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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


1.  콩



   콩은 쌀 이전에  주식이였고  천신께 올리는 제물이며 콩 斗(두), 太(태)로  

頭, 體, 禮, 登, 豊, 太平洋, 黑太, 白太 , 豆滿江 에 콩 豆와 콩 太가 들어있다.

머리가 깨어나는 머리 두,頭

뼈가 튼튼 해지는 몸 체,   體

곡진한 뜻을 표시한 예절 예,  禮

깍지 마다 터질 듯 콩이 여문 풍년   풍,   豊

콩 농사가 잘돼 편안한 태평,   太平

콩을 실어 날랐던 바다  태평양,     太平洋

콩을 종류를 가르키는  흑태, 백태, 황태, 등,   黑太,  白太,  黃太

발해의  콩을  실은 배가 가득했다 는  두만강       豆滿江



三危太白



삼위태백 :  옛날  하늘나라에 어른 환인이 있었는데 그 아들 환웅이

누차 하늘 아래에 뜻을 두었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삼위(三危)태백 즉

세 사람이 차례로 제단 앞에 단정히 앉아 콩을 바치고 고하는 데가 있어 가히

인간을 도울만 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황웅에게 주어 보내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사람들이 콩을 천신께 바치고 고했던 산마루

신단수아래 내려와 그곳을  神市(신시)라 이름했으며 이가 바로 환웅천왕이시다.



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병, 주형, 주선악의 장을

지휘하여 무릇 삼백육식여 가지의 일을 세상에 머물면서 이치로써 다스렸다.



대개 太태는  크다, 심하다, 맨 처음이다는 뜻으로 훈독하는데 우리는 콩 이라는

뜻으로도 훈독하는데 이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다.



神壇樹 신단수의 樹자에서도 나무를 상징하는 목木자에 땅을 상징하는 부호 一가

합해진 十자 아래 콩을 뜻하는 豆자를 쓰고 법을 상징하는 寸 촌자를 붙여 만들

어진 것이다.



콩의 원산지는 발해 ,

청국장은 발해의 원주민이 삶은 콩을 말안장에 싣고

다니다 자연 발효한 식품이며  ,콩은 흔히 밭의 소고기라 하며  

콩의 최대 생산지 및  수출국은 발해로 두만강 연해주 일대가 주생산지로

두만강, 태평양 등은 콩에서  유래되었고   콩은 다른 작물과 달리 싹보다

뿌리가 먼저 나와 거름이 필요없고  오히려 뿌리의 혹덩어리가 거름을 만든다.



콩은  코에서 나왔고

코와 잉태한다는 孕잉자의 종음을 합하여 만들어 졌고 뱃속의 아이가 생길 때

맨 처음 코가 생김이며 각 성씨의 시조를 鼻祖비조라 이른다.

신장을 콩팥이라 함은 그 콩팥에서 씨앗이 생기고 그 씨앗을 여자의 콩팥에 매여

있는 여자의 자궁에 들어가 잉태된다.



녹두는 뱃속의 음식물을 중화시키기 때문에 독한 음식이나, 좋은 약도 중화시켜

산삼도 도라지가 되어 한약 먹을 때  녹두 못먹게 한다.



숙주 나물은 잘 변하여 제일 먼저 변절한 신숙주를 두고 한 말이며 숙주나물은

주독과 열독을 풀러주고 삼초를 이롭게 한다.



미국에 유학한 동포가 학비를 마련하고자 이 숙주나물을 팔았는데 미국의 한 과학자가

숙주나물에 몸에 좋은 성분이 검출되었다 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콩 노래



원시 조상이 야생의 콩  취하여 심을 적에

조개껍질 농구 삼아 갈고 매니  곡식재배 비롯이라

그리하여 농사 짓자  김맬 호자 만들었지

산같이 쌓여 풍년 풍자  신께 올린 오를 등자

몸 체자 예도 예자  머리 두자 생겨났네

지각이 열리어  온갖 곡식 심게 됐네

콩이 소금 만나  된장 담가 먹음에

우리 생명 기름이  이로부터 길어졌네

콩의 원산지는  한반도 연해주

세계 식물학자  다 아는 사실이네

강 이름 두만이라  콩 실은 배 가득했지

콩 나물 먹는 법   우리한테 나왔지만

지금의 세상에선  제일가는 식품이네

콩이 솔잎 만나  신선음식 되었지

신선이 무엇인가  사람 산이 합침이네

지금도 우리 땅엔 야생하는 콩 있지

그 이름 샛콩  지천으로 널려 있네

맨 처음 콩이 부엌에 들어  부엌 두자 부엌 주자 지어졌네  

고라는 섬에 채우고  두라는 말로 헤아려

물화유통 활발하니  어딜 가도  걱정 없지

고 주둥이 가죽 입혀  소리내니 등당 등당

중국사람 흉낸 소리  텅탕 텅탕

우리사람  아무리 들어봐도  텅탕으로 아니 들려

이로 보아 우리 문자 분명해

딸 난 아내 구짖으면  동네사람 남편에게 말하기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네

부여시절 정월에는  콩섬맞이 제천 행사  공무중단 죄수사면

춤 노래 이어졌네  콩 이름 太태라 하여

태극이란 말 나왔네

태평이란  삼년을 농사 짓지 않아도 콩을 고루 먹고서

살 수가 있다는 뜻이네

태묘란 콩을 천신하는 집을 말함이요.

태자란

그 제사 받들 사람 말함이네

팥은 간식으로 먹지만  돌림병 막을 때 쓰이고

녹두는 항상 먹을 수도 있지만  해독할 때  요긴 하네

태극의 이치란  만년 가도 변함 없고

팔괘의 의미란  때에 따라 바뀌지네

그러므로 하늘, 땅, 막힌 괘를  땅, 하늘  통할 괘로 바꾸고

수화기제괘를 뇌풍항괘로 바꿔야 하네

바꿔라는 노래  이런 일이 아니냐

유태인이 조작한  유전자 조작 콩

콩 같으나 콩 아니지  유태라는 말 바로 그렇네

배움이 먼 데 있지 않다오    가까운  말  탐구하소.



콩은 음악의 시원으로

농작물은 흥겨운 가락을 좋아해서 농사를 지을 때 풍작굿을 쳐 주었는데

부여의 콩섬맞이굿 즉 영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콩 농사를 지을 때 남을 흉보거나 싸움말을 하면  빈깍지가 많거나  먼저 여문

덜 된 콩이 된다하여  말 조심하고  화합하는 말을 해야 농사가 잘 된다 하여

별스럽게  야한 소리를 해도 흉이 되지 않고 오히려 농사가 잘 된다 하였다."



논두렁이나 길가 수로변에 거름없이 심을 수 있어 유전자 콩을 먹지 말고 남는

땅에 그냥 거름 없이 심어면 되는  농사짓기 쉬운  콩 농사를 장려하여  토종콩을

장려해야 한다.



콩을 太태자 (처음, 클, 심하다, 콩 ) 로  청태, 백태, 흑태로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고

犬견은  꼬리를 위로 감은     狗구는  꼬리를 아래로 내린

貂초는 꼬리가 짧은 동강개 로

獻헌은  천신(천강성)께 개를 바친다는 것이고

천강성은 북두칠성 (: 첫번째 천추, 두번째 천선, 세번째 천기, 넷째 천권,

다섯째 옥형, 여섯째 개양, 일곱번째 요광 ,  첫번째에서 네번째가 곡식을 계량

하는 말斗의 형상, 다섯 째에서 일곱번째 까지가 말의 손잡이 형상)을 보좌하는

천보성과 천강성중 하나이다.

개는  기혈을 탁하게 하며  마늘과 같이 먹으면 독이 된다하여  옛날 선비의

집에서는 먹지 않았고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콩의 20%이상은 한국 콩 종자로 밭고기라 불리며

단백질, 지방, 등 영양가가 풍부하여  밭의 소고기고 유방암, 전립선암, 골다골증

치매 같은 만성질환을 예방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임상 결과가 대거

발표되었다.



유전자 조작콩은 유태인(猶太人) 이 조작한 콩으로 콩 같지만 콩이 아니다(猶太)



솟대에서 천군이 천신께 제사 드릴 때는 솟대에 북과 방울을 달아 놓고 지냈는데

북은 원래 콩을 담았던 큰 그릇에서 비롯되었고 방울은 바로 콩의 형상을

금속으로 만들었음에서 유래하고

솟대위의 오리류의 기러기는  물에서 살아 물을 상징하고 계절을 알리고 암수의

사랑이 두텁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다.

솟대문화는 콩 생산지와 같고  제상상에 콩나물이 올라가고 밥상의 중앙에는

간장이 차지한다.



素金 소금은  옛날에 콩과 맞바꾸었는데 소금은 산골에는 귀해 하얀금이다.

옛 고구려 땅인 지금 중국의 내몽고에는 무진장한 염산이 있는데, 현재 채취한

소금만으로도 12억 중국 인구가 600년은 먹을 수 있으며 그걸 다 소비한다 해도

3년 이면 회복된다고 중국사람이 자랑하고 있어  옛 고구려에는 그런 무진장한

염산이 있었고 태평을 구가할 만한 콩을 생산했으며 물화의 유통을 수레로 하였다.

고구려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온차라는 가벼운 수레를 타고 있는 고분벽화만

보아도 당시의 국력을 가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뒷날 고려나 조선에서는 임금도 수레를 타지 못했으니 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로  중국을 과대 선전하기 위한 소설이고

정사에 가장 가까운 것은  진수의 삼국지죠

여기에  부여(고구려의 전신) 사람들이  밍크코트와  부츠를  신고다녔다는  구절이 있죠


정사에 가장 가까운  진수의 삼국지 권 30 부여(고구려의 전신)조

" 흰 옷 입은 것을 숭상하여 흰 베에 큰소매의 도포와 바지를 해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들이 할 때는 비단으로 옷을 해 입고 귀한 사람은 여우와 너구리와 흰원숭이와

검은 담비의 털로 옷을 지어 입으며 금과 은으로써 모자를 장식했다. "



부여시대에 가죽신을 신고 다녔는데  구한말까지 짚신을 신고다닌 건

고려때  망명한  목축업을 하던 발해사람을  백적이라 하여  호적에 올리지 않고

천대 했으며  조선때에는  호적에는  올려 주되  백정으로  천대했습니다.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편

"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에서 세워 대를 이어가게 하고 진왕 스스로는 자립하여 왕이 될 수 없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찰벼를 심으며 누에를 기르고 비단과 면포를 짜 입으며, 소와 말을 길들여 타고 수레를 사용할 줄 안다.

혼인에는 예속을 지키고 남녀가 분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써 죽은 이를 보내니 그 뜻은 죽은 자의 혼으로 하여금 하늘에 올라가라는 뜻이다 "


마한 편

" 사람들이 금은비단 등을 보배로 여기지 않으며 성품이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의 꾸밈새는 뾰족한 상투를 하는 것이 마치 칼자루와 같이 하며, 베로써

도포를 만들어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에 일이 있다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을 때는 젊고 건장한 자들이 모두 크고 튼튼한

끈으로 얽어맨 기구(지게)를 등에 지고 또한 한 발 정도나 되는 나무(작대기)를 지니고

나와서 하루종일 일을 하나 피로한 줄을 모른다.


이미 이같이 힘을 모아서 일을 마친후에는 서로가 그 노고를 치하해준다.


모내기가 끝나는 오월이면 항상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날은 여럿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날이 새도록 쉬지 않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 사람이 모두 일어나 같이 따라서 발을 구르고 머리를 숙이고 올리는데,

손과 발의 동작이 척척 들어맞아서 그 곡조와 박자가 마치 탁무와도 같다.

시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다시 그와같이 즐겁게 논다.


신을 숭상하여 국가와 고을이 각각 천신을 제사하는 주제자를 뽑는데 그 이름을

천군이라 한다.

또 각 나라에서 각각 별읍을 이름하기로 " 소도 "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워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신을 섬긴다. 혹 죄를 짓고 도망다니는 자일지라도 그곳에 다다르면

잡아 올 수 없게 되어 있다. "

우리가 밤새 술마시고 춤추고 노는  것은  역사가  오래됐죠.

중국은 다른 나라의 역사는  짧게  낮추어서 기록하죠.

중국인 진수의 삼국지에  마한 진한시대에 이미 목화가 있었는데  문 익점의 목화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역사는  친일파  실증사관을 주장한 이병도가 조작한 역사죠


이런 사람이  서울대(경성제국대) 사학과 학장, 문교부 장관 했죠

이승만 대통령 시절  친일파가 득세하며  승승장구 했죠

이 사람 죽기전에 친구인 최태영 박사(서울대 법대 학장,저서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가

죄를 늬우치도록 설득하여 역사책  

"한국 상고사 입문"을  공동으로

발간하였는데  요지는  단군은 실존인물이다죠

제자들이 묵살했죠.  그렇게 안 가르쳤으니까

아직도 친일파 사학자가  득세하죠. 이병도, 신석호 등 식민 사학자 제자들이 많죠

이병도 손자  이 건무 지금 서울대(경성 제국대?) 총장하죠.

또 다른 손자 국립박물관장 했죠.

왜곡된 역사는  계속됩니다......


유전자 콩은 유태인이 조작한 콩으로  컴푸터 바이러스 같이 인체의 생명프로

그램을 망가뜨릴 수 있다.



