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한국어

한민족의 맥

우주는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 있는 삶에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빛의 지
구는 내면에 있는 다양한 차원
의 의식을 통합하여 평화와 조
화의 빛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
들의 교류 장소입니다.


신과나눈이야기한국모임
http://cafe.naver.com/cwgkorea


역 사


  
                                       한웅시대 북방민족의 삶의 터전(왕검 개국 이전)



                                           시베리아 강토


시베리아 전역이 마한의 강역이었다. 아니,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시베리아에서의 삶 전체가 곧 마한의 강역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강대한 마한은 그들이 갖고 있는 씨앗을 여러 민족에게 심어나갔다. 중화인들에게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집단이 모여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말을 타면서 싸움만 일삼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한인들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혼혈이 불가피하였다. 마한과 번한은 이같은 차이점이 있었다.


중화인들은 한인의 피를 갖기를 원하였지만 북방의 민족들은 피가 아니라 한인의 지식과 삶의 방법을 원했다. 그런데 원치 않은 혼혈이 이루어지자 그들은 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스키타이, 투르판, 그리고 타타르인들은 그들 사이에 순수혈통을 찾기가 어려워지자 한인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한인들은 안타까워하였다. 그들의 몸속에 영원히, 그리고 식지 않는 마음을 주기 위하여 맺었던 혼혈관계…… 그것은 무슨 뜻인가?
수많은 중화인들은 어느 날 마한의 우산 속에서 벗어나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 이동을 자처하였다. 도무지 마한의 광경(영역권) 속에서 마한의 힘 때문에 그들의 욕망을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북방의 수많은 민족들은 싸우고 싶었다. 시베리아는 엄청난 대륙 어디까지가 자신들의 땅인지도 모를 드넓은 대륙에서 그들은 점점 더 큰 땅과 더 큰 세력과 더 예쁜 여인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북부여와 북옥저인들은 이들이 욕망을 불러일으킬 적마다 달려가 그들의 욕망을 제지하였다.


북부여와 북옥저의 병사는 주먹구구식의 군대가 아니라 신식병사였다. 잘 조직된 양국의 병사로 하여금 북방의 민족을 정착하여 살아가게 했으나 이들은 떠나기를 원하여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여 갔다. 북방의 민족들은 대륙에 살았었으므로 말이 그들의 필수 교통수단이었고, 그것이 곧 힘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마한의 관경 속에서 살아갈 때에 그들은 반은 정착의 삶이요 반은 이동의 삶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이동을 원하고 정착을 싫어하였기에 어느 누구도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이가 없었다. 오직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이들의 역사였다. 중화의 민족이나 북방의 수많은 민족의 삶도 그 시작은 한웅 천황 이전부터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록이란 없었다. 모두가 씨족 삶 때부터 한인들의 영역 속에서 살아왔는데 한인들 또한 이들의 역사를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한인들은 변한 것이다.


한인시대를 거쳐 한웅시대를 지나 이제 선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제 그들은 한인의 힘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한인과의 삶은 그들을 언제나 욕구불만 속에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싸움을 하고 싶었다. 예쁜 여인을 보면 겁탈을 하고 싶었다. 남을 괴롭히면서 그 모습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욕구를 사전에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마한은 이제 그들을 더 이상 붙잡아둘 수 없었다. 그들이 이동을 하여도 마한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들을 마한의 관경 속에 잡아둔다는 것은 그들을 불행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떠나던 시기는 대부분 선군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였다. 이동해 가는 그들은 농사를 지어주고 식량을 얻으며 갔다. 어디까지 가는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하나의 이동민족일 따름이었다.
이들이 일시적인 정착을 하는 목적은 식량을 얻는 이외에 자손을 늘리는 것과 휴식을 얻는데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병사가 필요하였다. 젊은 남자와 무기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들이 자손을 번성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잦은 이동에 따른 변화 때문이었다.


