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한국어

한민족의 맥

우주는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 있는 삶에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빛의 지
구는 내면에 있는 다양한 차원
의 의식을 통합하여 평화와 조
화의 빛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
들의 교류 장소입니다.


신과나눈이야기한국모임
http://cafe.naver.com/cwgkorea


역 사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2...우리 기사님의 검.
kimi 추천 5 조회 578 20.07.28 13:56 댓글 45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의 기사님이 평생을 써오신 검이다.

무술을 배우며 검을 자유자재로 쓰시는 기사님이시다.

어딜가든 이 검은 기사님과 함께했었던 오랜 지우다.

이 검으로 맨처음 3명의 적을 죽였다 한다.

적은 총을 가졌고 기사님은 총을 가지지 않으셨다 한다.

전쟁터든 어디든 이 검은 기사님을 뜬적이 없다 

말씀하셨다.


이 검을 쓸수있는 대장부는 과연 기사님 외에 누가있을까!

기사님은 이 검을 케이큐에게 넘겨 주셨다.

케이큐는 언젠가 이 검을 쓸수 있는 자에게 넘겨줄 것이다!

이 검은 오직 정의로운자 만이 쓸수 있는 검이다!




분류 :
우주
조회 수 :
186
등록일 :
2020.07.28
15:35:36 (*.111.10.13)
엮인글 :
http://www.lightearth.net/history/642487/618/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www.lightearth.net/642487

베릭

2020.07.28
20:17:42
(*.100.106.169)
profile

미국중앙정보국

Central Intelligence Agency , 美國中央情報局

CIA

요약

국제적 정보수집과 특수공작을 담당해온 미국의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 세계 최고의 첩보기구로써 1947년 공식 창설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당시의 전략사무국(OSS)을 모체로 발전해왔다. 국가적 기밀의 수집  분석, 비밀첩보활동과 특수임무의 수행이 주된 활동 내용이다.

설립
1947년 9월 18일
국가
미국
사이트
https://www.cia.gov
미국중앙정보국(CIA)

미국중앙정보국(CIA) 새로운 본부 입구

ⓒ Central Intelligence Agency/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역사

미국의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 국제적 정보수집과 특수공작을 담당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첩보기구이다. 1947년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서명한 <국가보안법 (National Security Act)>에 의해 공식 창설되었다. 과거에는 육군·해군 및 연방수사국(FBI,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에서 첩보·방첩 활동을 담당했는데, 업무 중복이나 기관 상호간의 경쟁으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등 문제가 적지 않았고, 동맹국들은 미국이 중앙정보기구를 갖추고 있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2년 6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잡다한 정보수집기관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을 설립했다. 1941년 7월에도 같은 목적을 가진 정보사무국이 구성되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보사무국의 윌리엄 J. 도노번(William J. Donovan) 국장은 OSS의 책임자로 지명되어 설립 당시부터 조직기반의 형성을 관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OSS는 첩보요원을 통해 미국 작전지역에 관한 대외정보를 수집·분석했으며, 역선전·역정보 활동을 벌이고, 적의 후방에서 사보타주·건물폭파활동에 착수하는 한편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원하는 등 특수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요원들이 경험이 없는 초심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OSS는 비정상적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수완가였던 도노번의 지휘 아래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했고, 전성기의 요원 수는 최고 1만 2,000명에 달했다.

OSS는 1945년 10월 해체되었으나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통합된 전후 전문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듬해 대통령은 행정명령으로 중앙정보그룹과 국가정보위원회를 설립했다. 양 기구는 OSS의 전시활동에 관여한 여러 부류의 인사들로 충원되었고, 중앙통제체제의 마련에 부심했으나 육군·해군·공군은 독자적인 정보활동을 계속했다. 1947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의 설립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하고 산하에 중앙정보국(CIA)이 설치되어 국가안보에 관련된 정보의 제공 및 자문, 정부 내 기관들의 정보활동 조정, 정보의 비교 및 평가, 정부 내 정보유통관리, 그리고 NSC가 규정하는 보안첩보임무의 수행을 담당하게 되었다.

