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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와 친일군인 백선엽
이승만의 감춰진 진실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1/06/19 [23:58]
1. ‘영웅’으로 부활하는 친일파 

최근 친일인물들에 대한 각종 미화사업이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나 방송사 등 공영 기관에서 거리낌 없이 이뤄지고 있다. 일본의 가미가제가 되라고 외친 서정주를 기리는 미당문학관이 설립되는 것을 비롯해 만주국 중위이자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근무한 경력의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근대화혁명가’니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워 국비지원을 받아 기념관을 세우고 있다. 또 간도조선인특설부대(간도특설대) 장교로 만주`중국의 독립군과 항일세력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김백일, 백선엽 등 악질적 형태의 친일파들마저  ‘6`25영웅’으로 부각하면서 기념 동상을 세우거나 심지어 공영방송을 통해 특집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할 예정이다. 

 불과 2년 전인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국회에 보고하고 대한민국 관보에 게시함으로서 일제에 협력한 악질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엄중히 물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행위의 죄질이 심각해 친일행위로 획득한 재산을 다시 환수해야 할 대상을 규정했고, 이에 따라 악질 친일파의 재산을 환수하고 있는 과정이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해 4천 3백여 명의 친일인물들을 등재한 바 있다. 이 결과 올해 18명의 친일인물들이 독립유공자 서훈이 공식 취소되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실패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마저 이승만대통령과 친일세력들의 협공에 의해 허무하게 중도 해체된 지 60년 만에 비로소 국가와 시민사회 양측에서 친일청산에 나서고 있다.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해 사욕을 채우며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가 이제야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곳곳에서 오히려 친일인물들을 미화하는 각종 기념사업이 각종 공공 세금이나 공공특혜를 받아 전개되고 있으니 대한민국은 아직도 조선총독부 아래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일제 강점기 중국 동북부(만주)와 화북 일대에서 간도특설대 장교로 일제의 주구노릇을 한 백선엽을 6`25전쟁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며 파주시가 동상 설립을 강행하고 공영방송인 KBS가 2부작 다큐멘터리마저 만들고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저지른 죄행에 대해 단 한 번의 공식 사죄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한 백선엽을 느닷없이 오성장군인 ‘원수’로 추대하려고 하고, 동상을 만들어 세우고, 다큐멘타리까지 제작하면서 억지로 영웅을 만드는 것이 과연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언론보도에 따르면 KBS의 백선엽 다큐멘터리는 6ㆍ25특집이란 명목으로 항일세력을 토벌한 간도특설대 경력과 활동은 몽땅 빼버리고 6·25전쟁 당시의 위대한 인격을 지닌 지휘관으로서 백선엽을 일방적으로 홍보하고 있다.1) 역사의 죄인을 역사의 영웅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 KBS는 친일군인 백섭엽을 영웅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이런 점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2.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와 백선엽 

백선엽(白善燁, 1920~ )의 만주국 장교 시절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2)  백선엽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1940년 3월 입학해서 1942년 12월에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     © 서울의소리
 
 
 
 
 
 
 
 
 
 
 
 
 
 
 
 
 
 
 
 
 
 

백선엽이 8기로 임관한 중앙육군훈련처 속칭 봉천군관학교는 1940년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만주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만주국 유일의 정규 장교양성학교였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은 과거 군벌의 특성이 남아서 개인적 이해와 인간관계에 의해 군 운영이 좌우되며 장교충원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폐단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는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 휘하 군대가 일정한 자율성을 가질 수 있으며, 관동군에 의한 만주국군의 지휘 통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자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동북지역의 군벌의 역사가 긴 만큼 장교들이 고령화했으며 이들은 일본식 군사시스템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때문에 만주국군을 직급과 직제에 따른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이러한 시스템에 적응하고 일본의 군사방침에 순응할 새로운 장교 육성이 필요했다.
 
