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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과 꿈에 대하여

시작


꿈에 대한 주제는 놀랍고 흥분되는 주제이며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데 관심이 있고 상위 마나스의 지각과 지식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역사를 통해서 꿈과 꿈을 꾸는 과정에 대해서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며 신지학은 이런 상태들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한 이해를 통해서 인간의 진화 과정들과 다른 기능들에 대해 많은 통찰력을 제공해 줌으로써 많은 도움을 얻는다고 한다.
 
깨어나고, 잠자고 그리고 꿈꾸는 것은 매일 밤 경험하는 주기로 진화의 전체 주기를 복사한 것이다. 그리고 일단 꿈이 무엇이고 누가 꿈을 꾸는지 그리고 꿈꾸는 동안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게 되면 삶의 많은 신비들을 푸는 열쇠와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갖게 될 것이다.
 
성경의 욥기에서 인용하면, “꿈들과 비전 속에서 인간은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H.P.B. 의사록 78 페이지에서 말하길, “’꿈꾸기’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투시력을 개발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새롭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매일 밤 우리들 모두가 상위 성질인 영원한 신성한 본성이 있는 세계에서 깨어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렴풋이 알게 될 수도 있다.
 
꿈에 대해서 과학에서 말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시해 준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어떤 꿈들을 경험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면 깨어 있는 동안 회복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회고적인 꿈. 꿈 속에서 본 사건들, 사람들, 장면들 등이 깨어있을 때 마주친 것과 사소한 부분까지 동일한 선견지명의 꿈. 수학적인 문제들, 추상적인 문제들 혹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깨어 있는 동안에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으나 꿈 속에서 해결 책이 제시된 그런 꿈. 꿈 꾼 사람 혹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꿈으로 깨어 났을 때 사소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그런 인상을 남기는 꿈. 그리고 꿈 속에서 꾸는 꿈들, 반복되는 꿈들 그리고 꿈 꾸는 사람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꾸는 꿈들 및 비유적으로 불길한 꿈 등등 많이 있다. 꿈이라는 주제에 대한 고대인들의 광대한 지혜 없이는 우리들은 도움과 영감이라는 매우 가치 있는 근원과 단절되어 있다. “진정한 자아”인 “우리”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고 신지학은 우리들에게 환기시킨다. 그러면 누가 잠자는 것일까?


잠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24시간 동안 깨어 있고 잠자는 두 가지 상태를 누구나 경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지학은 한걸음 더 나가 잠자는 시간이 스바푸나(Swapna) 그리고 수슙티(Sushupti) 혹은 꿈 꾸는 상태와 꿈이 없는 수면 상태라고 부르는 두 가지 상태로 나누어진다고 가르친다. 수슙티를 번역한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졋지 씨는 말한다. 그가 [인간의 세 가지 의식 상태]에서 말하길;


“꿈이 없는 수면 상태”로 번역된 것은 부정확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꿈이 없지만 또한 심지어 범죄자들도 자신의 높은 본성을 통해서 영적인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상태이며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대한 영적인 저수지로 그것에 의해서 사악한 삶으로 향하는 것을 제지하는 엄청난 힘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그 영향은 계속해서 유익하게 작용한다.


이 글에서 말한 세 번째 상태는 자그라타(Jagrata)로 깨어 있는 상태이며 그가 말하길, “깨어 있는 상태인 자그라타에서 꼭 재생해야 한다. 바로 그 상태에서 내면의 자아에 대한 완전한 의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길, “자그라타는 스바푸나에 영향을 주어서 꿈과 암시들을 만들어 내고, 상위 상태로부터 내려 오는 가르침들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혹은 꿈 속 생활에서 겪은 정신적 경험들의 뒤틀림을 줄여주는 침착함과 집중을 통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거나 한다. 그러면 스바푸나는 꿈 속에 있었던 좋은 암시나 혹은 나쁜 암시를 통해서 깨어 있는 상태인 자그라타에 영향을 준다.”


