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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남자의 신학적사고

 

 

천국의 영성

-천국과 지옥에 대한 최근의 관심에 대해-

김영봉 목사

최근에 기독교 서점가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책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면서 한국교회 일가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바람을 일으킨 당사자는 토마스 주 남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녀는 과거 7년 동안 천국을 17번이이나 다녀오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을 썼다. 이와 함께 매리 백스터가 지은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라는 책도 이 바람에 가세하고 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저자들의 영적 경험에 기초해서 쓰였다는 점이다. 사실,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구약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내세 문제에 대해 히브리인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아려져 있다 시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과 묘사는 초기 유대교(구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종교 전통들을 통해 내세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교리를 만들었다고 본다. 신약성경에서도 내세적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요한계시록은 예외로 보일 수 있으나, 정작 이 책을 통해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초점이 내세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계 안에서 인정받는 권위 있는 문서를 토대로 하여 내세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문학적 혹은 동화적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어떤 초월적 경험을 토대로 삼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종류의 천국 여행기 혹은 지옥 여행기는 초기 유대교 시대부터 끊임없이 출현해 왔다. 그 중 어떤 것은 독자들을 심각한 오류로 인도하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독자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선한 열매를 맺기도 했다. 나는 위의 두 책이 독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나누려 한다.

 

하늘이 열리고

우선, 이러한 책을 대할 때 우리는 보통 입신 현상이라고 부르는 초월적-영적 경험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초월적-영적 경험의 원천은 대개 세 가지다. 첫째는 단순한 심리 현상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심리 작용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줄 때 보통의 환경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둘째로 악한 영에 의해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셋째,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보고 들은 것은 성령에 의한 영적 경험에 속한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는 동안 경험한 사탄의 유혹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누가복음에 보면 70명의 제자가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수께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0:18)고 말씀하시는데, 신약학자들은 이것도 역시 예수께서 본 영적 경험에 속한다고 본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도, 삼층천에 갔었다는 고백(고후 12:2)성령의 활동에 의해 일어난 영적 체험에 속한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그 이후로부터 오늘까지 진지한 구도자들에게 주어져 왔다.

 

문제는 한 사람이 어떤 영적 체험을 했을 , 그것이 위에서 말한 셋 중 어디에 속하는지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경험을 한 사람이나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영적 경험에 대해 기도와 성찰로써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도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오인할 수도, 악한 영에 의해 속을 수도 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 100년의 역사를 통해 거듭 확인된 사실이다. 영성이 깊다고 자인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자신에게 일어나는 영적 현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확인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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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충분히 성찰한 결과 성령의 역사로 확인 된 이후에도 영적 경험을 한 당사자는 여러 가지로 조심해야 하고, 그 사람의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세심하게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를 이제 설명해 보겠다. 한 사람이 영적 경험을 통해 천국을 목격했다 하자.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천국혹은 지옥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는 3차원 공간이 아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현대 물리학으로 11차원까지 확인했다말하는데, 현대 과학이 11차원까지 확인했다면 하나님의 차원(divine dimension) 그것을 초월하는 차원에 있다. 우리 인간은 3차원 공간만을 경험했기 때문에 4차원의 현상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11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차원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 말은 영적 경험을 통해 본 것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성령께서 천국의 어떤 차원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실재를 보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인식 한계에 있다. 지금은 3차원 TV가 개발되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TV2차원 평면 공간을 통해 3차원을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3차원을 모르는 사람이 TV 화면을 보았다면 모든 것을 2차원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다.

