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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미 제국의 두 기둥 - 한국인이 외면하는 제국주의 미국 5
기독교 공화국 흉내 내기
최천택. 김상구 공저
기사입력: 2015/12/20 [23: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귀축미영에서 은혜의 나라로

 

19458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을 방송했다.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방송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문사 벽보에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한민족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국은 해방의 감격에 흥분했고 환호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곳곳에서 보였던 국민복과 몸빼 차림은 자취를 감췄고, 흰 옷 입은 시민들만이 거리를 메웠다. 사람들은 일장기에 푸른색을 덧칠해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울며불며 뛰어다녔고, 하루 종일 전차에 매달려 만세를 불러댔다. 일제 통치는 이렇게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인은 해방 후에도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장기가 휘날리는 총독부에서 일본군이 미군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99일 일본 총독부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았다. 사실상 한국의 해방은 형식적인 해방일 뿐, 힘은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일본은 절름발이 경제만을 이 땅에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닥친 해방은 곧 분단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미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98J. R. 하지 중장 휘하의 미() 24군단은 인천에 상륙, 서울에 도착해 99일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12A. V. 아널드 소장이 미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군정체제의 골격을 갖추었다. 미군정은 914일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했으나 행정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이들을 남겨두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이용했다.


918일 미군장교를 각 국장(局長)에 임명하고 19'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통치체제를 완비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강점기의 몇몇 악법들은 폐지했으나 신문지법·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은 처음에 한국인 11명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했다가 뒤에 양()국장제도를 채택해 한국인을 행정에 참여시키고, 194691219명의 한국인 부처장(部處長)에게 행정권을 이양했다.

 

미군정은 행정의 편의성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중용함과 동시에 개신교 정치를 시작했다. 미군정이 임명한 고위 관료들을 살펴보자.

 

조선 통치의 수장 역할을 할 군정장관으로는 미 육군 소장 아키발드 아놀드가 맡았고, 경찰책임자로는 헌병 사령관 육군준장 로렌섬, 육군소장 키량프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점령군의 행정요원은 행정경험이 거의 없는 하급 장교였다. 국장급으로 보직된 장교의 계급이 대위, 소령 정도였으며, 실무 책임자인 과장급은 중위였다. 조선총독 아베가 해임되었고 상층부만 좀 바뀌었을 뿐 미군정은 여전히 총독부 관료를 중용하였고 그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 군정청에 제출하였으며, 한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에도 추천권을 행사했다.일제 강점기 시절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최고 통치자만 일본천황, 수상, 총독에서 미국대통령, 맥아더, 하지로 바뀌었을 따름이었다. 미 군정청이 나름대로 한국인을 의식한다면서 내세운 인물들은 대부분 친일 경력이 있는 개신교인들이었다.

 

1945105일 미군정이 임명한 11명의 행정고문 중에서 목사 3명을 포함한 6(55%)이 개신교 신자였다. 1946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군정청이 임명한 군정 각 부처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가운데 7명이 개신교 신자였으며, 이들 전원이 미국 유학 출신자였다. 1946년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이는 해방 당시 개신교 신자가 총 10만 명 정도로 인구 대비 비율이 0.5%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수준의 비율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귀축미영(鬼畜米英: 귀신과 짐승인 미국과 영국)을 박멸하자!”고 목이 터져라 외친, 가장 강력한 반미(反美)세력이었던 개신교가 이제는 미국이 가장 총애하는 집단으로 둔갑해 버린 아이러니가 이 시절 실제 상황이었다. 개신교계 대표적 지도자였던 어느 목사는 아예 창씨명이 평강미주(平康美洲: 미국대륙을 평정한다)’였다. 그렇게 반미성전(反美聖戰)의 열렬한 전사 노릇을 했었기 때문에 해방 후엔 그걸 속죄하려고 친미 노선으로 돌아선 것이었을까? 개신교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군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던 것일까?

 

1940

년대초, 이른바 성전’(聖戰)이라고 하던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일제의 자원 수탈은 극에 달했다.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그들의 통치전략에 따라 한국인 모두가 적성(赤誠)을 다하도록 국방헌금을 각계각층에 강요하였고, 각종 친일단체들이 등장하여 부역하였다.

 

귀족의 처와 중견 여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애국금차회(愛國金車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그들의 금비녀·금가락지 등을 국방비로 헌금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반 사회의 이러한 작태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하였을까? 특기할 점은 미국에 대한 비판에는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윤치영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고, 박희도는 그가 운영하는동양지광(東洋之光)을 통하여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간섭 행위"에 대한 일본의 "신성불가침의 자주권, 환언하면 국가 생존권에 관한 최후적 발단"이라고 일본의 행위를 옹호하였다. 개신교인 그리고 개신교 단체의 친일·부역 행위의 예는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백미는 조선 장로회에서 조선장로호”(朝鮮長老號)라는 해군비행기를 헌납한 사건이다. 당시의 보도를 중심으로 개신교의 부역 양상을 살펴보자.

 

 

1942(昭和 17) 71일 자 기독교신문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황군 환자용 자동차 2대를 헌납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지나사변 이래 황군의 혁혁한 전과에 감격하여, 작년 8월부터 애국기 헌납 운동을 전조선적으로 일으켜 36만 교도가 총동원하여 육해군에 애국기 한 대씩과 고사기관총 7대의 자금으로 금()12317원을 헌납하였고, 25백여 교회당의 종까지 헌납하여 총후(銃後)의 적성(赤誠)을 보여 왔는데, 이번 619일에는 다시 총회장 철원지화(鐵原志和), 정인과, 백낙준, 이용설, 오문환 등 대표가 조선군사령부로 창무(創茂) 보도부장을 방문하고 육군 환자용 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322128전을 헌납하였다.

 

 

▲ 조선 장로교단에서 일본군에 헌납한 조선장로호 전투기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해군기 헌납에 이어 육군기 헌납도 하였는데, 19421117일 용산 연병장에선 조선장로호명명식이 일제의 신도의식으로 거행되었다. 아래는 122일 자 기독교신문의 보도기사이다.

36만 장로교도들의 애국정성을 실은 미영(米英) 격멸의 의미로 이미 육군에 헌납한 애국기 조선장로호의 명명식은국민의례로 시작하여 제주(祭主) 조선신궁(朝鮮神宮) 죽도 권(竹島權) 궁사(宮司)에 의하여 신사(神社)가 있었고…》

일제의 수탈과 여기에 동조하는 기독교의 모습들이다. 마지막으로 194422일 자 기독교 신문의 사설을 소개한다.


