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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전체공개 20 / 2010.09.18 17:41
황길경(hgeng)
카페매니저
 

과거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본 오늘날 한반도 정세.. "작업은 끝났다"

 

1945년 8월15일, 유대자본 측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벌인 제2차 세계대전쟁은 미국유대자본의 압도적인 역량에 의하여 유대자본 측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자본 측은 곧바로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과 대치를 이루게 됩니다. 공산진영의 등장입니다.

 

유대자본과 공산진영은 국제적 이해관계를 두로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유대자본 측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공산진영 당사국들 간에 대치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전쟁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1년 남짓 만에,

 

1946년 말, 베트남 하이퐁 항구에서 베트민(공산주의+민족주의 단체)과 프랑스 간에 직접적 무력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 무력 충돌로 시작된 전쟁을 제1차베트남전쟁(또는 제1차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데, 베트남과 유럽유대자본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의 승자인 미국유대자본이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유럽유대자본의 권리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옛날에 베트남이 아닙니다. 독립국가를 추구하는 베트남은 용감하게 프랑스를 상대하여 싸웁니다. 이러한 차에 이번에는 미국유대자본이 한반도에서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충돌하게 됩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 만에,

 

1950년 6월25일, 조선전쟁(한국전쟁)이 발생합니다. 조선전쟁은 제1차베트남전쟁과는 달리 게릴라전이 아니라 전면전 형태로 매우 치열하고 처절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피카소가 그린 <한국의 학살>이라는 그림처럼 학살과 만행이 피바다를 이룬 한(恨) 많은 전쟁입니다. 남쪽은 유대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16개 국가가 참전하고, 반대로 북쪽은 소련이 간접 개입하고 중국이 참전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3년 뒤,

 

1953년 7월27일, 북-미 간에는 정전협정이 맺어져 전쟁은 중단되었습니다. 정전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은 철수되어야 마땅한데도 미군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정정협정은 종지쪼가리에 불과한 것이고 전쟁은 언제 다시 시작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정전협정의 내용이 지켜지든 지켜지지 않든 북한에게도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고, 미국 유대자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정전협정에 따라, 이 땅은 허구에 불과한 정전체제로 오늘날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트남 입장에서 조선전쟁이 갖는 의미는 인도차이나반도에 집중되어야 할 유대자본 측 역량이 한반도에 집중됨으로써 상대적으로 한반도 보다 유리한 조건 하에서 유럽유대자본과 전쟁을 치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베트남은 유리한 상황을 얻은 것입니다. 프랑스를 상대로 한 9년간 지속된 1차베트남전쟁은 결국,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북위 17도선에서 남북 분할을 합의하고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역량부족을 절감한 유럽유대자본 측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권리를 미국유대자본에게 넘겨 주고 철수 하였습니다. 베트남은 국제패권 유지에 있어서 한반도 못지않은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곧바로 미국유대자본이 개입하였습니다. 북위 17도선에서 남북 분할된 베트남은 미국의 영향력에 들어간 남베트남과 공산진영의 도움을 받는 북베트남으로 갈라졌습니다.

 

1955년, 남베트남에서 미국유대자본 측은 제네바 협정에서 합의된 베트남 남과 북의 총선 실시 조항을 무시하고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을 건국하였습니다. 디엠 정권은 미국의 후원을 받아 남베트남 내 공산당 운동원과 그 지부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시작하였습니다.

 

1958년 12월1일, 남베트남은 대학살을 자행하고 반공법을 시행하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남한에서 있었던 일이 그대로 복사판처럼 자행되었습니다. 유대자본은 정치적으로 안 되면 살육을 자행하고, 살육으로도 안 되면 전쟁을 합니다. 북베트남은 게릴라 전법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1960년 12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내에 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 NLF)을 설립하고, 남부 농촌지방에서의 세력 확장을 꾀하며 남베트남 정부를 압박하였습니다. 이쯤 되자 미국유대자본은 직접적으로 개입합니다.

