 자기 존재 바깥에 무엇인가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믿음을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그것을 허용한 것이다.

 

점성술을 믿는 이가 많다. 점성술도 또한 나름대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누가 이 진실을 부여한 것인가? 그리고 별과 행성의 운행이 어떻게 그것을 먼저 창조한 신들보다 위대할 수 있는가?

 

마스터, 당신이 누구인지는 결코 천상의 움직임으로 알아지지 않을 것이다. 행성과 별의 움직임이 한 사람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에 대해서 한 마디 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꿈이나, 상상, 창조성, 생명 같은 것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당신들 개개인의 생은 많은 별들 아래에서 태어났다. 모든 별들은 그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의 운명이 그 중 몇 개에 의해서 통제되고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마스터,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당신의 삶과 당신 자신인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순수함을 없애 버린다.

 

신들은 여러 가지 게임을 만들었다. 점성술도 그 중의 하나이다. 때에 따라서는 매우 위험한 게임이 된다. 한 실체에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스며들게 하고, 감성적으로 앞날을 미리 결정해 버린다. 점성술사가 항상 슬기롭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소중한 삶을 문자 그대로 남의 손에 쥐어 주는 꼴이 된다. 나는 그러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점성술이 하나의 게임인 것처럼, 종교의 교리도 그렇고, 정치나, 시장경제 또한 그렇다 - 당신이 자신을 노예화시켜서 생존 게임을 하도록 허용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점성술을 시행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면에서는 정말로 아름답다. 별을 연구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별들의 운행이 아름답고 미스터리는 황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삶이 그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마스터, 당신은 그 별들을 형성하는 가스보다 더 나을바가 없다.

 

점성술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하나의 게임인 것이다. 현실적인 진실은 "자, 당신의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내가 결정했다."라고 말하는 자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가 의뢰인 주위를 둘러싼 감성적인 자기-전기장 중에서 하나를 집어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임을 없애려 한다면, 의뢰인에게도 이와 같은 얘기를 말해 주라. 분명히 그는 놀랄 것이다. 물론 어떤 별이 잘못된 위치에 있고 그가 신성하고도 우주적인 계획의 일부분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현자라는 이들은 수정구를 들여다보고, 불을 밝히고, 물을 응시하고, 폭발을 일으키고, 술이나 엑기스를 마시는 등등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실을 만들기 위한 온갖 종류의 행위들을 취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해답과 이유를 찾기 위해서 항상 자신의 바깥을 둘러보았다. 말없는 별을 비난하든지 왕의 통치력이나 '하나님의 뜻' 탓으로 돌리는 것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우주의 창조자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훨씬 편했던 것이다. 신부나 예언자, 예지자를 찾아서 안내를 받는 것이, 자기 자신이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한 주체이고 또 충분히 현명하다는 것을 믿는 것보다 더 쉬웠던 것이다.

 

이유와 해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바깥만을 둘러본다면, 모든 진실의 제공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인 당신의 내면에서 나는 소리는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 항상 당신은 당신이 정말로 가지고 있는 경외로운 힘과 무한한 이해를 볼 수 없게 만드는 미신적인 믿음과 터무니없는 논리의 범주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마스터, 당신은 원하는 것이면 어떠한 진실이든지 받아들이고 창조할 수 있는 독존적인 실체이다. 자기 왕국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노예가 되도록 허용할 수도 있다 - 어느 것이든지 경험하기를 바라는 대로 일어난다. 모든 실체가 진정한 창조자이고 자기 삶의 지배자이며, 자기 운명의 설계자라는 사실을 당신이 깨달을 때, 아마도 당신은 그러한 깨달음을 얻어, 당신 자신을 위해 더 무한한 삶을 창조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 존재에게 아주 굉장한 일이 될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를 기억하라.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창조자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순식간에 바꾸어서, 다시 한번 그의 삶을 추스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점성술을 시행할 때, 마스터, 이렇게 하기를 바란다. 순서에 따라 그 모든 것을 행하고 난 다음에, 그에 대한 해석을 끝마쳤을 때, 사람들에게 우주라는 것은 그들 자신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어라. 그들이 없다면, 별이나 행성 따위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 주어라. 이것이 당신이 말해 주어야 할 전부이다. 그들은 당신이 말한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이 그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자긍심을 높이며, 도도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기에 와 주어서 나는 기쁘다. 당신은 이 자리에서 깊이있게 배우게 될 것이다. 여기에 온 이들 중에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무한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다. 모두가 자유를 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괜찮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 받고 있고, 여전히 옳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고 모든 현실의 창조자이다.

 

 

 

 

 

 

 

 

 

 

[람타] 13장. 삶에 법칙은 없다 [76p]

 

13. 삶에 법칙은 없다

 

 

인간이 법이나 계획, 규칙 등 구속하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그는 자신과 전 인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스터 : 람타, 당신은 하느님의 계획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람타 : 하느님의 계획?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은 하느님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마스터 :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람타 : 하느님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이 하느님이라는 생명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만약에 하느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나타낼 수 있는 자유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 된다. 당신만의 유일한 개성도 스스로 진화하는 능력도 하느님이라는 생명원리를 확장하는 능력도 모두 앗아가 버리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유일한 계획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과 하나되어 진동하는 모든 것이다. 이 진동은 먼저 생각에 기초를 두고, 생각에서부터 물질로... 진동하고, 의식을 가감하기도 하며, 생명의 또 다른 순간을 표현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과 병행하여 영원의 다음 순간을 표현해 낸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획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모든 것들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된다.

 

당신이 깔고 앉아 있는 이 방석을 보자. 이것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도 있으므로,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된다. 왜 사랑하는 마스터가 여기 앉아 있는 것인가? 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랑하는 이 마스터는 어떻게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되는가? 당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있음으로써 그렇게 된다. 나는 어떻게 부합되는가? 나는 존재한다. 이 푹신푹신한 방석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존재할 뿐이다.

 

내가 어떻게 부합이 될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그렇게 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누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 사랑이나 표현이 환상적이고도 신성한 계획에 부합되는지 아닌지 나는 염려하지 않으니까?

 

내가 어떻게 전체 생명의 있음에 기여할까? 하느님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과, 왜 그 하느님은 당신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사랑하는가를 당신이 이해하도록 도와줌으로써 기여한다. 모든 생명이 어떻게 서로 어울리게 되는지를 더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떠한 계획에 따라서도 아니고 숨은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저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생명이 그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최상의 능력을 다하여 창조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당신에게 허용되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에 당신이 무엇을 하든, 모든 생명 가운데에서 당신은 진동할 것이며 또 다음 순간에도 그러하고 그 다음 순간에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당신은 안식을 취할 것이다.

 

생명에 계획은 있지 않다. 마스터, 단지 있음만이 있다. 있음의 자리에 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표현이다. 있음! 중요한 것은 당신 자체이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마스터 : 당신은, 사람이 살아가야 되는 바람직한 길이란 없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즉, ‘아무 것이라도 좋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람타 : 그러하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마스터 : 그렇다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람타 : 삶의 목적은, 마스터, 당신 존재 안에서 당신이 즐기는 어떤 생각이든지 삶의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표현에 이끌리든지 간에, 그러한 표현은 항상 지속되는 생명의 있음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라.

 

생명의 목적은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 생명의 창조자가 되는 것, 그것을 빛내는 것이다. 생명이 당신의 내면에서 전개되는 대로 순간 순간을 당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자신을 허용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의 다른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어 당신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스터 : 그러나 만약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면, 성경에서 언급된 그런 하느님의 율법에 위배되는 일들이 생기지 않겠는가?

 

람타 : 아름다운 마스터여, 당신이 사랑하는 하느님은 단지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법도 만들지 않았다. 그 하나의 법은 당신의 자주적 의지에 따라 삶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의지를 실현시켜 나갈 때만이 모든 생명의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의 의식, 그것은 하느님이다. 만약에 하느님 아버지가 법 따위를 만드는 그러한 실체라면 그 자신인 당신에게서 생명이 진화하고 영속하도록 허용하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제한된 근원으로서 종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마스터, 영원에게 종말은 없다.

 

당신이 말하는 ‘하느님의 율법’은 책 중의 책에 씌여 있는 율법으로 예언자마다 추가해 놓은 여러 계율을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율법’이 이러이러하다 혹은 이러이러한 것을 금한다 또는 이러한 것을 해야 된다는 등을 언급함으로써 대단히 권위 있는 말이 되었다. ‘하느님의 율법’이라는 것을 따라서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복종하는 것을 배웠고 두려움을 배워야 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두려워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그저 부모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할 따름이다.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유일 법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은 모든 것들이 그들의 자유와 열망에 따라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느님의 존재를 통하여 표현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유에 의해서만 하느님을 알게 되고 다시 그와 함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느님에게로 돌아오고 하느님이 그 자신의 귀향을 숙고할 때, 위대한 날들이 시작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당신은 하느님처럼 존재하게 되며, 하느님처럼 존재함으로써 무한한 사랑과 한없는 기쁨, 존재의 영원함이 항상 지속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법을 만들지 않았다! 인간이 법을 만들었지 그가 만들지 않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 인간이 그 자신의 왕국에 독자적인 법을 만드는 법제가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생명에 대한 이해가 진화함에 따라 생각으로부터 그의 왕국에 적절한 믿음이나, 진실, 태도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자유를, 사회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법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법은 무자비하게 인간을 협박하거나 노예화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 법들은 자유를 구속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지 자유를 고양하기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법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을 허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다스리는 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이 무한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스터 : 그러나 람타, 법이 없다면 사람이 자신 속에 있는 악을 드러내는 것,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람타 : 이것을 알라, 마스터.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 속에 악이라는 것은 없다. 인간의 영혼이 악하다고 씌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영혼은 신성하다. 인간의 영혼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일 따름이다. 영혼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왔겠는가?

 

하느님의 영역, 존재의 관할 밖에 있는 것은 없다. 아무 것도! 누군가가 악하다거나 나쁘다 그르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이나 행위는 모두 의식 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의식 속에 존재한다면, 그것도 틀림없이 하느님 마음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놓고 사악하다고 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악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사악하지 않다. 하느님은 선하지도 않다. 선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나쁘다거나 악한 것이라고 하는 개념과 비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결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악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존재도 아니다. 또한 하느님은 완전하지도 않다. 하느님은 단순히 존재한다... 자신을 알기 위해 단지 기쁨에 기쁨을 더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있음이요, 영원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력이 자신의 일부분을 선과 악, 신성함과 사악함,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 판정을 내림으로써 자신을 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느님이 내려다보고 ‘이것은 악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모든 의식은 -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 생명력으로부터 단절되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생명과 그의 지속적 확장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를 허용하는 자유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히 무한하고 있음의 나뉘지 않는 전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 자신을 한정된 눈으로 보는 일은 없다. 만약에 그랬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당신 자신이나 이웃을 판단하는 선택권을 행사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마스터, 선이나 악은 없다. 오로지 있음만이 있을 따름이다. 있음에서는 모든 것이 오로지 충족이라는 견지, 즉 지혜로 자신을 충족하기 위해 영혼이 필요로 하는 감성적 경험의 견지에서 평가된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해 왔던 일들은, 아무리 아름답거나 비열하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러하도록 정한 것으로서, 당신은 단지 지식을 얻기 위해 그렇게 했다. 당신의 영혼과 열정에 떠밀려 그 일을 했던 것이고, 배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행동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것으로부터 배웠다. 사악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 행한 일일 따름이다.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 인간은 그의 형제들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 위하여 자신의 창조성으로 선과 악의 균형을 고안해 내었다. 종교의 교리나 정부의 법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 받게 될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국가를 오랜 세월 동안 다스리고 지탱해 준 무력이었다. 당신들이 쓰는 단어로 사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할 때마다 동시에 자신에게도 꼭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 더 근본적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남들에게 어떠한 판단이나 제한을 가하더라도,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의식 속에서 법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법에 의하여, 당신이 그렇게 제한을 받고, 당신이 자신을 그렇게 심판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결코 사악하지 않다. 비록 악의 그늘에서 산다 하더라도, 좀더 넓은 견지에서 보면 악이라는 것은 없다. 인간이 선택한 것은 무엇이든지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으로부터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생명의 무대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유일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느님은 미신이나 신앙, 그리고 인류의 제한적이고 꽉 막힌 태도에 의하여 악의 환영이 생겨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악이라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판단, 그리고 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의하여 한 실체 안에 악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그의 실체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가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왕국이 생겨나는 것이다.

 

실재하는 유일한 법은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유효하도록 창조해 낸 것들이다. 만약에 당신이 선과 악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진실이며, 또한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것은 내 진실도 아니고 다른 누구의 진실도 아닌 바로 당신만의 진실이다. 그것이 정말로 당신의 진실이라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소신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러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틀림없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그것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마스터, 이제 당신은 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 보라. 나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마스터 : 글쎄, 선과 반대되는 것이 악이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악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람타 : 그런가? 그것이 왜 악인가?

 

마스터 : 글쎄,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내 딸을 해쳤다면, 그것은 악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죽었다고 치자.

 

람타 : 그것은 당신의 악에 대한 판단이다. 죽는 일에 대해 악은 무엇인가?

 

마스터 : 그렇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건가?

 

람타 : 그렇다. 나는 어떠한 것에도 종말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나 자신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소멸되지 않으니까. 영원히!

 

있음과 지속되는 생명의 영속성 안에서, 하느님은 모든 것들이 존속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 즉 하느님 자신보다 더 위대한 것은 창조하지 않았다.

 

마스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은 아무 것도 열등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아이는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느님의 생명을 소멸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마스터 : 그렇다면 살인조차도 나쁘거나 사악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람타 : 그렇다. 명심해 두기 바란다, 마스터, 생명은 항상 지속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매순간, 각자가 생명의 무대에서 표현함에 따라, 자신을 행복으로 충만하게 해줄 무한한 기회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순간 순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자유의지와 욕구,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옳다고 여기는 것에 따른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자 재량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통치력이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감성의 왕국인 것이다.

 

당신의 정부와 종교는 법과 규칙, 계율에 따라 대중을 다스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사고작용에 조용히 작용하고 있는 의지를 다스리지는 못한다. 그 실체만이 그럴 수 있다. 한 실체가 다른 이를 죽이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 혹은 그러한 생각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영혼으로 그러한 일을 한다면(누구도 다른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 생각 속에서 살인을 했다면 그는 살인을 한 것이기 때문에 - 생각 속에서 남을 해친 적이 없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어느 쪽이든 그 실체는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렇게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당신이 이해해 주기 바란다.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살인자와 함께 참여한 자는 그 살인자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태워지거나, 잘려지고, 괴롭힘을 당하는 가능성에 대해서 숙고했을 것이다. 그것을 숙고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살인을 해야 하는 자나 살인을 당해야 하는 자는 - 그 일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서로 서로에게 이끌린다... 경험하기 위해서.

 

학살자를 무서워하거나, 그들을 심판하고 저주하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나는 살인을 한 그를 사랑한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그는 하느님의 섭리와 생명과 경이로움에서 제외되어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마스터.

 

피살자들은 돌아올 것이다. 다시 또 다시, 왜냐하면 생명은 영구하고, 생명은 영속하니까. 생명은 영속하는 유일한 것이고, 또한 모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행동을 혐오하고 학살자에 대하여 비판을 하게 되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되며, 내 삶이 그 판단에 의하여 악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라. 왜냐하면 유아독존인 나 자신이 자신의 일부를 제거하여 내 존재로부터 분리시켜 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전체가 아니다. 알겠는가?

 

어떤 사람이 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그는 그 행동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지독한 죄책감과 자기비판,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살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다가오는 시간이 편안한 것이 못 된다. 그가 그 자신을 용서할 때까지... 학살자는 이미 그 자신에 대한 판결을 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가 그 행동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든지 그것에 속박 당할 것이고, 그때 이후부터 영겁의 순간까지 자신만의 생각과 감성의 왕국에서 그 일을 처리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행동을 혐오하지 않는다. 그 행동의 합리적 이유를 알아냈다. 그것을 이해한다. 나는 그 너머에 존재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악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지혜를 제공해 주는 경험이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인간이 더 이상 그의 형제들을 비난하지 않으며, 자신이 결코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자신의 존재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한 하느님이라는 생명력에 의하여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는 자신의 가치와 능력과 불멸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전쟁이나 약탈, 살인 같은 행위들을 더 이상 경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이 법이나 계획, 규칙 등 구속하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그는 자신과 전 인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구상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다. 그때에 그는 하느님처럼 사랑할 것이다. 그때 그는 하느님처럼 존재할 것이다. 모든 생명을 양육하고 지원하는 터전인 하느님처럼. 그렇게 될지어다.

 

마스터 : 최근에 두 사람이 나와 가까워졌다. 나와 접촉하여 살아가는 삶에서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생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지 알고 싶다.

 

람타 : 그들이 당신의 삶에 다가온 이유는 그들이 거기 있기를 당신이 원하고 또한 그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겠는가?

 

마스터 : 그러나 내가 그들을 원했는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다. 아마도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업보와 서로에게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 있다고 생각했다.

 

람타 : 마스터, 당신이 알다시피, 어떤 관계 설정이 부족하면, 아마 전생에 함께 살았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가상을 하여 지금의 관계를 훨씬 아름답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업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단어 ‘필요’에 대한 종교적 설명일 따름이다. 당신은 생애마다 많은 이들과 함께 있을 필요가 있고, 그것을 즐기며, 또 그러한 것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삶을 이어 나가면서, 똑같은 친구들만 있다면, 그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고 답답할 것이다. 지금 그들과 가까이 지낸다면, 그 사실과 연관지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마스터, 당신들은 다시 한번 더 함께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다시 헤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

 

마스터 : 좋다. 당신이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 업보에 대하여 다른 의문이 있다. 어떤 일, 즉 살인이나 도둑질, 사고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이 지난 생에서 했던 일을 상쇄시켜야 하는 업보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이런 인과응보의 법칙에 대하여 당신이 어떻게 말할지 궁금하다.

 

람타 : 당신이 알아야 하고 모두 다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업보’라는 것은 하느님의 법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자들의 법이다.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신조를 믿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딱하게도 완성이라는 허황된 깨침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한 생에서 무엇인가를 하면 다음 생에 다시 와서 그것을 보상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항상 ‘업보’ 탓으로 돌린다! 그것은 삶에 대한 아주 형편없는 설명이다. 마스터, 삶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오직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하나의 현실이 된다. 실재하는 유일한 법은 당신의 왕국에서 효력을 갖도록 당신이 허용한 것들이다. 법을 만드는 진정한 법제가는 자주적인 실체 개개인이다. 각자는 나름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에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하든 어떤 것을 법으로 창조하든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왜곡된 이해를 토대로 스스로 상쇄의 법칙과 완성이라고 하는 이상을 만들었다.

 

업보를 믿는다면 당신은 분명히 자신이 창조한 대상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다. 당신이 그 믿음에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유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난 생에서 당신이 했던 것들을 무효화하거나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틀림없이 다시 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인과응보나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성취가 아니라 한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업보의 구속을 통하여 완성을 얻고자 애쓰는 이들은 원하는 바를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업보를 갚는 동안에 다른 업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러 번 생을 반복하여도 있음의 상태, 하느님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채권자이기보다는 항상 채무자의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완성 따위는 없다. 오로지 있음만이 있다. 생명의 있음 안에서 모든 것은 변화하고 매순간 진화한다. 그러므로, 완성의 상태는 결코 확립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있음만을 인식할 따름이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법이나 이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있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외에 꼭 해야할 일은 없다. 업보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고 당신의 창조다 - 당신의 경험을 얻기 위한. 그러나, 마스터, 제한적인 힘과 인과응보라는 환영을 당신 스스로 창조했다는 것을 알라. 업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결과로 당신은 자신의 제한된 사고의 틀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자유로운 영혼이자 영성이다. 당신은 어떤 진실, 어떤 현실, 어떤 환상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 순간에는 창조하고 경험하는 것이 자유롭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어느 순간에든 그 꿈을 다시 창조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업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나, 원함은 실재한다. 원함이라는 것은 변덕스럽다. 원할 땐 언제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중에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살인이나, 사고, 강도 등은 형벌이 아니다. 마스터, 당신이 과거에 했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다. 그것은 심사숙고한 생각과 경험의 결과로서 당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며, 지속되는 상황도 아니다. 좀더 크게 본다면 그러한 일들은 그렇게 끔찍한 것만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그것들은 훌륭한 스승이기도 하다.

 

당신이 무고한 사람들 일만 명을 죽인 학살자를 보았다고 하자. 당신은 중얼거릴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이렇게 잔학한 행위를 보고도 천사들은 왜 울지 않는가? 왜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서만 노래하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생명에 끝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자신들을 제한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살된 이들은 당신이 말하는 ‘천국’이라는 곳으로 곧바로 들어 올려져, 그곳에서 더 나은 배움과 경험을 얻고, 그리고 내가 말하는 모험이라는 것을 겪게 될 것임을 천사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일만 명의 시체를 묻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도, 하느님은 슬퍼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내일이 오는 것이다.

 

누가 당신의 운명을 설정한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이들이 모든 사람들을 조종하고 모든 일들이 일어나도록 조장하는 주관자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자기의 어깨에서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오로지 당신만이 당신의 운명을 다스린다. 당신은 이 순간에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따라 매순간 당신 삶의 창조자가 된다.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은 이 순간 바로 지금이 영원한 것이고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지금이 계속됨으로 해서 매순간은 새롭다. 마스터, 매순간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 결코 어제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내일을 실현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창조한 현재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신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매순간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당신에게 준 것이다.

 

아무도 과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방금 전이나 천년 전에 했던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당신이 갚아야 할 것은 없다. 언제라도! 당신이 어떤 일을 한 순간 그 일을 함으로써 이해를 얻고 의도했던 이익을 실현했다.

 

과거라는 것은 경험해 버린 지금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현재와 관련지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당신의 깊은 사고작용과 의도적인 계획에 따라 최선의 능력을 다하여 이 순간을 창조할 수 있는 지혜를 당신에게 제공하였다.

 

과거는 지나갔다. 마스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과거는 당신 안에 지혜로만 남아 있다. 이것이 과거가 당신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전생을 모두 통틀어서 현재가 가장 위대하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앎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축적된 전체이다.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고, 경험은 삶이라는 행위를 통해 얻은 것이다. 당신이 표현하는 순간마다, 당신은 새로이 창조하고 있다 - 지혜라고 하는 경험의 결정체와 감성을 얻기 위한 새로운 모험을 하고 있다.

