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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 있는 삶에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빛의 지
구는 내면에 있는 다양한 차원
의 의식을 통합하여 평화와 조
화의 빛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
들의 교류 장소입니다.


신과나눈이야기한국모임
http://cafe.naver.com/cwgkorea


자유게시판

깨달음이란 깨달음을 구걸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깨달음을 간청하지도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어떻게 깨달을까 노심초사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처해진 환경에 지배되지 않은 것이다.
깨달음이란 관습과 연민, 번뇌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어디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자신을 묶고있는 쇠사슬을 푸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에 진실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속한 것에서 뛰쳐나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사슬을 끊었는데 다른 쪽에서 사슬을 걸고 있다고 생각되면
이것이 끊은 것인가?

뛰쳐나오라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http://jungto.org/home/youth/zboard/view.php?id=gaejang323&no=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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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음이란?

깨달음이란?  


제가 생각하기로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소우주라 했습니다.
내 안에 모든 우주의 원리가 모두 들어있지요.

그래서 쏘크라테스가 말을 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네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부처는 이런말을 했죠.
'나에게 경배하지말라 부처가 어찌 부처에게 경배를 하느냐'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겠구요.


예수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말을 하고 싶습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밖에서 찾으려하지 마세요.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바쁘기만 할 뿐......
각자의 존재가 결코 부족한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 완전하게 태어납니다.
인간 하나 하나가 신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창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탐욕속에 사로잡혀 더 많이 가지려하고, 비교하고

현재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완전성을 잃어버리고
이미 내 몸안에 우주의 원리가 들어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밖에서 완전함을 추구합니다.

어찌하려하고, 어찌하지 못하면 괴로와 하고.....


'나'는 무엇일까요?
태어나자마자는 '나'라는 의식이 없을텐데
어떻게 해서 '나'라는 의식이 생길까요?

나라는 존재는 컴플렉스로 부터 시작됩니다.
있는 컴플렉스, 없는 컴플렉스, 여자 컴플렉스, 남자 컴플렉스
착한사람 컴플렉스, 신체 컴플렉스 등등 별의 별 컴플렉스들이 많지요.

그런 컴플렉스들이 한겹한겹 껍질이 덥히면서
딱딱한 껍질 덥힌 나라는 존재가 생기게 됩니다.

그 껍질은 외부와의 단절을 만들고 외곡된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방해하지요.
그래서 컴플렉스가 심한사람은 자격지심이 강해서
남들의 일상적인 반응을 심하게 왜곡해서 반응하지요.

상대방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기식으로 판단, 결정해버리고
기정사실화합니다.

예를들어서 어떤 사람은 자기가 다른사람에게 인사를 했는데
자기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며 그 사람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노발대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네모난 물건을 들고 갈때 배고픈 사람이 본다면
그 것을 도시락으로 생각할 것이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책으로 보시겠지요
글쎄 저라면.....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궁금해 지면 그때서야 '그게 뭐유'하고 묻겠죠.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추운날 한밤에 길을 가다가 너무나 급한 용무(똥)가 생겨 두리번 거리다
얼떨결에 춥지 않고 불이 환한 현금지급기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얼른 들어가서 신문지를 깔았습니다.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순식간에 볼일을 보고
신문지에 싸서 얼른 밖으로 뛰어 나오는데
누군가가 그 신문지뭉치를 채갔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돈이 너무나 필요한 날치기 눈에는
그 신문지 뭉치가 돈으로 보였겠지요.

'너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을 무조건 적으로 사랑을 하게되면
나를 감싸고 있는 컴플렉스 껍질들이 하나 둘 벗겨져 나갑니다.
완전하게 나를 사랑하게 되면 껍질이 사라지면서
나도 사라지고 우주와 합일이 됩니다.

컴플렉스가 사라지는 것!
그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입니다.


컴플렉스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0세~5세까지 엄마가 아이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나 자신에게 내가 엄마가 되어 그런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쏟아 부어 그 사랑이 충만되면
컴플렉스가 사라집니다.

곧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불교나 기독교 역시 최상의 단계는
나를 버리는 것이 최종의 목적입니다.

불교는 흔히 자력신앙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나를 버려 나를 없애는 상태
그 상태가 불교의 최고의 경지이고


그리고 기독교는 타력신앙이라고 합니다
타력 신앙은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이지요.
즉 신께 나를 온전히 바쳐
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최고의 경지입니다.


