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나쁜 사장님과 무심한 공무원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 선 우리 스스로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 잠시드 씨는 노동자 200명가량이 일하는 ㈜성일모티브에 근무하면서 산업용 기름폐기물을 야산에 갔다 버리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근무하는 동안 매달 한 번씩 800kg었답니다. 잠시드 씨가 버린 1공장 기름만 10,000kg인 셈입니다. 주위 나무들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사장한테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하니 어디다 신고하면 불법체류 만들겠다 했답니다. 진천군에 찾아갔더니 그냥 돌려보냈답니다.
잠시드 씨는 가혹하게 일했습니다. 잠 안재우고 51시간, 30여 시간, 20여 시간, 18시간 이렇게 혹사를 시켰습니다. 2014년 4월 출퇴근기록을 보니 430시간가량 일을 시켰습니다. 1일 8시간 주 40시간 일할 경우 한 달 172시간 나옵니다. 힘이 세다고 그리 시켰답니다.
이 회사 관리자들은 이주노동들한테 욕은 일상사이고, 목을 들게 하여 손 옆날로 치기도 합니다. 코딱지를 손가락으로 파서 이주노동자의 얼굴이나 옷에 발랐습니다. 뒤에서 바지를 벗기고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습니다. 주로 약해 보이는 이주노동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커피를 안 갖다 바친다 해서 작업속도를 늘리는 일,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안 만들어준다고 일을 안 주겠다 협박하는 일도 있습니다.
사장님한테 호소를 해도 일이나 하라 하고, 주무기관인 고용센터에 가서 하소연하니 공무원은 한국이 늘 그러니 열심히 일하라며 돌려보냈답니다.
잠시드 씨는 5월 2일 작업용 칼에 손가락 절반 정도가 절단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기숙사에 있는데 대리가 찾아와 “너 당장 나와. 사장님이 부른다”고 했답니다. 잠시드 씨가 “나는 안 가겠다. 손이 너무 아프다”고 했지만 강제로 차에 태우고 회사로 갔답니다. 지금도 잠시드 씨는 손가락 통증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성치 않은 손가락 때문에 기계 세척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산업용 세척제를 취급하는데 그 세척제에 경고 표지가 있었지만 비닐장갑도 아무런 보호장구도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다리에 세척제가 튀어 피부가 심하게 헐었습니다.
손가락이 너무 아프고 몸도 성치 않아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고 말하고 기숙사에 쉬었습니다. 근무태만과 무단결근으로 11월 1일 해고했습니다.
이 자리에 선 우리가 부끄럽습니다. 고용센터 공무원이 얘기했다는, 한국은 늘 그러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런 현실을 노동, 시민사회단체에 있다는 우리부터가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우리가 직접 회사를 고발하고 중한 처벌을 요구하겠지만, 너무 한국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못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2014년 11월 27일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출처: http://cjnodong.com/382 [청주노동인권센터]


http://peaceasia.or.kr/bbs/board.php?bo_table=03_07&wr_id=379 우즈베키스탄 여성 이주노동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 <로사> |
글쓴이 : 동북아평화연대 날짜 : 2014-06-05 |
![]() 우즈베키스탄 여성 이주노동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로사>가 5월 29일 개봉된다. 영화 <로사>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이주해온 18살 소녀가 겪는 냉혹하고 처절한 현실을 거침없이 그려낸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로사(Dayana Ruzmetova)는 볼쇼이 발레학교 입학을 꿈꾸며 학비를 벌고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로사는 조실장(조하석)을 만나게 되고, 원하지 않는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주노동자들이 겪을만한 일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특히 행복한 결론에 맞춰 그 과정을 미화하기보다는 꿈(코리안 드림)을 찾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맹관표 감독 역시도 “그녀(로사)가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하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영화 안에서 그녀가 꿈을 위해 앞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현실에 더욱 가치를 두었다.”라고 말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다큐멘터리와 같은 영상을 보여주고자 카메라 기법으로는 핸드헬드를 사용하였고, 주인공의 긴 여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으로의 해외 로케촬영을 과감히 진행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 <로사>의 제작사인 예스프로덕션은 상업영화 시장이 성장하는 만큼 최근 다양성 영화에 대한 과객들의 관심도 함께 증가하고 있으므로, 맹관표 감독과의 <로사> 작업에 있어 어떠한 고민도 없이 즐겁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5월 29일 개봉하는 영화 <로사>의 맹관표 감독은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을 졸업하고 제 6회 대한민국영상대전에서 부자간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영화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

