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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900년 고구려제국의 핵심강역은 어디?

우리 역사의 진실은 국사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훈 칼럼니스트  
  
과연 900년 대제국 고구려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또 그 영토를 지도에 그려보면 과연 어떻게 될까?

우리 국민들에게는 무척이나 궁금한 사항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토의 변화가 수시로 있었던 고구려의 영토를 한 장의 지도로 확정지어 그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900년의 긴 사직에는 광개토태왕 같은 전성기도 있었지만, 동천왕 때와 같이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을 받아 많이 위축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당나라 고종이 언급했듯이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가 마치 개이빨(犬牙) 처럼 서로 얽혀져있어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며,  또 고구려는 직접 통치의 영역도 있었으나, 연방제국으로 상대국을 인정하며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는 식으로 운영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  백제,신라,왜를 연방으로 편입한 고구려 대제국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백제 아신왕을 공격해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을 받는다.

아신왕을 죽이고 백제의 영토를 고구려의 직할령으로 전부 편입할 수도 있었으나, 조공을 받고 속민으로 삼아 백제라는 국가를 따로 인정하면서 고구려 연방의 하나로 편입한 것이었다. 신라와 가야도 마찬가지로 연방국으로 편입한다.

그러면 우선 사학계의 바이블인 <삼국사기>로 고구려의 영토를 추정해 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영토의 단서가 될만한 몇 개 기록은 있으나, 근본적인 지리 비정이 잘못되어 있어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추정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

그럼 왜 어떤 내용이 <삼국사기>에 있기에 고구려의 영토를 추정하기 힘든 걸까?

반도사관의 빌미를 제공한 삼국사기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인의 민족정신과 얼을 빼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고, 조선과 중국 전역에 있던 고대사서 20만권을 수거하여 불사르고 수많은 우리의 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남겨놓은 고대사서로는 달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둘 뿐이었다. 왜 2권은 남겨 두었을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위대한 단군조선에 대해 알게 되면 민족정기를 빼기 힘들다고 판단되어, 단군조선을 언급한 고대사서는 전부 없애 버리고는 단군을 신화화해 버린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삼국시대 사서이기 때문에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신화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남는다. 사서를 전부 없애는 것보다는 “너희들의 사서에도 단군은 신화로 기술되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 위대한  조선의 영역도. 이런 민족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역사왜곡과 단군의 신화화가 필요했다.


<삼국유사>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아무래도 <삼국사기>보다 많이 떨어진다. 승려가 저술한 역사서이다보니 아무래도 종교관에 입각한 서술이 많이 있다.

고려 때 신라계 김부식선생이 저술한 <삼국사기>는 상당히 정교하기는 하나 선생의 조상이자 승자인 신라 위주로 기술하다보니 고구려/백제를 많이 폄하시켰고,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 저술된 사서라 주체성이 없고, 일제에게 반도사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제의 분서갱유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일제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는 것이다.

반도사관의 빌미란 <37권 잡지 지리>에서 우리 고대 강역에서 중요한 위치인 패수(浿水)의 위치를 대동강으로 분명하게 비정하면서, 고구려의 평양성은 서경(西京)인 것 같다고 적었다.

그 근거로 <당서>의 기록을 인용했다. 이 문구는 나중에 일제에게 악용되어 망국의 반도사관을 고착화시켜 아직까지 정설로 이어지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 의해 패수가 현 대동강으로 비정되는 바람에 낙랑군 등 한사군의 위치가 전부 현 북한 지역이 되고, 현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 실제보다 엄청 축소되어 버린다.

일제는 <삼국사기>의 이 점을 이용하기 위해 분서갱유에도 없애버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삼국사기>를 직접 조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  현 국사교과서의 삼국의 영토

필자는 김부식이 인용한 <당서>를 열심히 읽어 보았으나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확정적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패강의 어귀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이 된다.”또는 “패강을 지나 평양에 도착한다.”는 문구가 있다.

아무리 사대주의에 물들어있는 유학자라 하더라도 <삼국사기>의 집필진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데 이런 글귀만 보고 패수를 대동강으로 단정지울 수는 없다. 패수란 중국 사서에서도 숱하게 언급되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뭔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결국 <삼국사기>로 추정할 수 있는 고구려의 영역은 현 국사책에 나와 있는 고구려 영역과 별 차이가 없다. 즉 현재의 북한 지역과 만주 땅만을 그 영역으로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영역은 고려와 근세조선의 영역일 뿐, 고구려와 대진국의 영역은 아니라고 잘라 말하고 싶다. 그럼 실질적인 고구려의 강역은 어떠했을까?

고구려의 강역을 전성기와 평상기와 쇠퇴기로 나누어 지도에 그린다는 것은 힘들고, 전성기에 동서남북으로 어디까지 최대로 진출했느냐를 알아보는 것으로 고구려의 영역을 말하기로 하겠다.

동쪽으로는 어디까지?

고구려가 중원의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동쪽으로는 당연히 한반도 전체와 만주 일대가 고구려의 영역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 신라가 있어 고구려의 영역이 아니라고 국사책에서 배운 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진실은 국사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백제와 신라는 원래 대륙에 있었던 나라들이며, 대륙에도 있으면서 한반도에도 들어온 것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5-6세기 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따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나중에 신라는 고구려 말기에 만주 지역까지 진출한다. 그래서 고구려 평양성(요양) 동쪽에 신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지, 평양성이 대동강 평양이 아닌 것이다.