《…기열(奇烈)한 중남태평양상공의 결전장에 하루라도 빨리 일기(一機)라도 더 많이 비행기를 보내어 제일선의 요청에 응하도록 일억 국민은 굳은 결의를 가지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될 오늘, 제국 내의 기독교가 일제히 보국기 헌납운동에 궐기하게 된 것은 종교보국정신의 발로로 믿고 감사감격하야 마지아니하는 바이다.오늘 제국이 하늘을 대신하여 정의의 칼을 들고 저 미영(米英)을 토벌함도 혹시 저들이 독선배타(獨善排他), 사리옹호(私利擁護)를 위하여 동아의 십억을 갈취하는 것을 치척(痴斥)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부질없는 노파심이 남아 있음인지 아지 못하거니와 애국기 헌납운동이 애국의 적성에서 나오고 조금이라도 바리새인적 불순한 동기가 없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심각한 결전단계의 금일을 제하여 우리 교도들은 국가가 있고야 종교도 있고 재산도 있고 생명도 있음을 다시금 깨닫기 바란다.

 

종교를 신앙함도 충량한 국민이 되기 위함이요, 우리의 생명은 국가를 위하여 있는 것이어든 하물며 재산에랴?…》

이 사설은 친일부역논리의 대표적 표현이다. 자발적인 애국기 헌납운동을 노회 단위로 전개하였고, 여기에 호응하여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시키려는 이 신문의 활동은 당시 부역 세력들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력들이 미 군정 시절 친미·숭미 세력의 최 일선에 나선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행정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목적 하에 이들을 최고위층에 포진한 미국의 정책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만 하는가?

 

 

미군정과 적산불하

 

200525CBS기독교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 120년을 대표하는 지도자로는 한경직 목사(37%), 주기철 목사(21.8%), 문익환 목사(5.6%), 손양원 목사(4.2%), 함석헌 선생(3.8%)의 순서로 되어 있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고의 명예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 서울 저동에 있는 영락교회의 전경, 원래 천리교 본당 자리였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한경직 목사는 거의 무명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월남을 계기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그러면 194510월에 거의 빈손으로 서울에 도착한 한 목사는 어떻게 하여 영락교회라는 거대한 교회를 만들게 되었을까? 이는 전적으로 미군정의 종교정책 덕분이다.

  

미군정은 남한 진주와 함께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세력들이 세운 '인민 공화국'을 부정하고 친미적일 것으로 여긴 미국 유학파 중심(이승만, 이기붕, 조병옥, 장택상 등)의 친미 괴뢰정부와 사회단체를 구성하려 했다. 미군정은 1945925일에 미군정법령 2호로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을 발표하여 조선에 있는 일본의 국·공유재산을 동결했다.그리고 이 재산은 1945년 말부터 친미 세력들에게 불하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의 재산불하를 '적산 불하'라고 한다. 적산(敵産, 일제의 재산)은 당시 한국 경제 전체의 80%정도에 이르는 규모였다. 이 재산들은 특히 친미적인 이승만, 한민당, 기독교계 등에 집중적으로 불하(대부분 무상)되었다.

특히 그들은 노골적으로 한국을 '기독교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작심한 듯이 한국 기독교 세력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여기에 프린스턴신학대 출신의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등이 우선적으로 미 군정청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 기독교 측에 불하되었던 재산 중엔 일제 때의 종교단체재산이 있었는데, 대개 일본 신사, 천리교와 불교재산으로써 대부분 기독교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재산이었다. 물론 일본인 개인 소유였던 병원, 농장, 임야, 가옥등도 무차별적으로 불하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남의 재산을 불하받아서 치부한 한국 기독교는 급신장을 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철저한 반공노선으로 미군정을 기쁘게 한 것은 물론이다. 미군정으로 부터 불하받은 엄청난 재산에 대한 그들의 기쁨을 스스로 표현한 대목을 한번 보자.

 

해방 후 일본신사나 일본사원 자리가 예수교예배당 혹은 교회학교로 변모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동시에 기독교의 승리이며, 한국 교회의 광명이며 사교에 대한 역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별관 자리에 대한예수교 장로회신학교와 기독교박물관이, 남산 북쪽기슭 경성신사자리에 숭의 여자중고등학교가, 또 그 아래 절간자리에는 창동교회 대한신학교가 점유하고 있으며, 더 그 아래 옛날 천리교 자리에는 한국제일의 근대식 건물을 자랑하고 있는 영락교회가 위치잡고 있는데…》

 

천리교 재단을 문서로 접수하고 보니 그 분량이 거창하였다. 동자동 건물과 제동의 건물 외에도 신당동에도 북창동에도 삼각지에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북창동건물에는 김재준 목사가 조선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혁명운동으로 죽었다는 제자의 미망인 전효덕씨에게 시켜 가정여학교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 학교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당시 학생인 이일선이 맡아 지키면서 교회를 개척하게 하였다. 삼각지에 있던 건물은 상명여학교 측에서 무슨 사유를 붙여 점유하고 신학교와 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당시 적산처리의 최고 책임자인 남궁혁 박사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학교측에 유리하게 처리해 버렸다.천리교 재산을 접수하는데 있어서는 상명여학교측과 경합하여 어렵게 재산을 교지로 인수받게 되었다.

 