http://blog.daum.net/hesu8187/6796177
이주노동자 짓누르는 ‘변방의 곡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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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
이천 화재 참사 현장을 취재한 한 일간지 기사의 첫 문장은 “어떻게 하늘 아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로 시작한다.40명의 노동자가 일순간에 시신이 되었다.이런 사고를 두고 “어찌 하늘 아래 이런 일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니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그런데 이천 화재 참사의 현장에는 또다시 우리의 눈과 귀에 낯설지만은 않은 단어가 언급되고 있다.이주노동자, 외국인 근로자, 중국 동포, 우즈베키스탄 등등….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가 한국인 여성을 업고 탈출한 훈훈한 이야기가 들린다.그러나 그 뒤에는 귀국을 얼마 앞둔 우즈베키스탄 사촌형은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해 버린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다.
이천 화재 참사는 이주노동자가 중심에 있는 사고는 아니다.아니 중심에 있는 사고이다.이제, 왜 이주노동자가 중심에 있는 사고가 아닌지, 그리고 왜 중심에 있는 사고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천 화재 사망자 중 35%가 외국인우선 왜 중심에 있는 사고가 아닌지 생각해보자. 40명의 인명을 앗아간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의 원인이 무엇으로 밝혀질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무리한 작업 공정과 원칙이 없는 관리·감독, 그리고 무엇보다 힘없는 노동자들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공사 비용을 줄이려고만 한 사업주가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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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터지자 이번 사건을 전형적인 인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원인은 소방 안전 규정 부재, 작업자 안전 수칙 미준수, 현장 감독 소홀 등이다.좀더 근본적인 사고 원인은 건설업이 어떤 산업보다도 재해가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더욱 철저한 관리와 감독, 원칙의 준수가 필요한데도 대부분의 공사 현장이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는 구조와 그 속에 수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고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즉, 이주노동자가 일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고였다는 점이고 끔직한 이야기이지만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면, 왜 이주노동자가 사고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40명의 사망자 중 이주노동자의 사망자 수가 14명이다.중국 동포 13명과 우즈베키스탄인 1명. 전체 사망자 40명 중 35%인 14명이 이주노동자였다.숫자가 많아서 중심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최근 들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보건학적으로 취약 계층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사전적으로 정의를 하자면, ‘위해 또는 방임에 민감한 것, 즉 타인의 작위 또는 부작위의 행위로 인해 피해를 받을 수 있는 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계층’을 일컫는다.즉, 타인의 행위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고 쉽게 부서지는, 손상을 당하는 사람이 취약 계층인 것이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은 취약 계층의 수많은 유해요인에 노출되기 쉬우며, 50인 미만 특히 5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들이어서 안전 보건 규제에서 벗어나 행정적인 관리·감독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외국인이라는 말에서도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언어적·문화적 장벽이 높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불법이라고 부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체류 자격에 따른 신분의 불안정으로 노동권을 비롯한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받기 쉽다.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이주노동자의 산업 재해 발생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외국 인력의 변화와 산업 재해 발생 건수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1987년 이후 계속 증가하던 외국 인력이 고용허가제를 시행한 2004년 8월에 42만3천명에 이르렀다가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2005년 12월에는 34만5천명 수준까지 줄어들었다.이는 고용허가제에 의해 입국한 비전문 취업자(E-9)가 큰 폭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이후 다시 외국 인력이 완만하게 증가하기 시작해 2006년 이래 41만~42만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이 중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약 18만명 정도이다.