그럼 동쪽인 현 일본 열도는 어떠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광개토태왕 비가 훼손되고 조작되기 전에 <한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이 직접 비문을 보고 글로 적어 놓은 <비문징실>이 전하는데 거기에는 왜 정벌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한단고기>에도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왜는 현 일본 열도라기보다는 열도로 옮겨오기 전 중국 남쪽대륙과 대륙에서 가까운 큰 섬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한단고기>에 의하면 고주몽과 같이 동부여를 떠나 길을 떠났던 사람은 오이 마리 협보였는데, 이들 중에 협보는 나중에 다파라국(왜)의 시조가 된다.

이 다파라국은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했는데,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고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늘 통제를 받았다 한다. 다파라국(왜)도 역시 고구려 대제국의 일개 연방이었던 것이다.

왜에서 처음 국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백제계 응신이 세운 야마토왜(大和倭)이다. 그 이전의 왜는 실질적인 국가로 보기가 어렵다. (응신은 백제 12대 계왕의 손자로 왜로 건너가 백제 아신왕과 손잡고 광개토태왕과 일전을 벌이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북쪽으로는 어디까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중국의 사서 <통전>을 인용하여 “주몽이 북부여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떠나 홀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성을 고씨라 하였다.”그러므로 홀승골성이나 졸본은 같은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몽고 과학원 수미야바타르 박사의 설에 의하면, 주몽의 설화 배경은 몽고의 부이르호나 할힌골강인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북부여 건국 장소로 언급되는 홀승골과 <위서>에 나오는 홀승골은 몽고의 할힌골 강이며, 졸본의 비류수(沸流水)는 부이르호수로 비정하고, 북부여가 몽고에서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광개토태왕 비문에서도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재 바이칼호 연변에 사는 부리아트인들이 스스로 코리아(Korea)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설이기도 하다.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천문기록을 컴퓨터로 계산하여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식기록으로서, 일식은 월식과는 달리 지구 전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과학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항이다.

천문을 관측하던 곳은 원래 그 나라의 수도와 가까운 법이다.

고구려의 일식기록을 분석해보니 최적관측지가 바이칼호 우측 몽고지역이며, 백제는 북경지역, A.D 201년 전의 상대신라는 양자강 중류, 787년 이후의 하대 신라는 한반도 남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최적관측지란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위치이므로 부분일식까지 보는 지역은 그 주위로 많이 넓어진다.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으로는 개기일식인지 부분일식인지 구별이 안된다.


▲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나오는 삼국의 일식기록도


참고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일식기록을 분석해보니 628년-709년 사이에는 동지나 해상 즉 대만 필리핀 해남도와 대륙의 남부가 최적관측지였다. 1189년 이후에야 비로소 현 일본열도가 최적관측지로 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핵심강역과 수도는 원래 우리 민족의 고향인 바이칼호 우측을 중심으로 위로는 시베리아까지 그리고 아래로는 현 내몽고지방이나 하북성 북쪽(북경 주변)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현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례라 하겠다.

우리 민족의 문명이라 하는 홍산문명의 발견지는 내몽고 적봉시 근처이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내몽고의 염수라는 곳을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어 이 사실의 신빙성을 더해주며, 게다가 1976년 북한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이러한 사실을 확정시키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  1976년 북한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 안의 벽화. 주변 13태수가 진에게 하례를 올리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 진은 고구려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태왕 때의 인물로 유주자사(유주는 현 북경지방으로 유주자사는 우리로 치면 경기도지사)를 지냈는데,
진에게 주변 13 지역의 태수가 하례를 올리는 장면이 벽화로 남아있는데, 13지역은 현 하북성 전 지역과 산서성과 산동성의 일부 지역까지로 이는 광개토태왕 시절 유주(북경)가 고구려의 핵심강역 임을 강력히 입증하는 자료라 하겠다.


▲  덕흥리 고분의 벽화의 13태수의 지역을 지도로 표시했다. 하북성은 물론 산서성과 산동성 일부 지역도 포함된다.


고구려의 핵심강역에서 북쪽 영토는 어디까지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바이칼호 북쪽인 북시베리아나 북극 쪽으로 올라가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기후 관계로 동토인 북시베리아를 힘들여 굳이 정벌할 이유는 없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바이칼호 북쪽대신 따뜻하고 물자 많은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나 싶다.

고구려의 남쪽과 서쪽까지의 전체 강역을 굳이 논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핵심강역만 보더라도 현 국사교과서는 엄청난 왜곡이 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맥을 잇는 정통성 있는 적장자 국가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현 국사교과서는 이러한 고구려를 만주 지방에 가두어 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박노자 같은 국적불명의 강아지가 여기저기서 고구려의 진실을 왜곡하며 함부로 멍멍 짓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면상 고구려의 남쪽과 서쪽 영역은 어디까지? 는 다음 편에 연재됩니다.


