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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사자 블로그에 가보니 아나스타시야의 이야기를 잘 번역해 놓았다.
아나스타시야는 '생각의 속도'를 자주 말하네.
러시아 타이가 숲의 그녀가 생각의 속도를 말했다면
대한민국 서울의 택균은 생각의 경계를 말한다.
자주 말했듯 진리를 내용이라고 믿는다면 그 내용에 의식이 고착화된다.
성경에 있는 창세기의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그 사실을 열심히 믿는 기독교인들은 의식이 아주 제한적이게 된다.
무엇을 믿음에 '진리'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을 알음에 진리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이 내게 어떤 정도의 '깨임'을 주는 여부가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는 내용에 있는 게 아니라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성자의 말씀, 누구의 말을 빌어 '진리'를 알았다고 자부하며 성자가 깨달았다, 누가 깨달았다고 쉽게 말한다.
아주 자주 말했듯 확장은 창고에 쟁여져 있는 비단이 아니라 창고를 넓히는 것.
거기에는 빛도 없고 어둠도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빛...
그것은 어둠의 상대개념도 아니고 악의 반대개념도 아닙니다.
밝음 곧 明입니다.
밝음을 영성계에서는 (어둠에 반대되는)빛이나 어둠의 반대개념으로 이해하지만
밝음은 실상을 드러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구분이 되지 않는 엉켜있는 사물에 빛을 비추면 사물이 분명히 보이듯..
밝음은 여러분이 아는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나의 진리이자 진실은 사물의 경계를 뚜렷이 해주는 명(明)에 있지
고상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고 편안함...그것에 있지 않다.
생각의 경계...
생각의 경계를 넘어서라. 그것은 자신의 경계를 알 때에 가능하다.
내가 이런 저런 책에서 보았던 '에고'가 있을지라도 그 에고는 너의 사념 안의 규정지어진 것.
에고조차도 진리의 한 경계임을 자각하라.
아나스타시야가 말한 생각의 속도를 제한하는 가장 큰 이유는(내가 보기엔)
개념이 언어와 고착화되어 있고 생각이 개념의 연속체인 언어의 연속체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언어는 가치와 결부되어 있어서 결국은 인간들은 가치적인 단어를 통해서 가치적인 결론을 내리는 '뺑뺑이 훈련'만을 계속한다.
즉 생각이 전개되는 언어가 (가치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의 순도가 낮고 생각의 결론이 객관적이지 않다.
개념이 언어와 고착화되어 있는데 이를 파(破)하기 위해서는 비(非)의 용법이 유용할 때가 있다.
강물은 바다가 아니다에서 강물은 바다의 반대 개념인 '육지'가 아니다...그것이 '非'이다.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강물은 바다가 아니다....에서 '아니다'를 '不'로 해석한다....
그래서 강물이라는 개념을 바다가 아니다라는 아주 고착화된 생각에서 머무르게 된다.
인간의 단어는 생각을 전개하는 요소인 동시에 생각을 제한하는 부(不)의 기능도 한다.
아나스타시야는 '생각의 속도'를 자주 말하네.
러시아 타이가 숲의 그녀가 생각의 속도를 말했다면
대한민국 서울의 택균은 생각의 경계를 말한다.
자주 말했듯 진리를 내용이라고 믿는다면 그 내용에 의식이 고착화된다.
성경에 있는 창세기의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그 사실을 열심히 믿는 기독교인들은 의식이 아주 제한적이게 된다.
무엇을 믿음에 '진리'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을 알음에 진리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이 내게 어떤 정도의 '깨임'을 주는 여부가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는 내용에 있는 게 아니라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성자의 말씀, 누구의 말을 빌어 '진리'를 알았다고 자부하며 성자가 깨달았다, 누가 깨달았다고 쉽게 말한다.
아주 자주 말했듯 확장은 창고에 쟁여져 있는 비단이 아니라 창고를 넓히는 것.
거기에는 빛도 없고 어둠도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빛...
