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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미 제국의 두 기둥 - 한국인이 외면하는 제국주의 미국 4
양대인 선교사 이야기
최천택. 김상구 공저
기사입력: 2015/12/17 [01: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제국의 팽창과 기독교 선교

 

서구 제국들이 식민지를 통하여 제국의 팽창을 시도할 때, 그 침탈과정을 합리화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을 터이다. 이 점은 식민지인뿐 아니라 본국인들에도 필요한 작업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은 미개한 식민지인들을 문명화의 길로 인도한다고 대개 미화한다. 이때 필요한 도구가 바로 종교다. 실제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식민지인들의 민족적 모순을 은폐시키고 본국의 제국주의를 침투시키는데 선교사들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기독교와 제국주의의 관련에 대하여 서로 분리하여 파악한다. 기독교가 제국의 첨병 역할을 했다고 긍정하는 이들도 한국만은 예외로 친다. 근대적인 학문을 들여왔으며 그러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었고, 병원도 만들었으며 서양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룬다. 한국의 경우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제국주의 세력과 관련이 없는가? 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선 대한제국의 병탄과정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야만 한다. 앞글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한국은 미··3국의 합의하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일제 강점하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인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대한정책을 알아야할 필요성이 있다. 선교사들이 순수한 열정으로 한국에서 선교를 했는지 혹은 자국의 정책 방향에 따랐는지 하는 점이 파악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대한 정책과 선교사들의 일본에 대한 정책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1884년 이후부터다. 이 무렵 한국의 상황은 아주 열악했다. 정치는 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그리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논쟁 등으로 국운이 흔들리고 있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은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이 무렵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 마르타 헌틀리(Mrs. Matha Huntly)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19세기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시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14세기의 유럽을 가리켜 인간 상실의 시대라고 한 말을 19세기 당시의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만하다. 실제로, 19세기의 한국과 14세기의 유럽은 많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전 시대의 에너지는 다 소진되어 버렸으며, 수 세기 동안 사회를 지탱해주던 철학적 지주도 날아버렸고, 옛 종교 또한 새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부적합했다.양반계급과 관리들이 가혹하게 수탈해 가는 실정 아래서 일반 백성들은 산업을 발전시킬 의욕을 잃어 버렸다.

 

당시 조정에서는 억울한 사정을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상소나 신문고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지만 백성들은 더욱 학정에 시달려야했으며, 어떤 이들은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양자택일을 놓고서 많은 사람들은 반기를 들거나 종교에 귀의했는데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불안을 조성하였다. 대규모적인 반란이 1804, 1811, 1813, 1817, 1833년에 있었으며, 1862년에는 23일 동안 피비린내 나는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885년에는 여주와 원주에서 일련의 봉기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알렌, 게일 등 초기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특별한 종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맥킨지(F. A. Mckenzie, 1869-1931)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 종교가 거의 없고 몇 개의 절과 소수의 중이나 보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592년의 임진왜란 당시에는 몇몇 일본의 불교도들이 반역한 사실이 있어서 불교는 불신을 당해왔고, 승려들은 도성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관직에 있는 젊은이들이 유학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생활규범의 이론이요 벼슬에 오르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백성들의 중요한 종교는 무속이었는데 그것은 악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유모의 도깨비 얘기가 민감하고 상상력이 많은 어린이의 마음을 어둡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속은 한국인들의 영혼을 어둡게 하였다. 무속의 신은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며,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며, 희망이 아니라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서구보다 500년 이상 뒤 떨어진 나라, 백성들은 미신에 빠져있고 지배계급은 가혹한 수탈자인 나라, 이것이 선교사들의 한국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었다. 그러면 이 무렵 미국의 대 한반도 외교정책은 어떠했을까?

 