2008/02/26 [14:04] ⓒ pluskorea

  

  朝廷은 朝鮮의 정부를 뜻하며 朝貢이라는 말은 朝鮮에게 바친다는 말이다    
  


朝貢이라는 말은 朝鮮에게 바친다는 말이다. 朝廷은 朝鮮의 정부를 뜻하며 중국대륙에 있던 모든 족속들은 朝鮮의 屬民임을 나타낸다.
漢나라에 물건을 바치면 漢貢이어야 하는데 이 역시 朝貢이라 한다.

朝鮮의 위대했던 모습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말은 존환양호(尊桓攘胡), 尊(檀)朝攘胡를 고친 것이다.



그러나 中土의 나라들이 君公 및 王에 봉해졌던 내내 우리나라 속국이었다. 百濟 皇帝를 君公에 봉할 수가 없어서, 皇帝보다 더 높다는 뜻으로 廣開土境好‘太皇’[高句麗가 계승한 北夫餘는 檀帝의 나라다. 中國 문헌으로 둔갑한 책에도 高句麗의 통치자는 皇帝로 기록되어 있다.

隋書에는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소열제(昭烈帝),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로 되어 있다. 날조하면서 빠트린 대목이다.


李氏朝鮮 중기에 쓴 太白逸史 조차 廣開土境好太皇이라 했다. 채옹(蔡邕 : 132~192 後漢의 학자)도 "독단(獨斷)"에서 天子라는 호칭은 우리나라가 먼저 사용했다고 했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太王으로 표기되어 있는 廣開土境大勳跡碑는 李成桂가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黃河 이남을 주었을 때, 날조사에 맞춰 새로 만든 가짜 비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라 했던 것이다.


新羅 皇帝는 신하를 君公도 아니고 君王에 봉했다. 원성제(元聖帝)는 황위쟁탈전에서 패한 金周元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했다. 王이 王을 封할 수 있나?

통치자는 君公이고, 신하는 君王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新羅의 최고통치자가 皇帝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하를 君王에 봉할 수 있었다. 新羅가 동아시아를 통일했을 당시 新羅는 天子國이었다. 그래서 日本이 植民母國 百濟를 멸망시킨 新羅에 서둘러 조공했다. 제1의 강대국이 天子國의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다.


고쿄 기요히코(吾鄕淸彦)는 일본 신대(神代)문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司馬遷의 史記 25 권은 檀君朝鮮이 中國 대륙을 지배 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中國이 檀君朝鮮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삼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최근 百濟는 동방의 로마(얼마 전에 열린, 학술대회 주제)라는 위치까지 끌어 올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百濟의 실체를 모른다. 로마가 서방의 百濟였던 것이다.

高句麗가 廣開土境好太皇 이전까지 中國 대륙에서 南進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허구의 漢四郡 때문이 아니라, 百濟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高句麗는 5 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4 세기 까지는 百濟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百濟의 전성기는 高句麗의 전성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百濟는 4 세기 까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淸이 後漢의 일식기록을 다시 베꼈다는 사실이나 日本이 1824 년 이후에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저들이 우리나라 역사책 및 고문헌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日本은 20 세기에 들어 와서도 우리나라 한단사(桓檀史)를 토대로 남연서(南燕書) 등의 날조 일본 역사책을 만들어 왔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이를 근거로 日本과 中國에 우리나라 역사책과 기타 문헌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부상수(扶桑樹)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나무다. 그 扶桑樹가 있는 나라가 동쪽에 있어 日出處라 했다. 우리나라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민족을 東夷族이라 했다. 그 원뜻은 오랑캐가 아니고 동쪽에 사는 어진 종족, 근본인 종족이다.

오늘날 옥편을 찾아보면 夷는 ‘오랑캐, 동방동족,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평평하다, 평탄하다, 깎다, 온화하다, 안온하다, 기뻐하다, 크다’라는 뜻이 있다.

정반대 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랑캐,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등은 中土의 미개 오랑캐 華夏族이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 나온 후에 玉篇에 추가한 것이다.

倭奴王이 소유하고 있다는 족보책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은 중국의 문물을 전수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졌다.

중국계 가문 109 개는 모두 중국에 있던 百濟, 新羅系의 가문이다. 高句麗系 역시 百濟系, 新羅系 가문이다[날조 日本史에서 新羅의 문물 전수는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中國倭에게도 新羅는 원수같은 나라였다. 추잡의 절정 기모노(きもの)섹스, 혼욕(混浴), 요바이(よばい) 풍습 때문에 新羅 땅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천문기록 27쪽)
하기야 家門이라는 말이 日本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中國倭가 저 땅에, 기모노섹스, 混浴, 요바이의 性文化를 전파한 이래로 천 년 동안 가문 해체를 경험한 나라다. 그저 다른 나라 보기에 창피해서 家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히로히토(裕仁)는 다이쇼(大正)의 섭정으로 있으면서 南淵書라는 희대의 僞書도 창작해내고, 倭奴王이 된 후에는 花郞世紀 (화랑세기)날조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新撰姓氏錄 역시 히로히토가 날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南淵書는 벌거벗고 흙구덩이에서 뒹굴던, 百濟의 군사식민지로 출발한 日本이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가 핵심 내용이다. 5 세기에도 日本은 원시 그대로의 아담과 이브였다.