유태인이 미국을 조종하고 미국과 친한 놈은  미친美親  놈  친한 년은 미친美親 년이 된다 ?



콩과 토종 종자를 살리기 운동을 다물 차원에서 해야 하며  발해의 정신인  正種

정종은 씨를 바르게 한다는 말이 아니던가

발해는  어느 임검도 감히 첩을 두지 못했으며 관리가 첩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해동성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발해의 일부일처는 콩을 법으로 삼아 콩이란 분합된 하나로서 그 표피가 벗겨져

야만 두쪽으로 나쥐어짐으로 부부도 혼인하여   둘이 하나됨이다



정통혼례의 초례상에 반드시 콩과 팥이 올라간다.

禮예는  곡진한 의사를 표시할 때 콩을 바쳤던 데서 비롯된 글자인 것이다.

우리는 전통혼례 역시 신랑이 맨 먼저  천상의 자미원군께 나무기러기를 바치고

두번 절하는데 이를 전안례라 하는데 이제 두 사람이 하늘의 뜻에따라 콩과 같이

한 몸이 된다는 소식을 기러기라는 송신기에 실어 천상께 보내는 의식이다.

이 전안례가 끝나면 신랑 신부가 서로 절을 하는 교배례를 행하고 교배례가 끝나

면 신랑 신부가 술잔을 들어 천지에 맹세하는 서천지례를 행하고

서천지례가 끝나면 신랑 신부가 술잔을 들어 각각 반쯤 마시고  서로 교환해

마시며 부부가 되었음을 맹세하는 서배우례를 행하고

서배우례가 끝나면 손잡이가 긴 표주박을 쪼개어 만든 술잔에 줄을 연결하고

술을 채워 각각 반쯤 마시고 서로 교환해 마시는

근배례를 행한 후 표주박 술잔을 다시 합혀야 예식이 끝난다.

   예식이 끝나면  신랑은 하객들을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신부는 얼굴을

가린 채로 하객들을 향해 다리를 약간 구부려 인사를 하는 데 이 때 하객들이

초례상에 올린 콩을 움켜다 신랑 신부의 머리 위에 뿌려둔다.  

이제 신랑 신부가 콩처럼 하나가 되었음을 여러 사람이 증명해 주는 것이다.

혹 신랑 신부의 머리위에 팥을 뿌려주는 하객들도 있는데  이는 액을 물리치고

부정을 막아주기 위함이였다.  

실재로 팥속에는 사특한 기운을 물리치는 묘한성분이 들어 있는 것이다.

콩, 팥뿐이 아니라 초례상에 올려놓은 것은 나름대로 다 묘한 의미와 상징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며 상 가운데 물은 천신이 하감하시라는 뜻이요  

쌀, 보리 등의 곡식은 지신이 감응하시라는 뜻이며 해와 달을 상징한 두 개의

촛불은 광명을 바라는 뜻이요,

소나무와 대나무 가지에 청실, 홍실을 걸친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연분을 맺었

으니 송죽같은 굳은 절개 변치 말자는 뜻이다.

그리고 암탉과 수탉은 봉황을 대신한 것인데 봉황처럼 평생동안 화기애애하게

살자는 뜻이요,  

곶감, 대추, 밤 등은 선영께 유구히 그렇게 이어가겠나는  무언의 약속이다.

   여기에  또 하나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목화씨다.

목화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면 절대로 옮겨 싦어서는 안 되는 식물이다.  

옮겨심으면 말라서 죽거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이 씨앗으로써

상징을 삼아 두 사람이 하나되어 평생동안  한 뿌리를 내리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근래 어느 무식한 양반이 이러한 우리 전통혼례를 허례허식이라  매도하고 가정

의례준책이라는 별스런 법령을 만들어 공포한 적이 있는 데 콩 같은 귀신이

전한 방법으로 혼례식 하기를 유도했는데 실로 이 방법이야말로 그 비용이

수십배가 더 들어가는 허례허식인 것이다.  

신부가 옷을 한번 빌려 입는 데 거액이 드니 말이다.  

어디 그 뿐 인가.

하객들도  예전과는 달리  다 축의금을 내야 하는 판속이니 말이다.

여기에 더욱 가소로운 바는  이미 그 콩 같은 귀신에 현혹된 상당수의

신랑 신부가 아예 그 귀신을 반드는 교당에 들어가 그 귀신 앞에 맹세를 하는

것으로서 혼례식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부터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콩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는 것이다

우리 솟대문화를 재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전통혼례의 멋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우리콩을 먹이면서 말이다

그래야 옛 고구려의 영광, 발해의 융성을 가히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쌀  이야기



風  바람 풍은  蟲 (충)  벌레가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는 뜻으로

秋  가울 추는  禾  (화) 벼와  익음의 火가 합쳐 만든 것으로  

무릇 농사에 해를 끼치는 벌레는 바람을 따라 이동하는 것으로 지금도 해마다

농사철이면 멀리 양자강 유역으로 부터 벼멸구의 유충이 비바람을 타고 이 땅에

건너왔다느니 하는 방송보도가 있다.



利이로울 이는   禾 벼  와  刀 칼도로 추수를 함이고



種  씨앗 종은  벼가 잘 익어  무거울 重  씨앗을 종자로 함이다.



글자의 의미로 미루어 일찌기 벼 농사를  지었던  우리 민족의 유산이며  

감히 밀, 수수 등의 밭농사를 위주로 생활했던 중국민족의  유산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는  논을  뜻하는  畓  답자가 없고   水田이라 한다.

중국은 최근에 벼농사를 했고 인삼을 재배했으며 구한말까지 고려인삼 한근이

중국의 소 열마리 값에 거래되었다.



自 至: 자지  :  자로 시작하고 지로 끝나는 우리말의 습관에서  유래했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이제  그만 하"지"

헌데 중국에서는  자나 지를  다 '"즈"로 발음한다.



벼 농사는  부루단지 ( 업주가리 = 신주단지)는 단군임검의 첫째 태자인 부루씨

에서 유래되었으며 부루단지의 유래에서만 보아도 4,300여년이나 된다.



移 :  옮길 이는   禾 벼 가 많다는 뜻으로 본시 벼는 야생종으로 이를 옮겨 심음

으로 대량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移秧 이앙 :   모를 옮겨 심을 때에는 반드시 모를 세워 중심이 서야 한다는

것으로 앙자 가운데   中이 들어있다.



踏 밟을 답 :  못 자리 판을 만들 때 거름을 붓고 발판에 줄을 달아 끌고 다니면서

밟아서 거름을 고르는데 이 踏에서 畓의 발음을 취했으리라



秀 빼어날 수 :  세상에 어느 곡식보다 벼가 이삭을 내놓을 때가 가장 빼어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빼어남을 뜻하는 秀가 벼를 형상화한 禾자 아래 乃자가 들어 있는 것이

다.

乃자는 바로 우리말에 내놓다. 내지르다 등의 첫소리로써 뜻을 합친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말이 없는 중국에서는 秀자를 해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穗 이삭 수 :  벼가 이삭을 내놓을 때에는  누구나 다 천지의 큰 은혜에 감사

드리는 법이다.  

그래서 벼 이삭을 상징하는 穗자에 은혜로움을 뜻하는 惠자가

붙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빼어나다는 수자와 동음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秀자를 "씨우"  穗자를 쑤에이 하고 발음하므로 우리처럼

빼어난 느낌을 주는 소리가 아니다.



曆法의 曆 :  벼 농사는 어느 농사보다도 가장 절기를 잘 맞추어 지어야 제대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확한 벼는 반드시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가 없는 바위굴이나  곳간에

저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이 맨 처음 역법을 만들어 낸 이유가 바로 해마다 농사를 잘 지어

저장하고자 함이었으리라  

그러기에 역자의 형상이 바위집을 형상한 엄자안에 벼들이 있고 날을 형상하는

일자가 들어 있으리라

지금 역자를 발음해 보아도 거두어들이는 소리가 그대로 나고 있다,

한데 중국에서는 이 역자를  "르이"하고 발음하므로 전혀 거두어들이는 소리가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학교에서 훈민정음만 가르쳐도 이 한자를 누구도 감히 중국문자라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학생들로 하여금 절기에 따라 농사를 체험케 하고 만물의 변화를 직접

보고 느끼게 함에 있어서랴.

이제 우리 교육을 마땅히 아이들에게 철을 알게 하고 천지자연의 소리를 깨닫게

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가을을 뜻하는  秋자의 발음이

추위가 시작된다는 말의 첫소리인 줄을 알게 되며,

벼를 베는 형상인 利자의 발음이 이롭다는 첫소리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루단지



솟대가 콩농사의 유적이라면 부루단지는 바로 쌀농사의 자취이다.



부루단지란 집안의 정결한 곳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토기에 벼를 담아 단위에

올려놓고 짚을 엮어 우지저리를 덧씌운 것이다.

이 부루단지를 지역에 따라 업주가리 혹은 신주단지라 별칭하기도 하는데

신주단지라 일컫는 경상도 지역에서는 벼 대신 쌀을 넣어 천신하였다.



부루단지의 유래는 먼 옛날 단군임금님의 아들 부루태자가 9년의 홍수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잘 살게 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규원사화 등의 사료에 전하고

있다.

부산의 낙동강 하류인 구포에서는 부루태자가 홍수를 다스린 공덕을 기리는

노래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또 고시네는

 환웅, 단군시대에  가축기르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신 요즘의

농산부장관인  고시씨를 기리기 위해 농촌에서 음식을 먹기전에 따로 음식을

차려 고시네(고수례,고시례) 하고 외치며 고시氏를 기리며  음식을 먹었다.



.숟가락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곡식을  쌀이라하며  쌀, 찹쌀,보리쌀,좁쌀, 등 이다.

禾 벼 화:  벼를 형상화한 화자는 초목에서 이삭이 나오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이치를 나타낸 것이다.



米 :  쌀 미는  곡식이 다 여물어 알알이 벌어진 모습

氣. 精 :  기운 기자와 정신 정자에 쌀 미자가 들어있는 것은 사람의 기운과

정신이 쌀을  먹음에 따라 변화하여 나오기 때문이다.

氏.:  씨자는  남자가 자신의 남근을 잡고 있는 모습

斡 :  알자는  둥글다, 돌아오다의 뜻

쌀이 나오면서 조개나 콩은 자연 주식에서 반찬으로 밀렸으나

농사, 풍년, 제사 등의 글자에 다 조개껍질과 콩의 형상을 그려 써왔다.



쌀은 씨알의 합성어 같고 젓가락이나 맨손으로 집어 먹는 잡곡에는 씨알이라

부르지 않았다.

숟가락은 모계 사회 때 원시할머니가 북두칠성과 여자의 자궁을 본뜨 만들어

北자에 숟가락 (匙) 가 들어 있고 숟가락을 천록이라 일컬어 왔다.

숟가락 비(匕)는 은나라 갑골문자에도 비를 형상한 글자가 나오고  할머니를

상징하는  비자가 여러개의 숟가락으로 자손들을 길러 냈다는 형상이다.



化될 화는 변화를 뜻하는 화자로 사람人이 숟가락 비匕로 밥을 먹고 자란다는 것

食 밥 식은  사람인자와 좋을 良자가 합쳐진 식자는 밥을 숟가락으로 먹어야

한다는 의미다.

량자 아래에는 숟가락 비자와 숟가락은 오른손으로 써야 한다는 불자가 들어

있는데 불자는 오른 손으로 이끈다는 우인의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이를 보더라도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만든 글자이지 결코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만든 글자가 아닌 것이다.



무릇 다른 나라의 풍습은 여자가 한번 시집을 가면 대개 남편의 성씨를 따르고

자신의 성씨는 영원히 없어져 버리게 되어 있다.

우리의 풍속은 여자가 늙도록 자신의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죽어서도 그 성씨를

잃지 않게 되어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할머니가 어머니의 제사를 지낼 때

지방문에 현조비유인 아무 성씨 신위  현비유인 아무성씨 신위라도 쓰고 있다.

이 지방문에 쓰이는 비자가 바로 앞에서 말한 여러 개의 숟가락을 지닌 여자의

형상을 그린 글자인 것이다.



   본시  숟가락을 상징한 匕비자가 북두칠성의 문양과 여자의 자궁을 형상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지금까지 여자의 거시기를  보至라는 보자를  匕자 아래

十자를 합쳐 쓰고 있다.

이 보자를 훈독하면  거기에 씨氏가 들어가려면 벌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벌릴

보다.

   뿐만 아니라 짐승의 암컷을 상징하는 빈牝자에도 匕자가 붙어 있고

새의 암컷을 상징하는 雌자에도  비자가 들어 있다.

조개의 형상도  여자와 비슷하여 조개의 모양을 그린

辰신자에 匕자가 들어 있다.



   어른을 상징하는  長자에도 匕자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더욱 묘한 뜻이

있어 늙은 터럭을 상징한표자에서 사사로움을 뜻하는 사자와 터럭이 자라는  삼

자를 떼내어 여자의 아랫도리를 형상한 비와 오른쪽으로 나아감을 그린 불자를

합하여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즉 여자가 어른이 되려면 거기에 털에 나야 하는데 그 털은 보이지 않게 잘

감추어져야 하고 털이 늘 자라나는 것이 아니며 오른 쪽을 숭상하여

나아간다는 뜻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남자는 왼쪽을 숭상하기 때문에 사내를 뜻하는 男이라는 글자는 모양이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다.  

