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무묘앙 에오의 저서 <작은 붓다의 큰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이 내용들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전적으로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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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구엔 차원 이동-휴거 따위-은 없다◆



지구가 어떤 시점에 오면 당신도 주위 사람도 아무런 노력 없이 모두 나란히 높은 차원의 의식체로 변용하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소문을 좋은 꿈의 재료나 정신세계 축제의 미끼로 사용하기 전에 다시 잘 관찰해 보아야 한다.


또 어떤 종파의 집단만이 구제되거나 혹은 조직이 아니라도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 자가 구제되어 진화의 차원으로 자리 이동한다고 말하는 수법에도 주의해야 한다.




제일 먼저 관찰할 것은,그 같은 집단적인 변용은 몇만년 동안 이 지구에서 일어난 예가 없고 또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것이다.특히 지구인들의 정신구조에는 전혀 진화의 흔적이 없다.사회적인 질서가 수립되면서 야만적인 살인이 감소한 것은 단순히 법적 규제에 의한 것이지,인간성이 양호하게 진화된 결과는 아니다.총과 마약의 밀수가 늘어난 것만으로도 이미 사회적 치안은 흔들리고 있다.현실의 세계를 보면 살해되는 인간의 수가 병기의 근대화로 인해 옛날보다 더욱 증가했다.


평화라는 실로 통속적인 이슈는 제쳐두더라도 도대체 깨달음이라는 것이 집단적으로 실현된 흔적이 있는가를 관찰해보라.그런 일은 없었다.각자(覺者)가 존재한 것이 사실이지만,그 결과로서 단순한 신자와 종교는 생겨났으나,그렇다고 <각자(覺者)>가 양산된 흔적은 전혀 없다.그들은 단순히 신앙의 대상 즉,당신들이 열중하게 될 대상의 하나로 <정신적 취미>의 타깃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과학은 <무척 순조롭게> 진보하고 있다.그것도 매일매일 개선되고 편리해진다.처리 속도도 빨라지고 합리적으로 개선된다. 또,인간의 체력도 올림픽을 보거나 최근 스포츠 제품의 기술적 진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기록의 홍수다.화상(라즈니쉬)의 적절한 설명처럼,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그것은 사고(思考)라는 동일 평면상의 사건에 불과하다.즉,아인슈타인과 당신의 차이는 그저 <양적>인 차이뿐이다.




그러나 광명이나 깨달음은 양적인 차이가 아니다.그것은 우리들 사고 논리의 세계와 동일 평면상에서 나타나는 사건과는 다르다.광명학원을 만든다고 해서 결코 붓다가 양산(量産)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면 할수록 된다>와 같은 수리(數理)상의 단순한 법칙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이다.만약 그랬다면 몇 천명이나 되는 고행승들은 훨씬 이전에 깨달아 선사(禪寺)에는 각자(覺者)가 넘쳐났을 것이다.또  역으로,만약 무위(無爲)가 깨달음에 이르는 최단거리라면,거지나 양로원의 푸근한 사람들이나 정신병원 어딘가에서 광명을 얻은 사람도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깨달음의 상태는 인간의 유물론적인 계산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다.확실한 수행으로 명명된 아쉬람이 전세계에 무수히 있어도,졸업생을 배출하듯 매년 각자를 계속해 배출한 곳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또,만약 지식이 깨달음의 원천이라면 지식인이나 학자들은 벌써 깨달았을 터이고,고행이 원천이라면 고행자는 벌써 깨달았을 터이다.


도사의 죽음 가까이에 있을때 깨달음이 일어난다면,크리슈나무르티나 라즈니쉬의 제자들은 벌써 깨달았을 터이다.


지관타좌가 그것을 일으킨다면 선승은 벌써 깨달았을 터이고,


비파싸나가 깨달음을 일으킨다면 벌써 각자가 나왔을 것이다.


만약 그 같은 <확실한 도(道)>가 학교처럼 되어 있어,그곳에 입학하면 누구든지 즉,당신도 일정한 학습 과정을 채우고 깨달을 수 있다면... ,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오이즘은 행법을 시도하여 만들었지만 그것만으로 대오한 자는 없다.또 에오이즘 철학에 들어가는 문(門)을 통과할 수 있는 자질의 소유자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처럼 도사에 의존하거나,또는 도사가 이미 죽었다해도,그 집단에 속하면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당신의 속셈은 매일매일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서 배반당해 왔다.