南淵書는 日本의 순수창작이 아니다.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한 것은 배달, 朝鮮, 高句麗였다. 배달과 朝鮮, 高句麗를 日本으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결단코 배달도, 朝鮮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데, 日本은 배달과 朝鮮이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王朝의 모든 正史書와 온갖 역사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의 역대왕들이 숨겨놓았던 한단 역사서 51 종 마저 日本으로 빼돌렸다.

倭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서를 분서하고 개서해서 韓國史 말살에 광분 했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韓國史 抹殺은 倭奴의 最大 國策事業이었다.

중국이 4대 발명품으로 자랑하는 것 중에 이미 한국이 元祖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앨 고어 前 美國 부통령은 2005 년 5 월 19 일 "서울 디지털 포럼"에 참석하여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Gutenberg : 1397~1468)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李氏朝鮮)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된 것"이라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敎皇의 사절단과 이야기 했는데 그 사절단은 Corea를 방문하고 여러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전했다. 2005.5.19.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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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래

2008.03.05
07:25:46
(*.205.150.156)
.고구려, 서西와 남南으로 최대 영토는?

현재 학생들의 52%는 교과서의 현행 국사를 믿지 않고 있다는..

성훈 칼럼니스트

고구려의 핵심강역(수도권)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내몽고 지방이었고, 동쪽으로는 한반도와 만주가 그 영토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도 현 압록강변 집안 지역이 아니라, 하북성 북경 인근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전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현 압록강변 집안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아니라 대전 현충원과 같이 선조들의 영혼을 모시는 일종의 신성한 소도지역이라 할 수 있다.

집안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피라미드가 산재되어 있는 협소한 산상(山上)도시라 대제국 고구려의 수도가 입지적으로 될 수 없는 곳이다.

현 사학계의 이론은 15km2에 불과한 집안의 평편한 곳을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에 의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 광개토태왕 비가 집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집안을 고구려의 수도로 비정했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나 우리 사학계는 일본 학자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사학계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한 현 집안 지도. 대제국의 수도(국내성)의 크기가 겨우 15Km2?


하북성에 수도를 둔 고구려는 남쪽으로는 어디까지 갔으며, 서쪽으로는 최대 어디까지 진출했을까?
이는 900년 대제국 고구려의 최대 강역을 밝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선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기록으로 고구려의 서쪽과 남쪽 진출을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는 6대 대조대왕 때에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한단고기>에 보면 안시성, 요동성, 석성, 건안성, 건흥성, 풍성, 한성, 옥전보, 택성, 요택 등이 나오는데 이 중 가장 남쪽에 있었던 성은 택성으로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있다 했고, 요택은 황하구(黃河口) 북안 왼쪽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나머지는 전부 하북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초기 고구려의 강역은 황하를 경계로 서쪽은 중국과, 남으로는 백제와 경계했다고 보면 된다.

이후 11대 동천왕 때는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이 있어 고구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며, 14대 봉상왕 때는 부왕 서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한다.

16대 고국원왕(소열제) 때는 연왕 모용황에 의해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와 왕비가 사로잡히는 치욕을 당했고, 나중에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 근초고왕과의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이 때가 고구려가 가장 위축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전성기 때 남쪽으로는 어디까지?

이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차츰 국력을 회복한 고구려는 19대 광개토태왕이 즉위하면서 그 전성기가 도래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이 위대한 정복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별로 없다.
물론 당시 중원은 5호16국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어 중원에서는 고구려를 견제할만한 그 어떤 세력도 없었고 그나마 백제가 유일한 적수였다.
여하튼 <삼국사기>에서 광개토태왕에 대한 전쟁 기록은 아래와 같다.

1년 7월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고, 북으로 거란을 쳤고, 10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해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11년 후연의 숙군성을 치니 평주자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13년 후연을 침범했다. 그리고는 정벌 기록이 없다.

그리고 17년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어 종족(宗族)의 정의를 나누니 북연의 왕이 답례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북연은 고구려가 중국 대륙에 세운 전초국가였던 것 같다.

이런 기록들로 어떻게 우리는 광개토태왕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장수왕은 63년 3만 군사로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고 팔천의 포로를 잡았다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온통 중국에게 조공했다는 기록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의 개로왕은 하수(河水 :황하)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이르렀다고 되어있다.

여기서의 숭산은 중국의 하남성 숭산을 가르키는 말이고 실제로 숭산까지 황하를 따라 제방이 아직도 남아있다.
21대 문자명왕 때의 기록도 온통 중국으로부터 책봉 받고 승진한 기록 외에는 정복 전쟁의 기록이 별로 없다.


▲ 고구려 전성기 때의 영토. 대륙 동부 평야지대까지 다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러나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광개토태제가 바다를 건너 왜를 정벌한 기사가 나오고,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를 굴복시켜 모두에게 조공을 끊임없이 받았고, 거란 평량(平凉: 감숙성 평량현)도 평정 굴복시켰고, 임나와 이왜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속해있던 3 가라(임나)가 영락 10년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로 통제되니 연정(聯政)이라 했는데, 고구려에 속하여 영락제의 명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태제에게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을 한 이후 고구려의 연방속국이 된 백제의 위치는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일식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현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이고,
전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의 위치는 절강성과 강소성과 안휘성 일대였다.

왜의 위치는 신라의 아래로 복건성과 광동성의 대륙 남부와 대만 해남도 일대이므로 중국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는 전부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봐야 한다.