원래 농사가 여자의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일은 지금까지 대개

남자들이 다해왔다.

그러기에 사내를 상징하는 남자가 밭에서 힘을 쓴다는 뜻

으로 田자와 力자가 합쳐저 만들어 진 것이다.



여자는 집안에 있으면서 어른노릇을 하고 살림을 해야 편안한 것이다.

   대개  집을 형상한 면자는 태초에 사람이 쑥대나 갈대, 띠풀 등으로 이엉을

만들어 비바람을 막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글자의 형상은 바로 지붕을 그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면자 안에 至자가 들어가면 집 실 室이 되고  

돼지 豕시가 들어가면 집가 家가 되고

于가 들어가면 집 우宇가 되고

려呂가 들어가면 집 궁宮이 되고

女가 들어가면 편안할 安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할 진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자를 중국문자로만 알고 있다.

어릴 때 할머니 , 어머니로 부터 숟가락질을 배우고 화하여 지금 그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으면서  엉뚱하게도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저 중국사람들의 배를

채워주고 있는 꼴이다.



밀과 개떡



   우리는 예로부터 밀가루로 만든 떡을 개떡이라 하였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 개떡을 제사상에 올려놓고 제사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간혹 입이 굴풋하면 해 먹었을 뿐이다.

이 밀에는 씨알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 밀쌀이라는 말이 없고 어떠한 문헌에도

전해오지 않는다.  하물며 별별스런 것이 첨가된 수입밀이야 말할 것도 없고

한데도 지금 그 개떡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밀은 개떡의 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술을 만드는 데에도 가장 긴요한 누룩의

재료가 된다.

하지만 밀이 제사상에 오르려면 반드시 다른 무엇과 합쳐져야 가능한 것이다.

밀가루 물에 각종 어류, 육류, 채소  밀누룩으로 술을 익힌것 등이다

하지만 술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조상께 제사를 지낼 때 맨 먼저 제사상 앞에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여 망령의 혼을 모셔들인다.

그리고 술을 따라 올리고 두 번 절하여 망령의 魄을 모셔들인다.

그런 후에 계반삽시라하여 제사상에 올린 밥그릇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그 멧진지에 반드시 꽂아 놓고서 제사를 지낸다.



   우리의 체질은 오직 씨알로써  밥을 해먹어야 기운과 정신이 제대로 나오게

되어 있다.

   서양에서는 지금까지도 식탁에 칼과 창이 오르고 있다.

그쪽 사람들은 그것으로 음식을 자르고 찍어서 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궐천년 전에 이미 삼지창이 집 밖으로 밀려나 대문을 지키는 데나

쓰였고 칼은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장만하는 데나 쓰였는데 말이다.



쌀은 개떡의 재료인 밀보다 단위당 수확량이 훨씬 많다.

때문에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는 벼농사가 제격이다.

특히 산악이 국토의 70%이상인 우리의 자연지리적 환경을 생각하면 우리가

쌀을 주식으로 삼은 것은 가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만약 이 좁은 땅에서 맨손으로 먹는 밀을 주식으로 삼아 살아왔더라면 아마

우리 종족은 제대로 대를 이어 오지도 못했다.

  

외국에 가서도 자기나라 음식을 지키고 먹으면 그 나라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나라에서도 외국음식을 먹으면 외국에 동화되기가 쉽다.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무엇이든지 들어오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신채호 선생 말과 같이 조선의 무엇이 아니고  조선위에 무엇이 되듯이

일본은 없는 역사를 조작하여 만들고 없는 전통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일본의 반의 반만이라도 하자



사찰에 있는 대웅전 大雄殿은 한웅을 모시는 곳으로 석가전이나 부처전이라

하지 않고

대전(大田) 을 한밭이라 하듯이  대는 큰 한으로   한웅전을 의미한다.



.우리문자의 기원



與野여야 :  여는 들어오는  야는 밖으로 나가는 발음

중국은 여을 유이로 야는 야로 둘 다 나가는 발음

呼吸호흡 :  호는 나가고 흡은 들이키는 발음

중국은 후시로 다 나가는 발음



陰陽 :  음양의 우리발음은 오므려들고 열리나 중국인들은 인양으로 발음하여

              둘다  열린 발음

射 :   사를 우리는 발사하듯이 앞으로 나가는 소리이나 중국은 써로 발음해

          들어오는 소리에 가깝다.

納 :  납은 무엇을 들어놓는다로 중국은 나로 발음하여 밖으로 나가는 소리

亡 :  망은 중국은 왕으로 발음하는데 도망가다, 망하다와 달리 들어오는 소리에

         가깝다.

內外 :  내외는 중국이  네 우아이로 발음하는 데 우리처럼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



母 :  모는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갑골문자는  어머니 가슴에 있는 두 젖을

형상화 하였다.

姓 :  성은  女와 生의 합성어로 혈통을 뜻하는 모계사회의 반영이다.

史覽 :  사람은  역사를 본다

家 :  집가는  집 면 아래칸에 돼지시豕를 기른다는 것을 형상화 한 집가자로

이러한 문화는 동이족 고유의 것이다.

父 : 아비부는 양손에 도끼를 들고 집안을 지키는 모습

夫 : 지아비 부는 하늘 天을 위로 뚫고 올라간 것으로 각종 위험한 것으로 부터

보호해주는 사람으로 높이 받들었다.

氏 :  자신의 남근을 잡고 있는 형상으로 가장 소중하고 가장 요긴한 것이다.

       대정씨 - 대관 씨 - 환인 씨 - 유우 씨


任儉.王儉 :  임검(임금)은 왕검신인을 높여 임검으로 일컬은 데에서 유래

任 :  우리 민족 특유의 존칭인 님은  임검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

聖 :  성인성은 귀耳로 천지의 소리를 듣고 입口으로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사람이며 , 우리 민족응은 이런 이를 높여   님任이라 불렸다.



廷 정:  군장이 정사를 논하는 곳을 뜻하는 정자에 임任자가  들어 있는 것은

조선의 임검이 정사를 논하던 데가 조정 朝廷이었기 때문이다.



姙 :  아이를 밴다는 뜻의 임자에 임금을 뜻하는 任자가 들어있는 것은 여자가

아이를 배면 임금님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朝鮮 :  조선이라함은 세상에서 가장 밝게 다스려지는 곳.

천자가 정사를 살피는 곳  朝廷

관리들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을 朝服

제후가 천자를 뵙는 일을 朝覲조근

제후의 신하가 조선의 천자를 뵙는 일을 조빙朝聘

천자가 계신 궁실을  조궁     천자의 명령을  조명

천자의 위엄을  조위朝威라 하였던 것이다.



성씨 이야기



桓 :  환은  하느님이 환인님에서 전음된 말이다.

박 :  은나라의 도읍지를 박이라하였는데  이는 박달임검 박왕 등 밝음을

숭상한 동이족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다.

朴 :  혁거세의 성씨인 박도  밝다에서 유래

鳳 :  봉씨족은 수령의 호칭을 봉의 암컷을 상징하는 凰자에서 궤자를 벗겨내

버리고 皇으로 일컬었다.

朋. 崩 :  친구를 뜻하는 朋붕자와  죽음을 뜻하는 崩붕자는 봉을 숭상하는

봉鳳씨족의 유산이다.

群. 蹄 :  양과 소를 중시한 군제족은 무리 군자에서 양자를 떼어낸 君자와

발굽 제자에서 足자를 떼어낸 帝자로 수령.제사장의 호칭을 삼았다.

牛頭山. 牛首村. 우수河. 우수리강, 속말,서불한, 각간, 가한(칸) :

우두산, 우수촌, 우수하, 우수리강, 속말, 서불한, 각간, 칸의 몇칭은 모두

소를 중시한 군제족의 유산이다.

美 :  군제족은 큰 염소  大羊가 아름답다고 여겼다.

養. 祥. 善. 義 :  군제족은 윗사람을 공경하여 봉양했고 길한 것과 착한 것과

의로운 것을 좋아했기에 이 글자들에 모두 양자가 들어있다.

松 :  소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삼은 송족은 소나무 송자에서 목자를 떼어낸

公자로 수령의 호칭을 삼았다.

公平. 公正 :  공정과 공평은 사냥감을 공정히 분배했던 송쌔족의 아름다운

관습에서 유해했다.

柏.伯 :  잣나무를 종족의 상징물로 삼은 백족은 잣나무 백柏자에서 나무 목자

대신 어질 인자를 붙인 伯자로 수령의 호칭을 삼았다.



5   부족



1.  桓族   환족 :  하늘을 숭배

2.  鳳氏族 봉씨족 :  봉황을 숭배

3.  群蹄族 군제족 :  소나 양을 종족의 부호로  삼았던

4.  松族 송족 :  소나무를 부호로 삼았던

5.  栢族 백족 :  잣나무를 부호로 삼았던



1.  환족

천제 환인님의 후예로서 환웅, 환검 등의 하늘부족으로 지금까지도 하늘을

하느님이라 하는데 이는 바로 환인님에서 전음된 말이고 하늘부족은 밝음을

숭상햇으므로 군장을 박달임검 혹은 박왕이라 했는데 이는 바로 밝다에서

전음된 말이다

단군의 후예가  가장 전성했던 은나라는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지만 도읍지

마다 박이라는 지명으로 일컬었다.

도읍을 옮길 때마다 박이라는 지명이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중원을 통일한 탕 임금부터 7대 태무임금까지 임금의 호칭을 다 박왕

이라 일컬었다는 사실이 전하고 있다.

박 혁거세의 박이라는 성씨도 다 밝음을 숭상한 하늘 부족의 후예라는사실을

전함이었다.



2.  봉씨족과 봉황



봉씨족은 성을 風씨라 하였고 즉 구이의 한 종족인 풍이의 부족이였다.

풍이족은 봉황을 하늘의 사자인 신조로서 받들어 숭상하였다.

때문에 설문해자에도 봉은 신조인데 동방 군자의 나라에만 나온다. 했고

그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하여 모든 새들이 따른다했으며

봉의 암컷을 凰이라 한다.

봉씨족은 태초 모계사회 때 종족의 수령을 여자로 뽑았다

때문에 수령의 호칭을 봉의 암컷을 상징하는 황자에서 궤자를 벗거내 버리고

皇이라 일컫고 황이라는 군장의 호칭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먼 옛날 봉씨족에서도 남자가 종족의 수령이 된 예가 태호 복희씨와 소호

금천씨이다.

봉씨족은 오로지 여자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그 후예가 번창하지 못했는데

금천씨의 후예만 남자의 성을 따라  이 땅에서 가장 번창한 김씨가 바로

소호금천씨 少昊 金天氏의  후예라는 사실이 신라 문무왕 비와 만성통보 등에 전하고 있다.



3.  군제족. 가장 오래된 성. 姜씨



군제족은 성을 강씨라 했는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성씨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하며 더 오래전에 비록 풍씨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여자의 성씨를

따르다 보니 세상에서 다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풍씨의 뒤를 이어 일어난 강씨를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말하는 것이다.

   군제족이라는 호칭은 양떼와 소 발굽에서 그 의미를 취한 이름이다.

즉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무리중에는 반드시 우두머리가 있으며

소는 발굽이 합쳐지면 길하고 벌어지면 흉하다는 것이다.

군제족은 수령이나 제사장을 군 또는 제라 했는데 군은  바로무리 군에서 양

자를 떼어낸 것이고 제는  발굽 제에서 발족을 떼어낸 글자이다.

  대개  양이나 염소는  그 우두머리가 수놈이다.

그리고  그 숫놈 우두머리가 이끈는 대로 흩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다.

君이란 무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군제족이 살았던 곳에는 쇠머리를 뜻하는 지명이  우두牛頭, 우수牛首로

시작되며

우두머리는 지위가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



4.  松씨와  소나무



소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삼았던 송족은 그 종족을 거느리는 수령을 가리켜

公이라 하였고 이는 바로 소나무를 상징하는 송자에서 나무 목을 떼어내고 공자

만을 쓴 것인데  환웅천제 때 뇌공이나 숙신씨가 이에 해당한다.

사냥감을 끝까지 추적하여 잡았고 잡으면 반드시 공평하고 공정하게 분배하여

두령이라 해서 결코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챙기지 않아 公正, 公平이니 하는

말들은 옛 송족의 그러한 의리에서 비롯되었음이 아니겠는가



5.  柏族과  잣나무



    잣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삼았던 백족은 그 종족을 거느리는 수령을 가리켜

백이라 하였다.

이는 잣나무를 뜻하는 백자에서 나무 목자를 떼어내 버리고 백자에 사람 인자

를 붙여 伯자로서 으뜸되는 사람의 호칭을 삼는 것이다.

황웅천제때 풍백, 지제씨,은나라 초기의 하백, 박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잣나무는 그 성질이 곧고 절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나무와 함께 능히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르름을 나타내는

군자의 기상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돌을 쌓아 봉분한 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줄이어 심었다는 기록도 삼국지에 전해오고 있다.



朝貢 :조선에 바치는 공물을 뜻하는 조공

헌종기(구당서)에도 朝는 천자를 다스리는 곳이다.



단군의 가르침



1.  正種 :  씨를 바르게 한다.  부화부순의 도리

2.  愛民 :  백성을 사랑하라는

3.  尊賢 :  어진 이를 높이라

4.  敬老 :  늙은 이를 공경하라는

5.  任能 :  능한 자에게 맏기라.