더구나 새로 수립된 만주국을 위협하는 항일무장투쟁세력을 한시바삐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이 아니라 조직을 통한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의 확립과 장교진의 충원과 교체 그리고 시급한 치안과 국방경비 확보라는 요소가 맞물리면서 탄생한 장교양성학교가 1932년 11월 1일 만주국 군정부(軍政部) 직속으로 봉천에 설립된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였다. 중앙육군훈련처는 일종의 속성 종합군사교육기관으로서  1939년 3월 新京에서 陸軍軍官學校가 정식으로 개설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를 양성했다3) 둘 다 만주국을 조종하는 일본 관동군 손아귀에 있었으며 일본육사의 만주분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백선엽의 경우 만주군관학교 입교는 자발적 친일의 전형이다. 만주국 장교가 되려면 연령, 기혼여부, 까다로운 신원조회, 신체검사, 필기시험, 면접 등을 거쳐야 했다. 지원을 한다고 손아귀에 있었으며 일본육사의 만주분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입학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만주의 군관학교에 입교한 조선인들의 경우 대체로 일본의 중국침략(중일전쟁, 1937년 7월) 전후한 시기였다. 장교가 된다는 것은 직업군인이 되는 것이고, 전시에 직업군이 출세하는 것은 당연히 전공을 세우는 것이다. 백선엽이 봉천군관학교를 입교한 1939년에는 연변일대(북간도)를 중심으로 일본군`만주군이 이곳에 남은 최후의 조선인 항일유격부대를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전력을 집중하던 시기였다. 국내 최남선 등 유명 친일파 100여명 내외의 명의로 조선인항일유격대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격문을 수만 장이나 만들어 비행기로 공중에 살포할 정도였다. 

따라서 만주국에서 조선인 장교가 되면 이곳에서 조선인을 포함한 항일세력에 대한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항일세력, 독립운동세력을 공격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다시 말해 확신범적 성격의 친일행위인 것이다. 이들은 해방을 맞아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일본군의 하위 행동대로서 항일세력을 탄압하다가 패전을 맞이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물론 만주와 화북지역의 조선인 항일세력에게 이들은 적국장교였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만주국 소위로 임관된 조선인은 극소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또는 만주의 군관학교 출신 조선인 소위 임관자 수는 다음과 같다.5)

즉 일본육사(1910-1945년) 입학자는 87명으로 연평균 2.4명이었고, 그 가운데  임관자 63명 연평균 1.75명이었다. 그 가운데 5명만 망명해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 만주국 장교(1932-1945년, 봉천군교, 신경군교, 군수학교)  임관자는 67명으로 연평균 4.8명이었다. 이 가운데 1명만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어찌되건 한 해 8도에 한 명도 배출하기 어려운 것이 일본군 또는 만주군 장교였다.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려웠기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혈서를 써서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임관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열하지역에서 항일세력을 색출 ‘소탕’하는 임무에 종사했다.6) 

 3. 간도특설대와 백선엽 

백선엽은 임관 후 자무쓰(佳木斯) 부대에 잠시 근무하다가  간도특설대로 옮겨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 : 기관총·박격포중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일제 패망 직전 간도특설대 본부가 있는 명월구(明月溝)로 돌아갔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귀환했다.7) 

그가 근무한 간도특설대는 1930년대 후반 간도협조회, 신선대와 함께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 항일세력을 탄압한 삼대 악질조직 중의 하나이다.8) 간도협조회는 주로 전향한 항일세력들이 중심이 되었던 군 외곽 특수조직이었고, 신선대는 경찰 산하 특수조직이었던 반면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정규 특수부대로 당시 만주국 최강, 상승의 무적부대로 불렸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옌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송석하, 김찬규(김백일)이 부대 창설 핵심요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김백일은 간도특설대에 최후까지 근무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간도특설대 해산업무까지 종사한 인물이다.9) 