주요 임무 및 조직 구성

CIA의 최고책임자인 국장은 국가정보국(DNI, 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의 지휘 아래, 인적자원을 포함한 적절한 수단을 이용하여 정보수집 활동을 수행한다. 또한 국가안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필요한 대상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CIA 이외에 해외에서 정보활동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이 수여된 다른 정부기관 및 관련된 정보기구들과 협의하고 수집활동을 종합적으로 지휘하는 것 또한 주된 임무이다. 대통령과 DNI의 지시에 따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 역시 동반된다. CIA는 국장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조직은 크게 4개의 하위부서로 이루어진다. 우선 정보부는 공개적으로 취합된 자료들과 스파이 활동, 항공·위성 사진, 전파·전화 기타 통신도청을 통한 비밀정보들을 분석하며, 분석한 결과는 충분한 검토과정을 거쳐 많은 보고서로 작성한다. 작전부는 비밀첩보활동과 그밖의 특수임무를 수행한다. 과학·기술부는 유용한 설비와 장치를 개발하며 임무수행을 기술적·과학적으로 보조한다. 집행부는 행정기능의 수행뿐 아니라 요원 및 시설·정보 그리고 망명자와 같은 정보원(情報源)을 보호하는 보안국을 운영한다.

주요 활동내용

CIA가 수행한 비밀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 1953년 이란의 내정에 간섭해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하고 를 복위시킨 일과 이듬해 과테말라에서 미국에 비우호적인 좌익 정부를 전복시킨 예가 있다. 그러나 1961년 쿠바의 반정부세력을 동원한 피그스 만 침공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고, 1973~74년에는 전직 요원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져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일반적으로 CIA는 소련의 케이지비(KGB)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CIA는 활동이 대외적인 첩보·방첩 활동으로 법적인 제한을 받고 있는 반면 KGB는 국내적으로도 광범위한 정보수집기능과 경찰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스파이·방첩 활동에 있어서의 기밀유지의 필요성이 CIA의 권한을 법적 한계 이상으로 확대시켜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일탈은 언론의 자유가 비밀활동의 취지나 전직 CIA 요원들의 침묵의무를 압도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국민들의 감시와 제재를 피하기 어렵다.

미국의 언론은 경찰과 언론이 1당의 관할하에 놓인 공산국가나 비밀공무집행이 언론의 자유를 유보할 수도 있는 영국과는 달리 언제나 정부의 시책과 그 집행을 비방할 수 있다. 더구나 양당제도와 엄격한 3권분립 구조로 말미암아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에는 알력이 항존하기 마련이며, 그결과 특정한 CIA의 활동이나 그 기능 전반에 관한 공개토론들이 심심치 않게 전개되고 있다.

출신 인물

역대 CIA의 국장들은 다양한 배경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초대 로스코 힐런코터(Roscoe Hillenkoetter) 제독과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원수의 참모장을 지낸 월터 B. 스미스(Walter B. Smith) 장군은 군인이었고, 앨런 W. 덜레스(Allen W. Dulles)는 외교관이자 정보전문가였으며, 존 A. 매콘(John A. McCone)은 기업경영인이었다. 윌리엄 E. 콜비(William E. Colby)는 CIA 자체에서 성장한 인물이었으며, 조지 부시(George H. W. Bush)는 정당지도자였다.

베릭

2020.07.28
20:20:02
(*.100.106.169)
profile

KGB

Committee for State Security

국가보안위원회, 國家保安委員會

요약

첩보·방첩 외에 소련 정치지도자들의 보호, 특수 국내 치안부대의 이용, 국경수비대의 감독, 국가  군사기밀의 보호, 치안방해와 전복활동의 예방, 검열의 감독, 소련의 출입국 통제 등의 임무를 맡았으며 활동영역은 국내외를 망라했다.
1954년에 설립되었는데 이전 기관인 체카, MGB처럼 정치사회적 통제 역할을 수행하지만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 아래 놓였다는 점이 다르다. 1960년대 중반 당의 보안 감시자로서의 KGB의 활동이 증대되어 많은 재판에서 반체제인사들을 노출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KGB는 세계 최대의 비밀경찰  첩보조직으로  전문적인 능력을 널리 인정받았으며, 공산당과 소련 정부 내에서의  권력과 영향력은 상당했다.  기구는 17개의 독립체로 구성되어 있다.

