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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유럽.로마.중국의 공포대상 스키타이족

유럽에서 한반도 남부지역까지...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흉노(훈)
  
문화부  
  
몽골고원 중부의 고비사막-고비사막 인근을 흐르는 강(약수)이 바로 흉노족의 시조 '색정'이 유배당한 흉(슝)노족의 땅    


유라시아 대륙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초원길과 비단길을 통하여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교류되는 개방적인 공간이였다는 점을 전제로 스키타이족인 흉노의 기원에 대해서 [한단고기]에는 "갑진 6년, 열양의 욕살(관직명) 색정을 약수(몽골고원 중부에 있는 고비사막 인근을 흐르는 강)에 유배시켰다. 뒤에 이를 용서하고 그 땅의 제후로서 봉하니 이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라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스키타이(훈.흉노.돌궐.몽골) 발원지(만주와 몽골)와 이동루트로써  초원 스텝루트    


이 스키타이족들은 황금장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 목곽분이라는 무덤양식이 특징이며, 유효사거리가 멀고 강력한 ‘맥궁’이라는 화살과 몸을 돌려 쏘는 ‘배사법’을 특징으로 하는 스키타이족이 바로 흉노족과 훈족으로 불리우는 북방 유목민족이다.

그리고 이들은 쥐나의 진,한 시대에는 흉노, 수.당시대에는 돌궐(투르크=위그르=터키), 고대 그리스(폴리스 시대)에서는 스키타이, 로마(제정시대)에서는 훈(후니)족으로 불리우게 된다. 따라서 흉노(스카티아)가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퉁구스(시베리아.만주.한반도 사람들을 지칭하는 동호=전통적인 동이족)계열에 속하고, 19세기 이후 발달한 언어학적인 민족계열로 분류하면 몽골어군에 속한다.


▲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 고분과 유사한 북방민족의 쿠르간(상), 훈족의 동복(하단 오른쪽),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동복(하단 가운데), 훈족의 편두(하단 왼쪽)-스키타이족(흉노.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들의 활동반경은 고분에서 출토된 유골과 유물들을 통하여 유럽에서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미쳤다. 김해지역과 경주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각배.황금장식 등 북방유목민들의 유골과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위 가야의 김수로왕 세력으로 대변되는 김해지역의 북방 유목민들은 편두유골로 보아 훈족들이고, 신라 경주 김씨들이 비문에 자신들을 흉노족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경주지역의 김알지 후손들은 흉노족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해지역과 경주지역의 북방 유목민들은 혈통적으로 모두 동일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 유입된 경주지역의 흉노족들의 경우 진시황의 폭정에서 탈출한 흉노족들로 볼 수 있고, 김해지역의 훈족의 경우 선비족 등 북방 유목민족을 이용한 훈족의 공격에 타격을 받아 그 일부가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해 오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부여와 고구려의 경우 흉노와 훈족을 동족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국문헌의 기록의 근거는 고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왕 손권이 고구려를 ‘흉노의 왕’이라는 ‘흉노의 선우’라고 지칭한데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손권의 표현을 통해서 ‘샤먼’신앙의 고향인 시베리아.만주와 한반도 사람들을 지칭하는 퉁구스인들인 흉노족의 조상의 터전은 본래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터전인 만주.한반도 지역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주 땅에 흉노족인 김알지 세력이 유입되기 전의 상황은 당시 한반도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마한의 진왕에게 복속되어 있는, 대륙의 진한 유민들이 내려와 세운 진한이였다.즉, 신라[BCE57~AD935]의 시조 박혁거세가 진한 6부의 추대로 거서간居西干이 되었으니 그 나라 이름이 진한辰韓이다. 그 주체 세력인 진한 6부는 대륙 진한의 이주민임으로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다.


이 한반도 진한은 박혁거세 이전의 진한과 박혁거세 이후의 진한으로 구분되는데, 전 진한은 마한(한반도)의 간접 통치를 받는 체제를 말한다. 이 때 마한은 대륙 단군3조선(삼한)의 전통에 따라 한반도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곧 마한, 진한, 변한이다.


마한은 훗날 백제에 의하여 정복됨으로 인하여 훗날 한반도 진한은 마한으로부터 자연 독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박혁거세의 진한이다.


그리고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한 6부 사람들이 공히 존경하여 사로시왕을 거서간으로 삼아 도읍을 서라벌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칭하여 진한辰韓이라 하였으니 역시 가로되 사로라고도 한다.”



그리고 박혁거세는 '성모'라고 표현된 부여의 공주의 아들로 역시 북방 유목민족임을 알 수 있다.


▲ 북방 유목민족 스키타이족(=흉노=훈=투르크=돌궐=터키=몽골)의 이동과 활동반경.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4대 오사구 단군은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의 칸으로 삼았다"라고 했는데, 이  몽골(몽고리)을 통일하고 인류역사상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세계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며 동서양 문명의 교류역할을 했던 징기즈칸을 배출한  보르키킨 부족의 경우, 몽골 지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흉노가 거주(한단고기 내용과도 일치)했는데 이들은 쥐나와 치열한 패권 장악을 위해 싸우다가 중심부에서 세력을 떨친 보르치긴족으로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다. 현재 몽골의 주력 주민들도 보르치긴족이다.

그런데 보르치긴족은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본래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으로 고대 한민족의 터전인 북만주 지역은 본래 단군조선.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에 동부여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흉노족으로써 지금 몽골에 거주하는 주류 종족인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다.  


유럽을 공포로 도가니로 몰아 넣은 공격과 지배는 1차 스키타이족, 2차 흉노(훈족), 3차 몽골로 이어진다. 스키타이족의 지배를 받은 역사를 가진 유럽인들은 후대에 스키타이족들을 드라큐라로 비하하기도 했다.


▲ 고대 동북 아시아인들(퉁구스인=동이=동호)의 '샤먼'신앙의식이 반영된 스카타이의 왕관


이러한 스키타이족(흉노족.훈.몽골)의 역사는 매우 장구하여 그 시작은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험윤(玁狁)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들의 활약은 시경(詩經)에 ‘우리가 집을 잃게 된 이유도, 우리가 잠시도 한가로이 쉴 수 없게 된 원인도 험윤 때문이다’란 글귀가 실릴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흉노의 중심부는 현재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오르혼-셀렝가 강변과 고대 투르크인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여기던 외투겐 평원의 카라품 사막과 오르도스 지역 사이였다.

기원전 4세기가 되자, 흉노는 역사에 그 이름이 강렬하게 부각된다. 흉노는 연(燕)을 크게 위협하였고, 특히 진(秦)의 중심부와 인접한 관계로 흉노와 진은 번번이 충돌하였다. 중원의 왕조들은 제각기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공을 막아보려 했으나 그들 간의 내전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김해 지역고분에서 출토된 왕관-아프가니스탄 출토왕관과 유사하다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549년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자 흉노와 중원간의 관계는 급변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흉노를 공격했고 이 공세에 밀린 흉노는 오르도스를 버리고 고비 사막 이북으로 일시 후퇴하였다. 흉노를 몰아낸 시황제는 그들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전국 시대 각 나라들이 쌓았던 장성들을 새로이 보수하여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시황제의 사후, 진승과 오광의 난을 필두로 하여 중국 각지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때문에 흉노 문제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흉노의 지배자인 두만선우(頭曼單于: 선우의 정식 명칭은 텡그리 쿠투 선우. 하늘의 아들 선우란 뜻)는 후궁의 아들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인 모돈(冒頓: 묵특, 또는 묵돌이라고도 표기함. 몽골식 원명은 바토르)이 반발하였다. 부자간의 권력 다툼에서 두만은 모돈에게 살해되고 모돈은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 제사용기로 추정되는 김해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고배들

모돈 선우는 국가를 정비하고 내정을 튼튼히 한 다음, 주변 부족들의 정복에 나서 동몽골과 만주 서부에서 강국으로 군림하던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예니세이 강과 바이칼 호 주변에 거주하던 정령족(丁零族)을 정복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천산 산맥과 감숙 지방에 할거하던 월지족(月氏族)을 격파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아내었다.

남침도 병행하여 시황제에게 상실하였던 하남의 오르도스 지방도 회복하고, 중국 북부의 도시들도 탈취하였다. 이때 흉노의 강병은 30만이 넘었으며 당시 중국은 항우와 유방의 내전으로 인해 흉노에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기원전 201~199년 사이에 벌어진 모돈 선우와 한고조 유방 간의 전쟁은 모돈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특히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 전투에서 모돈 선우는 흉노 대군과 항복한 한의 군대까지 합쳐 무려 40만 대군으로 한고조의 30만 대군을 7일 간이나 포위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한군은 8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결국 한고조는 모돈 선우에게 매년 조공으로 곡물과 비단을 바치고 한의 공주를 모돈 선우에게 출가시킨다는 실로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모돈 선우의 정복 전쟁은 더욱 확장되어 투르키스탄 북부의 월지와 오손을 복속시킴으로써 아시아 초원 지대의 거의 모든 민족이 흉노에 통일되었다. 흉노 제국의 경계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시 강, 서로는 아랄 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와 티벳 고원, 그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잇는 거대한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


▲ 경주의 괘릉 무인석 - 얼굴모양이 중앙 아시아인 - 아시아에서 서진한 스키타이족(흉노)이 유럽인들과 피를 섞여 동진해왔음을 알 수 있다.