 

오직 이 순간의 있음만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이다. 당신은 이 순간의 산물이다. 당신의 삶은 이 순간에 존속된다. 당신의 미래는 이 순간에 창조된다. 이 순간에 진정으로 존재하여 살아가려면 당신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법이나 규칙, 계율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있음으로서 살아간다면,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이 순간이다 - 바로 하느님이 살고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매순간 당신의 영혼이 추구하고자 하는 모험을 겪으면서 사는 삶, 매순간 당신이 더 위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그전에 겪어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경험해 보면서 사는 삶, 당신은 이러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서라든가, 아무도 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이 할 것이라고 예정되어 있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이 지상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완성에 이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라는 말을 당신은 듣고 있다! 당신이 항상 혼돈 상태에 있다면,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전적으로 선택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육신을 빌려 이곳에 돌아왔다. 이 창조적인 환영의 지상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모친의 난자와 부친의 정자로부터 신체를 만들었다. 과거의 일을 보상하기 위하여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물질을 통하여 자신을 진화하게 하고 이 지상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진 감성 안에서 자신을 완성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한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고, 그것은 그곳에 있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삶의 무대에서 지혜를 얻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다. 당신이 이 환영을 끝까지 연출해 내고, 지혜로 영혼을 충족하는 데 당신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해 이 생애에 여기에 와 있다. 당신이 얼마나 더 많은 생을 이곳에서 지내기를 원할지 모르겠지만. 이 지상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풍부한 감성을 갖추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여기에 돌아올 필요가 없고, 돌아오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인지는 당신만이 결정하는 것이지, 다른 그 누구도 결정하지 않는다.

 

마스터, 당신은 하느님이 되기 위하여 이곳에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당신 존재에게서 모든 법과 독선적인 믿음, 모든 의례적인 관습을 제거하고, 사고과정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표현의 자유와 결코 죽지 않는 육신, 그리고 존재의 평화와 기쁨을 얻고 싶다면,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삶이 완전히 무한하다는 것을 알라. 당신이 그것을 알게 될 때, 그렇게 될 것이다. 당신의 존재 안에서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당신이 무엇을 진실이라고 알든지, 그대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의 왕국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유일한 법이다.

 

당신이 자신을 용서하기만 한다면, 지금이나 다른 어느 생에서나, 생각하고 행했던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당신이 빚을 갚아야 할 필요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라.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당신 자신인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는 죄의식이나 판단을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제거하는 신성한 행위이다. 일단 당신 자신을 용서했다면, 이제 이 생이나 앞으로 오는 생은 존재를 경험하기 위한 지금 이 순간의 일부일 뿐이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의 미래라는 것을 알라.

 

당신은 영원하며,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과 당신이 유일하게 잘못한 것은 당신이 잘못된 무엇인가를 했다고 믿는 것임을 알라.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마스터.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무엇을 느끼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지루해질 때까지 온 마음으로 그것을 좇아가라. 지루하다는 느낌은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고, 이제 다른 모험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는,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전해져 온 신호이다. 당신의 내면에 있는 느낌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당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것도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법이나, 가르침, 혹은 어떤 실체에게도 응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 지금, 그리고 지금에게서 당신이 얻는 느낌이 언제나 변함없이 중요한 전부이다.

 

법이 없는 상태가 되어라. 그것은 분별없이 무법적으로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당신의 목에서 밧줄을 제거하여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에게서 법이나, 교리, 제한된 믿음을 제거한다면, 그때 당신은 스스로에게 하느님 자신인 자유와 무한이 되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당신은 자신과 생명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이제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했던 누군가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험은 순간순간 새롭게 펼쳐진다.

 

살면서 행복하라. 그것은 하느님이 당신에게 늘 요구해 온 유일한 것이다.

 

 

 

[람타] 14장. 삶의 목적 [84p]

 

14. 삶의 목적

 

하느님이 당신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은 알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처럼 존재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당신들 각자의 삶에서, 그 목적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인간이 되고, 특정한 직업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도록 양육되었고, 가족이나 사회는 확실히 그렇게 되도록 주의 깊게 감시한다. 너무나 나쁜 분위기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나 구원자 또는 치유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고 상상하는 이들도 있다. 참으로 고상하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할, 하느님에게 이르는 좁고 경건한 길을 끈기 있게 찾아가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느낀다. 얼마나 따분한가.

 

아무도 목적을 가지고 이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다.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에게, 기쁨이 어떤 의미이든, 기뻐하라는 것 한 가지 외에는 당신이나 다른 누구에게도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를 내려주지 않았다. 당신에게 바라는 이 한 가지 소망은 존재의 궁극 원리이다. 왜냐하면 소중하고 신성한 자아 안에서 당신이 더 행복하고 더 기쁘게 살아갈수록, 생명이 있는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고 하느님의 존재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기뻐하는 것이 하느님이 당신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망이다. 실로 이것이 가장 고귀한 감성적 가치이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가 이것이다. 어느 세상에 살아가든지, 어떤 이해를 성취하든지 상관없이, 기쁨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이 전 인류에게 부여한 운명이다. 당신이 기쁨과 행복의 상태로 돌아오면 하느님의 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기쁨 자체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쁨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있음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당신에게 부여했다. 당신이 기쁨을 이해하는 탐구를 계속하는 중에도 당신이 하느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는 그렇게 되어 줄 것이다. 그가 당신의 행동과 욕구의 성취 정도를 심판하는가? 아니다,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생명력에 대한 생명력의 사랑이다. 그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같이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방해받지 않고 움직이는 자유다. 그것은 판단 없이 표현하는 자유이다. 또 이것은 두려움도 죄의식도 없는 존재의 자유이다. 기쁨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허용하는 지고의 움직임이다. 이것이 기쁨이다.

 

왜 기쁨은 존재의 가장 숭고한 상태인가? 기쁨의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은 하느님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흐름 속에 질투나 분노, 비통함이나 전쟁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기쁜 상태에 있다면, 누군가를 증오하기 어렵고, 공격하기 어렵고, 상처를 주기도 어렵다.

 

당신이 행복하고 즐거울 때, 당신은 모든 것에 내재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지극한 기쁨 속에 있다면, 당신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과 평화로운 관계가 될 것이다. 삶을 기쁨 속에 영위할 수 있다면 후회나 불안, 두려움, 분노나 부족함을 느낄 수 없다. 기쁨의 상태에서 당신은 충만하고 완전하며, 생명과 지혜, 창조성이 당신 존재의 내부에서부터 큰 강물처럼 흐른다. 당신은 최고의 위대함과 가장 심오한 느낌에까지 이르게 된다.

 

기쁨의 상태에서 삶은, 하늘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장밋빛을 띠고, 구름은 타는 듯 붉게 물들며, 새들은 나무에서 노래하고 있는 새벽녘의 열정과 강렬함이 된다. 기쁨 속에서, 당신은 나이를 먹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더 이상 고단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놀라운 모험이기 때문이다. 기쁨이 흘러나올 때 당신은 자신의 왕국 안에서 하나가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당신은 낙원을 발견한다.

 

어떻게 기쁨의 상태가 되는가?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 삶의 매순간은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을 행복과 기쁨...

 

그리고 하느님과 떼어놓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완전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는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 진정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 자유가 존재하는 것은 자신을 포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유로부터 기쁨이 탄생한다. 이 탄생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하느님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하고 깊고 의미 있는 사랑은 순수하고 순진한 자신 - 육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위대한 피조물로서 움직이고 깊이 생각하고 창조하고 허용하고 그리고 존재하는 존엄한 피조물 - 에 대한 사랑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모든 이의 얼굴 뒤에 있고,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내가 사랑하는, 그 장엄한 근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하느님이 사랑하듯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는 것이 쉬워질 것이다. 용서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모든 생명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면, 이제 당신은 정복할 수 없는 것이 없다.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없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의 삶은 웃음으로 빛나고, 기쁨의 행로를 따라 가게 된다.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빛, 통합된 힘, 행복, 기쁨, 존재의 유쾌한 상태는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된다. 사랑이 경이로운 당신 존재 안에 가득 차면, 불만으로 가득 찼던 세계가 아름답게 되며,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되고 기쁨이 넘치며, 또한 기쁨은 당신 존재의 충만함을 통해 모든 생명을 끌어올리고 영광스럽게 하며, 당신 존재가 순수하다고 선언하게 된다.

 

삶에 있어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충족만큼 위대한 목적은 없다. 이것은 오로지 삶에 참여하여 자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을 함으로써 성취된다. 그 일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감히 누가 그것이 틀렸다거나 당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이 가는 모든 방향이며,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의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말라. 당신의 삶에서 그토록 방해가 되었던 그 제한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기쁨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하느님은 당신에게 기쁨을 강권한다. 당신이 문을 열고 기쁨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리며, 그는 항상 거기에 있다. 이것이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가 의미하는 바이다. 어떤 경우에도 아주 쉽게 기쁠 수 있다. 구하라, 그리고 당신은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라!

 

기쁨이 기쁨을 낳는다. 당신에게 주어진 기쁨을 받아들인다면, 그 기쁨은 내일의 기쁨을 증대시키고,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신을 열어준다. 이것이 매순간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다. 그렇게 할 때,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들과 보조가 맞기 때문이다.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항상 자신에게 묻고 또 느낌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구애되지 말고 행함으로써 오로지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기쁨만을 위해서 살라. 황홀하고 약동하는 순간이 자신의 영혼에 기록되고 이는 다시 앞으로 다가올 더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그리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당신 자신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면서 보낼수록, 모든 생명력인 하느님 존재에 더 가까워지게 된다.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당신은 삶의 가장 숭고한 운명을 따라 살게 될 것이다. 기적과 같은 일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당신 자신 및 하느님을 사랑하는 본보기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라는 경이로운 수수께끼와 고귀한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라. 종국에 가서 하느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때 당신은 새롭고 더 위대한 이해를 찾으러 또 다른 무한한 삶의 경험을 향하여 떠난다.

 

알고 있겠지만, 내가 지상에 있던 때에 아틀라시아인은 우리를 ‘영혼이 없는 자’라고 했다. 그때 우리가 찾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목적’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없다고 하는 영혼을 찾는 것이었다. 나는 비참한 야만인이었고 인간을 증오했다. 그러나 내가 기쁨이 무엇인지 찾아내었을 때, 그리고 내가 기쁨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모든 생명을 지탱하고 양육하며, 모든 생명 자체이기도 한 그 근원이 되었다.

 

하느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당신을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가게 하는 길이다.

 

마스터 : 내가 이 육체로 돌아오기를 선택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람타 : 다른 누가 당신을 대신해서 선택하겠는가?

 

마스터 : 그렇다면 내가 왜 이 시간 이 장소에 돌아오기로 선택했는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람타 :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삶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마스터 : 그러나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특정한 목적, 또는 이곳에 돌아오기로 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람타 : ‘특정한 목적’이란, 마스터, 삶을 경험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마스터 : 그렇다면 어떤 것이든지 가능한가?

 

람타 : 어떤 것이든지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무엇은 아니다. 당신은 그저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돌아왔다. 당신이 ‘당신’을 선택했다. 왜 당신이 아니겠는가? 당신이 지금 시간을 선택했다. 이 때가 지극히 좋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지금 피어나고 있다. 당신이 지금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모두들 산다는 경험을 간과하고 감사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산다는 것보다 더한 무엇을 찾는다. 그러나 당신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로 가장 우선적인 것은 그저 산다는 것이다! 이 생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영광된 것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겠는가? 당당한 왕이라 해도 먼저 왕이 될 수 있는 삶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가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왕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매우 좋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는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당신들이 듣고자 원하는 그러한 대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면 이 대답에 감사해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누구나 자신이 존재하는 데 무슨 구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마스터, 내 운명이 무엇인가? 내가 이 생을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알고 있다.” 하고 나에게 묻는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삶!” 그러면 그들은 당황하고 못마땅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 황금을 몸에 두르고, 새들이 머리 위에서 노래하는 가운데 인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스터, 당신의 목적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것이고, 생명을 전체적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오기를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고, 이곳은 돌아오기 즐거운 곳이라는 것을 당신 자신이 스스로 깨닫는다면, 다른 모든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모두 이곳에서 살며, 표현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곳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당신 안에 살아 있는 하느님에게도 가장 우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 일어나는 것은 특정한 무엇인가가 아니어도 된다. 그저 삶의 매순간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이면 된다. 이것을 ‘창조’라 한다. 당신은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 속에 있는 하느님이 당신에게 창조하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매순간 창조적 자아인 영혼이 이끄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 이외에 어떤 특정한 운명이 따로 있어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계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당신은 들어보지 못한 왕국, 들어보지 못한 삶들을 창조할 수 있다. 당신을 충족시킬 수 있다. 당신에게 이 명백한 자유를 허용하면 당신이 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일단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을 기쁘게 한다면 언제라도 당신은 자신의 빛을 밝혀 당신을 기쁘게 해줄 어떤 충족이라도 나타내게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깨달은 실체들 중 일부는 부랑자 시설에서 사는 변변치 못해 보이는 사람들인 까닭을 아는가? 그들은 그 순간을 살며, 그들은 살기 위해서 또 그 다음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곳에 가 보았고, 많은 것을 보고 실행했으며,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러 각도에서 인간의 영성에 대한 위대한 지식과 이해를 거두어들였다. 그들은 지극한 깨달음의 상태에 있다. 그리고 매우 행복해한다. 그 자신에게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오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에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목적이 없지 않는가?” 그들의 목표는 순간에 살고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새롭고 모험적인 일을 하면서 유쾌하게 즐기는 것이다.

 

마스터, 이 삶은 결코 감옥이 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다양하고 도전적인 창조성과 표현을 위한 무대로 설계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막간을 두고 여러 장을 거치면서 모험을 해볼 수 있다 - 항상 이러한 것들이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마스터 : 그러나 람타, 어릴 때부터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곳이 내 집이 아니고 어딘가 다른 곳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람타 : 다른 곳이 있다. 삶이란 다른 여러 차원과 여러 곳에서 계속된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또 다른 진실을 말하겠다. 진정 당신이 이곳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 존재 안의 생명력은 이곳에서 배우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 여기서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단지 이곳이 지내기에 비참한 곳이라는 걸 알아보기 위해 이곳에 오기에는 당신이 ‘훨씬 더 고상한’ 실체라고 생각하는가? ‘고상한’ 실체는 자신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행복을 발견한다.

 

이 지상에 있는 시간이 힘들다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곳에서의 삶을 더 잘 견딜 만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건, 어떻게 선택을 하든, 좋거나 나쁘고, 행복하거나 불행하며, 흥미진진하거나 세속적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것을 결국에는 깨닫게 된다. 오직 우리의 태도와 판단에 따라 이 삶에서 얻는 경험이 결정된다.

 

이곳의 한 부분이 되어 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하느님은 다른 모든 곳에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넘쳐 있다. 그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마스터, 당신이 그것을 알고 나면,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 삶을 받아들여서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웅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삶의 모든 부분을 경험하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곳에서의 삶으로 충족된다. 그러면, 당신이 이곳을 떠날 때, 여기에 돌아와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다.

 

한 가지 하찮은 길만을 따라서 여기까지 살아온 이들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계속 그 길을 따라 살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번민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이것을 했어야 했고, 저것도 했어야 했고 등등. 이런 모든 ‘했어야 되는 것들’은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도 될 때까지.

 

마스터 : 그렇다면 ‘했어야 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람타 : 마스터, 그것은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 쉽게 느껴진다면, 살고 추구해야 될 이유를 자신 스스로 설정해 보라. 진심으로 그렇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충족하고 나면, 그땐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새로운 이유가 생긴다. 계속 또 계속 반복해서.

 

마스터 : 내가 뭔가를 위해 돌아왔고, 내가 지금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특별한 어떤 일이 없다는 것인가?

 

람타 : 아름다운 마스터여, 지혜란 축적된 감성이다. 이것이 이 지상으로 돌아오는 모든 실체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전에 경험했고 이해했던 것을 다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 충족과 지혜를 약속해 주는 모험에는 항상 당신이 이끌릴 것이다. 그것들은 당신을 흥분하게 하고 유혹하며, 호기심을 자극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자신을 허용하고, 당신 존재 안에서 나오는 충동과 당신 안에서 느끼는 느낌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항상 당신의 경이로운 자아를 확장하여 더 나은 지혜와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마스터, 당신의 의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한 가지 이해를 말하려고 한다. 존재해야 될 하나의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 이유가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되게 하라 -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만은 영원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것이 되겠다든지 저것이 되겠다는 목적은 이 생에서 성취될 것이다 - 그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면서, 당신의 더 큰 지혜를 확장시켜 주고 당신에 대한 더 근원적인 사랑을 더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분별력 있는 눈인 자신의 눈으로 볼 때. 당신을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마스터, 바로 당신이 삶의 목적이다.

 

모든 이들이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 또는 내 운명은 이것이다, 아니면 저것이다 하는 등의 생각을 넘어서게 되면, 그들은 그 순간을 명확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문제에 전념하게 되고, 그전에 알지 못했던 더 큰 행복과 더 고귀한 자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것이 진정 삶으로의 해방이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당신의 목적이다 - 존재하는 것!

 

 

 

 

[람타] 15장. 잊혀진 신성 [90p]

 

15. 잊혀진 신성

 

인간은 자신이 신성하지 않다고 자주 듣게 되면, 그것이 확고한 믿음이 되어 버린다. 귀 여린 진실의 탐구자인 인간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어리석은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한때는, 인간이 자신의 유산과 계보를 알고 있었다. 한때는 인간이 하느님을 알았다. 자기 존재에게서 떨어져 있는 근본으로서가 아니라 지속되는 생명의 숭고한 있음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신성하고 영원한 자아의 바로 그 생명력인 생각으로서 하느님을 알았다. 한때는 인간이 그것을 알았다. 인간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우고 다가오는 세대에게 '내면(mid)의 불꽃(pyra)', 마음속의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상징으로 남겨 주었다.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 많은 일이 일어났었지만, 그 피라미드는 인간의 위대함과 신성함의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이 이 지상에서 처음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한 육신으로 수 천년을 살았다. 육신을 불사하게 하는 힘은 존재하는 상태에서 인간이 표현하는 무한한 생각의 순수성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신-인간(神人間)은 이 지상에서 처음으로 삶을 경험하면서부터 그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잊기 시작하였다. 왜? 그는 이 놀라운 물질계의 놀이마당을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이곳에서 경험하고 창조하는 것만이 중요한 모든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자신의 창조성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 또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 무한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장엄한 피조물인 인간은 생존, 질투, 그리고 소유 같은 제한된 생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는 존재 - 그의 영혼과 영성 - 는 영원하다! 아무 것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신이 그 자신을 위해서 지구의 흙으로 창조한 육신은 그를 점유하고 있는 불사의 존재인 생각에 종속된다. 인간이 어떤 생각이든지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그 몸에 발현된다. 육신은 인간 왕국의 궁극적 부분으로 그 속에 거하는 신의 사고작용에 의해 지탱된다. 신-인간이 생존이라는 태도를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몸에 영원한 생명력을 점화시켜 주는 생각의 힘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몸은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함에 따라, 그의 두뇌가 추론 할 수 있는 능력도 감퇴되었다. 추론하는 능력을 잃게 되자 두려움이 그의 의식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두려움의 요소들이 인간의 사고작용 안에서 하나의 태도가 되었을 때, 육체는 두려움의 힘과 그 영향으로 우환(憂患)과 질별..죽음의 고통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지상에 처음 건설된 문명은 위대한 깨달음으로 채워져 있었으나, 그들 사고작용의 무한성은 죽음에 대한 기대와 생존을 위한 태도에 따라 점점 흐릿해져 제한적으로 되어 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 생존태도는 생존을 위한 이른바 '본능'이라는 것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졌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의 세포와 유전자 구조 안에 새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신은 몸의 형태를 빌려 자신의 창조성을 경험하려는 욕망으로 물질의 한계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신은, 인간으로서, 제한이라는 태도를 이 지상에서 경험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육체적인 경험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 신의 첫 번째 육신이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는 허공이라고 하는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허공은 빛의 차원으로, '전지(全知)한 하느님'을 이해하는 의식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물질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 신은 이제 더 이상 무한한 생각의 세상으로 졸아갈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그 자신의 사고방식 안에 한계라는 변형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물질계 놀이마당이 경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장소임을 발견하였던 신은 삶의 진보를 계속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몹시 갈망하였다. 그래서 신은 자기 자손의 씨를 얻어 다른 육신을 가지고 돌아왔다. 물질계에서 계속 경험하기 위하여, 그리고 전생에서 그의 사고작용을 변형시켰던 모든 제한된 생각을 조정하기 위하여 도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지장의 물질적인 양상들을 더 많이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신은 그보다 더 많이 변형을 경험했고, 한계의 늪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갔다. 그렇게 하여 이 본보기 세상에서 환생이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신들이 인간으로서 삶의 모험을 계속하기 위하여 이곳에 자꾸 자꾸 되돌아오면서 점점 이 세상이 그들의 삶의 전부가 되었고,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의 계보와 신성을 잊어버렸다. 더 이상 하느님을 모든 생각인 '총체'로 인식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원한다고 해도, 이제 그들은 순수한 생각, 무한한 존재의 세상, 즉 태초부터 그곳에서 그들이 표현해 왔던 의식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지식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제한된 세계, 제한된 생각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합리화했다. 그래서 의식이 표현해 내는 또 다른 세상도 소위 말하는 '제한된 천국' 제한된 세계로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세상에서 가장 장엄하고 단순한 것을 잊어버린 실체들은, 육신이 죽으면, 그들의 행복과 집합적 태도인 생각에 따라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신들이, 인간으로서, 자신이 신성하고 불사한다는 것과 모든 전능과 전지가 진실로 그들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자, 주변에 널려 있는 에고에 물들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 그들은 신비한 힘과 지식의 광대한 자료를 이용하여 자신들만의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이보다 자신을 더 높이 올리려고 애쓰는 실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인간이 두려워하며 떼를 지어 다니기를 좋아하는 피조물이 되자, 예지자나 예언자, 계시자가 나타나 파괴와 멸망을 예언하면서 자신의 권능을 강화시켜 나가는 데 혈안이 되었다. 예지자는 자기가 말하는 것에 사람들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저주와 파멸의 협박을 가했다.

 

 

이렇게 하여 이 지상에 종교가 탄생하였다. 종교는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 영원한 하느님 격으로부터 인간을 더욱 분리하였다. 종교는 매우 영악했다. 사람을 칼로 지배하거나 다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오직 하느님에게는 도달할 수 없다는 가르침 즉 전지함과 전능함은 인간에게 불가하다는 가르침만을 계속했다.

