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목격자' 미국인 돌린저, 5.18 회고록 발간 ㅡ전두환 헬기 사격 계엄군의 총격 / 무고한 시민에게 발포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어떻게 헬리콥터에서 사람들의 등 뒤에 총을 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죽도록 구타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총검으로 죽이고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할 수 있나? 그런 게 정당방위인가?”
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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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목격자' 미국인 돌린저, 5.18 회고록 발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전한 독일인 힌츠페터를 기억하시는 분 많을텐데요.
당시 그와 함께 현장을 목격한 미국인 청년이 있었는데 60대가 된 그가 그때의 기억을 담은 회고록을 국내에서 출간했습니다.
또 한 명의 '푸른 눈의 목격자'를 김애린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5.18 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힌츠페터 옆에 서 있는 한 20대 청년.
당시 평화봉사단 활동을 왔다가 5.18을 목격했던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 씹니다.
시민군의 목소리를 통역하는 등 외신기자들의 취재를 도왔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돌린저 씨는 한인 교회에서 5.18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직접 꾹꾹 눌러쓴 연설문에는 5.18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계엄군이 가게로 사람들을 쫓아가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하게 때렸다.", "헬리콥터가 금남로에서 군중들에게 총을 쏘며 시내를 날고 있었다.", "학생, 교수, 일하는 사람 모두가 하나였다.
우리는 광주 시민이었고, 광주였습니다."
외국인으로선 유일하게 시민군의 항쟁지였던 전남도청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제 60대가 된 돌린저 씨가 자신의 한국 이름을 새긴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을 내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습니다.
[데이비드 돌린저(임대운) : "제가 당시에 했던 행동 단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어떤 외국인보다 해야 하는, 해야만 했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최용주(번역자) : "(도청에 남았던 이유는)혹시라도 계엄군들이 영어로 무전을 교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시민군들이 판단하고 통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돌린저 씨에게 요청했던..."]
또 한 명의 '푸른 눈의 목격자', 돌린저 씨의 회고록은 42년이 지난 5.18의 참상을 아프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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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임대운..42년 전 5월의 광주에서 다시 태어났다네
5·18 도청에서 하룻밤 보낸 유일한 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힘든 시절 돌아보는 고통 커"
“나는 42년 동안이나 회고록을 쓰고 또 썼습니다.”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66)가 1980년 광주항쟁에서 42년이 흘러서야 회고록을 낸 이유를 설명한 첫 문장이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내(가 경험한) 이야기가 5·18을 둘러싼 역사의 ‘공식적인’ 일부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회고록 출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돌린저는 광주항쟁의 첫날(5월18일)부터 마지막 날(5월27일)까지 현장을 목격한 소수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으로 쳐들어올 것이란 소식을 듣고 광주 시민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며 도청에서 하룻밤(5월24일)을 보낸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미생물학·면역학 박사로, 미국에서 감염병 진단법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평화봉사단으로 영암보건소 근무
돌린저 회고록은 광주항쟁 42주년을 앞둔 2022년 5월 둘째 주에 한국에서 영문판과 한국어판이 동시에 출간됐다.
영문판은 온라인서점 아마존에서 한국사 부문 1위에 올랐다. 회고록 제목은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다>(Called by Another Name), 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펴냄)이다.
그의 회고록은 앞서 2020년 5월 돌린저의 친구인 폴 코트라이트가 쓴 <5·18 푸른 눈의 증인>(원제는 Witnessing Gwangju)에 이어 외국인이 쓴 광주항쟁 회고록으로는 두 번째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8678.html). 둘 다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낸 최용주 박사(사회학)가 번역했다.
‘또 하나의 이름’ 임대운은 돌린저가 22살이던 1978년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어 선생님이 지어줬다. 숲(林)과 큰 구름(大雲). 돌린저는 “이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돌린저는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지 3년 만인 최근 다시 가족(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한겨레21>은 그의 한국 방문에 앞서 전자우편으로 문답을 주고받았고,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인 5월11일 서울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1980년 당시 전남 영암의 보건소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의 인생은 ‘5월 광주’와 함께 큰 변화를 맞았다. 5월16일 평화봉사단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광주에 가면서였다.
그날 저녁 광주역에서 전남도청까지 학생들의 평화적 횃불시위 행진을 지켜볼 때까지만 해도 향후 벌어질 비극은 상상조차 못했다. 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5월18일,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지면서 영암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일찍 끊겼다.
돌린저는 이날 광주의 거리 곳곳에서 방독면 차림의 무장군인들이 저지르는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들었다. “서울의 시위와 다르지 않았는데도 군인들이 길거리에 보이는 젊은이들을 진압봉으로 잔인하게 구타하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해 잡아들였어요.” 돌린저는 군인들이 왜 그렇게 잔인하게 진압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했다.
5월19일 첫차를 타고 영암으로 돌아가서도 돌린저는 군인들의 잔혹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5월21일, 그가 직무교육을 받으러 다시 광주로 향한 날, 광주의 모든 전화 회선이 끊겼다. 버스도 나주에서 멈춰 섰고, 더는 갈 수 없었다.