이러한 이유로 결국 각자(覺者)는 지구의 <각 대륙에 몇 명> 정도만 출현했던 것이다.단,무엇인가를 남긴 자,무엇인가를 행한 자가 몇 명뿐이라는 것이지,실제로 깨달은 자야 그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다만,그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지 않았다.대부분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또 광명의 순간에 허용량을 넘어선 부담으로 인해 뇌사했을 수도 있다.또 외견상 눈에 띄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경우도 많다.이들은 실제로도 특별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유감스럽게도 당신은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당신은 단순히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환상을 가졌을 뿐이지,결코 당신은 그들을 만날 수도 또 그들을 찾아낼 안목도 없다.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그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화상(라즈니쉬)이 말했듯이 <그것>을 아는  것보다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훨씬 곤란한 작업이다.무수한 거짓말의 방편이 필요해진다.그것은 단순히 한 인간이 깨닫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어렵다.


따라서 이야기하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광명을 즐길뿐,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실제로는 그들의 방법이 훨씬 지혜롭고 평화적이면서 올바른 면도 있다.다만 유감이 있다면,그들이 당신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아무도 모른 채 죽어가는 일이다.그런 까닭으로 표면적으로 역사상으로나 항상 동시대를 풍미하며 무대에 오르는 각자(覺者)는 단 몇 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각자들이 무거운 입을 열기시작하면,당신들에게 백 보나 양보하는 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경지를 극단적으로 떨어뜨리 게 된다.그래야만 당신들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정확히 말하면 잘 오해할 수 있다.)그러나 그 때문에 광명도 또 그만큼 희미해진다.


당신들이 운 좋게 책방이나 길모퉁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각자들이란,어떤 형태로든 당신보다 <조금 앞선 위치>로 자신의 차원을 몇 만 피트나 의도적으로 떨어뜨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령,지구에 철저히 이름없는 각자들이 약간 명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 느낌조차 주위에 풍기지 않을 만큼 철저히 평준화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주위에 전혀 변화를 주지 않는다.


해탈할 때 혹은 해탈이 임박한 시기에 온 각자의 경우는,<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큰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어느날 돌연히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감추거나 혹은 침묵에 들어간다.


또,처음부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 자들은,그 모습이 더욱 희박해진다.(원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러한 현상으로 볼 때,깨달음과 광명은 당신의 떠들석한 축제나 형편없는 정신세계의 프로모우션에 의해서 감당할 수 없다.당신들은 그들을 <자기 현시욕>이나 <욕구 불만의 구실>로 삼아 떠들 수는 있어도 실제 깨달음의 의식이 히트곡처럼 대중적 붐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당신이 도사를 찾는 것도 결국은 헛된 일이다.당신 노력의 성과도 헛되고 지식을 채워 넣는 것도 헛되고,깨달음이란 이 같은 것일 거라는 환상을 쌓아 올린 것도 철저히 헛되고,태만에 지나지 않는 무위 또한 헛된 일이다.




그러므로 결코 <일반화되지 않은 이 길>을 만약 당신이 진정 원한다면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당신은 철저히 <혼자> 가야 한다.



깨달음에 있어서 유일하고도 확실한 법칙은 전혀 구제 받으려 하지 않는 고(苦)의 속박에 걸려 장기간에 걸쳐,당신이 고민하는 것이다.어느 누구도 그것을 도와주지 않는다.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미지(未知)인 의식의 알이 <부화>되기 위한 열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수행이나 도사란 단순히 그 절망점에까지 당신을 이끄는 도로 표지판에 불과하다.


무엇이든 수행을 할수록 고통이 늘어난다면 당신은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탐구가 당신에게 고통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비록 <평탄한>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래도 그것을 알 수 없다면,다가오지도 않은 차원 이동이나 지구의 의식이 변용되는 것을 노래로 불러 상업적 테라피나 명상회,혹은 도사를 흉내 내는 놀이라도 하고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