 

 

그런데 영혼은 영원한 기억을 갖는다. 영혼은 모든 생의 모든 경험을 기억한다. 무엇이든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면 아무리 변형된 이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에 확고한 현실이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신성하지 않다고 자주 듣게 되면, 그것이 확고한 믿음이 되어 버린다. 귀 여린 진실의 탐구자인 인간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어리석은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한 사람에게 하느님은 그의 밖에 있으며, 그는 비천하고 영혼이 약하다라고 충분히 오랫동안 말한다면, 그 생각은 그의 영혼의 기억 속에 견고하게 각인(刻印)된다. 그러고 나면 달라지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실제로 이 지상에서 수 천년 동안 일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실체들은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번갈아 가면서 이와 같은 가르침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받아왔다.

 

그들은 그 이해에 맞추어져, 자신은 사악하고, 하느님은 자기 존재의 밖에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은 신성과 거리가 멀다고 믿어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자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예언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종교 단체의 계율을 따르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 인간이 자신의 앎이 진실의 근본이라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그는 자신의 주권과 힘을 포기하고, 대중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 종교와 정부가 오랜 세월동안 대중들을 획일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획일적이지 않다. 모든 인간은 모험을 경험하는 독특한 신들이다. 인간은 각자의 모험을 할 자격이 있다.

 

인간이 자신은 사악하고 죄인이고, 하느님은 자신밖에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자신을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러한 이해와 믿음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인간이 육신을 빌어 계속해서 태어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 자신을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고, 하느님은 그의 안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한, 그는 수백만 번을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재의 상태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신성과 삶을 실현할 때까지.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결코 덫에 걸려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참여하는 게임이며, 창조성과 생명을 탐구하는 새로운 모험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육신의 감각 때문에 자신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그래서 당신의 몸이 당신 정체성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이 세상의 물질에 너무 집착함으로써 당신은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끼며, 쉽게 흔들리는 인간이 되어 버렸고,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 안에 있는 힘의 근본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리하여 죽음은 배웠지만 삶은 잊어버렸다. 인간을 배웠으나, 정작 하느님은 잊어버렸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그 환영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그 지고의 지성을 잊어버린 것이다.

 

당신들은 모두 이 지상에서 여러 삶을 살았다. 삼만 번을 산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일만 번을 살았고, 또 어떤 이는 두 번만 산 이도 있다. 이와 같이 여러 번 살았고 죽었다.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단지 생명이라는 것을 찾아가는 모험으로서 한갓 꿈이고, 게임이며, 환상이지만, 그러한 삶들은 당신을 타락시켰다. 몹시, 그렇게 많은 삶을 사는 동안 당신의 가족이나 사회, 종교, 그리고 정부 권력은, 당신은 비천하고, 하느님은 당신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고 당신에게 주입시켜 왔다. 그래서 이것이 당신의 사고과정에서 확고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지금까지도 당신들 대부분은 하느님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스승이나 종교, 그리고 그밖에 다른 사람들이 당신 삶을 지배하고, 진리를 해석해 주도록 만든다. 당신들은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진실, 즉 '하느님과 천국은 참으로 당신 안에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남들이 복잡하게 만들고 어지럽게 흩뜨려 놓도록 만들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진실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하느님과 연결되기 위하여 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교리를 따르거나, 특정한 '수단들', 즉 의식(儀式)이나 기도, 음송, 단식, 명상 등을 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당신은 자신의 영혼에게, 당신이 되고자 하는 그것은 아직 되지 못했고, 당신이 찾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나 지식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매우 어려운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확신시킨다.

 

 

종교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종교적 가르침을 세우고 그것을 발전시킨 이들은 당신이 사랑하는 형제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신성과 가치와 힘 등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신의 형제를 노예화한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경험하고 이해한 진실이 되어 버렸다. 선지자나 성직자일지라도 나는 이 모든 이를 사랑한다. 그들도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행하고 교리를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옳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의 소리 - 그것은 하느님이다 - 는, 당신이 이미 당신이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더 좋은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 이곳에 돌아왔다. 그리고 당신은 이미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해 주려고 왔다. 당신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불쌍하지도 비천하지도 않다. 죄인도 아니다. 놀랍도록 어리석은 생각인 악마라는 것도 없다. 이러한 모든 것을 깨닫고 나면, 이제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화를 내고, 슬퍼하고, 명상에 잠기고, 신앙심이 깊은 피조물이 아니다. 근본으로서 완전하고 무한한 기쁨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느님은 당신의 내면에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생에서도 그래 왔다. 당신은 이미 하느님이다. 그는 당신 존재의 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신성한 창조 지성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제한을 경험하고 있을 때에도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이 다시 무한으로 돌아올 때에도 당신을 사랑할 근본이다.

 

 

제한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제한은 하나의 경험이었으며, 이 지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제한을 삶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무한한 사고로 자신의 육신과 전 우주, 그리고 차원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결코 다시 제한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고 모든 생각을 받아들이고 포용한다면, 당신의 가장 원대한 꿈을 능가하는 기쁨과 평온을 이 삶에서 얻게 될 것이다.

 

생각이 궁극의 창조자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느끼면서 허용하면, 그것은 당신 인생의 현실이 된다. 제한된 사고 영역을 넘어서는 모든 생각을 포용한다면, 그 생각은 발현되어 당신 삶을 넓히고 확장시킬 것이다. 필요한 것은 당신의 사고과정을 넓혀서 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을 넘어서 무한한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이 비참하다고 앎으로써 그렇게 되어 버린 것처럼, 이제 당신 존재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당신 전체로 하느님이 될 것이다. 순수 생각의 일곱 번째 수준의 이해 상태, 즉 존재의 궁극적 상태, 만물의 궁극적 힘인 상태로 당신이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단 한가지는, 하느님이 당신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느님이라는 기억이 당신 존재의 영혼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 속에서 잠자고 있으면서, 언젠가 일깨워지기를 기다리며, 현실로 경험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알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 당신이 하느님인 것을 알 때, 그 느낌을 확신함으로써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당신에게 가르쳐 줄 경험과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깨우쳐줄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 자신의 사고과정과 감성에 의하여 그 이해를 성취해 나갈 수 있다.

 

 

당신과 하느님이 하나라는 것을 안다면, 분리하는 태도를 당신의 사고방식에서 제거하고, 당신은 다시 신격과 하나가 된다. 큰 지혜와 전지한 하느님의 지성이 생각의 전체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임을 깨닫고 전체 생각이 되도록 자신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하느님 전부, 즉 모든 것이 된다. 그때 당신은 당신의 자유와 위대함과 영광을 되찾는다. 다시 천국에 돌아올 필요가 없이, 더 광대한 천국으로 가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더 웅장한 모험을 계속할 수 있다.

 

 

단언하건대, 당신이 이 지상에서 성취해야 할 것은 본연의 당신으로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이 하느님이라는 지식은 존재의 상태에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은 존재(Being)이며, 모든 생명의 있음(Isness)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당신이 누구이고 또 어떻게 표현하든지, 당신 자신을 허용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 순간에 성취할 수 있다. 한 순간에 깨달을 수 있다.

 

하느님은 바로 현재이다. 무한도 바로 현재이다. 영원한 하느님이 되는 길은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온전히 영원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단순히 존재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생명의 있음 그리고 지속성과 하나가 되고, 당신의 몸은 스스로 고양되어 지속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죽을 필요가 없고, 모든 세상을 초월하여 일곱 번째로 갈 수 있다. 이곳은 모든 것의 종착점인 생각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속박(制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가지고, 왜 자신들은 정부나 교리, 사회의 위선에 노예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이 지상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한된 의식의 장벽을 넘어서 그것을 초월할 정도로 충분히 자신과 남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있다. 지로소 자신의 내면과 모든 사람의 내면에 부드럽고 애정이 깊으며 현명한 근본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인간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예언과 종말론, 모든 종류의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그것들을 벗어나 살아 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하느님을 사랑해야 된다면 왜 그들은 하느님을 무서워해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다.

 

이 지구상의 의식은 변하고 있다. 인간을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간주하게 만들었던 제한된 이해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오면서, 인간을 본래 하느님인 지고한 근본으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향상되고 있다. 이제 새로운 배움이 일어나야 할 때이다. 그것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당신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 그 진실이 당신으로 하여금 정체해 있는 독단적인 믿음과 이해를 넘어서, 항상 존재해 왔던 생각의 천국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올가미가 당신의 목덜미에서 풀리고, 당신의 영혼 안에서 기쁨의 느낌이 확연해지면, 당신은 당신의 본래 모습인 위대한 하느님이 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육신의 시대였다. 새로운 시대는 벌써 지평선 위로 떠올랐다. 이 시대를 빛의 시대, 순수 영성의 시대, 하느님의 시대라 한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천국이 자신 안에 항상 있어 왔음을 깨닫는 시대이다. 빛의 시대는 인간을 무한한 생각으로 되돌려 놓는다. - 사랑과 기쁨, 그리고 존재의 자유가 있는 지고한 왕국으로, 새로운 왕국을 살아 갈 이들은 전쟁영웅이나 폭군이 아닐 것이다. 한계의 속박을 벗어나 평화를 알리는 선구자로서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다.

 

 

"나는 하느님이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나 자신이 내가 보는 모든 것이고,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에까지 도달한 이들은 그 자신의 빛 하나만으로도 전체 의식을 향상시킨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당신들은, 다가오는 내세에 더욱 현명한 창조를 할 수 있도록 해줄 지혜의 진주들이 가득한 무한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이 지상에서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거대한 환영이다. 이것은 거대한 꿈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꿈에서 깨어나, 배우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하느님을 모든 이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은 구름 낀 하늘을 쳐다 볼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늘을 쳐다보면서, 눈부신 빛들이 여기 저기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며, 별들이 내려와서 구름속에 둥우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보는 것을 온 인류가 다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당신을 깨워, 내가 당신에게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이 참으로 위대한 진리이고 경이로운 현실이라는 것을 당신이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마스터 :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이나 태초에 우리를 결속시켰던 것들로부터 분리되었는지 알고 싶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람타 : 태초에 당신들 각자는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의 에고 - 당신의 정체는 '유일하고도 독특한 하느님'이었고, 삶은 모든 생각을 경험하기 위한 감동적인 모험이었다. 하느님은 모든 생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에고는 순수했고 변형되어 있지 않았다. 당신의 존재 안에 생각, 혹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어떤 태도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존재하는 지금 순간에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생각을 받고, 감성으로 변화시켜서, 그 감성을 창조성으로 발현하는 능력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당신들 모두 어린이와 같았다. 존재의 순수성을 깨뜨리거나 표현을 제한하는 어떤 태도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들은 두려움을 알지 못했다. 더 낫다거나 못하다는 판단을 알지 못했다. 경쟁이나 질투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죽음도 알지 못했다. 이러한 태도들은 그 어떤 것도 창조하고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당신들, 신들은 태초부터 생각의 감성을 창조적 형상으로 창조하고 표현하려는 강한 충동을 가졌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누구에게는 좀 많이, 누구에게는 좀 적게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동등하였다. 그러나 창조하기를 시작하자 경쟁심이 당신들 사이에 일어났다. 다른 이의 창조적인 생각을 취하여 더 위대한 무엇으로 확장하려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또 창조해 내고..

 

 

왜 이 지상에 그렇게 많은 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한 가지 장미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떻게 그 많은 나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왜 신들은 경쟁적인 경주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창조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자신의 창조성은 다른 이의 것처럼 대단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기 존재가 뒤떨어져 있다고 보기 시작하였다. 그 부족한 느낌을 채우기 위해, 신들은 다른 이의 창조를 뛰어 넘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사고 과정이 경쟁적인 창조성에 휩쓸릴수록, 점점 더 그들은 있음의 완전함에 비하여 그들 자신을 훨씬 모자란 것으로 보게 되었다. 모든 것의 평등함인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알겠지만, 생명으로부터 나온 분리와 '불완전'이라고 하는 이해는 항상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보게 될 때만 생긴다.

 

 

삶의 현실에서 보면 아무 것도 낫거나 못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고, 있음에 있어서 평등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완전한 상태에 있다. - 더 적절하게 표현하면, 있음의 상태, 존재의 상태에 있다. 어떤 것을 진정한 있음의 완전함보다 못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마음가짐, 집합적 생각인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인간의 육신으로 들어왔을 때, 당신은 심하게 분리되었다. 비록 자신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해 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당신은 자신의 신성과 존재의 불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낮추어 육신으로 들어가고 세포물질 수준의 현실을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당신은 배고픔과 추위, 생존같은 '물질적 기능'에 얽매이게 되었다. 육신을 갖게 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그때부터 세포물질과 뒤섞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세포물질은 처음부터 육체가 생존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된 것이다. 이렇게 불사의 존재가 육체의 메카니즘과 합쳐지게 되면서 육신의 생존에 매달리게 되었다. 존재의 에고 상태가 극심하게 변형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에 '지식의 나무' 변형된 에고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두려움과 경쟁심, 질투 같은 감성을 경험한 것으로서, 당신의 영혼에 기록되고 몸의 세포구조물에 프로그램되었다. 그리고 변형된 에고를 더욱 강화시켜 자신이 신성하고 불사하며 모든 생명과 하나라는 앎을 변형시켜 나갔다.

 

 

마스터 : 자신이 영원한 것을 아는 신들이 왜 자신이 죽는다고 믿게 되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 먼저 그들은 어떻게 죽음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람타 : 그들은 자신이 창조한 것들로부터 변화의 과정 -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였다. 알다시피 이곳에 창조된 많은 것들은 서로의 먹이가 되도록 짜여졌다. 피조물이 자신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물질은 그 자신과 같은 물질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을 당신들은 '먹이사슬'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꽃은 신들이 창조한 동물의 먹이가 되었다. 동물이 식물을 먹어 버릴 때, 식물을 창조한 신들은 끔찍스럽게도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눈앞에서 분해되고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초식동물들은 다시 다른 신들에 의해 창조된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었다. 계속 이렇게 진행되었다. 이것이 신들이 경쟁하기 위하여 선택한 한 방법이다. 알다시피 당신이 창조해 놓은 피조물이 다른 신들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먹히고 소화하도록 하는 것은 대단한 치욕이었다.

 

 

인간이라는 육신을 설계하고 진화하게 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이라고 하는 피조물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신들은 그 인간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이 여기에 창조한 다른 모든 것들의 일부가 되었던 것처럼...

 

 

초기에 창조된 인간은 그다지 잽싼 피조물이 아니어서, 짐승들은 계속해서 인간의 몸을 먹이감으로 취하였다. 인간의 고기 맛이 괜찮은 것을 안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신들은 죽음이라는 행위를 경험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를 얻고 나자, 그 육신을 개선시켜 자신이 먼저 창조해 놓은 피조물인 육식동물의 발톱에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신들이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 지상에 애착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그들은 이곳에 창조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상호작용을 하고 싶어하면서부터이다. 신들은 식물이었고 동물이기도 하였다. 곤충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배할 형상을 가지는 것, 그것이 자신들의 궁극적 사랑이고 창조행위였다.

 

 

신들이 결국 그 자신을 남자와 여자로 형상화하고, 그들의 모든 주의력을 자신의 창조물들을 능가하고 그것들로부터 당하게 될 화를 모면하는데 집중하였을 때, 그들의 생명은 변형 상태가 되어갔다. 우스꽝스럽게도, 신들이 그들의 먹이로 취하는 짐승들에게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그들의 의식을 빼앗아가기 시작한 생존을 위한 태도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의 육신을 쓰러뜨린 것은 생존을 위한 태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면, 그는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신들이 창조한 모든 것 중에서 두려움이라고 하는 창조물만큼 파괴적인 것은 없다. 어떤 것도 이 두려움의 그림자 속에서 생명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신들이 인간으로서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유일한 현실이자 욕구는 이 물질의 낙원을 계속하여 경험하고, 이 왕국에서 성취하기 위해 더 많이 창조하는 것이었다. 신들의 자부심은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들은 점점 더 좋아지고 싶은 안달이 나서 자꾸 돌아오게 되었다. 자신에게서 찾아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창조성을 '더 나은' 것으로 이곳에서 표현하기 위해서 돌아오는 것이다. '더 나아'지려는 태도와 욕구에 따라 이 물질계에 너무 깊숙이 빠지게 되면서 자신의 신성불사인 본성을 잊어버리고, 죽었거나 죽어 가는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된다는 이해는 불행하게도 창조를 구상하면서 잃어버리기 시작하였다. - 신들이 이 지상에 집착하기 이전부터 - 경쟁심 때문에 그리고 '더 위대한 것', '더 나은 것'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이것을 말해 둔다. 마스터. 하나됨은 오직 한 순간이다. 한 숨만 들이키면 된다. 당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당신이 다른 어느 것과도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전체 생각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한 것은 단지 당신의 태도이자 당신의 제한된 생각이고 당신의 변형된 정체성이다. 생각에 대한 판단을 제거해 버리고 전체 생각으로 돌아오게 되면 당신은 이제 결코 길을 잃거나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기 위한 길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빛이 될 것이다.

 

 

마스터 : 람타, 우리는 실제로 완전하고, 우리가 바로 하느님이며, 우리는 영원히 산다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나는 조심해야하고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때때로 느끼는 이 느낌은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 내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 환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이러한 느낌은 참된 나를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다.

 

 

람타 : 마스터 당신도 알다시피 동물한테는 자기 보존이라는 경이로운 능력이 주어져 있다. 이는 생존을 위한 원시적 본능으로 세포 구조 안에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그들은 살아가고, 경험하고, 진화할 수 있었다. 인류도 또한 원시적 본능이 있으며, 이것은 유전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인간의 생존에 대한 본능은 몸의 세포 구조에 들어 있어서 그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인간은 아무런 보호체도 없이 알몸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뿔도 없으며 발이 재빠르지 않다. 손이 빨리 움직이지도 않는다. 청력이 뛰어나지도 않으며 시력이 탁월하지도 않다. 인간은 매우 섬세하고 뛰어나며 자족하는 실체로서, 자기 보존을 위한 가장 훌륭한 본능은 조심하는 것과 숨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본능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 실제 모습인 경이롭고, 생각할 줄 알고, 진화하며, 창조적인 육신을 갖출 때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물질의 밀도를 경험하기 위하여 영혼의 자유를 보류하는 쪽을 선택하였으며, 이때에 당신은 유전적이고 본능적인 정형으로 빚어지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두려워하고, 집단을 이루며, 의심하고, 매우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조심하는 것은 환영(幻影)이 아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조건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결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본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이해를 한 단계 넓혀 보자. 조그맣고 경이로우며 창조적인 불꽃인 당신이 이곳에서 진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의 몸이 당신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이제 당신은 육체를 넘어서 영성과 영혼의 불사의 영역으로 나아 갈 때가 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려고만 한다면, 이제는 당신의 영성이 당신의 몸을 제어하고 보호할 때이다. - 생각의 무한함을 이해함으로써.

 

 

지금 해야 할 일은 당신 자신인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굳건하고.. 확고하며..자주적인 존재..유아독존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극복해야 할 유일한 환영은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환영을 지워 버릴 수 있는가? 단순히 당신의 사고과정에서 그것을 지워 버리면 된다.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모두 현실이다. 이 차원에서 결코 현실로 발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 당신이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한번 포용하기만 하면, 유아독존의 원리로, 당신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당신의 실체를 사랑하라. 마스터. 자신을 사랑하라! 당신이 영원하고 자신이 곧 하느님임을 알라. 이를 알라! 이를 느껴라! 이 생각을 포용하라. 오랫동안 당신을 보호해 왔던 본능적인 천성이 당신은 죽는 것이 아니라 불사라는 지식과 마주치게 되면, 그리고 당신은 한정된 인간이 아니라 무한한 하느님이라는 지식과 직면하면, 당신의 영혼은 이 무한의 생각을 육신의 세포체에까지 전해 주게 되며 세포체는 환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몸은 그 안에 거하는 위대한 신이 가지는 무한한 생각과 기꺼이 조화를 이룰 것이다. 당신의 몸이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불확실성과 조심성을 가지게 된 것처럼, 이제 그 자신의 세포에 무한한 하느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나 자신인 하느님' 전체와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

 

 

더 '당신다워지려면', 마스터, 단순히 당신이 느끼는 불확실함의 경계를 넘어서라. 그리고 육신에 의해 보호받던 당신이, 당신이 이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면, 당신의 몸은 흔쾌히 따를 것이다.

 

 

마스터,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완전하게! 삶을 사랑하라. 생명 전체를! 이렇게 할 때, 당신은 합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확신하건대 태도만으로 한 순간에 그렇게 된다.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그저 알라!

 

 

 

[람타] 16장. 환생 [99p]

 

16. 환 생

 

당신은 하느님과 유아독존의 원리를 경험하기 위하여 돌아왔다.

유아독존의 원리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생각의 영역에서 창조된 모든 태도,

모든 감성, 모든 환영을 망라한다.

 

마스터 : 특별히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당신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우리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느낀다.

 

 

람타 : 지금도 그렇고.. 또 늘 그랬다.

 

 

마스터 : 그러나 두 가지 일반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쪽으로 진행한다고 당신은 말해 왔다.

 

 

람타 : 그렇다. 이 자리에서 떠날 때는 존재의 위대한 순간으로 가게 될 것이다. 당신의 삶은 항상 그 전 순간보다 더 위대한 순간으로 진보하기 때문이다.

 

 

마스터 : 그렇다면 환생의 이치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더 나은 데를 향하여 이곳을 떠나지만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 이곳으로 보내지는 것인가?

 

 

람타 : 마스터, 어째서 당신은 미래에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더 나은 무엇인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마스터 : 이곳에서 사는 것은 투쟁인 것 같다. 고통과 슬픔을 너무 많이 감당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많은 고통을 경험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그러한 일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곳에는 고통이 많은 것만은 분명하고, 가까운 미래에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어렵다.

 

 

람타 : 잘 알겠지만, 이곳에서 지난 시간의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모든 이들이 항상 배가 고팠다. 그래서 주린 배를 채울 빵 한 조각, 치즈 약간, 신선하지 못한 포도주 한 모금을 사기 위한 푼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이제 그들을 보라. 모두가 비만과 전쟁을 하고 있다. 모두 배불리 먹고 살쪘다. 오다가다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한다. " 쯧, 쯧, 아름답지 못해" 그래서 지금, 모두 다시 굶기 위해서 투쟁을 한다. 삶은 모험이 아니던가? 이곳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마스터, 에고이다.

 

 

마스터 : 좋다. 그렇지만 내가 초점을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당신은 삶이 순환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순환에 끝은 없는가?