그런 이유로 19세기 후반에 광개토태왕 비를 입수한 일제는 비문을 훼손하고 조작하여 자신들 조상의 치부를 숨기고, 조선 침략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나일본부설을 허위로 날조하게 되는 것이다.

신라는 개국 이래 왕이란 호칭 대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과 마립간으로 불리다, 22대 지증마립간 4년(503년)에 사로, 사라, 신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국호를 처음으로 신라로 통일하고,

23대 법흥왕 23년(536년) 비로소 처음으로 자체 연호인 건원(建元)를 사용한다. 신라는 최소한 고구려 전성기 때인 광개토태제(391년)부터 문자제(519년)까지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고구려의 통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쓴 문자호태열제 11년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고구려에 속해 나라의 강토가 더 커졌다라고 기록하였다.

제와 노는 산동성, 오는 양자강 하류 강소성 일대, 월은 그 아래인 절강성 일대이다.

또한 문자제 12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겼다. 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라고 적혀있다.
천주는 현 복건성 진강현이고, 주변에는 아직도 신라에 관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삼국사기>는 본기에서 고구려의 영토를 구체적으로는 언급 안했지만, 46권 최치원 열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100만으로 북쪽의 유, 연, 제, 노를 위협하고 남으로 오, 월을 침공하여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정벌에서 기인되었다.”라는 중국 기록을 인용하였다. 이 기록은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서쪽으로는 어디까지 갔을까?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나와 있는 최초의 서쪽 진출은 5대 모본왕 때로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태원은 현 산서성의 성도이다.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서 13 태수 중 한 명인 태원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서성 태원은 초기 고구려의 서단(西端)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 모본왕의 진출로. 서남으로 산서성의 성도 태원까지 갔다. 덕흥리 고분에도 태원태수가 하례드리는 벽화가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24대 양원왕 8년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고,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장안성이 과연 현 중국의 섬서성 서안(西安)인지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강단사학계는 이 장안성을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건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대동강 평양으로 도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평양성(수도)은 요녕성 요양이었고,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사학 측에서는 이 장안성을 현 중국의 서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의 <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봐도 장안성은 한 곳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장안성 같이 수도를 나타내는 신성한 이름은 원래 다른 곳에다 함부로 쓸 수가 없으므로 장안성은 서안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양원왕 28년은 A.D 586년으로 수나라는 문제 4년으로 수도는 낙양이었다.

낙양은 장안보다 동쪽에 있다. 그리고 그 때 수문제와 고구려의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한단고기>에 보면,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 18년 온달장군을 보내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관(楡林關)은 지금 산서성의 경현의 동북에 있는 관문으로 중국의 장안(長安)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에 있는데, 후주(後周)의 무제가 요동을 치니 온달이 선봉이 되어 싸워 이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져 있는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왔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고 허둥지둥 도망을 가고 고구려는 맹추격을 한다.

<한단고기>에 나와 있기를, 세민(당태종)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연개소문은 양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다.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양자강 북쪽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 위는 온달장군의 유림관 진출로. 유림관은 장안성의 북방 관문. 아래는 연개소문의 당태종 추격로. 장안성에 입성해 당태종의 항복을 받는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에 모두 장안성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다.
장안성은 현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서안은 낙양(洛陽)과 더불어 중국 고대 역사의 심장이다.

그리고 서안 외곽에는 중국 정부가 쉬쉬하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피라미드 군(群)이 있다.
이 피라미드의 주인공은 한족(漢族)이 아니라 고조선이나 고구려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정부는 발굴 초기 이 피라미드들이 자기네 유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자 발굴을 중지했고 피라미드를 은폐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 피라미드가 정상적으로 공개 발굴된다면 서안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서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피라미드. 중국정부는 발굴 3일만에 이 피라미드는 동이족(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것으로 결론짓고 발굴을 중지하고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 은폐하기 시작했다.



▲ 중국의 전통 경극의 한 장면. 4편의 경극에 당태종 항복 장면이 있다.

이렇듯 여러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가 서쪽으로는 장안성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의 전통 경극(京劇)에는 당태종이 어니하에 빠져 연개소문에게 항복하는 장면이 남아 있어 <한단고기>의 기록을 사실로 입증해 주고 있으며,

당태종이 도망하면서 남긴 수많은 전설은 그 이야기가 절대 허황되게 날조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어니하는 여러 곳에 있으나 서안 근방에도 있다.

장안에서 더 서쪽으로 갔을까?

신강성에 인접한 감숙성의 돈황(敦湟)은 석굴사원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곳에 있는 벽화는 고구려 벽화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구려와의 연관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 고구려 풍의 벽화들은 고구려인들이 와서 직접 그렸거나, 고구려와 같은 계열인 후삼한(後三韓)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연방대제국 고구려는 종족(宗族)으로서 이들과 분명 뭔가 밀접한 교류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돈황 석굴에서 발견된 벽화. 성벽이 고구려 양식인 치양식으로 되어 있어 고구려 성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후삼한의 일부는 중원의 서남쪽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며, 또 일부는 월지와 함께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마한이 초기에만 등장하고 뒤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월지족은 파미르고원을 넘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대에서 대월지국으로 발전하며, 대월지국은 나중에 쿠샨왕조로 발전하여 남으로 인도의 북부에까지 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 지방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가림토 문자와 비슷한 것도 월지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피는 물보다 진하듯이 북연과 같은 종족(宗族)으로의 정의를 나누었다는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와 왜를 동족(同族)으로 감싸 안으며 각국을 연방제국의 일원으로 인정해 준 형님의 나라였다.