얼씨구    절씨구     지하자    졸씨구  

蘖氏求     절氏求    至下者     卒氏求

전쟁으로 남자가 귀해  얼씨는 서얼의 서자 ,절씨는 중 , 지하자졸시구는  가장 천한

일을 했던 지극히 낮은  졸병의 씨라도 구해야 겠다.



부우씨  



단군의 둘째 태자로 희화국 여자와 혼인하여 열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의  순으로 이름을 지었고

은 나라의 시조 설은 이 십일의 아들이라고 산해경은 전하고 있다.



상희국 여자와 열 두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낳은 달이 달라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순으로 이름을 지어

이로부터 사내아이를  아달(阿撻)로 당시 해의 별칭이며

계집아이를  딸 (月)이라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우씨(제준)가 다스린 나라가 구이중 우이였는데 우이사람들이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를 않아서 "우리" 라는 말이  우이에서 왔다죠


祖 :  조상 조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且차자는 은나라 갑골문자에는 남근을

형상화하였고  보일 시 변에  남근을 그려놓은 것이다.

제주도에는  남자가 적어 음기가 많아  음기를 누르기 위해 돌하루방 이 많은 데

뒷 모양은  영락없이    남근이다.



雄 :  수컷웅은 새가 어깨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수컷을 상징

이는 한웅이 하늘에서 왔다는 뜻으로 은나라를 필두로 고조선에서 파생한

나라마다 그 시조들이 알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말이고 새와 관련이 있음을

뜻한다.



昔. 鳥 :  석 조는 신라의 석昔탈해가  나온 궤 곁에 까치가 모였다가 날아갔다.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를 뺀 글자로 성씨를  삼았다.



제주 삼성 高, 夫, 梁 씨의 시조는  다 땅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高乙那고을라, 夫乙那,

梁乙那에 다 새를  상징하는 乙이 들어있다.



滋至 :  아들이 자라면  불어날 자 滋至가 되고  이 자지가 여물면

祖至를 합한 반절음으로 조ㅈ 라하고 곧게서야 한다는 말로 조상으로 부터

전해진 씨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婚 혼인할 혼:  여자 女가  씨 氏를  받는 날 日

壻 :  짝 疋필과 딸 月이 합쳐진 사위 서

며느리 :  젖이 아직 다 크지 않는 소녀

査 :  사돈을 말하는 것으로 사자는  木자와 차且자가 합쳐져 나무(남의)조지

를 가르키는 말로  木자를  파자하면  十,  八이다. 남의 조지와 十八 즉 남의 씨

다는 말 .     차 且는 갑골문자에  남근을 형상화하였다.

臼 :  절구 구는 구멍을 형상화

興 :  흥할 흥자  남녀가  음양화합하는 것으로  우리는  흥흥하지만

중국은 씽이라 발음하고 일본은 고로 발음하는데  어느 것이 실제와 맞겠는가

與 :  참여하다의 여자의 위 중간에 여자는 남근이 힘줄이 솟아 오른 것을  

   臼구멍 구에  들어가면  여라는 발음을 한다. 중국은 유이라 발음하여 이치에

맞지않다.



兒 : 어린 아이 아는  사람은 여자가 자궁에서 막 나온 아이 때가 가장 순수하고

어질다.  그래서 臼에  어진 인仁자를 붙여 아이 아 자로 만들어 졌다.

우리는 세상에 이미 나온 형상의 아로 중국은 얼로 발음한다.

경상도에서는 얼라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글의 이치로 覺과   學을 생각해 보라



佛 :  불자는 사람인자에  아닐 불자가 합쳐져  사람이 아니다는 말.

比丘尼 비구니 :  부루임검때  남국(절강지역)에서 바라문교가 들어와 정행, 정지를

내세워 세상살이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몇몇 여자들이 빨려들어갔다.

이 여자들이 남편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가 무리를 이루어 정행, 정지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 여자들을 비구니라 이르고 비웃었는데  과연

이 들이 정행. 정지가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남편이 그러웠고 번뇌만 쌓여갔다고 한다.

   당시 세상에서 일컬었던 비구니라는 말은  일하지 않는  여자들의 집단

이라는뜻이다.

즉 숟가락이 겹쳐 있는 比비자는  여러 여자의 아랫도리를 뜻하고 丘구자는

무리를 뜻하며 尼니는  일 하지 않는  숟가락  죽은 아래도리를 뜻한다.

尼니는  바로 죽음을 상징한 尸시자와 匕비자가 합쳐졌기 때문이다.

대개  여자들만 사는  집안에는 음기가 쌓이고  상하여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

이다.  남자들만 사는 집안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집안엔 비록 늙은이일지라도

남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마땅한 법이다.

그러기에 집을 형상한 면자안에 도끼를 형상한 且차자가 들어 있으면 마땅하다는 宜의자가 되는 것이다.

解 : 소牛에게 칼刀을 사용하면 뿔角만 남는다는 뜻의 해자

蟹 : 게 해로 분해가 잘 된다는 뜻이 담긴

집게발은 물론 등 껍질도 쉽게 떼어낼수 있어 게에 물린 경우 집게를 벌리기 보다 집게

발을 떼어내면 된다.

우리는 해하고 다 밖으로 풀어져 나가나 중국은 오히려 지에라 발음하여 안으로 감겨드는

소리에 가깝다.


반절법


두 글자를 한자로 발음하는 것으로 두자의 음을 반씩 떼어 합쳐서 한 소리로 만드는 법

奴婢 : 노비 반절음 놉

祖至 : 반절음 조 ㅈ

氏入 : 반절음 씨 ㅂ

誤入 : 잘못 들어간 氏

每焉 : 매언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다. 반절음 맨 맨 손

女焉 : 여언 반절음 년

奴蔭 : 노음 반절음 놈

飯逼 : 먹을 것을 가까이 한다. 밥


공자께서 젊었을 때 경계할 것은 색色에 있다
그냥 좋은 줄만 알고 뼛속에 골수가 차기전에 성을 허비하면 그것이 죽음을 구하는 짓이다.

구 : 성을 허비하면 죽음을 구한다는 뜻으로 자지 구자로 죽음을 뜻하는 尸주검시 아래
구함을 상징하는 구求

비 : 죽음 구멍을 뜻하는 보지 비 자로 죽음을 뜻하는 시尸자 아래 구멍을 상징하는 혈穴

夷 : 큰 大와 활 弓의 민족을 뜻하는 이자 .  우리민족을 흔히 東夷族동이족

중국의 고서에는 夷자를. 오랑캐 이가 아닌 평탄하다, 기쁘다, 즐겁다, 간이하다, 떳떳하다로
표현

중국인 허신의 설문해자에는

"동이는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  풍습이 인자하고  인자한 자는 오래살고

군자가 죽지않는 나라다.  살피건대  동이는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크다."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신장이 제일 크죠.


葬 :풀로 사체를 묶어 놓은 모습을 그린 장례 장

弔 : 효자 대정씨가 활 弓에 살 1을 먹이고 부모의 시신을 지켰다는데서 유래한 장례식 때

조의 弔意의 조弔


공자의 예기

소련과 대련이 부모상을 당하여 잘 치렸으니 3 일 동안 슬퍼하여 먹지 못하면서도

능히 스스로 예법을
이루었고 석달 동안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1 년을 슬퍼했고 3 년을 근심으로 살았으니

동이의  아들이다
.  
대련,소련씨의 장례예법이  얼마전까지 전해왔습니다.


대정씨(활로 시신을 지킴. 장례와 활의 시조) -

대관 씨(매장법을 만듬) -

대련씨 (장례예법을  만듬)- 걸걸(大) 중상 - 대조영(발해의 시조)

걸다는 크다,푸짐하다로  걸걸에서 왔죠

우리 민족이 최초로 활을 만들었으며 가장 강력하고 사거리가 가장  길었죠

올림픽에서 국궁이 아닌 양궁 그것도 토너먼트식의 올림픽 라운드에서 우리가

메달을 싹쓸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한자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자를 한나라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한자니

한문이니 하는 말은 일본인

들이 이 땅을 무단통치하면서 만들어낸 말이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참글이라는 뜻에서 眞書라 일컬었고

조선시대에 한문이라는 말이 간혹 있는 것은 한나라 선비들이 지은 문장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결코 이 문자 자체를 한문이라고 부른것이 아니다.


한자는 우리글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이 글이 중국의 글이라는 생각이 꽉 박혀 있는 상황에서

한자는 우리글이라는 대담한 주장은

예컨대 집 가자에 돼지 시자가 들어 있는 것은 집안에서 돼지를 키웠던

우리 민족의 풍습에서비롯된 것이고

날숨을 뜻하는 호자와 들숨을 뜻하는 흡자를 중국 발음으로 후 시 하고 발음하기

때문에 다 밖으로 나가버리지만 우리식으로 호흡하면 소리가 나가고 들어오는

느낌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가 쓰고 있는 논답자가 중국에 없다는 사실은 이 문자가 중국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논농사를 생업으로 삼은 우리 민족이 만든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한나라보다 천 수백년 앞선 은나라 때에 이미 이 문자의 원형인 갑골문이 있었고

이 은나라가 우리

동이족의 왕조였음을 각종 사서가 증명해 주고 있다.

한자를 단음으로 발음하는 민족은 우리뿐이다.

원래 자기나라의 글자라면 어느 글자나 단음으로 발음할 수 있어야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거의 다 복음

으로 발음하고 있으며 오직 우리만이 어던 글자든지 단음으로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운학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이 문자가 우리글일 수 밖에 없고 예컨대

사람의 입이 하나가 되는

소리를 형상한 합合이라는 글자를 우리 발음으로 하면 입이 닫혀 하나가 되는데

중국 발음으로 하면 허가

되어 오히려 입이 열러버리며 우리의

출입出入발음은 소리의 나가고 들어옴이 분명한데 중국인들은 츄루 하고

발음하기 때문에 소리가 다 밖으로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문자에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배어있다


우리 문화와 역사에

오를 등자에 콩 두자가 들어 있는 있는 이유는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제사상에 콩을 올렸기 때문이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사상에 콩나물이 빠지지 않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또한 짧을 단短자도 콩은 화살로 길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짧다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고
장葬자도 사체를 풀로 묶어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고

조弔자도 옛날에 한 효자가 활弓에 살1을 먹이고 부모의 시신을 지킨 데서 유래했다

수많은 글자의 유래와 우리 민족의 삶을 연결지어 고대 중국에서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곳을

조정이라

일컫은 이유와 옛조선의 관계는 조공朝貢은 천자가 계신 조선에 바치는 공물을 뜻하는

말이였으며
사당 廟묘는 조자가 들어있는 것은 제후국의 군주가 집을 짓고 조선을 향해

제사를 지낸데서 유래했다.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이 문자를 참글 즉 진서라 일컬었을 뿐

한문이니 한자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

진서라는 말도 한글 즉 언문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익혀면서 쓰이게 되었고

그전에는 그냥 글 契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글 이라는 말은 고조선 시대에 고글이라는 현인이 음운을 제정하여 읽는 방법을 세상에

알린 데서

유래되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문자는 우리 문화와 우리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중국문화나 중국말 어디에서도

이 글자가

만들어지게 된 연유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즉 한자라 이를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 . 농초  박 문기의  한자는 우리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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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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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래

2008.03.08
07:50:42
(*.205.149.29)
.

ㆍ‘갑골문화’ 동이족이 창조 한자는 발해 문자 였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빛바랜 논문 한 편을 꺼냈다.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 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이었다.
그는 논문 뒤편에 쓴 후기(後記)를 보여주며 추억에 잠겼다.

“여기 후기에 ‘내가 병중에 초고를 완성했다(病中完成草稿)’고 했어요.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대장암 진단을 받았거든. 의사가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이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 수술 날짜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신들린 듯 논문을 완성했지.

그리곤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 재진찰을 받았는데, 아 글쎄 오진이라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


안양 샤오툰춘에서 나온 갑골과 갑골문자. 갑골문화는 발해문명권의 독특한 문화였다.
27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격인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유학 초기부터 발해문명에 깊이 연구해왔던 이 교수가 아니던가.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피니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더군요.”

이 교수의 말마따나 “갑골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잘 뜯어봐요.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 아닌가.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의 나라, 예법·효의 나라

이렇게 은(상)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월식사실이 기록된 은(상) 무정(BC 1250~BC 1192년)시기의 갑골내용. 점을 친 정인의 이름과 점복내용, 실제 일어난 일 들이 기록됐다. |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에서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갑골의 원류는 발해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갑골문화와 한반도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죠.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했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

조강래

2008.03.08
08:24:20
(*.205.149.29)
.


한자와 녹도문

 동양을 한자문화권이라고 합니다.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옛 책들은 거의 한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얘기 거의 전보도 한자로 기록된 것을 옮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지겠죠.

