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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라는 책에서 지적한 황충(누리)떼와 메뚜기의 차이점, 그리고 구성(九姓)의 의문점에 대해서!!!

우리는 메뚜기에 대해서 많이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추억 속에 그려진 력사에서 요즘은 들녘에 나가

어린아이들까지 즐거움에 웃음바다다.
그런데 정말로 메뚜기가 웃음으로 논두렁을 기웃거리며

이리저리 다녀도 되는 현상이었는가? 아니면,

눈물의 바다고 고통의 비명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거나 "메뚜기"란 말로 붙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요즘 난데없이 "사막 메뚜기"란 말이 떠돈다.

물론 그런 지역에서 생존하기 때문에 붙여져서 리해하기는 쉽다.

이런 말을 붙이는 까닭은 한반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력사 속에서는 이미 그런 곤충이 존재했고,

피해도 매우 컸다. 그 이름이 "황충(蝗蟲)"이며 순수한 한글로는 "누리"이다.










이것이 조선의 어디에도 나타났겠지만, 특히 "호남"과 관련하여 보기로 하자.

(1) 右議政李台佐曰: 嶺南兩麥凶 , 八道蝗蟲大熾.
우의정 리태좌가 아뢰기를, "령남에는 보리와 밀이 흉년이 들었고,

팔도에는 황충[누리]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영조실록 22권, 5년(1729) 5월 10일 갑인]





조선의 지역을 8도라 고 했으니,

그 8도 속에는 전라도·경상도가 들어 있고,

통상 우리는 그 전라도를 호남(湖南),

경상도를 령남(嶺南)이라고 한다.
여기에 나온 사건은 그런 8도에 황충(蝗蟲),

즉 누리떼가 크게 번지고 있다는 보고이다.







대개 우리는 메뚜기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언젠가

tv방송에서 아라비아 사막에서 홍해를 넘나들며,

소말리아·이디오피아·예멘·오만·사이디아라비아 등지로

떼지어 날아다니며 폐해를 끼친다며 특집으로

방영한 데서는 "사막 메뚜기"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대개 추억 속에 들녘에서 가을에 잡아

구워먹기도 했던 그런 "메뚜기(grasshopper)"는 아닌 것이다.

위에 말한 "사막 메뚜기"는《조선왕조실록》등의

조선의 여러 력사 속에서도 언급되는 "황충" 즉 "누리(locust)"이다.
이런 누리떼가 8도에 번지고 그것도 특히

호남·령남 지방에도 있었다면, 그 호남·령남은

결코 한반도일 수가 없다. 그것도 시기가 1729년이라면 더더욱 아니다.









(2) 上命讀湖南道臣蟲災狀聞, 敎曰: 姚崇焚蝗, 雖爲目前救急之圖,

盧懷愼之言, 不無意見. 蟲之蝕穀, 良由否德, 彼雖微物,

由我化生, 乃一號令而灸之, 此何異於勸人殺人, 而又以法殺之者乎.

此後申飭道臣, 所拾蟲只坎而痙之, 勿焚灸.


임금이 명하여 호남 관찰사의 황충재해 장계를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요숭(姚崇: 당나라 재상)이 황충을

불에 태운 것은 비록 눈 앞의 급함을 구하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로회신의 말은 의견이 없지 않다. 벌레(황충)가 곡식을 먹는 것은

진실로 임금의 부덕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저것이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나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한번 호령하였다 하여 불에 태운다면 이는 사람에게

살인하기를 권하고 또 법으로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뒤로는 관찰사에게 신칙하여 잡은 벌레를 구덩이를 파서

묻고 불에 태우지 말게 하라."하였다.

[영조실록 111권, 44년(1768) 7월 23일 무신]





여기서는 그 황충의 재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호남이다.

말하자면 호남 지방에서 그 사막 메뚜기,

즉 누리떼의 폐해가 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누리떼를 잡아 없애는 방법을

태워 죽이지 말고 파 묻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누리떼의 발생지역을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해서 "호남" 지방이 그런 누리떼가 극성을 부렸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찾아서

그곳이 호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全羅道古阜牟平光州仁義馬令靈光長興

南平順天金溝益州, 蝗蟲遇風雨盡死.