그런 고구려가 기록은 없지만 서역의 종족들과도 뭔가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돈황 석굴의 벽화는 뭔가 신비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적장자국(嫡長子國)으로 사직은 장장 900년이었고,

그 영토는 하북성 북부와 내몽고 지방을 핵심강역으로 하여 東으로 한반도와 만주 땅, 北으로는 몽고와 시베리아, 南으로는 중국 남부 광동성까지 대륙 동부 평야지대, 西로는 서안 내지는 최대 돈황 일대까지 진출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제국(The Greatest Empire)이었던 것이다.


▲ 현행 국사교과서의 고구려 영토

이러한 대제국 고구려를 현 만주 땅과 한반도 북부라는 가두리 양식장에 가두어 놓고 고구려의 역사를 임의로 축소 왜곡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자기네 일개 지방정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동북공정을 펴게끔 빌미를 제공한 사학계는 반성해야 한다.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일식기록 분석과 덕흥리 고분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강역이 백일하에 명백히 밝혀졌건만 아직도 억지주장을 하는 우리 사학계의 추잡한 행태를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한단고기>라는 민족의 성서가 이 땅에 나온 지 3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위서(僞書) 운운하며 인정 안하는 우리 사학계의 한심한 작태를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하는가!!!
<한단고기> 없이 현 사학계의 엉터리 이론만으로 중국의 거대한 음모인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 있다고 보는가!!!


▲ 미국 역사교과서에 나와있는 삼국의 영토. 고구려와 중국의 경계가 압록강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미 미국의 교과서를 바꿨다.

이 나라는 많은 역사를 이미 상당부분 중국에게 빼앗겼고, 또 현재도 빼앗기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이 빼앗길 것이다.

그러함에도 말도 안되는 엉터리 이론을 고수하며, 망국과 치욕의 국사교과서로 자라나는 학생들과 국민들의 민족정신과 얼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우리 사학계 정말이지 반성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그간의 과오를 시인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역사의 진실을 찾는데 민족사학과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며 부탁드리는 바이다.

강단사학과 민족사학이 서로 협력하여 이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으로부터 이 나라를 같이 지킬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제도권의 강단사학이 민족사학과 합심하지 못하고 현행 국사를 계속 그대로 고집하는 한, 이 나라는 역사의 진실을 영원히 되찾지 못하고 언젠가는 망국의 길로 갈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민족사학은 이 나라의 국사를 바꿀 제도적 힘이 없고, 기득권자인 강단사학은 국사를 바꿀만한 이론과 정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옛날과 같이 거짓이 통하지 않는 대명천지 인터넷 세상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강단사학계는 언젠가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학생들이나 국민들이 저절로 다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현재 학생들의 52%는 교과서의 현행 국사를 믿지 않고 있다는 조사보고가 있다. 이 퍼센테이지(%)는 해가 가면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 분석은 그 어떤 사서로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자랑한다. 박교수의 논문이 이 세상에 발표된 지 벌써 15년이 다되어 가건만 아직까지 단 한건의 반박자료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한단고기>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준 박창범 교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가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을 대입해 삼국의 영역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이것에 대한 반대 의견은 아직까지 단 한건도 없었고 또 있을 수가 없다. 중국 25사에서 삼국의 자료를 발췌해도 같은 결과다.


다음은 ‘광개토태왕 비 일제가 옮겼을 가능성 크다’가 연재됩니다.




2008/03/04 [12:13] ⓒ pluskorea



진실은 묻히거나 왜곡조작될 수 없다.. 윤복현 08/03/04 [12:59]


[특히 중국의 전통 경극(京劇)에는 당태종이 어니하에 빠져 연개소문에게 항복하는 장면이 남아 있어 <한단고기>의 기록을 사실로 입증해 주고 있으며, 당태종이 도망하면서 남긴 수많은 전설은 그 이야기가 절대 허황되게 날조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어니하는 여러 곳에 있으나 서안 근방에도 있다...고구려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적장자국(嫡長子國)으로 사직은 장장 900년이었고, 그 영토는 하북성 북부와 내몽고 지방을 핵심강역으로 하여 東으로 한반도와 만주 땅, 北으로는 몽고와 시베리아, 南으로는 중국 남부 광동성까지 대륙 동부 평야지대, 西로는 서안 내지는 최대 돈황 일대까지 진출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제국(The Greatest Empire)이었던 것이다.]


아! 고구려!라는 감탄사가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대륙을 경영했던 위대한 고구려의 정신과 기상을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겠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세력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분란과 분열의 근원입니다.

