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개월 가까이 큰 기사를 쓰지 않았더니 제가 뭐하나 하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외형상 "지난 24일 열린 KODEF 세미나 준비하느라 바빴다"고 하고 다녔는데 이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사실 주위에는 비밀로 하고 보안을 유지하며 두가지 기획 취재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하나는 특별취재반의 일원으로 현정부의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추진과 관련된 비화를 여러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며 취재한 것이었고요, 다른 하나는 지난주말 보도된 김장수 국방장관 심층 인터뷰입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보도된 전작권 전환 추진 관련 비화는 현재 유력 국방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이상희 당시 합참의장의 714계획(2012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계획) 극비보고와 2006년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 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의 항명 사건 내용 등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공개가 됐습니다. 1개월 가까이 국방부와 청와대 등 핵심 관계자들을 만나 종합 구성한 내용임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아래에 참고로 기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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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년 5월… 군, 청와대 전작권 압박에 '714계획' 극비리에 보고
2006년 10월 盧대통령 "2009년 돌려받자" 李합참의장 "안된다"

인수위 시절부터 '전작권·자주국방 로드맵' 만들어 추진
국방부, 전환시기 뺀 채 업무보고 했다 계속 퇴짜맞아
盧대통령, 주한미군 감축 통보에 "거봐라" 동맹파 비판

< 특별취재반 >
유용원·안석배(사회부)
윤영신(경제부)
신정록(정치부)
차학봉(산업부)
박중현(전국뉴스부)
신형준(문화부)
김희섭(미디어팀)
한현우(엔터테인먼트부)


"그래요? 한국 대통령의 권한이 그렇게 센지 몰랐네요…."

2003년 2월 17일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찾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에 대한 브리핑을 하자 노 당선자는 예상 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 브리핑은 노 당선자가 2월 13일 한국노총을 방문한 자리에서 "막상 전쟁이 나면 국군에 대한 지휘권도 한국 대통령이 갖고 있지 않다"고 발언하자 깜짝 놀란 국방부가 서둘러 마련한 자리였다.

# 자주파·동맹파 힘겨루기끝 자주파 승리

전작권은 전쟁이 나면 한·미 대통령과 양국 군 수뇌부가 공동으로 행사하게 돼 있다. 노 당선자가 미국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브리핑을 준비했으나 국방부 입장에서 브리핑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브리핑에 참여했던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노 당선자는 국방부의 브리핑 내용을 좀 못 믿겠다는 듯 다소 냉소적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 뒤 전작권은 노무현 정부 내내 국방·안보 분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며 국내는 물론 한·미 간에도 논란과 갈등을 초래한 단어가 됐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이미 전작권 전환(환수)과 자주 국방 추진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던 것으로 이번 취재 과정에서 확인됐다.
당시 인수위에 참여했던 A씨는 "인수위에서는 개념적이긴 하지만 '자주 국방 로드맵'을 만들었다"며 "인수위는 임기 중 평화체제 구축 3단계 계획을 추진했으며 전작권 환수 및 자주 국방 로드맵은 평화체제 구축과 연계해 그 하위 개념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인수위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이었던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은 "전작권을 가져와야 정상국가로 가는 길이라는 게 노 당선자의 뜻이었으며 인수위에서 개념은 서 있었다"고 밝혔다.

전작권 전환 추진은 노 대통령 취임 이후 본격화됐으나 한동안 지지부진했다. 한·미동맹보다는 자주 국방을 강조하는 '자주파'와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동맹파'가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2003년 4~6월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 주재로 '자주 국방 토론회'가 몇차례 열렸으나 자주파와 동맹파는 책상을 치거나 고성을 주고받는 설전(舌戰)을 벌여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노 대통령이 겨우 회의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이 토론회에 참석했던 김희상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은 "당시 회의에서 전작권 환수를 추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와 격론을 벌이다 책상을 치며 반대했다"며 "회의 뒤 대통령 앞에서 결례한 것 같아 비서실장에게 사표를 제출했으나 반려됐다"고 말했다.

팽팽하던 자주파와 동맹파의 힘 겨루기는 그해 6월 초 미국이 대규모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우리측에 통보하면서 자주파의 승리로 귀결됐다. 6월 4~5일 서울에서 열린 미래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에서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가 "2006년까지 주한미군 1만2500여명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다. 주한미군 3만7000여명의 3분의 1에 달하는 규모를 줄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같은 감축 통보는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을 우려, 이듬해 5월 미 2사단 2여단의 이라크 차출문제가 불거질 때까지 극비에 부쳐졌다.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통보받자 노 대통령은 "거봐라! 전작권과 무관하게 미국은 주한미군을 빼가지 않느냐"며 동맹파를 비판했다고 한다. 그 뒤 노 대통령과 청와대의 전작권 단독 행사 추진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 국군은 능히 나라를 지킬 만한 규모를 갖추고 있으나 아직 독자적인 작전 수행 능력과 권한을 갖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내에 우리 군이 자주 국방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당시 경축사 원고에는 '미국은 대규모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통보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으나 국민들의 충격 등 부작용이 감안돼 행사 직전인 8월 15일 아침에 빠졌다고 한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등 군 당국은 이런 노 대통령과 자주파의 입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전작권이 한국군의 손에 넘겨지는 순간 한·미 안보동맹의 상징인 한미연합사령부가 해체되고 안보동맹의 기본 틀이 바뀌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작권에 대한 거론 자체를 금기시했다.