전라도의 고부·모평·광주·인의·마령·령광·장흥·

남평·순천·금구·익주에 황충이 바람과 비를 만나 모조리 죽었다.

[태종실록 10권, 5년(1405) 7월 29일 임술]




(4) 全羅道觀察使李淑 馳啓南原等處蝗蟲害穀.

下書曰: 卿當盡心捕獲, 以除民病.
전라도 관찰사 리숙감이 치계하기를,

"남원 등지에 황충이 곡식을 해칩니다."하니,

글을 내려 말하기를, "경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 잡아서,

백성의 근심을 제거하라."하였다.

[성종실록 231권, 20년(1489) 8월 1일 병술]






(5) 全羅道…扶安靈巖, 蝗.
전라도…부안과 령암에는 황충이 있었다.

[명종실록 30권, 19년(1564) 7월 15일 을묘]





위의 (3)(4)(5) 지역은 분명 전라도이다.

그리고 그런 곳을 우리는 호남이라고 부른다.
전라도와 호남이 반드시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재 사막 메뚜기, 즉 누리떼의 폐해로 보아서는 동일하다.
이런 누리떼 폐해가 1405년/1488년/1564년/1725년/1768년이므로,

조선초기부터 줄곧 그런 폐해가 호남지방에 있어왔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그런 메뚜기는 존재하지 않고,

흑해·카스피해·아랄해·발하슈호의 남쪽 지역에서

그런 사막 메뚜기, 즉 누리떼의 폐해가 있었다는 것은

"湖南"이란 지역이 바로 페르시아·아라비아 지역이고,

그 "湖"란 말은 바로 "카스피해·아랄해·발하슈호"일 것이다.

그래야 자연현상이 알맞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알제리·니제르·차드·수단에

사막 메뚜기가 있다고 해서 그런 곳까지

조선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느냐고 빈정댄다면 그것은 정말

"朝鮮"의 의미를 모르고 말 그대로 "빈정대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아시아"이다. 그것이 동남서북의

어디를 말하든 아시아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익주(益州)에 기자의 준왕이 내려와서

마한(馬韓)을 세웠다는 곳에는

마한 54개국의 명칭이 나오며,

거기에 월지국(月支國/月氏國)이 나오는데,

바로 이 나라가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에 진출하여

박트리아(Bactria)를 세웠다는 아프가니스탄의 북부 지역이다.









같은 소리의 다른 표기는 "일리국(一離國)"이 있는데,

이것은 발하슈호 이리강 유역에 있는 "伊犁國·Ili"와 같고,

"막로국(莫盧國)"은 그 소리가 사실 "모로/무루"이므로,

간다라 서쪽 "무루(Mouru)"일 것이다. 이 지명은

지금은 "메르브(Merv)"이다. "V"는 본디 홀소리

[u][ㅜ]의 소린데, 뒷날에 닿소리로 변형되어

[브]라고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全羅"란 말은 "全州+羅州"를 가리키는 것으로

근세에 지은 말이며, 고대부터는 아마도 계속

"湖南"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 호남에 자연폐해를 입은

"황충(=누리·locust)"의 활동 지역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서남아시아 지역이며, 이들이 동쪽으로 날아와

천산산맥 동쪽까지 내몽골지역과 산서성·

하남성·호남성까지도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이런 일은 조선의 력사 속에서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도 일어나고 있고, 눈물과

굶주림이 공존한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전혀

그렇지 않고 "메뚜기"와 함께 추억 속에 산다.




《바이블》의 레위기 11:22에는 분명히 먹을 수 있는 곤충에서

"grasshopper"와 "locust"가 적혀 있다. 이들을 똑같이

"메뚜기"로 번역되어 있지만, 엄연히 이 둘은 다르다.

전자는 정주형으로 톡톡 튀는 것이 고작이지만,

후자는 이주형·이동형이며, 그것도 대륙을 넘나드는 비행을 한다.