 흔히들 한자는 복희씨가 만들었다고 하는가 하면, 창힐이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한자는 어느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발전되고 다듬어져서 오늘과 가은 글이 된 것입니다.
 6,0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글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배달날라 현덕이 임금의 명을 받고 녹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형문자입니다. 이 녹도문이 동양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문자인 것입니다
.
 단군조선에 이르러서는 녹도문 말고도 한글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국문정음을 만들어 녹도문고 함께 사용했습니다. 녹도문은 단군조선과 하나라 은나라를 거치면서 갑골문자로 발견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부여시대에 이르러서는 왕문이라는 사람이 이 글자를 더욱 개량했습니다. 이때 진나라에서 숙신에 사신으로 왔던 정막이 왕문이 개량한 글자가 진나라에서 쓰는 것보다 더욱 다듬어진 글자인 것을 알고 배워갔습니다. 적막은 이것을 더 다듬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한나라에 이르러서야 거의 오늘의 한자 형태로 발전된 것입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글인 녹도문은 이런 과정을 거쳐 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중국 한나라에 이르러서야 거의 오늘의 한자 형태로 발전된 것입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글인 녹도문은 이런 과정을 거쳐 한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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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천부경(天符經)과 녹도문(鹿圖文) 잘도 아시네. ㅎㅎ
글쓴이 : 우리 번호 : 1034조회수 : 902006.04.11 00:39

* 검은 글자는 원문 검은 글 속의 빨간글씨는 특이한접, 필자의 생각은 자주색





천부경(天符經)과 녹도문(鹿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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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맥(李陌)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는 천부경 원문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간략한 설명을 해 놓았다.

"천부경(天符經)은 천제(天帝) 환국(桓國)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글귀(書)이었는데, 환웅(桓雄) 대성존(大聖尊)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후,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역시 옛 비석(古碑)에서 신지(神誌) 전문(篆文)으로 새겨진 이 것을 보고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1)

천부경이 처음에는 녹도문으로 쓰여졌으며, 그 후에는 비석에 신지 전문으로 기록되었다가,

신지는 사슴발짝을 보고 만들었으니 그게 녹도문이며 그 글자체가 전자체 이니 녹도문이 따로 있고 전문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최고운(崔孤雲)에 이르러 그 당시 책(冊)의 일종인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책은 그냥 사실을 적은것이고 첩은 시첩 이라도 하듯이 주로 시 같이 간단하고 요약된것을 적는것이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최초의 문자가 녹도문이었으며,

그 다음이 신지 전문이고, 그 다음에야 종이첩이나 비단첩에 쓰여졌던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으리라는 점이다.

첩 은 수첩 같은것에 쓰이니 종이첩 이라 하지 않고 더구나 비단은 필 이라 하지 첩 이라 하지 는 안는다.



그러니 현재 알려져있는 천부경 원문(原文)은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고문(古文)에 능통하였던 최고운이 옛 비석에 새겨진 전문(篆文)을 보고 나름대로 해석한 번역본(飜譯本)인 셈이다.

번역본이 아니라 更復作帖 이라 했으니 시첩이다.




이렇게 최고운에 의하여 작성되었다는 천부경은 가로 세로 9자씩 나열되어 모두하여 81자에 불과한 아주 짤막한 내용이지만,

거꾸로 이에 대한 해석은 수백수천 가지에 달할 정도로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당연하다. 한자로 써 있지만 우리 말로 해석해야 할것을 한자로 해석하면 백놈이 해석해 봐야 풀리지 안으니 뭐 컴퓨터라도 동원해야할 수리학이나 기묘만 도표, 그리고 음양오행설로 떠들어 봐야 만명이 읽어봐도 그게 무슨소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미친놈인가? 왜 남들이 알아먹지를 못할 말을 써 놓았는가? 누굴 잡으려구?



필자가 이미 밝혀놓은 견해로는 이 세계의 진리(眞理)를 알기쉽게 풀어놓은 글이지만, 결과적으로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암기하고 덧셈과 그 이치(理致)를 가르키기 위한 일종의 수학책(數學冊)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잘도 아네 히히



(2) 그러니 녹도문이나 전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최초의 천부경은 1부터 10까지의 수(數)의 나열(羅列)이었거나 그 덧셈의 과정이 그려져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옛날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먹 구구만 해 봐도 그건 알텐데 하느님이 개국을 하려는 그 아드님 환웅께 그걸 내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고있는 녹도문과 전문이 어떠한 형태이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최소한 숫자의 나열 이라는 점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숫자의 나열 까지 아는 사람이 왜 딴소린고?




녹도문(鹿圖文)
현재까지 동아시아에서 2000년 넘게 사용된 한자(漢字)의 역사에서 도(圖)와 서(書)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구분되어 적용되어 왔다.



한자의 시원은 그림으로 부터 시작됐고 그 그림을 자꾸 간단하게 그리다 보니 원시한자 金文, 글구 더 간단하게 하다보니 은허갑골문 이 진시황때 소전 대전을 거치면서 지금 한자가



됀게야.



도(圖)는 그 기원이 겹두리꼴(二重同心圓) 무늬와 하나의 두리꼴(圓) 무늬가 이어진 형상(形象)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럼 그게 圖 인 그림이냐? 뭐 복잡한 암호문이지



서(書)는 고대의 산법(算法)으로 5를 표시할 때, 4개의 줄을 나란하게 긋고 그 중앙에 하나의 긴 줄을 교차하여 하나의 묶음인 5를 표현한 ' ' 모양에서 비롯되었다.

그건 숫자의 시작이지 그게 글자라는 書 의 시초냐?



즉, 도(圖)는 동그랗게 그려진 모양에서 비롯하여 그림과 도안 등의 의미이며, 서(書)는 그어놓은 줄에서 비롯하여 획(劃)이나 필치(筆致)로 그려진 글귀(文)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럼 금문에서 제상인 示 자 같은데서 입을 버리고 있는 兄 자 그림이 있고 이건 결국 祝 축자가 된 원인은은 어떠게 설명할거야?



그런데 천부경은 신지 혁덕이 고안하여 녹도문자로 기록하였다고

하지만, 자부선생(紫府先生)이 헌원(軒轅)에게 주었다는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신시(神市)의 녹서(鹿書)로 기록하였으며,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삼성기(三聖記)의 주석(註釋)에서도 고대 문자를 열거하면서 신시(神市)에 녹서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3) 이런 점에서 녹도(鹿圖)와 녹서(鹿書)는 비록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눈에 뜨일 정도로 구분이 가능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그야 같은 그림이라 하더라도 빨리 대강 그린 놈것과 실제 모양대로 꼼꼼히 그린놈 것이라 해서 그게 원천적으로 다른가?



고대 중국에서 복희(伏羲) 시대에 팔괘(八卦)와 문자 기원을 말해주는 하도낙서(河圖洛書)는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나오면서 등에 나타난 그림(圖)과 하(夏)의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렸을 때에 섬서성(陜西省) 낙수(洛水)에서 나타난 거북이(神龜) 등에 쓰여져있었다는 글씨(書)를 말하는데,

그만큼 그림(圖)과 글씨(書)는 처음부터 완전히 구분되는 모양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아주 흡사한 사례가 이암(李암)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도 실려있다.


복희씨는 팔괘 만을 말했고 하나라 우왕은 천년뒤의 사람이다.

"천하(天河)에서 거북이(神龜)가 그림(圖)을 지고 나왔는데, 그 그림이 마치 윷판(柶板)과 비슷하였다." (檀君世紀/ 10世檀君 魯乙/ 丙午16년)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星文)가 있었다." (檀君世紀/ 36世檀君 買勒/ 辛亥35년) (4)

이건 모두 그림뿐 아냐? 어디 글씨가 있다는 말인가?

중국에서 말하는 하도낙서는 용마의 등에서 보이는 그림과 거북이 등에 나타난 글을 말하는데, 단군세기에서는 용마의 등에 나타난 별무늬와 거북이 등에 나타난 윷무늬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비록 서로의 근거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같은 상황을 말하고 있어, 이 둘을 비교하여 그림(圖)은 윷판과 비슷한 모양이며, 글씨(書)는 별무늬와 비슷한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별 모양은 간단하니 그림이고 윳판은 복잡하니 글씨들 이라라면 또 모른다.



윷놀이는 한민족(韓民族)에게 수천년을 넘게 전해지는 가장 친숙한 놀이로서, 윷판(柶板)과 4개의 막대기인 윷, 그리고 8개의 말(馬)이 윷놀이 도구의 전부이다. 그런데 이 윷판이라는 것은 4등분되어 있는 원이나 정사각형에서 각각의 선분(線分)에 동그란 원점(圓點) 29개가 늘어서있는 모양을 말한다.

즉 윷무늬는 원점과 원점이 서로 선으로 이어져 하나의 도형을 이룬 것이며, 별무늬는 다섯 개의 선(線)이 교차하면서 별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하는데, 앞의 것은 동그란 원점(圓點)과 그 사이의 선(線)의 조합(組合)이며, 뒤의 것은 직선(直線)의 교차(交叉)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건 둘다 그림이거나 글자 이어야 하지...

결국 천부경을 처음으로 기록하였다는 녹도문(鹿圖文)은 윷무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다음의 문자로 여겨지는 녹서(鹿書)는 원점보다 선이 늘어나면서 만들어진 점선(點線)이나 괘선(卦線, 三爻)의 형태가 아닐까 여겨진다.


애구 팔괘가 뭔지도 모르네. 팔괘는 우리 태극기 4 괘 + 4괘를 그린거니 윳판 보다는 훨씬 간단한데 그게 그림이고 그 복잡하게 그려진 윳판이 글자라니? 그리고 그 윳판에 왜 (卦線, 三爻) 가 들어가나?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記)에서는 신지 혁덕이 암사슴(牝鹿)이 뛰어다닌 발자취를 보고 녹도문을 발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발자국은 다섯 개의 원점이 꽃봉오리처럼 둥그렇게 모여있는 모양이며,

그러니까 그 사슴은 신지가 쫓아 오는데 도망은 가지않고 그 자리에서 춤이나 춘 모양이군. 내가 죽더라도 그럴로 녿도문자나 만들라고..참 신통한 사슴이네...히히




그러한 발자국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지표면을 살짝 스치면서 그어진 가느다란 선으로 연결되어 원점과 선이 이어진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점(點)으로 이루어진 하도(河圖)

복희의 하도는 신지보다 천년후의 팔괘 랑게...팔괘가 어디 점으로 이어져 있어?




이전의 고하도(古河圖)에서는 점이 아니라 이화문(梨花紋, 또는 菊花紋)으로 이루져 있었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옛 윷판을 보게 되면, 각각의 원점은 이화문이나 여러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원점에 놓여지는 말도 이화문으로 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윷판에 늘어선 각각의 원점은 원래 여러개의 원이 모여있는 이화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게 배꽃 무뉘인지 버꽃 또는 복숭아꽃 무뉘인지는 몰라도 엿장사가 그린그림이니 그럴것이고 그 말도 엿장사가 만들었으니 그때는 아마 엿장사가 많았던 모양. 히히 근디 왜 말판까지 그 이화문이냐? 그래야 천부경 글자가 완성되나?




또한 태백일사(太白逸史) 마한세가(馬韓世家)에서는 윷놀이에 신지 혁덕이 기록한 천부경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이 모양으로 환역(桓易)을 강연하였다고 하였다.


참 한단고기 좋아 하네. 환단고기는 진필도 많지만 특히 이맥이 쓴것은 2/3 가 가필이여.

桓易? 그러니까 桓나라때 부터 易 이 있었다는 말인디 그럼 왜? 易 의 창시자가 복희씨라 하나?

30 년간 易 에 대해 연구한 서울대 김경탁 박사는 복희씨 조차도 근거가 희박한 전설적 인물이며 은나라 시대에서 팔괘가 없었으니 易 이란 고대인들이 나뭇가지 등을 꺽어 점치던 일종의 점술을 문왕 공자가 정리한것으로 확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김경탁 박사도 30 년간 헛짓을 했군.




그러니 천부경을 처음으로 기록한 녹도문은 바로 윷판과 매우 비슷한 모양이었으며, 또한 윷판에 나열된 원점은 여러 개의 원이 모여있는 이화문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녹도문이 윷판과 비슷한 모양이라고 한다면 최고운이 보고 베꼈다는 비석에 새겨진 전문(篆文)은 녹도문에서 발전된 형태로서,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의 문자 가운데 원(ㅇ)과 직선(ㅡ)으로 조합된 문자는 한반도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한글의 기본인 조선시대의 훈민정음(訓民正音)과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상고시대의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이 있으며,



이 양반아 어찌 원(ㅇ)과 직선(ㅡ)으로만 이어졌냐? 천부인이 원방각 이라는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그것이 天地人 이라는것은 동양의 보편적 사상이며 그 천지인을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도 三才 라 하지 않더냐?

도대체 가장 중요한 사람은 거시기 허러 갔냐? 천지인이 뭔지도 모르고 천부경 어쩌구 하네...



일본과 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자들이 발견된다. 일본에서는 한글을 신대문자(神代文字)라 하여 제의용(祭儀用)으로만 사용되었는데,

대마도(對馬島)의 복부(卜部) 아히루(阿比留) 가문(家門)에서 전해지는 아히루(阿比留, アヒル) 문자는 거의 한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대문자가 아루히 문자고 그건 가림토에서 발전한 글자야. 훈민정음 발전되듯...



구주(九州)의 구가미(九鬼) 가문(家門)에서 전해지는 까스가(春日, カスガ) 문자는 선보다는 원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5) 그리고 인도 남부 구자라트 주(州)에 사용되는 드라비다어(Dravidians)가 한글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반도 남부지방에서는 이렇게 원과 선으로 이루어진 알구멍(性穴)과 바위그림(岩刻畵)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본의 구주(九州)에서도 두세군데 발견되었다.