일제 당국이 조선인만으로 특수부대를 만든 것은 당시 (북)간도(동만주) 일대가 조선인항일유격부대의 최대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1932년 연길현 항일유격대대가 설립한 이래 1933년 3월에 화룡현 유격대대가 창설되는 등 1933년 초까지 북간도지역에서 항일유격근거지 도합 10개가 창설되었다. 조선인 항일유격대는 만주, 조만국경을 넘어 조선에까지 무장 출몰했고, 이에 맞서 일제는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동만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하여 전후 3차례 되는 대규모의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동만항일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거쳐 1935년 8월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발전해 일만 군경들과 교전했다.10)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노구교사건을 일으킨 후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침략에 나섰다. 이에 맞춰 일제는 대중전쟁(対中戦争)에 있어서 병참기지라 할 만주의 ‘치안’을 한시바삐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36년에 이미 『3년치안숙정계획������을 제정해 관동군, 만주군, 헌병, 특무, 경찰 등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동북지역의 모든 항일역량을 철저히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의 일부 병력(전원 조선인)이 1937년 6월 4일,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에 있는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일시 점령한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일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조선인 유격대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을 없애고, 조선인은 조선인으로 제압한다는 취지 아래 간도특설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간도성은 80%이상의 주민은 조선민족이고 그들은 본래부터 일본군은 물론 중국인으로 편성한 만주국군에 대하여서도 비협조의 태도를 취한다. 만약 일만군경(日満軍警)들이 출동하여 ‘토벌’을 하여도 비단 반만항일세력(反満抗日勢力)의 정보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격대방면에서는 늘 사전에 토벌대의 정보를 알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국군은 오히려 새로 조선인만으로 편성된 부대를 설립하여 정보수집임무를 맡게 하여야 한다”11) 

특설부대의 설립은 일제가 조선인 밀집지역인 간도지역을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다스린다”는 정책의 산물이었다. 그 목적은 백두산지구의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고 반만항일투쟁을 진압하여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특설부대는 1940년대에는 중국 열하,하북성 일대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항일투쟁을 진압하는데도 종사했다.  간도특설부대는 일본침략자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전문적으로 항일련군, 팔로군 그리고 재만 조선인의 반일운동을 탄압하는 가장 악질적인 조선인 친일군사조직이다.12)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매년 1기씩 7기까지 모집했는데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13)

간도특설대는 성립된 날로부터 해산될 때까지 일제 패망 때까지 일본군과 합동 또는 단독으로 간도(연변)지구, 열하성 지역, 허베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나 되는 토벌을 감행하였다. 매달 평균 한 번 이상 ‘토벌’에 나간 셈이다. 그들이 잔혹하게 살해한 항일전사와 무고한 민간인은 도합 172명에 달하며, 이것은 특설부대 인원 4사람당 한사람씩 살해한 것과 같다. 그들에 의해 체포된 자와, 강간, 약탈, 고문당한 자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14)

  국내에서는 간도특설대가 죄행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면을 빌어 중국공산당 당국이 간도특설대의 죄행에 대해 조사한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15)

1) 연변지구에서의 활동(1938. 09 ~ 1943. 09) 

이 시기 간도특설대의 주요 임무는 조직을 강화하고 작전능력을 배양하는 한편 주요 역량을 집중하여 장백산맥지구의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고 조선인, 중국인들의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안도현의 大沙河・北十騎河・迷魂陣・西北岔, 연길현의 二靑脊・天寶山・老頭溝, 왕청현의 天橋嶺, 화룡현 등에 병력을 집중하여 楊靖宇・金日成・崔賢 등이 지휘하는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토벌활동은 連에서 선발된 우수 대원 중심으로 조직된 便衣隊를 각 농촌에 침투, 항일연군의 행적과 민심을 정탐하고, 이를 토대로 일본수비대와 함께 항일연군의 숙영지를 습격하여 항일세력과 관련 민간인을 학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동안 10여 회의 토벌작전이 감행되었다.

2) 열하성 유수림자 지구에서의 활동(1944. 02 ~ 1944. 07) 

간도특설대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시기로 특설대 전병력을 집중하여 유사림자 주변 약 60리 이내의 각 촌락에 대하여 잔혹하게 소탕활동 전개하였다. 특히 정보반의 활동이 가장 극성을 부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 간도특설대의 공식적인 토벌활동만 28회에 달했고 22명이 살해되고 14명이 체포되었다. 특히 이 시기부터 정보반을 운영했는데,  정보반의 활동은 특설부대 부관처에서 전문적으로 정보를 관리하는 군(장교)관 한명이 지휘하였다. 정보반 각연에서 13명의 골간분자들을 뽑아 조직되였으며 또한 정보수집 편리를 위해 변절분자중 약간 명을 흡수하여 정보수집 활동을 진행하였다.