(참고: 사진 자료 출처) [http://blog.naver.com/sk6044?Redirect=Log&logNo=20005438097]
[http://blog.naver.com/ph824204?Redirect=Log&logNo=140006728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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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가 싸운 고구려 땅 중앙아시아의 중앙?
력사는 력사가가 만든다. 이것은 진리다.
그 력사에는 진실도, 거짓도 함께 한다. 그 까닭은 사람이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진실은 밝혀지며, 언젠가는 반드시 사람들이 알게 되어있다. 우리는 한국사, 아니 조선사를 공부하면서 늘 가르쳐준 내용에 충실했다. 한 문제라도 중등·고등학교에서 배운 대로 쓰지 않으면 대학에도 갈 수 없다. 그렇게 배우는 것이 "學"이다.

여기에 스스로 공부하더라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틀을 벗어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12년을 공부한들 그 "학습효과"의 증대뿐이지,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게 하여 대학에 가면 "학문의 자유"라는 그럴 듯한 구호가 있긴 하지만, 역시 "취직시험"이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이 또한 그 틀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현실이다.

진실이 드러날 수 없는 환경에서 외로이 "진실 타령"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럴 수만은 없는 것이 또한 "진실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 진실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대륙조선사, 아니 아시아조선사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충고한다. 지금까지의 구조 속에서만 생각하거나, 보지 말고, 구조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훨씬 많은 것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럼 다음의 증언을 한번 보자. 수필가 김문숙씨의 여행담이다.


(1) 레닌그라드에서 타슈켄트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기질쿰'사막은 사막이라기보다 붉게 타는 광막한 황무지였다.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도 없는 끝없이 계속되는 초토와 같은 기질쿰의 처절한 경관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 가늘게 꿈틀거리는 실뱀같은 '시루 다리아'강이 아침 햇살에 금속 빛으로 반짝인다. 강을 끼고 양측에 간간이 녹색이 풀이끼처럼 붙어있다. 천산산맥의 빙하에서 시작된 두 강은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지나서 … '시루 다리아'와 '암 다리아'. 타슈켄트는 그 가운데의 푸른 점. 중국 돈황에서 인도·이란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길목의 오아시스 도시 '타슈켄트·사마르칸트·부하라 그리고 히와' ….

조선 사람이 살고 있고, 조선어를 가르치는 사범대학이 있다기에 …. 타슈켄트의 한인들은 자기네들을 '고려사람'이라 한다. 소련연방 우즈베크공화국에 사는 소수민족 조선족으로, 그들의 조국은 북한도, 남한도 아닌 소련이었다. 이제 3세·4세들은 한국도, 한국말도 모른다. 얼국모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50년의 세월의 장벽은 그들에게서 '조선'을 앗아가 버렸다. …
소련에는 약 40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

한인들의 소련 이주는 1862년에 시작되었고,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강압을 피해 부쩍 늘어난 1930년 말에는 약 25만 명으로 늘어났다. 1939년 무렵 연해주에서 대소련 첩보활동을 활발하게 펴던 일본은 연해주으 한인들을 대소 첩보활동에 이용하곤 했다. 이에 발끈한 소련 당국은 1937년 9월부터 12월까지 사이에 연해주와 모고차 시에 사는 한인들을 3-4주일이나 걸려 먼 중앙아시아 우즈베크와 카자흐로 강제이주시켰다.[김문숙,『제8수필집: 꽃들에게 지혜를 묻다』(대주기획, 2006), pp.111-113]


이 증언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이 한인들이 살고 있는데 1862년부터라고 했고, 1937년에 강제이주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옛날부터 '고려사람'으로 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력사적 사실을 1937년에 력사의 혼혈을 시켜버렸다.n 그래서 그 중앙아시아의 조선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인데, 사실은 그보다 먼저, 아니 그 옛날부터 그곳이 "고려 땅"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 수필가의 여행에서의 증언은 왜곡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르 다르여와 아무 다르여가 있는 지역이 지금까지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고려사람"이라고 하는 까닭이 어디에서부터 있어 왔겠는가? 그것은 력사, 아니 조선의 력사가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시아조선사에 의심이나, 회의를 가진 사람들은
백제·고구려가 멸망하는 력사 현장부터 확실히 보아야 한다.
우리는 통상 라당련합군의 활동에서부터 경상도·전라도의 감정골이 깊어져
지금도 지역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정말 한반도에 그런 경상도·전라도라는 말과,
신라와 백제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인지, 우리는 정말 알고나 그런 행태를 부리는 것인지를
이번에는 정말로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알고 넘어가자.