진실을 바로 세워 위선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객이 바로 서는 역사를 만들어야 겠습니다. 역시 고대사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이 명쾌한 역사적 진실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西로는 서안 내지는 최대 돈황 일대까지 아시아=동이족이 통치한 땅 08/03/05
[01:36]

西로는 서안 내지는 최대 돈황 일대까지 <===== 서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불가리아, 중동, 인도, 이집트 까지임. 왜냐하면 고구려는 수도가 다섯개인 대연방제국이었으므로... 아시아 = 고구려 = 고려 = 조선


12환국의 땅이던 '아시아'는 어원적으로 "제일 처음"이란 의미죠..^^ 독자 08/03/05 [03:02]


성선생님의 역사논단은 언제나 논리정연하십니다..역사논쟁이란 감정만 앞서도 안되고 차분한 마음으로 문헌과 유적유물 등을 총 동원하여 진실을 밝힐 때만이 한중일 역사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필하십시요..

그리고 역사인식이란 땅의 문제보다는 정신의 가치를 찾는데 우선해야 그 정신적 가치에 의해 수 많은 국가와 민족이 흠모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연방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인종을 초월하여 널리 사람들을 돕는 홍익인간이념을 현대적으로 실용화하는 방안과 대안들을 많이 개발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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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래

2008.03.07
15:19:39
(*.205.148.218)
.


청제국(淸帝國)이 조선을 정벌했더라면

'금제국 건국하고 도성에 단군묘를 세우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

편집부

이 글은 아래 본문에 '애신각라 부의 (愛新覺羅 傅儀)' 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어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진명서구(homj66)" 네티즌의 글을 옮겨 싣는다.[편집자 주]


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다.
판사가 젊은이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젊은이는 대답한다.

" 애신각라 부의 (愛新覺羅 傅儀) "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모택동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한족(漢族)인 판사가 듣기엔 이상하기만 했던

청나라 황제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약 '애신각라'에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면...

[애신각라 (愛新覺羅) 의 비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라는 중국의 억지가
10년만의 폭염으로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한국의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부흥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토록 가볍다.
그러나 섬뜩하게 위험하다.

'섬뜩하게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노리는 것이 단지
고구려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은 상당 부분 한반도 북부와 동북아시아로 고구려와 비슷하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면 고조선도 중국사인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박탈당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신라 건국 이후 2천년으로, 강역은 한강 이남으로 좁혀질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현재 논리를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백제도 한국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중국인'이라는,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청나라를-엄격히 말하면 후금(후금은 청나라의 전신이다)-
세운 사람은 누루하치.

그런데 그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이 신기한 조합의 한자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 는 의미라고 한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의 '근원'을 살펴 보면 신라와 관련된
성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진다.

[금나라의 금(金)은 신라왕실의 성씨인 김(金) ]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라'와, 신라 왕족의 성 인
'금(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은 먼저 청나라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긴 예를 들었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우리 시조는 신라인" ]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
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고 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 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 라고 주장한다

'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 '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원제목 : 청나라가 조선을 정벌했었더라면
글쓴이 : 네티즌 민족파

이명박 행정부에서 나서서 영어를 전국민에게 강요하는 것만이 세계화의 길이다라고 강요한다.

민족정기를 잃어버리고 이제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자들, 길게 잡아도 유대인의 언어, 넓게 범위를 잡아도 앵글로족, 브리튼족의 언어에 불과한 영어를 국어화하려고 사대매국적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분위기와 여론을 조성하고 충동질을 해대고 있다.

충동질에 넘어간다라고 하는 것도 것이겠거니와 해마다 영어사교육비로 퍼붓는 돈은 자그만치 2백억이 넘는다.

대략 드러나고 밝혀진 것만 2백억이겠다지만 눈에 들어나지 않은 것까지 종합한다면 2백억의 수배는 더되고도 남을 것이다. 해외로 언어연수, 조기유학 등 간다라고 하면서 외국에다가 쏟아붓는 돈은 또 얼마이던가.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면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고 타민족에 흡수되거나 동화되기에 마련이다.







그런데 과학적 우수성이 입증된 한글을 버리고 양키와 앵글로족, 바다해적의 언어를 국어로 사용하려고 위에서부터 충동질을 하고 있다.

정치적, 군사적 노예, 문화적 노예로 부족해 이제는 언어적 사회적 노예까지 자청하겠다는 것인가.

청나라가 조선을 콱 정벌해버렸었더라면, 청나라 누르하지(1559 ~ 1626. 9. 30)나 황태극(1591. 11. 28 ~ 1643. 9. 21)이 중원을 원정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서 조선을 정벌하였다더라면...

누르하치나 황태극이 말머리를 돌렸었더라면 우리는 일제침략기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영토는 다시 단군조선,

고구려의 강역(한반도와 만주 모두를 포괄했던)을 다시 수복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절실하다.

청나라가 차라리 조선을 쳤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일제시대를 찬양한 수구냉전파 지 아무개와 대학교수 한 아무개, 뉴라이트의 이 모 교수와 같은 줄로 놓을지는 모르나 일본과 만주족은 차원이 다르다.

철저하게 언어가 다른 이민족으로 변화한 일본, 단군조선과 변한의 도래인(일본 원주민 아이누들이 말하는 고깔족, 현 일본인의 주류의 선조로 기마민족)과 뒤에 백제와 고구려계 유민들이 일부 모여서 이룩한 나라가 일본이나 일본은 자신들의 근본을 잊고 산다.

그러나 만주족은 중국에 흡수되기 전까지만 해도 만주족, 여진족에게는 단군과 신라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이 있었고, 그들과는 통역 없어도 언어가 통하고 설·단오·추석·동지 등 우리와 같은 명절전통과 풍속을 갖고 있었다.