올라가는 길은 다르지만 결국 최고지점의 봉우리는
한 점에서 만나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이야 어찌되었든
결국은 나 자신이 없어지는 상태
그 것이 바로 기독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나가 사라지면 결국 우주와 하나가 되지요.
우주속에 융화된 나
굳이 나와 너의 경계가 필요없는 상태

껍질이 없어졌으니 나와 너가 없는 그런 나
껍질이 사라지면 우주와 내가 통하게 되고
우주 만물이 나와 이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우주와 하나가 되면서 우주의 모든 개체와 하나가 되는 상태.
나가 사라지기 때문에 내가 되든 네가 되든
흩어졌다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의미를 두지 않으면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윤회가 되든 말든 윤회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해탈한다고 해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해탈하면 윤회에 대해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하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나가 사라지면 우주와 합일이 이루어지고
우주와 합일이 이루어지면
모든 사물과 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우주 만물이 나의 스승이 됩니다.


식물 한포기, 날아다니는 파리도......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나와 동일한 소중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미물의 삶 속에서도
내가 살아가야 할 철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불가에서 미물도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옮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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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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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릭

2012.04.02
18:31:24
(*.135.108.108)
profile

일본의 에오의 글.

 

**************************************

 깨달음이란 앎이 아니다. (무묘앙 에오)



< 내용없는 것에 명상한다 >


명상을 하려면 항상<내용 없는 대상>을 고르는 것이 좋다.
내용 없는 대상이란 하얀벽, 어둠, 천정, 구름 한점 없는 하늘 등이다.
육체를 대상으로 할 수도 있지만 두정 이외의 육체 부분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된다.
외적인 대상이라도 파란 하늘은 다른 연상이
떠올려질 가능성이 있으며, 천정 또한 연상을 낳는다.
그럼 점에서 보면, 가까운 거리에서 하얀 벽을 마주하든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좋다.
왜 내용 없는 것을 골라야만 하는가?
내용이 없어야 사고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대상 속에는 사고가 자리할 수 없다.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당신의 의식도 내용이 없기 때문에,
내용없는 대상을 명상하면 그만큼 본성에 가까워진다.
내용 없는 대상이라면 자기 동일화하는 데도 좋다.


사인선에서 자기 동일화를 허락하는 것은
오직 두정과 어둠뿐이다.
거의 모든 동일화는 미혹을 낳지만, 이 두정과 어둠에 대한 동일화는
본성과의 일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지금, 이 순간에도<내용은 없다>
당신의<단순한 존재감>에도 내용은 없다.


따라서 항시 <내용 없는 것을 교두보로 삼아 사용>하는 것이 탁월한 방법이다.


< 전혀 아무것도 모를때가 기회이다 >


명상중일 때, 한 순간 당신에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감각이
엄습할 수 있다. 이<무지의 감각>에 이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단언컨대, 이것 없이는 개오란 있을 수 없다.
무엇인가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성의 차원에서 보면,
무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이야말
로 열쇠다. 그 불안이 찾아온다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순간.
당신은 개오 직전까지 와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모르는 그대로>에 깊이 몸을 맡긴다면,
불안은 한순간에 개오하는 만족으로 변화한다.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그<무지와 동일화>되는 것 뿐이다.



< 지복이외에 앎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


만약 지복이 거기에 있다면 어찌 앎 따위가 필요할 것인가?
당신이 무언가를 알아야만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알면 만족할 것이라>생각하며 알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앎의 최종적인 목적이 만족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거기에 만족이 있다면,
수단으로서의 앎 따위는 당신에게 필요없다.
개오한 자들이 중생들에게 받는 질문 가운데 답변하기 곤란한 것은,
<당신은 과연 깨달았는가>라는 질문이다.
앎은 깨달음이라는 상태를 정의할 수 없다.
단지 복잡해서만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도대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다는 것,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설명할 수 없는 최대 원인이다.


나아가 깨달음 자체는 더<볼>수도 없다.
즉, 그것은 그 어떤 주체에 의해서도 대상화가 될 수 없다.
만약 대상화된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순수한 중심 또는 주체성이라거나 혹은 중심 같은 것이 아니라,
이를 테면 본성을 공(空)으로 가정했다면 논리적으로도
<그것을 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한 내적 성찰인나 자각은 결코 없다.
개오한 자는 , 이것은 사고다. 저것은 감각이다. 그것은 망상이다, 라고
이것 저것 지적할 수는 있지만 단 한가지.
깨달음 그 자체는 <이것이다>라고 지적할 수 없다.
그 원인은 본인 스스로가 바로 깨달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오한 자는 어떻게 개오한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
단 한 가지 근거는<지복>이다.
또는<만족>이라고 해도 좋다.
지복 외에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자기를 판단할 방법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족이나 지복은 깨달음의 부산물(이라기보다 깨달음의 종속물)에
가깝다. 하지만 오로지 그 속성을 통해서만 깨달음이
거기에 존재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깨달음 그 자체는 영원히 미지의 향나무와도 같다.
우리는 그 향기를 맡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깨달음 자체를 본다든지 안다든지 하는 것은
제 아무리 개오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개오와 함께 만족이나 지복이 생기는 원인은,
거기에서 앎이 소용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써,
아는 것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만약 만족하는 쪽이 먼저 있다면,
어찌 앎 따위가 필요로 될 것인가.