KGB

KGB

ⓒ Marco Rubino/Shutterstock.com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활동영역은 국내외를 망라했으며, 그 임무는 공개·비공개의 첩보·방첩 외에 소련 정치지도자들의 보호, 특수 국내 치안부대의 이용, 국경수비대의 감독, 국가 및 군사기밀의 보호, 치안방해와 전복활동의 예방, 검열의 감독, 소련의 출입국 통제를 포함했다.

1954년에 설립된 이 기관은 체카(Cheka)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같은 계열의 역대 기관 가운데 가장 수명이 길었다.

체카(원래 이름은 VECHEKA로, 러시아어로 '반혁명과 사보타주 퇴치를 위한 전러시아 특별위원회'라는 뜻)는 볼셰비키 정부의 초창기인 1917년 12월에 창설되어 반혁명과 사보타주의 예비조사라는 책임을 맡았지만, 이내 '국사범들'의 체포·투옥·처형을 떠맡았으며, 국사범은 내전기간(1918~20) 동안 그 범위가 확대되어 부르주아·구(舊)귀족·성직자를 포함하여 볼셰비즘의 모든 적을 망라하기에 이르렀다.

체카의 권한과 전횡은 적색 테러 기간중에 증대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1922년에 "영웅적인 업적에 감사를 표하면서" 체카를 폐지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후에 들어선 것이 게페우(GPU : Gosudarstvennoe Politicheskoe Uprovlenie[국가정치부])로 그 기관의 임무는 반혁명의 진압이었으며, 초대 장(長)은 체카의 총수였던 폴란드 출신의 볼셰비키 일원인 펠릭스 제르진스키였다.

1923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성립되었을 때, 이 새 기관은 오게페우(OGPU : '통일국가정치부')로 개칭되었으며, 그 활동범위는 전연방에 걸치는 것으로 명문화되고 강제노동 수용소의 관리와 광범위한 새로운 조사 및 사법권의 집행과 같은 직무를 추가로 포함하게 되었다.

이 기관은 반(反)소비에트적인 크론슈타트 반란과 안토노프 봉기의 분쇄, 네프멘의 진압, 집단농장화의 강제이행과 '쿨라크'의 국외추방을 맡아서 처리했다.

또한 멘셰비키와 그밖의 '파괴분자들'의 여론 재판(1928~33)을 꾸미기도 했다. 1931년까지 OGPU는 소련의 모든 경찰기능을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항공대와 전차부대가 완비된 자체의 군대를 보유했고, 모든 공장과 관공서와 적군(赤軍) 부대 내에 침투한 첩보원과 정보제공자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정보망을 갖추었다.

1934년의 조직개편에 의해 OGPU는 새로이 내무인민위원회(Narodnyi Konissariat Vnutrennikh Del/NKVD)로 흡수되었으며, 이 NKVD는 물려받은 포괄적인 조사권과 사법권을 1930년대의 전기간에 걸쳐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수행하는 데 이용했다.

그 희생자 가운데는 이 기관의 제1대 위원장인 겐리흐 G. 야고다(OGPU의 총수로도 잠시 재임했음)와 제2대 위원장인 니콜로이 I. 예조프도 들어 있었다. 그들의 뒤를 라브렌티 P. 베리아가 이어받았다. 1941년 국가보안업무는 NKVD로부터 분리되어나와 국가보안인민위원회(Narodnyi Komissariat Gosudarstvennoi Bezopasnosti/ NKGB)로 이관되었다. 이들 두 기관은 1946년 모든 위원회가 부(部)로 개명될 때 함께 부가 되었다.