알구멍(性穴)과 바위그림(岩刻畵)
한반도 전역과 요동반도에 산재하는 수많은 고인돌에는 간혹 그 덮개돌이나 앞마구리돌,

또는 낮게 박혀있는 문지방돌에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알구멍(性穴)들이 새겨져 있다. 대여섯기 이상 고인돌이 모여 있는 고인돌떼에서는 그 가운데 1 ~ 2기의 덮개돌에서만 이같은 알구멍들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이런 점에서 알구멍은 일반적이지 않고 특정 무덤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로서 알구멍은 영속적(永續的)인 역량(力量)을 갖고있는 무덤 주인공에게 그 후세(後世)들이 도움과 구원을 얻으려는 기원(祈願)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알구멍이 아니라 별자리를 그렇게 그린게야, 이건 내별 저건 네별, 그래서 옛 사람은 별를 보고 그사람의 운명을 점 첬고 수명을 빌었던 게야. 그러니까 구멍이 컷다 작았다 하는게야

글구 그게 알 이라 하더라도 알이 얼 과 같은 생명이라는것을 알았을것 같애? 또 생명이라 알았다 하더라고 천부경은 일단 교훈인데 왜 알을 그려?

아! 새 새끼 들이 거가다 알 낳고 새찌 치라고? 히히




그런데 고인돌의 앞에서 기원하면서 덮개돌을 쪼아대면서 하나 둘씩 만들어졌던 알구멍들이 한반도 중남부지방, 즉 옥천(沃川), 칠곡(漆谷), 경주(慶州) 등지에서는 여러 개가 새겨지면서 그 사이를 선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이고,

남해안 가까이의 함안(咸安)에 이르러서는 알구멍 주변에 마치 수면(水面)의 파문(波文)처럼 고리꼴 무늬가 여러겹 덧붙여지게 되어,

알구멍의 원과 그 둘레의 선이 복합된 바위그림(岩刻畵)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고령(高靈)을 비롯한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 일부지방에서는 알구멍이 점차 줄어들고 그 대신 검무늬(劍紋)나 검자루무늬(劍把紋)가 도드라지게 표현되며,

(6) 서울 북한산(北韓山)과 안동(安東) 등의 고지대(高地帶) 바위에서는 윷무늬(柶板紋)와 말굽무늬(馬蹄紋)가 발견된다. (7)


말굽 무뉘까지 여러 그림이 나타나지?

이건 먼저 별구멍인지 알구멍 인지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옛 사람들의 그림일 뿐이야.

언듯 보면 뭐 피카소 추상화 같지만 잘 보면 초등학생 그림야. 우리란 놈 보다 더 그림못 그리는 놈 쏨씨야.

그러니까 아이들이 제 아버지 돌파는 연장 훔처 가지고 와서 손작난 하며 얼라리 꼴라리(정액이 나왔네 콧물이 나왔네)하고 놀다가 그냥 그린거야 한번 잘 봐!

그것도 한놈이 아니라 여러놈이 그린 일종의 낙서야 .

이게 뭐 윳판? 천부경? 히히히






이 가운데 가장 다양한 무늬가 어우러져 있는 암각화 유적은 경주(慶州) 석장동(錫丈洞)에 위치한 금장대(金丈臺) 암각화이다.

여기에서는 알구멍(性穴)이 포함되어있는 검무늬(劍紋)와 검자루무늬(劍把紋)를 중심으로 사람 발자국무늬(足印紋)와 함께 사슴 발자국이라 할 수 있는 이화문(梨花紋)도 보인다.

그럼 왜 거기에 왜 또 칼이 등장하나? 칼은 전쟁무리라며?




그러나 이화문으로 이어진 윷판 암각이거나, 또는 이화문으로 이어진 고하도(古河圖)와 비슷한 암각화,

또는 이러한 암각화와 암각문자를 이어주는 어떠한 증거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하게 경주의 이화문 암각화를 녹도문(鹿圖文)의 일종으로 여기기에는 무리가 많다.

이제야 바른 말을 하는군




이런 점에서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에서 말한 녹도문의 기원인 "암사슴(牝鹿)의 발자국(足印)"이라는 구절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牝 은 노자 독덕경 是謂玄牝 에서 설명했듯 소 엉덩이를 비수로 찍은것 같은 소 거시기야. 그때 사람을은 가축에서 거시기가 가장 크게 보이는것은 암소 일테니 당연하고 거기서 새끼가 나오니 생명으로 알긴 알었어.

사람은 소 거시기 에서 나오지 안는다고 사람 거기기를 말 할 수 있겠어? 비유 한것이지 .




여기에서 암사슴은 빈록(牝鹿)으로 표현되었

는데, 사실 암사슴이라는 표현은 원래 우록(鹿/匕+鹿)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더구나 우(鹿/匕)는 암컷 사슴(鹿)을 말하고 빈(牝)은 암컷 소(牛)를 말하는 상형(象形)이기 때문에, 굳이 암소에 사용되는 암컷 빈(牝)을 사용한 것을 보면, 빈록(牝鹿)은 암사슴이라는 짐승을 표현한 단어가 아니라

그러니까 사슴도 그 牝 자를 붙이면 암사슴이 되는건 좋아.근디 사람한테 붙이면 어떻게 될까? 牝 + 人? 牝+女? 뭐 그런 글자도 있나? 여기까진 좋다.



사슴(鹿)을 신(神)으로 여기는 여인네들을 비유하여 말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예라이 잘 나가다가 옆으로 가네...牝 은 牛 + 비수인 匕 야. 그럼 생명의 신을 모시려면 당연히 牝 인 소를 섬겨야지. 힌두교 처럼, 왜 그 신지도 놓처버린 산중에나 있어서 잘 볼수도 없는 사슴거시기냐? 그 잘 보이지도 않는 사슴 거시기를 보느니 차라리 개 거시기를 보는게 빠르겠다.



즉 신지 혁덕은 여인네들이 만든 어떤 흔적들을 보고 기록할 수 있는 문자를 창안(創案)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흔적(痕迹)은 바로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알구멍(性穴)이 아닐까 여겨진다.

으하하하하




윷판(柶板)과 고하도(古河圖)
결국 이화문(梨花紋)으로 나열된 윷판은 간단한 윷판에 부가된 화려한 장식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 근본은 역시 간단한 알구멍들이 선으로 이어지거나, 둥그렇게 늘어서 4등분되는 고리꼴(環形)을 이룬 모습이다. 이러한 알구멍의 연결이 점차 각각의 알구멍에 의미가 부여되면서 복잡한 이화문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梨花文이란 배꽃모양이 글자인데?



특히 고하도(古河圖)의 경우를 보면, 이화문이 5겹으로 늘어서있는 다섯겹두리꼴(五重同心圓)인데,

우선 우측 그림이 다섯겹두리꼴(五重同心圓) 윳판인가? 지금 윳판인가? 지금 윳판과 같은디...



중앙에 5개의 이화문이 십자형으로 놓여있고, 그 둘레에 10개의 이화문이 선으로 연결되어 원을 만들고 있다.



중앙에 5개의 이화문이 십자형으로 놓여있는것은 지금 말판도 그런데 그 둘레가 10 개의 이화문이라니? 내 눈엔 20 개로 보이는디. 내가 궁민핵교 나온지가 오래돼서 잘못 세나?



그리고 그 바깥에 북쪽(아랫쪽)에 1개, 남쪽(윗쪽)에 2개, 동쪽(왼쪽)에 3개, 서쪽(오른쪽)에 4개가 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뭰 말이여? 그렁게 20 개가 선으로 이어졌지.

글구 남쪽이 왜 한개고 동쪽이 왜 두개....냐? 남쪽은 첫번째, 동쪽은 두번째 해야 말이 되는것 아녀?
글구 왜 남쪽이 위쪽이냐?
아랬쪽이고 동쪽이 오른쪽이지. 이거 말판이 뒤집혔나?

내 정신이 뒤집혔나?



다시 그 바깥에는 북남동서 방향으로 각각 5개씩 더해진

그러니까 이건 우측 사진은 아니군. 그면 왜 우측 사진을 제시했어? 누구 약 올리냐? 근디 난 그 럼 말판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디...



6, 7, 8, 9개의 이화문들이 늘어서 외곽은 원각방형(圓角方形, 또는 抹角方形)을 이루고 있다.

그놈의 고하도(古河圖)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나 글쓴이는 위에서 자기입으로 " 고하도(古河圖)의 경우를 보면" 했으니 글쓴이는 그 古河圖 를 보긴 본 모양인디 왜 그림을 올려 주지 않고 연재 말판을 올려 주어 사람 헷갈리게 하나?

글구 古河圖 말판에는 "6, 7, 8, 9개의 이화문들이 늘어서 외곽은 원각방형(圓角方形, 또는 抹角方形)을 이루고 있다." 했는데 이놈의 말판이 도채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멍청한 필자로써는 이론상으로도 상상도 되지 안네.



이렇게 1부터 10까지의 수가 모여져 만들어진 하나의 겹두리꼴(同心圓) 도형이 원래의 하도(古河圖)이었던 것이다.


어디 " 1부터 10까지" 야? 첫번째 두번째 하더라도 6, 7, 8, 9 하고는 연결이 않돼.


천부경(天符經)은 사실 1부터 10까지의 수가 모여 세상의 진리(眞理)를 숫자로 반영시킨

그건 맞아



도형적(圖形的) 문장(文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형적 문장이 아냐. 신지 녹도전자야.



옛 하도(古河圖) 또한 이와 똑같이 1부터 10까지의 수가 모여 세상의 온갖 변화(變化, 易)를 간략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하도나 역 어쩌구 한 사람은 천년후 사람이야



이러한 세상의 진리(眞理)를 반영한 숫자를 재미있게 놀이로 승화(昇華)시킨 것이 바로 윷놀이이며, 이러한 윷놀이를 통하여 만물의 조화(調和)를 이루어가는 지혜(智慧)를 터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최고운이 보고 베꼈다는 옛 비석(古碑)의 신지(神誌) 전문(篆文)은 분명 윷판이나 옛 하도(古河圖)와 비슷한 모양이었으며, 그 전대(前代)의 녹도문(鹿圖文)도 이 범주(範疇)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2000년 10월 8일 邊光賢 씀.
(이 내용은 월간 '뉴휴먼 단(丹)'의 2000년 11월호에 기고되었습니다.)



예이 여보슈 더 연구한다음에 글을 발표하슈!



원문 글 쓰신분은 무었인가 연구하는 열의는 좋습니다. 그 열의를 가지고 지금 우리가 가 볼수 있는 중국 산동성 백수현에 있는 창성조적서 비를 보았으면 좋은번 했습니다.

여기서 창성이란 창힐이 글자를 만든 성인이니 바로 창힐을 성인대우 하여 붙인 이름이고 아래 사진은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그의 첫 글씨를 비석에 새겨 놓은것 입니다.



이 찰힐은 신지 밑에서 글자만든는 법을 배웠다는 기록은 너무 많고 그 비석내용은 창힐이 한자 만든는 과정을 적은걸로 중국인들은 알고 있으나 그 글씨를 해독해 보면 이는 환웅이 고조선을 세우는 것을 보고 적은 일종의 견문록이라 중국의 국보가 아니고 우리 국보 입니다.



그 옆 북한 법수교 밑의 녹도전자도 일반은 천부경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자식이나 농사를 잘 되게 해 달라는 고천문 에 불과 합니다.





다음 1940 년 북한 영변지에 태백산에서 탁본해 왔다는 녹도전자가 진본 천부경 인데 이는 편집상 가로뉘이어 세어놓고 해독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문외한 이라도 금방 이것이 하나 둘 셋 ... 열 인줄 압니다. 아니 그냥 문외한은 않됩니다. 그 전에 천부인으로 만든 ㄱ ㄴㄷ ..ㅎ 속의 뜻 부터 안다면 쉽게 해독이 가능 합니다.



그러니까 원문 글 쓰신분 같이 진본 천부경은 하나 둘 셋 ...열 이라는것을 아신분이 중국에 있는 창성조석서 비 부터라도 보셨다면 문제는 간단했을 겁니다.



그러나 어디 누가 만들었지는 모르지만 옛날 어떤 심심한 놈이 만년묵기로 돌에 파 놓은 윳판을 가지고 그게 진본 천부경 이라고 풀려니 그렇게 모순이있는것 입니다.



필자의 카페에는 그 모든 신지녹도문자, 뿐 아니라 원시 가림토 해독이 다 돼어 있습니다.

http://cafe.daum.net/chunbuinnet -우리 -

스크랩] 신지녹도전자, 금문해독 천부경 10.(신지녹도문 해독을 증거하기 위한 방법)

글쓴이 : 큰바위 번호 : 78조회수 : 312007.04.06 19:45
*신지녹도전자, 금문해독 천부경 10.(신지녹도문 해독을 증거하기 위한 방법)




(이 신지녹도문자, 금문 해독 천부경은 처음 1.번부터 순서대로 읽으실 것)

* 독자님들께 부탁! 이 글을 읽으시다가 오자 탈자가 있으면 꼬리글로 알려 주실것!



* 우리 하느님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환단고기 같은데도 쓰여 있기는 하나 이는 하느님 시대로 부터 수천 년이 흘러 한자가 생긴 다음에 써진것이다.