그러므로 만족하는 지복 속에서는 앎이 필요없다.
앎이 필요 없다는 것은 사고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앎이 필요없으면 성찰도 인식도 소용 없어진다.
그러니 만약 당신에게 앎에 대한 굶주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만족하지 못하고, 지복이 아니며,
동시에 개오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때달음을 추구해도 당신이 그것에 굶주려 있는 한,
앎은 깨달음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 O -------


깨달음을 향해 교두보를 쌓는 방편은 지극히 제한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당신의 알고자 하는 움직임,
즉, 무언가를 대상화하려는 움직임이 한순간, 단 몇 초라도 좋으니까
완전하게<정지하고 또 정지하는>일이다.


거기에는 앎이 불가능해지는 방법이나 또는 앎이 무의미해지는 방법,
오직 그런 방편만이 남을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그 어느 쪽이 된다.


그러면 앎은 물러나고, 앎이 물러남에 따라 본원의 밑바닥에 있는 것,
즉, 애초부터 거기에 있던 깨달음만이<남는다> 그와 동시에
그것의 속성인 만족과 지복이 등장하고,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유일하게 개오를 자각할 수 있게 한다.
지복 이외의 그 어는 것도 개오의 증표가 될 수 없다.
심신의 허탈 등이 의식된다면 그것은 아직 개오 직전의 상태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복이나 만족을 느끼는 감각 그 자체로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본원은 항상 알 수 없는 것,
대상화 될 수 없는 것이며, 거거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깨달음조차도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미 지복과 만족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당신은 단 한가지도 시도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도에 있어서의 <무지>란, 특정 지식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상화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앎이란 바로 대상화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깨달음을 체험하고 싶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말고,
무지 안에서 직면적으로<정지>하는 일뿐이다.



------- E 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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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속의 침묵(무묘앙 에오)


화상은 말한다.
"실재하는 문제라면 해결할 수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문제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면, 실재하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들, 즉 의식체의 말을 빌리면, 실재하는 것은
오직 <침묵. 진공. 무>뿐이다.
그 이외는 단 한 가지도 실재하지 않는다.
오직 침묵만이 실재한다. 하지만 그 실재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놀랍게도<실재하는 않는 쪽>이다.

그러면, 실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망상>이다.
그러나 망상 자체는 우리들의<사고 속에 분명히 실재>한다.
그러나 망상은<존재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지도 않는 허구란, 한마디로 사고 즉, 마인드다.

<마음의 소음>이야말로 문제였던 것이다.
단, 사고가 그대로 문제되진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모든 <이차적 사고(思考)의 발생에 있다. 일정한 사고가
없이는 우리들도 동물도 미생물도 결코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생물로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우리들의 사고 작업이 아니라,
<가치다. 미래를 위해서다, 화상을 위해서다. 아니 자신을 위해서다...
개혁이다. 변혁의 시대다. 자기 변혁 방법이다. 관조다. 다이나믹이다. 무
위다. 신이다. 있는 그대로다. 만족이다. 축복이다. 사람이다.> 와 같은
마음의 소음이<허구 그 자체>인 것이다.

왜냐하면<실재>는 단 한번도 이런 종류의 말을 내뱉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가<침묵, 공허, 진공, 무>인 이상
실재는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의 지속적인 침묵이 일시적이라면 당신은 고요해질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이웃, 또 당신 본인의 교육받은 사고는
반드시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걸로 됐다고 보니?"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야"
"그런 것으로는 세상을 살아갈수 없어."
"더 힘좀 내" 라고, 그리고 가게 주인이 말한다.
"손님 괜찮으세요?"

어렵게 찾아온 침묵과 고요에 대한 <안팎으로의 아차적 사고>...이것이
바로 소음, 허구, 그리고 마인드이 상투적 수단이다.
그것은 항상<삶의 의미>를 무기 삼아 당신을 협박하려고만 한다.
<어이, 그러면 죽어>...
이것이 마인드가 말하고 싶은 유일한 <논점>이다.

나는 여기서 말한다.
"상관없어, 살고 싶은 자는 멋대로 살고, 죽고 싶은 자는 멋대로 죽어버려,
그래서 이런 돼먹지 못한 에오라는 생물도 이 시대에 어찌보면
일시적으로는 필요했다. 에오는 말한다.
"얼른 죽음의 신과 계약해버려,
그러면 아무도 너를 협박하지 못해.
(...하지 않으면 죽어)가 모든 협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벌써 마음이 죽어 버린 자에게는
협박 따위는 성립되지 않는다.
비록 협박해오는 상대가 신(神)이라도 말이다."

여기서 비열한 신이라면 이렇게 협박해올 것이다.
"야- 자네는 절대로 죽지 않아. 윤회에서 빠져 나가지 못해."