60년 간 계속된 흉노와 한의 종속 관계는 한무제의 즉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원전 133년, 한무제는 마읍에 10만의 병사를 매복시켜 흉노의 군신 선우를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어 두 대국은 곧바로 전쟁에 돌입했다.

흉노와 한의 전쟁은 43년간이나 이어졌다. 하남지전(河南之戰), 하서지전(河西之戰), 막남지전(漠南之戰), 막북지전(漠北之戰)이란 명칭까지 붙여지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극한 양상의 전쟁은 결국 양자의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 경제와 문제가 물려준 한의 국력은 대흉노전을 위해 모두 소모되었으며, 한무제는 군비의 각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때 소금이나 쇠로 된 쟁기, 밥그릇에까지 세금을 매기려는 극악무도한 재정수탈정책이 등장했다. 이 염철론은 이후 국가전매제도의 효시 및 경전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자 왠만한 범죄도 돈만 내면 해결될 정도로 한의 사회적 기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죽을 당시, 한의 인구는 초기의 4천만에서 2천만으로 감소해 있었다. 결국 무리한 대흉노전으로 인해 한은 멸망의 길을 밟게 되었다.



▲ 김해지역 고분의 유물들은 일본열도에서도 발굴되고 있다

흉노의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한과의 쉴 세 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고 20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한으로 끌려갔으며 흉노의 돈줄이 되어주던 중앙아시아의 도시 국가들이 한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흉노의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약점을 본 복속민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흉노에게 반란을 일으킨 복속민들은 바이칼호 주변의 정령족, 시라무렌 강변의 선비(흉노에게 멸망된 동호의 후손), 실크로드 북쪽의 오손 등이었다.

흉노제국에 불어닥친 불운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오손을 정벌하러 간 원정군은 엄청난 눈보라에 휩싸여 전투도 하기 전에 스스로 자멸하는 낭패를 보았고, 더욱이 기원전 68년에는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과 가축 중 6~7할이 사망하는 극한상황까지 발생했다.

주변 속국들의 이탈과 거듭되는 자연 재해는 점차 흉노의 내부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이 내부갈등은 기원전 60년 허려권거선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도기, 호게, 차려, 오차, 호한야 등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내란 상태로 확대되어 끝없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56년에 네 선우가 차례로 패망하고 호한야 선우가 겨우 혼돈을 수습하였다.


▲  김해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각배(뿔잔). 이 뿔잔은 마치 고대 지중해와 팔레스틴 지역의 뿔잔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기의 사촌 동생인 서쪽의 휴순왕이 자립하여 규진선우가 되고, 호한야의 형인 동쪽의 좌현왕 호도오사가 독립하여 질지 선우라 칭했다. 기원전 54년부터는 질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규진을 격파한 뒤, 호한야를 공격하였다. 질지의 공격을 받은 호한야는 복속민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가 한의 선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대가로 호한야는 중국 북서쪽 오원군의 변경 지대를 통치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55년경 흉노의 세력은 완전히 양분되어 더욱 약화되었고, 중국에 대한 공격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 질지의 돌파구는 서쪽이었다. 우선 호한야를 물리치고 선우 왕정을 차지한 질지는, 기원전 51년 서진을 계속하여 실크로드의 오갈과 신장 위구르 지방의 견곤을 합병하였다. 이어 오손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추강과 카자흐스탄 남부의 강거를 복속시킨 뒤, 오손을 공략하고 아랄 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41년, 새로운 흉노 제국의 수도를 추강과 탈라스 강변 사이의 견곤에 건설하고, 성을 쌓아 방어에 임했다. 이로써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인도, 동서 유럽을 잇는 투르키스탄 지역에 투르크계 인종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페르가나, 박트리아 지역까지 흉노에 속하였고, 질지는 남서 경계가 멀리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연결되는 파르티아 왕국까지 공략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질지 선우의 웅대한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광대한 정복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 체제가 채 정비되기 전에, 한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강거와 오손의 지배권을 탈취한 한은 기원전 36년, 강거에 있던 질지 선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흉노와 다른 복속 국가에서 차출한 한의 군사 7만은 탈라스 강변의 흉노 도성을 에워싸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결국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질지를 비롯한 흉노 지배층 1518인이 살해되었고, 다른 흉노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질지 선우의 죽음으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분산되었던 흉노족은, 더욱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소그디아나 동부와 드네프르 강변, 아랄 해 동부 초원 지대에서 국가를 형성하여 주변 유목민들을 병합하고, 서기 1세기에서 2세기 후반까지 동쪽에서 이동해온 북흉노 무리들을 흡수함으로써 강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약 2세기 동안 주변 국가들과 큰 마찰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흉노족은 자연 기후의 변화와 생태계의 고갈, 그리고 350년 경 북중국에서 쫓겨나 이동해온 동족 우아르 흉노족(에프탈 족)의 압력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더 서진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기후변화와 식량부족으로 유럽에 갑자기 출몰하여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유럽을 지배한 아틸라 훈족의 판도      


유럽에 훈족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서기 374년으로 이때부터 흉노족은 훈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훈족은 374년, 사령관 발라미르의 인솔하에 남러시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알란족을 정복하였고, 같은 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고트 국왕이던 아르마나리크는 자결하였고 훈족은 후리문트를 왕으로 임명하여 동고트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동고트족은 80년 동안 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최강대국 한을 위협하던 훈족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 전술은 서쪽의 유럽 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훈족은 드네프르 강에서 서고트 군을 격퇴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 아타나리크는 375년에 잔존 세력과 함께 로마 제국에 보호를 구하여 돈 강을 건너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훈족의 계속된 공격과 막강한 군사력은 당시 어떠한 게르만계 민족도 대항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무수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공포심을 집어먹고 자기들의 영토에서 도망쳐 로마 제국 영내로 이주해 왔으니 이것이 역사상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불린 민족 대이동의 효시가 된 것이다.


▲ 5세기 신라 황남대총 금관 (金冠) - 신라 김알지 왕조는 흉노족의 후손들임을 경주 김씨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먼저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고, 서고트족의 침입이 이를 더욱 촉진시켜 395년에 로마 제국은 드디어 동서로 나뉘어졌다. 훈족의 등장과 동유럽에서의 급격한 정복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라틴 어나 그리스 어 문헌에 나타나는 훈족에 대한 과장된 묘사와 적개심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진격을 거듭한 훈족은 정복지에서 차출된 고트족, 알란족, 게르만계의 타이팔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앞세우고 378년 봄에 투나 강을 건너 로마군의 저항없이 트라키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에 첫발은 내디딘 훈족의 예비 부대는 정찰 전위 부대에 불과하였다. 같은 시기 훈의 또 다른 부대는 헝가리 초원 지대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즈음 훈족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서서히 로마 영내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경작지에 거주하던 마르코만니족과 쿠아드족,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족, 트란실바니아의 서고트족들이 각각 다른 경로로 381년 로마 영내로 침입해 들어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게르만계 종족들과 이란계 바쉬타르나족이 헝가리 서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따라 남하해와 이탈리아를 위협하였다.


▲  스키타이(흉노.훈)족은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이동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훈족이 본격적인 로마 침공을 시작한 것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동서 로마가 분열되는 395년 봄이었다. 두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한 훈족은 발칸 반도에서 트라키아 쪽으로, 또 다른 주력 부대는 카프카스에서 아나톨리아 고원 쪽으로 동로마를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아나톨리아원정은 돈 강 유역에 본부를 둔 훈 제국의 동부 군단이 주력이었으며 바시크와 쿠르시크라는 두 사령관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원정은 군대의 규모나 주변국의 정세 재편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훈족의 정예 부대는 에르주룸 지역에서 출발하여 카라수와 유프라테스 계곡을 지나 멜리테네(현재의 말라티아)와 킬리키아(현재의 추쿠로바)까지 진격했다. 그 곳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에데사(현 우르파)와 안타키아 성채를 한동안 점령한 후 시리아로 남하하여 티로스(현 수르)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훈의 군대는 395년 가을 다시 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중앙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여 카이세리와 앙카라 평원의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를 유린하고, 그 곳에서 아제르바이잔-바쿠의 길을 따라 북쪽의 본거지로 귀환했다. 398년에도 훈족의 군대가 재차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1세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훈족의 군대가 자국 영토를 유린하는 것을 방관해야만 했다.