이 글은 잠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을 말한 글이기 때문이 더 많이 인용하겠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이 잠들어서 꿈을 꾸고 그리고 나서 수슙티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외적인 감각들이 무뎌지면서 두뇌는 이미지들, 즉 깨어 있을 때의 생각들과 행위들을 재생한 이미지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다가 이내 곧 잠이 든다. 방금 떠난 것과 실제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 갔으며, 단지 다른 종류의 경험일 뿐이다. 깨어 있는 상태와 수슙티 상태가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더 높은 상태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까지 이 영역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동요나 방해도 두뇌 활동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자신의 본성이 허락하는 정도까지 “신들의 향연”에 참여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깨어 있는 상태로 되돌아와야 하며 처음 왔던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왜냐하면 수슙티 상태는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그 밑에 있는 스바푸나도 마찬가지이므로 수슙티에서 자그라타 상태로 바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올 때 꿈에 대한 어떤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다양하고 혼란한 생각으로 초점이 없는 보통 사람은 자신의 스바푸나 영역 혹은 상태를 혼란스러운 상태로 만들어서 그 의식 상태를 지나갈 때 수슙티의 유용하고 고양된 경험들이 섞이고 뒤틀리게 되어 깨어나면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으며 갖는 것이 의무인 어떤 이로움도 없게 된다. 여기서 또 한번 깨어있을 때 가진 편견이나 그 반대의 생각들과 행위들의 지속적인 영향을 보게 된다.

※ 기본 자료실에 [인간의 세 가지 의식상태에 대하여]라는 글 참고.


그러면 꿈은 무엇인가


꿈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고 개개인마다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에 꿈이란 무엇인지 전체적인 정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꿈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활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꿈에 대한 어떤 것들을 언급해야겠다.


꿈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꿈이란 육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것이 무엇이든 경험하고 본 것을 깨어나면서 두뇌가 기억하는 것이다. 두뇌가 기억할 것, 두뇌를 통해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것,”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등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 중에 하나가 개성인 비물질적인 선을 따라서 개발되는 것이다. 다른 요인은 잠자리 들기 바로 직전의 마음의 상태이다. 세 번째 인자는 윤회하는 자아의 영적인 발전 정도이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는 “한 사람의 카르마가 또한 꿈의 의미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왕은 자신의 왕국과 관련된 꿈을 꿀 것이고, 시민은 중요하지 않은 일시적인 것과 관련된 꿈을 꿀 것이다.” 그리고 [호두 껍질 속의 우주]라는 글에서 H.P.B.는 내면의 인간이 영적인 선을 따라서 발달되는 것이 명확하고 의미 있는 꿈들을 전달하는 데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녀가 말하길;


외부의 두뇌에 순전히 영적인 혹은 비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을 외부 두뇌에 어느 정도는 생생하게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자아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준 영적인 두뇌가 지각하는 장면들의 인상과 듣고 느끼는 말들을 잠자고 있는 외부 인간의 두뇌로 전달하는 것은 내적의 자아의 정신적인 감정들의 민감함과 그 기능들의 영적인 정도에 달려 있다. 그 기능들의 영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아가 잠자고 있는 대뇌 반구를 깨워서 감각 중추와 소뇌를 활동시켜서 깊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충분하게 휴식을 하면서 활동하지 않는 대뇌 반구에 생생한 그림으로 인상을 주는 것이 더욱 더 쉬울 것이다.


그래서 어떤 꿈은 전혀 쓸모 없고 무의미한 사건들과 그림들의 쓰레기일 수도 있고 혹은 종종 이해할 수 없지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아가 있는 세계에서 자아의 활동을 섬광처럼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꿈의 선명도와 성격은 두 가지 방향에서 오는 힘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나는 상위 마나스인 자아의 발전과 영적인 의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개성이 “혼의 언어”를 읽고 본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 정도이다.