3차원의 실재를 2차원의 스크린에 비추면 실재와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를 본다고 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경험을 전하면서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라고 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경험을 당사자가 말로 표현한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또 한 번의 왜곡이 일어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는 데서 일어나는 왜곡이며, 그 말을 듣거나 읽는 사람들이 자기 배경에서 받아들임으로 일어나는 또 한 번의 왜곡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언어는 3차원 공간에서 경험하는 것조차 만족스럽게 담아 낼 수 없는 부족한 도구다. 게다가 사람마다 이해나는 폭과 깊이가 달라 전하는 사람의 의도가 그대로 전해지지도 않는다.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경이로운 노을을 보고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그 광경을 설명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내 언어가 그것을 제대로 담아낼 것이며, 내 말을 듣는 아내가 상상하는 노을은 내가 본 것과 얼마나 닮았겠는가? 하물며, 3차원 공간의 경험도 아닌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 왜곡은 얼마나 심하게 될 것인가? 경험한 당사자가 아무리 정직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려 해도 그에게 비추어진 영상 자체가 실제와 다르기 때문에 그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영적 경험을 거친 사람은 자신의 인식에 남겨진 영상을 그대로 묘사하려고 하기보다는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잔영(殘影)에 대해 묵상하고 성찰해야 한다. 자신이 목격하거나 들은 것에서 천국에 관한 어떤 정보를 얻어내려 하지 말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암시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자신이 본 모습을 언어로써 묘사하는 것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해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인정하고 말을 아끼는 편이 옳다. 그 경험에 대해 듣거나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간증에 그리 관심을 두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다. 일시적으로 경각심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방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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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창공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 하나님의 공간은 3차원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간도 1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용 가능한 용어가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용어밖에 없으므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묘사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그 용어는 실재에 대한 직설적 묘사가 아니라 비유가 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들을 때 직설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저 위 공간 어디에 계신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공간이 인간의 3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 외에 다른 표현을 쓸 방도가 없다. 언어적 한계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경험의 언어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 경험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해서는 비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영어로 “Our Father in heaven”이라고 말하는 것과 “Our Father in the sky”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 Sky는 비유적 의미의 여지가 없는 사실적 단어인 반면, heaven은 비유적 의미로 해석될 충분한 여지를 가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한다면, “창공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치는 이렇건만, 천국과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3차원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표현은 3차원의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 표현을 통해 전하려는 내용은 3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예컨대, 천국에서 우리가 먹게 될 음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다면(화제의 책 속에 한 장이 천국 음식에 대해 할애되어 있다) 그것은 3차원적 경험으로 천국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천국을 3차원으로 그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오류다. 1961년에 구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 인류 최초의 우주 배행을 하고 귀환한 후 아무리 둘러보아도 천국은 없더라라는, 지극히 유물론적인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었지만, 실상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말을 들은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 한 사람이 토로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이 지상에서 천국을 보지 못한다면 우주를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생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1차원의 시간을 무한정 늘린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영생이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얻는 질적으로 다른생명을 가리키는 것이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숨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논하면서 영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간을 선으로 본다면 - 이것은 시간의 부분들이 연속되어 있으며 어떤 부분도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시간에는 폭이 없고 길이만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이미지입니다 - 아마도 영원은 면이나 입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2차원인지 3차원인지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1차원 시간의 연속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무한정 오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옮겨간다뜻이다.

그러므로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개념으로 표현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들은 절대로 액면 그대로,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그 그림들을 통해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고 언어들은 버려야 한다.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표면적 언어에 붙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표현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혹시 그런 표현들을 읽는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을 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셨다면, 그 모습을 통해 하시려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가는 천국, 오는 천국

또 하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대중적 사고방식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킬 지경까지 잘못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천당이라는 말은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에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천국 혹은 하늘나라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인데, 다른 복음서나 서신에서는 하나님나라라고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 저자가 천국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유대적 어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천국혹은 하나님나라예수님의 설교의 중심 주제였다는 것은 20세기 신약한 연구의 몇 안 되는 합의점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나님나라 혹은 천국이 무엇이냐를 정확하게 요약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이미 미국 신약학자 노만 페린(Noman Perrin)은 예수께서 사용한 아람어에서 이 용어는 어떤 개념을 전하는 사실적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를 전하는 상징적 언어라고 지적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한 논의에 쐐기를 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전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노력은 지금가지 지속되고 있다. 최근에 활발하게 논의된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에 힘입어 예수님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하나님나라 혹은 천국에 들어간다라는 말은 우리 중에 임재 하는 하나님의 영의 현존에 눈을 뜨고 그분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 그분이 이끄는 대로 살아감으로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 개념에 기초하여 대중적 천국관의 문제를 몇 가지 짚어 보자. 우선, 예수님은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간다는 표현보다는 온다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셨다. 그런데 대중적 천국관에서는 간다는 표현이 압도적이다. 천국의 진행 방향을 180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어서 천국 간다는 식의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다. 반면, “천국이 임한다혹은 천국이 너희 중에 있다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죽은 다음 천국가게 하소서가 아니라 천국이 저희에게 임하게 하소서”(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구하고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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