미국의 해외정책은 먼로주의가 상징하듯 19세기 후반까지는 고립주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엽 잉여제품 처리와 축적된 자본의 재투자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외교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한다.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을 계기로 미국은 본격적으로 태평양 지역에 진출을 시작하는데, 하와이를 거쳐 중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특정국의 독점적 지배를 막기 위하여 문호개방정책을 내세웠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미국은 영국·일본과의 연대를 추진했다.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진출이라는 더 큰 이해관계의 테두리 속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본국의 외교노선에 따르면서 선교기반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으며, 정교분리선언에 의한 교회의 비정치화를 선택했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이유가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친일을 표방했던 것은 아니며 특히 초기 선교 시에는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했던 선교사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까지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일본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국 정부와 미국선교본부의 공식입장을 나타낸 문서로는 1897511일자로 발표된, 주한 미국영사관 거주지 총영사 존 실(John M. B. Sill)의 주한 미국 선교사에 대한 지시문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스피어(Robert E. Speer)1897년에 작성한 방문보고서 등이 있다.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자 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선 철저히 외면하며 일제의 정책에 따를 것을 주문했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보다 선교가 우선이었다. 선교사들의 친일 행위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장로교 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J.Brown)은 일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일본 통치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거기에는 네 가지의 태도가 있다. 첫째는 적대요, 둘째는 무관심이요, 셋째는 협력이며, 넷째는 충성이었다. 넷째의 충성은 내가 믿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온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예와도 일치된다. 그리스도는 일본보다 더 악한 정부에 자기의 충성을 바쳤고 그의 사도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교훈, 로마서 13장의 말씀과도 일치된다. 평양에서의 한국 선교회에서 이 네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충분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충성의 입장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멕켄지(F.A.Mckenzie)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복종하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당신들은 지금 무력으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라당신들도 그들(일본인)만큼의 자치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그리고 피셔(J.E.Fisher)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준법적이요, 수헌적(守憲的)인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을 뒤 밀어서 일정(日政)에게 항거하거나 불복케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근본 교리에 배치되고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된다.라고 주장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정책이란 이름 아래 이와 같이 일본의 종교정책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정책을 비호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근대 개신교의 정교분리 정책은 결과적으로 개신교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민족주의 논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한국인식과 인종차별

 

선교사들이 정말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파악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들은 극히 정치적이었다. 선교사들은 노골적으로 친일의 태도를 보였다. 을사늑약이 조인되자 선교사들은 새 지배자에게 복종하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시오라고 조언하였으며 감리교 감독 해리스는 이토의 통치는 상찬을 받기에 마땅하다고 했고 존스나 스크랜튼 같은 이는 선교사는 통감의 선정에 성실한 동정을 품고 조선인의 도덕적·정신적 개발을 위함에 노력하고,

정치상의것에 대해서는 초연의 태도를 갖는 것을 상궤(常軌)로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고의 밑바탕에는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과 경멸감이 깔려 있었다.더럽고 게으르고 도적 같은조선인의 정신적·사회적·정치적 질병을 치료해 주려고 왔다는 시해의식과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지배에 의해서 조선의 문명화가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기본적인 인식은 선교전략이나 미본국의 정책방향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두어, 후진국 문명화에 대한 선진국의 책임론을 내세우는 제국주의의 논리와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한국인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다.

 

192512월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던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과도한 노동을 줄여 달라며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무기정학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학원장 길보른 선교사를 포함한교수 탄핵운동을 벌이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원 측은 두 명에게 정학을10명에게는 퇴학처분을 내려 사건을 수습했다

 

192611월에는 구세군 한국인사관들이 인종차별적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가 출교 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인사관들은 구세군 사령관이던 부드의 내한에 맞춰 내려 했던 진정서를 통해 한국인 사관들의 참정권 확대와 봉급·승진 등의 차별 철폐, 구세군의 재정 및 정책 공개, 한국인을 무시하는 외국인 사관의 정리 등을 요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권력 핵심과의 밀착은 정교유착을 낳으면서 선교사들은 어느새 이 땅의 세도가로, 어른으로, 혹은 나으리라는 대인(大人)으로 군림했다. 소위 양대인(洋大人)의 등장이다. 조선과 일제 당국으로부터 비호를 받으며 부와 권력을 누린 선교사들은 대부분 한국인을 멸시하는 편견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허시모(許時模·28·C. A. Haysmer)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허시모 선교사는 자신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다 들킨 김명섭(12) 군의 얼굴에 염산으로 '됴적'(도적)이라고 새겼다.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실리면서 한국인의 분노를 샀다. 다음은 사건 발생 다음 해, 동아일보에 보도된 기사 내용이다.

 

미국인 허시모(C. A. Haysmer)가 조선 어린 소년 김명섭에게 인도상의 용서 못할 무도한 사형(私刑)을 감히 행하고도 일 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양심에 하등의 가책이 없이 방약무도한 태도로 순안사회에 낫을 들고 지내 온 사실이 온 세상에 폭로됨에 따라그때 김명섭은 얼굴에 독약을 발리우고 하루 밤을 지나매 견딜 수 없이 아프고 저림으로 허둥지둥 허시모에게 찾아간 즉, 그 자는 고민하는 모양을 보고도 오히려 만족치 못하였는지 일주일 동안 자기 과원에 제초를 하라고 하며 큰 호미를 내어다 주었다는데 그를 데리고 갔던 그 모친은 어이가 없어 그 잔학한 행동을 책망한 후에 명섭이가 약을 좀 발라 아픔을 덜어달라고 한즉, 그는 도리어 도적질한 놈이 무슨 잔소리냐 하며 욕설을 하며 때리기까지 하여 보내고 말았음으로 영영 없어지지 못한 도적이라는 판을 박게 된 것이라고 하며 이와 같은 끔찍한 소리를 들은 시민들은 더욱 분개하여 그 자의 얼굴에다 독약으로 그와 같이 하자느니…》

 

결국 허시모는 경성 고등법원에서 징역 3월에 집행유예 2

년을 선고받은 뒤 조선인에게 공개 사과문을 낸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1925년 평양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밖에도 선교사들은 여러 구타 사건과 성추행에 연루되었다.