정보반의 임무는 주로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보 수집이었다. 그 주요한 임무는 팔로군 명칭, 번호, 지휘관 성명, 부대장비, 전투력, 활동지역, 활동규율, 민병정황, 군사사상 동태 등이다. 두 번째는 반공선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집결시켜 놓고 팔로군을 토비라고 무함하였다. 그리고 군중들더러 교통호를 파지 말며 민병조직에 가담하지 말고 팔로군에게 양곡을 주지 말라고 얼음장으로 놓기도 하였다. 특히 팔로군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고 팔로군의 물자를 발견하면 즉시 받치거나 보고하라고 위협하였다. 세 번째는 체포된 팔로군과 혁명군중을 직접 심문하고 우리의 군정인원과 군중을 체포, 살해하며 기타 정보활동을 한다. 그들이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주로 다음과 같다.
 
(1)특설부대 정보반 대원이 화장을 하고 마을에 들어가 직접 정보를 수집한다.
(2) 한 곳에 갈 때마다 당지의 경찰과 특무기관을 연계하여 팔로군과 민병의 활동 등 정보를 수집한다.
(3) 토벌 중 포로가 되었거나 부상을 입은 팔로군과 지하공작원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얼리는 수단으로 정보를 얻는다.
(4) 투항하거나 변절한 팔로군을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한다.
(5) 군중을 집결시켜 반공선전을 한 후 그 가운데 일부 청년들을 검거하여 체포해서는 위협하고 고문을 하는 등 수단으로 정보를 얻거나 그들을 이용하여 하부 정보망을 구축한다.
(6) 강제적으로 매 촌마다 정기적으로 서면상 혹은 구두상으로 정보를 제공하게 한다.16)

위와 같은 방법으로 팔로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 특설부대는 전체 대오 혹은 련(중대)을 단위로 유수림자 주위의 약 60리 이내의 각 촌락에 대하여 잔혹하게 소탕을 하였다.

간도특설대는 항일세력 탄압만으로도 마당히 역사의 준엄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각종 민간인 고문과 학살, 부녀자 강간, 방화와 약탈 등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집단이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겠다.

<사례 1> 1939년 5월, 경박호 남호두일대에 이르러 항일연군에 대한 일제의 토벌을 위해 열흘동안이나 이 지역에서 수사활동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특설부대 일부는 일본수비대와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 북부지역에서 항일부대를 수사하던 중 야채를 채집하던 여성을 총칼로 찌른후 불속에 집어넣어 태워죽였다.

<사례 2> 1939년 7월, 특설부대는 “천보산금광”이 항일연군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수비대와 연합하여 이틀 동안 항일연군을 추격하였는데 도중에 한 항일연군 전사의 시체를 발견하고 잔인무도한 특설부대는 그의 간을 오려냈다.

<사례 3> 1944년 4월, 특설부대는 40여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유수림자에서 약 50리 떨어 진 곳에서 팔로군공작인원을 습격하여 무선전대 공작인원 4명을 체포하고 무선전 하나를 약탈하고 팔로군 전사 한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특설부대는 또 이 마을의 牌長을 불러놓고 군칼로 찔러 죽였다. 특히 梅原이란 日本軍医는 이 패장의 머리를 베여 가져다가 가마에 넣어 끌인후 머리통을 자기의 사무실의 책상에 놓았다. 또 그해 5월, 특설부대는 유수림자에서 한 40여세 되는 사람을 잡아서 사격장에 끌고 가 산 사람을 목표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밤중에 謝家杖子부근의 부락에서 부녀들만 보면 강간하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하였다.19)

<사례 4> 1944년 10월, 특설부대는 정보반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라 석갑진에서 약 20리 떨어 진 부락을 덮쳤다. 이 마을에 팔로군식량과 복장이 매장되었다는 정보를 얻고, 특설부대는 이 마을에서 식량 40여 포대와 신발 40여 켤레, 그리고 소 3마리를 잡았다. 도중에 또 팔로군 한명을 칼로 살해하였다. 동년 음력 8월1일, 특설부대는 다시 석갑진에서 동쪽으로 약 60리 떨어 진 東庄禾村에서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감행하였다. 날이 밝자 이 마을의 사람들은 특설부대가 온 것을 발견하고 도망을 쳤는데 특설부대가 마구 총을 쏘아 민간인 한명이 총에 맞아 죽고 한 임신 부녀는 총에 다리가 맞고 수수밭까지 겨우 기어갔는데도 토벌대는 잔인무도하게 그녀의 배를 찔러 태아까지 흘러나오게 하였다.