 

1961년, 미국 캐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결정으로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하게 됩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주의자들이 확산일로에 들어선 것을 방치할 생각이 없으므로 전쟁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1962년, NLF은 민족주의 정당으로 남베트남 지부로 창설된 인민혁명당(PRP)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이들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관통하는 이른바 호치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을 통해 남부로 군수 물자를 지원하고 게릴라요원을 직접 파견했습니다. 미국유대자본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1963년,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에서는 불교도들의 시위와 분신자살이 발생했고, 미국도 디엠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인가를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11월 디엠 대통령은 기어코 암살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남베트남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치닫게 됩니다.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합니다. 통킹만 사건은 오늘날 미국의 자작극으로 밝혀진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자작극 여부를 알지 못했고, 이 사건은 미국이 제2차베트남전쟁을 시작하는 명분으로 작용했습니다. 미국유대자본은 자기 수하의 국가를 전쟁에 동원하여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전쟁은 전개 되었습니다. 16개국이 미국유대자본을 위해 참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전면전 양상이 아니라 게릴라 전투와 국지전 양상으로 지루하게 지속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자본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 양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4년째 이르던 때에 한반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1968년 1월23일 오후 1시45분, 북한은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해상 첩보활동을 벌이던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를 대담하게 나포하였습니다.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피(P)-4 초계정 네 척과 미그 전투기 두 대를 동원하였고, 나포과정에서 미 해군 병사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포작전에 해병으로 참가했던 북한 군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 처음에 우리가 국적을 밝히라고 하자 놈들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성조기를 띄우며 거만하게 나왔습니다. 아마 미국이라면 감히 어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천만에, 놈들은 오산했습니다. 우리 7명의 해병들은 번개같이 배에 날아들어 순식간에 80여명의 적들을 모두 체포했던 것입니다. ] - 한호석 소장의 논설 중에서

 

미국 유대자본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무슨 당황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제2차베트남전쟁에 전력의 총력을 투입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고, 따라서 매우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유대자본이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소련에게 "북한이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도록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부탁을 받은 소련은 북한에게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한 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 당국자는 김정일 위원장인데, 당시 직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의 휘하에 있었음이 분명하고 오늘날 김정일 위원장 휘하에서 지휘봉을 잡은 김정은 대리의 역할과 비슷한 지위에 있었다고 보면 무방할 것입니다.

 

[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우리나라 영해에 들어와 정찰행위를 감행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법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올 때에는 제마음대로 왔지만 돌아갈 때에는 절대로 제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미국 놈들이 항복서를 내기 전에는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절대로 석방하지 않겠다. 그리고 푸에블로호는 우리의 전리품이므로 그놈들이 항복서를 낸다 해도 돌려주지 않겠다. 우리 인민군대가 나포한 미제 무장 간첩선을 먼 훗날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후대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미국 놈들에게서 빼앗은 간첩선이라고 말해주겠다. ] – 한호석 소장의 논설 중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그때 소련의 압력을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린 것입니다. 미국과 한판 붙겠다는 뜻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믿고 그러한 결정을 하였던 것일까요? 북한의 이러한 단호하면서도 공격적인 태도에 대해 미국은 혼란과 충격 그리고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공중정찰 강화, 해상 첩보활동 계속, 곡물수출 차단 등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여 "군사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으로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핵전쟁을 방불케 하는 미군의 무력을 한반도 동해에 집결하였습니다.

 

미국은 세 개의 항공모함을 북한 연안으로 출동 시켰고 전략폭격기를 서태평양에 배치하였습니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앞세운 미 해군 구축함과 전함 16척이 울릉도 남쪽 50마일 해상에 정박하였고 미 공군기 3백72대가 출격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표하여 공군 예비역 1만5천명에 게 긴급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 재래식 무장력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은 미국의 살벌한 핵전쟁 위협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주한미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미국은 뒤통수를 얻어맞아 소름이 끼칠만큼 놀랐습니다.