2003년 3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친 청와대 업무 보고에서도 핵심인 전작권 전환 시기는 뺐다. 청와대는 전환 시기를 포함시켜 다시 보고하라고 계속 퇴짜를 놓았다. 조영길 국방장관은 결국 그해 7월 말 '2010년'을 목표연도로 포함시킨 '자주 국방 비전' 계획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전 장관은 "당시 그런 보고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노 대통령 등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이 뒤에 군을 압박하는 근거로 이 보고를 자주 활용했다. 한 소식통은 "당시 청와대로부터 몇차례의 보고가 퇴짜맞자 마지못해 큰 의미 없이 보고서 한쪽 구석에 '2010년'이라는 표현을 집어넣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전작권 전환 추진을 실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미뤘다. 청와대가 목표연도를 포함시킨 구체적인 전작권 전환 추진 로드맵을 만들도록 계속 압박하자 이상희 합참의장 등 군당국은 2005년 5월 비밀 추진 계획을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한다. 암호명 '714계획'. 2급비밀로 분류된 이 계획은 2012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추진하되 몇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북핵문제의 해결, 남북 간 군사적 신뢰 구축, 북한 노동당 규약 폐기 등이었다. 군의 입장에서 일종의 '안전장치'를 단 것이다. '714'라는 암호명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군 지휘권(전작권)을 이양한 날짜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전제조건은 뒤에 "전제조건을 달면 전작권 환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청와대 입장과 "우리가 억지력을 변함없이 제공하므로 전제조건이 필요없다"는 미국측 입장에 밀려 빠지게 된다.

한동안 국민과 언론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던 전작권 문제는 2005년 9월 한·미안보정책구상(SPI)회의에서 우리측이 전작권 단독 행사 협의를 미측에 공식 제안함에 따라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3주 뒤인 10월 21일 윤광웅 국방장관과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서울에서 열린 제37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양국군 지휘관계와 전작권에 대한 협의를 적절히 가속화(appropriately accelerate)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우리측은 전작권 전환 협의를 서두르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미측은 이에 부정적이어서 '적절히 가속화'한다는 것으로 타협했다는 후문이다.

전작권은 이듬해인 2006년 들어 본격적인 가속이 붙으면서 정치적 이슈로까지 변질(變質)된다. 그해 1월 25일 노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올해 안에 전작권 환수문제를 매듭짓도록 미국과 긴밀히 협의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 신호탄이었다. 그 뒤 그해 3, 4월 우리 국방부와 합참은 미측에 전환 목표시기를 2012년으로 하고 싶다는 의사를 처음으로 전달했다.

# 美“2009년 이양” 선언에 정부 크게 당황

예상치 못한 '폭탄'은 그해 7월 터졌다. 7월 13~14일 서울에서 열린 제9차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에서 미측이 "2009년에 한국측에 전작권을 이양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우리가 목표로 하고 있는 2012년보다 3년이나 빠른 것이어서 우리 정부와 군 관계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군이 하고 싶은 말들을 전직 군 수뇌부들이 중심이 되어 쏟아냈다. 그해 8월 전직 국방장관 등의 집단 회동 및 성명 발표로 시작된 전작권 단독 행사 추진 반대 움직임은 전직 외교관, 대학교수 등 지식인, 전직 경찰 수뇌 등의 성명 발표라는 유례없는 집단 저항을 초래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노 대통령은 8월 9일 연합뉴스와의 특별회견에서 "2009년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전작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오기에 찬 발언을 해 반대 진영의 더 강한 반발을 샀다.

미측의 '2009년 이양' 입장은 예상보다 확고했다. 우리가 양보하든지 2012년을 고수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했다. 군 고위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2009년도 좋으니 미측 입장을 받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예비역 장성들로부터 "대통령에게 직언(直言)을 하고 아예 사퇴하라"는 압박에 시달려온 이상희 합참의장은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때 노 대통령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실상의 항명(抗命)사건을 일으킨다.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군의 날 행사 직전 노 대통령과 3군 수뇌부가 간담회를 갖는 자리에서였다. 노 대통령이 이 의장과 미국측의 '2009년안(案)'을 수용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 이 의장에게 "2012년을 고집하는 것은 대통령 뜻과 다른 것이다. 대통령 뜻에 복종하든가 항명하든가 둘 중 하나 해라"고 최후 통첩성 발언을 했으나 이 의장은 "저는 대통령이 결정하면 수행할 의무가 있는 직업군인이다. 그러나 제가 2012년으로 판단한 것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라며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간 간담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썰렁해졌다. 그뒤 이 의장 경질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결국 다음달 군 수뇌를 대규모로 교체하는 조기 인사에 포함돼 군복을 벗었다.

10월 20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38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는 한·미 간 전작권 전환 합의에서 분수령이 됐다. 양국이 전례 없는 마라톤 협상 끝에 '2009년 10월 15일~2012년 3월 15일 사이에 전환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미측은 한국측이 2012년을 고수하자 막판에 '2011년 10월'안까지 제시했다. 청와대는 미국측 안을 받으라고 했으나 윤광웅 국방장관과 이 의장이 2012년을 고수, 이같이 합의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이어 이듬해 2월 워싱턴에서 김장수 국방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 간에 열린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2012년 4월 17일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작권을 전환키로 합의함에 따라 노 대통령 최대 '숙원사업' 중의 하나였던 전작권 문제는 외형상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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