근로복지공단이 낸 최근 5년간의 이주노동자 산업 재해 통계를 보면 재해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불법 취업자라고 불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재해 건수는 줄어드는 반면, 합법 즉, 등록 이주노동자의 재해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표 2). 외국 인력 체류 현황 자료(표 1)와 비교해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재해율은 2003년 1.95%(2,703/138,056)에서 2006년 0.81%(1,531/186,894)로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주노동자의 산업 재해가 은폐되거나 몰라서 신청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훨씬 더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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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김동영 |
반면에 합법 취업자는 2003년 0.28%(573/200,039)에서 2006년 1.48%(2,891/194,195)로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오히려 산업 재해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서 더 많이 발생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합법적으로 취업한 이주노동자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이것은 고용허가제 이후에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이 짧은 경험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제대로 된 노동 안전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은 채 위험하고 유해한 작업장에서 일하며 사고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산업 재해, 은폐·축소 일쑤이주노동자가 일하는 곳이 국내 노동자가 일하는 곳과 따로 있는가? 한편으로는 옳은 듯하다.그러면서 어떤 이들은 다른 자료(표 3)를 제시하면서 이주노동자가 결코 산업 재해에 취약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노동부가 국회에 제출한 2004년 ‘외국인 근로자 산업 재해 발생 현황’ 자료(2004년 현황)를 보면 산업재해율과 사망만인율 모두 이주노동자가 국내 노동자보다 낮은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근무 환경이 열악한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이 낮은 이유는 공공연히 벌어지는 산재 은폐와 불법 취업 노동자의 경우 산재 요양을 받을 수 있음에도 산재 요양이 끝나면 출국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한계로 신청하지 않기 때문으로 예상되지만, 숨길 수 없는 사망재해율은 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산업 재해로 인한 사망에는 단순한 사고뿐만 아니라 진폐증, 뇌출혈 등의 직업병이 포함되어 계산되는데 이주노동자들에서는 이러한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이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따라서 질병에 의한 것을 제외한 업무상 사고만으로 사망만인율을 계산하면, 국내 노동자의 경우 2.74에서 1.47로 감소한다(노동부, 2005년). 숨기기가 어려운 사망 재해에서도 이주노동자의 발생 건수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해 작업장 투입, 직업병 걸려 쫓겨나기도앞에서 말한 사고성 재해 외에 최근에는 직업병도 다수 발생하고 있다.2002년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의 반도체 부품 생산 업체에서 일하던 중국 여성 노동자 3명이 일을 시작한지 3~4개월 만에 손끝과 팔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이 발현되어 ‘노말헥산’이라는 물질의 중독에 의한 ‘다발성 신경장애’(‘앉은뱅이병’이라고 불림) 판정을 받아 병든 몸으로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2005년 초에는 태국 출신 여성 노동자 여덟 명이 또 노말헥산에 의해 집단적으로 말초신경염을 앓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이 외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이주노동자들은 독성 간염, 직업성 천식 등 많은 질병과 직업병으로 고통받고 있다.이뿐만이 아니라 지난해 2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로 인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사망 사건 등은 단순한 산업 재해만의 문제가 아닌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까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는 이번 이천 화재 참사의 중심에 있다.그들은 취약 계층 중에서도 가장 취약 계층이다.특히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루하루 일용직으로 일하는, 언어가 미숙하고 정보를 얻기가 어려운, 주어진 정보를 활용할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더욱 재해에 취약하다.‘취약’은 타인의 어떠한 행위에 의해서도 쉽게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회가 제도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단순히 말초적이고 감성적인 것만을 자극하는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회적인 사업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수용 가능하고 접근 가능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만이 또 다른 이천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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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가톨릭대 예방의학교실 및 산업의학센터 조교
시사저널 기사목록 기사제공 :

http://press.uos.ac.kr/news/articleView.html?idxno=5369
사회사회 |
위기의 여성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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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gin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401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주노동자 구멕씨 가족
“내 아들 고향은 대한민국 용인시 입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3년만 일하다 가야겠다’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월급을 받지 못해 사장님 쫓아다니기 일쑤, 다행히 받기도 했지만 받지 못한 친구들도 많습니다. 쳐다보는 시선도 따가웠습니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거쳐 용인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주노동자센터 식구들, 집주인 아주머니…
용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용인이 고향인 나의 사랑하는 아들, 아지스도 태어났습니다. 2007년, 한 해만 더 고생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고향에 가면 밀가루 공장을 차릴 생각입니다.