하지만 이미 벌써 전폭적으로 살고 있는 자라면,
윤회의 협박 따위는 성립되지 않는다.
죽음을 동경하고 간절히 원한다면 윤회는 고(苦)일 것이다.

하지만 삶도 죽음도 간절히 원하지 않고 그 어느 쪽에도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삶이라는 협박도 별로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상대가 신이라도 말이다. 즉,,,

완전한 삶은 완전한 죽음과 동의어이며,
완전한 죽음은 완전한 삶과 동의어기 때문이다.

에오의 E O가 본 얼간이들(원제: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속의
<장자 이야기>속에서 몇 사람의 깨달은 자들이 해탈에 실패했지만,
오직 단 한사람, <잡초>만이 진정한 열반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잡초는 문지기의 협박에 이렇게 말했다.
"?...."

정말 완벽하게 바보로 있으면,
그에게는 그 어떠한 협박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을 부정해도 동시에 죽음 또한 부정해야 한다.
화상은 이것을<나누어지지 않는 전체성>이라고 말한다.

오쇼가 <삶 전체>라고 말할 때,
그는 반드시 죽음과 삶의 양쪽을 포함해서<삶>이라고 말했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에오가 <죽음>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가 반드시 삶과 죽음 양쪽을 포함해서<죽음>이라고 말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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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앎이 아니다.

 

ic_safe.gif
글쓴이 : 1970-01-01 09:00 조회: 0

깨달음이란 앎이 아니다. < 내용없는 것에 명상한다

> 명상을 하려면 항상<내용 없는 대상>을 고르는 것이 좋다.

내용 없는 대상이란 하얀벽, 어둠, 천정, 구름 한점 없는 하늘 등이다...

 aramola.nidc.kr/index.php?id=eo3&no=33&p=2

  

 

베릭

2012.04.02
18:42:03
(*.135.108.108)
profile

http://cafe.daum.net/daum1000

 

깨달음이란?

 

 

깨달음,은 신비가 아니다.

깨달음 이란", 오해와 착각"을 바로 아는 것이다.

과일을 손에 올려주어도, 먹어보지 않고는 그 맛을 설명 하기란 어렵다.

 

모든 일의 이치를 알고자 하는 가.? 이치"를 모르고, 이해 하기란 어렵다.

문제의 모든 본질을, 볼줄 아는 혜안"이 참선" 공부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 보는 이치를 아는 것이 바른 공부다.

 

함께 살면서 한 집에 살면서 서로의 감사를 모르면. 천리만리나 떨어저 사는 관계다.

한 이불속에 살면서" 동 떨어진 생활 하는 자기가 아닌지 돌아보라.

"마음의 문을 닫고 산다면 반듯이 고쳐야" 한다.

 

"깨달음",을 다른 곳, 마음 밖에서 찾으면 바보다.

깨달음",은 오직 자신의, 마음" 가운데에서 만이 찾을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문,(無常의 이치)" 을 열고 봄'을 맞이하라.

둘이 면서 하나인 "마음, 하나에서 느끼는 무상(無常)의 봄" 을 맞이 하려 노력 하자.!

 

성낼 때도 같이 있고", 슬플 때도 같이 있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같이 있는 놈".그놈이

도데체 무엇인가.?

있다 없다'. 좋다 싫다". 같이 있는 놈, 그놈이 마음"이다.

이해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은, "눈먼 거북이요. 절름발이 자라"다.

 

마음의 이해가 들면,누구와도 통한다.

한 집에 한 식구로 살면서, 남.같이 살아서는 안된다.

"내 마음은 남이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내가 나를" 이해되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지 않으면 이치를 알수가 없다.

이치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인류사 에서 세상사 에서, 가장 큰 힘.은,원자탄 아니요. 핵폭탄도 아니다.

세상을 순화하고, 원수가 이해되고, 분노와 절망 통곡의 아픔을 치료하는 힘은."

"오직 부처님의 자비사상" 뿐이다,

사람과 사람 싸이(사이)에 관계의 문"을 여는 힘은 "자비심" 밖에 없다.

 

깨달음은  제삼의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나를 닦아가는 마음공부",그보다 가치있는 공부는 없다.

자기를 성숙시켜가는,"무상정등각"은."중생이 보살답게" 살아가려는 노력이다.

마음을 깨치면" 천하의 이치가 소화되고 이해된다. 하지 않는가.! 

 

맺힌  마음을 풀고, 분하고 섭섭함,을 스스로 풀어가라.

아버지도 어머니 형도 동생도 이웃도 사촌, 친구와 동료 남편과 아내,나와 또다른  

당신이 있어.나의 삶"도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치를 알면, 이해"되고, 용서" 못할일, 하나도 없는 것이요.

"내가 바로 세상의 옳고,그름을 판단 하는 재판관"이다

 

그래서."