 

 

람타 : 삶은 순환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대로 반복되지도 않는다. 항상 변한다. 그 뿐만 아니라 부단히 지속되기 위해, 매순간 진화한다. 삶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삶의 존재, 삶의 있음 덕분에 다음 순간을 창조한다. 각 실체의 태도에 따라 그 다음 순간이 창조된다. 쳇바퀴 도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당신의 삶에 대한 태도이다.

 

 

환생은 진실이다. 단순히 몸을 버리고 - 그의 태도가 그를 죽도록 허용하기 때문에 - 이곳에서나 혹은 물질 세상의 다른 곳에서 다른 몸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곳에 오는가? 그들은 이곳에 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강제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있던 곳에서 쫓겨나 육신으로 되돌아오고, 자궁을 빠져 나오기 위해 애쓰고 난 뒤에는. 당신을 둘러 싼 에고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을 이곳으로 보내는 법령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당신의 의지에 반하여 당신이 무엇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만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을 결정한다. 이 지상에서 다시 표현하기를 원한 이는 당신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불행을 탓할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당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만이 전적으로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의 존재, 슬프거나 놀라운 당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도 이 세상에 환생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그러나 무한히 긴 시간을 이곳에서 살았던 인간이 이곳만을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몸을 잃고, 감성적인 애착을 가졌던 것과 이곳에 있는 장난감에서 멀어지게 되면, 그는 곧 서둘러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원한다. 이곳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천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다. 그에게는 실제로 그러하므로.

 

 

당신이 이곳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당신이 이곳에 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당신의 영혼을 충족시켜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슬픔, 동정과 분노, 고통, 그밖에 환영으로 이루어진 이 지상에서, 당신이 경험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그 일에 지치고, 지겹고, 싫증나면, 태도를 바꾸어 다른 감성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단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고통과 슬픔, 지옥과 같은 환경과 양립될 수 있겠는가?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태도 하나에 달렸다.

 

 

당신은 하느님을 경험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유아독존의 원리를 살아보기 위해서 이곳에 돌아왔다. 유아독존의 원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망라한다. - 하느님이라고 하는,, 생각의 영역에서 창조된 모든 태도, 모든 감성, 모든 환영을.

 

 

왜 당신이 지금의 당신인지 아는가? 전에 다른 역할을 다 해보았으며 지금은 이 역할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처럼 부유한 실체가 아니라 굶주리는 아이로는 태어나지 않았을까? 당신은 부유한 실체가 되고 싶었던 굶주리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왜 지금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빵을 굽는 빵집 주인이 아닌가? 전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빵을 굽는 빵집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에게서 빵을 사는 실체이다.

 

 

이 왕국에서 경이로운 것은 지속한다는 것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면 어떠한 배역도 될 수 있다. 이 삶이라는 무대에서 진보해 나가면, 당신은 당신 존재에게 가장 큰 배움을 제공해줄 환영이 전개되는 새로운 장으로 나아간다. 그 무대에서 당신은 왕이나 빈민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되고, 사랑 받는 이가 되며, 노예가 되고, 자유인이 되는 자유를 갖는다. 이 모든 환영들이 당신의 영혼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이해를 제공해 줄 것이다.

 

 

마스터, 당신이 겪어 보지 못한 경험도 무수히 많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 있고, 되어 보지 못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지고한 평화로움으로 살아가면서도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단히 발현시킨다. 그들은 당신이 경험하려고 선택해 본 적이 없는 태도와 모험을 생각으로 즐기면서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간다.

 

아직도 살아 보지 못한 많은 이해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장엄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단순히 살아간다는 이유 때문에 사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사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그 때가 평화를 알게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기쁨을 알게 되는 때이다. 마스터, 그때가 다시 한번 당신이 온전히 하느님이 되는 때이다.

 

 

그러한 삶의 이해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다. 부양해야 하는 역할, 노력해야 하는 역할, 경쟁해야 하는 역할, 모범을 보여야 되는 역할, 고통받는 역할, 신경과민인 역할 등에 당신이 너무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당신의 몫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삶의 다른 부분을 살아 보게 된다면, 그러한 것들은 당신이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찮은 조각들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삶은 인간의 역사 속에 일어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멋진 것이다. 불행하게도, 도시 한가운데서 앞뒤가 꽉 막힌 사회의식이라는 두터운 벽에 갇힌 도시인들은 이곳이 살아가기에 불행하고 비천한 곳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인간의 이상(理想)들과 위협, 그리고 제한된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용기를 얻고, 당신 내면의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대자연의 초야에서 살게 된다면, 삶은 진정 광휘로운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속적이며, 무한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느님과 생명의 웅장함을 경험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은 당신이 이 지상에 붙들어 두는 것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은 빙하 위를 걸어보지 않았고, 돌다리 밑에 숨어보지 않았으며, 겨울의 하얀 눈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아름다운 빨간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창문 너머로 내다보지도 못했다. 깊은 동굴에 있어 보지 않았고, 사막을 걸어다녀 보지도 않았으며, 먹이를 찾는 뱀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당신은 거대한 피라미드 안에서 홀로 잠을 자 보지도 않았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 - 이러한 곳은 수없이 많다 -을 탐구하러 나서 본 적도 없다. 대양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 가서 거대한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것을 보거나, 빽빽한 숲 속에서 사슴을 쫓아가 보지도 못했다.

 

 

당신은 당신 존재를 흥분하게 하고 전율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많은 것들을 해보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들 중 어느 하나도 당신의 직업이나 학벌, 지위, 신체적인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당신이 아직도 경험해야 하는 삶의 측면들이다. 당신이 그러한 일을 하게 되면, 신경증이나 두려움, 굴레, 망설임 등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기쁨에 넘쳐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 누군가가 당신이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을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든지, 또한 누군가로부터 강요받지 않아야 한다. 받지 않는다면 이것은 당신의 본성이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 이곳에서 당신이 선택한 것을 모두 경험하도록 당신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기쁨이나 자유와는 전혀 거리가 먼 환영에 불과한 것을 이상으로 삼도록 당신은 강요받아 왔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이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다면, 돌아오지 말라. 당신은 돌아올 필요가 없다. 영영.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바람과 함께 초탈하였고, 나 자신이었던 모든 거을 함께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로운 실체가 되었다. 자유로운 실체! 내가 이곳에 살았던 동안에 했던 모든 것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했고, 이 삶을 포용했으며, 하느님이 되는 일에 몰입하였다. 무지하고 비천한 야만인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도 할 수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의 삶을 마치는 길을 살고 사랑하고 그리고 단순한 것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생명의 자유를 위협하고 제한하며 구속하는 그러한 이상을 자신에게서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을 비교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을 버리고, 그 대신에 당신 존재 안에 있는 어떠한 것이든지, 당신만의 이상과, 당신만의 진실을 따라서 살고, 당신의 영원한 존재를 사랑한다면, 그때에 당신은 꽃과 하나가 되고 물고기와 하나가 되며 결국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된다. 그때 당신은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경험을 마쳤다. 이곳에서의 모든 삶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모험을 할 준비가 되었다. 저 멀리 있는 왕국과 새로운 이해와 존재의 전혀 다른 길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당신이 이러한 일들을 끝마쳤을 때, 마스터, 빛나는 영광과 함께 이 지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떠났다.

 

나는 이 지상을 사랑한다. 나는 자주 계곡을 따라 거닌다. 나무사이로 부는 바람이 되고, 어린이의 웃음 속에 있기도 한다. 이곳에 있는 모든 가치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곳의 삶을 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사랑하는 형제들의 아픔을 안다는 것이다. 나는 해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당신이나 다른 모든 이들이 이곳에서 표현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환생이다.

 

 

마스터 : 고맙다. 당신이 말해 준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람타 :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은 당신 존재에게 좀더 친절해지고, 당신 존재가 더 쉽게 숨쉴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할 것이다.

 

 

마스터 : 이 지상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에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람타 : 당신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표현하는 일이다. 유일한 차이는 당신의 경우는 표현이 제한되어 있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영원에까지 닿아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종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실 그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바람과 함께 다닌다. 그것이 내 궁극적인 소망이었으니까.

 

 

나는 행복하다. 나는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또한 그녀의 삶 속에서 그녀를, 그의 삶 속에서 그를... 나는 당신의 환영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 환영이 당신에겐 그토록 심각한 것이고 무서운 빛깔로 채워져 있지만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들 모두는 더 많은 것을 보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이 있다.

 

 

나는 표현하고 있다. 마스터,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있다. 당신이 여기에서 만나고 있는 나로서 있지 않을 때는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이 나오는 그 터전이다. 일곱 번째 차원은 생각의 전체로서 행성을 궤도에 묶어 놓고, 세포를 결속하고, 영원의 범위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거대한 허공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차원의 실체가 되면, 이제 차원이라는 것은 없어진다. 오직 있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것,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의 모든 느낌이 된다.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숙고해 보라. 생각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태양의 표면에까지 생각을 이르게 할 수 있는가? 달의 뒷면은 어떤가? 천상의 크고 작은 별에는? 다른 세상에 있는 다른 실체에게 생각을 보낼 수 있는가? 한 순간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당신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한 표현을 원하지 않는 이가 바로 당신이다. 그러한 표현을 원한다면, 바로 그렇게 된다.

 

 

마스터 : 우리가 왜 자꾸 돌아오게 되는지 깨닫게 되는 때가 언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람타 : 그렇다. 그것을 행복이라 한다. 그 순간은 당신이 당신 이외의 그 어느 실체도 아닐 때,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에서 얻어진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다.

 

 

한가지가 더 있다. 마스터. 당신에게는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다른 실체에게는 종종 행복일 때가 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복에 대한 이상은, 사물의 색깔을 마음대로 파란 색, 연보라색, 핑크색으로 바꾸어 버리는 팅커벨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어릿광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는 행복하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확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고 싶어하면, 아프게 된다. 불행하고 싶으면 불행하게 된다. 그들이 그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삶을 즐기고 이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은 죽어 버린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스터, 존재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어느 날, 주위에 있는 이들을 쳐다보면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든 무한히 행복하다는 것을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마스터 : 질문을 한 가지 더 해도 되겠는가? 다른 생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했다. 전생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람타 : 마스터, 청중을 대기시켜 놓고 소위 말하는 당신의 '기록' 전체를 명백하고 상세하게 풀어놓는다면, 당신의 다음 생까지도 우리는 계속 여기 있어야 할지 모른다. 당신은 이곳에서 이만 삼백 사십 육회하고도 반을 살았다. 그래서 당신의 과거를 당신에게 말해 주려면 어느 때, 어느 지역에서, 어떠한 환영이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풀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마스터, 이 현생의 삶은 지루해하고 아무런 느낌을 못 갖는 많은 이들이 때때로 과거의 삶에 집착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마도 과거에 삶의 활력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들이 지금 부족하게 느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를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삶인 것처럼 상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생에서 삶이 재미없고 지루할 때, 자신은 전장에서 매우 영웅적이었고,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많은 여성들을 뒤로하고 떠났다는 식으로 그들은 항상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 왔을 때, 도시 전체가 아주 오랫동안 축제를 벌였다거나, 아니면 그들은 그 시대에 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으며, 많은 남성을 연인으로 거느렸을 것이라는 식이다. 이제, 이것을 모두 이해해 주기 바란다.

 

 

당신들은 많은 생을 살았다. 그 생은 모두 훌륭했으며 낭만적이었다. 비천하고 미개했으며, 유명하기도 했고 악명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의 그 모든 모습은 지금의 당신에 비할 바가 못된다. 바로 지금의 당신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위대하다. 마스터,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생에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스터, 지금 현재는 과거 그 모든 삶의 목적이다.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 어떤 환영, 어떤 경험을 하든지 상관없이, 당신이 지금보다 나았던 적은 결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지혜, 앎, 사랑을 과거 어느 때보다 현재에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당신을 현생 이전의 다섯 전생으로 데려간다면, 당신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아라는 요소를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훨씬 정제시켰기 때문이다. 당신의 과거 어느 생에서 지금의 당신을 본다면, 용감하고 천재적이며 영웅적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과거의 자신은 지금의 당신을 보고 '신들린'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해는 그 옛날과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과거에 당신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과거를 돌아본다면, 당신은 지금 순간의 삶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이 현재의 삶이 미래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해답도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머리 속은 뒤돌아보느라고 너무 바빠 새로 오는 현재를 볼 겨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마스터, 과거에 당신이 누구였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우리에게 전생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다. 내일을 위한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을 함께 하였던 근본적인 아름다움은 아직도 조용히 숙고하며 마침내 깨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위대한 신만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힘과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현재에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 지금은 항상 새롭다. 지금은 허용된 순간들이다. 이 새로운 순간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는 당신이 자신의 태도로 결정한다. 당신은 불쾌하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하게 느낄 수 있다. -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 태도를 바꾸어 사랑이 넘치고, 자유로우며, 매력적이고, 즐겁고, 기쁨에 차며, 활기차게 될 수가 있다 -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이전 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우울하고, 밝으며, 헌신적이고, 후회할 수 있다. - 당신이 원하는 대로.

 

 

중요한 것은, 마스터, 당신이 지금 누구인지를 알고 이 삶에서 행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미래의 생에서 이 현생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매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영혼 속에 항상 살아서 남아 있게 만들라. 무한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면, 매순간을 완전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스터 : 내 미래가 어떤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람타 : 미래에 당신은 어떤 사람이겠는가? 당신은 항상 당신일 것이다. 눈이나 피부색, 용모는 변하겠지만, 당신은 언제나 당신일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동일한 영혼을 지니며, 당신의 존재는 동일한 하느님의 영성을 지닐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싶은 환영 속의 인물로 다음 생을 살 것이다. 그것이 이 지상에서라면, 생명의 탄생 과정과 당신의 특별한 구상에 따라 자궁을 거쳐 태어나, 당신 스스로 설정한 게임과 환영이 충족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간단히 환영에서 벗어나 더 위대한 이해의 세상으로 갈 수도 있다.

 

 

현재를 사는 법을 배우라. 이 생을 한껏 살고, 당신 자신을 경험하라. 바람을 타라. 생각을 조종하여 달에까지 항해해 보라. 태양에까지 찬란한 생각을 조종하여 달에까지 항해해 보라. 태양에까지 찬란한 생각을 비추어라. 태양이 당신을 알아 줄 것이다. 별 위에 앉아 보라. 물에게 말을 걸라. 그것은 당신들 모두이고, 그것은 모두 하느님이며, 그것은 모든 삶이다.

 

 

마스터 : 고맙다. 마지막으로 질문에 하나 있다. 내가 어느 세상으로 진보해 나가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람타 : 하느님에게 가고 있다. 마스터.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성을 다듬어 나가고 있다. 당신은 신으로서 이곳에 왔다. 신으로 이곳에 와서, 육신을 빌려 배고픔과 더위, 추위, 그리고 영토 분쟁 등에 휘말린 채로, 당신 본래의 신성과 힘, 모든 것을 다 해볼 수 있는 전지한 지성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이 세상과 연결되었다. - 이곳 또한 일곱 번째로 향하고 있다.

 

 

당신은 일곱 번째의 이해로 진보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한 지식의 절정은 그 지식의 제공자이고, 그가 바로 당신이다.

 

 

마스터 : 그렇게 될지어다.

 

 

람타 : 그렇게 될 것이다.

 

 

 

 

 

 

 

[람타] 17장. 앎의 과학 [107p]

 

17. 앎의 과학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의식 안에 있고, 하나님 마음은

심장이 박동하듯이 그 모든 것을 퍼내어 당신에게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축복 받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를 열심히 구하는 이들이 많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이들은 적다.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에 밝아진다.’라는 뜻이고, ~ 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며, 당신이 원하는 대로 적용할 수 있는, 당신에게 유용한 지식을 갖는다는 뜻이다.

 

어떻게 깨달음을 얻는가? 세례를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길은 생각이 당신의 사고과정에 유입되고, 당신의 존재 안에서 경험되어, 지혜가 생겨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왜 지식이 중요한가? 그것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보배이다.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간다고 해도, 당신으로부터 빼앗아간 적도, 또 결코 ! 뺏을 수도 없는 것은 당신에게 다시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지식이다. 지식이 있으면, 당신은 자유롭다. 선택권이 있다. 지식이 있으면 여러 왕국을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지식이 있으면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을 위협하거나 노예화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어떤 요소도, 어떤 원리도, 어떤 이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두려움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지식이 있으면 당신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넘어서 숙고하고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지식으로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깊게 할 수 있고, 더 위대한 지식을 담는 수용능력을 키울 수 있다. 지식은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확장하고, 항상 더 넓은 의미의 자기 정체성을 찾게 만들어, 그렇게 ‘되도록’ 강권한다. 그리하여 지식은 당신을 제한된 삶의 경계 너머의 더 무한한 광활함으로 데려간다. 지식을 통해 그리고 배움을 향한 모험을 통해, 당신은 단순해진다. 그 단순함 속에서 당신은 존재의 평화와 생명의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들에게 앎의 과학을 이해하도록 해주고 싶다. 어떻게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가? 그것이 왜 중요한가? 당신이 무엇을 알든지, 당신이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는 법을 배운다면,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무한한 지식이고, 무한한 자유와 존재의 기쁨 안에 있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 마음인 생각으로부터 실재하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자기 존재의 생각을 하나님 마음으로 되돌려보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자체를 감싸는 빛의 장을 가지고 있다. 빛의 코로나에 둘러싸여 있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빛은 생각의 이미지를 붙잡아 거기에서 생겨나는 이상을 물질이라는 형상으로 창조하게 때문이다. 그 빛의 장을 통하여 모든 것은 자기 존재의 생각을 방출하고 ‘의식의 흐름’ 또는 생각의 강이라고 하는 하나님 마음으로 되돌아간다.

 

카펫, 식물, 빛, 신발 가죽을 보라. 자신의 손이나 다른 실체를 보라. 이런 것들이 공통으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실재한다. 실재하는 까닭에 각각은 자기 존재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각을 자기 존재로부터 방출한다. 이것을 ‘집합적 지각’이라 한다. 카펫은 그 색상이 무엇이고 누가 그 위에 앉아 있는지 지각하고 있고, 식물은 실내를 지각하고 있고, 그 지각은 그 존재의 빛을 통하여 의식의 흐름으로 방출되고 있다. 매순간 그 지각은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존재하는 생각의 강인 하나님은 계속해서 확장하고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단(星團), 모든 먼지 알갱이, 모든 실체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이 우주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우주로부터 - 자기 존재의 생각을 하나님 마음으로 방출해낸다. 그곳에 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생각으로 되돌려진다. 이것은 모든 것이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다.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얻는 수 있는가? 당신의 육체는 오라와 오라장이라고 경이로운 빛의 장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 오라는 빛의 장으로서 육신의 물질을 감싸고 함께 엮는다. 과학자들은 킬리언 사진기를 이용하여 오라의 첫 번째 코르나 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감사고 있는 오라는 훨씬 더 많은 층들이 있다. 왜냐하면 오라는 전기밀도(몸을 감싸는 푸른 코르나)에서부터 생각의 무한에까지 뻗쳐있기 때문이다.

 

오라의 한 부분은 음의 전기단위와 양의 전기단위로 이루어진 강력한 전자기장이다. 이 전자기장을 넘어서면 더 이상 전기 단위로 나누어지지 않는 빛의 구체가 당신 존재의 영성이다. 당신 존재의 영성 - 내가 당신 존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은 하나님 마음, 즉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바로 연결된다. 당신의 영성은 생각의 강, 지식의 강에서 흘러나온 생각이 이 위대하고 강력한 장을 통하여 흐르도록 한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알게 되는지는 당신의 사고작용으로써 결정된다. 왜냐하면, 오라 중의 그 전자기 부분은 당신이 사고하는 바에 따라 당신에게로 생각을 끌어오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성은 항상 움직이고 항상 변하는 생각이라는 강의 연안에 설치해 놓은 그물과 같다. 그 빛에 의해 당신은 모든 지식이 흘러드는 생각의 흐름인 하나님 마음을 수신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신은 모든 의식이 연속적인 흐름인, 모든 지식의 강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강물과 같다.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 세포를 포함한 당신의 전체 자아는 그에 의해 부양받고 있다. 왜냐하면 생각이 당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의식의 흐름에로부터 들어오는 생각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마치 몸이 혈류를 통해 영양분을 각 세포에 공급받아 살아가듯이 당신의 전체 자아도 의식의 흐름으로부터 공급되는 생각의 영양분으로 유지된다.

 

당신은 의식이 흐름으로부터 들어오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이 실재하는 매순간을 창조한다. 당신은 생각의 강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취하고 영혼에서 느끼고 감성을 통하여 당신의 존재 전체를 부양하고 확장하며, 그 확장된 자아의 생각을 다시, 모든 생명의 의식을 확장하는 그 강으로 되돌리고 있다. 지금 당신이 창조에 대한 생각을 숙고할 수 있다. 당신이 그렇게 하자마자. 그 생각이 느껴지고, 전기 진동으로 당신의 영혼에 기록된다. 그 진동률은 당신의 몸을 떠나고 누군가가 그것을 붙잡아 창조해 낼 수 있도록 의식을 드나든다.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다른 이들도 모두 접속할 수 있다. 그들은 당신의 생각으로부터 공급받고 또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로부터 공급받는다.

 

의식은 모든 실체와 모든 것들이 방출하는 모든 생각으로 구성된다. 의식을 구성하는 생각은 서로 다른 전기적 진동률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매우 낮고 느린 진동률인데 이 세상의 사회의식에는 이것이 참 많다. 다른 하나는 높은 진동률의 생각으로 더 무한한 초의식의 생각이다. 의식이라 하는 것은 여러 다른 진동률로 이루어진 생각으로서 각 생각의 가치에 따라 모든 곳에서 유사한 가치를 끌어들인다.

 

사회의식은 전기적 생각 진동률의 일정한 밀도를 갖는다. 이는 아직도 공기보다 가볍다. 사회의식의 밀도는 표현된 생각으로 구성되며, 이 생각은 모든 실체에 의하여 감성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것은 실현된 생각으로 구성된 것이다. 모든 실체가 벌써 취했던 것이고 영혼으로 느낀 것이고 그 자신의 오라장에 의하여 분배되어, 다른 모든 이들이 공급받을 수 있는 생각의 강으로 되돌려진 것이다. 이 지구에 팽배해 있는 생각은 제한 적이며 낮은 진동률의 사회의식이다. 이 생각은 매우 한정되어 있고, 비판적이며, 거칠다. 당신의 삶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생존에 관련된 태도에 따라 지배받기 때문이다. - 에고의 죽음이든 육신의 죽음이든, 그러므로, 당신의 의식은 의식주와 일거리, 황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비판이나, 유행, 미모, 출세, 비교, 나이. 질병, 죽음등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이런 것들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낮은 진동률의 생각은 오라장을 통하여 쉽게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한정적이고 정체된 의식으로부터 제한된 생각을 계속하여 공급받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당신에게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함과 동시에, 당신은 그 느낌을 되돌려서 인간의 제한된 생각을 다시 재생시켜 계속 남아 있게 만든다.