용인은 잊지 못할 우리 가족의 두 번째 고향입니다. 다시 와서 살고 싶습니다…
용인시민 여러분 “양기 일린기즈 꾸들룩 불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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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이주노동자센터 소개로 용인에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 부부를 만나러 갔다.
마중 나온 구멕씨를 뒤쫓아 양지면 어느 마을, 좁고 굽은 골목길을 지나 한 주택 앞에 섰다. 처음 만난 사람을 선뜻 집으로 초대한 구멕씨 배려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의 가족을 만났다.
마침 이천, 여주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놀러와 새해 첫날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영화가 재미있다며 TV에서 방영되는 한국영화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3평이 채 안되는 작은 방에 모인 우리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한 고향에서 지냈던 구멕씨와 그의 친구들은 어려울 때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돼주는 사이라고 했다. 그 중에서 구멕씨가 ‘최고참’. 모여서 고향 얘기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어른 서 너 명이 앉기에도 비좁은 작은 방은 이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방안에서 새록새록 희망의 꿈이 싹트고 있었다.
# 6년전 ‘코리아 드림’
우즈베키스탄에서 운전을 가르쳤던 구멕(33)씨와 카자흐스탄에서 교직에 몸담았던 아르닥(36)씨 부부는 6년 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들어왔다.
구멕씨는 대구에서, 아르닥씨는 인천에서 일자리를 잡고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어딘가 다른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하는 일도 생기고 없는 몸까지 아프면 의지할 곳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곳을 ‘코리안 드림’이 있는 희망의 땅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다시 일할 곳을 찾아 용인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인천에서 일하던 아르닥씨도 남편 구멕씨가 있는 용인으로 옮겼다. 둘은 한 지붕 아래 작은 방을 얻고 구멕씨는 백암의 한 공장에서 현장 노동자로, 아르닥씨는 식당에서 돈을 벌었다.
작은 부엌이 딸린 단칸방은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14만원 짜리다. 마치 80~90년대의 주거환경 그대로다. 어쨌든 둘이 사니 생활비도 아낄 수 있고 열심히 일해서 월급만 제때 타면 우즈베키스탄에 있을 때 보다 5~6배 더 벌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르닥씨는 “돈 벌어 잘 살고 싶어 한국에 왔는데 처음에 많이 울었다”며 “가구공장에서 일할 때 3년 치 월급을 못 받아 간신히 받았지만 아직 못 받은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돈을 벌기는커녕 임금 체불로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도 많다고 전했다.
더욱이 몸까지 아프면 어렵게 모은 돈은 하루아침에 병원비로 쏟아 부어야 한다. 구멕씨 역시 다리 수술을 2번이나 받았고 앞으로 한 번 더 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다. 뜻하지 않은 다리 수술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기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한번 수술 할 때 500만원씩 들었는데 다행히 고향에서 온 친구들이 5만원, 10만원씩 도와주고 (이주노동자)센터에서도 도움을 많이 줬다”며 그들이 보낸 사랑의 손길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또 너무 외로워서 술로 시간을 보내는 남자들이 많아 한국에 온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부부도 꽤 있었다.