이게 진짜 조선력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 그럼 설인귀의 짤막한 력사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2) 高宗思其(薛仁貴)功, 開耀元年, 復召見, 謂曰 '往九成宮遭水, 無卿已爲魚矣. 卿又北伐九姓, 東擊高麗·漠北·遼東咸遵聲敎者, 竝卿之力也. 卿雖有過, 豈可相忘? 有人云卿烏海城下自不擊賊, 致使失利, 朕所恨者, 唯此事耳. 今西邊不靜, 瓜·沙路絶, 卿豈可高枕鄕邑, 不爲朕指揮耶?' 於是起授瓜州長史, 尋拜右領軍衛將·檢校代州都督. 又率兵擊突厥元珍等於雲州, 斬首萬餘級, 獲生口二萬餘人·駝馬牛羊三萬餘頭. 賊聞仁貴復起爲將, 素憚其名. 皆奔散, 不敢當之. 其年仁貴病卒年七十一.[『舊唐書』卷83 列傳33 薛仁貴, pp.2779-2782]

[고종(649-683)은 설인귀의 공로를 생각하여 681년에 다시 불러다가 말하기를, '구성궁에 갔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그대는 또 북쪽으로 구성(九姓)을 토벌하고, 동쪽으로 고구려·막북·료동을 공격하니 모두 성교를 따르는 것은 모두 그대의 힘이다. 그대에게 비록 허물이 있다고 하지만, 어찌 그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대가 오해성(烏海城) 아래에서 적들을 공격하지 않아 손해를 보게 되어 짐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오직 이 일이라고 하는데, 지금 서쪽 변방에는 어지럽고, 과주로(瓜州路)·사주로(沙州路)는 길이 끊어졌으니, 그대는 어찌 고행에서 편히 지내며, 짐의 지휘를 받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여 설인귀를 다시 과주장사에 임명하였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우령군위장군과 검교대주도독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설인귀는 군사를 거느리고 돌굴(Turk) 원진(元珍) 등을 운주(雲州)에서 공격하여 그들 1만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포로 2만여 명을 잡고, 낙타·말·소·양 3만 마리를 잡아왔다. 적들이 설인귀가 다시 장군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이름을 듣는 것을 싫어하며 모두 달아나 흩어졌으며, 감히 당적하지 못하였다. 이때 설인귀는 늙어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71살이었다.]


이것은『구당서』의 설인귀에 나온 짧은 글이다.
여기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지역이 어디인지를 눈으로 보면 알 것이다.
다름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중심지가 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첫째, "과주로·사주로"는 중앙아시아의 동쪽에 해당되는데, 천산산맥의 동쪽, 타림분지의 동쪽이며,
지금의 돈황이 있는 지역이다.


둘째, "오해성"이란 두 말할 것 없이 "청해(靑海)"의 남쪽 "고해(苦海)·칠도해(七島海)"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북위 35.4도 동경 99도에 있는 곳이다.


셋째, "북쪽으로 구성(九姓)"이 있다고 했으니, 그 "구성", 즉 아홉 성은 무엇인가?
이 성씨의 지명은 나보다고 이미 잘 풀어놓은 정수일의『씰크로드학』의 글을 보자.


"당대에는 파미르고원 이서 출신으로서 중국에 체재하는 사람들을 일괄하여 강(康)·조(曹)·석(石)·미(米)·하(何)·심( )·무지(戊地)·사(史)·안(安)의 소구구성(昭武九姓)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다. 이들 9성은 대부분 소그드인들이었다. … 오아시스로의 관문인 돈황의 동편에는 안성(安城)이라는 소그드인들의 집성촌이 있었는데, 8세기에는 9성의 약 300호 14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타슈켄트·카그탄·토카리스탄·케쉬 등 중앙아시아 지방 출신으로서 주로 장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다."[정수일,『씰크로드학』(창작과비평사, 2001), p.450]


이 구성들이 있는 중심지는 아무 다르여 중류의 북위 39도 동경 66도가 되는 곳인데, 옛날의 강거(康居)·소그드(粟 /速毒)·대완(大宛) 지역이다. 이곳은 물론 천산산맥의 파미르고원 서쪽 지역이다. 바로 이곳에서 백제·고구려·신라의 전쟁이 있었고, 우리는 여기에 당나라가 개입되었다고 하지만, 그 구성의 남쪽에 "唐"이 있었다는 말은 곧 신라의 중앙조성 "당조(唐朝)"라는 말이지, "당나라"는 아닌 것이다. 바로 그곳에 백제가 있었던 곳이며, 그곳 또한 신라가 차지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구 "구성"이 차지한 지역의 동쪽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말이니,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이『구당서』에 적혀 있다. 바로 그 시기가 681년이다.