베리아는 내무부장관직을 계속해서 맡았으며, V. S.아바쿠모프는 국가보안부(Ministerstvo Gosudarstvennoi Bezopasnosti/MGB)장관이 되었다. MGB는 온갖 가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 소련의 첩보 및 방첩 활동을 수행했고, 전쟁포로수용소를 관리하고 군에 대한 정치적 감시를 했으며, 국내치안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맡았다.

종전 후와 스탈린의 집권 말년에 MGB의 활동범위는 소련 블록 전체로 확대되었으며, 위성국들의 경찰업무 총수역할을 하고 반공주의나 반소 또는 무소속 단체들에 침투하여 이들을 파괴함으로써 위성국들의 엄격한 순응을 강제했다.

소련 자체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위성국들에서도 시민들이 정당한 법절차 없이 MGB에 의해 체포·처벌되는 일이 빈번했다. 정치적으로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체포·투옥되었다. 재판이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 MGB는 체포를 하고 필요한 자백을 받아냈다. MGB는(이 전의 NKVD와 함께) 1941~44년 카라차이족, 칼미크족, 체첸잉구슈족, 크림 타타르족, 발카르족, 그리고 볼가 지역의 게르만족의 전전(戰前) 강제이송을 단행했다.

또한 1948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A.A.주다노프 지지자들을 대량으로 처형·투옥했으며, 1953년 의사단 음모사건에서 반정부 음모를 꾸민 것으로 간주된 유대계 의사들을 숙청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 직후 MGB는 내무부(Ministerstvo Vnutrennikh Del/MVD)로 재통합되어 스탈린주의자 라브렌티 베리아의 휘하로 들어갔다. 여름도 되기 전에 스탈린 이후의 지도층은 이 비밀경찰조직이 자신들의 책임자에게 반기를 들게 만들었으며, 베리아는 선임자와 마찬가지로 해임·처형되었다.

1956년까지 계속된 일련의 재판과 처형으로 베리아의 고참동료 다수가 제거되었다. 그후 MVD는 점차 격하되다가 1960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KGB가 1954년에 창설되어 국가보안 책임을 떠맡게 되었으며 이 기관은 선임 기관들과 달리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 아래 놓였다. 이 새 기관은 베리아 지지자들의 숙청작업에서 주된 역할을 했으며, 그 숙청의 범위와 효율은 비밀경찰의 평판을 전체적으로 떨어뜨리는 작용을 했다.

비밀경찰에 대한 소련 시민들의 신뢰회복을 위한 대대적인 운동이 KGB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시되었다. 해외첩보활동을 일체 부인하던 과거의 정책을 포기하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어 사후에 소련의 영웅이 된 리처드 소지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활약한 거물간첩 루돌프 아벨과 같은 소련 첩보활동의 영웅들이 소련의 언론매체에서 대중에게 소개되고 찬양되었다. 1960년대 중반 당의 보안 감시자로서의 KGB의 활동이 증대되었으며, 시냐프스키와 다니엘 재판(1966), 페트르 야키르와 빅토르 크라신의 여론재판(1973), 그밖의 많은 재판에서 반체제인사들을 노출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적·정치적 통제수단으로서의 KGB의 가치는 그 의장인 유리 안드로포프가 1973년 정치국원으로 임명되고, 1982년 국가의 통수권을 계승한 것에도 반영되었다.

KGB는 세계 최대의 비밀경찰 및 첩보조직으로 그 전문적인 능력을 널리 인정받았으며, 공산당과 소련 정부 내에서의 그 권력과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 기구는 17개의 독립체로 구성되어 있다. 방첩, 해외정보 또는 첩보, 국내안보와 같은 일을 담당하는 다수의 총국이 있다.