“외국인도 살아가는 건 다 똑같아요. 가정이 있으면 빨리 집에 가고 싶죠. 남자들 혼자 있으면 술 많이 먹고 힘든데 부인 있고 아이 있으면 변하죠.”
구멕씨 부부 사이에 5개월 전 아들 아지스가 태어났다. 요즈음은 아들 보는 재미에 살 정도다. 고향에 있는 부모들도 전화 할 때마다 손자가 보고 싶다며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한다고 했다. 아르닥씨도 식당일을 쉬고 아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
“아이 낳을 때 고향 생각 많이 했어요. 엄마 생각 많이 났어요.” 아르닥씨는 아이 낳을 때 기억을 떠올렸다.
아르닥씨는 냄새 때문에 먹지 못했던 미역국을 지금은 아주 잘 먹는다. 아이 낳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끓여준 미역국 맛을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 고향가면 밀가루 공장
6년 동안 알뜰살뜰 돈을 모아 고향에 집 한 채를 마련한 구멕씨 부부는 “언제 붙잡힐까 하는 생각만하면 스트레스 받고 무섭다”며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면서 한국에서의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구멕씨 부부는 아들 아지스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아지스 고향은 대한민국 용인 양지면입니다. 용인에서 세상의 가장 큰 선물인 복덩이를 얻어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이름도 올리지 못해 아직은 세상에 없는 아이 아지스를 위해 구멕씨 부부는 내년에 고향으로 들어갈 계획을 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밀가루 공장을 세워 장사를 할 꿈에 벌써부터 설렌다.
2007년은 이들 부부에게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다. 더 열심히 일해야 계획대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이들 세 식구가 사는 양지면 방 한 칸에서는 또 다른 행복이 자라고 있다.
인권을 존중받으며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인권센터가 만들어 갑니다 한국CLC 부설 이주 노동자인권센터 |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9347§ion=s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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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2271
이주노동자 사기 피해 기승

대구고용지원센터 통역원 상습적 ‘뒷돈’ 요구경기 불황과 맞물려 이주 노동자 더 열악해져
대구종합고용지원센터는 지난해 1월 베트남 출신의 한국인 한 명을 통역원으로 고용했다.
고용지원센터 전반의 문제
고용 과정에서 알선비 요구는 비단 대구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외국인 관련 정책 미비
관계자는 정부의 정책상 이런 문제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경기 불황과 맞물려 더 심화
하지만 최근에는 경기불황과 맞서 이런 문제들이 더 심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주노동자 A씨 사연“제발 사람 대접 해주세요”
한국에 온 지 1년 반 정도 됐다는 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 A씨는 가장 힘든 점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라며,
소제 돈 벌 수 있다면 불법체류자도 감수
“한국으로 일하러 오기 위해 가족들도 포기하고 300만 원에서 400만 원 정도 큰돈이 들었다.
소제 :
http://gnfeeltong.tistory.com/144
생애 첫 이주노동자 상담, 고용센터의 업무실책 바로잡아
노동 2016.07.26 14:52
김중희 (거제고성통영 노동건강문화공간 새터)
새터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된 이후 4월 1일에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2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사무실을 찾았다. 부산고용센터에서 추천한 업체에 가서 근로계약을 하고 신고하러 갔더니 구직기간이 만료되어 미등록 체류자가 됐으니 당장 출국하라는 말만 듣고 무서워서 도망쳤다가 주변에 동료들의 얘기를 듣고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았다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 상담내용은 아래와 같다.
- 2014. 3. 26. 입국(E-9 비자)
- 2015. 8월 몸이 안좋아 퇴사. 이후 진단서 첨부하여 구직기간 3개월 연장함.
- 2016. 1. 20. 부산고용센터에서 23일까지 입사해야 한다는 연락과 업체 추천문자가 옴.