 

1968년 4월14일 밤 11시, 판문점 남쪽 대성동 입구에서 북한군 병사들은 주한미군과 남한군 병사들을 수송하던 미군 군용트럭을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기습 공격하여 미군 병사 두 사람을 죽이고, 다른 미군 병사 두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북한은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했을까요? 도대체 뭔 배짱일까요? 당시 대응을 두고 북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이것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광란적인 전쟁소동을 일으켰을 때 우리의 대답이었다. ] - 한호석 소장의 논설 중에서

 

1968년 12월 23일, 결국 이러한 북-미 핵전쟁 대치는 미국과 북한이 협상을 벌인 끝에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Gilbert H. Woodward)가 '미 합중국 정부를 대신하여' 북한의 요구와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포로가 되었던 승무원 82명과 시신 한 구를 판문점에서 넘겨받고 끝났습니다. 미군 포로가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북한의 요구사항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오늘도 푸에블로호는 북-미 대결의 상징물로 남아있습니다. 그 동안 원산 항에 있었던 푸에블로호는 1998년 12월초에 대동강으로 옮겨졌고, 북한은 1866년 9월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격침 당한 제너럴 셔먼호 격침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대동강 기슭, 바로 그 기념비 옆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공해상에 자국의 프에블로호를 마음대로 끌고 가면서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 동방에 작은 나라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을 선택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푸에블로호 사건은 2차세계대전에서 승전하여 의기양양한 했던 미국유대자본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프에블로호 사건을 느닷없이 제2차베트남전쟁을 설명하는 중에 도입한 이유는 이 사건이 국제정세의 큰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제2차베트남전쟁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프에블로호가 피랍되던 시점에 베트남에서는 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프에블로호 사건 후 정확히 1주일 만에,

 

1968년 1월30일, 베트남의 음력설(베트남에선 설을 테트-Tet라고 부름) 날, 북베트남은 테트공세(구정공세)를 단행합니다. 구정 연휴 기간 전후로 이 총공세를 개시하는 시점으로 결정되었는데, 설 전날인 1월29일, 베트남 전국은 고향집을 찾아가는 귀향행렬로 큰 혼잡을 이루었습니다. 이전에도 구정연휴 기간에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1968년 1월 29일 오후 6시부터 1월 31일 오전 6시까지, 36시간의 휴전을 선포합니다.

 

버스는 모처럼만에 고향을 찾아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들떠 있는 민간인들과 군인들을 가득 싣고 있었고, 이 버스들을 일일이 검문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 베트남군의 군복을 입은 게릴라 대원들은 미군 트럭까지 세워 타고 사이공 등 봉기를 일으킬 여러 도시들로 속속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각종 무기와 탄약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미는 농산물 수레 속이나 가짜 장례식을 만들어 관속에 넣는 방법으로 운반되었습니다.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 게릴라 7만 명이 각자의 작전 지역으로 은밀하게 이동합니다. 총 35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사이공시의 주요 공격 목표는 대통령 궁과 미국 대사관, 합동참모본부, 탄손누트 공항, 해군본부, 국영 방송국 등 6개소였습니다.

 

1월 30일 새벽 1시 30분, 새해를 축하하는 요란한 폭죽소리가 거리에 가득 찬 가운데 베트남 대통령궁이 30여명의 게릴라 대원들에게 습격 당합니다. 뒤를 이어 해군본부와 합참, 방송국에 대한 공격이 이어집니다. 미국 대사관이 공격 당한 시간은 새벽 2시47분 경 이었습니다. 소형 트럭과 택시에 나눠 탄 게릴라대원들이 대사관 담에 폭발물로 구멍을 뚫고 대사관 안으로 진입합니다. 이 게릴라들 중에는 대사관의 정원사나 운전기사로 일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사관 본관에 몇 발의 로켓탄이 명중하고, 건물을 수비하던 미군 헌병들과 게릴라들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총격전은 날이 밝으면서 미군의 증원군이 투입되어 게릴라대원들을 사살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에서 벌어진 6시간 남짓의 상황은 미국 대사관 정문에 걸려 있던 국가문장이 불에 탄 채 떨어진 장면 등을 포함하여 그대로 방송사의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깁니다.

