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이 가장 후회하는 일 두 가지
2011.02.17 18:04 등록

세르비아 정보요원 숨겨주고 폭격당한 사건
가족· 측근 반대 물리치고 파룬궁 탄압 강행

 

 

“1999년 5월 나토군이 세르비아를 폭격했을 때 중국대사관을 철수시키지 않고 대사관 안에 세르비아 정보요원을 숨겨준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1999년 7월 파룬궁수련자들이 크게 늘어나자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룬궁을 탄압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중국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평생 동안 한 일 중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로 이 두 가지를 꼽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내용은 장쩌민이 자식의 입장에서 작성한 미공개 회고록 ‘부친을 회고한다’ 라는 내용에 포함돼 있다고 홍콩 잡지 ‘첸싸오(前哨)’가 최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1999년 나토군이 세르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했을 당시 중국대사관은 세르비아군 정보요원들을 지하에 숨겨두고 있었다. 나토 공습에 의해 국방 · 정보 · 경찰본부가 모두 파괴된데 당혹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부터 정보요원들의 은신처를 제공해 달라는 요청이 있자 중국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자 나토군은 중국대사관을 폭격했고 이 폭격으로 세르비아인 14명과 중국시민 3명이 사망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공습으로 당시 중국 내에서 반미 시위가 촉발됐고,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의 타격 목표를 잘못 설정한데 따른 오폭이었다며 사과했지만 중국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르비아 정보요원 숨기도록 지시


홍콩 잡지 첸싸오는 장쩌민이 중국대사관 내부에 세르비아 정보요원을 숨기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 결정을 후회하고 있으며 이를 심각한 정치적 실책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장쩌민의 회고록에는 중국정부가 폭격에 분노했지만 미국 측에서 중국 대사관 내부에 있던 세르비아 요원들의 원격 통신 증거를 비공식적으로 제시한 이후 반미 시위를 억제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도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나토군의 공습이 확대되자 중국 외무부는 장쩌민에게 베오그라드에서 직원을 철수할 것을 요청했지만 장쩌민은 밀로셰비치와의 유대관계를 위해 남아있으라고 지시했던 사실도 회고록에 나와 있다고 첸싸오는 전했다.


이 잡지는 또 회고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중국이 세르비아를 도와준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밀로셰비치의 요원들이 발칸 반도에서 격추된 미국 F-117 스텔스 전투기의 항법 장치와 단열재 및 부품들을 중국정부에 제공했다는 것이다.


첸싸오의 보도는 주로 장쩌민의 가족과 측근들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과거 고급 내부 문건이나 지도급 간부들의 회고록 내용이 홍콩에서 종종 노출된 사례로 볼 때 중국 언론인들은 첸싸오의 보도가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장쩌민이 후회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이 재임시절 결정한 파룬궁 탄압에 관한 것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 결정 이후 중국 내에 수많은 반대인사들이 생겨나고 자신의 입지가 점차 줄어들자 주변 인사들에게 푸념삼아 이런 내용을 말해왔다고 전해진다.


파룬궁 탄압사건은 1999년 4월 25일, 중공 정법위서기 뤄간(羅幹)과 그의 측근 허줘슈(何祚)가 텐진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이 사건으로 만 여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이 중난하이(中南海)에 있는 국무원 신방국(信放局)을 방문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질투심·위기감 느껴 파룬궁 탄압


중공은 이 사건을 ‘파룬궁 수련생이 중난하이를 포위한 사건’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하며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쩌민은 파룬궁수련자들이 점점 증가해 수천만 명에 육박하자 질투심과 권력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 탄압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 결정은 시작부터 정치국 상무위원 내부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상무위원들은 기공수련인 일종인 파룬궁을 그렇게 전면적으로 탄압할 필요가 있느냐고 탄압 결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장쩌민은 가족으로부터도 반대를 받았다고 하는데 장쩌민의 부인인 왕예핑(王野平)과 손자도 파룬궁을 수련했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장쩌민은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탄압하는 결정을 정치국에서 강압적으로 통과시켰다.


장쩌민이 내세운 이유는, 공산당 통치 아래의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한 개 조직이 큰 규모로 발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파룬궁은 중국 내외에서 중공의 죄상을 파헤치는 가장 유력한 단체가 됐다. 탄압에 관여한 중공 관료들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그림자처럼 다가와 박해반대와 항의활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뿐만 아니라 장쩌민을 추종해 적극적인 파룬궁 탄압을 진행해왔던 관리들은 해외 법원에 기소됐으며 이로 인해 해외에서 구속될 위기에 처해있다. 또 많은 관리들은 탄압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고 있어 장쩌민은 이 일로 인해 매우 고립되는 상황에 빠졌다.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함으로 인해 수천만 명의 대립된 사람들을 만들게 됐고, 탄압 이후 전 세계가 나서 파룬궁 박해 중지를 요구했지만 거부하다 이제는 자신이 평생 해온 일 중 가장 ‘바보처럼’ 처리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경찬 기자 kcl02@epochtimes.co.kr

http://www.epochtimes.co.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103&no=112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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