 

사실 이러한 예는 한도 끝도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으로 알려진 미국인 헐버트(轄甫, 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의 경우를 보자.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19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시기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베델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195031일에 대한민국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대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조선인 혹은 조선 문화를 멸시했다는 것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저서한국사(History of Korea, 1905)2권은 한국 전통 문화의 몰락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퇴보하는 왕국이나 죽어가는 문명을 위해서 통곡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철학이다.한국에서 지금 낡은 것들이 소리 나게 죽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술이 옛날의 술병에 부어지고 있다.

 

또 다른 저서인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는 한국 전래의 무속을 한국인들에게 씌워진 저주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불교 사원의 잔인한지옥도(地獄圖)들이 한국 형벌 제도를 잔혹하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등 한국의 전통 문화를 청소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한국을 사랑한다는 헐버트와 같은 소위 문명의 전도사들 조차 그들의 기본적인 인식은 한국이 유일하게 진보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 문명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의해 한국의 전통문화들이 죽어가는 현실은 그들과는 전혀 무관한 별개의 세계였다.

 

선교사의 양대인화는 한민족의 종속화로의 전락이었다. 형이상학적 가치관도, 형이학적 가치기준의 결정도 모두가 서양인의 몫이 되고 말았다. 노예로의 삶이 우리가 받은 유산이다.

 

  선교사와 돈

 


이제부터 돈 이야기를 좀 하자. 선교사들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이기를 얻게 하는 봉사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안락한 생활이 기독교 문명의 결실이라는 것을 내세워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조차도 선교전략의 하나로 합리화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선교사들이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나하는 좋은 예가 있다.

 

2009130, 서울 종로 5가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뜬금없이 '지리산 선교사 유적 조사와 근대적 가치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기독교계가 지리산에 옛 선교사들의 휴양 시설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고, 더 나아가 복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개최한 학술행사였다. 겉모습은 심포지엄이었으나 내심은 지리산 유적의 보존과 복원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행사다.발제자와 토론자의 주장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리산 노고단 선교 유적은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선교사들의 피난처였다. 단순한 쉼의 장소만이 아닌 중요한 선교 전략을 나누는 수련회 장소였고, 신구약 성경이 번역된 장소다. 한국 교회의 유산인 선교유적을 보존해야 하고 복원까지 해야 한다." (김준곤 목사. CCC 총재)

 

"지리산 유적은 기독교 수난과 성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보존해야 할 이유가 있다. 간단한 기념 표식이나 기도시설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안이지 싶다." (이만열 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복원은 문화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일이다. 기념시설이나 개인 기도실도 반대한다. 보존하는 정도가 낫다고 본다." (한규무 교수. 광주대)

 

"기록 조사는 필요하지만 복원은 의미가 없다. 더 훼손되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적극적인 활동은 우려스럽다" (김정신 교수. 단국대)

 

지리산 선교 유적지의 근원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일제와의 협의를 통해 노고단에 휴양시설을 마련한 것이 시초다.

외국인 선교사 휴양지는 원산과 소래 등에도 있었으나, 지리산 노고단은 고지대여서 토착민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곳이다. 따라서 풍토병에 고생하던 선교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는 풍토병이 미치지 못하는 곳. 이런 조건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 등지의 선교사들도 노고단으로 와 휴식을 취했으며, 선교 전략 수립 및 신구약 성경 번역 등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노고단 휴양소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 되면서 적산 처리됐고, 해방 이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등의 과정을 거치며 파괴된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린튼과 하퍼 선교사 등이 50년대 말까지 천막을 치고 휴양소를 유지하다가 1962년 왕시루봉으로 옮겼다. 지역 관리들의 주선으로 토지 소유주인 서울대 농과대학과의 접촉을 통해 사용 허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왕시루봉은 이후 10년간 선교사 휴양기관으로 기능했으나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외국인 선교사 수가 격감하면서 이용자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현재는 린튼 선교사의 아들인 인요한 박사(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장)가 관리하고 있는 상태다. 이상이 노고단 휴양소의 개략적인 연혁이다.

 

문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이곳이 어떤 모습이었나 하는 의문이다. 먼저 서춘(徐椿)193686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남조선 편력기행 노고단의 피서지란 글을 보자.