 

다음날(1968년 1월31일), TV 뉴스를 시청하던 미국 시민들은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프에블로호 사건에 이어 베트남 사이공시의 미국 대사관 내에서 벌어지는 미군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과의 총격전이 생생히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대통령과 미국 정부 관리들의 말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TV속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불과 두 달 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존슨 대통령이 한 "전쟁은 이제 몇일 끌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공언이 무색해지고 있었습니다. TV를 본 미국 시민들의 가슴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베트남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미국에서 이 하나의 장면을 담은 방송으로 인하여 제2차베트남전쟁에 대한 회의론에 불을 붙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혼란과 공포에 빠져있는 베트남의 모습은 TV 전파를 타고 미국인들의 안방까지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미국 유대자본은 왜 충분히 통제 가능한 언론을 통제하지 않고 그대로 방송하도록 방치한 것일까요? 당시 미국유대자본은 제2차베트남전쟁을 끝내야 할 정도의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유대자본의 위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는 당시에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억제할 군사적 능력을 갖추면서 생겨난 돌발적 위기상황입니다. 북한은 무모하지 않습니다. 심심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무엇인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미국 함선을 선제공격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핵무기가 배비 되었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에블로호 사건 이전에 이미 북한은 미국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었고, 그 요구사항에 미국유대자본이 관심을 갖지 않자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북한의 요구사항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이미 그때 우리의 남북통일 문제가 협상테이블에 올려졌고, 또 필연적으로 제2차베트남전쟁 문제도 협상테이블에 올려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주한 미군철수 등의 내용이 논의 되었을 것으로 봐야 합니다.

 

1960년대 후반 즈음에, 유럽에 근무하는 북한 외교관은 여기저기 타국의 외교관 등을 만나면서 "뭐 핵무기 만드는데 그렇게 어렵지도 않더라"는 등의 말을 흘리고 다녔습니다. 미국의 관심은 왜 북한 외교관이 그러한 말을 흘리고 다니는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요주의 사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간접경로를 통해 북한의 요구사항들이 유대자본에게 접수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프에블로호는 뭔가를 탐지할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해에 나타난 것이고, 탐지할 대상은 핵무기와 관련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프에블로호 승무원의 해이한 경계상태로 보아 공해상이 틀림없고, 그러한 상황에서 북한군에게 체포될 것이라는 점을 승무원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습적으로 나타난 북한군에 강제로 끌려가는 미국 첩보함 프에블로호의 장면은 유대자본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였습니다. 유대자본이 머리가 돌아간다면 "북한에게는 뭔가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끔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니 당시 북한 동해 지역에서 나타나는 정황증거들은 확실히 핵무기가 있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프에블로호 사건은 유대자본으로 하여금 곧바로 북한 외교관이 흘리고 다녔던 말들이 생각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때문에 미국은 그러한 수모를 받으면서도 북한을 공격하지 못했으며, 베트남에서 철수를 고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북한의 직접적인 지원과 개입으로 게릴라전이 이루어지던 제2차베트남전쟁은 북한이 주도하는 이러한 전략전술의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북베트남은 프에블로호 사건 일주일 만에 테트공세(구정공세)를 단행한 것입니다. 미국유대자본은 즉각적으로 북한의 요구사항에 대한 수용적이고 호의적인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때문에 테트공세(구정공세)에서 대사관 기습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도록 방치하여 베트남 철수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그때 북-유대자본 협상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의 테트공세(구정공세) 기습은 사이공시뿐만 아니라 36개 지방 주요 도시와 100 여 곳의 촌락, 25개소의 주요 군사시설에도 동시에 가해졌습니다. 기습의 효과는 결코 무시하지 못했지만,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2~3일 내에 공격을 당한 대부분의 지역을 다시 장악합니다. 미안하지만 결과적으로 '2~3일간의 혼란' 쯤으로 치부하여도 무방합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의 테트공세(구정공세)는 군사적으로 보자면 실패한 공세였습니다.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했고, 작전에 투입되었던 병력의 절반이상(5만2천명)을 잃어야 했습니다. 특히 민족해방전선은 전투조직은 물론 핵심 지하조직까지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서 한동안은 조직자체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분명 북베트남으로서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명분을 얻었고, 치명적인 열세에 직면한 적을 몰아부쳐야 마땅한데도 그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군철수 여론을 조성하고 평화교섭문제를 꺼내고 있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테트공세(구정공세)로 생겨난 북베트남군의 어려운 상황은 큰 변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협상은 북한이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으로서는 북베트남이 열세에 처한 기회를 잡아 대규모 공세를 가한다고 해서 핵무기를 맞을 우려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공세는 핵무기를 맞을 가능성을 크게할 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작 전면적인 공세로 제압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는 곳은 북한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요구사항은 유대자본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랬다는 뜻입니다. 즉 당시에는 동방의 작은 나라가 요구하는 내용을 제2차세계대전의 승자인 미국유대자본이 순순이 수용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유대자본은 다시 한번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취해봅니다.