[블라바츠키 롯지 회의록]에서 H.P.B.는 한 장을 꿈에 대해서 할애했다. 그녀가 말하길,


만약 육체와는 독립적인,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 속에 불멸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꿈의 성질과 기능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면 중에는 독자적인 사고력이 마비된, 생기를 가진 형체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주제가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속에 있는 영구 자아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영구 자아를 우리들이 고급아(Higher Self)라고 말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일반적으로 헛된 공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은 내면의 인간의 삶과 경험들에서 찢어진 페이지이며, 깨어나는 순간에 우리들의 육체적 기억에 의해서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왜곡된 희미한 기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기억은 내면의 인간이 완전하게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 내면의 인간이 행했던 행동들과 목격한 사실들이나 생각들의 일부분의 인상들을 기계적으로 잡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자아는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마다, 즉 육체 인간이 잠을 자는 동안에 육체라는 감옥 안에서 별개의 삶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의 종류


많은 종류의 꿈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H,P.B.는 [블라바츠키 롯지 회의록]에서 대략 일곱 가지 부류로 나눈다. 그 리스트를 보면,


1. 예언적인 꿈들. 상위 자아(Higher Self)에 의해서 기억에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간단 명료하다. 목소리가 들리던가 혹은 일어날 사건을 보는 것.


2. 우화적인 꿈들 혹은 두뇌에 의해서 붙잡혀서 공상에 의해서 왜곡된 실재를 희미하게 흘깃 본 것. 이런 꿈들은 일반적으로 전체가 아니라 반 정도만 진실한 꿈이다.

3. 초인들이 보낸 꿈들 혹은 선하건 나쁜 꿈으로 최면술사가 보낸 꿈 혹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매우 강력한 정신이 만들어낸 생각들에 의한 꿈.


4. 회고적인 꿈. 과거 생에 속하는 사건들에 대한 꿈들.


5. 인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고의 꿈들.


6. 혼란스러운 꿈들로 원인들은 앞에서 말했다.

7. 소화나 정신적인 문제 혹은 그런 외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혼돈스러운 그림들과 단순한 공상들에 대한 꿈들.


수 년간 [신지학 메거진]의 “전망대” 섹션은 다양한 출판물에 인쇄된 예언적인 꿈들의 예를 모았다. 물론 아브라함 링컨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꿈도 소개했다. 또한 1964년 5월24일에 예언들과 꿈들에 대해서 말한 루이스 멈포드의 흥미 있는 글을 소개한다.


무의식에 의한 예언적인 계시들 중에 1913년 10월에 있었던 압도적인 계시였다. 거대한 노란 파도가 익사한 육체들과 문명의 부스러기들로 가득 찬 채, 전 유럽을 휩쓸고 가는 재앙의 계시. 머지 않아서 그 사건에 의해서 입증된 틀림없는 이 꿈은 블라바츠키 여사가 훨씬 이전에 꾼 전체 도시가 핵폭발로 파괴되는 생생한 계시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전망대”는 마크 트웨인이 꾼 꿈에 대해서 말한다. 미시시피에서 폭발한 보트에 있던 자신의 형의 죽음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사건은 그가 꿈에서 본 정확한 장소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많은 꿈들과 사건들을 열거하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워싱턴 포스트에서 언급한 예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세이스(Sayce) 교수로 꿈 속에서 바빌로니아 승려의 출현으로 바빌로니안 원통을 해석할 수 있었다. 존 보가스티스 부인은 군부에서 남동생이 죽었다고 분류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는 꿈을 꾸었다. 꿈에 확신을 가지고 경찰에 수색을 요청하여 그의 위치를 찾았다. 많은 예의 죽음의 전조를 알리는 꿈의 예들이 있으며 나중에 그 세부사항까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 흥미로운 것들 중에 어떤 것은 경고를 주는 꿈들이다. 어떤 경우는 당사자에게 직접 오는 경우도 있고 또는 그 경고의 꿈을 쉽게 받아서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는 경우도 있었다.


1941년에 [코로넷(Coronet)]은 많은 예의 경고의 꿈들을 발간했다. 그 중의 한 예가 1812년 5월3일에 당시 국무총리인 스펜서 퍼시발이 하원 휴게실에서 총격을 당하는 꿈을 꾼 존 윌리엄이라는 영국인의 예이다. 세 번이나 그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가 그 꿈을 비웃어서 영국으로 갈 수 없었고 단순히 기록만 해두었다. 5월11일 그 사건이 꿈에서 본대로 일어났다. 
 