<사례 5> 1944년 음력 7월 27일, 그들은 당지의 경찰들과 배합하여 黄各庄에 가서 식량을 빼앗았는데 21명 군중을 체포하고 농회주임을 살해하였다. 9월, 특설부대는 석갑진에서 약 30리 되는 곳에서 몽고기병과 함께 팔로군을 토벌하였다. 이 교전에서 특설부대는 참패하였다. 화가 치민 특설부대는 주둔지로 돌아오던 중 20여 호나 되는 무고한 백성들의 집을 태워버리고 두 명의 백성을 칼로 찔러 죽였으며 마을의 돼지 두 마리를 잡아 갔다.20) 

<사례 6> 1945년 3월, 唐山부근인 石守鎮에 주둔한 특설부대는 팔로군을 토벌하던 도중 팔로군 환자 6명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에게 매일 고문을 들이 대다가 나중에는 여의치 않게 되자 그들 모두 살해하였다. 같은 해 5월, 藤井대장의 지휘 하에 특설부대 각 련에서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수사를 하였는데 2명의 武工인원을 체포하였다. 그들은 팔로군과 교전하다가 죽은 자들을 위해 2명의 무공인원의 머리를 베여 제사를 지내였다.21) 

1943년 만주국은 간도특설대 175명의 대원에게 만주국 국무원명의로 된 武功章, 景勛章, 柱國章 등을 주었는데 1945년 3월 21일, 만주국 국무원에서 수여한 각종 훈장의 통계를 보면 그 가운데 조선인은 167명, 일본인은 8명이었다. 간도특설대는 부대가에서 나오듯이 시종일관 일본 천황을 위해 충성을 다했으며, 그 잔악한 행위는 지금도 연변 현지 주민들이 증언하고 있다. 아울러 일제는 간도특설대 운용을 통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 실시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간도특설부대가- 

한편 일제 당국은 실전 경험을 쌓은 간도특설부대의 하사관들 가운데 우수 분자를 육군훈련학교에 입교시켜 장교로 복무케 했다.(<표 3> 참조) 충성과 능력을 보인 이들이야말로 가장 “충성스런 천황의 개”들이었기 때문이다.

4. 왜 백선엽을 기념하는가 : 범죄의 재구성 

1948년 9월 출범한 반민특위는 해체될 때까지 약 1년간 682건을 조사하여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반민특위 소속의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것은 221건이며,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한 것은 28건에 지나지 않았다. 기소자들도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실제 처벌받은 자는 거의 없었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제1공화국은 오히려 친일파를 비호했고 친일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기득권을 장악했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안타까운 과거의 역사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친일파들은 친미와 반공 이데올로기 그리고 일제 군국주의의 파쇼적 사고방식을 새로운 생존의 무기로 삼고 지금껏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다. 

먼저 친일파들 중 상당수는 6·25 전쟁이 터지면서 친일문제가 흐지부지되자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해 자신의 친일행각을 덮으려 했다. 일부는 과거 자신이 독립운동을 했던 사실만 내세우고 친일파로 변절한 이후의 행적을 감춤으로써 독립투사로 행세해 오기도 했다. 지금도 국립묘지에는 일제 밀정이나 헌병보조원 등 삼십 여명 이상의 친일파가 독립투사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버젓이 안치되어 있다. 