 

1968년 4월14일, 미해결 상태에 있는 프에블로호 사건에 미국은 한반도 동해에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앞세운 미 해군 구축함과 전함 16척, 공군기 3백72대가 출격태세를 갖추고 북한을 압박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공세에 전면전으로 대응해 오는 북한을 감당하기에는 두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북한에게는 뭔가 있는 것입니다. 핵무기 같은 종류 말입니다.

 

문제는 북한의 대응이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북한은 미국의 전면적 대결태세에 게의치 않고 오히려 들이쳐 내려올 태세입니다.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든지 전쟁을 해보시든지.. 미국유대자본은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반도는 전면전쟁 일보직전에 전쟁이 멈추어진 것입니다. 물론 미국유대자본이 북한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북-미 군사적 극한 대결 후 정확히 1달 만에,

 

1968년 5월13일, 2차베트남전쟁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미국은 베트남 17도 이남지역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북베트남과 대치 국면을 유지해 나가면서 평화교섭에 나선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베트남의 추종자들이 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북베트남의 구정공세(테트공세)는 실패한 군사작전이었고, 오히려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유리한 상태로 전황이 전변되고 말았지만 미국은 왜 평화교섭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북한 때문입니다. 미국유대자본은 핵무기가 터지는 사태에 대한 위협을 감당할 수 없었고, 또 베트남 전선과 한반도 전선에서 2개의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살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자본은 제2차베트남전쟁을 끝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북한은 그때에도 <2개의 전쟁전략>으로 유대자본을 몰아세웠습니다. 북한은 베트남의 평화협정과 한반도의 평화협정을 동시에 얻기 위하여 공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며 비밀협상에 나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련도 중국도 하지 못하는 일을 북한이 대담하고 공세적으로 미국유대자본을 몰아 세우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유대자본 킬러'였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유대자본(=제국주의)를 잡는데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러한 혈통은 대를 이어 오늘날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에게 가장 강력한 천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밀협상과 진척은 지지부진한 국면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한 북한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미국과 전면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1968년 4월14일로부터 정확히 1년이 경과한 시점에,

 

1969년 4월15일, 북한은 공해상을 날아가던 미군 정찰기를 일순간 격추해버렸습니다. 일본 아츠기(厚木)에 있는 해군 항공기지를 이륙한 미국의 전자정찰기 이씨(EC)-121에는 미 해군 장교와 병사 서른 명과 미 해병 한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정찰기는 동해 상공에서 북한 연안을 따라 비행하면서 공중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청진 동남방 바다 위를 비행하던 이 정찰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보고가 미 해군기지에 들어온 때는 오후 두 시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시간 55분이 지난 시각 평양방송은 대담하게도 전세계를 향해 북한군이 지대공 미사일로 이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정찰기는 물론,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서른 한 명은 시체도 찾지 못한 채 동해에 가라앉았습니다.