이들의 이동경로는 지금의 유럽이었고, 유럽으로 가기까지는 너무나 장대한 거리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름진 옥토를 찾아간다는 부푼 꿈속에서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동민족들에게는 왕이 없었다. 추장이 있을 뿐이었다. 가장 명석한 두뇌와 힘으로 무장된 자가 추장이 되는 것이다. 추장의 명령에 의해서 어느 한 곳에 정착하게 될 경우, 길게는 수십 년에서 짧게는 몇 개월 정도가 된다.
이들이 수십 년 동안 정착을 하는 경우는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든 때이다. 새로운 환경에 접할 때마다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연 죽게 되었고, 전염병으로도 상당수 희생되곤 했다. 또한 이민족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 등 인구가 불어날 수 있는 요인이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동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섹스를 많이 하는 것이 이동민족의 삶 중의 하나였다. 달리는 말 위에서 말의 흔들림을 이용하여 섹스를 하는 것이 이동민족의 삶중의 하나였다. 이들로서는 자연 외부세력 때문에 언제나 긴장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착민에게 있어서는 이동민족이 외부세력이었지만, 이동민족에게 있어서는 정착민이 외부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착민처럼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또한 교육을 시킬 만한 선생들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따른 긴장과 호기심, 그리고 적응을 하기 위한 안간힘만도 이들에게는 벅찬 노릇이었다. 이동민족들에게는 남자의 할 일과 여자의 할 일이 정착민보다 훨씬 뚜렷이 구분이 되어졌다. 남자는 태어나자마자 공인된 용사였다. 민족을 수호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힘의 존재였다. 이로 인해 남자는 용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도 불사하며 민족을 지켜야 하는 것이 이들 용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여인들의 할 일이란 이동민족이건 정착민이건 크게 다를 바가 못 되었다. 이들에게는 특별히 남편과 아내의 존재가 없었다. 굳이 정해 놓음이 아닌 모두가 서로의 섹스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혼인이 없었던 것은 아내로 인하여, 혹은 남편으로 인하여 맛보는 슬픔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용사가 적병과 싸울 때에 아내로 인하여 용맹성이 반감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왕검시대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이동 시작



후세에 이동민족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만, 지금 마한의 관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스키타이, 키르키즈 그리고 투르판과 타타르인들의 상들은 유럽에 다다를 때까지 그와 같은 삶 속에서 이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드디어 지금의 유럽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정복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들의 용맹성은 실로 눈부신 것, 유럽의 아리안인들은 기마민족의 용맹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은 격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이동민족 중에서도 이들만의 순수혈통을 지닌 인간들이 소수 남아 있었다. 그들은 영원히 순수혈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이들은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순수혈통을 지닌 존재들은 여러 혼혈민족들로부터 분리되어졌다. 다른 민족과 분리된 이들은 외모가 아리안족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유럽에 정착하였다.


한인들의 피가 섞인 이동민족들은 모두 유럽의 전대륙을 벌집 쑤시듯 휘젓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리안인들의 저항 또한 매우 만만치않았다. 그리하여 끝없는 싸움이 이루어졌다. 바로 그와 같은 상태에서 순수인들은 정착하였고, 이제는 아리안인과 싸우는 자신들의 종족이자 혼혈인들의 싸움을 말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동민족 가운데 순수혈통인들이 서양의 땅 위에서 정착하게 된 일이었다. 아리안인들을 보호하며 말을 탄 저들 기마민족들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으니, 그들은 정당하게 유럽의 터전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매우 복잡한 역사 속에서 시베리아에서 이주해 간 순수혈통을 지닌 키르키즈와 투르크인들이 모여 앗시리아가 되었고 페르시아를 건설케 되었다. 유럽에서 물러난 가장 용맹스런 스키타이는 지금의 카스피해의 초원 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착이라 하여도 그 영역 속에서 이동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수많은 이동민족들의 몸속에는 한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남모를 갈등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애초에 지구성의 '한'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으로 끝나는 역사는 모두가 뜻 속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동양은 정신세계, 서양은 물질세계를 추구하도록 그렇게 뜻이 펼쳐졌다. 따라서 수많은 혼혈인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서양쪽에 머물기보다는 동양이 더 그리워졌다. 그들은 서시베리아를 무수히도 이동하였지만 얻을 것은 없었다. 수없는 세대가 지나는 동안 이동하는 삶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발전이란 것이 없었다.