급속히 진행된 훈족의 아나톨리아 원정과 그에 따른 파괴와 살상은, 특히 그 지역의 동방 기독교 교회 성직자들에 의해 집필된 훈족에 대한 부정적인 설화와 무용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김해시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동복]북방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취사도구의 일종인 동복. 이 동복이 왜 한반도 남단, 대성동 가야고분에서 발견되었을까?동복은 스키타이 형과 오르도스 형으로 나뉘는데, 대성동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은 오르도스 형에 속한다. 오르도스 형 동복은 다리가 없고, 상부 장식이 단순한 것이 특징. 스키타이 형보다는 후기의 것에 속하는 것이다.

중국 오르도스 지역에서 출토되어 오르도스형 동복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동복은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 외몽골 노인울라, 길림성 유수, 한반도 북부의 평양 등에 분포한다. 백제, 신라 고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북방계 유물이다. 김해지역은 훈족계의 북방 유목민족이 이동했고, 경주의 경우는 흉노계의 북방유목민족이 이동해 왔으나, 흉노나 훈족 모두 혈통적으로는 동일한 스카타이족에 속한다

진영에서 훈족의 원정은 사령관 울딘이 지휘하고 있었다. 발라미르의 자손인 울딘은 후일 아틸라의 시대까지 지속되는 훈족의 대외 정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정책의 기본은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면서 서로마와는 친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 로마 관계를 차단시켜 훈에 위협적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막고, 보다 강력한 동로마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제 1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 서로마를 협공하는 주변 민족들이 훈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훈은 서로마와 연합하여 그들을 공략하고자 했다.

동유럽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민족들을 압박하던 울딘이 투나 강변에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제 2의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반달족과 훈족의 공격을 받아 서진한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다. 반달족 출신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402년 4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을 힘겹게 패퇴시킴으로써 로마를 방어했으나, 계속되는 주변 민족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동고트의 라다가이수스 장군은 훈족에 쫓겨난 반달, 수에비, 쿠아드, 부르군트 등 여러 게르만계 민족들을 연합하여 로마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이 유린당하고, 스틸리코 장군마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자 훈족이 개입하였다.

로마군과 울딘이 지휘하는 훈의 군대가 406년 가을 플로렌스 남부의 파에술레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라다가이수스를 처형함으로써 서로마는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로써 훈족의 위세가 온 유럽에 진동하였다.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사르마티아족들은 훈족의 위협을 피해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훈의 서부 유럽 경영은 이제 정치적, 군사적 장애 요소가 제거된 상태여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울딘은 훈의 서부 지역을 통치한 왕이었다. 그는 404~405년, 그리고 409년에 투나 강을 건너 강 남부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비잔틴에 대한 훈의 위협을 계속하였다. 또 그리스 문헌에 따르면 울딘은 훈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된 트라키아 총독에게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까지 모든 영토를 정복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훈 제국의 힘을 과시하였다.

410넌 울딘의 사망으로 훈 제국의 통치는 카라톤에 위임되었다. 그는 412년에서 422년까지 약 10년 간 훈의 동부 지역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422년은 훈 제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같은 해였다. 이 해에 훈 왕가의 네 형제인 루가, 문주크, 아이바르스, 옥타르가 서로 권력을 두고 쟁패하여 루가가 왕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문주크가 사망함으로써 다른 두 형제는 각각 지역의 엘리그(Elig, 번왕)에 봉해졌다.


▲ 경남 창녕의 교동고분. 유럽과 중앙시아에서 한반도까지 분포되어 있는  적석목곽분은 전형적인 북방 유목민족의 무덤양식이다. 한반도 무덤양식도 신라의 한반도 병합이후부터 한반도 무덤양식으로 확산,정착되었다.  

울딘의 정책을 계승한 루가는, 422년 비잔틴이 훈의 내분과 복속 민족의 반란을 획책하며 발칸 원정을 시도하자, 비잔틴군을 패퇴시켜 연간 금 350 리브레(1Libre= 약 450g)의 공납을 부과했다. 423년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가 네 살의 나이로 등극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에 대항해 로마 침공을 개시했다.

동로마의 육해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해 오자 서로마는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루가는 6만의 기병을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 전선에 참가하였다. 이 때, 로마 원로원은 어린 황제를 폐하고 요하네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당시 35세이던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에서의 전쟁을 피해 재빨리 루가의 진영에 가담했다. 훈의 침공에 비잔틴 군대는 승산 없는 전쟁을 회피하고 퇴각함으로써, 로마의 폐허 대신 과중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에도 아프리카의 반달 왕 게이세릭과 전쟁을 벌인 그의 정적 보니파시우스의 공격을 피해 훈 제국에 망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루가의 강력한 통치력과 함께 훈 제국이 로마의 내정과 대외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 로마와 유럽의 공포대상 훈족의 왕 - 아틸라

434년 봄, 루가는 사망하였고 아틸라와 블레다가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훈 제국의 왕으로 등극할 당시 40세였던 아틸라는, 부친인 문주크가 일찍 사망함으로써 숙부인 루가에게 양육되었다. 그와 함께 수많은 정복 전쟁에 참가하면서 주변의 여러 종족과 국가에 대한 정황을 파악할 기회를 가졌으며, 통치자로서의 덕목과 국가 경영에 관한 경륜을 쌓을 수 있었다.

결국 아틸라는 그의 형 블레다와 함께 훈 제국의 통치권을 계승했다. 블레다는 낭만적이고 예술을 즐겼고, 군의 작전과 대외 관계 수립 등 통치권은 아틸라에 의해 행사되었다. 숙부인 아이바르스와 옥타르는 각각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번왕으로써 전왕 루가 시대의 지위를 계속 누렸다. 블레다는 아틸라의 협조자로서 11년 간 제국의 경영에 참가하다 445년경에 사망하였는데, 세간에는 아틸라의 암살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434년 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파견된 비잔틴 사절단이 훈 국경에 도착했을 때, 왕인 루가는 사망했으므로 아틸라가 그들을 맞았다. 아틸라는 비잔틴 영토의 마르구스 성채 맞은편에 있는 투나 북안의 콘스탄티아 성벽에서 비잔틴 사절을 말 위에서 사절단을 맞으며, 평화를 위한 훈의 요구 조건을 단호하게 전달하였다.

첫째, 비잔틴은 훈의 복속민들과의 접촉과 연대를 일체 중단할 것. 둘째, 훈에서 비잔틴으로 도망간 자들을 즉각 돌려보낼 것. 셋째, 양국의 무역 거래는 지정된 국경 마을에서만 행할 것. 넷째, 비잔틴의 훈에 대한 연간 공납액을 2배로 올려 금 700리브레 (약 315kg)으로 할 것 등이다. 이것은 콘스탄티아 평화 조약이라 불리웠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조건 없이 평화 협정을 수락했으며, 협정 이행의 첫 단계로 도망자들을 훈에 인계하였다. 아틸라는 그들을 비잔틴 영내에 있는 트라키아의 카르수스에서 처형함으로써, 비잔틴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게 그의 권위와 위세를 각인시켰다.

그 후 아틸라는 제국 동부 지역을 원정하여, 435년 볼가 강변의 샤라구르 족의 반란을 분쇄하였다. 이즈음 동부 지역 중심지는 드네프르 강에, 서부 지역 중심지는 투나 지역에 있었다.  

훈 제국에 편입된 영토는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서 발트 해안까지,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포괄하였으며, 예속된 종족의 수는 45개에 이르렀다. 복속민들은 단지 정치적 통합체로서 훈의 일원이었을 뿐 고유의 언어와 풍속을 유지하였으며, 종족이나 민족, 국가 단위로 동족의 부족장이나 총독, 왕의 통치를 받았다. 5세기 중엽까지 훈 제국 내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었다.


▲  흉노족이 사용한 동복과 이 동복을 말 잔등에 올려놓은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 토기. 국보 188호 경주 천마총 금관에서는 사슴뿔형 장식과 나무 형상의 出자 장식이 보인다.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왕관. 이 금관은 편두를 한 남자 머리에 맞을 정도로 작은 것이 특징이다(왼쪽부터 시계 방향).  

이 때,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민족이 서로마 영내를 지나가며 유린과 약탈을 일삼았고,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곤경에 처했다. 이에 로마는 재차 아에티우스를 파견해 훈에 원병을 요청했다. 2년간에 걸친 농민 반란은 아에티우스와 아틸라가 보낸 원병의 도움으로 겨우 반란 주모자를 처형하고 소란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르군트족의 군디카르 왕이 벨기에 지역을 침공하여 훈의 서부 지역을 위협하였다. 훈의 서부 지역 왕인 옥타르의 지휘 아래 네케르 강변에서 벌어진 훈과 부르군트족간의 대전투에서 군디카르 왕을 포함하여 2만 명의 부르군트 병사가 전멸함으로써 훈의 군대가 승리하였다.

이 전쟁은 중세 독일의 유명한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주력이 훈에 의해 패퇴된 전투 결과, 부르군트, 바야부르, 프랑크, 롱고바르드족 같은 많은 민족들이 새롭게 훈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440년 이후 아틸라의 비잔틴 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콘스탄티아 협정을 철저히 준수하지 않고 훈으로부터의 도망자 송환을 거부한 것에 연유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훈의 포로 중 고트족 출신 아르네기실후스를 송환하지 않고 오히려 장군으로 임명해 훈 접경의 트라키아에 파견함으로써 훈을 자극하였다.