돌린저는 나주에서 광주까지 걸었다. 이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자, 군부가 처음으로 시민에게 발포한 날이었다.
돌린저는 이날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상공을 낮게 맴돌던 군용 헬리콥터에서 군인들이 몸을 내밀어 지상의 시민들에게 총을 쐈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헬기 사격 뒷받침할 총상자 엑스레이 사진
헬기 사격 증언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잠시 후퇴한 5월22일 돌린저가 외국 기자들의 취재를 도우려 함께 간 광주기독병원에서도 뒷받침된다. “의사들이 총상을 입은 한 젊은이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줬어요. 총알이 왼쪽 어깨로 들어가 (몸을 관통해서) 오른쪽 엉덩이로 빠져나간 흔적이 뚜렷했습니다.” 이런 탄도는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쏜 총탄에 맞은 정황의 증거다.
돌린저는 “다른 총상 엑스레이 사진에는 총알이 몸속에서 부서져 있었다. 국제법으로 금지된 연성탄”이라고 했다. “총알이 몸속에서 잘게 부서지면서 장기를 파괴합니다. 적국과 전쟁할 때도 쓰면 안 되는 총알이에요.”
전두환씨가 죽을 때까지 헬기 사격을 부인하고 계엄군의 총격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에, 돌린저는 “거짓말이다. 무고한 시민에게 발포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떻게 헬리콥터에서 사람들의 등 뒤에 총을 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죽도록 구타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총검으로 죽이고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할 수 있나? 그런 게 정당방위인가?”라고 되물었다.
돌린저는 당시 광주에 있는 동안 외국 기자들의 취재와 통역을 도맡다시피 도왔다. 광주의 참상을 처음 세계에 영상으로 알린 독일 공영방송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도 이때 만났다. 그가 기자들을 안내한 전남대병원과 기독병원은 응급실뿐 아니라 건물 바깥 공터까지 주검과 부상자로 넘쳐났다. 그는 회고록에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썼다. “이곳에 남아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돌린저는 42년 전 일을 어떻게 정확하고 생생하게 회고록에 담을 수 있었을까? 그는 “수많은 메모와 미국의 집에 보낸 편지, 그리고 다양한 버전의 회고록 초안들을 보관했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끊임없이 기억하려 했다”고 말했다. 증언자로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당시 일을 기억하는 건 힘들지 않았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그 시절 기억을 되돌아보고 글로 쓰는 고통이었지요. 내가 봤던 사망자들, 내가 만났지만 그 뒤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보면 절로 눈물이 나왔어요.”
극단적 충격과 공포가 심리적 상흔을 남기진 않았을까? 돌린저는 “사람들이 내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었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충격에)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결심을 굳건하게 다지는 데 활용했다”고 말했다.
돌린저는 회고록에 “광주는 내가 다시 태어난 곳”이라고 썼다.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광주는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나의 눈을 틔워준 곳입니다. 광주는 내 삶을 돌아보게 했고, 대학원에서 의료과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에 힘을 실어줬죠. 광주항쟁은 내가 다른 사람을 돕고 살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살지를 결정하게 한 사건이었어요. 나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1980년 5월22일 광주 시내 병원마다 부상자들이 밀려든 가운데 전남대병원 옥외에 마련된 임시병상에 부상자들이 누워 있다. 데이비드 돌린저 촬영. 1980년 5월21일, 데이비드 돌린저가 전남 나주에서 광주까지 걸어가던 중 찍은 사진. 시민군이 탄 트럭과 버스의 앞 택시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돌린저가 사진 찍는 것을 보고 곧장 다가와 필름을 빼앗으려 했으나 돌린저는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완강히 거부했다. 1980년 5월21일, 데이비드 돌린저가 전남 나주에서 광주까지 걸어가던 중 찍은 사진. 시민군이 탄 트럭과 버스의 앞 택시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돌린저가 사진 찍는 것을 보고 곧장 다가와 필름을 빼앗으려 했으나 돌린저는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완강히 거부했다.나를 ‘확장된 가족’으로 받아준 여성들
그는 42년 전 광주 시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민주주의와 미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지요.
나는 주로 학생과 노동자를 만났는데, 모두가 너무 친절했고 항상 나의 안전을 걱정하며 먼저 챙겨주려 했습니다.” 그는 특히 “광주항쟁과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여성의 힘이 과소평가된 것 같다. 사람들이 직접 봤다면 여성들이 얼마나 강인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결코 자기 자신(ego)을 내세우지 않았고 무엇이 옳은지 잘못인지 알았으며, 마치 엄마나 자매처럼 항상 나를 ‘확장된 가족’의 일원으로 여겼습니다.”