 

미국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프에블로호와 마찬가지로 공해상에서 운항하고 있던 자국의 정찰기가 피격 당했는데도 말입니다. 북한의 채찍입니다. "빨리 서둘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자본은 서두르는 액션을 취하지만 여전히 좀처럼 진척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북한은 또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미 해군 정찰기가 동해에서 격추된 때부터 넉 달이 지난 1969년 8월17일 한강 하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북한군이 미군 헬리콥터(OH-23)를 격추하였습니다.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 세 사람은 중상을 입고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1969년 12월3일,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북한은 한발짝 한발짝 추동합니다. 미국 말로 '스텝 바이 스텝 (Step-by-step)'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협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또다시 큰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1971년 어느 날, 미국은 지진계를 통해 북한의 어느 지역에서 강력한 폭발이 있었음을 감지합니다. 지진계 상에 나타나는 그래프는 진앙지 및 진원지 그리고 진도를 알려주는 것을 넘어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일반지진과 핵폭발은 특성이 서로 달라 지진계 그래프를 통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때 미국은 절망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핵폭발로 추정됩니다.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하는가? 비로서 북한과 유대자본 간의 비밀협상은 크게 진척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1972년 7월4일, 남과 북은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남-북 당국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사항을 발표하였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말 느닷없는 발표였습니다.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1)외세(外勢)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2)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3)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세를 절감하고 김일성 주석에게 비밀리에 귀의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제2차베트남전쟁에 대한 부분에서도 결정적인 진척이 발생합니다. 6개월 뒤,

 

1973년 1월27일, 파리에서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이 조인됩니다. 제2차베트남전쟁의 종결을 약속한 협정입니다. 공개된 협정내용은 "1954년 베트남에 대해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승인된 베트남의 독립, 주권, 통일성, 영토를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북베트남 측은 원형 테이블을 이용하자고 주장했고, 남베트남 측은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고집해서 수개월이 지연되었다"는 언론의 내용과 함께 오픈트랙입니다. 클로즈트랙은 따로 있지요. 베트남 주둔 미군은 곧바로 철수를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북한이 주도하는 5년여 협상 끝에 제2차베트남전쟁을 종식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협정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남베트남에 40억달러(20억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북베트남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습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켜 휴전선을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평화협정이 체결 2일만에,

 

1973년 1월29일,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선언하였습니다. 이어 미군은 3월29일에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당시 평화협정 조인에 대한 공적을 높이 사서 헨리 키신저 대통령 특별 보좌관과 북베트남의 레 드크 트 특사에게는 노벨평화상이 주어졌지만, 레 특사는 거부하였습니다. 미국 유대자본은 2개의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한에게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베트남에서 우선적으로 발을 빼고 주적(북한)에게 역량을 집결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1975년 4월30일, 그 해 초부터 남베트남에 대한 총 공세를 벌인 북베트남은 마침내 사이공을 함락하였습니다. 동 반 민(Dong Van Minh) 대통령은 항복했습니다. 베트남 통일이 달성된 것입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2년3개월 만에 이루어진 통일입니다. 지루하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해야 했던 1차, 2차 베트남 전쟁은 27년 만에 끝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북한의 은혜를 입은 첫 번째 국가가 바로 베트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베트남은 전쟁이 아닌 공작에 의해 다시 유대자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철수하는 미군을 바라보며 우려하는 남베트남 추종자들에게 "지금 철수하지만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 하겠다"고 굳게 약속하며 안심시켰습니다. 남베트남과 방위조약도 체결하였으며, 더불어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남베트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남베트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남베트남 추종자들을 북베트남 군대로부터 지킬 수 있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미국 유대자본은 북한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2개의 전쟁에서 벗어나야만 했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군사 역량을 한반도에 대처 능력으로 집중하기 위해서 파리평화협정은 맺어졌으므로 남베트남을 보호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파리평화협정 클로즈트랙 합의에 따라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접수하는데 협력하여야만 했던 지경이었습니다.