이보다 쪼끔 이른 시기 657년(현경2)에 이어 660년에서 667네 이르기까지 소정방과 설인귀의 군사들이 백제와 싸웠던 곳은 북위 38도 동경 76도 중심의 소륵(疏勒)·주구반(朱俱盤)·총령(蔥嶺)·엽엽수(葉葉水)·마두(馬頭)이고, 이리수(伊麗水)·석국(石國: 타슈켄트)이며, 이곳에서 소정방과 설인귀가 백제를 공격했는데, 언제 한반도로 날아와서 멸망시켰는가?
아마도 소정방과 설인귀 등의 군사들은 귀신이었던 모양이다. 한반도가 조선이라면, 그런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느니 말이다.

특히 소정방은 670년(함형원년)에 대비령(大非嶺: 靑海 서쪽 大非川)의 오해성(烏海城)의 토번(吐藩)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곽대봉(郭待封) 등 40만 대군을 토벌했다. 그리고 나서 681년에 청해성 서쪽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언제 한반도에까지 와서 전쟁을 했겠는가? 게다가 설인귀는 전쟁터에서 나이가 71살에 병들어 죽었다.

그렇다면 백두산이라는 불함산(不咸山)·불내성(不耐城)의 "不咸·不耐"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그것은 천산(天山)의 서쪽 지역이 대완(大宛)이며, 이것을 "Ferghana/Fergana"라 하며, 한자로 "撥汗"(발한)이라는 것으로 보아, 바로 이 곳의 산 "천산"을 가리키는 말이라 본다.

그리고 그 구성의 동쪽에 "高麗", 즉 "高句麗"를 설인귀로 하여금 공격했다고 했으니, 한반도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곧 소정방과 설인귀의 전기에서 고구려·백제·신라의 터전은 아시아 전체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아시아가 조선이라는 증거는 바로 이런데서 찾을 수 있다.

호로하(瓠盧河)!
그 이름만 들어도 이 강은 한반도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름에서 붙어있는 글자가 "河"이다. 한반도의 력사 속에서나, 현재의 력사에서 볼 때에 지리적 명칭에 "水"니, "江"이 붙은 강이름은 있어도 "河"는 없다. 지명에 "河東"이 있긴 하지만, 그곳엔 물론 "河"가 없다. 이것은 아시아 넓은 대륙에서 이 한반도에 갖다 붙여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날(2005. 4. 6)에 이 "호로하"와 관련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엔 "호로하"를 <중국력사지도집>(명청시기)의 것을 보면, 산서성 북쪽에 "울현(蔚縣)을 거쳐 북쪽으로 흐르는 상간하(桑乾河)의 샛강인 "十里河"로 보았다. 그 까닭을 이 호로하와 관련된 지명이 "칠중성(七重城)=중성(重城)"이라는 말 때문이었고, 또 당나라 류인궤, 리근행 등이 고구려를 공격했고, 신라를 공격했던 "호로하"니, "칠중성"에 얼음이 "2자[二尺=42cm]"나 되는 기후 때문이었다.

이렇게 본 것은 이미 1차 왜곡된 력사의 자료에 치중되었기 때문에 주변의 상관관계를 더 살피지 못한 잘못 때문에 나온 결론이지만, 이제는 "아시아가 조선"이라는 사관 속에서는 더 넓은 지역에서 확실한 지명·강이름들이 찾을 수 있으므로, 그 력사적 사실의 현장도 당연히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구당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 顯慶二年 詔(薛)仁貴副程名振於遼東經略 破高麗於貴端城, 斬首三千級. 明年, …高麗有善射者 於石城下射殺十餘人. …尋又領兵擊九姓突厥於天山 將行 高宗內出甲 令仁貴試之.

