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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완의 세계窓] ‘조국 사태’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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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수수색과 수사기밀 유출, 언론들의 받아쓰기 등 판박이
검찰, 기소독점 빼앗으려는 조국 사퇴시키려는 의혹 일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사건들은 언제든 다시 재현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검증된 요리법을 적어놓은 요리책이 아니다. 역사는 격언이 아닌 비유를 통해 교훈을 준다. 역사는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만 어떤 상황이 비슷한지를 파악하는 것은 각 세대의 몫이다.”

키신저를 끌어들인 이유는 1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한 사건과 오늘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사태의 흐름이 비슷한 면이 많아 ‘우리 세대의 몫’, 즉 앞으로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사건은 ‘드레퓌스 사건’이고, 오늘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조국 사태’다.

1894년 9월 말,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부는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우편함에서 독일 무관에게 보내는 프랑스인의 편지 한 장을 입수했다. 편지에는 프랑스의 군사기밀이 담겨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스파이라고 여긴 군 수사기관은 유대인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유력할 용의자로 점찍었다. 12년 동안 이어진 ‘드레퓌스 사건’의 시작이었다.   

앞서 1871년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해 자존심이 상해 있던 프랑스인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누군가 조국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화풀이 차원에서 반유대주의 정서에 젖어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대인인 드레퓌스는 프랑스 군부가 전쟁 패배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택한 안성맞춤의 희생자였다.

군 수사기관은 편지에 쓰인 필체와 드레퓌스의 필체를 비교하기 위해 드레퓌스에게 독일 대사관에서 입수한 편지와 동일한 문서 한 장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문체는 달랐지만, 이를 받아든 군 수사기관은 사전에 기획한대로 동일한 필체라고 주장했다. 

이후 조작된 서류, 불충분한 증언과 증거 등을 통해 그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자택 수색에서도 아무 물증을 찾지 못했지만 서류를 감추거나 파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꿰맞췄다.

그 과정에서 보수단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에 귀를 기울이는 시민들도 점점 많아졌다. 

드레퓌스가 범인이 돼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았고, 군 수사기관은 그를 범인으로 묶기 위한 완벽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수신문에 사건의 전모를 밝힌 자료를 속속들이 제공했다. 

그러자 보수신문들은 그가 범죄자임을 자백했다며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시민들은 그를 처형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드레퓌스의 항변에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조국 사태’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그 흐름만큼은 판박이가 아닐 수 없다.

 확인되지 않은 불충분한 증거가 흘러나오고, 수사기관의 압수수색과 수사 기밀 유출이 이어지고, 언론들의 받아쓰기는 물론, 시민들의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100여 년 전 프로이센에 패한 데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엉뚱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든 프랑스 군부와 무소불의의 기소독점권을 빼앗으려는 조국이라는 인물을 낙마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오늘 우리의 검찰조직을 동일선상에 놓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드레퓌스 사건’은 어떻게 결말이 났을까. 모든 것이 조작된 채 진행된 재판에서 드레퓌스는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살뤼 제도로 이송돼 반역자로 남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새로 부임한 참모본부 정보부장에 의해 보강 수사가 진행되면서 다른 인물이 진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군 수사기관은 진범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무죄가 선고됐다. 보수신문들 또한 드레퓌스에게와는 달리 근거도 없이 진범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때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지식인인 에밀 졸라가 나섰다. 그는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쓰는 등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한 끝에 1906년 항소심에서 드레퓌스에게 무죄가 선고되도록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반역자를 돕는다는 시민들의 비난 속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채 발견됐다. 그를 죽인 인물은 잡히지 않았고,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고 간 사람들도 처벌받지 않았다. 군 수사기관이 조작에 개입했다는 사실도 인정되지 않았다. 

드레퓌스는 1935년 숨을 거뒀다. 그리고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발표 100주년을 맞은 1998년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와 졸라 가족에게 공식 사과 서한을 전달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데 100년이나 걸린 것이다.

과연 ‘조국 사태’는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장기적인 사태로 전개될까, 아니면 곧 수습이 될까. 조국은 낙마할까. 검찰은 기소독점권을 내려놓게 될까. 우리에게도 에밀 졸라와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잘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인사가 나타날까. 역사가 반복되더라도 결과를 예측하기는 역시 어렵다.

곽영완 국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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