이 무렵은 한국 기독인들에게 축복의 나날이 계속된 시기였다. 적산 불하 이후 한국 기독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경직 목사의 육성을 들어보자. 한 목사는 1992618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제로 나라가 분단되기 전, 서울에는 소수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때 서울 시내에는 약 30개 정도의 교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 분이 오늘의 현상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역사가 어떠했는지 참으로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통계를 잠시 살펴보십시다. 1991년 말 현재로 서울의 교회당수는 7,477개이고, 목사안수는 18,903명이며 그리고 기독교인수는 4,383,422명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와 제일 큰 감리교회와 제일 큰 하나님의 성회와 제일 큰 성결교회가 모두 서울에 있다고들 합니다. 서울의 전체 인구 약 1,000만 명 중 43퍼센트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현재 남한에는 34천 교회가 있습니다. 남한의 목사는 모두 58천명쯤 되고, 교인 수는 1,200만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이 수는 남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크게 축복하여 기독교의 성장을 이토록 이루어 주셨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연설한 상기 내용은 대부분 맞다. 해방 당시 대략 30개 정도의 교회만이 있던 서울풍경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뜨이는 게 십자가인 도시로 변해버렸다. 그러면 적산불하의 주인공, 한경직 목사가 어떻게 활동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당시 서울시내에는 천리교 포교당이 40여개가 있었는데, 그 부속재산을 합치면 엄청난 액수의 가치였다. 하지만 일본인 천리교 신자들은 이미 모든 재산을 한국인들에게 양도하여 한국천리교회 재단 설립을 끝내고 법적등기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재단의 이름으로 학교인가까지 얻어 동자동 천리교본부에는 서울원예학교라는 간판까지 내걸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 목사는 어떻게 천리교 재산을 습득할 수 있었을까? 남한 내에 있던 기독교 계통과 신도 계통의 귀속 재산은 대부분 개신교 쪽으로 불하되었는데, 특히 김재준과 한경직은 서울 시내에만 40여개의 포교당이 있던 천리교를 접수하여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미 군정청의 도움으로 서울시와 임대차 계약을 맺고 당시 서울시 부시장 구스타프의 도움으로 천리교 재단을 접수하였다. 그 결과 천리교본부가 있던 동자동에는 조선신학교가 창설되어 김재준이 관리하고, 구내 교회는 성남교회가 설립되어 송창근 목사가 시무하게 되었다. 가장 큰 천리교회가 있던 저동에는 영락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광복 후 10여 년 동안 2천여 개의 개신교 교회가 신설되었는데, 대부분이 상기와 같은 경우였으므로 한경직 목사뿐 아니라 개신교 전체가  미 군정청의 정책 탓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이승만 정부는 194912월 귀속재산처리법, 19503월에 동법시행령 그리고 같은 해 5월 동법 시행 규칙을 제정하여 미 군정청의 행위에 대하여 법적인 조처를 마련해주었으니, 혜택을 입은 당사자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 무렵부터 권력의 힘과 능력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였지 않았나하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그 무렵부터 한경직 목사는 개신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주요 유명인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승만의 종교정책을 논할 때, 헌법에는 정교분리를 명시했으나 실제로는 공인교제도를 취하여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음을 비판한다. 그 예로 크리스마스의 공휴일 제정, 국가배례를 주목례로 교체, 형목제도, 군목제도, 경찰전도 실시, YMCA등 종교단체 후원,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의 설립 등을 든다. 그러나 종교관련 적산을 대부분 개신교 측에 불하한 사실이 더욱 큰 문제라고 판단된다.


인구 대비 비율 0.5%에 지나지 않던 개신교가, 10년 만에 2,000개 가까운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혜택을 베푼 사실은 분명 권력의 횡포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개신교 부흥의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는 뜻이다. 적산불하과정 특히 종교관련 재산의 처리과정에 있어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위법행위를 했다.

 

첫째, 개신교에 특혜를 준 사실이다. 당시 개신교의 교세를 고려해 볼 때 종교적산의 대부분을 개신교에 불하한 것은 종교의 자유라는 면에서 그리고 국민 정서상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자행했음이 분명하다.

 

둘째, 개신교와 관련 없는 종교재산을 개신교 측에게 불하한 사실이다. 귀속재산처리법 제15조에 의하면 귀속재산은 합법적이고 사상이 온건하고 운영능력이 있는 선량한 연고자등에게 매각하게 되어 있으며 특히 국가에 유공한 무주택자등에게 우선적으로 매각하게 되어 있다. 천리교재산, 신사관련부동산, 일본불교사찰이 개신교와 어떠한 연고가 있는 지 그리고 일본군기지, 병원, 농장, 주재소 등이 과연 개신교와 무슨 관련이 있는 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분명히 답해야만 한다.

 

셋째, 친분이 있던 자들에겐 거의 무상으로 제공한 사실이다. “종교적산들은 미군정에 의해 사안별로 처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정에 우호적이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무상으로 제공되었던 것이다.”미국 유학파 출신인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등이 천리교 적산을 불하받은 사실이 대표적 사례인데, 정부는 당시의 자료를 재검토하여 친분에 의해 불하받은 모든 적산을 재환수해야 할 것이다.

 

넷째, 종교단체법의 폐기에 따른 대체입법이 없었으므로 종교적산의 불하는 원천적으로 불법이며, 무효다. 미군정은 패전국 소속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1945.9.25. 제정, 법령2)’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 1945.12.6. 제정, 법령33)’ 등에 의해 적산을 군정청에 귀속하였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1948911일에 체결된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에 따라 귀속재산을 한국정부에 이관하였다.

 

문제는 미군정의 법령이나 후일 한국정부가 제정한 <귀속재산처리법> 등 어떠한 법률에도 종교적산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규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관련법도 마찬가지다. 당시 미군정청은 <신사법> <종교단체법> 등을 폐지하고 난 뒤 일본과 달리 대체입법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법보다는 친분 혹은 자의적 판단에 의해 종교적산의 처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귀속재산처리법에도 종교단체 혹은 종교관련 사항은 전혀 없는데, ‘공인된 교화기관을 종교단체로 규정하는 임의 판단에 의거, 종교적산처리를 한 셈이다. 공인된 법에 의해 집행되지 않은 종교적산은 당연히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면 해방당시 종교적산 불하문제는 반드시 재검토되어야만 할 것이다.

 

20094, 기독교대한감리회측이 감리교망실재산 조사연구회 발기위원회’(위원장 조영준 원로목사)란 단체를 만들어 적산으로 처리된 후 도로나 공공기관으로 편입돼 현재 감리교재산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는 토지들은 마땅히 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가 정당화되려면 광화문에 있는 감리교 본부 건물을 비롯하여 미군정 시절 불하한 모든 적산 종교 재산에 대한 재검토가 선행되어야 하리라본다. 이 문제는 종교재산의 소유는 총유라는 개념과 더불어 향후 <종교법인법> 제정 시 필히 검토되어야할 사항이다.

 

장로대통령과 예수교 공화국

 

교계 지도자들의 권력지향성은 일제강점기 이래의 악습이었다. 신사참배로 이미 신앙의 순결성을 상실한 그들은 일제군국파시즘의 침략전쟁에 거침없이 앞장섰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일제의 승전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무운장구기도회8953회나 열렸다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부일배로서 그들의 경력은 해방 이후,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그들에겐 미국이란 은혜의 나라가 있었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독재 권력이 있었다.