 

대도시에서 그 의식은 더욱 제한되어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매우 경쟁적이고 시간과 유행 중심적이고, 이웃을 두려워하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도시의 모든 것들은 의식의 진한 밀도로 덮여 있다. 다른 우주에서 이곳에 온 이들이 당신이 살고 있는 대도시를 내려다볼 때 복합 색상의 빛으로 구성된 빽빽한 그물 망 - 빛의 장으로 나타나는 매우 제한된 의식인 낮은 진동률의 생각 -을 보게 된다.

 

초의식이라는 높은 진동률의 생각은 있음과 존재, 생명, 하나됨, 지속성, 이런 것들이다. 이것은 사랑을 생각하는 것이고, 기쁨을 생각하는 것이다. 천재의 생각이다. 사실상 이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한한 생각이다. 무한한 생각으로 얻어지는 느낌은 이미 말로 묘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높은 진동률을 갖는 생각은 인간의 정체된 생각을 벗어난 야생의 의식상태에서 쉅게 경험된다. 그곳에서 생명은 단순하고, 시간이라는 것이 없이, 지속적이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당신은 인간의 판단을 벗어나, 당신 자신의 앎에서 나는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의식의 흐름으로부터 생각을 붙들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가지게 되는가? 오라의 전자기 성분은 당신의 사고작용에 따라 그리고 존재의 감성 상태에 따라 생각을 당신에게로 끌어온다. 생각이 당신에게 들어오려면 - 그것이 느껴지거나 당신 존재에 인식되려면 - 먼저 빛의 형상으로 낮추어져야 한다. 생각이 몸을 둘러싸는 빛인 이 영성과 만나게 되면 빛으로 작열(灼熱)한다. 즉 생각이 빛을 만나서 스스로 점화한 것이며, 빛이 생각의 원질을 낮춘 것이다. 그리하여 빛, 자신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을 볼 수 있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빛이 작열하는 것으로 생각을 볼 수 있다. 생각은 빛의 형태로 두뇌에 들어와서, 그 생각의 가치에 따라 일정한 진동률을 갖는 전기적 빛 추진체로 변환된다.

 

어떤 것을 인지하는 순간, 당신은 그것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은 그 생각의 빛이 당신의 두뇌로 수신되는 때이다. 빛이 작열하는 것을 가끔 씩 보는 이들이 있다. 대체로 눈의 바깥 부분에서 그것을 본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이 보는 것은 그 자신의 영성이 생각을 수신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휘황하게 전개되는 빛을 보는 바로 그 순간은 생각이 오라장으로 들어가 두뇌 안에서 그 생각을 전개해 나가는 순간이다. 눈을 감고 색의 움직임을 보거나 모양이 확장되는 것을 보고 있다면, 두뇌로 들어가고 있는 생각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된다.

 

두뇌는 전기적 생각 진동률을 받아들이는 거대한 수신기이다. 두뇌의 여러 부분은 생각의 각기 다른 진동률을 수신하고 보관하고 증폭하도록 설계되었다. 각 부위는 세포막에 있는 물의 밀도에 따라 다른 생각을 보관하고 전기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부위는 높은 생각 진동률을 저장하고 증폭할 수 있고, 어떤 부위는 낮은 생각 진동률만을 저장하고 증폭한다.

 

상식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두뇌는 생각을 창조하지 않는다. 두뇌는 단지 생각이 의식의 흐름을 통하여 두뇌 속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허용할 따름이다. 두뇌는 신들에 의하여 특별하게 고안된 기관이다. 이 기관은 자기 존재의 영성을 통하여 들어오는 생각을 수신하고 보관하며, 전류로 변환하고 증폭하고, 중추신경계를 통하여 신체 각 부위로 보낸다. 그리하여 그 생각은 하나의 이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다.

 

당신네 과학시술로 본다면 음량 조절과 주파수 선택 기능이 있는 라디오 수신기와 같은 것이다. 두뇌도 그런 기능을 가진 수신기이며, 일정한 진동률을 저장할 수 있는 두뇌 부분을 활성화해야만, 그에 해당하는 진동률을 수신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생각 진동률을 수신할 수 있는 두뇌의 능력은 뇌하수체 샘이라는 강력한 계기(計器)가 지배한다. 뇌하수체 샘은 뇌의 좌우반구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일곱 번째 막이라고도 하는 이 뇌하수체가 뇌를 다스린다. 이 뇌하수체 샘은 여러 가지 다른 생각 진동률을 수신하고 저장하도록 두뇌의 각 부위를 활성화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것은 당신이 생각을 숙고하고 추론하며, 몸으로 그것을 깨닫고, 더 위대한 이해를 얻기 위한 경험으로 실행해 나가는 능력을 열어주는 문이다.

 

뇌하수체는 아주 작지만 매우 놀라운 기관으로 ‘제 삼의 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글쎄, 사람은 제 삼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머리 속에 제 삼의 눈을 위한 공간이 없다. 뇌하수체는 눈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서양 배와 닮은 모양으로 좁은 목에 조그만 입이 있고, 꽃잎 모양이다. 당신의 뇌는 복잡한 호르몬계를 통해 이 강력한 뇌하수체 샘의 기능에 의해 다스려지고 지배된다. 도관이 없는 분비샘인 뇌하수체에서 나온 호르몬은 뇌 속을 흘러서 송과선의 입구에 다다른다. 송과선도 도관이 없는 샘으로서 뇌하수체가 가깝게 대뇌의 아래 부분 그리고 척주(脊柱)의 위에 위치해 있다. 송과선은 여섯 번째 막(봉인)으로서 또 다른 조절기이며, 생각 진동률을 몸 전체로 보낼 수 있도록 증폭하는 일을 담당한다. 뇌하수체에서 송과선으로 흐르는 이 호르몬이 바로 뇌의 각 부위를 활성화시켜 여러 다른 생각 진동률을 수신하고 저장하게 하는 것이다.

 

몸의 기능은 도관이 없는 샘에서 혈액으로 공급되는 호르몬 분비에 의해서 조화를 유지한다. 송과선은 그 조화를 유지하는 일을 담당한다. 송과선에서 나온 호르몬은 다른 모든 분비샘을 활성화시켜 서로 조화롭게 각각의 호르몬을 분비하게끔 한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호르몬 균형‘을 만들어 낸다. 그 균형의 정도는 송과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집합적 생각 진동룰에 의하여 결정된다. 생각 진동률이 높을수록 몸 전체에 흐르는 호르몬은 많아진다.

 

그리고 진동률이 높아질수록 몸 전체에 흐르는 호르몬은 많아진다. 그리고 진동률이 높아질수록 송과선은 뇌하수체를 더 많이 자극하여 뇌하수체 호르몬을 분비하게 만들고, 이 호르몬은 다시 뇌를 자극하여 더 높은 생각 진동률을 수신하도록 해준다.

 

의식의 흐름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이 어떻게 당신 존재에게 인식되는가 ? 오라를 통하여 생각이 들어오지만 오라는 그것을 정의하지 않는다. 오라는 생각을 판단하지도 변형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무제한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할 따름이다. 생각의 추진체가 뇌에 다다르면, 대뇌의 좌반구 상부에 먼저 도달하게 된다. 이곳은 이지와 추론기능이 있는 곳이고 변형된 에고가 표현되는 곳이다.

 

변형된 에고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얻은 이해로, 영혼에 저장되어 뇌의 추론 부위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그저 생존이나 하기 위한 피조물로 사회의식의 그늘 속에 살아가는 신 - 인간의 집합적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집합적 관점에서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어떤 생각 진동률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실체의 생존을 보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면 거부한다. 변형된 에고란 육신을 지닌 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생각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변형된 에고가 받아들여 두뇌 속으로 흘려보내는 생각 진동률은 전류로 변환된 다음, 뇌하수체에 의해 활성화된 뇌 부위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 전류를 증폭하여 송과계로 보낸다.

 

송과계는 중추신경계를 지배한다. 송과계는 들어오는 생각의 진동률을 수집하고 증폭하여 중추신경계를 통하여 내보낸다. 중추신경계는 전기적 생각이 고속으로 흐를 수 있는 척주를 통하여 뻗쳐있다. 송과계에서 나오는 전류는 물로 이루어진 중추신경계의 액체를 통하여, 척주를 따라 흘러내린 다음, 온몸의 신경에서 세포까지 퍼져나간다.

 

몸의 모든 세포는 혈액에 위해서 영양을 공급받는다. 섭취한 음식물에 작용하는 효소의 활동에 따라 발생하는 기체도 함께 공급된다.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전류가 세포 구조체에 들어갈 때는 빛의 섬광을 일으키면서 들어간다. 그 섬광은 세포를 작동하고 기체를 팽창시킨다. 그에 따라 세포는 복제과정을 거쳐 자신을 복제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의하여 다른 세포가 만들어지도록 허용하고 그 자신을 재생한다. 그러므로 몸 전체는 하나의 생각에 의하여 양육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육신의 분자구조 안에서 생명이 유지된다. - 당신이 실재하는 모든 순간에 당신 자신이 받아들이도록 허용하는 모든 생각의 결과로.

 

생각이 몸 세포 전체에 지속적으로 공급됨에 따라, 몸 전체는 주어지는 전기충동에 반응한다. - 당신의 몸 전체가! 그러므로 모든 세포에서 경험되는 생각의 결과는 몸 안에 느낌과 감각이 만들어진다. 그 느낌은 당신의 영혼으로 보내어져 그곳에 기록된다.

 

당신의 영혼은 거대한 기록장치이다. 아무런 치우침도 없이 지극히 과학적으로, 당신의 육신에서 느끼는 감성을 전부 기록하는 컴퓨터이다. 당신이 감성적으로 느낄 때, 당신은 생각 - 당신 존재의 빛 구조체에 쏟아져 들어와, 뇌를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충추신경계를 통하여 몸 전체 세포에 보내져서, 하나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영혼은 나중에 참조할 목적으로 그 느낌, 그 감각을 감성으로 기록한다. 이것을 기억이라 한다.

 

기억은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본질이다. 기억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성적인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감성이다. 영혼은 기억을 위해서 그림이나 단어를 기록하지 않는다. 이미지나 단어의 감성을 기록할 따름이다.

 

영혼은 몸 전체로 경험되는 생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느낌을 취한다. 그리고 모아 놓은 기억들 중에서 비슷한 유형의 것을 찾는다. 뇌의 기능 중에 ‘이지(理智)’리고 하는 추론 기능 담당하는 부분이 그 느낌을 적절하게 묘사할 단어를 찾아내게 된다.

 

당신이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의 감성적인 경험에 근거를 둔, 그와 관련된 특정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꽃이라고 하는 구조체를 눈으로 보고 만져 봤으며 냄새도 맡고 꽂아보기도 하였기 때문에 당신은 꽃을 꽃으로 안다. 그리하여 꽃은 당신에게 특정한 느낌을 준다. 당신이 실크를 실크라고 아는 것은, 그것에게서 ‘실크’라는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특정한 감각 및 감성적 경험을 연상해내기 때문이다. 영혼은 당신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느낌이 느껴질 때, 영혼은 그 느낌을 먼저 기록하고 이전에 경험한 생각에서 얻어진 유사한 느낌이 있는 찾아본다. 그러고 나서 그 정보를 뇌로 되돌려보내며 생각이 인식되었다는 - 그 생각이 전체적으로 몸에서 이해되었다는 - 것을 알린다. 생각은 단순히 뇌를 통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몸 전체로 인식된다. 그러면 뇌의 추론 기능을 하는 부분은 당신이 그 느낌을 묘사할 단어를 찾아내도록 해준다.

 

어떻게 생각을 인식하고 알게 되는 것인가? 느낌을 통해서다. 앎이란 순전히 느낌이다.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먼저 느끼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고 나면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다. 어떤 생각을 안다는 것은 당신의 뇌에서 그것을 받아들여서, 당신 자신이 그것을 느끼도록 - 그것을 당신의 몸 전체로 경험하도록 - 허용하는 것이다. 지식은 어느 것도 증명하지 있지 않다. 그것은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내면으로 느낀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안다 나는 느낀다. 나는 알고 있다”

 

사랑하는 마스터여, 진실로 당신 자신 안에 모든 지식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당신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미세한 원자 안에서, 그리고 거대한 별이나 모든 세포체에서 -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깜박이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똑같은 불꽃인 것이다. 그 빛의 원리에 위해 전체 생명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 영혼 안에 있는 느낌을 신뢰하는 그 빛은 꽃과 별,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동일한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장된 용어로 가득 찬 현학적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꽃을 안다는 것은 느낌을 통하여 내면의 존재에 다다르는 것이다. 당신은 항상 어떤 대상이 방출하는 진동률, 즉 감성을 통하여 그것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그 방출하는 진동률이 감성이다. 어떤 것을 알고 싶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신이 그것을 느끼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항상 전적으로 옳을 것이다.

 

 

생각이 어떻게 당신의 삶을 경험하게 할까 ? 송과선은 ‘ 앎을 구체화하는 ’ 역할을 하는 막이다. 당신이 받아들이고자 허용하는 지식은 어떠한 것이든 먼저 몸에서 구체화된다. 왜냐하면 송과선이 생각을 느낌으로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전류형태로 몸 전체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좀 더 무한해질수록 당신의 몸에 쏟아지는 진동은 크고 빠르다. 그러므로 더 위대한 생각일수록 더 높은 진동률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제 그 느낌은 일정한 진동률로 영혼에 기록되고 저장된다. 당신의 영혼에 기록된 모든 생각의 느낌은 당신의 오라에 일종의 기대감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기대감은 당신의 빛의 장에서 전자기 부분을 활성화하여 마치 자석처럼 당신의 집합적 태도와 생각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와 유사한 것이라면 모두 당신에게로 끌어오게 한다. 그 기대감은 왜 ? 라는 당신의 모든 생각이 당신의 몸에서 경험됨으로써 얻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만들어 낼 상황, 사물, 대상이나 실체들을 당신에게 끌어다 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삼차원 현실에서 당신의 생각을 경험하고, 지혜라는 경험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어떻게 당신의 욕구가 실현되는 것일까 ? 욕구라는 것은 단지 어떤 대상이나 실체, 경험 등을 통하여 알게 되는 충족하고자 하는 생각에 불과하다. 충족하고자 하는 생각은 어떤 것이라도 당신이 느낄 수 있도록 허용하면, 그 생각은 전자기장을 통하여 몸을 떠나, 의식의 흐름으로 들어가서, 당신의 몸이 경험하는 욕구와 동일한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당신에게로 끌어오게 된다. 욕구가 더 완전하고 강하게 몸에서 느껴질수록, 충족은 더 완전해질 수 것이다. 당신의 욕구가 충족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할수록, 실현되는 것이 좀 더 빨라질 것이다. 오라장에 나타나는 기대감을 강화하고, 그리하여 욕구를 실현하는 당신의 능력을 증폭시켜 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 육신을 가지고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는 신이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의 차원이라면, 3차원 형상을 통하여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어떠한 차원이든지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있는 그 경이로운 수신체로 어떤 생각이든지 당신 자신이 알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 생각을 현실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먼저 당신의 육신 안에서 그러고 나서 삶의 주변조건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삶 속에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단지 아는 것만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은 간단한 과학이다. 기억해 두라. 생각이 있다. 그러면 빛이 보인다. 빛은 전기 충동으로 낮아진다. 전기충동은 낮추어지고, 낮추어지고 또 낮추어져서 물질이 되고 그 물질이 더 낮추어져서 생각 - 이상을 실재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똑같은 진실이 몸에서도 적용된다. 두뇌라는 수신장치가 생각을 빛의 형태로 받아들인다. 즉, 이 수신장치는 전기단위를 붙잡고, 그 전기단위는 몸을 이루는 물질을 통하여 흐르며, 그 물질은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느끼는 것이다. 그 느낌은 당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하나님에게로 되돌려진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로 향한다. 너무 간단한가? 더 복잡하기를 바라는가?

 

 

 

[람타] 18장. 닫힌 마음 [113p]

 

18. 닫힌 마음

 

 

앎의 총제인 하나님 마음으로부터 모든 생각 진동률을 받을 수 있도록 당신의 뇌는 설계되어 있지만, 뇌는 당신이 받아들이고자 허용하는 진동률만 수용하도록 활성화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경이로운 생각들이 당신들을 결속하는 그 하나님에게로 무한히 쏟아지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용하는 앎이란 단지 사회의식이라는 낮은 진동률의 생각뿐이다. - 이것은 당신이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매우 제한적이고, 틀에 박한 생각이다. 사회의식에 따라 살고, 그리고 제한적 사고에 치우친 진동률로만 추론해 간다면,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분은 대뇌의 좌우상부, 척주 바로 위에 위치한 소뇌의 하부 일부분의 제한되며, 뇌 대부분은 잠자고 있는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채로 남아 있다. 가족이나 동료, 사회나 교리 등의 제한적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떤 생각이든지, 쫓아내 버리기 때문이다. 거부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생각으로만 숙고하고 추론하도록 자신을 제한한다는 의미이다.

 

당신들이 쓰는 용어로 ‘닫힌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의 표현이다. 사회의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생각을 하는 모험을 거부한다면, 뇌의 많은 부분이 문자 그대로 높은 진동률의 생각에는 닫혀 있다. 뇌하수체 샘이 그 입구를 조금만 열도록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의식이라는 낮은 진동률을 받아들이는데 사용되는 부분만이 활성화된다.

 

어떤 누군가가 천재적이고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인간의 제한적 사고를 뛰어넘는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이 거부한 생각을 즐기고 추론해 볼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한다. 당신은 그러한 생각들을 추론할 수 있는 뇌의 부위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당신의 빛 구조체에 쏟아져 들어오는 무한한 이해와 생각들은 어떻게 되는가? 당신이라는 수신체로부터 튀어져 나와 당신 존재의 영성 바깥으로 다시 되돌려져, 결국 생각의 강으로 되돌아간다.

 

닫힌 마음을 갖는 것은 몸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가능성을 막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영역에선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어떤 것이라도 마음에 품거나 숙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재한다. 꿈을 꾸거나 상상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실재의 영역에 벌써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이 이렇게 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것은 “단지 당신의 상상일뿐이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를 어리석음과 제한된 창조성으로 프로그램하는 셈이 된다. 이런 일이 이 지상에서 실제로 어린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당신들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어떤 것이든지, 생각한 것은 존재한다. 당신이 자신에게 생각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의 전자기장이 그것을 당신에게로 끌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닫힌 마음이 되었을 때의 해악은 당신이 기쁨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을 인간이라는 환영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영광을 알지 못하도록,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거나 더 위대한 현실들의 가능성을 숙고하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곧 변혁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분명히 그것은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이 있는 조그마한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것보다 더 많은 볼 것이 있고, 이해 할 것이 있으며, 그것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그 제한 된 생각만을 받아들이는 경험할 수 있는 뇌의 더 많은 부분은 결코 활성화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던 것보다 더 위대한 생각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 생각은 두뇌의 다른 부분을 원래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활성화한다. 그렇게 할 때마다, 그 위대한 생각은 당신의 추론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매개체’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더 많이 생각하고 , 더 많이 수용하고,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뇌의 다른 부분을 활성화할 것이다. 무한한 생각인 초의식을 경험하고자하면 뇌하수체는 커다란 꽃처럼 피어나면서 열리게 된다. 더 많이 열릴수록 호르몬은 더 많이 흐르게 되며, 생각의 높은 진동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뇌의 잠자던 부위가 더 많이 활성화된다.

 

알다시피, 천재가 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뿐이다.

 

뇌는 많은 이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크나큰 미스터리이다. 뇌를 꺼내어 들여다보았으나, 거기에는 물로 이루어진 액체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물은 전류를 흐르게 하는 도체이다. 물이 고밀도일수록 거기를 지나는 전류를 더 많이 증폭한다. 뇌의 잠자는 부위는 유체의 밀도가 높다. 높은 생각 진동률을 큰 전류로 증폭하여 더 빠른 속도로 몸 전체에 보내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잠자고 있는 뇌 부위에 더 많은 생각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하면, 몸은 더 빠르고 확실하게 반응하도록 활성화된다. 두뇌 전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 당신은 몸으로부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영혼은 당신이 받아들이는 모든 생각의 감성을 기록하고 온전하게 저장한다. 이러한 당신의 영혼을 통하여, 당신의 뇌와 그 뇌에서 몸에 주는 자극은 당신이 생각으로 결정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지 몸이 그렇게 될 수 있게 만든다.

 

당신이 뇌 전체를 다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당신 몸을 빛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또 당신 몸은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아는가? 사지가 하나 없어졌다. 해도 뇌는 그것을 다시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을 아는 가 ? 뇌가 충분히 가동된다면,. 당신의 뇌는 순식간에 당신의 몸을 완전하게 치유하기도 하고 또 육체를 당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이상형으로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뇌의 전체 능력은 광대하다. 그러나 당신은 생각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단지 뇌의 삼분의 일만을 사용한다. 나머지는 무엇에 쓰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저 빈 공간을 채워 넣기 위해서일까?

 

당신의 몸은 뇌와 당신의 집합적 사고로 유지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뇌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모든 생각은 몸의 모든 세포를 대전(帶電)시키고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릴 때부터 사회의식으로 추론하기 시작하면서, 성장해야 하고 늙어야 되고 죽어야만 한다는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생명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이 각 세포구조체에 느리고 낮은 진동률의 전기불꽃을 보내주게 된다. 속도가 더 느릴수록, 몸 안의 생각을 더 많이 잃게 된다. 몸이 자신을 다시 젊게 하고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이를 먹는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며, 결국 몸에 죽음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그러나 당신이 높은 생각 진동룰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몸 전체로 더 빠르고 높은 동력의 전류를 보내게 되고, 당신의 몸은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를 먹는다든가 죽게 되는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들 모두는 나이를 먹고 죽는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서서히 전류는 점점 더 둘어들게 된다.