위험한 항해라는 친숙한 경고의 꿈이 소이어(Sawyer)씨에게 왔다. 그는 1909년 7월 더반에서 출항하려고 했다. 그는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배와 자신 사이에 긴 칼을 한 손에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피로 물들여진 넝마를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있는 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었기 때문이다. 그 배는 아무 흔적도 없이 바다에서 사라졌다.
 
1951년 5월26일 토요일 저녁 포스트에서 빅터 고더드(Goddard) 경의 경고의 꿈 이야기를 말한다. 격렬한 비행기 추락 사고에 고더드 경이 있었다는 것을 “본” 낯선 사람에게서 경고의 꿈이 왔다.
 
또 다른 경고의 꿈의 예는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 박사가 경험한 경우로 그 분에게 인상을 줄 수 없었던 꿈이다. 그는 젊어서 이탈리아 파듀아에 있는 대학교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가 도버 해협에 도착했을 때 그가 도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 정기선에 타는 것을 총독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유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다음날 그 정기선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그 정기선이 사라졌다는 뉴스가 왔다.  그러고 나서 그 총독이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엄청난 힘이 그 젊은이를 금지하라는 암시를 주는 꿈을 꾸었다. 그 꿈 속에서 그 젊은이의 얼굴이 보였고 배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비가 나타났을 때 그는 꿈 속에서 본 그 얼굴을 알아 보았다.
 
수 년에 걸쳐서 사상가들과 학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발명가들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기대치 않게 꿈 속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들이 수 주간 혹은 많은 날 동안 노력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을 때 해결할 수 없었던 어려운 문제를 말끔하게 하는 혹은 예술 작품의 동기가 되는 해결책을 꿈 속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 경우들이 종종 신문에 나오기도 한다.
 
그런 경우 중에 하나가 덴마크의 원자 과학자인 닐 보아(Niels Bohr)의 경우이다. 그는 태양과 주위를 도는 행성들 그리고 그 행성들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대한 분명한 꿈을 꾸었으며, 깨어나자 마자 원자 모델을 만들 수 있었고 후에 그것은 원자 분야에서 모든 연구와 발명의 토대가 되었다.
 
독일의 화학자인 프레드릭 케쿨레(Fredrich Kekule)도 꿈을 통해서 벤젠 분자의 구성 요소가 고리구조라는 이론을 발견했으며 많은 복합물들에 적용되었던 발견이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루이스 아가시(Louis Agassiz)는 자신의 저서인 <화석어류 Recherches sur les poissons fossils>에서 화석판에 보존되어 있는 화석어류의 희미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2주간 노력했지만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분제를 포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전체 화석을 본 강한 인상을 가지고 깨어났다. 그 후 두 번의 꿈을 더 꾼 후에 그 문제의 정확한 해결책에 다다랐다.
 
예술의 분야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꿈이나 비전 속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시인들도 그들 시의 일부분의 영감을 “보았다”고 말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니벨룽의 반지 중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의 서곡 전체를 꿈 속에서 들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수 많은 환생을 경험하였고 보편적인 토대 같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인식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진정한 자아가 있다. 이 능력은 우리들 것이며, 만약 하위 정신의 편견과 개성적인 욕망을 통해서 그것을 가져오려고 한다면 우리들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내면의 인식 능력에 접근할 수 없을까?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이런 내면의 인식 능력에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양심, 영감, “밝은 생각들”은 모두 이 내면의 존재에게서 온다. 이 존재는 모든 생명의 하나에 대한 지식과 아주 다른 높은 곳에서 온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오겠는가? 그것들은 분명이 육체에서 오는 것은 아니며 두뇌나 혹은 순전히 행운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꿈을 인식하듯이, 이런 번득이는 통찰력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마음 속에 장벽을 세웠다. 그리고 매일 밤 듣고 목격하는 그림들과 생각들을 표현할 수 없는 사고 방식들을 부추겨왔다. [자아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재미있는 점을 말했다. 그가 말하길,


육체의 구속과 신체 기관들을 통해서 힘들게 살고 일을 하던 자아는 자유로워져서 자신만의 세계에서의 경험들을 즐기게 된다.