 

소위 교계의 거물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변함없이 권력에 굴종하거나 타협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 중심에는 한경직 목사가 늘 있었다.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기대어 그 세를 급격히 넓힌 교회는 1952년의 선거에 이승만을 한국의 모세라고 부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그 이유로 정치의 기독화’(기독교 의례의 국가적 수용) 이외에 군목 제도의 설립을 들었다. , 동족상잔을 치르고 있던 한국군에 목사들이 파견되어 공산 악마와의 성전을 격려해주었던 것은, 교회로서는 문제라기보다는 성취였다. 이 제도의 신설을 이승만에게 요청했던 한경직 목사는, 전쟁 때에 군대의 정신 무장이 기독교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해 전군의 기독화를 촉구하고, 1956년에 성경을 애국애족의 교과서라고 평가했다.


▲ 3․15 부정선거 당시 개신교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하여 적극 협력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이승만을 한국의 모세라고 추켜세우던 한국교계는 한국의 모세 혹은 여호수아를 박정희로 그 다음에는 전두환으로 변경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권력에 면죄부를 발행해 주며 자신들의 권세를 계속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한국에 기독교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시작은 이승만이다.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학살에 직간접으로 책임이 있는 이승만, 그가 꿈꾸는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과 평화를 교의로 삼고 있는 예수교국이었다. 191931일을 전후 하여 조선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70종이 넘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을 즈음인 48, 이승만은 연합통신을 통하여 뜬금없이 예수교국 수립을 언급한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현금 만주에서 조직된 한국 임시정부 내각의 국무경으로 선택된 이승만 박사는 오늘 연합통신을 대하여 말하기를 이번 독립운동에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으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겠노라 하더라.

 

한국독립운동보다 기독교 전파가 우선이라는 이승만의 생각은 그의 저서한국교회핍박에 잘 나타나있다. 이 책의 마지막 결론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는 진실로 일본과 권세를 다투려 한다든지 일본인을 배척하자는 것이 조금도 아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일본이 우리의 종교적 자유를 방해하지 말아서 조선 민족이 장래에 생존을 유지하며 자유 복락을 누릴 희망이 있도록 배려하면 우리는 일본인의 정치적 자유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자 함이니 그렇게 된다면 어찌 피차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승만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이 한국교회를 탄압만 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식민지 통치를 계속해도 된다는 뜻이다. 이승만이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을 예수교국으로 만들 기회는 그의 나이 74세 때에 찾아왔다. 그런데 1948531,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회식에서 기상천외의 일이 발생한다. 소위 제헌의회 기도문으로 알려진 제헌국회 제1차 본 회의록에 기록된 내용 일부를 소개하겠다.

 

임시의장(이승만)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일동기립)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올려 기도하나이다. 아멘

 

제헌의회 의원 198명 중에는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당시 감리교 서부 연회장이던 이윤영 목사에게 회순에도 없는 개회기도를 요청하였다. 이승만의 독선과 아집이 표출된 대표적인 예다. 같은 날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하나님과 애국선열과 삼천만 동포 앞에 바치는 맹세문에 선서했으며, 이어서 국회개원식 축사에서는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 앞에서국가 발전을 위해 분투할 것을 맹서했다. 1948720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그는 8

15일 개최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는 취임사를 낭독하였다.

 

신앙을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한 이승만의 비호 하에 성장한 개신교는 이제 천만 신도 운운 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19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으로 건설하겠다.’는 이승만의 포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 진 셈이다. 오늘 현재, 기독인들의 염원인 완전한 기독교 공화국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등 세 명의 장로 대통령을 배출함으로써 그들의 소망은 일정 부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장로 대통령 시절, 기독인의 염원과 달리 우리 국민들은 그리 행복한 기억을 갖지 못했다. 이승만 장로이후 대략 30년 만에 김영삼 장로가 들어서고 다시 10년 만에 이명박 장로가 들어서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경제를 망친 주범들이고 대통령 스스로가 온갖 갈등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천재지변이상의 흔치않은 재앙이 이들 장로 대통령 시절에 일어났다. 1950년도의 한국전쟁과 1997년도의 IMF환란이다. 그리고 이명박 장로는 한국전쟁과 IMF환란 이상의 재앙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고, 한미FTA협약을 비준했다.

 

하나님 축복받은 나라, 행복지수는 왜 낮나?

 

20119IMF가 발표한 각 국가별 GDP전망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2015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2011년 말 국민소득 추계가 23,749달러로 세계 31위라고 하니 IMF의 전망이 그리 터무니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흔히들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3만불로 보고 있으니 조만간 우리나라도 선진국 소리를 들 수 있는 모양이다.

 

201211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210월말 외환보유액'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3,2346천만 달러로 전월말 3,2201천만 달러 보다 145천만 달러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20129월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규모는 중국, 일본, 러시아, 스위스, 대만, 브라질 다음인 세계 7위 수준이다.

 

2011년도의 수출은 5160억 달러, 수입 4850억 달러로 사상 최초로 무역 1조 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한국은 세계10위권의 무역대국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 지표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개신교 관련 통계다. 한밤의 불이 꺼지면 보이는 것은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뿐이다. 출석 교인 기준으로 뽑은 세계 50대 교회 리스트에 한국 교회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었다. 지난 자료이지만, 미국 종교전문 잡지인 크리스천 월드가 지난 1993년도에 발표한 세계 50대 교회를 보면 신자수가 10만 명이 넘는 교회는 1위인 여의도 순복음교회(60)2위인 안양 남부 순복음 교회(105) 두 곳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계 10대 교회 중 절반,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

 

2005년 인구주택조사 인구부문 전수집계 결과 개신교인은 861만 명, 천주교인은 514만 명이다. 둘을 합치면 1375만 명으로 전체 인구 4700만 명 중 29.2%. 불교(22.8%)를 넘는 수치다.

 

 

참고로, 미국의 전체 교회 수는 33만 개 정도다. 그 중 출석 교인이 만 명을 초과하는 곳은 레이크우드교회(조엘 오스틴, 47천 명, 텍사스 소재) 윌로크릭커뮤니티교회(빌 하이벨스, 235백 명, 일리노이) 세컨뱁티스트교회(에드 영, 텍사스) 새들백교회(릭 워런, 캘리포니아) 라이프처치(크레이그 그로셀, 오클라호마) 5개 교회 정도다.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을 공식적으로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해로 삼는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는 1901514일 오후 2시 서울 상동교회에서 집사목사(執事牧師)로 안수 받은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이다. 두 사람은 미감리회선교부로 부터 안수를 받았다.