657년에 설인귀는 고구려 군사를 귀단성에서 무찔렀으며, 658년에 고구려에 활 잘 쏘는 사람이 석성 아래에서 10명 남짓을 쏘아 죽였다. 얼마 뒤에 또 군사를 거느리고 구성 돌굴(=투르크)을 천산에서 무찔렀다고 했다.
소정방·설인귀가 643∼655까지 타쉬켄트·발하슈호·천산산맥에서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백제와 글안·말갈 군사들과 련합하여 전쟁을 벌였다고 했다. 그러니 이들은 한반도에 올 수도 없고 있지도 않았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그리고 지금 657∼658년에도 그들은 발하슈호 남쪽 강 이리하(伊犁河: Ili)에서 서쪽, 천산산맥의 서쪽 석성(石城), 즉 타슈켄트(Tashkent)에서도 싸웠다. 바로 이 타슈켄트가 석국(石國)이라 부르며,『세종실록 지리지』의 "석주(石州)"이다. 도저히 소정방·설인귀 등이 한반도에 발을 디딜 시간적 여유나, 공간적 이동능력이 전혀 없다. 바로 그곳이어야 마땅하다.
게다가 여기에 구성돌굴(九姓突厥)이라면 무엇을 의미할까?

그 구성은 아홉 성씨들이 여기저기 사는 곳을 말한다.
그것은 安國·何國·曹國·史國·米國·穆國·石國 등등을 말하는데, 이들은 바로 아랄해 동남쪽 우즈베케스탄, 즉 옛날 옥저(沃沮)가 있는 시르 다르여(Syr Dar'ya) 유역에 있는 지방의 호족들이다.
여기가 어딘데 고구려·백제·신라·당조의 군사들이 어우러져서 싸웠단 말인가. 그것도 투르크·말갈 군사들까지 끌어들여서 말이다. 자! 여기서 다시 고구려·신라의 전쟁에 당조 군사들이 끼어있는데, 바로 673년의 호로하 전투이다.


(2) 高宗 咸亨四年閏五月丁卯 燕山道總管李謹行 破高麗反黨於瓠盧河之西 高麗平壤餘衆遁入新羅.[『舊唐書』권5 本紀5 高宗下] [고종은 673년 윤5월 정묘일에 연산도총관 리근행이 고구려 반란군을 호로하 서쪽에서 무찌르니, 고구려 평양의 남은 무리들은 신라로 달아났다.]

이 사료는『삼국사기』(고구려본기10 보장왕)의 것과 같으므로, 그 사건의 신뢰성은 높으며, 여기에서 말해주듯이 고구려 군사를 치는데 그곳이 "호로하" 서쪽 지역이다. 이 "호로하"를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 "임진강"이라고 한다. 그럴까?
이 673년에 있었던 사건의 "호로하"와 관련 있는 지명은 무엇보다도 "칠중성"이다.『신증 동국여지승람』(권11 적성현)에서는 "七重縣=七重城=重城"이며, 이곳은 "개성부(開城府)"에 예속되었다.
그렇다면 개성부와 멀지 않는 곳이다.

이 "호로하"를『중국력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제5권)(p.63-64)에서 보면, "托什罕河=胡蘆河"로 나오며, 이 "胡蘆河=瓠盧河"인데, 글자의 모양이 다른 것은 단지 간체자로 나타냈을 뿐이다. 이 강은 아크치(Akqi: 阿合奇)와 우쉬((Wushi: 烏什)를 지나 고묵주(姑墨州), 즉 아크쑤(阿克蘇)를 지나는 강이며, 언기(焉耆: 카라샤르)로 들어가는 개도하(開都河)의 다른 이름이다. 간단히 경위도로 보면 북위41도 동경 76도에서 동쪽으로 80도로 흘러 들어간다.
이 "언기"가 "개성부"이며, "우쉬"가 "大石城"인데, 이것이 곧 "重城", 즉 七重縣인 것이다.

이 지역의 설명은 곧 643년부터 줄곧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서역"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며, 이곳에서 백제·고구려가 멸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젠 아무리 한반도의 "임진강"을 "호로하"라고 우겨본들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호로하는 중앙아시아 천산산맥에 있는 강이름이다.  
leeby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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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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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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