이동민족은 크게 마차를 수단으로 남쪽 방향으로 이동을 하는 민족과 추운 지방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기마민족으로 구분되었다. 남방에서 활동하였던 민족으로는 타타르족과 흉노, 월지국 그 밖에 소수의 민족들이 상당수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북방으로 활동하였던 민족으로는 스키타이와 키르키즈, 투르판 그 밖에도 소수민족들이 많았다. 이 이동민족들 대부분은 선군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동을 시작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 천 수백 년 동안을 이동하면서 살던 이동민족들, 특히 북방대륙을 누비던 키르키즈인과 투르판인들은 이제 정착하고 싶었다. 한인들이 그리웠고, 더 이상 시베리아 저편에 있다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천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이동민족은 각기 자신의 자손들에게 한인들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해 내려갔다. 마침내 이들의 후손들은 동쪽의 한인사회를 꿈의 사회로 여기면서 다시 동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민족이 다시금 한인사회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마한의 관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옛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머물러야 할 곳은 바로 마한의 관경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북방 이민족의 이동



이들이 강성했던 시기, 특히 북방의 대륙에서 가장 용맹을 떨쳤던 스키타이족들이 강성했던 시기는 BC 10세기를 전후해서이다. 그들이 강성하였던 이유는 카스피해에 펼쳐진 스키타이 초원에서 오랫동안 정착하였고, 그 동안 많은 인구가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인구는 곧 힘이었다. 많은 용사가 태어났기에 그들은 강성할 수가 있었다. 이때에 그들의 활동무대는 카스피해로부터 시작하여 서시베리아 전역이었다. 그리고 투르판족은 스키타이족이 차지하고 있던 서시베리아의 동부를 차지하면서 스키타이와 수많은 접전을 벌이면서 살아갔다. 이들의 싸움은 참으로 용맹스러웠다.


스키타이인에게는 우르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아리안족의 피도 히브리인의 피도 섞여 있었다. 스키타이인들이 이집트사막에서 히브리인들을 돕지도 않고 부정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만이 느끼는 말할 수 없이 착잡한 심정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이 그 옛날 민족의 설움을 느끼고 있을 때 만약 스키타인인들이 달려갔었더라면 히브리인의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1)

#1) 히브리인을 <여와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훗날 밝힐 자가 나오겠지만 간단히 언급하면, 히브리인은 수메르인의 영역 속에서 지내다 선군 '한율'시대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인도에서 화란으로, 화란에서 '아브라함'때에 전생에 지은 '업'을 소멸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노예계급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굴레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훗날 '한인'들과 다시 만나 실상의 세계로 가기 위하여 함께 정진할 것이다.


투르크족 또한 일군국의 피와 선비족의 피가 섞여 있었다. 서남아시아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던 흉노, 그리고 타타르인들 모두가 선비, 비리, 구모액인들의 피가 혼혈된 인종들이었다. 그들 모두의 혼혈인종이 세월이 지나면서 또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 비리국과 구막한국인이 합치 되었고, 일부 혼혈인들이 함께 존재하였던 월지인들도 티벳의 서쪽 너머에서 일부가 흉노의 북방지역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북방의 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선군 마휴가 즉위 한 이후부터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이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하여 남방과 북방, 그리고 서방으로 모여들기 이전에는 마적들이 광활한 대지 위를 달리며 소수민족의 거주지를 습격하여 약탈을 하는 등 매우 어지러웠다. 그러나 드넓은 강역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에 티벳의 북부지역이었던 청구국에서는 '차탐'이란 수호군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조선에서도 없었던 것인데, 숙련된 검객이 1천에서 1천5백 명이 집단으로 움직이며 이른바 인간사회에서 독초 노릇을 하는 도적들, 그리고 마적, 산적들을 소탕하는 의로운 부대였다. 이들은 말을 타고 인간잡초를 제거하며 돌아다녔다. 이들은 믿음직스러웠고 매우 용맹스러웠다.


차탐은 북방의 인간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난 세월 동안 살았던 수많은 민족들이 들어온다면 청구의 차탐들이 해야 할 일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 대신 마한인들이 그 옛날처럼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오랜 방랑 끝에 돌아오는 투르판, 스키타이, 그리고 타타르인들, 그들은 어제의 종족이 아니었다.


이들은 조금도 순진하질 않았다. 포악스럽게 변해 있었고 사람을 죽이는 일도 예사로 하였다. 그 옛날 마한의 다스림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마한이 아닌 진한이 직접 뛰어들어야 할 판국이었다. 이 당시 조선의 관경에 있던 신통력을 지닌 자들이나 수리를 다루는 인물들은 이들이 시베리아와 서남아시아에서 언제쯤 몰려오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특히 선제는 영혼의 스승으로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진한의 선군 두밀로 하여금 나라를 잠시 청구땅으로 옮겨 북방의 세력을 평정케 하도록 만들었다.