국경 수비대총국은 기갑부대와 포병대 및 해군함정을 포함한 KGB의 약 30만 명의 병력을 갖춘 군대를 관리하며, 소련 국경을 방위하고 외국인의 침투와 국민의 해외도피를 방지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 밑에 여러 지국이 있어 군대 내의 보안활동, 조작활동, 행정, 인사, 감시, 통신과 암호작성, 경비근무를 맡는다. 그밖에 특별조사, 재정, 작전분석, 물리적인 안보, 기록과 기록 보관 등을 담당하는 독립 부서들도 있다.

서방의 정보소식통은 KGB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첩보활동을 하는 외에, 체코슬로바키아·동독·헝가리·폴란드·불가리아·루마니아·쿠바의 첩보와 방첩 활동을 감독했다고 단언한다.

KGB 요원들은 국제연합(UN)과 외국의 수도에 주재하는 외교관 '신분'(이것이 모든 국가의 정보기관들이 이용하는 것임)뿐만 아니라 소련 국제무역기구인 암토르그와 소련의 통신사인 타스의 직원으로도 위장하여 첩보활동을 해왔다. 이 정보기관은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소련의 문화와 공산주의 세계관에 친숙한 반제국주의적 간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했다"라고 말한 모스크바에 있는 외국인 학교 파트리스루뭄바친선대학교를 관리하기도 했다.

서방의 정보 당국에 의하면 KGB는 미국중앙정보국(CIA)을 제외한 서방의 모든 주요정보기관에 침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CIA에도 한때 KGB가 침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KGB는 순수한 군사정보는 담당하지 않으며, 그것은 군 참모부의 정보총국인 중앙정보처(Glavnoye Razvedyvatelnoye Upravleniye/GRU) 관할에 속한다.

KGB는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1992년 1월 27일 공식 해체되었으며, 현재는 연방보안국(FSB), 연방국경수비국(FPS), 대외정보국(SVR), 연방경호국(FSO), 연방통신정보국(FAPSI)로 분리되어 각 기구별로 별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베릭

2020.07.28
20:22:43
(*.100.106.169)
profile

북대서양조약기구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 北大西洋條約機構

NATO, 나토

요약

1949년 조인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유럽  반공 세력에 대한 서유럽 국가들의 기본적인 집단 방위 조약으로 지속되었다. 회원국은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서독· 미국· 벨기에·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 등이다.
제2차 세계대전  서유럽은 경제적으로 황폐해 있었고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집단방위체제 확장을 위해 1949년 북대서양조약이 체결되었다.
중점이 되는 조항은 가입국에 대한 무력 공격은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며 무장군의 사용을 포함한 공격당한 국가의 지원을 명시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체크·폴란드·헝가리  동유럽 국가들의 NATO 가입  회원국은 19개국으로 늘었다.

개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2010년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 회담

ⓒ Wikifreund | Public Domain

1949년 4월 조인되었으며, 1949년 8월 24일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그후 유럽 내에서 반공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서유럽 국가들의 기본적인 집단방위조약으로 지속되었다. 회원국은 그리스·네덜란드·노르웨이·덴마크·독일(서독, 1955~90)·룩셈부르크·미국·벨기에·스페인·아이슬란드·영국·이탈리아·체크·캐나다·터키·포르투갈·폴란드·프랑스·헝가리 등이다.

1952년 2월 가입한 그리스와 터키, 1955년 5월 가입한 서독, 1982년 5월 가입한 스페인, 1999년 3월 가입한 체크·폴란드·헝가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래의 조인국들이다. 프랑스는 NATO의 회원국으로는 계속 남아 있었으나, 1966년 NATO 통합군에서 탈퇴했다.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 서유럽은 경제적으로 황폐해 있었으며, 약화된 국민적 사기와 국내 정치의 취약성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또한 종전과 함께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연합국들은 군사력을 급격히 그리고 철저하게 감소시킴으로써 군사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이 강력한 공산당들이 대두되었다. 반대로 소련은 전쟁을 계기로 중·동유럽의 모든 국가를 군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강국으로 부상했다. 1946~48년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은 자국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면서, 모든 비공산주의적 정치 활동을 억압했다.