자기를  바로알기만 알면", 만사가.자연스럽게.형통하여 행복하여 지는 것이다.

 

 

 

베릭

2012.04.02
18:53:45
(*.135.108.108)
profile

http://cafe.daum.net/YusuharaCU/ORer/72?docid=108WQ|ORer|72|20120227174326&q=%B1%FA%B4%DE%C0%BD%C0%CC%B6%F5

 

 

 

인류역사에는 어둠을 헤치고 우주의 실상과 인간의 길을 확연히 밝히신 몇 분의 성자가 계셨다

그분들이 밝히신 진리의 빛이 있었기에 인류문명은 삶의 기준을 찾고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진리의 빛이 희미해진 관계로 인류는 온갖 혼란과 무의미 속을 헤매고 있다

쾌락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그칠 줄 모르며 현대문명은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혼돈과

절망의 낭떠러지로 서슴없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이러한 한계는 성자들이 밝히신 진리의 빛을 외면하고 중생들의

근시안적인 지식을 과신한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지금 현대 지식인은 이 우주가 우연히 생겨난 먼지덩어리에 불과하며

성인들의 가르침도 확인할 수 없는 추상적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연 성자들은 전설상의 인물이며 그분들의 깨달음은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

이 문제는 진리의 빛을 찾아 헤매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쟁점이므로 깨달음의 진실과

그 실체를 밝힘으로써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구도자들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깨달음이라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역사적 증거가 흔치 않으니 명확히 답을 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4대 성인 이후 선가에서는 수많은 각자들이 나왔다고 하고 인도요기들도 자칭 타칭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 증거가 있어야 한다

진리의 빛이 있으면 그 주위가 밝아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세상은 날로 어두워지고 인심이 악해지는 것으로 봐서 세상에 진리의 빛이 나타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깨달음은 진실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진실했다고 이의없이 말한다

부처님은 정각을 얻었기에 어둠과 무의미 속을 헤매는 중생들에게 우주의 실상과 세상의 이치를

밝혔으며 인간이 가야할 참된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깨달음이란 다른 말로 해탈했다고 표현한다

해탈했다고 하는 말은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업을 지워버리고

우주의 근원과 같이 맑고 신성한 불성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맑은 마음 거울 위로 세상일이 완전히 비쳐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리고 있던 업이 모두 사라져 모든 충동에서 벗어나

완전한 평안과 자유를 얻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모든 번뇌와 망상이 사라지고 오욕에서 멀어지며

세상의 일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업을 지울 수 있는가?

업이란 수많은 생을 돌면서 잘못된 삶으로 자신의 영혼 속에 지은 어둠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을 지우기 위해서는 다시 밝은 삶으로 지난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원인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만 깨끗한 물로 때를 지워내듯이

어두운 업을 씻어내고 맑은 마음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연의 뜻과 흐름에 따라 완성으로 향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 소멸로 향하는 길이다

하늘은 인간에게 동물과 같이 욕망으로 사는 길에서부터 인간완성에 이르는 길까지

모두 제시해놓고 인간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고 있다

 

깨달은 자는 이 두 가지 길 중 인류와 진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완성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여 완전한 마음을 이룬 것이다

즉 인간완성이란 사람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인간의 본질에 가장 충실하게 살아감으로써 

그 열매를 맺는 것이다 따라서 삶과 떨어진 수행으로는 결코 인간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말법의 영향으로 기술적인 명상을 수행의 본질로 생각하며

단순히 바른 삶으로서는 마음자리를 찾을 수 없으며 현실을 벗어나 특별한 수행을 함으로써만이

도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마음은 갈고 닦아서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얻는 것이지 본래부터 있는 마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보물찾기가 아니라 진지한 삶의 농사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진리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수행인 것이다,

삶을 떠나 다른 수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도 당신의 깨달음은 수행이나 명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돌면서

세상을 뒤덮을 만한 공덕을 쌓았기에 비로소 이생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공덕행 속에 마음을 닦는 큰 비밀이 있다

사람은 하늘이 내리신 양심에 따라 세상을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되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은 말세일수록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불굴의 용기 밝은 마음이 있어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진리를 실천하면 그 과정에서

사랑의 불이 일어나고 애가 타서 업이 녹는다

그래서 큰 장애를 극복할수록 인간은 더욱 위대한 영혼을 지니게 되며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여있던 모든 업이 사라지면 우주의 뜻에 따라 저절로

반야지경에 들게 되며 깨달음을 증득하게 된다

반야심경에 나와있듯이 모든 제불보살의 깨달음은 오직 반야지경을 체험함으로써 증득하게 되는데

올바른 삶으로 마음에 먼지가 사라지고 인간완성의 경지가 되면

명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반야지경으로 인도된

 

성된 차원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우주의 근원과 합일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하늘의 완전한 질서이며 약속인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에 한번씩 나타나는 성자들은 자신이 지은 공덕으로 열매맺어 우주의 조화에 의해