돌린저는 1980년 광주의 비극에 대한 ‘미국 책임론’에 대해서도 분명한 의견을 밝혔다. “당시 지미 카터 정부는 엘살바도르에서 했던 것과 매우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간접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미국인이 아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미국 정부가 광주의 사건을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은 지미 카터 정부가 인권을 대변한다던 내 생각과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비밀문서를 계속 발굴해 진실을 밝히고 미국에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가 말한 엘살바도르 사례는 미국이 1980년부터 12년간 이어진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군부정권이 좌파 저항세력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것에 눈감고 돈과 무기를 지원한 흑역사를 말한다. 영화 <로메로>로 잘 알려진 오스카르 로메로 주교도 극심한 빈곤과 인권 억압에 신음하는 민중을 돕다가 미사 집전 도중 무장괴한들의 총격에 숨졌다.
돌린저는 광주항쟁이 자신과 인류에게 “모든 인간을 생각하는 큰 비전을 갖게 했다”며 “광주에서 배웠고 지금도 배우려는 교훈은 인내심”이라고 했다.
“광주 시민의 희생이 결실을 보기까지(1987년 6월항쟁과 민주화) 7년이 걸렸고, 여전히 더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광주 시민은 함께 뭉쳤고 하나처럼 행동했지요. 우리는 모두 각자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한목소리를 내야 세상이 들을 수 있고 변화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돌린저는 “민주주의란 양분이 필요하고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기본적 인권이 부인돼선 안 됨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소수자를 이해하고 보호하며 전체를 인식하되 개인이 전체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도 인정하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우리 자신을 북돋우며 서로 도울지를 이해할 때, 개인과 권력과 돈이 아니라 휴머니티(인간애)를 강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음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월출산의 모든 길을 다 알았다”
돌린저는 열흘 남짓 한국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열리는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고 지인들을 만나며 영암에도 찾아갈 계획이다. “한국 음식 정말 맛있어요. 아내와 아들도 너무 좋아합니다. 영암 월출산도 정말 멋진 산이지요.” 그는 40여 년 전 영암보건소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월출산에 자주 올랐고 절의 스님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월출산의 모든 길을 다 알았다”고 말할 때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은하수
- 2022.05.21
- 13:31:23
- (*.39.244.220)
베릭
- 2022.05.21
- 13:50:54
- (*.235.178.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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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묘지, 정치적으로 변질된 것 같아 안타까워"
기사내용 요약
'푸른눈의 증인' 데이비드 돌린저 제42주년 5·18 기념식 참석
"다른 목적 가진 사람들이 묘역 둘러싼 것 같아, 옛날로 돌아갔으면"
[광주=뉴시스]이영주 기자 = "마지막 방문 당시만 해도 영령을 기리는 숭고한 장소였는데, 정치적으로 바뀐 듯한 모습이 못내 안타깝습니다."
'5·18민주화운동 푸른 눈의 증인' 데이비드 돌린저(David L. Dolinger·69·한국명 임대운)는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희생된 영령을 기리는 공간이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돌린저는 귀국을 위해 서울로 돌아가기 앞서 시간을 내 아내와 아들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민주묘지를 방문했던 2006년과 비교해 오늘날에는 정치적인 모습들이 많이 묻어난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만 해도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공간의 역할을 다했지만, 오늘날에는 추모보다 상징에 초점을 둔 듯하다고 아쉬워했다.
대통령 방문을 위해 수많은 경호 인력이 투입된 점에 대해서도 "일반적이지 않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묘역은 숭고한 희생을 치른 이들이 잠들어있는 신성한 곳이다.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묘역을 둘러싼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며 "마지막으로 묘지를 찾았던 그 때가 그립다. 묘지가 변할 수 있다면 당시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5·18 항쟁 당시 미국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일원이었던 그는 오월 광주 한복판에 서 있었던 '푸른 눈의 목격자'로 꼽힌다.
그는 시민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외신기자와 미 대사관에 항쟁 참상을 널리 알렸다. 제2차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린 24일에는 '5·18 최후 항전지'인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우며 라디오 영어방송을 통한 계엄군 동향을 시민군들에게 전했다. 생사를 함께 하겠다며 최후항쟁지 도청을 지킨 유일한 외국인이다.
폴 코트라이트 등 동료 봉사단원 2명과 함께 뉴욕타임스 헨리 스코트 스토크스 등 외신기자들의 '귀와 입' 역할을 했다. 동료들과 함께 전남도청 안팎에서 계엄군의 최후 진압으로 숨진 시민군 시신 수습을 돕기도 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 미국인 돌린저, 5.18 회고록 발간 ㅡ전두환씨가 죽을 때까지 헬기 사격을 부인하고 계엄군의 총격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에, 돌린저는 “거짓말이다. 무고한 시민에게 발포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떻게 헬리콥터에서 사람들의 등 뒤에 총을 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죽도록 구타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총검으로 죽이고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할 수 있나? 그런 게 정당방위인가?”라고 되물었다.
https://cp.news.search.daum.net/p/115969833
<김군> ― 5·18의 거짓된 오명과 권력의 광기를 넘어 불의·폭력에 대한 강인한 저항으로
.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