동유럽 전체에 '철의 장막'이 형성되었으며, 동유럽에 주둔한 대규모의 소련군은 서유럽에 길고 불안정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편 서유럽 연합군과 소련군의 전시협조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양측은 독일 점령지역에 각각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구축했으며 사실상 독일은 동·서 국가로 양분되었다. 1948년 미국은 마셜 플랜을 수립했으며, 이 계획은 서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고 경제 복구를 촉진시키기 위해 공동계획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유럽에 대량의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군사적 측면의 복구를 위해서는 1948년 3월 브뤼셀 조약에 따라 영국·프랑스·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가 집단방위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브뤼셀 조약 체결국들이 미국의 원조 및 지원 없이 소련에 적절히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1개월이 채 못 되어 브뤼셀 조약 체결국들은 미국·캐나다 등과의 협상을 시작하여 집단방위체제를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1949년 NATO의 창립 회원국들은 워싱턴에서 북대서양조약을 체결했다.

조약 내용

북대서양조약과 NATO 동맹의 중심이 되는 조항은 제5조로서, "조약국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의 한 국가 또는 여러 국가에 대한 무력공격을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 행위로 간주하며, 조약국 중 한 국가가 그러한 무력공격을 당했을 때에는 국제연합(UN) 헌장 제51조에서 인정한 개인 또는 집단의 자위권(自衛權) 발동에 따라 나머지 조약국들은 북대서양 지역의 안보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무장군의 사용을 포함한 모든 행동을 개별적으로 다른 국가들과 협의하여 즉각 활용함으로써 공격당한 국가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추방당한 우사마 이븐 라딘이 조직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기구와 워싱턴 D.C. 근교 펜타곤을 공격해 3,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NATO는 처음으로 북대서양조약 제5조를 적용해 미국을 지원했다. 제6조는 "유럽 및 북아메리카 지역의 조인 당사국들에 대한 무력 공격"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조약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역을 정의하고 있다. 제3조에 따라 미국이 이행한 군사방위원조(동맹 창설 후 처음 20년간 25억 달러 이상의 원조가 이루어짐)는 유럽 NATO 회원국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제9조에 따라 동맹의 중앙집권적 행정·지도 체계가 수립되었으며, 광범위한 민간단체, 군사적 지휘체계, 군사고문단, 군사활동 등이 개발되었다. 그밖에 다른 조항들은 회원국이 민주제도를 발전시키고 집단군사능력을 배양하며, 회원국끼리 긴밀히 협력하고, 유럽 내 비회원국의 참여에 개방적 자세를 보일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NATO의 부속기구

1949년 북대서양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유럽을 강화시킬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여, 1950년 1월 처음으로 NATO 회원국들에 대한 1억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를 발표했다.

1950년 6월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고무된 미국은 유럽에 대한 소련군의 팽창 및 압박을 격퇴하기 위한 확실한 징표로서 유럽에 대해 한 단계 높은 원조를 시행했다. 1950년 12월 북대서양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SACEUR)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직위는 후에 미국 장군들이 승계했다.

북대서양조약이 발효되면서 곧 설치된 북대서양 이사회는 조약국들의 대사급 대표자들로 구성되며, 최소한 1년에 2번 회합을 갖는다. 회원국 사이에서 순번제로 선출되는 이사회 회장은 NATO의 국제사무국을 총괄하는데, 이 국제사무국은 근본적으로 민간기구이다.

NATO의 군사기구는 전시에 운용 가능한 완전한 지휘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조약국의 참모장으로 구성되는 군사위원회에는 3개의 중요한 군대가 있다. 첫째, 유럽군은 공식적으로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로 지칭되며, SACEUR에 의해 통솔되고, 둘째, 대서양군은 대서양연합군 총사령관(Supreme Allied Commander Atlantic/SACLANT)이 지휘하며, 셋째, 해협군은 해협총사령관(Comander in Chief Channel/CINCHAN)이 통솔한다. 평화시에 이들 군대는 동맹국의 실제적인 군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조약국의 방위를 계획하고 조약국의 군대를 감독·훈련시키는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조약 체결 이후 3억 달러를 호가하는 NATO 군사시설(군사기지·활주로·송유관·정보망·저장창고)이 처음 20여 년 간 공동으로 기획·건축·투자되었다. 그 비용의 1/3 정도를 미국이 부담했다.