 

발전소(發電所)까지 설치햇고, 유영장(游泳場 풀장), 정구장(庭球場)도 만드러 노코, 멀리서 오는 손님을 위하야 호텔까지 잇다. 이 호텔은 서양인(西佯人)만 드린다노고단 경내에는 서양인이 아닌 타민족은 별장 짓기를 불허한다구역경계에 비서양인 출입불허(非西佯人 出入不許)’라고 써부치고 일체로 타인을 드리지 안엇는데 이에 인근 주민들은 분개하야 주민 거주구역 경계에 서양인 출입엄금(西洋人 出入嚴禁)’이라 써부처 상호간 교통을 단절해 버렷엇다

 

특별히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노고단 휴양소가 어떤 곳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통계연보는 노고단 수양관을 종교시설이라 표현하지 않고 노고단 외인 피서지라고 적고 있다. 선교사들의 휴양 장소 즉 별장이었다는 뜻이다. 다음 차례로 구례군지 편찬위원장인 문승이씨(2009

년 당시 82)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가 구례국립보통학교 4학년(10), 6학년(12) 때 전교생이 노고단에 소풍갔었다. 호텔도 있고, 전깃불도 켜져 있고, 풀장과 테니스장도 있었다. 전부가 네모반듯한 돌로 만든 돌집이었다.서춘의 글과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 당시의 시설물은 영빈관(호텔), 강당(2층 높이, 33), 발전실, 상점, 진료실, 목공소, 주택 등 58동이었으며 흰색 석영이 박힌 난로도 있었다. 58동 중 남장로회 선교사의 소유 건물은 41동이었고 당시 시가로 53,477(16,043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노고단 수양관이 당시로는 상당한 규모의 호화건물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단서다.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는 선교사 및 외국인들은 노고단까지 어떻게 오르내렸을까? 화엄사 일주문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가마나 지게를 타고 오르기도 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직접 오르는 코스는 하나 있었는데, 한 사람이 지날 정도의 희미한 급경사 오솔길이었다. 다시 문승이씨의 목격담을 들어보자.

 

대나무로 만든 가마에 선교사를 올려 앉히고 4명이 들고 올랐다. 선교사는 거의 드러누운 자세에서 책을 보고 있더라.

 

화엄사 일주문에서 노고단까지, 조선인 4명이 들고 오르는 가마에 드러누운 자세로 책을 보고 있다가 편안히 목적지에 도착하는 선교사의 모습을 그려보라. 호화 호텔에서 휴양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과연 이러한 모습이 기독교의 선교 활동에 적합했을까? 그다음은, 그러면 선교사들은 어떻게 하여 이런 호화생활이 가능했을까하는 의문을 풀어볼 차례다.

 

앞글에서 알렌, 언더우드, 마펫 등의 이권침탈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했지만,몇 가지 다른 정보를 제공하겠다.

 

백만장자 선교사라고 불리던 언더우드는 선교 활동을위한 자금 확보와 한국인들에게 서양 문명의 이기를 전한다는 명분하에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공사관보다 호화스런 집에 살면서도 만족하지 않을 만큼 사치를 누린 빈톤(C. C. Vinton)은 재봉틀 1백여 대를 들여다 팔았고, 심지어 서울의 한 선교사는 여관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교회 보수 신앙의 대부로 칭송받는 마펫(Samual A. Moffett:한국명 마포삼열)과 리 선교사조차도 압록강 연변의 나무 3천여 그루를 세금도 내지 않고 벌채하려는 이권에 관계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7년 주한 영국공사였던 힐리어(W. C. Hillier)"선교사들이 아니었으면 동양에 대한 상업 진출의 정보를 서구 국가들이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죽했으면 타운센트(L. T. Townsend) 선교사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선교 단체에 기부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선교사들은 상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내지에 살면서 미국 물품을 소개하고 수요를 창출하는 영원사원의 역할도 했다.

 

일제 강점기시대에도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각종 규제를 완화해주고, 법인을 허가하여 재산 유지를 편리하게 하도록 배려한 일제의 회유 정책에 야합하여 친일 행보를 보였다. 일제 만행을 촬영하여 외국에 알린 이유로 추방당한 스코필드(Frank W. Scofield)조차 1922년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송별연에서 당시동아일보간부 김성수와 송진우에게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일선(日鮮) 공존의 온건한 사상을 지니는 것이 이롭다"라고 충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와 종교의 야합, 그리고 권력과 돈의 결합, 이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지속된 관행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정교분리라는 미명하에 한국 기독교인들의 항일민족운동은 선교사들에게 비판받게 되어 금기시되었고, 당시 한국 교회를 주도하는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는 폭력적인 항일투쟁 대신 법과 질서를 지키도록 요청받게 되었다. 결국, 한국교회는 인간을 의지하는 독립운동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신앙부흥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체질 속에 깊이 뿌리박힌 비정치화 전통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하는 노예의식이나 심지어 권력에 아부하는 왜곡된 정치화 전통을 갖게 했다. 물론 그 대가는 교회의 부흥 즉 물질적 축복이었다. 한경직, 김준곤으로부터 시작한 한기총의 오늘 현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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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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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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