그것은 어둠의 상대개념도 아니고 악의 반대개념도 아닙니다.
밝음 곧 明입니다.
밝음을 영성계에서는 (어둠에 반대되는)빛이나 어둠의 반대개념으로 이해하지만
밝음은 실상을 드러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구분이 되지 않는 엉켜있는 사물에 빛을 비추면 사물이 분명히 보이듯..
밝음은 여러분이 아는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나의 진리이자 진실은 사물의 경계를 뚜렷이 해주는 명(明)에 있지
고상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고 편안함...그것에 있지 않다.
생각의 경계...
생각의 경계를 넘어서라. 그것은 자신의 경계를 알 때에 가능하다.
내가 이런 저런 책에서 보았던 '에고'가 있을지라도 그 에고는 너의 사념 안의 규정지어진 것.
에고조차도 진리의 한 경계임을 자각하라.
아나스타시야가 말한 생각의 속도를 제한하는 가장 큰 이유는(내가 보기엔)
개념이 언어와 고착화되어 있고 생각이 개념의 연속체인 언어의 연속체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언어는 가치와 결부되어 있어서 결국은 인간들은 가치적인 단어를 통해서 가치적인 결론을 내리는 '뺑뺑이 훈련'만을 계속한다.
즉 생각이 전개되는 언어가 (가치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의 순도가 낮고 생각의 결론이 객관적이지 않다.
개념이 언어와 고착화되어 있는데 이를 파(破)하기 위해서는 비(非)의 용법이 유용할 때가 있다.
강물은 바다가 아니다에서 강물은 바다의 반대 개념인 '육지'가 아니다...그것이 '非'이다.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강물은 바다가 아니다....에서 '아니다'를 '不'로 해석한다....
그래서 강물이라는 개념을 바다가 아니다라는 아주 고착화된 생각에서 머무르게 된다.
인간의 단어는 생각을 전개하는 요소인 동시에 생각을 제한하는 부(不)의 기능도 한다.
골든네라
- 2010.02.26
- 17:54:16
- (*.34.108.87)
옥타트론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빛이란 부조입니다. 배경속에 파묻힌 님들의 개개인 하나에 나온대로 음영을 주어서 부각시키는게 빛입니다. 그것은 용기를 요하는 일입니다. 님들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있습니까? 대부분은 하루 하루 안락과 안위를 선택하며 배경 집단속에 숨고 살아가고 싶어 하는게 또 현실이기도 하지요.
빛은 빛입니다. 그 근원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빛을 낳는 것은 빛이고 생명을 낳는 것은 생명이란 겁니다. 무생명이 생명을 낳고 어둠이 빛을 낳는게 아닙니다. 그 연원을 근원을 알수 없는 곳에서 나온게 빛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 어딘가에서 홀연히 나와 광명을 비춘게 빛입니다.
빛은 빛입니다. 그 근원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빛을 낳는 것은 빛이고 생명을 낳는 것은 생명이란 겁니다. 무생명이 생명을 낳고 어둠이 빛을 낳는게 아닙니다. 그 연원을 근원을 알수 없는 곳에서 나온게 빛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 어딘가에서 홀연히 나와 광명을 비춘게 빛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진리라는 이름으로 속박됩니다. 빛이라는 것도 혹은 밝음이라는 것도 혹은 명(明)이라는 것도 그렇게 가는 지향성으로 인간을 다시 속박할 것입니다. 4차원의 밝음에서 더 빛이 밝아지면 그게 5차원의 빛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가 1억짜리 아파트에 2억짜리 인테리어를 한다고 시가 5억짜리 아파트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아주 맑은 4차원의 한 신선의 의식은 5차원의 한 티끌과도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보기엔 삶과 유리된 수행은 하나의 영역이자 전문 분야입니다. 호흡을 통해 도를 이루었다는 분이 편협한 의식을 지녔다면 그냥 숨쉬기 전문가입니다.
넓게 가고 크게 이룰 수 있는 곳이 이 염부제 세계(불교에서는 지구를 염부제라고 합니다..)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