그 세계에서 생각의 과정들을 사용하여 육체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 적합한 생각들을 인식한다. 자아가 보고 듣는(이런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것은 우리가 있는 세계와는 반대로 보인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전혀 모르는 언어이다. 육체로 다시 들어왔을 때 하위 개성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상한 말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장해가 되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그 의미의 번쩍임을 주워 듣는다. 마치 영어 몇 단어를 아는 사람이 외국 마을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들과 단어들을 들으면서 그 중에 아는 몇 단어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아의 언어를 배워서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밤마다 자아가 들어가는 그 세계의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두뇌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언어이고 두뇌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항상 번역을 해야 한다. 만약 번역이 틀리면 자아의 경험을 하위 인간에게 완전하게 전달 되지 않을 것이다.

혼의 언어는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들을 통해서 생각들과 경험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언어에서는 소리가 색깔이나 그림으로 표현될 것이고 냄새가 진동하는 선으로 표시될 수도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 그림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빛이나 그림자 혹은 구역질 나는 냄새나 기분 좋은 향기로 묘사될 수도 있다. 광대한 광물계가 그 세계 및 각도, 색깔뿐만 아니라 진동들과 빛들을 보여줄 것이다.
 
혼의 언어의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진화의 사다리를 거슬러 올라가서 자아가 있는 세계로 가야 한다. 그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개념들과 사건들이 전체에서 보여지며, 의미와 전체에 대한 관계가 상징, 색깔, 조화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체들로 보여진다. 혼이 개념들을 직접적으로 관찰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우리들의 개념들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는 형체들이 아닌 개념들에 집중함으로써 혼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내면의 성질에 대한 인식을 일상 생활의 생각들과 활동들 속으로 가져오면서 생명의 숨겨진 면에 있는 언어를 알게 된다고 신지학에서는 지적한다. 우리는 점점 더 의미와 의도, 관계들과 상응들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표면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사물들이나 사건들의 본질적인 성질들을 보거나 느끼기 시작한다. 혼은 사물의 근본적인 성질, 본질, 실재를 다룬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바탕을 근본적인 생각들에 둔다면 혼의 언어가 점점 더 자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꾼 꿈을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우리만이 자신의 꿈을 해석할 수 있다. 깨어 있을 때 자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은 개성이 익숙한 용어들로 변환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생각의 일부분인 그림들과 개념들로 변형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꿈 속에서 메리(Mary)나 예수(Christ)를 볼 것이다. 반면에 힌두인들은 자신의 신을 볼 것이다. 우리가 자아의 언어를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들의 꿈의 의미를 풀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사용해야 한다.


아마도 첫째 조건은 인간의 이중성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즉 내면의 영원한 자아와 죽어서 사라진 개성에 대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육체가 잠을 자는 동안 우리가 있는 세계와는 매우 다른 세계와 다른 의식 상태 속에서 자아가 활동하고 생각하고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자아는 그 세계에서 우리들에게 진리에 대하여 인상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보편적인 세계의 “성질”에 맞추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깨어났을 때, 이런 경험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는데 일상 생활에서 생각과 용어 들에서 엄청난 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들을 최대한 이롭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위 자아의 영향들이 우리들에게 스며들도록 만드는 것이며 혼의 목적을 가장 잘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방식은 틀림없이 미덕과 지식으로 이끌게 된다. 왜냐하면 악과 욕정들은 자아가 우리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의 의미를 인식하는 데 우리들의 시야를 영원히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미덕을 되풀이하여 가르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만약 악한 자가 자아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며 덕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만 성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깊은 수면 상태에서 오는 이점을 높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르침에서 제시된 실습 방법들 중에 하나는 낮 동안 하는 모든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정신을 통제해서 그것을 목표물로 향하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곳에 고정시키면 꿈 상태 속으로 넘어가는 질서와 목적의 패턴을 만들어 주고 그래서 깊은 꿈 상태 속에서 오는 생각들과 그림들이 깨어날 때 왜곡되거나 뒤틀리지 않은 채 들어오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바로 전에 어떤 고귀한 원리이나 목적에 집중하는 것도 꿈의 세계에 있는 욕망의 성질에 의해서 놓여진 위험들을 지나서 오는 길을 곧고 깨끗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의 생각들을 회상해보고 그것들을 정신 속에서 하나씩 지나가면서 회상하면서 자연과 이 세계에 조화를 이루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주고 혼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들은 의식적으로 옳게 고치거나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 것이든 가장 좋은 생각들 중에 하나에 대해서 명상한다면 수슙티 상태로 빠르게 지나갈 것이고 한층 더 영감과 활기를 가지고 깨어나게 될 것이다.