저절로 나타난 것이지 스승에게 배우거나 명상을 익혀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야심을 얻게 되면 이상 일어날 먼지가 없기에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맑은 마음을 유지하며 업과 환상에 휘말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주의 근원과 같이 맑음 마음에 세상만사가 그대로 비쳐

그 속에 있는 모든 이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세상 속에 있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속에 스며있는 원인과 결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일반인들과 같은 감각이나 사유로 보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자의 마음 이미 인간의 마음을 벗어나 우주의 근원같은 불성이 되었기에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불성(신성)으로 우주와 합일하여 비춰보는 것이다

 

조용히 반야에 들어 세상의 일을 보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물아일여(物我一如)의 상태가 되고

맑고 깨끗한 반야심에 세상의 진실과 이치가 비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은 자가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밝히는 비밀이다

 

그러면 성자들이 본 진리는 무엇인가?

그분들은 중생들과는 달리 완전한 시각으로 우주의 실상을 본다

일반인들이 60%정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깨달은 분은100%에 가까운 시각으로 우주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현실을 보아도 일반인들은 악이 선을 이기는 세상을 보고 세상이 무의미하고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성자들은 악한 사람들이 마음속에 쌓인 애착과 탐욕으로 삶이 불안하고

죽어서는 유계를 헤매며 미물로 떨어지는 과보까지 보기 때문에 세상일이 완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깨달은 자와 중생의 시각은 장님과 눈을 뜬 사람 정도의 차이가 있다

중생들은 세상의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을 물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을 장님과 같다고 했다

장님들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눈을 뜬 한 사람이 본것을 다 알지 못한다

따라서 세상의 지식인이 다 모여도 깨달은 자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항상 안다고 하는 자에게 그가 안다고 하는 일의 실상을 묻는다

그러나 현실에 나와있는 모든 지식은 실상을 본것이 아니라

상상이나 가정, 혹은 전해들은 이야기이기때문에 분명한 답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현대지식의 정체이니 그래서 눈을 뜬 자가 세상일의 실체에 대해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과학은 현상 속에 존재하는 인과의 이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왜 진리가 존재하는지

왜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기준과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하고

현대문명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여러 성자들이 본 우주의 실상과 진리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어

그 진실성이 의심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첫째, 문화적 배경 차이로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 달리 표현되었기 때문이며

둘째, 성자들의 가르침이 경전이 만들어지기까지 이삼백 년 동안 구전되면서 진리의 실체를

모르는 제자들에 의해 왜곡되었고

셋째, 가장 중요한 이유로 인류사에 나타난 성자들의 깨달음정도가 달랐던 까닭이다

 

 

인류역사에는 네 분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존재한다

석가, 예수, 노자, 소크라테스가 그분들인데 차이는 있지만

모두 우주의 실상과 완전한 진리의 실체를 보셨다

이분들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완전한 뜻과 진리의 세계를 본 것은

마음이 바른 삶으로 완성되어 해탈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 업이 거의 사라지고 완성에 가까워지면, 꼭 해탈에 이르지 않더라도

그 마음에 우주의 실상이 비치기 시작한다

이때 진리를 비추는 마음거울업이 사라진 정도에 따라서 맑기가 각각 다르다

 

완전한 해탈을 이룬 분은 항상 여일한 반야지경에 머물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우주의 실상과 그 속에 있는 이치를 밝히게 된다

그러나 마음에 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분들은 진리가 보이기는 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토론을 통하여 미진한 것을 밝혔던 것이다

 

이처럼 인류사에 4대 성인이 나타나 진리를 밝혔으나 그 정도는 모두 같지 않다

그중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정각을 선언하셨으나 예수는 스스로

인자라 칭하였으며 소크라테스와 노자는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분들이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은 단순한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표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지가 가장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분들의 깨달음이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처님의 깨달음과는 차이가 있었으며 그 명확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성자들은 누구에게나 당신이 보았던 진리로 이루어진 뜻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우주가 하나인 이상 실상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같은 뜻과 진리의 세계를 보았다면

그분들은 모두 우주의 진실을 깨달은 성자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진위 여부는 그분들의 말속에 우주를 감싸고 있는 뜻과 진리의 세계가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명확성의 차이는 있으나 그분들의 말씀을 보면 한결같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우주의 진리와 삶과

내세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생명의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성자들의 공통점은 그 마음이 한점 흐림 없는거울과  같아서 세상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비치는 대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같은 소리를 하며 없는 것을 지어서 하는 말은 절대 없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는 진실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평생을 수많은 진리에 대해 설했으면서 아무 말도 한것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자연 그대로를 표현했을 뿐

단순한 생각이나 허위를 말한 적이 없다는 표현이다

따라서 성자들은 누구를 만나도 보이는 대로 설명하니 막히지 않았으며

상대의 실상과 어긋난 관념이나 거짓을 지적할 수 있었다

 