이들은 분단과 좌우 대립을 이용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나 정통성을 반공에서 찾았다. 대한민국이 오랜 항일 투쟁과 반파시즘 투쟁의 역사 위에서 건설되었다고 할 경우 자신들의 친일 행적은 치명적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대한민국은 피로 물든 좌우투쟁 위에서 건설된 반공국가라는 점을 강조했고, 이 전제 위에서 이들의 ‘반공주의’는 곧 애국으로 치환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일제 시기 일제의 走狗로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것마저도 반공애국투쟁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강력한 반공국가가 존재하는 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 반공애국투사로서 그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다. 때문에 이들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이들은 반공을 대한민국 정체성으로 내세워 자신의 친일범죄를 반공으로 덮으려고 한다. 

한편 친일파 숙청이 실패한 덕으로 친일의 대가로 보존해온 자신의 기득권을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정계, 재계, 관료집단, 문화, 언론, 학술, 교육계 등에 실력자·원로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의 친위세력이나 방어조직을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금기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나  양심적 인물들은 대한민국에서 배제되었고, 한 사회의 존립기반이 될 최소한의 가치관과 역사의식마저 무너졌다. 정의는 칼을 쥔 자의 것이며 역사는 언제나 권력자의 편이라는 자조적인 역사인식마저 확산되었다. 더구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상당수는 이승만의 정적 또는 ‘용공’으로 몰려 수난을 당했고, 그 후손들 대부분은 극도의 어려운 생활은 해야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향신문사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후손의 학력과 경제 상태를 조사한 결과 설문 대상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60%가 고졸 이하의 학력에다 직업도 없이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22)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이어진 친일옹호 세력들은 각종 기념사업과 숭조사업을 전개하고,  친일파를 21세기 민족의 지도자상으로 치장해 후세들을 세뇌시키려 하고 있다. 그 핵심이 최근의 박정희기념관, 백선엽과 김백일 동상 건립, 백선엽 다큐멘터리 제작 등이다. 

심대한 친일행위자이자 살아있는 사람을 동상을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난 만주국 장교들은 전혀 과거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김석범의 경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들 만주군인 출신은 일제 압제 하에서 조국 땅을 떠나 유서 깊은 만주에서 독립 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혈맹의 동지들이다 우리는 타향인 만주에서 철석같은 정신과 신념 밑에서 철석같은 훈련을 거듭하여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건국 40유여년(有餘年)이 된 오늘날 50여명의 장성급과 다수의 영관급 고급장교가 배출되어 조국의 독립과 자유 수호에 공헌하였다.”23)

김석범을 비롯한 만주국군 출신자들은 해방 전 자신들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서 복무한 행위를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것으로 포장했다. 진실로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오만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1944년부터 복무했던 ‘영예로운’ 鐵石部隊의 이름이 떠올랐는지 ‘철석’이라는 낱말을 연거푸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자랑스럽게 만주국군 출신들이 대한민국에서 50여명에 달하는 장성급 군인이 되었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 수호에 공헌”했다고 내세운다.24)

그의 말처럼 만주국군 출신자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군대의 중추가 되었다.(<표 4> 참조) 군대뿐만 아니라 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 등을 지내면서 정치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휩쓸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권력과 군부를 장악하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독재와 반민주로 시름해야 했다.25)

백선엽은 1993년 일본에서 출간한 책에서 자신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중략)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26)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백선엽이 조선인특설부대원으로 한국인이 포함된 항일무장부대를 탄압했으며, 이것이 일제의 ‘이이제이’식 식민통치에 빠져든 것이었음을 인정했지만,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자조적인 언급에 그쳐 역사적 책임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27)