또, 국경 시장에서의 거래 원칙도 그리스 상인들에 의해 종종 위반되었다. 특히 마르고스 주교가 콘스탄티아 근교의 있는 훈의 무덤을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해 비잔틴에 대한 훈족의 악감정은 극에 달했다.

이 때,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왕 게이세릭은 지중해 진출을 방해하는 비잔틴에 대항해 아틸라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틸라가 지휘하는 훈 군대는 마르고스의 점령을 시작으로 1차 발칸 원정에 나서 지금의 베오그라드인 싱기두눔과 나이수스를 점령했으며 트라키아에서 서로마의 중재로 진격을 멈추고 비잔틴과 다시 협정을 맺었다.

서로마의 실권자 아에티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평화 협정 준수를 확실히 약속하고, 그에 대한 보장으로 자신의 아들 카르필리오를 인질로 훈 궁정에 보냈다. 아에 티우스의 제안을 수락한 아틸라는 투나 강변에 산재한 비잔틴 성채들을 접수하고, 훈에 대한 공격 거점이 될 수 있는 발칸 반도의 요새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445년, 형 블레다의 사망으로 아틸라는 명실공히 권력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서아시아에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동서 로마를 비롯해 그에 대항할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훈과의 협정을 또다시 어기자 아틸라는 447년, 제 2차 발칸 원정을 시도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의 대군은 두 방향에서 비잔틴 영내를 공격해 사르디카, 필리포폴리스, 마르키아노폴리스, 아르카디오폴리스 등을 함락시키고 각 도시들을 약탈했다. 훈군은 계속해서 테살리아의 테르모필레까지 진군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위해 아티라(현 이스탄불 외곽 부육 체크메제)에 포진하였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테오도시우스는 정무관 아나톨리우스를 아틸라에게 보내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아나톨리우스 협정’으로 알려진 이 휴전 조건은 투나 남쪽 5일 거리 공간에 비잔틴 군대를 주둔시키지 말 것이며, 양국 무역 시장은 훈의 변경 도시인 나이수스에 설치할 것, 비잔틴은 전쟁 배상금으로 훈에게 금 6천 리브레(약 2천 7백kg)를 지불하고, 그동안 바쳐오던 연공을 세 배로 늘려 금 2천 1백 리브레(약 945kg)으로 할 것 등을 명시하고 있다.

비잔틴의 재정 상태로는 이렇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연공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는 아틸라 암살 음모를 획책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때 아틸라의 관심은 동로마(비잔틴)보다는 내분에 휩싸여 약화되고 있는 서로마에 더 쏠려 있었다. 서로마에 대한 아틸라의 군사적 원조는 439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서로마는 훈에 대한 공납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령관 아에티우스를 중심으로 훈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아틸라는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매진했다. 448년, 2년간 계속된 군비 증강과 정치적 안정이 일단락 되자, 드디어 서로마에 대한 외교적 공세를 취했다. 우선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 3세(425~455)황제의 여동생이자 한때 자신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약혼 반지를 보낸 바 있는 호노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결혼 선물의 지참금으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발렌티아누스와 아에티우스가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하자 아틸라는 이를 서로마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451년 초, 헝가리 중앙에서 서쪽으로 원정을 개시한 훈군은 8~10만의 규모였다. 훈군과 동일한 규모의 게르만과 슬라브 복속민 군대가 합류하여 그 규모가 20여 만으로 불어났다. 20여 만의 훈 연합군이 451년 3월 중순경 세 방향에서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에 진입할 무렵, 이탈리아에서도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훈에 적대적인 부르군트와 서고트, 프랑크족을 규합하여 훈과 동일한 규모의 대군을 형성하여 갈리아를 지나 북상하였다.

마침내 훈군이 4월 7일 메티스와 두로코토룸을 정복하고 파리 근교의 아우엘리아눔(현 오를레앙)에서 그 곳에 진주하던 아에티우스와 맞부딪쳤다. 그러나 서로마와 훈, 서방 세계의 2대 강국의 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라우눔에서 벌어졌다. 하루 종일 계속된 치열한 접전 끝에, 쌍방 모두 16만 5천명이란 전사자를 남기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다.

유럽의 역사가들은 19세기 이래 로마군이 궤멸되지 않고 훈이 퇴각한 이 전투를 로마의 승리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 결과, 전쟁 당일 밤 로마군의 지휘 계통이 붕괴되어 아에티우스 자신이 훈 진영에 포위, 고립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사실이 밝혀졌고, 로마군에 소속되어있던 프랑크군과 테오도리크 왕이 전사한 서고트군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결과적으로 훈의 서로마 침공은 로마 제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했던 갈리아를 폐허로 만들어 서로마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이 전쟁 후 명장 아에티우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도 전쟁의 승패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 [로마제국 영역]훈족의 로마침략시기인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고 로마 제국은 동 로마제국과 서 로마제국으로 양분되었다.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동로마는 서로마 멸망이후 500년간이나 유지되었다.

아틸라의 훈군은 갈리아를 떠난 지 20여 일만에 수도인 판노니아의 세게드로 귀환했다. 그리고 1년 후에 또다시 대규모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교황 레오 1세의 시종관이었던 프로스페르티로의 기록에 의하면, 무저항의 진격을 계속한 아틸라의 공세에 방어력을 상실한 아에티우스는 황제 발렌티아누스에게 이탈리아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452년 봄, 아틸라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베네치아 평원에 도착했다. 아퀼레이아 성을 함락시키고 또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여 아에밀리아 지역을 정복하고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 근교에 이르렀다. 공포에 질린 민중의 소요와 적의 공격에 다급해진 서로마 황실은 교황과 원로원의 화평 건의를 받아들여 긴급히 사절단을 파견했다.

교황 레오 1세로 이루어진 사절단은 452년 7월 중순경 민시오강과 포강이 만나는 강변에 진주해 있던 아틸라를 방문해 협상을 했다. 교황은 서로마 황제와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여 로마의 파괴를 자제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아틸라는 5년 전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진격하여 비잔틴 수도 점령을 눈앞에 두고도 철수했던 전례를 상기시키면서, 문화 보호 차원에서 로마를 초토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틸라는 로마 교황의 방문을 이미 서로마가 비잔틴 제국처럼 자신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프리스쿠스가 448년 훈의 수도를 방문한 서로마 사신 로물루스의 전언을 기록한 대목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아틸라는 다음의 공격 대상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임을 밝힘으로써 동서 로마가 이미 자신의 통치하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 제국은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아틸라는 게르만 제후의 딸인 에리카(일디코, 힐디코)와 결혼식을 치루던 날 밤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아틸라의 명성과 그에 대한 두려움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만, 영국,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후반 새로운 아틸라 연구는 그가 중세의 폐쇄된 기독교 사회에 의해 철저한 야만인, 약탈자로 폄하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훌륭한 덕목과 통치력, 뛰어난 국제 감각과 탁월한 지휘관의 재능을 가졌던 당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틸라의 사후 훈 제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었다. 아틸라의 아들인 엘락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게르만 연합군과 판노니아에서 벌인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뎅기지크는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르네크는 훈족이 유럽에 정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쟁에 지친 훈족을 이끌고 흑해 서안으로 이주해갔다.

이르네크의 영도하에 훈족은 당시 남러시아 평원에서 모습을 보이다가, 발칸 반도와 중부 유럽에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한 불가르족과 마자르족(헝가리)족과 합류하여 그들에게 많은 정치, 군사, 문화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마자르인들을 인솔하여 헝가리 땅에 정착해 왕국을 세운 족장 아라파드는 자신을 아틸라의 후손이라 주장했으며 현재도 헝가리 인들은 아틸라를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유럽인들의 기록을 보면,


▲ [고구려 수렵도]한자'동이'의 '이'는 오랑캐 '이'가 아니고 '큰 활'를 의미한다. 즉, 동이는 동방의 큰 활 민족이라는 [동방족]을 의미한다.먼나 먼 유효 사거리를 가지고 있는 강력한 맥궁과 몸을 돌려 쫓아 오는 적에게 활을 쏘는 배사법은 오직 우리 한민족의 독창적인 전투기법으로 고대 한민족의 코드라고 할 수 있다.    