  
선군 두밀 때



그리하여 진한이 본거지를 티벳의 북부 전역을 차지하는 청구의 후예들이 머문 서장으로 옮기니, 청구는 여기서 두패로 나뉘어졌다. 진한이 청구로 오는 것을 환영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진한이 청구로 옮기기 전 하나라가 멸망하고 상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 티벳의 북부를 차지하던 청구와 남부를 차지하던 중화의 세력은 몇 차례의 또 다른 충돌 끝에 청구에게 패하고 동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하여 부족의 형태로 살아가는 주나라의 터전 속으로 들어가 뒤섞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수가 동으로 이동하였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세력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진한의 본거지가 청구로 옮겨지자 이를 반대하는 청구인들은 남부로 이동을 했다. 그러고는 그곳에 살고 있는 나머지 중화민족을 남김없이 동쪽으로 내쫒아버렸다. 우르인들이 살던 그곳에 중화인이 주인이 되어 살았었는데 이제 그 터전이 다시 청구인들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북방의 세력들은 바야흐로 진한의 관경 속에 있게 되었다. 진한은 마한이 아니었다. 진한은 조선의 역사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나라였으니 곧 힘의 국가였고, 가장 애정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였다. 조선이 서장에 머문 것은 오로지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른 척 그대로 넘겼다가는 어느 날 북방의 세력 모두가 조선을 넘볼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변하였고 그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군의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 후 북방의 세력과 진한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장의 역사는 눈물의 역사이며 고통의 역사였다. 수많은 인명이 죽어갔다. 그와 같은 인륜사는 이 지구상에서는 물론 이 우주에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역사였다. 무엇 때문에 북방의 역사를 사라지게 하였는가? 그리고 왜 왜곡시켰는가? 우리 한민족의 터전 속에서 영혼의 스승을 사라지게 하였던 역사가 서장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으니 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 역사였던가? 바람이 알고 나무가 알고 또 대지가 알아도 인간은 그 아픈 역사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번한은 그들의 본래의 사명이었던 중화의 역사를 차질없이 진행시키고 있었다. 중화와 번한의 역사가 서로 다른 시각 속에서 각자 이루어지고, 그것이 세월 따라 통일되고, 그 속에서 중화와 한인이 통일되는 스토리의 역사였다. 그러나 하·은·주를 거치면서 춘추와 전국시대에서 흘려야 했던 그 엄청난 피의 대가, 무지스런 그 마음들…… 누가 그들을 영웅호걸이라 말하던가?


북방의 역사, 아니 서장의 역사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역사였다. 북방의 세력 전체를 진한 스스로가 뛰어들어 움직였다. 지혜가 없었다면 결코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춘추전국시대의 싸움과는 감히 비할 바가 못되는 것이다. 춘추전국의 싸움이 부족 규모라면 북방인들의 싸움은 국가간의 싸움이었다. 그 공격성과 용맹성에 있어서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땅속에 들어갔던 북방인들의 역사를 잠시나마 들추어내도록 하자. 그들은 실로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던 민족들이었다. 히브리인들처럼 노예로 보낸 적은 없었지만 1천 년이 넘도록 방랑생활을 해야 했던 존재들이었다.


그들 민족들을 어여삐 여겼던 인간이 있었던가? 이동민족을 어느 누가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여 주었던가? 정착민들에게 있어서는 이동민족들이 마치 도적의 집단처럼 인식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들을 도적의 집단이라 부를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악인은 없는 법, 그리고 선인도 없는 법, 모두가 같은 조건하에서 태어나며 성장해 간다. 이동민족들이 아무리 용맹스럽고 싸움도 잘하며 포악스러울지라 하여도 그들이 애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동민족들이 그렇게 변한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 때문에 자의건 타의건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북방세력을 나타낼 때에는 스키타이와 키르키즈, 그리고 투르판을 나타낸다. 타타르와 흉노, 얼마나 무자비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는 민족들이었던가? 그러나 마음,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저 지고한 존재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들 또한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동민족들이 기름진 옥토를 찾아 이동할 때에는 언제나 정착민과 전쟁을 해야 했다. 아니, 원치 않아도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하건 이동민족은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이미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전쟁 그 자체가 생활화되어 있었다.