서독과 NATO

195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기까지 NATO가 직면했던 심각한 문제는 동맹에 서독을 참가시키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 재무장에 관한 검토는 서유럽에 불안과 주저를 가져다주었지만 서유럽 국가와 미국은 소련의 팽창에 맞서 유럽에서 적절한 군사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서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왔다. 따라서 동맹에 서독의 안전을 보장하는 규약이 1954년 10월 파리 조약의 일부로 채택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서유럽 연합국의 서독 점령은 막을 내렸으며, 서독의 제한적인 무장과 브뤼셀 조약 가입이 승인되었다.

1955년 5월 서독은 NATO에 가입했다. 1955년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바르샤바 조약은 서독의 NATO 가입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이었다. 서독은 NATO 동맹군의 여러 분과와 공군에 참여했다. 냉전이 끝날 무렵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벨기에·네덜란드 등 6개국 군대가 절반을 차지한 NATO군 90만 명이 서독에 주둔해 있었다.

프랑스의 역할

1958년부터 프랑스의 NATO 참여는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이 NATO 내 미국의 우월권과 NATO 휘하의 많은 국제 자문단 활동 속에 프랑스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요하는 것에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NATO가 '통합'이라는 명목하에 프랑스를 '자동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1966년 7월 프랑스는 정식으로 '통합된' 군 지휘구조에서 철수했으며,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는 NATO군과 군사령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드골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침략행위'가 발생했을 경우 프랑스도 북대서양조약을 준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NATO의 다른 회원국들은 NATO 사령부를 파리에서 브뤼셀로 이전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NATO의 통합군 고문단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NATO 이사회국의 일원으로 계속해서 서독에 지상군을 배치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NATO의 규약보다는 서독과 체결한 새로운 쌍무조약에 더 치중했다.

그 후의 역사

처음부터 NATO의 근본목적은 유럽에서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이 공산주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서유럽을 침공할 경우 서방 연합국의 군사적 대응능력을 통일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50년대 초반 NATO는 상대적으로 우세한 소련 지상군에 맞서기 위해 미국의 가공할 핵무기 보복을 생각해냈다. 1957년초 서유럽 군사기지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됨으로써 NATO의 이러한 정책은 이행되었다(당시 동맹국의 핵무기는 미국의 통제하에 있었음). 1950년대말과 1960년대 전반에 걸쳐 NATO군은 체계적으로 개선되었다.

비록 NATO군은 바르샤바 조약 동맹군의 거대한 지상군 병력에 비해 수적으로 대단히 열세에 놓여 있었지만 NATO군의 우수한 병기와 훈련은 가상의 적에 맞설 수 있을 만큼의 전력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는데 당시 NATO군은 대규모의 정규군뿐 아니라 미국의 통제하에 중거리 핵미사일의 배치를 완료한 상태였다. 약 30만 명의 미군이 NATO 소속 주둔군으로서 서독과 그밖의 서유럽에 배치되었으며, NATO와 바르샤바 조약군 사이의 냉전상태는 수십 년은 더 계속될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1980년대말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광범위한 개혁은 NATO와 냉전시대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1989년 소련은 암묵적으로 동유럽 공산주의 정부의 붕괴와 자유롭게 선출된 비공산주의적인 정부의 등장을 수용했다. 모스크바의 동유럽 통제권 포기는 바르샤바 조약이 서유럽에 가하던 군사적 위협의 분산을 의미하며, 이것은 군사기구로서의 NATO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루고, 통일 독일이 NATO를 지지한 NATO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군사동맹기구를 유럽의 국제적 안정유지에 기여하는 정치기구로 변화시키기 위한 제안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NATO군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평화유지 작전에 참가해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에 공습을 가했

소련의 붕괴와 바르샤바 조약 동맹의 폐기(1991)로 체크·폴란드·헝가리 등 몇몇 동유럽 국가들은 NATO 가입을 꾀했다. NATO 회원국 대부분은 이에 찬성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러시아의 안마당을 넘보는 NATO의 팽창정책으로 규정해 강력히 반대했다. 러시아의 반대에 부딪히자 NATO 내부에서도 러시아를 자극하는 것은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민주주의 제도 도입을 방해하고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동유럽 국가의 NATO 가입에 반대했다.