졋지 씨는 우리가 매일 밤 우리가 이 높은 상태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만약 이것을 믿고 상위 자아의 실재를 인정한다면 소위 명상의 신비스러운 힘으로부터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 상위 자아에게 도움을 진심으로 요청하는 헌신적인 사람은 수슙티 다음에 오는 꿈의 상태 속에서 요구하는 도움을 받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최고의 상태에서 받은 꿈의 인상들을 더욱더 명확하게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물어본 질문과 원하는 인상들은 고귀하고 이타적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위 자아는 물질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신지학에 대해 연구하는 것, 내면의 인간의 구조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 정신과 자연의 이중성, 과거 모든 기억들과 행동들을 간직하고 있는 아스트랄 빛에 대한 연구, 동양 심리학 및 바가바드 기타를 연구하는 등등, 우리들이 하는 모든 연구는 꿈을 더 꾸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서 오는 꿈들로부터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수면과 꿈이 얼마나 중요한가


“잠자는 자를 깨우지 마라. 왜냐하면 만약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고치기 어려우리라.” 이것은 고대 우파니샤드에 있는 교훈으로 연구에 정신의 이중성을 포함시키지 않는 많은 꿈의 연구자들이 무시하는 것이다. 지난 반 세기 동안 꿈과 수면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으며 새롭게 찾은 것들을 주기적으로 갱신하기 때문에 아직도 나올 것이 많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그 많은 연구를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수면 부족 시에 심각한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장시간 동안 강제적으로 깨어 있으면 신경 기능이 분명히 정지하는 것을 보여 주고 짜증이 증가하고 기억 상실과 환영이나 환상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깊이 충분히 잠을 자면 그런 징후들이 다 사라졌다.


[동양으로부터 온 메아리]에서 졋지 씨는 육체의 피곤에 대해서 흥미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수면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설명은 육체가 피곤해지고 활기를 잃어서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태는 그 반대라고 신지학은 말한다. 왜냐하면 활기를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육체는 깨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생명의 파도들이 육체 속으로 격렬하게 몰려들어 온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 이상 그 생명의 파도들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고 우리를 압도하여 잠을 자게 된다. 잠을 자는 동안 생명의 파도들은 육체의 분자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균형이 완전할 때 깨어 나서 생명과 다시 싸움을 하게 된다. 이런 주기적인 조정이 없다면 생명의 흐름이 우리를 파괴해 버릴 것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생명의 흐름들은 더 보편적인 상태 속에서 머무르려는 자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산 채로 깨어 있기 위해서는 그런 성향에 저항해서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이것이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저항이다. 생명력을 상실해서가 아니다. 생명은 모든 곳에 있으며 만물 속에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이용할 수 있으며 자유 상태로 돌려 놓게 된다.


다른 실험을 보면 꿈을 꾸기 시작할 때 깨워서 일정 시간 동안 꿈을 꾸지 못하게 할 때 근심하고 안절부절 하게 되고 종종 실험을 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본다. 아마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배웠다. 개성적인 인간이 진정한 존재와 주기적으로 접촉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혹은 어떤 일이 일러나는지 의식을 하건 못하건 그 신성한 빛의 광선에서 혜택을 매일 밤 받는 것으로 우리를 믿고 계속 시도할 이유가 있다고 믿을 만하지 않을까. 만약 이런 것이 없다면 동물 인간이 동물 인간 이외에 다른 무엇이 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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