특히 스키타이가 그러하였다. 가장 저돌적인 전쟁광들인 그들의 공격 앞에서는 오직 도망가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들 후예 중의 한 파를 코사크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미 이들 민족에게는 정착이란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러나 선군의 나라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분명 정착시켜야만 하였다. 그것도 옛 터전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머물렀던 곳에서 살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도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좋은 일이었고, 조선으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이동민족으로서 선군의 나라 관경으로 물밀 듯 들어와 살아간다면 역사는 분명 엉뚱하게 변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강압으로라도 이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분명 옳은 일이었다. 그래서 역사는 시작되었고 다시금 볼 수 없는 아득한 사백력의 역사가 선군의 이름으로 천 수백 년 만에 새롭게 제도되어졌다.



  
선군 사벌시대 조선국의 15만 제군들 툰황으로 집결




  
선군 사벌(BC892)시대 인구 현황



이미 용맹스럽고 저돌적인 인간으로 변해 버린 북방의 세력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조직력이 뛰어나고 가장 잘 훈련되어진 조선 9나라의 통합군이 필요하였다. 이때에 조직된 통합군을 '제군'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선군 오루문 시대였다.


드디어 전쟁이 반발했다. 가장 먼저 동족이라 말할 수 있는 스키타이와 키르키즈가 분쟁에 분쟁을 거듭한 끝에 전면전을 펼치게 되었다. 바이칼을 기점으로 하여 좌국과 우국으로 나누어진 스키타이는 키르키즈에게 무참한 공격을 가했다. 대단한 유혈극이었고 무지스런 싸움이었다. 스키타이를 북으로 한 키르키즈가 남쪽에 있는 선비국에게 도움을 청하자 선비국에서는 기꺼이 응해 주었다. 불리했던 키르키즈인들이 선비국의 도움으로 사태가 유리해지자 스키타이가 물러갔다.


그 후 스키타이는 북쪽의 선비국에게 도움을 청하나 선비국이 이를 거절했다. 거절하는 북선비국에 감정을 가진 스키타이는 어느 날 북선비국을 공겨했다. 이에 북선비는 남선비에게 도움을 청하니, 남선비국에서는 키르키즈와 합동으로 스키타이를 공격했다. 이에 스키타이는 흉노족에게, 그리고 투르판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 스키타이와 키르키즈의 싸움이 불씨가 되어 중화대륙은 차츰 전면전으로 확대되어가기 시작했다.


양 선비국에서는 온당치 못한 스키타이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월지국에 도움을 청하니, 월지국 또한 이에 동조할 것을 선언했다. 이것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대전쟁의 양상으로 변해 가는 것이었다.
이에 선군 사벌은 대장 '언파불합'에게 150만의 제군을 내려 이를 평정케 하였다. 제군들은 지금의 말로 말하자면 특공대였다. 9나라에서 차출된 가장 뛰어난 강군이었고 젊은 용사들이었다. 언파불합 역시 진조선의 일선에서 움직였던 최고의 대장이었기에 싸움과 전투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함을 갖춘 인간이었다. 북방세력간의 싸움을 평정키 위하여 출전한 제군들의 목적은 싸움이 아닌 진압이었다. 그러나 제군은 평범한 부대가 아니었다. 강인한 부대였고 무적의 역사들이었고 특공대들이었다. 진한이든 마한이든 평범한 부대가 들어가 진압하였더라면 희생은 따랐겠지만 싸움을 중단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제군이라는 어마어마한 병사를 투입하였다.