“훈족은 자신들의 왕 아틸라를 '하늘의 아들'로 여겼다. 하지만 아틸라와 일반 훈족 사이에는 다른 나라의 왕과 백성 사이만큼의 큰 신분적 차이는 없었다...아틸라는 왕관을 쓰지도 않았고 옷은 수수했다. 그의 칼, 신발, 馬俱에도 금장식은 찾아 볼수 없었다. 그는 나무 잔으로 술을 마셨고, 나무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 아틸라는 훈족 내부의 다툼을 듣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로마인 Priscus)

“아틸라가 죽었을 때 훈족은 풍습대로 머리칼을 자르고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내며 슬퍼했다. 전사의 죽음은 여자들의 눈물 대신 남자들이 흘리는 피로 위로받는다.”(Ammianus, Getica)

슬픔의 표시로 얼굴에 상처를 내는 풍습은 투르크, 마자르, 슬라브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 풍습은 최근까지도 세르비아, 알바니아와 타지키스탄의 일부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고됐다.(Rakhimov, 1959)

“아틸라는 수염이 적었다” Priscus는 아틸라와 그 친척들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던 덕에 자세한 묘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수염을 남성의 상징으로 여겼기에 훈족의 성긴 수염이 이상하게 보였다. “훈족은 다부지고 튼튼한 몸과 강한 목을 가졌다”(Ammianus)

“아틸라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작았다”(Priscus) 반면 훈족이 복속한 Alan 족은 키가 크고 피부가 희었다. 볼가강 유역의 사마르티아인 무덤의 뼈로 추정하건대 이들의 신장은 보통 180cm임.

“훈의 머리는 둥글고 모양이 없다(shapeless). 눈은 안보일 정도로 작고 깊이 파였다.'(Jordanes) 코는 아주 납짝했다.(Sidonius)” 말에서 내린 훈족의 키는 중간 정도인데 말에 앉아 있으면 커보인다.' 훈족의 앉은 키는 컸다.

많은 훈족은 유럽계와 혼혈이 많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훈의 장군 Balamber는 고트족 귀족의 여자와 결혼했고, 아틸라의 마지막 아내의 이름은 게르만족 계통인 Ildico였다.

고인류학적 증거는 훈족이 인종적으로 유럽계와의 혼혈이 심했음을 뒷받침한다. 로마군의 주둔지가 있던 헝가리의 Gyor, Szechenyi 광장에서 발굴된 훈시대의 23개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6개가 유럽계, 6개는 몽골계 유골(퉁구스계의 특징이 강함)이 분명하고, 나머지는 불분명. 인위적으로 변형된 아이의 두개골도 발굴. 헝가리의 Adony에서도 몽골로이드 계통의 유골 4구가 발견되었다고 헝가리의 인류학자 Nemeskeri, J의 논문 Anthropological Examination of the Skull from Gyongyosapati, 1945), An Anthropological Examination of Recent Macrocephalic Finds, 1952)에 나오며, Mosonszentjanos의 Avar족 무덤에서도 몽골계통의 유골이 발굴된다. [편집/윤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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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어로 기록된 코카서스 쩨렌추크에서 발견된 비문 -이상하게도 그 그리스문자는 그리스어로 뜻이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스크바 대학의 민속학교수이자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 회원인 밀러(Vs. Miller)박사는 묘비의 그리스문자를 빌려 쓴 그 언어에 분명히 오세티안,(체첸, 잉구세테아지역)어로 볼 수 있는 몇몇 어휘들이 반복해서 등장함을 보고 오세티안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설총의 이두문자처럼 그리스어를 소리음으로 빌려 쓴 것 ).6,7,8라인에 X....(흐,하)로 시작되는 자의 아들 '박달'Bakatar이 보인다. Χ. .. . ρη φουρτ  ΪΙακαθαρ ( X....의 아들  Bakatar)이다.   여기서 '박타르'란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하여 '흉노제국'을 건설한 박타르 왕을 의미한다.단군(檀君, 檀은 '박달나무'단이다)도 퉁구스 말로 '박타르'로 발음되는데 박타르는 '영웅'을 의미한다. 코카서스 오세티아에는 7명의 아들을 둔 왕 박달의 전설이 있다.  Os-Bagatar이 바로 그 주인공

[자료]단군.배달.흉노의 어원



단군왕검의 경우 과연 이 말이 당시의 알타이,퉁구스,몽골,투르크인들에게 뜻이 통했겠느냐하는  것을 그 당시 원시 알타이어 (proto-Altain)로 검증해 보는 겁니다.

예를들어 '흉노'는 쥐나인들이 중원을 지배했던 흉노족을 비하하면서 표기한 한자인데 이거 아무리 한자로 해석해도 오랑캐뜻밖에는 안나옵니다. 그러면 흉노는 자신을 무어라고 불렀을까요? 바로 'ㅎ슝누'(shun nu)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해를 뜻하는 원시알타이어(몽골어,투루크어,퉁구스어,알타이어,만주어 공통) 'shun', 즉 '하늘, 해'등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하늘의 자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대 알타이어 '슝'은 송화강에서도 나타납니다. 송화강은 중국식 표기인데 아무리 해석해도 '소나무꽃의 강'이라는 것 밖에 안나옵니다. 그런데 이 송화강을 퉁그스어 즉 만주인들은 '天川' '하늘의 강' 또는 '빛나는 강'이라고 합니다. 송화가루 날리는 강이 하늘의 강이라니! 한자어로는 아무리해도 이해가 안 갑니다.

하지만 만주 퉁구스인들이 이 강을 부르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중국식 표기 송화강은 만주인들의 언어(퉁구스)로 슝리 올람(Shungri olam)입니다. '하늘'을 뜻하는 원시 알타이어 Shun, 바로 흉노가 자신을 일컬었던 그 '슝'입니다. 송화강이 백두산 천지에서 나오고 그들은 그래서 송화강을 하늘의 강이라고 한 것입니.

더 들어가보면 신라의 서라벌은 한자어로 아무런 뜻도 통하지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일 터어키인에게 "서라벌이 뭐게?" 하고 물으면 아마 그는 "궁전이 많은 곳 이냐?"라고 되물을 겁니다. 좀 더 유식한 터어키인은 '왕이 있는 도시' (The city of King)이라고 대답할겁니다. 왜냐하면 투르크어 'sara'는 궁전을 뜻하고 bol은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탄불, 카불 처럼, 불(bul)이 도시(city)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고조선을 검토해 봅시다.

우선 배달(baedar)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요? 투르크,몽골,알타이,퉁구스,만주사람들에게 '배달겨레!'이렇게 외치면 그 사람들이 알아 들을까요?  아마도 못알아 듣겠죠? 하지만 여러분이 만일 '바타르 게레!' 또는 '바타르 죠료'하고 외치면 대개 고개를 끄덕일겁니다. 바타르(batar)는 원시 알타이어로 영웅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몽골의수도 울란 바타르는 바로 울란=붉은, 바타르=영웅, 즉 붉은 영웅이란 뜻이지요. 퉁구스족에는 아예 자신을 baatar라고 하는 민족도 있습니다.

그러면 게레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청나라 푸이가 자신의 성을 아신각라라고 했는데 아신(acin)은 퉁구스어 바로 금(金)인데, 이것은 원시 알타이어 '알친(altin)'과 동족어(etymology)입니다. 우리 백제왕에도 아신왕이라고 있지요?  '각라'는 가라,  '게레'로 모음조화가 일어나고 엣날에는 G발음과 J발음이 왔다갔다해서 jara, jere,joro등으로 쓰일 수 있었지요.

따라서 바타르 게레 (batar gere)란 바로 원시알타이어로 영웅민족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이제 더이상 배달이 박달에서 오고 檀자에서 어쩌고 저쩌고 하지맙시다. 언어는 단순한 겁니다. 흉노라는 발음처럼 말이지요.

자 그러면 우리가 왜 그 당시 '바타르게레' (배달겨레)=영웅족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단군왕검'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단군(tangun)'은 원시알타이어 Tangur(탕구르)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몽고인, 투르크인 퉁구스인,만주인 할 것없이 모두 신성한 '하늘' 또는 천신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다는 뜻 지고하다는 뜻을 갖습니다.

문제는 왕검인데(wangum)인데 중국에서는 '왕험'이라고 썼더군요. 저는이것이 당시 알타이 제민족간에 신성시되었던 Aga, 또는 Agahan이 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아가', ;아가한'은 그들에게 전설적인 영웅인 동시에 그들의 조상신입니다. 이것이 아랍에도 영향을 주어서 그 유명한 'Agha-Kan'이 역사에 등장하기도 하죠.

즉 여러분이 고조선시대로 가서 몽고,투르크,퉁구스,만주, 모든 제민족 앞에 서서 하늘을 가리켜 'Tangur Aga han!' (탕구르 아가한) 이렇게큰 소리로 외친다면 아마도 모두 무릎을 꿇고 엎드릴 것이고 또 그들을 가리키며 " Batar gere'(바타르 게레)! 이렇게 외치면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탕구르아가한'(檀君王儉)은 바로 '하늘의 거룩한 조상'이며 '바타르 게레'(Batar-gere)는 '영웅민족' 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출처]http://blog.daum.net/innomy/9402820

[자료]고고학과 기마민족 정복국가설 - 이도학 교수


▲ 인류문화는 해양문화와 대륙문화의 교류와 융합을 이루어 왔다. 고대 인도문화는 해양을 따라 일본.한반도까지 영향을 주었다. 인도 스리랑카의 설화는 가야의 김수로왕 설화와 유사하며, 가야 10국은 스리랑카의 고대 10국의 국명과  동일하다.  