즉 하느님 당시에는 한자는 물론 아무런 글자가 없었고 환숫이 한울의 소리, 즉 천부경을 보관하고자 만든것이 신지녹도전자라 했는데 이는 신을 위한 글자라 천제를 지낼때만 썼었고 다시 원시가림토 신획,

그리고 가림토가 만들어 졌으나 이는 발전하는 말을 따라갈 수 없음으로 그림을 그려 보충한것이 금문이고 이는 갑골문, 그리고 진시황때 소전(小篆) 대전(大篆), 예서(隸書), 해서(楷書)등을 거치면서 중국말과 맞추어져 발달했고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는 삼국초에나 들어왔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사서는 중국기록인데 그들은 우리 상식을 모르니 엉터리로 한자로 금문등을 번역했을 것이고 또 중국인들의 기록이 가령 정확하다 해도 한자 번역은 열이 하면 열의 내용이 다 다른것이 번역이다.

따라서 비단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 사서를 훔쳐가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 번역자들의 개인 의견으로 인한 가필이 없을 수 없으므로 정확한 유물이 있어야 하는데 유물 중에 무엇보다도 정확한 유물은 우리 뿌리 말이고 이는 천부인으로 만든 ㄱ ㄴ ㄷ...ㅎ 속의 뜻을 알아 우리 뿌리말을 아는것이라 했다.






신지녹도 전자는 환숫(桓雄)님 께서 직접 하느님으로 부터 받아 기지고 온 말씀을 그 신하 신지가 바로 썼으니 하느님 말씀 원본 그대로 일 것이고 이 귀한 신지 녹도 전자가 태백산 단군전비(檀君篆碑)에 쓰여져 대략 5천 년이 흐르도록 그 글자해독이 어려워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는데

신라말 어문학의 대 성자인 고운 최치원은 이것을 번역 하여 다시 81자의 시첩(詩帖)으로 만들었다는 (更復作帖)것이 현재의 천부경이라 했다.





여기에서는 그 대략 6천 년 전에 써진 신비한 하느님 교훈, 그리고 최치원만이 해독 했다는 그 신지녹도 문자의 해독과 난해한 최치원의 81자 시첩을 천부인으로 만들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ㄱㄴㄷ...ㅎ 속의 뜻을 해독하여 그 하느님 말씀이 바로 우리의 숫자 하나 둘 셋 ...열이라는 것과 이 숫자가 과연 무슨 소리 인지를 누구나 이해가 가게끔 밝힌다.







* 다음 글은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의 만화 내용 같은 삼국유사와 규원사화를 근거로 약간의 살을 붙여 현대 감각으로 쓴 글인데 그 이유는 서유기의 불타는 개울에서 유전을 찾아내고 요귀의 여인천국에서 로고호의 모우스 부족, 즉 외부 사내들을 납치 해다가 종종을 퍼트리는 여인들만 사는 나라를 찾아 내듯이 고전이란 전연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실화를 과학상식이 없던 고대인들로써는 신화처럼 써 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삼국유사나 규원사화 같은 곳의 하느님 이야기도 그 뿌리는 사실 이기에 얼마든지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책 '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을 인용한다.


환숫께서는 당시 마치 짐승과 같은 호랑이 족(한앙이>하랑이> 호랑이-크고 히다는 뜻의 백계 러시안)과 곰족(감,검, 굼, 곰의 모음 혼동으로 땅,여자,검다, 작다는 뜻의 검고 작은 현재 중국 남부나 동남아세아인 -南蠻) 이 살고 있는 삼위산과 태백산 사이 검불(검은 벌 >검벌 > 검불-神市)에 ‘밝은땅’ 이라는 뜻의 '밝달' 나라 기초를 를 세우고(후에 한자가 생기자 倍達로 전음 된다) 우선 그 짐승과 같은 무리들을 천부인 의식으로 사람을 만들려 하셨다.






당시 그들은 요즘 사스 같은 풍토병과 각종 해충에 물리고 나뭇가지에 찟기어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가 말도 완전 짐승 소리이고 생각도 짐승생각 외엔 없었다. 환숫님 께서는 이들을 천부인을 상징하는ㅇ, 즉 동굴과 따을 상징하는 ㅁ, 즉 마늘과 사람을 상징하는 ㅅ,즉 쑥으로 치료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일체라는 천부인 사상을 교육시켜 사람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그 지독한 맛의 마늘과 쑥을 먹어 보고는 고개만 절래 절래...






한편 항상 홧숫님을 사모하던 호족 추장 딸과 곰족 추장 딸은 환숫님의 아이를 낳고자 했는데(결혼제도 아직 없었음) 환숫님은 그 조건이 우선 천부인 의식을 통하여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녀들의 시범을 통하여 그들 종족들을 교화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호녀와 웅녀는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게 되는데... 환웅을 하늘같이 사모했던 웅녀는 마늘이 아니라 쥐약인들 못 먹었겠는가?




그러나 호녀는 참지 못하고 도망가고 웅녀는 100 일이 아니라 21일이 되었는데도 마치 짐승과 같던 몰골이 미스코리아는 저리 가라 가 되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한데다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사람 말 까지 하니 모든 곰족 들도 앞 다투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ㅎㅎ.






환숫께서는 약속대로 곰녀를 택하여 앗달 (아사달)에서 앗선(처음 세운, 새로 세운 - 朝鮮)을 세우실 밝달임금(밝은땅 임금 - 檀君)을 낳으시자 환숫님과 같이 왔던 3천명의 모든 무리와 곰족들도 그들과 피를 섞어서 그로부터 우리의 민족과 역사가 시작 되었던 것은 이미 말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마늘과 쑥으로 지금 사스같은 풍토병과 해충의 피해를 이겨 냈고 따라서 그들은 이 마늘과 쑥을 항상 먹었으므로 이 지구상에서 그 지독한 마늘과 쑥을 상식하는 민족은 그들의 후손인 우리 한민족 뿐이다.




환숫께서 이 천부인 의식으로 짐승과 같은 곰족을 교화 시키고 그들과 피를 섞어... 그들과 동화 하여 새 민족을 세웠다는 것은 이미 인디언이 살고 있는 땅에 처 들어가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미국 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과 대조되는 홍익인간이 최초로 이 세상에 펼쳐진 위대한 모습이라했다.






환숫 께서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하신 것은 모두 하느님으로 부터 받으신 교훈...즉 천부경 속의 "홍익인간" 정신 때문이며 한편 사람이 되지 못한 호족 후손들(호랑이의 원말은 한앙이로 히고 큰것, 백계 러시안, 백인)은 자고 나면 오직 남을 죽이려고 싸움질 뿐이라 살인 무기만 발달 시켜 왔고 모든 과학 문명은 모두 전쟁무기에서 비롯되는데 6.25 이후 우리는 그들의 물질문명에 병들어 오히려 그들의 비 인간성을 흠모하기도 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고했다.




사람이란 과학이 발달하고 살인무기가 발달하여 약한 자를 죽이거나 굴복시키고 따라서 돈과 명예와 허영과 사치와 초를 다투고 또 시간에 얽매어 사는 현대 문명 세계가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신선과 같이 사시던 하느님(桓因)의 세상이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 에덴동산이며 아담과 이브의 생활이 인간 본연의 자세라고 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이 지구상에 전쟁을 없애고 세계 평화를 이룰 정신인 홍익인간의 내용이 들어있는 우리 민족의 주 경전인 천부경이 가감 없이 수록된 신지녹도 전자가 우리 전 세계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 한편 먼저 말한 태백산 단군전비에 있는 천부경은 그 후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대략 4천 년이 흐른 다음 신라 말 고운 최치원에 의해 해독,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나는 81자의 한자 첩(帖)으로 기록 되는데...


그러나 우리는 이 최치원의 81자를 천부경으로 잘못 알고 또 우리말을 한자로는 마음대로 기록할 수 없으니 마치 처용가와 같은 이두로 써진것을 한자 뜻대로 해독하려니 잘 풀리지가 않으니까 각종 음양오행설로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해독하여 독자는커녕 풀었다는 사람도 무슨 소리인지 알고나 썼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횡설 수설 풀고 있고 컴퓨터로나 가능한 수리학적으로 풀려 하지만 이직까지 속 시원히 풀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1.신지녹도전자를 최치원 이후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두로 써진 문장을 한자 뜻대로 해독하자니 해독이 되지 않는것이다.







2. 최치원은 위 신지녹도문자를 해독해 본 결과 그 뜻이 "하나 둘 셋 ...열" 이었으므로 이것을 그대로 한자로 번역 해봐야 "一 二 三 ...十"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당시 사람들은 "하나 둘 셋 ...열"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그 져 숫자로만 알고 있었고 이 숫자의 의미를 풀어 설명 하려면 원시한글인 가림토의 ㄱ ㄴ ㄷ ...ㅎ의 자음 속에 어떤 뜻이 들어 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때 선비들은 한자에 미처 돌아 이미 가림토가 없어진 때이니 가림토로 설명도 할 수 없고 또 가림토를 복원해 설명해 봐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없을 때이니 써봐야 말짱 헛일이었을 것이다.

( 최치원이 81자를 쓰고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그의 시 秋夜雨中 참고)






그러니까 최치원은 이 신지전자를 해독하여 그대로 번역문을 쓴 것이 아니라 갱부작첩(更復作帖) 즉 하나의 시첩(詩帖)처럼 별도의 글을 이두로 만들었고 그 속에 우리 숫자 "하나 둘 셋 ...열"의 뜻을 묘하게 써놓아 우리말이 아닌 한자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게 써 놓으면서 당시나 후대에...또는 지금도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한자에나 미처 돌고 한자로만 풀려는 선비들을 "엿"을 먹인 것이다.

즉 이두로 써진 글이니 우리말로 풀면 쉽게 풀리는 것을 한자로는 도저히 풀 수 없게 위대한 작난을 처 놓았다는 것이다.






3. 신지녹도문자의 내용은 책 '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하나 둘 셋 ...열”이고 최치원의 81자는 전술했듯이 이 숫자들의 뜻을 가지고 다시 하나의 시첩을 만들면서 이 숫자의 뜻을 설명 했고

또 우리 한 민족 이라는'한' 을 예찬한 것인데 아직까지 모든 이들은 이것을 천부경으로 잘못알고 풀려 했으니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점이다.






4.신지녹도 전자는 바로 하느님 말씀이고 한자가 생기기전의 우리말인데 최치원의 81자가 한자라 하여 이두로 써진 우리말은 생각 하지 않고 자꾸 한자의 뜻 대로 풀려 한다는 점.






5. 신지전자가 쓰여질 무렵은 말이라곤 불과 20여개 밖에 없는 이심전심으로 살아가던 시대로 20 만 단어를 쓰는 현대인들의 상식과는 너무나 괴리가 심하다는 것을 모르고 현대의 상식으로 풀려 했다는 점.






6.하느님 시대나 신지전자가 쓰여질 무렵에는 음양오행설이 태동도 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복희씨가 겨우 팔괘를 창안 했다 하더라도 이는 몇 천 년 후의 일인데 과연 하느님은 몇 천 년 후에 음양오행설이 생길 것을 예비하여 음양오행설로 말씀을 하실 것 같은가?






7. 컴퓨터로나 풀 수 있는 우주의 수리학적 논리로 풀려 하고 있는데 그때 숫자라고는 하나 둘 ...열밖에 되지 않는다. 즉 손가락 수대로 '열' 밖에는 안 되고 더 이상의 숫자는 그냥 '온' 이라 했는데 이 '온' 은 그 후 천년 후인 3세단군 가륵때 와서야 百이 된다. (이는 먼저 우리 숫자는 애초 열밖에 없었다는 증거 참조)






8. 신지녹도전자는 분명 16글자인데 거기서 81자의 천부경이 나왔단 말인가? 그것도 한자이고 우리말로 풀면 한 권의 책이 되는데...






9.한 권의 책을 과연 입과 입으로 전한다는 구전지서가 될 수 있을까?





10.최치원의 81자는 순전히 우리 숫자 놀음 인데다가 우리 숫자 “하나 둘 셋 ...열”도 뜻은 열 개이나 글자는 신지녹도 문자처럼 16자 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11.최치원은 81자 중에서 一 二 三은 天地人으로 설명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숫자는 아무 뜻도 없어 음양오행설로 풀어야 한단 말인가? 하나 둘 셋이 우리말인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면 다음 “넷 다섯...열”도 우리말로 풀어야 할 것 아닌가?






12.우리 조상들이 우리 숫자 “하나 둘 셋 ...열”을 만들 때 "하나 둘 셋" 까지는 "하늘과 땅과 사람" 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로 숫자를 만들고 다음 "넷" 부 터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로 숫자를 만들었을 것 같은가?






13.넷 서 부 터의 뜻은 우리는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 숫자는 하느님 시대의 말이고 하나 둘 셋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고 최치원의 말했으나 넷 부 터는 직접적인 설명은 없다. 그러나 최치원의 81자 속의 숫자를 우리말로 보고 우리말에서 발음되는 ㄱ ㄴ ㄷ...ㅎ 속에 어떤 뜻이 들어있는가를 풀어본 학자가 있었다면 그 뜻은 분명하게 밝혀진다.






14. 하느님 말씀인 천부경이 우주의 진리이고 음양오행설도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에 음양오행설로 풀어야 최치원의 81자가 제대로 풀린다면 지금까지 음양오행설로 풀이한 100여 개의 천부경 해석이 왜 쓰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가?