스키타이, 키르키즈 그리고 투르판인, 타타르인, 월지인들이 대륙을 이동하면서 몸에 배어버린 그 용맹성이 아무리 뛰어나고 싸움을 잘한다 하여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주먹구구식의 병사들일 따름이었다. 이때에 스키타이의 인구는 420만, 키르키즈 300만, 투르판600만, 타타르가 900만, 북흉노 290만, 북선비 150만, 남선비 180만, 월지 550만, 청구 400만이었다. 그리고 부여국이 3,800만이었다. 북부여가 1,500만이며 북옥저가 1,900만이었다.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진 숙신국은 모두 합하여 4,000만이 조금 넘는 수였다. 진조선이 있던 서옥저가 2,000만이 넘었고, 낙랑에 1,300만이 살았었다. 남국과 구려국이 모두 합하여 3,000만이 조금 넘었다. 그리고 중원대륙의 청구인과 중원인 모두 합하여 4,000만에 이르렀으니 숙신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미 그것은 진압군이 아니었다. 강군이라 함은 그만큼 훈련이 잘돼 있는 병사를 뜻함이요, 잘 훈련된 병사라 함은 그만큼 잔인성도 내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숙신병들의 양궁술, 옥저병들의 검술, 독로의 후예인 북옥저 병사의 격투술과 북부여 병사들의 투창술, 남국과 구려병의 병법속에서 북방의 세력들은 엄청난 죽음을 당했다.


그것이 어찌 진압이란 말인가? 강군 150만이라면 주나라를 위시한 중원의 세력 전체를 단시일 내에 섬멸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각 나라들이 내노라하는 특수부대들을 내새운 것이 아닌가, 중원뿐 아니라 북방의 세력 전체와 싸운다 하여도 결코 두려울 게 없는 부대였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왜 선군 사벌은 진압의 목적으로 강군 150만의 병력을 보냈을까? 눈물이 많은 나라로 알려진, 그래서 정이 많은 나라로 여겨진 낭랑국(낙랑국)의 병사를 보내어 평정케 했더라면 희생은 컸으나 애정 속에서 서로가 화해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선군 사벌은 결코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150만의 병력을 조직케 한 것은 단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지 어느 나라를 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을 잠자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방의 세력들간에 전쟁이 치열해지자 대장 언파불합은 선군의 명을 받고 바이칼호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싸우는 모습을 주시하며 그 상황을 서한으로 선군 사벌에게 보내니, 선군은 15만의 병력으로 진압할 것을 대장에게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부족한 병력이었다. 그들을 진압하기에는 어려운 숫자였다. 잘못하다가는 공격당하기에 좋은 숫자였다. 선군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군들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부족함을 택하여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나라를 망치는 무리는 반드시 밖에만 있지는 않다.
아니, 바로 안에 있는 무리들이 더욱 나라를 망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밖에 보이는 적은 분명 적이지만 친구도 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안에 있는 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리였다. 나라를 썩게 만드는 무리가 어느 때부터인가 선군의 신하들 중에서도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썩은 무리들에 의해 선군의 친필서한이 언파불합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수정되었다.


15만이 아니라 150만으로 둔갑되어 싸움을 피하고 평정하라는 내용이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진압하라는 내용으로 바뀌어졌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언파불합은 150만의 제군을 이끌고 지금의 툰황에서 바이칼호로 전쟁의 목적을 띤 진압작전을 하기 위하여 기세도 당당하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그것은 분명 학살이었다. 부여가 자랑하는 청동으로 된 4두마차라는 전차의 말발굽 아래서 무수히 많은 인명이 죽어갔다. 어느 나라의 편도 들지 않은 완전한 제군의 입장에서는 마치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낙엽을 쓸어버리듯 그렇게 쓸어버렸다.


하늘 아래 어찌 이같은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가장 신뢰하는 조선국이, 그것도 진한이! 북방의 세력 전부가 합친다 하여도 제군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이 제군은 강군 중의 강군이었다. 온 대지가 피로 물들었다.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었다. 제군의 진압과정에서 북방세력들의 병사와 양민까지 합하여 800만이라는 인명이 죽어갔다. 씻을 수 없는 비극이었다.

언파불합은 그 직후 서한이 잘못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숨을 끓어버렸다.


그러나 진조선의 위치가 하늘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설명으로도 납득되어질 수 없는 제군들의 행위, 썩은 무리들의 붓장난으로 인하여 800만이라는 인명이 죽어갔고, 역사는 이렇게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중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세력은 스키타이였다. 다음으로 투르판과 키르키즈였다. 이들은 분함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 분노를 식히기 위하여 다시 이동민족이 되어야 했다. 이때에 스키타이는 소수만이 남은 채 대다수가 지금의 동유럽까지 진출하였고, 투르크는 서북의 시베리아로 진출을 했다. 키르키즈는 둘로 분열되어 한쪽은 선비산에 머물고 다른 한쪽은 티벳 서북으로 이동을 했다. 이곳에서 다시 두 패로 분열되니, 그 하나가 지금의 카스피해로 이동하여 정착을 했다.