 

파리평화협정 이후 남베트남 패망까지 2년3개월간의 정황을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대사관 경제담당공사로 근무하던 A씨가 전하는 내용이 관심을 끕니다. 그는 남베트남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월맹군(북베트남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며 완곡히 거절했다. ]

 

북베트남군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한국 외교관 A씨가 알 정도였는데, 남베트남 대통령은 웃기만 했다는 내용입니다. 종속변수에 있던 남베트남 대통령은 A씨가 우려하는 내용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신이 간섭할 내용이 아니다"라는 것을 너털 웃음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A씨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1973년 초, 월맹군이 남진해오자,) 월남군(남베트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외교관이었던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실은,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

 

A씨는 이러한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 두끼 식사만 하고, 군화도 없이 타이어 끈으로 질질 끌고 다니는 거지 행색의 북베트남군에게 어찌 그리 허무하게 무너지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고 사이공에서 북베트남군에게 체포된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3월26일 다낭이 함락됐고,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 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

 

A씨는 '유령 군인'과 '꽃 군인'으로 불리우는 부유층의 해이한 안보의식에 그 원인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나리오에 따라 그렇게 흘러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도 그와 유사하게 문제 투성 입니다.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누구나 받을 것입니다. A씨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 - 전직 남베트남 외교 공사 이대용 / 2004년 4월 이전 작성글 / 전문:
http://cafe.naver.com/kocoree/14317

 

그는 어째서 거지 같은 북베트남군에게 그 강력하다던 남베트남군이 그렇게 쉽게 붕괴되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채 미국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경제담당공사의 직위로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그는 큰 강물이 어떻게 흐르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파리협화협정에서의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자본의 의무는 '작업(work)'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선반도(한반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자본의 의무는 '작업(work)'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지요?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지 못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베트남에서의 선례에서 보듯이 북한과 유대자본 간에는 항상 '투트랙'으로 운용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당시, 한반도에도 평화협정 문제가 대두 되었습니다.

 

1974년,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회의에서 북미 평화협정을 제안하였습니다. 물론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북-미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북한의 제의에 대해 미국의 대답은 당시에도 6자회담이었습니다.


1975년 9월22일, 제30차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 헨리 키신저는 주한유엔군의 장래와 휴전문제 재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회담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1단계는 북-미-중-남이 참여하는 4자회담, 2단계는 소련-일본이 추가로 참여한 가운데 회담을 확대하여 국제 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북-미 양자간 평화협정을 주장하면서 거부하였습니다. 한반도의 일이 완료되기까지 길어질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북한의 세계적 전략전술은 베트남 통일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것은 그때 멈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가설 <2개의 전쟁전략>에서 살펴보았듯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대를 이어 계속 되는 것이고, 그때에도 그랬듯이 지금까지 언제나 채찍과 당근으로 유대자본을 몰아세우는 형국입니다. 그 대결은 오랜 세월이 걸린 만큼 판은 커졌고, 세계적 대결이었던 것이 지금은 우주적 대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남베트남 권력은 미국유대자본의 종속변수였고, 오늘날 이곳에서의 권력도 같은 종속변수입니다. 남베트남의 모든 사람들과 베트남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칠 베트남 통일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듯이 이곳에서도 예측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는 퍼즐의 조각을 맞추어 원칙을 깨고 천기누설(天機漏洩)을 발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2차베트남전쟁 경우 1973년 1월27일, 평화협정이 맺어졌고, 1973년 1월29일, 닉슨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그 해 3월29일에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2년 3개월 간의 '작업(work)' 후, 결국 1975년 4월30일, 베트남 통일이 달성되었습니다. 긴 '작업(work)'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저의 가설 <2개의 전쟁전략>에 의하면 북-유대자본 비밀협상은 2009년 10월13일 베이징에서 북한 김양건 부장 일행과 미국 유대자본 헨리 키신저 일행 간에 양자회담(남북통일)과 6자회담(본토고토)에 대한 개괄적인 합의가 있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북-미 평화조약은 2009년 12월11일 북한이 원하는 대로 문안이 완성되었고, 2010년 2월10일 유엔이 서명함으로써 체결이 완료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결국 2010년 2월10일이 북-미 평화조약 체결일 입니다. 그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양자회담(남북통일)을 위한 '작업(work)'이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두고, 또 6자회담(본토고토)에 대한 이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저는 '정치.군사적 시나리오'와 '유희적 시나리오'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8월31일까지 양자회담(남북통일)이 완성된다고 단언하였고, 2012년까지(2011년말)까지 6자회담(미국본토 분할 및 고토회복 등의 세계질서 개편)이 완료될 것이라고 또 단언하였습니다.