이런 내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들 3국은 1999년 3월 마침내 NATO에 가입했으며, 이로써 NATO 회원국은 19개국으로 늘었다. 3국 외에도 알바니아·불가리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 가입을 희망했다. 21세기 들어 러시아와 NATO는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었다.

더 이상 NATO의 주적이 아닌 러시아는 2001년 NATO와 새로운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고 테러리즘 대처, 핵무기 확산 금지, 무기 통제와 같은 공동 관심사를 함께 해결하기로 다짐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지구 적을 바로 보지 못하면 적의 하수인으로 춤추게 됩니다 아트만 2022-01-13 2883
공지 우주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실시간 전달되는 중요한 정보를 금일부터 올립니다. 아트만 2020-05-14 8103
공지 지구 지구/ 조선의 역사와 현재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대조선삼한역사학회 아트만 2019-01-26 13171
공지 지구 유엔 각국대표부에 보내는 제안서 [2018. 8. 29.] 아트만 2018-09-06 8863
공지 우주 우리가 지금 이곳 지구에 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트만 2015-08-17 12731
공지 한민족 정치포탈 서프라이즈 - 제정신 가지고 사는 이들이 모인곳 아트만 2014-07-12 26494
공지 한민족 뉴스타파 - 시민의 회비로 운영되는 / 믿을 수 있는 언론 아트만 2014-07-12 14432
공지 지구 한민족의 맥에 올려지는 현실 정보에 대하여 아트만 2013-08-03 24152
3261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43...속보...라스베이가스에 아동납치 본거지 [2] 아트만 2020-07-29 170
3260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42...속보...뉴욕 폭력배들 체포시작. 아트만 2020-07-29 139
3259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41...속보...한국이 아시아해상에서 가장큰 두목 아트만 2020-07-29 147
3258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40....속보...인도네시아 정치인 다수체포 [1] 아트만 2020-07-29 157
3257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9...코로나 바이러스약 만들 의사들 살해 [2] 아트만 2020-07-29 151
3256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8...우리의 뿌리. [3] 아트만 2020-07-29 171
3255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333...특보...한국의 모든 살인을 정하는자는 오창익 [1] 아트만 2020-07-29 218
3254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7...속보...우리님들에게. [2] 아트만 2020-07-29 204
3253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6...속보...아시아 전지역 거물들 체포시작 아트만 2020-07-29 166
3252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5...속보...제리 네들러 등 민주당 무너지기전. [1] 아트만 2020-07-29 151
3251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4...속보...말레이지아 수상체포 [4] 아트만 2020-07-29 162
3250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3...특보...전세계 CIA, NATO, GLADIO OPERATION DOWN! [1] 아트만 2020-07-28 228
»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2...우리 기사님의 검. [3] 아트만 2020-07-28 186
3248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1...속보...마스크 쓰지않아도 된다. 아트만 2020-07-28 180
3247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30...케이큐 트레이드 마크...하하하하 아트만 2020-07-28 258
3246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29...트럼프가 케이큐를 무서워한단다.....ㅎㅎㅎㅎ 아트만 2020-07-28 185
3245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28...세계 인류가 모르고 있는 현실. [2] 아트만 2020-07-28 208
3244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27...2차대전의 진실 [2] 아트만 2020-07-28 200
3243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26...카프리콘이 님들에게 묻는다. [2] 아트만 2020-07-28 188
3242 우주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3525...타이타닉호는 누가 침몰시켰는가? [5] 아트만 2020-07-28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