 

지금까지 활성화되지 못한 뇌의 부분은 재생능력을 가지고 있다. 단지 앎을 통해 손상을 입은 몸의 어느 부위라도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신의 몸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고 당신이 아는 순간에 이 생각은 중추신경계를 통하여 커다란 불꽃을 손상된 부위가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 불꽃은 각 세포 안에 있는 DNA 인자가 세포를 완벽하게 복제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완벽하게! 이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실제로 그렇게 된다.

 

당신은 몸이 의사와 약물에 의해서만 치료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렇게 치유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렇게 치유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 스스로는 할 수 없다고 들어 왔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 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한 앎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유능력자를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들은 소문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육신에게 절대적 진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유되었다. - 순식간에 ! 이것이 앎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이고 당신의 몸이 어떠하기를 바라든지, 그대로 당신의 몸을 바꿀 수 있다. 몸의 움직임에서조차도 당신은 무한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몸은 그렇게 고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잠을 자고 깨어 있거나, 또 의식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실재하는 순간마다 당신은 하나님 마음에서부터 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신들은 결속하는 경이로운 하나님을 통하여 어떤 생각 진동률이 들어오도록 허용하든지, 당신은 느낌이라고 하는 삶의 유일한 실체를 상(賞)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불행하고 지루하고, 침울하고, 두렵고, 고통스럽고, 성내고, 질투하고, 허둥대고, 사랑 받지 못하고, 쓸모 없다고 느끼는 당신은 어떠한 생각 진동률을 느끼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사회의식이다. 반문해 보라! 당신은 묻는다. 영원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묻는다. 영원은 어디에 있는가 ?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 단지 한 생각만큼 떨어져 있을 뿐이다.

 

매순간 당신의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그 경이로운 생각들을 왜 모르고 있는가 ? 당신들은 그것들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회의식의 그림자 속에 살아가기를 선택하였다. - 군중과 비슷하게 입고 행동하고 생각하고자 하였다. 거기에 맞추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당신이 주권자이고 당신이 곧 하나님이며, 당신은 영원하고, 당신은 전지(全知)라는 생각을 즐기는 것은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 종교, 국가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을 의미하므로, 당신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망각했다. 뇌를 닫아버렸다. 그것을 다시 여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내가 돌아왔다.

 

 

인간이 오랫동안 필사적으로 찾아서 밝히려고 했던 무한한 미스터리로서, 종교에서 말하는 그‘하나님’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생각 자체이고 또 그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다. 그 자신을 수용함으로써 그 자신을 확장하고 그 자신이 된다. 이것이 온전한 하나님이고, 생각의 전체이다. 당신은 바로 당신 존재 안에 완전하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완전하게 ! 왜냐하면 뇌의 전 스펙트럼을 사용하면, 당신은 이 순간부터 영원까지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알 수 있다. 태양의 눈부신 색조가 되고, 대양의 깊은 수심이 되고, 바람의 힘이 되고,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별이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전체성을 알고 그렇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변형된 에고이다. 변형된 에고는 하나님이라는 생각 진동률 전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단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만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변형된 에고는 그러므로 ‘적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것은 당신과 하나님이 하나이고 같다는 생각, 즉 당신은 신성하고 불사의 원리로서 영원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고...죽음마저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깨닫고 받아들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적 그리스도는 변형된 에고이다. 그리고 그것은 왕국의 사회의식이다. 그것은 무한한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의 교리는 두려움, 비판, 그리고 생존이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힘과 아름다움, 사랑과 무한 생명을 완전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는 자신이 신성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처럼 되는 인간이다. - 도그마와 예언, 두려움을 초월한 이이다. 그는 사회의식 너머에 하나님이라는 무한한 힘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는 동일한 신전을 공유한다. 그 신전은 바로 당신이다.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인 하나님은 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다 같이 허용하기 때문이다. 또 생명과 죽음을 허용한다. 한계와 무한을 다 같이 허용한다.

 

‘아마겟돈’이라 예언을 들어보았는가? 글세 당신은 이 삶 속에서 그것을 살아가고 있다. 아마겟돈은 하나님을 깨닫는 것과 적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투쟁이다. 적 그리스도는 변형된 에고로서 무한한 생각이 무한히 표현될 수 있도록 당신의 두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의식과 무한한 앎 사이의 전쟁이다. 이것이 아마겟돈이다. - 당신 바깥에서가 아니라.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와 통제 속에 안주해 있는 변형된 에고 사이에 일어나는 당신 내면의 마찰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실제로 이 시간대에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되는 것은 무한한 앎, 무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되는 것은 더욱 더 큰 지식에 열지 않는 제한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 이론은 받아들이지만 살면서 실행하지는 않는 자, 가르치는 자보다는 가르침을 받는 자이며, 탐험가라기보다는 보호받는 자이다.

 

말해 두지만, 당신은 알아야 될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발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몸을 지닌 채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도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변형 된 에고는 ‘그럴 리 없어’라고 말한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인간이 누구인지는 알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미스터리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람타] 19장. 마음열기 [117p]

 

19. 마음 열기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할수록 당신의 뇌는 더 많이 열리게 된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몸 이상의 무엇이 되어간다.

당신들을 결속하는 그것이 된다.

 

 

당신들은 모두 제한된 물질 형상으로나마 하나님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을 키워왔다. 이 지상에서 그 수 많은 생을 거치는 동안, 당신은 자신의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하여 만들어 놓은 이 낙원의 모든 요소를 경험하여 왔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당신은 사회의식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신-인간의 제한 된 사고의 가치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모두 배워왔다. 두려움과 불안, 슬픔, 분노, 탐욕에 대하여 이미 배웠다. 그 근원은 있음이 눈부시게 전개되는 그 마지막 수준에서 당신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이 어떤 모험을 거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고 지원했다.

 

무한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그리고 존재의 기쁨과 자유를 경험하기 위하여, 그것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육신 안에 갇혀 있으므로, 일곱 번째 막인 뇌하수체를 완전하게 활성화하여 사회의식 바로 너머에 있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이해를 행하여 자신의 앎을 넓혀 가는 방법이다. 허용하고, 사랑하고, 그 자체로서 전체이며 동시에 생각의 전체인 그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 경이롭고 조그마한 샘이 호르몬 분비로 뇌의 잠자는 부위를 일깨울 수 있는가? 단순히 욕구 하나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되는 길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이 자신의 현실로 되도록 허용하는 욕구이다. 그것은 매순간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당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의 있음이 되고자하는 욕구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전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당신이 그렇게 하면, 당신은 곧바로 사회의식을 초월한다. 그 때에 당신은 남들의 인정을 넘어서게 된다. 비판을 초월한다. 시간의 환영을 넘어선다. 그렇게 되면, 자아의 충족을 위해서만 살게 된다. 자기 내면의 소리만을 듣게 된다. 기쁨의 행로만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며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람타,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이지 않은가?” 사실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기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이로운 것이다.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과, 포옹하고 또 포기한 그 모든 환영, 자신의 기쁨과 빛을 찾기 위하여 당신이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와 의식의 흐름에 합쳐져서 인류 전체를 부양한다. 전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당신은 만연한 사회의식 속으로 하나님을 스며들게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랑하는 형제들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 - 사랑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길에 불을 밝히게 될 것이다.

 

당신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여 하나님 전체를 수용할 만큼 자신을 가치 있게 느끼고,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알고 싶어할 때, 당신의 뇌하수체는 경이로운 꽃처럼 활짝 열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뇌의 능력을 확장해 가는 방법이다. 알기를 원하고 그 앎의 감성을 모두 느끼기를 바라면 된다.

 

욕구를 실현하는 가장 위대한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 존재의 주-하나님이 그것을 말로 표출해 내는 것이다. 당신 존재의 주(lord)는 당신의 영혼이며, 그 자신의 감성체를 통하여 당신의 몸을 주관한다. 뇌하수체에게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영혼이다. 당신 존재는 육신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물질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에고이다. -이 에고는 판단을 내리도록 독촉하고, 있음이라는 생각의 순수성을 변형한다. 그래서 ‘변형된 에고’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당신 존재의 주-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전체를 일치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발현하고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을 당신에게 줄 것이다.

 

당신이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당신 존재의 주 -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면, 충족을 하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당신의 영혼에서 느껴져, 뇌하수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당신 몸에서 발현되고, 이어서 뇌하수체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열리기 시작하면, 더 많은 호르몬이 송과샘을 통하여 흘러나온다. 그에 따라. 잠자고 있는 마음을 깨운다. - 더 고귀하고 섬세한 생각 진동률이 당신 몸을 통하여 경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 뇌의 다른 부위도 열어준다.

 

더 높은 진동률의 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은 새로 깨어난 뇌의 부위에서 다루어진다. 머리 둿부분에 있는 송과샘이 그 높은 진동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부위는 부풀기 시작한다. 그래서 두통이 생긴다. 약간 현기증을 느낄 수 있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 진동률은 강력한 전류로 바뀌고 중추신경계를 통하여 몸의 각 세포로 보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엇인가 찌릿한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아려오면서 위로 뜨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이제까지 당신이 느껴 본 것보다. 휠씬 높은 에너지가 몸 속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진동은 모든 세포를 자극하고ㅡ 세포의 진동률을 높이게 만든다. 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수록, 세포의 진동률을 높이게 만들다. 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수록, 몸은 더 빠르게 진동하고 당신은 빛을 띠기 시작한다. - 당신은 밀도를 가진 육신을 빛으로 되돌리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생각의 느낌을 당신은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당신은 할 수 없다. 무한한 생각을 알게 되면, 그것과 연관지어 표현할 단어가 없다. 그것은 새로이 경험되고 있는 생각이고, 새로운 감성이며 어마어마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당신을 흔든다. 앎은 순수한 느낌으로...말할 수 없고, 정체를 알 수 없으며 이름 없는 감성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깨달음을 찾는 많은 이들은 그것이 언어의 형태로 얻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이해하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이전에 느껴 보았던 것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고, 당신이 그저 느끼고 있다면,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것은 천재적이며, 그것은 슬기로운 것이다. 그것은 실로 무한한 생각이다. 당신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감성과 통찰력으로 알 수 있다. 그 앎이 다가오면, 당신은 느낌 때문에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그 생각에 언어를 연결 짓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자신을 제한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단지 알고 있다는 경지에 이르면, 앎을 정당화하거나 설명하는 일이 없어 당신 왕국의 지배자가 된다. 그 때에 당신은 절대적인 앎의 상태가 있다.

 

높은 진동률의 생각을 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고양된 느낌은 어떻게 되는가? 그 느낌은 영혼에 포착되어, 그곳에 기억으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당신의 영혼은 무한한 생각을 감성과 느낌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당신이 알게 된 것들을 항상 붙들어두고, 당신이 받아들인 것들을 계속해서 다시 이끌어들인다.

 

고양된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또 하나의 경이로운 일은 당신의 영혼이 그 느낌을 당신의 오라장을 통하여 의식의 흐름에다. 방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의 밀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동일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당신 삶에 끌어들인다. 왜 ? 생각은 경험을 통하여 완전하게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진동률의 생각이 완전히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진동률의 생각이 완전히 이해되고 나면, 이제 당신의 영혼 속에 지혜로 남게 된다. 그 지혜가 의미하는 것은 앎이 당신 안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고착된다는 것이다. 그 지혜는 영혼의 진동률 수준을 높여서 당신의 삶을 더 위대한 감성적 존재에 맞추어 나가도록 할 뿐만 아니라., 뇌에서 더 고귀하고 높은 진동률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추론할 수 있도록 뇌하수체 샘을 더욱 활성화한다. 이러한 일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뇌하수체 샘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당신의 인생에서 모든 것은 당신이 가능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달라진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지고한 감성을 통해서 느끼 것이다. 당신이 내면으로 느끼는 앎이 창조적인 형상을 만들어냄에 따라. 당신이 내면으로 느끼는 앎이 창조적인 형상을 만들어냄에 따라, 당신의 생각이 점점 빠르게 실현되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과 이해, 자비심이 고양된다. 당신이 다른 이해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렸기 때문에, 이전에 어울리던 실체들은 당신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실체들이 당신 곁으로 이끌려 온다.

 

곧, 재능과 창조성, 자비심이 당신 안에서 확고해짐에 따라., 당신은 이전에 느껴 보거나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알고 느끼기 시작한다. 다른 실체를 바라다볼 수 있고 그 실체를 당신 존재 안에서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을 통하여, 다가오는 당신의 미래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심령술사를 특이한 실체라고 생각하는가 ? 이는 오르지 당신이 사회의식에 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회의식은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능력이 실제로는 오히려 평범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심령술사다. ! 당신 자신이 알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사회의식의 환영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앎은, 당신의 눈에서 장막을 거두어내, 다른 차원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당신의 귀를 막고 있던 방해물을 제거하고, 모든 생명이 그 자체로 조화롭게 진동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겠는가 ? 원하면 되는 것이다.

 

무한한 앎을 더 많이 원할수록,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더 많이 포옹하고 느낄수록, 뇌하수체는 더 많은 호르몬을 분비하고, 그 입구는 더욱 넓어지게 된다. 당신이 더 많이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고, 더 많은 앎을 이루며 살아가고자 하면 할수록, 당신의 존재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에 의하여, 당신의 뇌는 더 많이 열리게 된다. - 크게 더 크게 그 때 당신은 육신이상의 무엇이 되어간다. 당신들을 결속하는 그것이 된다.

 

뇌하수체는 사실상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무한한 생각을 당신의 뇌에 더 많이 허용할 수 록, 뇌하수체는 더 많이 열리게 된다. 뇌하수체가 더 많이 열리면, 당신은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당신이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은 그렇게 될 수 있다.

 

꽃은 일정한 생각 진동률을 방출하고 있다. 동시에 카펫도 생각 진동률을 방출하고 있다.

 

당신이 모든 생각 진동률을 집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진동률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바람이 되거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절대자유를 가지게 된다.

 

곧 이어, 뇌하수체계 전체는 완전히 피어나고 당신의 뇌 전체가 활성화된다. 그러면, 뇌하수체는 그 자신의 영성체 안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충만한 마음에 넘겨주게 되며, 마음은 이제 결코 제한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꽃이 한번 피어나면, 결코 다시 닫히지 않는다. 항상 열려 있게 된다.

 

뇌가 완전히 활성화되면, 당신은 이곳저곳을 오가며 존재하게 된다. 즉, 당신은 이곳에 있지만 일곱 번째 수준에 있을 수 있고, 일곱 번째 수준에 있으면서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하나 진보된 인류가 거주한다함. 최근에 많은 채널링 정보가 이곳에서 온다

 

에 있을 수 있다. 플레이아데스에 있으면서, 친구 곁에 있을 수 있을 수 있다.

 

당신의 뇌하수체가 완전히 피어나면, 당신은 이제 죽지 않게 된다. 나이 먹는 일은 중단한다. 당신이 몸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몸이 그대로 따를 것이다. 몸에게 진동률을 빠르게 올리라고 명령하면, 몸은 그 자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당신의 뇌는 이러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당신은 신성한 하나님의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 있을 것이다. 당신이 순수한 하나님일 때, 그것은 순수한 생명이며, 또한 당신은 영원하다., 이제 당신은 모든 것이다. 이것이 가장 장엄한 천국이다.

 

이처럼 위대한 일곱 번째 막은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다. 그리하여 당신의 마음 전체가 깨어나고, 훌륭한 당신의 수신체는 앎을 전부 포옹한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이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삶을 사랑하고 포옹하고 난 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하여 당신의 영혼이 완전해졌을 때, 그로부터 얻어진 앎은 당신으로 하여금 몸을 지닌 채 보이지 않은 상태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때 당신은 물질계에서 반복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다.

 

당신의 세 가지 차원 - 영성, 영혼, 에고- 의 피조물로서 , 밀도가 있는 세상에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당신은 세 가지 차원으로만 영원을 실감할 수 있다. 당신 존재의 주 -하나님으로부터 말하라.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말하는 이는 주이자, 하나님이고, 지배자이다. 당신 존재의 주-하나님으로부터 당신 자신에게 기억하라고 말하면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무한한 이해를 소유하기를 당신 존재의 주-하나님으로부터 바란다면, 주-하나님은 앎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마음을 열고 더 위대한 생각 진동률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허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해, 뇌하수체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관이 없는 그 내 분비샘이 그 명령을 따른다. 그리하여 더 위대한 이해로 당신 존재를 충전하는 느낌들이 솟아날 때,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려라. 이러한 일들이 그렇게 간단하다는 것에 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어떻게 더 잘 이해하고 있을 수 있는가? 단순히 당신 자신에 대해 알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가 하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많이 알려고 하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이 알기를 원한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면 결코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하겠다.”라고도 말하지 말라. 노력으로는 결코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알려고 애쓰고 있다”라고 말하지 말라. 애쓴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라. “내 존재의 주-하나님으로부터. 지금 나는 이 순간에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안다. 그러게 될지어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려라.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그 순간에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것을 그 순간에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 문을 열어준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말의 전부이며, 그 때, 당신이 원하고 있는 지식이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당신은 모른다고 말하거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앎을 의심함으로써 자신의 창조성과 생명을 제한하고 있다.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나는 모른다”라는 문구이다. 기억하라 당신은 법제가이고, 당신이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 말하는 것은 그대로 법이다. 만약에 “나는 모르겠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모를 것이다. 만약 “나는 결코 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모를 것이다. 만약 “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결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것은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 그 생각의 느낌은 당신의 영혼에 기억되고,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사고작용을 충족시켜 줄 현실을 만들어낸다.

 

당신은 컴퓨터와 같다. 날마다. 당신은 ‘의심’이라는 것을 당신의 지식에 입력한다. ‘부족’이라는 것을 입력한다. ‘알지 못함’이라는 것도 실제로 당신의 지식에 입력한다. 당신은 당신의 왕국의 약탈자이다. 왜냐하면 의심과 제한만을 알고 있는 당신이,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으로 당신 자신에게서 다름 아닌 생명력을 약탈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해두지만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지식 앞에 당신을 개방하는 문은 그저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깨닫는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 당장 일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지만 결국 일어날 것이다. 항상 그렇다. 왜냐하면 ‘안다’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것이고, 당신의 욕구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안다라는 생각이 영혼에서 느껴져, 당신의 존재 안에서 발현되고 더 위대한 생각이 받아들여 질 수 있도록 뇌하수체를 연다. 안다라는 것은 생각의 강이 무한한 흐름으로 당신에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이다.

 

그리고, 앎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추측이 개입된 것이지만, 앎은 절대적인 것이다. 앎을 가져오는 것은 오르지 아는 것에 의한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당신의 영혼은 누군가가, 아니면 당신자신이 당신에게 억지로 어떤 진실을 확신시키려 하고 있다는 의미로 그 ‘믿는다’라는 말을 이해한다. 그 진실이라는 것은 당신이 현실로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당신이 어떤 것을 믿기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이 알기를 바란다. 깨치게 되는 것이 아는 것이다. - 의심이나 믿음, 신념 혹은 기대 따위는 배제한 채로 이러한 것을 모두 추측이 개입된 것이다. 아는 것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고, 또한 알게 된 것을 발현시킨다. 생각을 발현시켜 경험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당신의 존재의 일 부분이지, 당신 자신에게 확신시켜야만 되는 그 어떤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나는 알고 있다”라고 말하라. 의심하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말아라. 알라. 절대적으로 “ 나는 안다. ” 라고 말하는 순간마다. 확고한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서 느껴지고 이것이 앎이 일어나기 위한 여백을 만들어 주게 된다. 당신이 앎의 문을 열어서 더 위대한 생각이 창조적인 형태로 드러날 수 있을 때 천재성이 발휘된다.

 

만약 당신이 굳건하게 이렇게 말한다면, “내 존재의 주-하나님으로부터 , 나는 지금 이것에 대한 대답을 알며, 그 대답을 받는 상태에 있다. 그렇게 되라” 그러면. 문제를 해결해 줄 앎이 생긴다. 그 순간에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생각으로 실현되거나 혹은 지식을 얻게 해줄 경험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당신 존재는 지금 당신의 앎의 상태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빠르게 조정할 것이다. 성취하기 위해서 수고할 필요가 없다. 애쓰고 탐구하고, 투쟁할 필요도 없다. 그저 알라! 앎으로, 당신은 그것을 알기 위한 수용자의 입장에 있게 된다..

 

어떻게 당신의 욕구를 빨리 발현시킬 수 있는가? 앎으로 된다. 안다는 것은 천국이 그 자신의 왕국 안에 있는 풍요로움을 과시해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문이다. 욕구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미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문이다. 욕구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미 충족된 것을 알면, 그 일은 당신의 욕구에 관한 생각을 증폭시켜서, 오라장을 통하여 의식의 흐름으로 보내고, 당신이 그 욕구를 완결시킬 수 있도록 당신의 욕구를 발현시켜 준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게 된다.

 

진실은, 모든 것이 이미 당신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 때, 그것들은 당신에게 유용하게 된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중심 역할을 하는 이는 당신이며, 또한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당신의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당신이 바라는 것을 얻는 방법은 단순히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라 !

 

앎은 진실이다. 그것은 제공자이고 당신의 미래이다. 당신이 말로 표현할 때,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질 수 있다. - 당신은 입법자이며, 당신이 알고 말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렇게 실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유일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당신이 구하는 모든 것을 가져도 된다. 지금의 앎으로는, 아직 이것이 진실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앎은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문을 열어준다. 그 깨달음은 생각이 현실로 발현되도록 뇌의 또 다른 부위를 활성화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각을 실제로 경험하고 나면, 앎이 과업을 행한다는 깨달음이 뇌의 에고 부위에 기억된다. - 이러한 깨달음은 더 무한한 생각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당신에게 준다.

 

길게 말하지 않고 몇 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이러하다. “ 나는 이제 안다. 난 절대적이다. 나는 완전하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유아독존이다. ”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이 말들만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이 세상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가정하거나 믿는 것보다.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아마도’그럴 것이다라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아는 데는 모르는 데 드는 것보다. 동일한 사고작용과 에너지,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필요로 한다.

 

알라 ! 그저 알라! 나는 이것이 일어날 것을 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알고, 알고, 또 알라! 그것이 전부다. 항상 알라.만약에 당신은 그렇지 않다거나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결코 모를 것이다. 지금 안다고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신과 나의 차이점을 당신은 아는가? 나는 내가 무한한 신(神)임을 알고, 당신은 모른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은 아직도 당신이 무한한 신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당신의 사회는 당신이 무한한 신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아는가? 그들은 날마다 스스로를 잊어버린다.