그 백여 사람은 각자 자기 해석만 옳고 남의 해석은 음양오행설도 잘 모르는 엉터리라 한다. 백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15.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란 말은 바로 하느님 교훈이다. 그런데 신진 녹도전자 천부경 이외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원본 그대로 쓰여 있는 문서는 아무데도 없고 그 말씀이 훼손이나 변질이 없이 그대로 보전되는 문서도 오직 신지녹도전문 밖에는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 환단고기 등에 고기(古記)를 인용한 하느님 역사에서 홍익인간 이란 말이 나오지만 이 고기는 는 옛 사람이 무엇인가 보고 갑골문이나 가림토로 전하던 글이 아니면 구전되던 것을 삼국이후 한자가 들어오자 한자로 번역한 것이고 이것을 일연은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이 전해진 것은 신지독도 전자 천부경 밖에 없으니 옛날에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냉용이 구전이나 어떤 형태의 글로 전해 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혹자는 홍익인간은 하느님 말씀이고 최치원의 81 자가 천부경 이라고 해석하면서도 그 81 자 속에 홍익인간 소리가 붙어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필자는 남들이 해석한 글 백 권을 읽어 봤어도 모두 아리송한 음양오행설이지 이것이 홍익인간 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그러니까 후세인들은 그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古記만 믿고 弘益人間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라고 임의로 해석하고 우리 헌법, 특히 교육법 1 조에까지 써 넣어 있다.






신지녹도 전자에서 홍익인간 이란 말은 바로 우리 숫자 '열' 이고 최치원의 81 자 중에서는 一積十鉅無 匱化三 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필자가 지금 신지녹도 전자를 해독하는 것이 엉터리 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 그러므로 필자는


책 '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에서 말 했듯이 최치원의 81자를 우리말의 뿌리를 추적하여 ㄱ ㄴ ㄷ...ㅎ 속에 개체적 의미와 철학이 들어 있다는 학설을 정립 한 다음 최치원의 81자는 이두로 써진 우리 숫자의 풀이인 동시 '한' 의 예찬서 임을 밝혀내고 따라서 위 신지녹도 전자를 우리말로 해독을 하였고 이 내용을 여러 차례의 강의와 토론을 통하여 검정 하였으며 특히 천부경으로 잘못 알고 있는 평양 법수교 아래 비문까지 ‘기천문’ 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여기에 자신 있게 글을 쓴다.






* 혹 독자들은 신지녹도 전자는 신인(神人)인 최치원이나 해독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지가 글자를 만들었다면 그 글자는 그의 임금님인 환숫님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신지의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글자가 써진 지 5천년 후에 최치원만 해독할 수 있고 6천년 후에 우리는 해독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글자가 아니다.




단 최치원이 3일에 해독 했다면 우리는 삼 개월 이라도 걸려서 해독해야 하고 최치원이 3개월 결렸다면 우리는 3년이 걸려서라도 해독해야 그것이 글자라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신지녹도 전자나 서두에서 말한 금문 그리고 최치워의 81자를 해독하지 못했던 이유는 알고 보면 너무도 간단하다.




먼저도 말했듯이 20만 단어를 쓰는 우리가 불과 20 여 개 단어로 살아가던 그분들의 의식주 생활은 물론 성생활, 그리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전연 이해하지 않은 채 우리 방식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 우리는 거리에 나가보면 우회전 좌회전 등 교통 표지판을 쉽게 접하고 누구나 이해한다. 그러나 1000년 후 비행접시를 타고 다니는 우리 후손들은 그것을 전연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비행접시에 가려는 집의 숫자만 입력하고 단추 하나만 누르면 단 일초 사이에 미국 친구네 안마당에 사뿐히 안착할 수 있기 때문에 교통 표지판이란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그런 그들이 어쩌다 그 교통표지판을 발견하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 자동차 문화로 돌아와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지 녹도전자와 최치원 81자를 해독 하려면 20만 단어를 쓰는 우리 의식을 버리고 20 여단어로 살아가던 5-6천 년 전 그들의 세상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신지녹도 문자를 풀어 보는데 다음 조건이 맞아야 한다.


만약 다음 조건이 맞지 않은 채 필자가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해독 한다면 필자가 사기를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천부경인 신지녹도 문자를 해독하고 그 글자들의 해석이 틀리지 않았는가를 검정하기 위하여 평양 법수교 비문, 섹스예찬문, 창성 조적서 비문까지 해독 해보고 네 개가 다 읽는 법이 같아야 한다.






2.신지녹도전자가 우리 숫자 “하나 둘 셋 ...열” 이라 했는데 이 숫자의 뜻 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 즉 책에서 말 하는 "ㄱ ㄴ ㄷ...ㅎ"속에 들어있는 우리말의 뜻과 그림문자인 신지 녹도전자를 해독한 그림의 뜻이 같아야 하며 또 우리 조상이 모자라는 글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만든 금문과도 맞아야 한다.






3. 최치원의 81자의 뜻이 왜 "하나 둘 셋..."열의 해설서 이며 '한' 의 예찬서 인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돼야 한다.






4. 우리가 툭하면 쉽게 말하여 심지어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이념 이며 교육법제 1조에 들어있는 "홍익인간" 의 뜻은 하느님이 우리 에게 주신 천부경, 즉 신지녹도 문자 이외의 기록에는 없는데 과연 어느 부분에 어떻게 무슨 뜻으로 말씀 하셨는지를 역시 신지녹도전자와 하나 둘 셋 ... 열과 최치원의 81자에서 찾아내고 그 말들이 일치 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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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래

2008.03.08
08:26:41
(*.205.1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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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부경 - 사진자료 >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더불어
오은(五隱)중에 한사람인 농은(農隱)의 유집에서 발견된 천부경문

출처 : 대종언어연구소, 일요시사 2002년 9월 29일자

갑골문자 天符經 발견,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민족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역사(歷史)는
존재의 정체성과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자리매김하는 가장 분명한 준거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역사는 자주적인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주변의 중국역사에 비해 열등한 모습으로,
그리고 일본의 강점이라는 치부를 지닌 왜소화된 이미지로 투영돼왔다.

이러한 데는 우리 역사의 실체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의식의 결여,
여기에 편입한 강단사학(講壇史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古代史)는 그러한 역사 관행의 피해를 본 대표적인 분야.
이로인해 찬란한 고대사를 증거해주는 사료(史料)는 위서(僞書)로 치부됐고,
재야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고대사의 실제 모습을 증거해줄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발견돼
향후 국내의 학계는 물론 역사의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

이에 따라 본지는 "농은유집 천부경"의 의미와
박대종씨의 연구 성과가 갖는 의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기로 한다.


< 갑골문과 천부경 >


갑골(甲骨)문은
속칭 한자(漢子)라 불리우는 동방문자의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로 알려진 문자이다.

갑골문이란 명칭은
그 문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등에 칼로 새긴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은왕조(B.C 3400~3100)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환국(桓國)에서 비롯,
구전되어 오던중 환웅(桓雄)의 명에 의해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新誌, 단군시대의 천황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의 임무를 전담하다가 혁덕이후 기록을 담당했던 벼슬의 이름,
앞의 신지혁덕과는 다른 사람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것이다.

단군숭배를 기초로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따르면

배달겨레의 거룩한 3대 경전으로
- 조화경인 "천부경"과
- 치화경인 "참전계경"이 있는데
- 총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환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 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때 묻히게 됐다.

그러던중 1916년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1917년 인편으로 탑본을 대종교에 전하게 되어 비로서 다시 맥을 잇게 됐다.


< 농은유집 천부경의 발견 >


앞서 언급했듯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중 청나라 말기인 광서 25년(1899)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일대 사건에 비유될만한 충격적인 일이다.

하나는 갑골문 하면 오직 중국대륙 내부에서만 발견되는
종래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전의 인물인 민안부가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에 다수 발견, 확인됐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도은 이숭인,
- 야은 길재,
-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발견된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또 주목할점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중
발해 문왕인 지은 "삼일신고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의 한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그림문자로 돌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 子)가 부여의 법학지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한 이로 알려져있는데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으로 은허 갑골문 시기와 일치한다.

이를 종합할 때
민안부의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 및 지시하에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농은일 가능성이 많음)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년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모사본으로,

왕수긍이 쓴 당시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즉 단군 나아가 환웅시대의 천부경까지 고려 하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소급된다.


< 중국갑골문의 한계 >

중국한자의 근원은 갑골문과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이다.
시기적으로는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나라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은문에 비해 발전적인 형태가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금문은 은문으로 칭해도 무방하다.

농은유집 천부경문에는 은문이나 금문에서 발견되지 않는 글자가 있고,
은문, 금문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있어
천부경이 갑골문에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구체적으로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기록되어 있는 중복을 제외한
총 46개의 문자중 은허갑골문에서 이미 발견된 글자들은 총 32자(69.6%)이다.
이중 갑골학을 지금껏 주도해오고 있는 중국학계에서도
정확히 해독하지 못하거나 불명(不明)으로 취급한 문자들이 있다.

지(地), 환(環), 동(動), 태(太), 등이 그것이다.
동(動)자 안에 포함된 중(重)까지 합칠 경우
천부경문에 포함된 글자 중 미해독 글자는 총 다섯 글자가 된다.

특히 지(地)나 환(環)과 같은 고자(古字)의 발견은
기존 갑골학계의 연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은허문에()와 같은 글자가 발견됐지만 중궁의 갑골문
권위자들은 ()을 지(地)가 아닌 다른 글자로 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곽말약은 그의 저서 "복사통찬(卜辭通簒)"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모양을 그린 ‘떨어질 타(墮)’는 본 글자라고 고찰하였다.
서중서도 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에서 무너질‘휴’자로
곽말약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天一一地一二人一三’에서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표현한 천부경문이 천지인이 아닌
천타인(天墮人) 일리 없다.

또한 환(環)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미해독문자 또는 '그물견자’로
풀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설명이다.

금문(金文)에서도 농은유집 천부경 내에 포함된 글자들중
五, 六, 七, 八, 九를 제외한 41자중 11자(26.8%)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미해독문자로 분류된 환(環)자는
농은유집 천부경문으로 해독되고 있다.


< 기존 천부경과의 차이 >

"농은유집 천부경"을 발견.해독하기까지 알려진 천부경은 모두 네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연수가 발견한 묘향산 석벽본,
둘째는
최문창전집 ‘고운(孤雲, 최치원)선생, 사적’ 편에 나오는 최고운 사적본이며,
셋째는
노사(盧沙) 기정진(1798~1876)으로 전유하여 내려오던 노사전본이고 ,
넷째는
조선조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실려있는 태백일사본이 그것이다.

이중 태백일사본 또는 묘향산 석벽본은
한 자도 어긋남이 없이 전문이 일치하여 현재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잇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 化三
일적십거무궤화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大三合六生七八九運
대삼합육생칠팔구운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그러나
태백일사본과 묘향산 석벽본은 농은유집 천부경과 네 군데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석삼극(析三極이 아니라 新(새로울 신)자를 쓴 신삼극(新三極)이었으며,

두 번째는
대삼합(大三合)이 아니라 氣(기운 기)자를 쓴 대기합(大氣合)이었고,

세 번째는
무궤화삼(無 化三)이 아니라
종(從, 좇을 / 나아갈 종)자를 쓴 무궤종삼(無 從三)이었고 ,

네 번째는
衷(가운데 / 통할 충)자를 쓴 칠팔구충(七八九衷)이었다.


< 앞으로의 과제 >

"농은유집 천부경"은
농은 민안부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2000년초 문중인 민홍규씨가 송호수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민씨는 이같은 사실을 "뉴스피플"(2000년 1월17일)
"민홍규의 우리문화일기 - 나무에 뿌리가 없다" 는 글에서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전해진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당사학계에 의해
위.개작(僞.改作)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밝힌 바 있다.

민씨로부터 농은유집을 접한 송호수 박사는 유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당시 송박사는 농은유집의 천부경문에 대한 해석은 하지 못하였다.

농은유집은 언어학자 박대종씨에 의해 비로서 가치를 발현하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홍규씨가 소장해온 고본을 찾는것이다.
민씨는 고본에 대해 일본 전문감정서로부터 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고본이 공개돼 농은유집 천부경문이
고증학적 절차를 거쳐 역사적, 민족사적인 가치를 담게되기를 기대해 본다




민안부(閔安富) 1328∼1401. 고려 말기 충신.

휘는 안부(安富)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이다.
학문과 지행이 높아 일찍이 별시(別試)에 등과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전리판서를 거쳐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13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30여 년간 관직에 있는 동안 처신과 성품이
처세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으며 불의와 타협없이 충직하고 과묵하며
바르게 간언하고 국사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분이었으며
사림으로부터 육은(六隱,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농은 민안부, 수은 김충한) 중의 한분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그밖의 농은 선생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치적 혼란기였던 고려 말의 대부분의 충신들이 그러했듯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임을 스스로 생각하고
그 간의 발자취를 후세에 전하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1392년(태조 1년) 이성계(李成桂)가 개국을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구홍(具鴻)·박심(朴諶)·채귀하(蔡貴河)·이맹운(李孟芸) 등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서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조선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경상남도 산청 산음현(山陰縣)의 대포리(大浦里)에 숨어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망국을 추모하였다.
자손들을 경계하여 조선조에 벼슬하지 말도록 하였고
현감에 기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하였다.

영조에는 그를 비롯한 72현의 충신들이 은거하여 있던
그곳을 부조현에 봉하고 치제하는 은전을 내렸으며,
산청 영남 유림들에 의하여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고,
정조 때는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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