 

양자회담(남북통일)만 두고 본다면 북-미 평화조약 체결일인 2010년 2월10일로부터 8월31일까지 6개월 남짓입니다. 2010년 8월31일까지 양자회담(남북통일)이 완성 된다던 저의 가설과 달리 다소 일정이 연기된 현재의 상황과 이유에 대해서는 종전선언과 동북3성 시찰 등의 내용과 함께 조만간 글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베트남에서의 투트랙 작업(work) 기간이 2년3개월 소요되었다면 조선반도에서는 투트랙 작업(work) 기간은 7개월 남짓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매우 빠릅니다.

 

저는 잘 두지는 못하지만 장기(將棋/將碁)를 좋아합니다. 장기는 각 16개씩 총 32개의 패(말)가 있는데, 1개의 왕(漢 혹은 楚), 2개의 사(士), 2개의 차(車), 2개의 포(砲), 2개의 마(馬), 2개의 상(象), 5개의 졸(卒 혹은 兵)이 있습니다.

 

유대자본은 세계적 대결의 장기판에서 이미 옛날에 끝난 게임을 오래 동안 잘 버텼습니다. 패를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어도 벌써 숙였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미국이 언제나 이길 것으로 여기던 카메라가 장기판을 비추이자 놀라운 화면이 나타납니다. 북한의 패는 조선전쟁에서 대차(代車=車의 상쇄)된 것을 제외한 모든 패를 그대로 갖고 있는데 비해 유대자본의 패는 달랑 왕(楚) 하나만 남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양수겸장이 아니라 '8수8장'이라는 점입니다. 달랑 홀로 궁의 가운데에 남은 유대자본의 왕(楚)은 마지막 수를 8방면으로 피할 수 있지만 모두 장(죽는 자리)입니다.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하나하나 적의 패(말)를 다 잡아먹어버린 이 우주적 판은 김정은 최고사령관 대리에 의해 마지막 남은 몇몇의 적의 패(말)을 제거하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2009년 3월~6월, 김정은 대리가 수를 세번 두자 '8수8장이' 되었고 게임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도록 되었습니다. 완전히 끝났습니다. 빠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황길경의 가설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0년 9월18일 16시55분 씀

 

| 조회수 1707 |
  | |
  • 2010/09/18 17:55

    2개의 분석글 중에 1개를 게시하였으니.. 이제 1개의 분석글과 1개의 성명이 남았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차를 타고 내려가야겠습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의 시골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여러분들과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

    만세~.... ^^*

분류 :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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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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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陽風

2010.09.23
23:42:34
(*.248.225.59)

"이 푸에블로호 사건은 2차세계대전에서 승전하여 의기양양한 했던 미국유대자본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이었습니다."

 

틀린 말입니다. 북한 군부또한 그들 손아귀에 있습니다. 김정일은 KGB에서 이승만은 CIA에서

키워준 인물들입니다. KGB는 유대인들로 득실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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