기마민족의 일본 진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인 1948년 좌담회 석상에서였다. 당시 도쿄대학 교수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이라는 가위 폭탄적인 주장을 제기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놀랄 만한 기동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마민족이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를 경유한 후 일본 열도로 진입해 통일국가를 실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천황가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고는, 자신의 주장을 ‘기마민족정복국가설’이라고 명명했다. 이 학설은 전전(戰前)에는 감히 입도 뗄 수 없었던 일종의 터부를 건드린 것으로서 쇼킹 그 자체였다.

에가미에 따르면, 유목민족에서 기마민족으로 급변(急變)하게 된 계기는 기동성을 핵으로 한 기마전술의 도입이었다고 한다. 광대한 풀밭과 많은 말들을 사육하는 기마민족에 비해 농경민족은 그 정반대 조건에 놓여 있었다. 도시를 비롯한 고정된 취락에서 살던 농경민족이 아무리 튼튼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보통 그 허술한 곳을 틈타 기습하는 기마민족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중국 한(漢)의 1개 군(郡)밖에 되지 않는 적은 인구의 흉노에게 한 제국 전체가 오랜 기간을 시달린 것이다. 그런데 이 학설의 주체인 기마민족은 스키타이계의 기마민족 문화와는 다른, 3~5세기 무렵의 중국화된 호족(胡族) 문화의 주인공인 흉노·선비·오환·부여·고구려를 가리킨다. 이들은 말 타고 활 쏘는 기사(騎射)에 적합한 마구(馬具)·도검(刀劍)·궁시(弓矢)·복장(服裝)·갑주(甲胄) 등에서 강렬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실제 부여나 고구려의 시조는 물론이고 고구려왕들은 활을 잘 쏜다거나 기마에 능했고, 뛰어난 말 감별 능력을 갖추었다. 고구려는 49년에 중국 베이징 근방인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 등지를 급습했다. 당시 고구려 군대가 국경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거리는 왕복 7000~8000리에 이른다. 이러한 대원정은 빼어난 기마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에가미가 주창한 기마민족정복국가설의 요지는 부여·고구려 계통의 기마민족이 남하한 후 한반도 남단의 금관가야를 발판으로 기타규슈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이들은 다시 기나이 지역에 진출하여 일본 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실현했다고 한다. 이 학설은 문헌자료 외에 고고학·민족학·언어학적 방법론을 폭넓게 적용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마민족설은 한반도의 천손강림설화가 일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즉, 『삼국유사』 6가야 건국설화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천손 니니기노미코도의 천강(天降)신화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가령 지배자가 모두 천손의 명을 받아 천강하였고, 하늘에서 포(布) 같은 것에 싸여 내려오고, 천강 지점이 ‘구지’와 ‘구지후루’ 봉(峰)으로 서로 음이 같다.

그리고 시조인 진무(神武)천황의 동정(東征)설화는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건국했으며, 바다에서는 거북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널 수 있었고, 시조의 아버지는 하늘이고, 그 어머니는 해신(海神)의 딸이라고 했다. 이는 강(江)과 연계된 동명왕의 남하건국설화와 대강의 줄거리가 일치한다. 이처럼 일본 건국신화에 부여와 가야계 설화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부여 계통의 기마민족이 남하 도중 일시 가야 지역에 정착하여 연고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가설은 고고학적으로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고고학적으로 볼 때 일본에 통일정권이 형성된 시기는 후기고분시대(5세기 말~7세기 말)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 시기 고분들에는 한반도계의 무기, 마구, 호사한 장식품 등이 잔뜩 부장되어 있다. 이는 전기고분(3세기 말·4세기 초~5세기 말)의 부장품이 보기적(寶器的)이고 주술적인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곧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문화가 금관가야를 경유하여 일본 열도로 진출한 증거라는 것이다. 에가미는 1992년, 45년간에 걸친 자신의 학설을 마무리하면서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부여계 기마민족의 능묘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꺼번에 확인된 목곽묘, 순장 습속, 호랑이 모양 띠고리·오르도스형 청동솥의 존재가 그것을 명료하게 입증해 준다고 결론지었다.

에가미에 따르면, 금관가야(임나)에 정착했던 기마민족은 4세기 전반기에 기타규슈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의 영도자는 『일본서기』에서 제10대로 기록된 슈진(崇神)천황이며, 앞서의 천손강림신화는 이 단계의 이동을 반영한다고 했다. 슈진 천황을 임나(任那·미마나)의 궁성에 거주한 천황이라는 뜻의 ‘미마키(御間城)천황’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어원이 슈진 천황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 것은, 그가 영도하는 기마민족이 임나에서 출원했음을 시사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슈진 천황을 『일본서기』에서는 ‘어조국(御肇國)천황’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일본국을 시작한 천황’이라는 의미이므로 실질적인 야마토 정권의 창시자임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 슈진 천황이 영도하는 기타규슈의 기마집단은 바다 건너 임나에 걸친 왜·한(倭·韓) 연합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반도 남부 여러 세력의 작전권을 주도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 집단의 영도자로서 제15대로 기록된 오진(應神)천황은 기마집단을 이끌고 기타규슈에서 오사카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본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오사카 지역의 대형 전방후원분인 오진 천황릉과 닌도쿠(仁德) 천황릉 등은 규모에서 이집트 피라미드에 필적하는 거대 건조물이다. 이는 절대 권력을 과시한 야마토(大和) 정권의 엄연한 존재와 더불어 통일국가의 기초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체로 이같은 요지의 웅장한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는 기마민족설은 대세론적인 입장에서 크게 주목되는 획기적인 학설임에 틀림없다.

한편 와세다 대학 교수였던 미즈노 유(水野祐)가 1966년에 ‘네오(Neo) 기마민족설’을 제기했다. 이 학설은 한반도계의 정복왕조가 남(南)규슈에 세운 구노국(狗奴國)이 기타규슈에 있던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을 정복하고, 4세기 중엽에는 기나이 서쪽인 혼슈 서반부를 통일한 원(原)야마토(大和)국을 타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구노국은 명실공히 서일본의 통일국가가 되었지만, 기나이 지역으로 천도하지 않고 규슈에 거점을 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4세기 말부터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적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한 구노국은 규슈 지역과 연락이 편리한 세토나이카이만(灣)에 위치한 기나이의 야마토 지역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때가 오진 천황을 이은 닌도쿠 천황 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기나이 지역의 후기 고분(5세기 말~7세기 말) 출토품이 전기와 달리 그 성격이 급변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사와 관련한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은 1988년 필자가 백제사에서 구체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백제에 온조와 비류, 2명의 시조가 존재하는 것은 2개 왕실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왕실 교체를 암시한다. 이와 관련, 백제 건국기의 주(主)묘제는 토광묘인 데 반해, 서울 지역에 등장하는 남만주 계통의 전형적인 적석총은 4세기 후반경에, 그것도 완성된 묘제로서 돌연히 등장한다는 점에 필자는 주목했다. 이는 곧 묘제의 단절을 뜻하는 동시에 왕실 교체를 뒷받침하는 물증으로 해석된다.

4세기 중후반 근초고왕대의 백제는 단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칠 줄 모르는 운동력을 가지고 팽창했다. 백제가 북방의 웅국(雄國) 고구려를 꺾고, 마한과 가야제국을 제압했던 힘은 강력한 중장(重裝) 기병전술에 기인한 것이었다. 근초고왕대의 ‘친정(親征)→약탈→분배’라는 전쟁 양식 역시 유목형 군주들의 전쟁 수행 방식과 동일하다. 또 백제왕을 가리키는 호칭인 ‘건길지’·‘코니키시’·‘코키시’는 돌궐에서 천자(天子)를 가리키는 ‘?키시’와 연결된다.

게다가 흉노는 물론이고 돌궐 등 유목 기마민족 사회의 직제인 좌우현왕(左右賢王)제도가 백제에서 확인된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보이는 빡빡 머리인 독두(禿頭) 역시 기마민족 사회의 두발 형태이다. 그러고 보면 백제 성씨 가운데 난씨(難氏)의 계통을 유목 기마민족인 오환족에서 찾는 주장과 더불어, 백제 조정의 단씨(段氏) 역시 선비족 계통의 단부(段部)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백제에 서식했던 사막지대의 운송 수단인 낙타와 초원 지대의 가축인 양(羊)의 존재 또한 기마민족체제에서 출발한 백제의 정체성을 웅변해 준다.