통역 없이도 언어대화가 가능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다른 민족이거나 전혀 관련이 없는 종족끼리 가능한 것인가?

청나라가 중국을 정벌하던 시기(1636~1664)의 조선은 이미 이때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합리적 중립외교와 부국강병을 추진하던 광해군과 임진왜란때 의병봉기 주도층인 북인이 몰락하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정적을 학살한 인조가 집권하고 중화 사대모화주의적 지식인인 사림파 서인들이 활개를 치던 시대였다.

차라리 청나라가 중국대신 조선을 콱 정벌해버리는 편이 우리민족의 민족사적 입장에서는 나았을 것이다.
만주족도 단군과 신라를 조상으로 받드는 민족이었다.

여진족과 만주족은 같은 민족으로 우리 조상들은 말갈, 물길 등으로도 불렀다. 여진족은 모두 동이족, 쥬신족의 일파였다.

그들이 모두 고조선의 성조 왕검단군을 그들의 국조로 받들던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후손들로 부여, 고구려, 대진국(중국명 발해)에 예속되거나 고려를 형님의 나라로 받들고 공물을 보내왔다.

부여가 고구려 태조대왕 고궁의 침입을 받자 부여왕의 종제가 1만호를 이끌고 귀순하였는데 남은 무리들 중에는 숙신족(말갈족의 선조)에게 귀순하는 이들도 있었다.

부여가 장수왕에 의해 망하자 끝까지 결사항전하던 이들은 말갈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말갈도 곧 고구려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후 말갈족은 고구려족과 연합하여 후고구려 대진국(발해)(668~926)을 세운다.

대진국이 거란족의 요(僚)나라에 의해 패망하자 말갈족은 제부족 형태로 흩어져 있다가, 1133년 완안족의 추장 김아골타를 칸(한)으로 받들고 금제국을 건국한다.

금제국을 건국한 아골타는 여진의 핏줄이나, 신라의 핏줄이기도 했다.

김준의 9대손으로 신라 경순왕의 11대손이 된다. 김준은 김극수,김함보 등의 다른 이름도 있는데 그는 경순왕의 아들 김일의 아들이었다.

아골타는 금제국을 건국하자 도성인 상경임황부에 단군묘를 세우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금사(金史)와 조선상고사(신채호), 몽배금태조(박은식), 규원사화(북애자) 등에 기록된 내용이다.

고조선 멸망후 독자적으로 분리된 숙신족에게도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식이 존재했다.

그들이 종주로 받들던 고구려와 부여가 조상신으로 추모해오던 단군이니 부여와 고구려의 형제 숙신-여진족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국조로 떠받들었던 것이고, 신라도 흉노족의 일파가 세웠으나 피지배층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유민들의 자손이었다.

임황부에 단군묘를 세운 아골타는 성조 단군왕검을 개천홍성제로 추숭하고 시조신으로 받들었다. 해마다 10월 3일이면 개천홍성제묘에 친히 제사를 주관하였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는 다시 아골타의 16대손이라는데 일설에 의하면 외손인 듯하다.

명말청초의 동요중 주씨네 떡 빵가루로 이씨가 빵을 지으니 조서방이 차지해 먹더라 라는 내용의 속요가 쥐나족 백성들 사이에 전파되었는데 주씨네는 명나라의 황실(주원장 일가)를 말하는 것이고 이씨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삼번의 반란의 주동자 이자성을,

조서방은 누르하치를 각각 말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가 '애신각라(신라를 사랑하고 뼈에 새기겠다)'라고 성을 쓰기 전에는 조씨성을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여진족, 만주족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조선인들과 대화를 할 때 통역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다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청나라때까지 전해지던 쥬신족의 강렬한 기상을 잃고 중국 지나족에 예속되어 식민화되었으나 신라인의 후손을 받아들여 왕으로 삼은 것이나 단군숭배와 신라를 뼈속 깊이 새기겠다는 것은 그들이 한민족,

우리와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이 아니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다물의 자손답게 넓은 벌판으로 무한대로 뻗어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중원의 넓은 벌판과 한도 끝도 없이 보이던 모래더미에 욕심을 내어 중원을 정벌하였다. 그 중원의 밀림 속에 각지의 약소민족을 집어삼키는 민족 블랙홀 지나족이 숨어있다는 것은 망각한채 말이다.

그들이 동이족, 쥬신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들이(아골타와 누르하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단군과 신라의 자손임을 영원히 잊지않고 쥐나족의 상스러운 문화따위에 동경심을 가지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은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지는 불행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 공용화가 유행하고 있다. 거친 세계화의 풍랑, 세계화라는 가면을 쓴 제국주의자들의 마수에 이제는 한글의 가갸거겨를 깨우치지 못한 아기들에게 조차도 영어가 무차별 주입식으로 암기, 세뇌를 강요당하고 있다.

세계화도 좋고 영어 공용화도 좋지만 한글을 지켜야 한다.
문자와 언어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영어 공용화가 소중하고 중요하다라고 하더라도 민족의 정체성은 지켜야 한다.

우리가 어느 민족이고, 우리가 누구고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뿌리·주체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어떤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의 형제 만주·여진족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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