흉노국도 이동이 있었다. 일부의 흉노인은 티벳을 지나 동남아시아로 이동하였고, 또 일부는 카스피해 너머로 이동을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타타르인들도 선비인들도 월지인들도 가능하면 진한과 멀리 떨어지기 위하여 조금씩 모두가 이동하였다. 한마디로 북방의 나라 모두가 풍비박산이었다. 진한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그들 입장에서 볼 때에 참을수 없는 뼈아픈 일이었다.


스키타이와 투르크, 키르키즈인들은 분노를 식히기 위하여 서남아시아와 동유럽으로 진출하여 울분을 터뜨렸다. 이들은 이유없는 침략을 감행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이들이 침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무렵, 아직도 남아 있던 세력들 모두는 진한을, 아니 조선을 때려잡기 위하여 다시 이동민족이 되어야 했다.
이때에 스키타이는 소수만이 남은 채 대다수가 지금의 동유럽까지 진출하였고, 투르크는 서북의 시베리아로 진출을 했다. 키르키즈는 둘로 분열되어 한쪽은 선비산에 머물고 다른 한쪽은 티벳 서북으로 이동을 했다. 이곳에서 다시 두 패로 분열되니, 그 하나가 지금의 카스피해로 이동하여 정착을 했다.


흉노국도 이동이 있었다. 흉노인은 티벳을 지나 동남아시아로 이동하였고, 또 일부는 카스피해 너머로 이동을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타타르인들도 선비인들도 월지인들도 가능하면 진한과 멀리 떨어지기 위하여 조금씩 모두가 이동하였다. 한마디로 북방의 나라 모두가 풍비박산이었다. 진한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그들 입장에서 볼 때에 참을 수 없는 뼈아픈 일이었다.

스키타이와 투르크, 키르키즈인들은 분노를 식히기 위하여 서남아시아와 동유럽으로 진출하여 울분을 터뜨렸다. 이들은 이유없는 침략을 감행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이들이 침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무렵, 아직도 남아 있던 세력들 모두는 진한을, 아니 조선을 때려잡기 위하여 규합하기 시작했다. 월지, 선비, 타타르, 북흉노와 남흉노, 스키타이, 키르키즈, 투르판 등 8개 나라가 일시적인 통합을 꾀하여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군대를 '타라마'라 불렀다. 타라마란 '승리로써 조선을 이긴다'는 뜻이었다. 타라마는 무려 450만의 대군이었다.
비록 오합지졸이었지만 이들의 조선을 붕괴시키겠다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마침내 이들이 스키타이의 오른쪽 지역에서 조선을 치기위해 선비인들에게 훈련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선군 매륵은 제군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이에 '협노'라는 장수와 '배반명'이라는 병법의 대가가 또다시 150만의 제군을 이끌고 들어가 이들을 항복시켜버렸다. 그러나 살생은 최대한으로 피하였다. 반면에 무기를 모두 빼앗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쇠물그릇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고는 선군의 명에 따라 수많은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곡식을 준다 하여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들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한인들 모두에게 선군의 신뢰가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인들끼리의 싸움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북방의 세력으로 인하여 선군의 힘이 북으로 치우치기 시작하자 이제 중원의 역사가 변하기 시작했다. 번한의 역사는 이제 조선의 관경에 있는 역사라고 부를 수만은 없었다. 독자노선으로 움직이는 번한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번한은 중화인과 함께 중화의 대륙에서 중화의 나라가 되어야만 하였다.


중화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인들은 중화인을 동화(同和)라고 불렀다. 한인에게 동화되어 함께 중화가 되어 후세에 저 고요한 명상의 바다를 이루는 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선군 마물에 이르러 북방의 세력이 거세어질수록 중화의 역사도 거세어져만 갔다.
하·은·주를 거쳐 춘추시대가 이어졌다.