- 2016. 1. 22. 부산 영도구에 있는 진석기업(현재는 태석테크로 인수된 상황) 총무와 근로계약서 작성하다가 오후에 사장이 온다고 하여 기다림. 15시 30분경에 사장이 와서는 25일(월)에 다시오라고 함. 후쉬노드가 구직기간이 23일 까지라고 하자 사장이 “내가 노동부에 얘기했으니 괜찮다.”고 하여 믿었음.
- 2016. 1. 25. 진석기업 총무와 노동부에 방문했으나 노동부에서는 이미 구직기간이 지났으니 안된다고 출국하라고 함.
- 상담자는 단속되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를 뜸.
- 미등록(불법)체류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제방법이 있는지 문의함.
● 이후 진행상황
- 부울경 이주공대위와 부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상담실장과 상담 사실을 공유하고 구제방법이 있는지 문의함.
- 거제고용센터(055-730-1919)로 전화해서 확인하니 구직기간 만료로 인해 미등록체류자가 된 거라고 확인함.
- 출입국사무소 거제출장소(055-681-8133)로 전화해서 확인하니 아직까지 고용노동부에서 미등록체류자로 처리되지 않아서 아직까진 등록된 체류자 신분이라고 함.
- 진석기업 총무와 통화하여 확인한 결과 22일(금) 회사 팩스로 부산고용센터에 서류를 접수했다고 함.
- 4월 6일(수) 부산고용센터(051-405-9426) 담당 주무관과 통화하면서 1월 22일 팩스가 접수됐음을 확인함. 상담자의 구직신청이 거부된 이유가 진석기업이 고용허가가 안된 업체이기 때문이라고 함. 하지만 2016년 1월 20일에 부산고용센터에서 후쉬노드에게 보낸 문자를 보면 진석기업을 추천하였고 그래서 상담자는 구직활동의 의무를 다했고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여 관련 서류를 보낸 것이기에 고용센터에서 잘못된 정보를 상담자에게 제공하였고 이주노동자의 특성상 고용센터에서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구직활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부산고용센터의 잘못이 있음을 피력함.
- 담당 주무관도 부산고용센터에서 고용허가가 안난 업체를 추천하는 등 업무처리에서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고 구제방법이 있는지 논의해서 알려주겠다고 함.
● 부울경 이주공대위와 함께 항의 면담을 진행
4월 28일(목) 부산지방고용노동청 지역협력과장과 부울경 이주공대위와 면담과정에서 자신들의 업무실책을 인정하면서도 상담자가 전부터 성실히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등의 쌍방과실인 것처럼 책임회피성 발언으로 항의방문 참가자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이에 “1) 피해를 입은 상담자에 대한 구제 답변과 2) 지역협력과의 업무실책으로 취업활동을 못한 기간 만큼 체류기간을 연장할 것 3) 상담자처럼 잘못된 정보를 받고 미등록 체류자가 되지 않도록 추천기업 관리 시스템 개선 등의 대해 5월 11일 까지 답변을 주라며 면담을 마무리 했다.
절반의 성과
부산지방고용노동청 지역협력과에서 “지역협력과의 업무실책을 인정하고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를 구제하기로 결정하고 1달간의 사업장변경 기간을 부여한다. 또한 고용허가가 안난 업체를 이주노동자에게 추천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한다.”는 답변이 왔다.
부울경 이주공대위와 당사자와 논의하여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부산지방고용노동청 지역협력과의 업무 실책으로 인해 미등록(불법)체류자 신분이 된 1월 25일부터 구제가 된 5월 30일까지 그 기간만큼의 체류기간 연장부분은 해결이 되지 않아 절반의 성공으로 마무리되었다.
억울하게 4개월간이나 미등록 체류자로 전락되어 불안해 하던 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번 사건은 고용노동부와 고용센터 등 정부기관의 업무실책 등으로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가 구제받은 사례 중 하나로 남게 되었고, 이 글을 빌어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린다.
*마창거제산추련 소식지 '산재없는 그날까지' 97호에 실린글입니다
출처: http://gnfeeltong.tistory.com/144 [경남노동자민중행동 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