 

장로교의 경우는 19079월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독노회)에서 그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한석진, 서경조, 양전백,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 등 7인이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인 선교사의 한국 포교 127년 그리고 최초의 목사를 배출한 지 111년 만에 한국 교회는 170개국에 선교사 2만여 명을 파송하며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됐다. 한국에 개신교를 수출한 나라인 미국에 오히려 역수출하겠다는 발상이 나올 법도 하다. 개신교인들이 한국을 축복의 나라라고 하는 주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더욱이 장로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리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지구촌 사람들로부터도 살만한 나라라고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 원인은 OECD 통계연보를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1인당 근로시간이 가장 길고 자동차 사고율 1위이며 공교육비의 40%를 민간인 학부모가 부담하는 사교육비 비중도 세계 1위이지만 고용률은 OECD 평균치에도 못 미치고 있다. 보건비지출도 하위권이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편, 한국의 40대 남성 사망률은 세계 최고이며 한국인의 스트레스 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통계도 있다. 한국인의 자살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몇 가지  더 보면, 저출산률에서 한국은 이미 몇 해 전에 세계 1위의 기록 보유자이며, 이혼율 속도에 있어 세계1위를 차지했고 급기야 OECD 국가 중에서 이혼율과 자살률, 사교육비 1위인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인용한 통계로 대한민국을 불행한 나라라고 단정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라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공되는 행복지수라는 통계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생활의 만족도와 풍요로움을 지표화한 통계가 바로 행복지수다. 이 행복지수는 국내총생산(GDP) 등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기대, 실업률, 자부심, 희망, 사랑 등 인간의 행복과 삶의 질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산출된 지표다. 주거환경, 소득, 일자리, 공동체 생활, 교육, 환경, 정치참여, 건강, 삶의 만족도, 치안, 일과 삶의 균형 등에 일정한 점수를 매겨 도출한 자료가 바로 행복지수 평가인데, 일부 국가에서는 '행복 지표를 만들어 국민들이 더욱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기도 할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의 데이터로 산출한 지수라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 OECD의 발족으로 경제발전과 함께 회원국 국민들의 소득이 늘고, 질병도 점차 감소하는 등 회원국들은 점차 경제적 회복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함께 사람들의 마음의 병, 자살 등 사회문제 역시 심각해지면서 각국 정부에서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경제성장만을 추구해 온 기존 정책에 대해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국내총생산(GDP)만으로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OECD의 행복지수 평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개인의 부가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드러나고 있다. 2012OECD의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OECD 36개 회원국 대상)에 따르면 호주, 노르웨이, 미국, 스웨덴, 덴마크, 캐나다, 스위스 등의 나라가 앞선 순위를 점하고 있다.

한국의 순위를 살펴보면 36국 중 24위다. 학력수준, 학업성취도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고용, 노동시간, 환경 등에서는 낮게 평가되었다. 경제활동인구의 63%만 일자리를 갖고 있고, 노동시간은 연간 2,193시간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수치로 나타났다.

 

행복지수의 순위를 살펴보면 경제력과 행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력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예로 OECD 회원국은 아니지만 국가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국민들이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가가 있다고 한다. 바로 행복한 나라로 대표되는 부탄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기슭에 자리 잡은 인구 70만 명의 작은 나라 부탄. 부탄은 국민소득이 2,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1990년대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TV가 보급됐을 정도로 문명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국가다. 하지만 국민의 97%"행복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행복을 만든다.’는 믿음을 없앤 대표적인 사례가 되면서, 자국을 보다 더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나라들이 이 작은 나라 부탄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부탄은 'GNH(Gross National Happiness)'를 기준으로 국가가 통치되고 있는데, GNHGDP(국내총생산)와는 다른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용어로 건강과 시간 활용 방법, 생활수준, 공동체, 심리적 행복, 문화, 교육, 환경, 올바른 정치 등 9개 분야의 지표를 토대로 산출하는 것을 말한다. 전문 담당자가 1인당 5시간의 면담으로 약 8,000명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국민들의 심리상태를 수치로 계산해 내는 방법을 활용하고 이를 통해 정책에 반영한다. GNH는 지난 1974년부터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국왕'에 의해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를 통한 정책이 이어져오고 있다.

 

이웃 국가들이 경제성장에 목을 맬 때도, 부탄은 건강과 생태계 보호 등 국민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생태계 보존과 전통문화 교육을 가장 우선으로 삼는 부탄은 국토의 60% 이상을 산림으로 유지하도록 정하는가 하면, 국가가 국민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하여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탄의 국민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행복이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이라지만, GDP가 곧 행복이라는 틀을 깬 행복지수와 부탄의 사례를 보면 행복은 물질적 풍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돈이 정신적인 안정감을 준다고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국민의 20% 정도가 개신교도, 세계 2위의 선교대국 그리고 세계 20대 대형 교회 중 10개가 있는 곳. 또한 대통령이 장로이며 국회의원 299명 중 113명이 개신교 신자고 상장기업 임원의 43%가 기독교인인 곳,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집단이 지금 현재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 어떠한 공헌을 하고 있는가? 기독인들의 자부심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초대형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과연 어떠한 일들을 하고 있는가? 이 거대 집단이 우리의 행복지수를 오히려 갉아먹고 있지 않은 지 냉정히 생각해야만 할 때이다.


 

 순교 콤플렉스와 영웅 만들기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한국의 개신교는 가톨릭보다 100년 이상 늦게 출발했다. 그러나 개신교 측은 신도 수, 충성도, 종립 사학의 수 등 사회적 영향력에서 한국 내 어떠한 종교 집단 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특히 첨예한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을 모든 면에서 따돌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순교자에 관한 것이다.

 

한반도에 천주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온 선교사(세스페데스)에 의해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설에서부터, 소현세자가 1645년 청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에게 로마 가톨릭 교회 서적과 지구의 등을 선물로 받아 가져와 전래되었다는 설까지 거의 100년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추측이 존재한다.

 

연대가 가장 명확한 천주교 전래에 관한 기사는 1631년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서양의 문물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다는 내용이다.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이 쓴 담헌연기(湛軒戀記)에도 중국을 오가던 조선 사신일행에 의해 천주교가 소개되었음을 변증하는 내용이 있다. 최초의 세례교인은 1784년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승훈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조선정부의 천주교 박해였다. 우상숭배라는 명분으로 제사를 금지하던 천주교의 교리는 조상에 대한 효를 무엇보다 중시하던 유교사회에서 용납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신해사옥, 신유사옥 및 기해사옥 등을 통하여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들 중 103인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가톨릭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물론 이들 중에는 다블뤼 안토니오, 베르뇌 시메온 등 외국인 신부들도 다수 포함되어있다.