더구나 그는 올해 6월 6일 전ㆍ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한 보수 진영 인사들로 구성된 `선진통일연합'이 창립대회를 열자 여기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적화통일을 막았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20만 특공대가 우리를 넘보고 있는데 남남갈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선진통일연합은 한반도선진화재단 박세일 이사장이 주도고 보수층 인사 1만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세력 결집의 매개체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보수세력이 반공 등을 내세워 다시 한 번 권력을 창출하려는 데 그 상징으로 백선엽을 부각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는 급하게 추진하고 있는 대한민국기념관은 사실상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독재의 오욕의 라인을 대한민국의 정통성 또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로 치장하는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 1945년 8·15광복절 대신 1948년 8ㆍ15 ‘건국절’(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더욱 기념해야 한다고 떠든다. 즉 일제로부터 독립한 날을 얘기하면 일제시기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해방 후 3년간의 좌우투쟁을 거쳐 세워진 대한민국 건국절이 진정한 기념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 일제시기 친일행위를 해방 후 반공으로 덮어버리고자 한다. 이 대 반공투쟁은 건국투쟁으로 바뀌고 건국투쟁은 애국투쟁 곧 건국공로자로 둔갑하는 논리가 건국절에 숨어있다. 이들 말대로라면 해방 공간 우익폭력배도 건국공로자, 애국투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를 마구 휘젓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라고 부르고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이인수라는 양자가 느닷없이 4`19 희생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사죄’하는 기만극이 나오고, KBS는 815특집으로 이승만을 5부작으로 방영할 계획이다. 반공을 국시로 다시 만들어 친일논란을 없애기 위해 백선엽을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에 공영방송까지 나선 것이다. 박정희기념관도 하반기에 개관한다고 한다. 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하되 그 내용을 안보의식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으로 고치겠다고 한다.  안보는 사실 반공이며 자랑스러운 역사란 이승만-박정희 되살리기이다.
 
어린 세대에게 학교 교육을 통해 낡은 사고와 잘못된 가치관을 주입시켜 자신의 미래의 세력기반으로 삼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내년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역사의 죄인을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범죄의 재구성이 눈앞에서 이뤄지고 있다. 권력과 기득권 유지에 눈이 멀어 역사마저 제멋대로 고치고 역사의 죄인을 역사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이 범죄의 현장을 우리는 보고 있다. 범죄는 다시 단죄를 받을 것이다.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승만의 감춰진 진실

 

우리는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가 저지른 킬링필드를 기억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역사를 통해서 나라 밖 독재자들이 저지른 인권유린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승만이 이 땅에서 저지른 백만 학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교과서나 역사책 어느 한 곳에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기술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60여년전 삼천리 방방곡곡 골짜기 골짜기를 붉은 피로 물들게 한 Korea killing valley 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에서 있었습니다. 골로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끔찍한 신조어가 이때 생겨난 말입니다. 바로 이승만이 이념이란 이름으로 저지른 무법과 탈법의 백만 민간인 대학살입니다.

국제 전범 재판소에 회부되어 정죄 되어야 할 학살자 이승만이 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건국의 아버지로 되살아 나고 있습니다.

더욱 강경해진 수구 세력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광화문 네거리에 동상을 세우자고 합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승만의 국부화나 미화 작업은 이승만 독재와 학살을 희석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달콤한 기득권을 계속 확보해 나가려는 반인륜적, 반역사적, 반헌법적 술책입니다. 분위기가 이쯤되니  국민의 혈세로 운영하는 공영방송 KBS마저 이승만 미화 다큐를 제작하는 간 큰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망발이자 숭고한 4.19 정신을 훼손하는 심각한 도전 입니다.

우리 한국전쟁 유족들은 이승만에 의해 부모.형제만 잃은 게 아닙니다. 1981년 3월 25일 연좌제가 공식 폐지 될 때까지 30여년간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되어 철저한 감시하에 신원관리와 사상검증을 통하여 부관참시를 당하여 왔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은커녕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 찍혀 평생을 비국민으로 살아 야 했습니다. 우리 유족들은 이렇게 국가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없어도 될 사람으로 반벙어리, 앉은뱅이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60여년을 사는 동안 나도 잘못 걸려 들면 우리 아버지처럼 어디론가 끌려가 개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불안감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경제적 주체 마저 사라진 유족들은 공직이 금지되고 웬만한 기업의 취직조차 어려운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빈곤할 수 밖에 없었고 학교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난의 대물림이 계속 되면서 알코올중독, 정신분열, 자해의식, 피해망상, 무기력, 대인기피증 등 소위 트라우마 환자로 유족의 상당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재자, 학살자 이승만이 우리에게 안겨준 야만성입니다.

“과거를 기억 할 수 없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게 된다.”는 조지 산타니아의 말로 제 토론을 마칩니다.

한국전쟁유족회 총괄사업단장 정석희
기사입력: 2011/06/19 [23:58]  최종편집: ⓒ 서울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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