금강경에 깨달음에 관한 진실을 묘사한 구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여래에 관한 구절이다

 

"여래는 세상의 있는 일에 대해 말했다

여래란 있는 일을 참으로 말하는 자이고

있는 일을 그대로 말하는 자이고

있는 일을 같게 말하는 자이고

있는 일을 속이지 않고 말하는 자이고

있는 일을 틀리지 않게 말하는 자이다

(如來說 一切諸相, 如來是 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

이것이 바로 실상을 보는 깨달은 자의 경지이며 깨달은 분들의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성자들이라 해도 한번도 보지도 못한 일은 알 수가 없다.

깨달은 자는 눈에 비치는 진실과 그 속에 있는 이치를 보기에,

한번도 보지 않는 미지의 세계와 환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성자에게 세포 속에 미토콘드리아가 어떻게 분열하는지 자동차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물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이 실험에 참가해 세포 핵분열을 관찰하고 자동차를 분해해 보면 그 속에 있는

생명의 이치와 자동차의 구조역학을 금방 알게 된다

천체물리학이나 생체의학에 대한 지식 등 모든 현대학문이나 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분들은 우주에서 최고의 컴퓨터이기에 아무리 미지의 혼돈 속에 들어가도 실체를 보면 거기에 내재된

완전한 뜻과 이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성자들은 업의 충동에서 벗어나 있기에 어떤 현상을 보거나 만나기 전에는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맑은 상태 속에 머문다

이것이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반야심을 유지하는 경지이다

 

이를 일반인이 보면 텅 비어 무지한 상태로 보이지만 어떤 대상이 들어오면 그 순간 맑은 마음속에는

진실이 비치게 되어 그 이치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와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상대가 관념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소크라테스 산파술의 정체이다

그의 맑은 마음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이고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나 환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를 만나기 전에는 그의 지식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대화를 통해 그 진실을 알게 되고

이치를 깨달아 상대의 허구와 무지를 노파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절대적 진리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성자들의 생전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요즘 종교들은 성자들을 미화하고 장엄화해 그분들이 살아있을 때는 엄청난 위광을 내뿜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분들의 행적은 기적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한번 만나기만 하면 모두 감복을 받아 진리를 받들게 되었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렇게 몸에서 빛이 나고 대환영을 받았는데 그분들의 제자들이 손꼽을 정도이고 가르칠 곳이 없어

세상을 헤매다 비참하게 돌아가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석가는 황량한 길가에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으며

노자는 말없이 국경너머로 사라졌던 것이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 환영받지 못한 성자들의 진짜 모습이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듯이

완전한 진리의 길은 맑고 청정해 탐욕과 애착을 가진 중생즐겨찾지 않는다

그래서 성자들은 항상 외롭고 힘든 삶보내셨던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의문을 갖는다

지금 종교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여기에 현 종교의 비밀이 있다

성자들이 가르친 진실한 가르침은 워낙 맑고 깨끗해

오직 정신이 맑은 소수의 제자들만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수백 년이 흐르면서 가르침이 변질되고 신앙화되면서 종교는 세속화했고

변질된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지금 종교에는 성자들이 가르친 바른 이치 대신

우상과 기복과 미신이 성행하고 있고 이를 이용해

성직자들은 배부르고 신자들은 불행해지는 말법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성자들은 항상 어둠과 혼란 속에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을 보고

그들의 무지와 탐욕을 밝히며 양심과 진리의 길을 가르쳤다

예수는 '주를 외치지 말고 신의 뜻을 행하라'하셨으며

부처는 '모든 사람은 고귀하니 진리에 따라 바른 원인을 지어라'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성자들은 삶의 진실과 바른 이치를 밝혔지만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은

자신의 죄와 위선이 드러날까 두려워 이들을 모함하 해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자들은 완전한 진리와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고 모든 집착과 두려움에서 벗어났기에

어떠한 세상의 권력과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세상을 위해 진리를 밝히게 되며

이러한 완전한 자비와 사랑이 인류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그럼 일반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깨달은 자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연 그분들이 경전에 나오는 것처럼 진리를 설하면 천상의 신들과 천사들이 와서 찬양하며,

천상과 지옥의 모습을 중생에게 영화처럼 보여주고 천리 밖을 보고 만리 밖을 들을 수 있었을까?

물위에 뜨고 하늘을 날며 물로 포두주를 만들고 빵 한 조각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여 살렸을까?