적석목곽분의 주인공은 기마민족

신라사에서의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은 먼저 김병모(金秉模·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신라 적석목곽분의 계통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고분군과, 그리고 신라 금관의 계통을 중앙아시아 지역의 관모(冠帽)와 연결지어 생각한 데서 출발한다. 이종선(李鍾宣·경기도박물관장)씨는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파는 서쪽으로 이동해 헝가리, 즉 훈족의 나라를 세웠고, 동쪽으로 이동한 일파는 한반도뿐 아니라 일본 열도에까지 상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거쳐 동남진(東南進)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승석문(繩席文)토기, 금 세공기술을 가지고 남하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추정은 오르도스문화의 전형과 신라의 주된 묘제인 적석목곽분뿐 아니라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상이 서로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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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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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래

2008.04.02
21: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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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

오나라 손권이 '흉노의 선우'라 칭할 만큼 고구려는 유목민족의 맹주

문화부

유라시아 대륙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초원길과 비단길을 통하여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교류되는 개방적인 공간이였다는 점을 전제로 스키타이족인 흉노의 기원에 대해서 [한단고기]에는 "갑진 6년, 열양의 욕살(관직명) 색정을 약수(몽골고원 중부에 있는 고비사막 인근을 흐르는 강)에 유배시켰다. 뒤에 이를 용서하고 그 땅의 제후로서 봉하니 이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라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스키타이(훈.흉노.돌궐.몽골) 발원지(만주와 몽골)와 이동루트로써 초원 스텝루트


사료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주장의 오류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 변방의 소수정권이라 주장하며 ‘고구려 훔치기’에 나섰으나, 고구려는 중국을 위협하며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다. 중국의 황제가 고구려의 왕을 중국이 그토록 경계했던 타자(他者)인 ‘흉노의 왕’으로 여긴다는 중국 문헌이 발견됐다. 이로써 중국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할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고구려 수도문제]▲ 고구려 전성기 때의 영토. 대륙 동부 평야지대까지 다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에서 기원한다. 고리국의 위치는 바로 북경지역에 위치한 난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초기에 수도를 티벳.서안 피라미드들보다 연대가 빠르다고 볼 수 있는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피라미드 무덤들로 추정되는 동이족의 성지, 압록강 부근의 집안의 홀본성에 잡고 세력을 확장한 후에 차츰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는 다물정신에 따라 중국침략을 방어하고 서토를 공략하는 차원에서도 조상들의 시원지인 난하지역에 수도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만리장성 넘어 하북성 난하지역은 중국 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홍산문명의 유적지가 발굴된 지역이기도 하다.

바로 고구려 조상들의 발원지인 이 지역은 고구려의 성지이자, 동이족 문명의 젖줄로써 고구려도 보존해야만 하는 땅이였을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만 천하에 드러나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면서 고구려사(高句麗史)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중국 옌볜대 류쯔민(劉子敏) 교수는 ‘중화천하질서(中華天下秩序)의 고구려’라는 논문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 중에서 갈라져나간 할거정권이며, 북방 소수민족(흉노와 그 후예를 뜻함)의 궐기로 형성된 분열국면의 틈을 타서 중원의 광대한 관할지구를 탈취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백제, 신라와 각축전을 벌였다고 했다. 중국이 남북조 시대에 들어선 후 고구려가 중국과는 독립된 국가로 나아갔지만, 남북조와 신속(臣屬)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사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노리는 것일까? 그 계기는 1997년 북한이 ‘조선전사’를 발간하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특별히 강조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은 이에 대한 반발로 우선 중국 동북지방(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 지금까지 무려 10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 벽화 유네스코 등재로 이슈화

집착이라 할 만큼 활발한 연구에도 고구려사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2001년 북한이 고구려 벽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면서 고구려사는 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고구려=중국사’라는 중국의 시각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북한에 유적을 공동으로 등재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제안을 일거에 거절했고, 이에 중국도 독자적으로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북한 단독 등재가 확실한 것으로 예측됐지만 막판에 심의가 보류되었다. 이때부터 고구려 문제는 중국의 국가적 과제로 급부상했다.


▲ 서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피라미드. 중국정부는 발굴 3일만에 이 피라미드는 동이족(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것으로 결론짓고 발굴을 중지하고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 은폐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중국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5년간 약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할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는 고구려가 중국 변방의 소수정권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고구려의 영토였던 중국 동북방을 중시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동북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 건 분명하다. 따라서 중국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재확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 지역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명분을 축적하겠다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이러한 역사 왜곡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구려 영토 대부분이 현재 중국 땅에 속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시도가 얼마나 모순에 차 있는지를 적극적인 대처 논리를 가지고 밝혀야 한다.

과거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대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료와 유물을 참조해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한민족에 대한 자료가 국내에 미흡해 다분히 인근 국가들의 사료들을 인용하는 것이 현실인데, 이 역시 단편적인 데다가 나라마다 편찬자의 이해득실이 엇갈려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가필되었을 가능성 또한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민족이 한민족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한민족이 스스로를 곡필하지는 않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왜곡하고 있는 역사에 대해 중국측이 작성한 사료를 통해 적절하게 대응한다면, 중국측에서 더 이상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 중국과의 과거사 논쟁에서 첫 단추를 잘 끼느냐 잘못 끼느냐는 중국보다 한국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 로마와 유럽의 공포대상 훈족의 왕 - 아틸라

중국 ‘밖의’ 나라, 흉노제국

중국인들은 소위 중국인이 아닌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특히 한민족과 관련되는 민족은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동이란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중국인이 아닌 민족이라고 부른 동이와 중국인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훈족(흉노(匈奴))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사료 등을 통해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의 문제는 375년 서유럽을 공격,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반도 남반지역에 정착했던 훈족(흉노)이다. 중국과 끊임없이 경쟁을 벌였던 흉노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소위, 가야·신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적어도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이들을 중국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가야·신라가 흉노의 일파인 훈족과 친연성이 있다면 가야·신라보다 흉노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고구려는 흉노와 어떤 관계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역사에서 흉노가 나타나기 전까지 주로 동이(東夷)들이 살고 있던 동북 지역은 한민족의 원류가 정착한 지역이자, 부여와 고구려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흉노와 고구려의 연계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근본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 스키타이(흉노.훈)족은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이동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흉노’란 중국 북방에서 처음으로 유목민 국가를 건설한 제국의 명칭이지,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 들이면서 점점 강성해졌다. 그러다 기원전 4세기부터 비로소 여러 유목민 부족들을 망라하여 하나의 포괄적인 기마민족 집합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들은 ‘흉노’라는 이름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고, ‘노(奴)’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란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흉노에서 흉(匈)자를, 선비(鮮卑)에서도 비(卑)자를 떼어내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에서 따온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로 ‘사람’이란 뜻이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흉노가 ‘노예 같은 오랑캐’란 뜻이었다면 흉노 제국이 이런 이름을 용납했을 리 없다. 특히 진나라의 뒤를 이어 들어선 한(漢)이 흉노에게 조공하는 입장에서 상대를 비하하는 뜻으로 ‘흉노’라 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를 의미했다. 고구려의 5대 부족인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도 흉노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 있다.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에 자리잡은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에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대(元代)의 극 ‘공작담(孔雀膽)’ 대사에 등장하는 ‘노(奴)’나 ‘아노(阿奴)’의 어의를 살펴보면, 이는 남편을 지칭하는 ‘낭(郎)’이나 ‘낭자(郎子: 그대, 그이, 낭군)’의 뜻이다. 즉, ‘노(奴)’자가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흉노의 어감과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선입견은 버려도 좋지 않을까.


기후변화와 식량부족으로 유럽에 갑자기 출몰하여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유럽을 지배한 아틸라 훈족의 판도


漢에게서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흉노 간 본격적인 대립의 역사는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했지만 곧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 중국인 한(漢)을 세운다. 당시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한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북쪽 흉노와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흉노는 몽골 중앙부인 상원(上原; 현재의 산서성 북부, 운중(雲中)에 상당하는 위치) 지역에 본영을 설치하여 선우(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의 아들’, 즉 흉노의 왕을 뜻한다)가 직접 통치하고 좌현왕과 우현왕으로 나누어 각기 동서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상원 지역은 광활하면서도 비옥한 초원지역이자 동서남북 교통의 요충지다. 흉노를 비롯해 칭기즈칸, 돌궐, 위구르 등이 모두 이 지역에 본영을 설치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 고분과 유사한 북방민족의 쿠르간(상), 훈족의 동복(하단 오른쪽),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동복(하단 가운데), 훈족의 편두(하단 왼쪽)-스키타이족(흉노.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한을 흉노의 속국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당시 동호(東胡;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며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인접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라며 순순히 동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1000여리의 황무지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신하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과 가축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는 유목기마민족의 패자로 떠올랐고,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을 뜻하며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슈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에 이르렀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 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10년간의 한·흉노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와 흉노는 대략 300년에 걸쳐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그후 두 나라는 모두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우선 흉노는 기원전 57년에 동서로 나누어지고, 동흉노는 다시 남북으로 갈라진다. 이후 중국과 계속 대립하다 350년 한족과의 전투에서 북흉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 모본왕의 진출로. 서남으로 산서성의 성도 태원까지 갔다. 덕흥리 고분에도 태원태수가 하례드리는 벽화가 있다.