 

반면 개신교의 본격적인 선교의 시작은 1886년에 체결된 조·불조약 이후부터다. 이 조약에는 기독교포교권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1882년에 체결된 조·미조약에 최혜국대우권이 포함되어 있음으로 인해 별도의 조약을 맺지 않고도 선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미국은 기독교를 전파해도 아무런 제약이 없게 된 시점부터 선교를 시작했다


가톨릭처럼 순교자를 배출하고 싶어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점부터 선교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이 개신교의 가톨릭에 대한 오래된 콤플렉스였다. 개신교의 이런 고민은 해방 후 준)개신교 국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세가 커진 후 개신교 영웅 만들기의 일환으로 순교자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데, 시작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첫 번째는 순교한 선교사 만들기였다. 그 대상은 토마스 목사로 선정되었다.

 

▲ 평양 대동강 변에서 순교당하는 토마스 목사를 그린 삽화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토마스의 미화는 오문환(吳文煥)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문환은 기독교 교육자이며 언론인으로서 1930년대 후반기의 대표적 친일인물이다.물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장한다.

그는 1928, 평양에서 발간한도마스 목사전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나누가 생()을 원치 안으리오만은 생다웁지 못한

생은 기가치(其價値)가 업스며 어나누가 사()를 원하리오마는 사다운 사는 도로혀 영광이니 일즉히 주()의 복음을 가지고 신기독교의 선교사로서 밟아보지 못한 조선강산에 와서맛참내는 그의 위한 생명까지 버린 도마스목사를 기념하는 것도 이 의미에 불외(不外)하는 것이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죽음을 의미가 부여된 죽음으로 그렸다. 즉 그를 복음의 사도며 거룩한 인간으로 재창조했다. 토마스 목사, 그의 죽음은 과연 순교였는가?

앞글에서 토마스 목사가 타고 온 제너럴셔먼호에 대해선 설명한 바 있지만, 맥켄지가 그의 저서조선의 비극에서 기록한 셔먼호의 목적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배는 총, 화약, 밀수품 등을 싣고 있었는데 이 배가 조선을 향해서 출발한 것은 평양에 있는 왕릉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맥켄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토마스 목사는 해적 혹은 도굴단의 일원으로 봐야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개신교인 대부분은 토마스를 거룩한 순교자로 알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239번지에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이라는 근사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1991년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 건축가협회상을 받은 바 있다. 이곳에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그린 삽화 외 그의 이력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외 개신교 관련 대부분의 문서에는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토마스 목사를 설명한다. 기독교계 문헌들에서 묘사하는 토마스 목사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1866724일 정오 무렵 평양성의 군민(軍民)들이 제너럴셔먼호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토마스 목사는 죽기 직전까지 강안(江岸)의 군중을 향해 성경을 뿌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군인에게까지 성경을 건네주었다. 그 군인은 그때 받은 성경을 읽고 나서 감화되어 훗날 기독교인이 되었다.자신이 탑승하고 있던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성서를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이러한 장면이 과연 사실일까? 26세의 토마스 목사는 목숨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성서를 나누어줄 만큼 신앙심이 그렇게 깊었던 사람이었을까? 성서를 나누어주는 종교인을 살해할 만큼 조선 군민들은 그렇게 무지몽매하고 잔학무도한 사람들이었을까?

 

관련 문헌들의 신빙성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럼, 토마스 목사와 관련된 문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토마스 목사가 최후를 맞이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관한 자료는 크게 3가지 종류로 나뉜다. 조선 측의 공식 기록, 미국의 외교문서, 기독교계 문헌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기독교계 문헌을 보자. 기독교계 문헌은 미국인 선교사 게일(J.S. Gale)과 앞에서 소개한 오문환(吳文煥) 목사의 저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문헌들을 연구한 국내 학자들 대부분은 두 사람의 저술은 셔먼호 사건을 목격했다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거하고 있으나, 그 증언들은 사건 발생 후 수십 년이 지난 시기에 수집되었을 뿐더러 주로 기독교도인 고로(古老)들의 기억에 의존한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게다가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증언 내용을 다분히 과장하거나 윤색한 혐의가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일근의 연구에 의하면, 미국의 외교문서는 셔먼호 사건이 발생한 지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 작성된 것들로서, 병인양요(1866) 때에 종군했거나 혹은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들 또는 셔먼호의 수로 안내를 맡았다는 중국 정크선 선장 등에게서 입수한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외교문서의 내용은 매우 소략하고 간접적인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외교문서는 토마스 목사의 최후와는 직접적 관련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조선 측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운하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적호기>에는 다음 내용이 있다. “(토마스는) 뱃머리에 나와 서서 중군에게서 빼앗은 인신(印信)을 창끝에 걸고 바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다.”여기서 중군은 조선 관리의 직함이다. 그리고 인신은 그의 신표였다.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중군의 신표를 탈취했기 때문에 이 중군은 그로 인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제너럴셔먼호 통역 담당 토마스 목사는 바로 이 인신을 성경이 아닌 창끝에 걸고서 조선인들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인신을 돌려줄 테니 나를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목숨을 구걸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조선인들에게 건넨 것은 성경이 아니라 창끝의 군인 신표(인신)였다.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의 친우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던 조면호(趙冕鎬)<서사잡절>(西事雜絶)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토마스 목사가 배에서 뛰어내려 항복을 애걸했으나, 분노한 평양성 주민들이 그를 때리고 짓밟아 죽였다는 것이다. <평양지>의 내용도 유사하다.

 

이 기록은 좀 더 자세한 편이다. “(토마스 목사가) 항복하고 중군의 인신을 바치면서 생환을 애걸하자, 겸중군 백낙연이 잔당을 모두 불러내오면 잘 대접한 뒤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 토마스가 양서(洋書, 영어 편지)를 셔먼호에 전달했는데,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으나 배에 있는 자들이 나오기는커녕 도리어 총포를 마구 쏘는 바람에, 셔먼호에 화공을 가하는 한편 토마스와 자오링펑을 묶어 군인들에게 넘겼다. 그때 인민들 중에서 셔먼호 일당에게 살상된 자의 가족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살육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 측의 기록에 의하면, 토마스 목사가 죽기 직전까지 성경을 뿌리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 게 아니라 사실은 조선 측에 목숨을 구걸했을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관리들의 눈에 비친 토마스라는 인물은 결코 성스러운 종교인이 아니었다. 조총을 자랑하고 전쟁 협박을 일삼는 청년에게서 성스러운 목사의 이미지를 발견해 낸다는 것은 웬만한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측 기록이 미국 외교문서나 기독교계 문헌에 비해 자료적 신빙성이 더 높은 점을 고려할 때, 토마스 목사의 최후가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는 점에 더 큰 무게를 둘 수 있다.