 

 

결론부터 말해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러한 능력이 일상적인 것이라면 예수의 제자들이 배고파 풋밀을 훔쳐 먹었을리가 없으며

하늘을 날아 다녔다는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가 도적에게 맞아 죽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제자들이 전도하는 과정에서 성자들의 가르침을 좀 더 호소력 있게

전하기 위해 미화한 신화인 것이다

 

 

성자들도 인간이고 인간의 몸을 가진 이상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허공을 날 수 없고 물위에 뜰 수 없으며 늙으면 병에 걸려 죽어야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죽음의 순간에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고뇌했던 것이다

 

만약 그분들이 생사를 초월한 자유자재한 초능력과

상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졌다면 그분들은 지금까지 남아

인류를 구원했을 것이며 오늘날 같이 어지러운 세상을 남겨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신이나 성자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주체인 인간 스스로가 지어가고 있는 것이다

 

 

목련존자가 부처님에게 신통을 부려서 가난을 면하자고 하지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에게는 해야 할 일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면 바른 법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될 것이며,

생각해서는 안 될 일과 행동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바른 법이 오래 머물 수 없다."(사분율)

 

길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이 깨달은 자의 삶이다

아무리 신통이 있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면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을 지키는 진리 앞에 신통을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은 자의 진정한 능력은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신통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실상과 완전한 진리를 밝히는데 있다

 

올바른 삶의 이치에 대해 밝히면 사람들은 어둠과 불행에서 벗어나고 세상 전부가 밝아진다

 

바른 삶을 알게 된 사람들은 세상을 밝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을 축복하여 세상 전체를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통으로 한가지 일을 이루는 것보다

리를 밝혀 세상사람들이 모두 바른 이치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천만 배나 큰 공덕이 된다

 

성자들은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완전한 법계의 실상과 진리를 밝혔기에 인류는 어둠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깨달음 중 가장 큰 힘이 바로 진리를 밝히는 능력인 것이다

 

오늘날 부처님의 경지로 대원경지,평등성지,묘관찰지,성소작지와 같은 거창한 개념들이 많이 나와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는 전혀 없던 말로서 후대에 불교가

이론화되고 관념화되면서 나타난 개념이다

 

부처님이 모든 업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후 하신 일은

우주의 실상과 이치를 보시고

자신과 세상을 구하는 바른 법을 펴신 것 밖에 없다

 

탁발하여 배를 채우고 인연에 따라 진리를 가르쳤을 뿐

초능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기적은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살아생전 자신의 조국이 망하고 민족이 살육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분들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완전한 우주의 질서와 생명의 길에 대해 처음으로 밝혔으며

인류를 위해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노력했다

 

성자들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진리를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완전한 용기와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한 진리를 보는 능력은 오직 소수의 깨달은 분들에게만 주어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중생의 운명이며 완전한 하늘의 뜻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진리의 실체를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생명의 질서에 따라 조화있게 살다갈 것이며

세상은 저절로 질서가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눈앞의 이익밖에 보지 못하기에 욕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 속을 헤매다

동물처럼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깨달은 이를 세상에 나게 하여

진리의 빛생명의 길을 전하여 세상을 밝히고

인간의 삶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깊은 뜻이 있기에 세상은 완전한 것이며 성자들을 인류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태어난 수많은 생명의 씨앗이 있으며

이들은 완전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잘 지은 것은 완성으로 나아가고

잘못 지은 것은 쭉정이가 되어 소멸하는 과정을 걷고 있다

그중 우주의 뜻과 이치에 따라 완성의 고리를 돈 씨앗은 마침내 우주의 열매가 되어

다시 신성한 근원과 합일하는데 이러한 열매를 우리는 해탈이라고 한다

 

해탈을 증득했다는 것은 곧 이 우주에 태어난 신성의 씨앗이

다시 우주의 근원과 동일한 상태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깨달은 이를 천상천하를 통틀어 가장 완전하며 존귀한 분,

바르고 보편타당하게 아는 이,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되면 해탈한 영혼은 생사를 자유자재로 하게 되는데

다시 태어날 경우 깨달은 자로 나게되며

돌아갈 경우 우주의 근원인 창조의 세계와 합일한다

이것은 완전한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나타난 신성한 씨앗이 열매를 맺었으니

다시 근원과 합일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서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가 깨달은 이는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불교가 자칫 오해하기 쉬운 대목 중 하나이다

만약 이것을 지구에만 매달려 해석한다면

불교는 세상을 무명의 소산인 환으로 보고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고해로 보는 염세적 종교가 되고 만다

 

윤회는 중생의 경우 휘둘려 돌아가지만

깨달음에 이른 자는 윤회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자신의 후생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칭하는 명호로 가장 많이 쓰이는 여래의 원 뜻은

'가로 옴이 여여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 우주는 완전성이  계속 순환하는 과정이니

깨달은 이는 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다시 완전한 세상을 짓고

완전한 열매를 맺는 완전한 우주의 율동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것이 깨달음의 실체이다

 

 

 

(책)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中

 

별을계승하는자

2012.04.03
14:14:49
(*.41.147.241)

멋진글들감사합니다!!역시베릭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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