 

 

왜 당신은 당신의 앎을 방해해 왔는가? 그 이유는 물질이라는 형상으로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쓰다보니, 당신의 사고작용은 물질현실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 삶에 대한 당신의 전체적인 이해를 당신 스스로 변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물질이란 생각을 극단적인 범위까지 변형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생각의 한 단계이다. 생각을 빛으로, 빛에서 전기단위로 낮추고, 그러고 나서 전기단위를 양의 전하와 음의 전하를 띠는 부분으로 나눔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물질 형상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 될 때마다. 당신은 생각을 원래 모습인 순수와 나누어지지 않은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나눔과 대립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다. 당신이 물질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생존에 치우칠수록, 당신은 점점 더 상반되는 차원의 용어들을 가지고 삶을 보게 된다. 위/아래, 가까이/멀리, 빨리/천천히, 밝은/어두운, 뜨거운/차가운, 좋은/나쁜, 긍정적인/부정적인 같은.

 

순수 생각의 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당신은 변형된 에고 - 물질적 삶과 생존에 치우쳐 있는 뇌의 추론 부위 -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변형된 에고는 시간과 거리, 분리라는 환영에 따라 인식하는 그것이다. 생존과 세상으로부터 인정이라는 견지에서 인식하는 그것이다. 순수 생각을 분열하고 심판하는 바로 그것이다.

 

순수한 생각은 당신들 누구에게나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재빨리 그것이 당신에게 옳은지 그른지,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현실적인지 비현실적인지,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분별한다. 자신의 생각을 판단하여 긍정이나 부정으로 나누어 놓을 때마다, 당신은 그것을 낮은 진동률의 가치로 변형시켜 버린 셈이 되었다. 앎은 그 어느 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당신이 알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진실한지 정확한지 당신은 결코 곰곰 생각하지 않는다. - 모든 생각이 진실하고 정확하다. ! 앎은 생각의 무게를 달아보거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앎은 생각이 있음이기를 허용한다. 당신의 사고작용이 중단되거나 방해받지 않도록 허용한다.

 

다른 세상을 보거나, 더 섬세한 소리를 듣거나, 몸이 더 가벼워지기 위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앎이 몸에서 경험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여러 가지 현실이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믿지 않음’은 당신의 뇌가 더 위대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매순간 영성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앎은 뇌에서 퉁겨져 하나님 마음으로 되돌려진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을 이 지상에 안전하게 묶어 두고 제한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 존재의 주-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이 무한한 앎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모든 생각이 판단에 따라 변형되지 않을 채 두뇌 의식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몸이 그 생각들을 충분히 경험 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변형된 에고 - 그것은 당신의 욕구를 신뢰한다.-가 허용하는 위식을 통하여 뇌하수체는 뇌의 다른 부위를 활성화하여, 무한한 이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당신이 원하고 있을 때, 무엇이 ‘문득’ 당신으로 하여금 창조적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는가? 당신은 단지 그것이 당신의 앎 속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였을 따름이다. 당신이 한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창조적 생각은 늘 거기 있었다. 당신이 찾아 주기를 그래서 당신의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을 당신이 허용하기를 기다리며,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사고작용이 판단과 변형된 생각에 얽매이는 것이 덜할수록, 초의식의 생각들은 당신의 뇌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이 쉬워진다.

 

당신 자신과 생명을 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우라. 꽃을 볼 때,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꽃에 대한 생각을 변형하는 판단이다. 순수한 것은 ‘꽃’이라는 생각이다. 당신이 꽃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꽃, 빛, 생명, 있음’으로 볼 때,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생각의 순수함과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당신의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높은 진동률의 전기단위를 보낸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모든 것을 동등함과 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경험을 제한하디 않고 판단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신의 뇌를 활성화한다.

 

당신이 받아들이는 생각을 결코 판단하지 말라. 무언가를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부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만약에 당신이 ‘이건 좋아’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다른 무언가는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 자신을 다독거리고 , 당신 자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라. 당신의 이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행할 때에도, 그것이 선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라. 그 말은 그것의 본질을 의미한다. 단순히 그것은 순수하고 고결한 삶의 경험임을 의미한다.

 

다른 실체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을 당신이 볼 때에, 그들을 있음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보지 말라. 그들의 표현을 좋다거나 나쁘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판단한다면, 당신은 변형된 것에 대한 인식을 당신 안에 만들어 낸다. 당신이 인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은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 하나의 느낌으로 기록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 판단의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 판단의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 기록 된 그러한 느낌은 앞으로 계속해서 당신 자신의 행동과 당신 자신의 존재를 판단하는 하나의 전례로 자리잡게 된다.

 

어떤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그들에게서 보이는 당신의 면면을 비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 점을 찾아내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관심이 그러한 면면으로 쏠린 것이다. 다른 실체는 간지 내면을 판단하는 거울이자,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당신에 대한 판단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다른 이들을 볼 때에 그들을 있음으로서 보라. 그리고 소위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보라. 그들이 남들에게 잔혹하거나 가증스럽게 대하고 있다면, 그들을 잔혹하고 가증스럽다고 말하는 것도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가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 나름대로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표현에 대해 그들이 나쁘다. 옳지 않다. 사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판단이다. -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경험이다. 변형인 것이다.

 

아무도 판단을 할 자격은 없다. 피부색도 행동도 다른 그 무엇도 당신을 있음의 상태, 하나님의 지위에서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들이 누구이든, 그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든, 그들을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들 내면에 있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사랑 받게 되어 있다. 그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미래에 그들이 행할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그들이 존재하므로, 그들이 누구인지 개의치 않고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지속되도록 한다면 당신은 항상 순수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의 사고작용에서 판단을 제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의 느낌들과 그 느낌을 낳는 생각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러한 것들을 인식함으로써, 당신은 더욱 정제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르칠 것이다.

 

불행이나 슬픔, 분노, 두려움, 조급함, 외로움 - 그 밖에 좋지 않은 느낌들 -을 느낄 때는, 당신의 생각을 살펴보라. 당신은 곧 당신의 변형된 생각 - 당신이나 남을 판단하고, 외양이나 크기로만 생명을 보는 -과 당신의 불쾌한 감정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점점 당신이 이러한 느낌들에 싫증을 냄에 따라, 당신은 생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던 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각을 정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리고 더 무한한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서 경험될 있도록 허용함에 따라, 당신의 무한한 생각과 평화, 기쁨, 조화, 가뿐한 몸놀림 등, 이러한 느낌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결코 판단하지 말라!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단지 당신에게 가르침을 줄 당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인식하도록 허용하라 왜냐하면, 확신하건대, 그것들은 그러한 것이므로

 

 

창조된 그 모든 단어 중에, 이러한 가르침에 가장 잘 부합되는 말이 하나 있다. - 그것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어떠하든지, 당신 자신을 허용하고 그런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 감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 완전하게 살아가는 전부임을 알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순간에 완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것이다. - 당신은 영혼이 당신에게 추구하기를 재촉하는 모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면, 당신은 결코 자신이나 남, 혹은 당신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옳고 그름도 없고, 가능 불가능도 없으며, 완전함이나 불완전함, 긍정이나 부정도 없다. 지금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못하게 하는 시간이라는 환영은 더 이상 없다. 당신이 존재의 상태에 있을 때, 생명의 있음과 이 순간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존재의 상태에서는, 과거나 미래에도 당신의 생각이 더 이상 죄의식이나 후회, 의무감이나 도리에 얽매여서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존재함으로써, 당신은 모든 진실을 있음으로 간주하고 당신 존재의 상태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각각의 진실을 탐구해 나간다.

 

그렇게 살아갈 때, 당신의 뇌를 통하여 당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다 숙고해보고, 당신의 몸에서 느낌으로 이해한다. - 이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앎,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있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존재할 때, 당신은 모든 것의 있음과 조화를 이룬다. 그러한 조화를 통하여, 당신이 원하는 것도 가질 수 있다. - 그리고 당신은 존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 당신 존재의 하나님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당신에게로 끌어올 것이다. - 또한 그것이 다가올 것이다. 외향적인 신념을 실행해 보느라고 바쁜 사람들은 내면적인 것을 비웃는다. 있음으로서,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존재하고, 그리고 모든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허용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때에는 당신이 그토록 알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알게 될 것이다. 당신 생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당신 영혼 속에서 감성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허용할 때, 당신은 무한한 신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 단지 있음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열려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하나님 본성으로의 순수한 통로가 되며, 당신은 순수한 하나님 마음의 단순함에 더 가까워진다.

 

알아가며 허용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당신은 변형된 에고를 비래하게 된다. 그 때 당신은 일곱 번째 수준, 일곱 번째 막, 일곱 번째 천국을 지배하게 된다. 이 일곱 번째에는 판단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생명의 지속적인 있음만이 있다. 일단 판단을 지배하게 되면, 당신은 이 세상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몸을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 뇌가 완전히 몸을 복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 뇌가 완전히 기능을 하면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 - 몸을 망가뜨리려고 서두르지 말라.

 

당신의 몸을 사랑하라. 몸에게 친절하게 대하라. 영양을 공급하고 부드럽게 다루어라. 그것은 이 세상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생명을 경험하도록 해주는 순수한 표현수단이다. 당신의 사고작용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하라. 또한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를 조심스럽게 다루도록 해라.

 

당신이 여성이라면, 여성답게 되라. 남성이라면 남성다워지라. 당신 그대로를 사랑하라. 당신의 몸을 남용하지 말라. 결코 손상하거나 더럽히지 말라. 몸이 하지 않아야 될 일을 하도록 시키지 말라.

 

당신 존재의 웅대함을 보라. 당신 자신을 신성하게 지켜라. 당신피부에 가장 좋은 곳을 입혀라. 당신 몸에 기름을 발라라. 향수를 뿌려라. 몸이 원하는 것만 섭취하라. 몸이 말하는 것에 귀기울인다면, 그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해 줄 것이다 해로운 것을 몸 속에 넣지 말라. - 해로운 것이란 당신이 해롭다고 아는 것이다. 당신의 뇌에 산소 부족을 일으키는 것들은 모두 많은 수의 뇌세포를 파괴한다. - 그러면 그 뇌세포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뇌는 자신의 뇌세포를 재생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뇌 세포가 파괴되면, 생각이 당신 몸에서 감성으로 실현되도록 해주는 기능이 약해진다. 생각을 숙고 할 수 있지만,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이 기쁨이 끝나는 순간이다. 생각을 느낌으로써 그것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생각으로 즐거울 수 있겠는가?

 

당신이 느낄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앎을 축적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이 환상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담배’ 같은 것을 취했을 때, 당신의 뇌에 가해지는 해로움이다. 그러한 것들을 취할 때마다 당신의 뇌에서 산소가 제거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기분이 고조된다’고 느끼도록 해주는 뇌의 죽음이다. 이렇게 할 때마다 당신은 자신의 아는 능력을 제한하게 된다. 울 수도 웃을 수 없는 시간이 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존재 안에 이제 더 이상을 감성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앎을 경험하는 것, 그리하여 당신이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글썽일 수 있다거나 또는 태양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며 사방으로 퍼지는 그 광휘로움을 아는 것은,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생각을 느낌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황홀’이라 한다. 이것이 진짜 ‘최고 기분’이다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당신을 사랑해 왔고, 당신이 살아온 그 모든 생에도 당신과 함께 있었고 당신의 몸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초탈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할 이 .... 그는 바로 당신이다. 그는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겪어 온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가 바로 당신이다. 자신을 포옹하고 사랑할 때, 그 사랑을 당신의 버팀목으로 삼을 때, 당신은 인간의 사회의식에서 하나님의 전체의식으로 초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본질은 법과 교리, 사회의식의 속박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넘어서고 완전함을 능가한다. 운명을 개척하고, 자아충족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충족인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라는 있음의 눈으로 볼 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이러하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며, 당신이 자신에게 알도록 하는 그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종말이 없고, 어떤 것에도 절대성은 없다는 것을 알라. 모든 것은 이 순간에 존재한다. - 그리고 항상 더 많은 것이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더 위대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대한 진실도 있다! 그것을 알라. 그러면 당신의 수용상태에 따라, 그것이 당신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결코 당신 자신을 노예가 되게 하거나 위협을 당하게 내버려두지 말라. 항상 방법이 있고, 또 나은 길이 있다. 그것을 알고, 기쁨으로 가는 길을 밝혀 줄 생각이 당신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의 한계에 부딪쳐라. 그리고 포용하라. 지배하라! 하나님 전부를 아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하라.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하라. 앎과 해답, 기쁨이 다가올 수 있도록 죄의식과 판단을 버려라.

 

두려움에 맞서라. 그리하여 당신 자신이 그 환영의 정체를 벗길 수 있도록 허용하라. 당신은 영원하며 당신을 행복과 기쁨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라. 이 세상에서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아는데 방해가 되는 그 두려움을 제거하라. 왜 당신은 먼 곳에서 이곳을 찾아온 이들을 무섭게 생각하는가? 거대한 우주선에 있는 당신의 형제들은 믿을 수 없으리 만큼 아름답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 가른 차원에서 온 다른 실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두려움을 버려라.

 

더 위대해지려고 노력할 때, 모법이 될 만한 것을 이 지상에서 찾는다면 당신이 되어 볼 수 있는 것은 이 지상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한정된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휠씬 광대한 무언가가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할 것이라고 숙고해야 한다.

 

진실 앞에 당신을 열어라 - 그 근원에 상관없이- 그리고 당신의 느낌이 당신의 안내자가 되도록 하라. 현명한 이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무엇이 옳게 느껴지는지를 안다. 진실은 당신이 밝고 가는 그 잔디의 잎새에도 있을 수 있다. 어린아이의 웃음, 거지의 눈 속에도 있다. 모든 장소에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게 모든 순간에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잔디의 잎새 하나도 한 순간의 속삭임도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현명해지는 법을 배우라. 진실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 그것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음을 알라.

 

천국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이는 현명한 실체이다. 어떠한 생각이라도 할 수 있으며 당신 영혼 안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당신은 천국의 열쇠를 당신 안에 가지고 있다. 즉, 감성이라는 보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느끼는 것을 배우라.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을 완전하게 느껴야 한다. - 하나님인 모든 생각이 당신 존재의 중심인 당신의 영혼 안에서 느껴질 때까지.

 

당신의 뇌 전체가 한꺼번에 모두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압박하지 말라. 당신의 뇌로 하여금 생각을 하나씩, 경험을 하나씩, 차근차근 열어나가게 하라. 그리하여 생각 하나하나가 당신 안에서 굳건해 질 수 있도록 하라.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존재하도록 허용하라. 있음으로 해서 당신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단순히 자신의 있음, 유아독존의 원리에 거한다면, 당신은 생명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 때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자신과는 멀어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람타] 20장. 경험의 가치 [128p]

 

20. 경험의 가치

 

 

당신이 사랑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 보가 훨씬 더, 당신은 사랑 받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고 있는 신 이외에는

어떤 생각으로도 간주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을 탐구하는 모험을 함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 - 하나님이 물질이라는 제한 된 형체로 살아가는 삶 -에서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당신은 인간이라는 세포체를 빌려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제한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나서야 무제한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 전체- 순수 생각의 광대한 영역에서부터, 물질적 제한에 이르는 전 경로-를 경험하고 포옹해 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인 당신 자신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슬픔과 자유, 그리고 영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비록 당신은 매우 어렵고 심각하게 이 세상의 게임과 환영을 수행해내고 있지마, 그 모든 것들이 있는 이유는 당신을 가르치고, 확장하고,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 당신이 당신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이 삶은 지혜라고 하는 생명의 가장 위대한 보상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게임을 진행하고, 당신의 환영들을 경험할 수 있는 무대일 뿐이다.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모아진 가장 경이로운 보배이다. 지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생각의 세계에서 행한 당신의 모든 모험으로부터 얻어진 느낌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먼진 옷이나, 으리으리한 집, 아니면 아주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는가? 오로지 당신 자체 - 당신이 생명의 원리를 겪으면서 얻었던 모든 느낌을 가지고 간다. 느낌이라는 것은 생각의 모든 것이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규율에 의한 폭정과 속박, 종족의 분열과 타락, 남녀간 또는 형제간의 반목등을 통해서 인류가 배우게된 모든 것들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모든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전쟁터에서 상대를 굴복하게 하고, 남의 자유를 부정하고, 여성을 차별하여 남성보다 비하하는 것이 어떠한 느낌인지 당신은 결코 알지 못헸을 것이다. 당신이 먼저 그러한 것을 현실로 만들 것을 꿈꾸고, 또한 의도적으로 그 꿈대로 살아가는 창조자가 되어 보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결코 그러한 일들을 감성적으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삶과 순간순간을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그것은 너무나 확고부동한 현실이 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증에 걸리고 불안해하며, 그 꿈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당신은 묻는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짐승같이 대하도록 허용한 하나님은 어디로 있는가? 그가 결과적으로 이렇게 잔악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글쎄, 하나님은 늘 거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환영 전체였고, 당신의 게임전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을 계속해서 사랑해 왔다. 왜냐하면 당신이 구상하는 대로 당신의 꿈을 경험하도록 허용해 왔기 때문이다. 단지 당신은 자신이 먼저 꿈을 경험하도록 허용해 왔기 때문이다. 단지 당신은 자신이 먼저 그 꿈을 창조했다는 사실- 당신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당신은 지극히 불행하고 슬픈 이야기로 당신의 환상을 엮어 나간다. 당신은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다. 당신의 마음을 닫아 버린다. 우상을 섬긴다.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가한다. 당신은 심판하고 증오하고, 소유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실로 오만하다. 과연 무슨 목적을 위해서인가? 그렇게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 결말은 어떠한가?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천국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 당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뛰어난 실체인 당신들 모두는 나름대로 근심걱정과 사소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나, 당신이 진행해 오면서 자신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당신의 환영 아래 깊숙이 숨겨온 게임들보다는 훨씬 위대하다. 당신이 얼마나 강하고 훌륭한가를 알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저주하거나, 비판하거나, 자신을 변형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로 내가 왔다. - 나는 당신의 과거 모습 전체이며, 또 당신이 앞으로 그러할 모습 전체이기도 하다. 그러면 당신은 앞으로는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고 죄의식과 두려움, 자기부정에 몸부림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실로 그보다 더 위대하다.

 

내가 왜 당신을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가? 당신이 또한 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존재의 모근 영역에 있어서, 당신의 모든 모습은 나이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환영을 숙고하고 창조해 내도록 해주는 그 모든 영역이기 때문이다. 유아독존인 나는 이곳에서의 상식적인 표현을 초월한 사랑이다. 어떤 조건이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당신 그대로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당신이라는 존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이 자신의 잘못과 실패라고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인간이 옳고 그름, 완전과 불완전을 창조하면서 또한 죄의식과 후회라는 족쇄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삶의 진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대들이여,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 당신이 어떤 것을 했다 하더라도, 이 지상에서 여러번의 생을 경험했던 공덕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그저 현재의 당신을 만드는 것을 도와준 삶의 경험이었다. - 또한 실로 가장 소중하고 경이로운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대단한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의 당신이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다. - 당신의 지혜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하므로.

 

당신이 해왔던 그 모든 것을 나 또한 꼭 같이 했다. 당신이 저질렀던 것처럼 나도 그 만큼 잘못을 저질렀다. 힘과 덕이 모자란 탓이라고 당신 자신을 힐난하는 그 모든 일을 나도 역시 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의 연약함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결코 존재의 강함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당신들 모두를 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했든지, 그것이 아무리 나쁘고 비열하다고 당신이 판정 내렸더라도, 당신은 단지 자신을 위한 배움을 창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한 배움의 과정에서, 당신은 상처입고, 고통받았으며, 슬퍼하였고, 자신을 비하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것으로부터 일어섰다. - 지금 여기에 당신이 있고,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알고 포옹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패하였거나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을 숙고해 주기 바란다.

 

당신이 탄생한 그 순간부터, 당신과 당신의 형제들은 생각....모든 생각..생각에서 생각 또 다음 생각을 감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하였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 존재의 하나님인 영성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그 모든 생각- 하나님의 모든 차원-의 느낌을 저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당신은 모든 생각을 당신의 영혼안에서 받아들이고 느낀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을 좀 더 이해해야만 한다면, 영혼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경험하도록 권할 것이다. 왜?오직 경험을 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그 생각의 모든 양상을 감성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은 생명이라고 하는 경험에 대한 보상이다.

 

당신은 영원토록 생명을 진화하게 하고 확장하여 창조해 가도록 종용되어 왔으며, 그러한 모든 창조의 발현- 생각으로부터 빛으로, 물질로, 형상으로, 그리고 다시 생각으로, 즉 사랑과 기쁨으로부터, 질투, 증오와 슬픔, 그리고 다시 기쁨으로의 반복을 경험하도록 종용되어 왔다. 당신의 영혼은 모든 형태의 생각과 태도, 감성을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그 자신을 충족할 수 있도록, 경험에서 경험으로, 모험에서 모험으로 당신을 몰아왔다. - 그리하여 당신은 하나님 전체이자 자신의 전체이기도 한 생각 전체를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영혼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굶주려 있다. 당신의 영혼이 어떤 경험에 굶주려 있다는 것은 그 경험으로부터 얻게 될 감성적인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혼은 당신존재를 온통 사로잡아 당신을 새로운 모험, 새로운 경험으로 몰아 붙일 느낌 - ‘원한다’라고 하는 -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 경험이 끝나고, 그로부터 얻어진 감성이 자리잡고 나면, 그 경험은 이 지상에 있는 황금 전부보다도 더 귀중한 부배를 당신한테 안겨준다. 그것이 당신을 지혜레게로 이끌어 주었음을 영혼의 속삭임으로 알 수 있다. “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또 다시 경험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당신의 영혼은 또 다른 갈망을 갖게 되고, 당신은 다른 것을 행하도록 종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그럴 필요가 있고, 그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당신 생명에 있는 불꽃이 당신에게 모든 삶을 경험하고 알기를 재촉하기 때문에.

 

그러면, 당신은 당신에게 옳지 않다거나, 혹은 당신이 실패할 거라고 알면서 그 무엇을 경험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당신은 항상 진지한 호기심, 흥미와 즐거움을 가지고 허다한 모험을 해 왔다. 시작할 때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잘 몰랐지만, 단지 전에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그 일에 착수하였다. 경험은 새롭고 흥분되는 것이었으며,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배우기를 바랐다. 비록 모험 중에 고통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통’이라는 감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결국 생명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경험은 당신의 삶에서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감성과 이해를 얻기 위한 또 다른 모험을 경험할 것을 재촉하므로, 당신은 그 다음 모험에 다시 착수한다. 이렇게 하여 당신은 영혼의 행복과 충족을 얻는다.