흉노 편을 든 고구려

한국사는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받는 부여(夫餘)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 桂婁部)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관해서는 대동 소이하다(‘광개토태왕비’에 추모(鄒牟)로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흉노와 동이에 속하는 예맥(부여)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 데도 두 나라가 교전한 기록이 단 한군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기후나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약탈에 나섰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서로 이웃한 종족간에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다소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흉노가 동호를 격파한 후 부여가 흉노의 세력권 안에 속해 있었다면 이들간에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도 발견됐다. 진(秦)나라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서’에 ‘해동의 모든 이족(夷族)들은 부여의 족속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부여와 흉노처럼 고구려와 흉노의 관계 또한 특별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왕망이 중국 전한(前漢) 왕조를 파하고 신(新, 8∼23)을 세운 후 흉노를 정복하겠다며 고구려에 병력을 요청하자 고구려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거꾸로 요하(遼河)를 넘어 신(新)을 공격해 요서태수 전담을 전사시키고 지속적으로 왕망의 영토를 유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망은 흉노의 일족인 휴도왕의 후손으로 중국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웠으므로 흉노도 자신의 세력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동·서 흉노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동흉노로 볼 수 있다. 왕망은 동흉노가 그의 지배를 거부하자 흉노의 다른 일파이자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으로 하여금 동흉노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소수맥은 동흉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망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는 것이 문무왕의 능비문에도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알지가 흉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경작(粗放耕作)을 하던 선비(鮮卑)는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족이다. 선비는 동호가 흉노에게 격파된 후 선비와 오환으로 분리된 다음 북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 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 후연, 남연, 남량,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이며 선비의 문화가 당대까지 존재했던 점 등을 미루어보아 선비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중국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이 할거하며 중원을 지배하던 시대를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라 부른다. 이러한 선비가 고구려와 특별한 유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선비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는 여러 차례 발견된다. 우선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삼은 일이 있다. 또 후한 광무제가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부용(附庸)세력화하여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 고구려로부터 이탈하게 한 일도 있다(48년). 이에 고구려는 모본왕 2년(49년)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방어선을 화북 산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이에 당황한 후한은 고구려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선비족 일부를 책동하여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도록 사주한다.

고구려의 태조 대왕은 더 이상의 선비족 이탈을 막기 위해 동왕 3년(55)에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하였고 동왕 69년(121)에는 선비세력과 합세,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행동 폭을 확대시켰다.


▲ 사학계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한 현 집안 지도. 대제국의 수도(국내성)의 크기가 겨우 15Km2?


선비(鮮卑)는 고구려의 부용세력

부용(附庸)이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대국(大國)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 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도 이러한 보호-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주체적인 생존방식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여 전사국가(戰士國家)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시켜 나가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사회적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런 내외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탈피,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독자적 생존권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한다.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흉노가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이 부용 관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地豆于) 같은 이종족(異種族)에게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고, 특히 노역과 군역을 확보했다.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라고도 한다.

고구려 제국은 복속된 기마민족들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였으므로 새롭게 탄생한 한족의 국가 수·당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 산재한 흉노의 후예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수·당은 고구려와의 전투를 한-흉노간 전투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 문제가 30만명을 동원하고도 참패했음에도 그의 아들 양제가 또 다시 고구려 침공에 매달린 것은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족을 지배하고 있는 동북아의 패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은 607년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을 때 때마침 고구려 사자와 마주친 후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부용세력 간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양제로서는 급선무였다. 마침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는 등 침공 명분까지 만들어주자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와 말갈 연합 세력에게 패퇴했고 당 태종의 공격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는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나 통일신라와의 항쟁에서 패배해 한반도의 주도권을 신라에 넘겨 주었음을 보여준다.


▲ [고구려 수렵도] 모양을 본 떠 의미와 뜻을 나타내는 갑골문자(한자) '동이'의 '이'는 그 본래 의미가 '오랑캐'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하늘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천손민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원리에서 나온 '큰 활'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동이는 동방의 큰 활 민족이라는 [동방족]을 의미한다. 유효 사거리가 강한 맥궁과 몸을 돌려 쫓아 오는 적에게 활을 쏘는 배사법은 오직 우리 동이족의 독창적인 전투기법으로 고대 한민족의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왕을 흉노의 선우로 인정

중국인들은 ‘북방 소수민족 세력의 궐기’였던 5호16국이 중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중국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동북방에 위치한 기마민족 고구려는 흉노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을 때는 흉노에 속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해 흉노가 멸망한 후에는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 같은 사실은 고구려가 5호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 등을 부용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북방 기마민족의 맹주 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한 사료가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주고 있다.

중국 중원이 오·촉·위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 황제 손권은 동천왕 7년(234),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파견한 일이 있다. 이때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單于)’라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3년 오(吳)의 손권이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가서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해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나라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책봉하고 예물을 보낸 것이다”(책봉이란 정식 수교(修交)의 외교적 관례로 왕위나 직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지, 상하 주종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국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견사자사굉(遣使者謝宏) 중서진순(中書陳恂)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가사의복진보(加賜衣服珍寶)” 그러나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한다. 그러나 관구검을 격파한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관구검을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 북방 유목민족 스키타이족(=흉노=훈=투르크=돌궐=터키=위그르=몽골)의 이동과 활동반경.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4대 오사구 단군은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의 칸으로 삼았다"라고 했는데, 이 몽골(몽고리)을 통일하고 인류역사상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세계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며 동서양 문명의 교류역할을 했던 징기즈칸을 배출한 보르키킨 부족의 경우, 몽골 지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흉노가 거주(한단고기 내용과도 일치)했는데 이들은 쥐나와 치열한 패권 장악을 위해 싸우다가 중심부에서 세력을 떨친 보르치긴족으로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다. 현재 몽골의 주력 주민들도 보르치긴족이다. 그런데 보르치긴족은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본래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으로 고대 한민족의 터전인 북만주 지역은 본래 단군조선.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에 동부여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흉노족으로써 지금 몽골에 거주하는 주류 종족인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다.


고구려는 변방 소수세력 아니었다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에서 세계를 주름잡던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특성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흉노가 중국과 끊임없이 혈투를 벌여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중국과 당당히 맞서 싸우거나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흉노의 수장급이란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 고구려는 중국에 종속된 변방 소수세력이 아니었다. 즉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끼워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중국인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고구려는 북방 기마민족으로 흉노의 몽골계에 속한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기할 것은 고구려가 흉노의 여러 습속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적석목곽분은 흉노 등 북방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인데 고구려에서는 이런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어 시체와 부장품을 안치한 후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중국, 그리고 일본에는 없는 무덤 형태이다.

북방 기마민족이 후대까지 견지했던 순장(殉葬)의 습속도 고구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반도 남부지역인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에서는 발견되고 있다.

광대한 영토에 속해 있던 한민족 원류들이 모두 똑같은 습속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 고대 중국 기록에서는 한민족의 원류가 거주한 지역의 민족이 예·맥·한·부여·옥저 등으로 구분되어 불렸지만, 이들은 모두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사람으로 불리는 것과 다름아니며 같은 민족이라도 지역에 따라 풍습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고구려가 흉노로 분류되던 거대한 제국 안에서 우월적인 독자제국을 형성했으며 습속도 독자적으로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우리 고대사 연구 강화해야.....

근래 언론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에 대응해 우리 정부가 고대사 관련 분야 연구자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고, 필요하다면 북한과도 적극적으로 공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사 왜곡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일본의 한국사 왜곡으로 우리가 얼마나 분개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시 중국으로부터 허를 찔렸다.

한국사를 왜곡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데도 한국이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민족사를 큰 틀에서 연구하고 분석하는 전문연구기관이 없는 데다,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는 현실 탓에 통일된 역사조차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역사 연구자들은 다음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2004년 6월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산하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 한·중 두나라가 신청한 고구려 유적의 ‘소유국가’가 결정될 예정인데, 현재 중국이 좀더 유리한 분위기라고 한다. 중국에서 문화유산위원회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요, 유적 규모나 정비 상태도 북한보다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원국들에게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중국의 단독 기재 시도를 적극 저지하는 일이 시급하다.

장기적으로는 한민족사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하고 공백상태나 다름없는 우리 고대사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민족사에 대한 어떠한 문제에도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 또한 길러야 한다. 북한과의 공조가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한민족사 연구에 과학을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고대사는 사료와 함께 발굴되는 유물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앞으로는 과학의 지원 없이 고대사 연구에서 정확한 사실을 규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유물 발굴과 고대사 연구를 ‘국립과학기술연구소’의 고대사 연구팀 주도로 진행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중국이 고구려사 연구를 위해 5년간 약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하는 현실에 비춰볼 때, 우리가 단편적인 연구 결과로 중국측의 물량공세를 이겨낼 수는 없다. 한국도 중국에 상응하는 예산을 투입해 전문가들이 민족사 연구에 앞장서도록 해야 한다. 보다 많은 정보를 축적해야 중국 등의 역사 왜곡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사건을 한민족사에 남겨진 퍼즐의 빈칸을 채우는 기회로 전환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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