 

그러므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대동강에는 토마스 목사의 복음 전파가 울려 퍼진 게 아니라 실은 목숨을 구걸하는 통역 담당 토마스의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죽기 직전까지 어설픈 조선말로 살려 달라고 외쳐 대던 토마스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조선인들에게 들이댄 것은 성경이 아니라 창끝의 인신이었음도 확인된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성경을 뿌리면서 전도하는 사람을 살상할 만큼 당시의 조선인들이 그리 잔혹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적선으로 의심되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와서 강자(서양)의 약자(조선) 침탈에 가담한 통역 담당 로버트 토마스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근거 없는 존경과 미화는 이제 사실에 근거한 재검토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토마스 목사가 조작된 첫 순교자라면 두 번째 조작은 아펜젤러 선교사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배가 파선되어 익사하였다.이러한 죽음도 선교로 미화하는 개신교의 순교자 만들기가 어째 안쓰럽기만 하다.

 

개신교의 순교자 만들기는 한국전쟁을 치른 후 아연 활기를 띤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한 번 더 둘러보자. 이곳에는 202명 순교자들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대부분 한국전쟁 때 유명을 달리한 기독교인들이다. 다분히 가톨릭의 순교자 수를 의식한 듯싶은 숫자다. 반공으로 만들어진 순교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선 생략한다.

 

그러면 최근은 어떠할까? 기독교 영웅 만들기의 두 가지 예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20046월 이라크에서 피살당한 김선일 사건이다.

김선일씨가 근무했던 가나무역은 미군에게 군수품을 납품하던  업체였다. 사자의 생시 행위가 혹 기독교 선교 전략의 일환이었다면, 침략자에게 편리함을 제공하여 패자에게 승자의 신앙을 강요하는 전형적 침략 선교 행위가 된다. 전쟁을 선교의 기회로 이용했다는 뜻이다.

 

이 사건이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은, 사건 이후 처리 과정에 드러났던 기독인들의 치졸한 조작이다. 안타까운 한 젊은이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하여 그들의 종교 사업에 이용하고자한 기독교계의 의도가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김선일씨의 죽음이 과연 순교였던가? 기독교의 제단에는 그렇게도 인류의 피가 필요한가?

다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아프간 피랍사건이다’ 2007719일 저녁, 한여름 밤을 강타한 뉴스에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피랍자들은 교회에서 파송된 단기봉사단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아프가니스탄 무장 세력인 탈레반에 의해 2명이 작고하고 나머지 21명은 42일 만에 풀려났다. 악몽 같았던 그 기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피랍자들의 안전귀환을 기원했다. 하지만 사태가 끝난 뒤에도 유가족과 피랍 당사자들, 이들의 소속 교회인 분당샘물교회는 교계 안팎의 시선과 깊은 후유증을 감내해야 했다.

 

20117월 경, 경기 성남시 정자동의 샘물교회는 1층 입구에 샘물교회 순교자기념관을 개관했다. 57(18) 규모의 기념관에는 아프간에서 작고한 고 배형규 목사와 고 심성민씨의 유품과 사진, 각종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 방명록을 보면 여러 개의 글이 눈에 띈다. ‘형님, 항상 기억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타 지역에서 올라온 교회 성도들과 해외 선교사들이 남긴 메시지와 어린이가 쓴 듯 삐뚤빼뚤한 글씨체도 여럿 보인다.

 

사건 당시 우려한 바대로 기독교는 고 배형규 목사와 고 심성민을 거룩한 순교자로 둔갑시켰다. 기념관에서 만난 2명의 순교자는 어느덧 신도들의 마음속에 친근한 목회자로, 아들로, 때로는 신앙의 선후배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샘물교회는 고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의 순교 5주기를 기념해 추모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제목은 , 순례의 길을 가다’(맑은나루)이다.

 

황당한 것은 고 심성민씨의 유족들이다. 심씨의 부모는 `아프간 여행객에 직접 그 위험을 알리거나 출국 자제 요청을 하지 않는 등 외교통상부가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3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민사26(정일연 부장판사)는 지난 2007년 아프가니스탄서 납치 살해된 샘물교회 신도 고 심성민씨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패소로 판결했다고 2011425일 밝혔다.

 

재판부는외교통상부는 수차례에 걸쳐 인터넷과 보도자료, 긴급 좌담회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여행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아프가니스탄 여행 자제를 요청한 안내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심씨는 이러한 상황을 감수하고 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국가가 주의의무를 게을리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심씨의 피랍 당시 구 여권법시행령을 조속하게 개정하지 않는 등 국가가 재외국민 보호에 소홀했다는 유족들의 주장도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지난 2009년 석방교섭인으로 활동한 B

씨가 언론 인터뷰에서한국 정부는 아주 안 좋은 방법으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진술한 사실만으로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 샘물교회 봉사단 출국사진, 아프간 여행 자제를 요망하는 안내문 앞에서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이 사건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치를 따지자면 소송은 정부가 아닌 교회에 해야 할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치인들의 빤한 거짓말에 면죄부 주기를 즐겨하는 언론과 시민대중의 무감각에 편승함인지 당시 아프간 피랍 관계자들도 거짓말의 성찬을 벌렸다. 이 거짓말 대열에 참여한 자들은 착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공중파가 외면하고 대형 언론사들이 동조하고 있지만, 누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네티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네티즌이 민심이자 천심임을 언제쯤 알게 될까? 네티즌들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정리를 해 보자.


선교가 아닌 순수한 봉사활동이었어요.

(단기선교 참가서, 외국의 언론 보도, 탈레반의 석방 조건, 일부 개신교인들의 배형규 순교자 만들기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이번 봉사단은 의사와 간호원 다수가 포함된 의료봉사단입니다.

(피랍인 중 의사는 단 한명도 없고 간호원 출신 2명인 사실에 대해 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을까?)

그곳 문화에 반하는 행동은 안했어요.

(이슬람 사원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워십을 한 자들은 누구였지? 그리고 아이들이 찬송을 따라 부르면 과자를 나누어주었던 사람들은 누구더라?)

유서는 쓰지 않았어요.

(721일자 서울신문, 문화일보, 728일자 한국일보, 730일자 조선닷컴의 유서관련 기사가 오보라는 정정보도가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터콥과 한민족복지재단은 이번 사건과 관계없어요.

(그러면 누구에 의해 초청을 받았고, 비자는 어떻게 받았을까? 그리고 한민족복지재단의 이사장은 누구더라? 샘물교회는 홈페이지에 있던 인터콥 관련 게시물을 왜 삭제했을까? )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프간 선교 활동을 전면 중단하겠어요.