 

당신이 행하는 것은 모다, 그것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경험은 당신에게 적절한 것이라는 것을 당신의 영혼안에서 느낀다. 어쩌면 그것을 더 잘 해내거나 다르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당신이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그 모험을 경험하고 난 뒤이며, 그리고나서 그것으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그 모험을 경험하고 난 뒤이며, 그러고나서 그것으로부터 얻는 느낌은 지혜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먼저 경험을 시작하고 그것으로부터 지혜의 보석을 거둘 때까지는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결코 알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누군가가 비난받아야 하겠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무죄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이 또한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패라는 것은 그것이 있다고 믿는 자에게만 하나의 현실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는다. 결코!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비천하고, 비열하고, 비밀스러운 것이라도(사실은 그렇지 않다.)-당신은 아직 살아 있다. 얼마나 아무 것도 정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삶에 있어서 결코 멈취 설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지속적으로 확정되는 모든 순간은 항상 더 크고 넓은 이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항상 무엇인가를 배워 왔던 것이다. 어떻게 불행해 보지 않고 행복에 대해 알겠는가? 당신이 거기에 도달하여 그것이 상상해 왔던 것과는 다른 색깔이라는 것을 알아 내지 않고서, 어떻게 당신의 목적지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결코!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게 왜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가? 소위 말하는 당신이 저지른 그 모든 잘못들, 실패, 오점들은 더 적절하게 표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 하나님에게로 행한 발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르지 그러한 발걸음을 떼어 놓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배우는 데 결코 죄의식을 갖지 말라. 지혜를 얻음에 있어서 결코 죄의식을 느끼지 말라.,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당신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해 왔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모두 필요했던 것이다. 당신들은 늘 옳은 선택을 하였다- 그것들 모두! 당신은 내일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이어져 나가는 참으로 축복된 날들을 살아갈 것이다. 그 때에 당신이 발견하게 될 것은 지금 당신이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삶은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영원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당신의 끔을 창조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그러나 무엇을 창조하든지, 당신은 이해를 얻기 위해서, 그것을 전체의식의 모든 곳에 추가한다. 당신은 결코 그것을 전체의식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떼어낼 수도 없다. 당신이 기꺼이 겪어보는 그 모든 모험은 생명의 열정과 강도를 더하게 된다. 당신이 포옹하는 모든 생각, 경험하는 모든 환영, 당신이 찾아내는 모든 발견은 아무리 사악하고 비천한 것이라도 당신 자신의 이해를 넓히고, 그 이해는 다시 인류의 의식을 키우고 넓히며, 하나님 마음을 확장한다.

 

만약에 당신이 인생에서 실패했거나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 당신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위대함을 인지하는 능력과 삶 전체에 미치는 당신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게 된다. 과거의 그 어느 부분도 제거해 버리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 그 어느 것도! 당신의 지고한 경험과 비천한 경험 사이의 마찰은 당신의 영혼 안에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지혜의 진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러한 꿈을 다시 꾸어야 하고, 그러한 게임을 다시 창조해 내야 하고, 그러한 경험을 다시 겪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들을 경험했고, 그것들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생명의 가장 소중한 보배인, 느낌이라고 하는 것으로 당신의 영혼 안에 기록해 두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곳에 왔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자신을 위해서 신 이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간주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생의 경험에서,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다. 당신은 그것을 세상에 베풀었다. 삶을 펼쳐 나가는데 대한 보상이 추가되었다

 

당신은 삶은 당신 안에 살아 있는 불꽃이 경이롭게 펼쳐지는 장관이었다. 그것은 존경과 신성함과 성스러움을 가지고 회고해야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당신은 언제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든지, 당신은 하나님이다. 어떠한 인연을 경험라고 있든지,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 인 것이다.

 

당신은 이 생에서 모험을 할 자격이 있다. 하나 하나씩 전부다. 게다가, 당신은 아직 대기하고 있는 훌륭한 모험을 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단지 당신 자신인 하나님- 삶이라고 하는 무대 위에서 당신이 얻은 모든 경험의 가치를 통하여 지금 여기에 드러나 있는 것- 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서는, 당신은 결코 유아독존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의 문으로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그대여,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배울 것은 다 배웠고, 싫증을 느끼고 있다면 - 그것을 없애라 ! 어떻게 ? 그것들을 사랑하고, 포옹하고, 당신 존재 안에 허용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맑은 눈으로 생명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고, 판단하지 않고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존재의 기쁨은 무한히 알 수 있는 힘이 된다.

 

당신의 삶을 포옹하라. 당신은 신성하며, 당신이 했던 그 모든 것 때문에 당신 존재가 강하다는 것을 알라, 죄의식은 버려라. 슬픈 시늉은 그만 두라.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을 멈추어라. 당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아무에게도 지우지 말라. 그 책임을 떠맡아라!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당신이 비판했던 그 모든 것을 포옹하고, 경멸했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당신의 모든 환영을 따라 살아보고, 당신의 모든 끔을 추구하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다른 이들이 그들 자신의 배움을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당신은 그들을 이해하고 연민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경험한 가치를 누리도록 허용할 수 있다. 그 때 당신은 성자라고 부르는 존재가 된다.

 

어떻게 하며 당신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가? 삶에서 벗어나 절제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동굴이나 사원에 은둔하여 향을 피우거나, 높은 산의 정상에 앉아 ‘하나님의 경지’를 숙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체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고 그 삶을 궁극까지 경험해 봄으로써 당신은 성자가 된다. 그리하여 지혜의 덕으로 마침내 온 인류를 포옹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되는 유일한 길은 완전하게 삶을 살고 포용하는 것이다.- 노든 상황을 다 겪어 보고, 모든 감성을 다 느껴보고,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그 안에 모든 삶의 지혜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왕이 되기 전까지는 왕이 겪는 일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왕은 하인이 되어 보기 전까지는 그 하인의 비천한 신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본처는 애첩이 되어 보지 않고는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애첩은 본처가 되어 보지 않고는 그녀의 비난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결한 삶의 길은 모든 것을 다 감싸안는 것이다. 매춘부와 성자, 스승과 농부, 살인자와 피살자. 정복자와 피정복자, 자식과 부모 - 인간의 모험으로 창조된 모든 인물, 모든 상황을 다 포함한다.

 

알다시피, 당신은 당신이 받아들 수 없는 것에 대해서만 남들을 비난한다. 만약에 당신이 노든 상황을 다 겪어보고, 그 상황에 대해 편안해지면, 그 때에는 아무런 비판 없이, 모든 이를 이해하고, 그들 모습 그대로를 허용하는 것이 쉬워진다.- 당신이 그들이었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을 비판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사랑의 심연이 당신의 영혼 안에 자리잡게 될 수 것이다. 그 때에 단신은 진정한 그리스도가 된다. 왜냐하면 장신은 제한 된 삶을 사는 당신의 사랑하는 형제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 전체로 사랑하고, 하나님 전체가 되는 것은 그 의 존재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존재 전부를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모든 형제들이다. 당신의 현실 속에서 당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그들이 어떻게 보일지라고 그들의 현실 속에서 당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그들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들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투쟁,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다 살아 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때 당신은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뛰쳐나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들을 홀로 놔두고 그들 자신의 필요와 계획에 따라 진화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뜻이다. 그들의 운명이 전쟁영웅이 되거나 성직자가 되거나,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이 되는 것이 이들이 있다. - 그것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아버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은- 그가 굶주리거나 불구이거나, 농부이거나 왕일지라고 - 그것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경험을 선택하였다. 그것에서 배우고 채워졌을 때에만 , 그는 다른 경험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는 더 고매한 이해를 계속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되고 나면, 당신은 암흑과 진흙탕 같은 제한된 의식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당신의 전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복닥거리는 무리들을 이해하고 왜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지 알기 때문이다. - 당신도 한 때 그러한 길을 걸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제한적인 삶을 사는 자유를 허용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다. 당신은 그들이 제한적인 삶을 살아보아야만, 무한한 이해를 얻게 되고, 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서 낯선 이를 만날 때, 그의 피부색, 말쑥함이나 용모에 상관없이, 당신은 그를 쳐다보면서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이들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당신도 하나님이 사랑하듯이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서 하나님이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깨, 당신은 이 지상으로부터 많은 ‘안식처’가 있는 더 넓은 공간으로 오르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 문들은, 자신과 주변의 모든 생명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포옹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닫혀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 모습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든지,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당신이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을 당신이 알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의 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은 판단에 따라서 지배당하지도 억제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로 , 이것이 그리스도 -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인간- 가 자기 존재 안에 거하는 방식이다.

 

 

이 삶에서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인가 ? 항상 당신의 느낌을 따르는 것이다. - 영혼의 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경험하도록 강권하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귀를 기울인다면, 무엇을 경험 할 필요가 있는지 당신의 영혼은 말 해 줄 것이다. 지루함을 느끼든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이미 그것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 모험에서 지혜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하기 원한다면, 영혼에서 느끼는 그러한 충동은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의 값진 결과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하기 원한다면, 영혼에서 느끼는 그러한 충동은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회피한다면, 다음 기회 혹은 다음 생까지 그 경험을 뒤로 미루는 것일 뿐이다.

 

당신의 내면에서 느끼는 바에 따라 진실하게 살며, 그것을 느끼고 자신을 사랑하라. 그 느낌에 거슬리게 행동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경험이 있고, 당신의 삶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 줄 장엄한 모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느낌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의 아름다운 자아가 심원한 지혜를 터득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당신은 항상 올바른 일을 할 것이다. 느낌에 거슬러 가고 있을 때, 당신은 몸이 병들고, 신경증에 걸리거나 절망에 빠지게 된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고, 꿈을 따르고, 욕구를 따라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혼이 당신에게 시키는 일을 하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혼이 당신에게 시키는 일을 하라. 그리고 그것을 끝마칠 수 있도록 허용하라. 그러고 나면, 당신은 또 다른 모험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당신은 결코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 주위에 있는 이들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비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당신의 의자가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 경험을 얻기 위해서.

 

언젠가 그 시간이 올 것이다. 이 생에서나 아니면, 그 다음 생에서,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은 욕구가 없고, 오직 ‘존재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매춘부나 도둑, 살인자, 또는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를 저주하고, 그들이 한 일을 가지고 비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이었고, 그들이 가고 있는 그 길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경험으로 인하여 그만큼 완전하며, 당신이 이곳으로 되돌아와 경험해야 될 것은 더 이상 없다. 그 때 당신은 더 위대한 존재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맞게 될 새로운 모험을 향해 이곳을 떠나게 된다.

 

내가 당신에게 들려준 내용을 숙고한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자, 불꽃이며, 생명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인지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맞닥뜨리게 될 온갖 모험에서 당신 자신이라는 미스터리를 더 잘 파악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현재 그대로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갈고 닦아, 당신 존재의 빛이 당신의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위대한 라 와 견줄 만하며, 당신 존재의 평화로움은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깊은 밤의 고요와 견줄 만하게 될 것이다. 결코 당신 자신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당신을 결코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되고자 하는 대로 허용할 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때, 우아함과 기품, 그리고 유순한 강인함을 지닌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현재의 나를 지극히 사랑합니다. 유아독존인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신은 생명의 흐름과 조화를 이룬다. 당신은 이 지상을 거닐고 있는 마스터이다. 당신은 깨달음을 얻은 그리스도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당신이 했던 모든 것을 사랑하고 포옹하며 그 모든 것은 당신 삶의 행복을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렇게 될 수 없다. -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오늘 현재의 당신이라는 숭고한 실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대한 가르침을 그에 맞는 방식으로 당신들에게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이 당신을 카르나나 죄악, 심판, 인과응보로부터 ‘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긍정도 없고 부정도 없다. 하나님은 그저 있음 그 자체다. 그러한 있음이 모든 인간, 모든 행동, 모든 생각, 모든 감성을 품는다. - 이 모든 것들을 ! 하나님이 당신을 심판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그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과 그가 하나이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당신에게 주어져 있었다. 아무리 당신의 경험이 비천하다고 해도 여전히 태양은 솟아올라 하늘을 누비며 넘실댄다. 변함없이 계절은 돌아오고, 들새는 북쪽 하늘을 향해 날며, 당신 방의 덧문을 닫을 때까지 쏙독새는 아직도 울고 있다. 당신은 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한 것들을 지속하게 한다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서 당신은 생명이 당신에게 언제나 베풀고 관용과 영원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밝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떠나라. 당신이 지고 있던 짐은 이제 내려졌다.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며 , 항상 그래 왔다는 것을 알라. 당신은 사악하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라.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함께 하기를 기원하라. 그는 항상 거기에 있어 왔으므로 당신 사랑을 숙고하고 있을 때마다, 나를 떠올려 보라...

 

어디에선가 미풍이 불어올 것이다.

 

 

 

[람타] 21장. 어느 갠날 아침에... [135p]

 

21. 어느 갠 날 아침

 

 

나는 당신이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내내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고귀한 영혼이 자비심과 지혜,

그리고 모든 생명을 포옹할 수 있는 사랑의 꽃으로 화려하게 피어나는 동안.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시간은 달콤했다. 당신의 삶에 다가가 그 삶의 언저리나마 가볍게 두드려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고 확신한다. 당신과 나누었던 그 모든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당신들 모두는 나라는 존재 - 내가 열렬히 사랑하는 하나님 - 이기 때문이다. 당신이라는 고귀한 존재의 진화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내가 존재하는 왕국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확장한다.

 

나는 인류의 형제로서 왔다. 한 때는 나도 활달한 인간이었다. 나는 인간으로 여기에 살았었고 당신이 느끼는 그러한 비통함에 눈물을 삼키기도 하였다. 온갖 수준에 다 가보았지만, 내 경험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은 이곳에 있을 때, 한 인간이자, 신 -인간으로 당신들 속에 섞여서 당신들 모두가 알고 있는 재난과 절망, 그리고 영광의 짧은 순간등을 경험한 것이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곳에 돌아오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당신을 이해한다는 것은...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을 어떤 것에서 구원해 내야 할 그런 것은 실제로 없으니까! 나는 단지 당신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경이로운 당신의 유산을 일깨워 주고, 당신들 모두가 곧 보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서 말해 주려고 왔다. 당신이 삶을 표현 할 때,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고, 당신이 그러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 선택권을 행사하도록 당신 자신을 허용할 수 있는 지식을 깨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 어떠한 이해라도 더 조화롭고 더 무한하고 즐거운 삶으로 진화해 나가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당신에게 적당한 때에, 당신만의 방법으로, 이 삶에 적용하라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 살았을 때 내 길은 미지의 하나님 -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내 자신이었다. - 이 되는 것이었고, 그 차원을 지나 영원으로 향한 모험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험을 했고, 아직도 하고 있다. 내가 했던 것처럼, 당신이 이 삶을 모두 포옹할 때 그러한 모험이 당신이 또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주기 위해서 나는 돌아왔다.

 

내 가르침으로 이해하게 된 것들을 깊이 숙고해 보라. 그것들을 당신 존재 안에 남아 있게 하라. 그러면, 당신이 지금까지 간구했거나 상상해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보배를 받았음을 당신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배운 것과 들은 것, 읽은 것을 간직하고, 그리고는 단순하게 적용하라. 당신이 더 단순해질수록, 당신은 더 강해진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그것을 구하라.! 이 지상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라. 어디서 가서 구해야 되는가? 내면의 있는 성전이다. 생각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구하기만 하라. 그는 언제나 듣고 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꿈꾸는지 안다. 아무도 당신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당신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그곳에 있다. 모두가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 특히 보이지 않은 우리와 같은 이들은.

 

당신이 누구인지는 사실 당신에게만 중요하다.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할 때, 당신이 의지할 사람은 오직 당신 - 바로 당신 안에 있는 소중한 빛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이 -밖에 없다. 당신 자신에게 한결 같이 대하라.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라. 당신의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그리하면, 당신의 빛과 당신의 모습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매우 밝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내 백성들은 깨달은 이라는 뜻에서 나를 람타라고 불렀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까지도 그 이름을 쓰고 있다. 깨달은 이 ? 나는 다른 이들이 하루의 삶을 위해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산정에 홀로 앉아 있었던 외로운 실체였다. 그러나 그 야생의 상태, 일상에서 벗어나 있을 때 나는 미지의 하나님을 발견했다.

 

세상은 시장 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곳에도 삶이 넘쳐나지만 , 더 위대한 삶은 시장을 벗어난 곳에서, 커다란 나무의 밑둥치에서, 바람이 세차며, 춥고, 청장한 눈 덮인 산정에서 아니면,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서,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 지상에는 당신들 대부분이 자신으로 하여금 보도록 허용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당신은 아직 그것을 실제로 살아보지도 알아보지도 않았다. 당신은 사회의 강압적인 의식에 스스로를 속박하였다. 사회의 판단과 보잘 것 없는 이상, 그리고 시간이라는 환영과 다투는 광적인 경쟁 속에서.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보면서, 밤하늘과 함께 평화롭게, 여명이 밝아 올 때까지 홀로 있어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삶을 진실로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지식과 모든 꿈에 의해서, 보라. 당신도 깨달은 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삶에서 우선 순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야생의 의식이 당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당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야생의 의식은 그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당신도 시간을 초월한 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당신은 그러한 하나님이 되어가고 날마다. 당신의 삶은 굳건하게 되어 간다.

 

미지의 하나님은 침묵, 거대한 침묵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가 그렇게 하기를 허용한다면, 그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을 할 것이다. 멀리 나아가서 이 대지를 경험해 보라. 구석구석을 다 가보라.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라. 걸치고 있는 좋은 옷과 보석을 내려놓고 신발도 벗어라. 정형화하지 않은 단순함으로 채우고 당신이 창조해 놓은 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찾고 경험하라. 이대로 할 것을 나는 당신에게 간청한다. 당신이 이러한 곳에 가보고 거기서 지속되고 있는 영원한 의식의 한 부분이 되어 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정하게 산 것이 아니며, 당신 자신인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존귀한지 알고 얼마나 사랑 받고 있고 또 필요한 존재인지를 알기를, 내 존재 전체로 내 안에서 타오르는 하나님으로부터 바란다.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관심을 갖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 당신 존재의 존귀함이 대단치 않게 여겨지기 시작하거나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땐, 나를 불러 달라.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날들을 당신들 모두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사랑과 희망, 기쁨으로 가득한 당신의 고귀한 영혼이 지혜와 자비심, 그리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생명을 포옹할 수 있는 사랑의 꽃으로 화려하게 피어나는 동안, 그 꽃이 피어나면서 감성적으로 혼란스러울 때면, 람타라는 이름을 결코 들어보지 않았더라면,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고 깨닫고 알게 되는 순간은 진실로, 훨씬,훨씬 더 위대할 것이다. 이제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당신에게 말했다. -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 가며 - 당신이 언젠가 알게 될 가장 위대한 진실,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진실을.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그것이 진실임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 진실을 확고하게 아는 것은 오직 당신 자신이 삶을 매순간 펼쳐 감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어느 갠 날 아침, 새벽이 오기 전에, 침대에 혼자 누워, 주위가 너무 조용하여 그 조용함마저도 들리는 것 같은 그 순간에, 당신은 꿈이 아닌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눈을 뜨고, 침상에서 일어나,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으로 걸어간다.

 

아직 아침 이슬이 문지방에 맺혀 있는 그때에, 창문을 통하여 아침의 그 희미한 어둠을 뚫고 장엄하고 밝은 빛을 준비하는 하늘을 응시한다. 밝게 빛나는 작은 보석이 영원이라는 휘장을 두르고, 어둠을 배경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아름다움을 쳐다보면서,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끝마치고, 이제 더 장엄한 밝음을 기다리며 지평선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 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전율하면서, 생명이 깨어나는 고요를 지켜보며 앉아 있다. 곧이어 당신처럼 그 이른 아침에게 인사하려고 새들이 숲 속에서 재잘거리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는다.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새소리를 들으면서, 당신은 먼 지평선을 쳐다보려고 동쪽으로 시야를 돌린다. 외롭게 서 있는 자줏빛 산등성이가 눈에 들어온다. 산은 생명의 파수꾼처럼, 높고 조용하며 그리고 강한 모습으로, 투명한 광채 배경으로 장밋빛으로 어슴푸레 드러난다. 지평선으로 조용히 여행을 떠난 구름은 새벽을 약속하는 황금빛으로 물든다.

 

단순하게 존재하는 이 모든 광휘로움과 하나가 되어, 당신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다. 지평선에서 영광의 불꽃을 이글거리며 곧 드러날 장엄한 광경을 기다리는 동안, 쿵쿵 뛰는 당신의 심장박동 소리 외에는. 밤의 장막이 아침의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면서, 별빛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달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그 자신의 아름다움을 밝아오는 새벽에게 물려준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과 환희에 취해 있을 때, 당신은 이것을 깨닫는다. 그 아침이 지속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느끼는 두려움, 걱정, 꿈과 환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이글거리는 보석 같은 광채가 금박을 입힌 산 뒤에서 솟아오르며 나타나, 안개 낀 계곡을 희망의 빛줄기 같은 황금 막대로 뚫고 지나간다. 위대한 라가 높이, 높이 올라가면, 하늘은 푸른색에서 엷은 자줏빛으로, 장밋빛에서 오렌지색, 그리고 붉은 색으로 불탄다. 새들은 더 크게 노래하며 날기 시작한다. 어김없이 찾아온 아침이 경이롭게 숨쉬면서 온 세상이 깨어난다.

 

항상 보아왔던 이 장엄한 광경을 비켜보는 동안, 이러한 경이로운 느낌이 당신 존재를 엄습하고, 당신은 자신이 실로 나의 생명이라는 깨달음으로 소리칠 것이다. 나는 먼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강하고 조용한 생명의 파수꾼이다. 나는 깨어나는 새벽의 색깔이고, 숲을 이루는 나뭇가지의 움직임이며, 창가에 내려앉은 이슬방울이고, 기쁨에 겨워 지저귀는 아침 새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노래이다라고.

 

그리고 이후에 당신이 맞이하는 새벽은 마침 유아독존인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위엄과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빛과 힘, 그리고 이 힘의 지속성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진리를 배운다는 것과 그것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거의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당신은 하늘에 펼쳐지는 이 광휘로움을 보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어느 갠 날 아침에 그 때는 온갖 말, 혼란, 분노, 자아거부, 하나님에 대한 복잡한 이해, 탐구, 수많은 책 그리고 스승 따위는 조용히 종말을 고할 것이다.

 

심오한 깨달음을 통하여...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당신의 아침이 다가온다. 나의 아침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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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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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013.06.16
10:16:47
(*.113.236.177)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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