(배형규 목사 같은 사람이 300명 아니 3000천명은 더 나와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더라? 한 사람의 입술에서 때와 장소에 따라 정 반대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 술술 나올까?)

우린 도착 때까지 석방인 줄 몰랐어요.

(이지영의 석방 양보설은 누가 말했더라?)

여기 이지영씨의 석방 양보 쪽지를 가져왔어요.

(이지영은 어머니한테 부모님이라고 하는 버릇이 있나 보다. 그리고 왜 열흘이나 지나서 쪽지를 보여 주었을까?)

감금당한 동안 피랍일지를 기록했어요.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바지 뒤집어, 자신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성능 좋은 볼펜을 가지고 시범을 한 번 보여 주면 모든 의문이 풀릴 터인데...네티즌들은 신이 내린 손, 기적의 바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피랍자 석방 조건에 금전적인 부분은 없었습니다.


(왜 외국의 언론들은 2,000만 불이니 이천만 파운드니 하며 떠들고 있을까?)

일단 이정도로 하자. 우리는 언제나 위선의 유혹에 빠지며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도를 넘는 위선은 언제나 독이 될 뿐이다. 위선은 대단한 게 아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성실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체면'이 곧 위선이요, 부패나 범죄를 욕하면서 자기 행동은 먹고 살기 위한 것으로 합리화한다면 그게 곧 위선이고, 마누라한테 야근했다고 거짓말하고 실은 룸살롱에서 밤새 놀고 왔으면서 다른 이들의 거짓말을 침 튀겨 가면서 비난하는 것이 위선이며, 미국과 일본에서 우리나라 교포들이 당하는 차별 행위에 분노하면서 자기가 고용한 동남아 노동자 착취하는 게 위선이다.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너는 해야 한다는 게, 공부는 안하고 졸업은 하기 위해 대리출석하고 컨닝하는 것이, 남의 작품 표절하고 아무 때나 립싱크하면서 예술가인 척 하는 게 위선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종교적 광신도 위선이고 외국 대학 가서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돈으로 따온 학위로 폼잡는 것도 위선이다.

 

관계자들의 언행이 착한 거짓말인지 새빨간 거짓말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간 사건에는 착한 거짓말도 필요 없다. 두 명의 귀중한 생명을 잃었음을 잊지 말자. 지금 현재도 납치에 대한 공포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수많은 재외 동포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은 필히 타산지석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 행위는 마땅히 중단되어야 한다. 아무리 봉사라고 주장해도 당사자들이 문화 침략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이다. 선교(宣敎)란 명사는 종교를 선전하여 널리 폄이라고 사전에 뜻풀이되어 있는데 선()의 의미는 베풀다’ ‘널리 펴다임금의 말’ ‘조칙등의 뜻이 있다. 기독인들이 선교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듯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우월함과 선민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음이 역사와 현실이 증거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불우한 나라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행태는 종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개항 초기 우리 선조들이 이미 경험하였으며, 몇 해 전 필리핀에서의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었던 모 선교사의 예에서 보듯 우리나라의 선교사들 역시 해외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현재, 해외 선교는 타민족에게 혐오감과 모멸감을 줄지언정 결코 환영의 대상은 안 되리라 본다.

 

선교의 문제점과 아울러 순교자 영웅 만들기는 더욱 심각하다. 순교에 관한한 노골적으로 자신감을 비치고 있는 가톨릭의 순교사도 다시 검토해야할 사안이다. 소위 103명의 성인이라는 한국 가톨릭의 순교자들 이력을 살펴보자. 이들 중 황사영(1775-1801)은 명주비단에 황사영백서라는 문건을 남겼다.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중국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Alexandre de Gouea)에게 보내려던 편지다.

 

지난 해 가르치심을 주신 편지에서 몇 년 후에는 큰 배를 보내겠다는 분부는 받았습니다만 지금은 형세가 많이 달라져서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 계책이 있으므로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어찌할 도리 없이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전선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배와 사람의 수가 능히 말씀드린 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약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6천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예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죄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무겁다고 하였으니 비록 이 나라를 멸망시키다 하더라도 성교(聖敎)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인데…》

 

황사영은 이와 같은 매국적 서신을 북경의 프랑스 신부들에게 보내려 하다가 탄로가 났다.

외세를 끌어들여 조국을 패망시키더라도 종교의 자유를 갈망한 그의 방책은 반민족,

반국가의 역적으로 정리되기 충분하다. 하지만 가톨릭 호교의 입장에선 그를 위대한 순교자요

선각자로 평가를 내리는 것이 현재까지의 입장이다. 그 역시 1984년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식

때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성인 서품을 받았다.

 

천주교인이 외국함대를 요청한 것은 황사영의 백서가 처음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1790,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주동이 되어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황사영 등

이 서명을 했다. 두 번째는 1796년에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했으니 백서 사건은 세 번째가 된다.

103인 성인의 한 사람이요 한국 최초의 신부로 알려진 김대건 역시 프랑스 제국의 앞잡이 노릇

을 한 사람이다. 1866918,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조선을 침공했을 때의 길잡이는

조선인 천주교 신도 최선일, 최인서, 심순여 등 이었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외교 통로를

무시하고 선교를 빌미로, 아시아 식민지 정책 구현의 수단으로 선교사를 앞세운 것이 바로

제국 프랑스의 행태였다고 하면,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했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은 제사에 관한 로마 교황청의 지침이다. 조선에서 가톨릭이 박해를 받은

가장 큰 요인은 제사문제였다. 구베아 북경주교가 근거로 든 교황의 가르침은 조상이나

공자(孔子)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한 1742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교서였다.

 

하지만 1939, 교황 비오 12세는 그해 128'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를 공경

하는 예식을 비롯해 망자나 망자의 위패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허용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공자를 공경하는 행위를 우상숭배가 아닌 사회 문화적인 예절로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은 보호

육성한다. 또한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이나 오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나 호의를 가져  고려하고, 할 수 있다면 잘  보존하고자 한다"(전례헌장 37)

밝힘으로써, 조상제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렇다면 제사문제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수많은 신도들의 신앙과 신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속된 말로 개죽음을 당한 것으로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순교는 이와 같은 문제가 따른다.

사후에 성인으로 추존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는 사안이다. 200여 년 전 발생한, 이러한

비극을 오늘의 개신교는 되풀이하고자 한다. 순교를 미화하는 종교 권력자들의 음모는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샘물교회 순교자기념관과 함께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섬찟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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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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