선군 마물은 중화의 춘추시대를 막기 위하여 남국에 갔다가 중화인들의 기습을 받아 아깝게도 죽음을 당하였다. 강을 건너기 위하여 배에 올랐을 때 갑자기 나타난 복병들이 불화살을 쏜 것이다. 배는 불타고…… 선군은 그렇게 죽었다. 불행한 역사의 예고가 분명했다.
그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 너무나 어지러운 싸움이 대륙의 북방과 남방에서 끝없이 전개되었다. 선군 마물의 뒤를 이어 다물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물이 즉위하자 타라마가 아닌 양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선군의 나라 서장으로 진격해 왔다. 양민들이 쳐들어오는 데 어찌 이에 맞서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과거에 피를 흘리게 한 사건에 대하여 당시에는 못 했어도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공식적인 사과를 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그러지 않았다. 북방세력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놓고 일언지하 한마디 말도 없었다. 800만의 인명을 학살한 후에 곡식과 의복을 주기는 하였으나 진심어린 사과와 해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조선국의 민간인들이 깊은 상처로 시달리는 북방으로 달려가 봉사활동을 펴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제군들에게 희생당한 유족들을 돌보며 그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한인들은 이렇게 어진 민족이었다.

그러나 왜, 왜 8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명을 죽이고도 진한은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해명을 못 하였던가? 한인들 사회에서 조차 선군을 향하여, 진한을 향하여, 제군을 향하여 비난의 소리가 드높게 울렸다. 그들에게 아무리 두터운 의복과 많은 곡식을 준들 무엇하겠는가?


그들에게도 자존심과 명예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800만의 인명 희생에 대한 쓰라림을 달래고 그들의 자존심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는 선군이 직접 나서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줌과 동시에 공식적인 해명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 그 무엇인가 베풀어주는 일을 했더라면 그들의 상처는 흉터는 남을지언정 뼈아픈 마음의 고통은 없었으리라. 북방의 세력이 모이던 이 시대까지만 하여도 선군의 위치는 그만큼 높은 존재였다. 까마득히 높은 인물이라 여기고 있었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했었다.

그래서 선군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중원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군이 그러한 지고의 위치에서 그들에게 한마디의 위로라도 했더라면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다…….


다물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북방의 세력과 진한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크고 작은 전쟁을 포함하여 선군 다물의 일생 동안 55차례나 전쟁이 치러졌다. 이 얼마나 우리 모두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일까? 다물은 타타르족의 궁수병들이 쏜 화살 수십 두를 몸에 맞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 뒤를 이어 두홀이 즉위하였다. 두홀은 천재였다. 제군을 재편성하여 3군으로 나누고, 1군은 자신이 직접 이끌고 2군과 3군을 좌우편에 세우고는 지금의 툰황으로부터 시작하여 북방의 세력 전부를 중앙시베리아 대륙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중앙시베리아 대륙은 선군시대가 시작되면서 투르판인들이 이동하여 살고 있었다. 북방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모두 이곳으로 쫓겨났다.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구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강제로 민족이동을 해야만 했다.


타라마 대군은 또다시 제군들에게 굴복당하고 무기를 빼았기고 양민과 함께 지금의 예니세이강으로 울며울며 이렇게 쫓겨갔다



  
선군 두홀 때






예니세이강은 애수의 강이다. 그때에 그들은 제군에게 내쫓겨 시베리아의 추위 속에서 저 북쪽 너머 흐르는 애수의 강을 바라보면서 서럽게 울었다. 이제 이들은 선군을 믿지 않았고 조선을 실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수의 강을 바라보면서 슬픔과 분노 속에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소도(蘇塗)마저도 이들이 머물고 있는 애수의 강으로 가질 않았다. 그것이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조선 전체, 그리고 선군의 곁에서도 소도가 사라져버렸다. 소도가 이끌아가는 길이란 지극한 길이었지만, 소도가 사라져버린 상태는 그저 막막함뿐었다.


소도란 한웅시대부터 이루어진 정신적인 세계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소도의 세계였다.
한인들에게는 한웅시대 때부터 삶의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정신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인간과 육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나뉜다. 대다수가 육체적인 삶을 이루고 살아가지만 소수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었다. 정신적인 삶이란 그 추구목표가 당연히 깨우침에 있었다. 소도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이 장에서 말할 수는 없다. 소도에서 당연히 영혼의 스승이 존재하며, 그 곁에는 스승을 따르며 깨우침의 세계로 다가서는 수행의 인물들이었다. 여기서의 영혼의 스승을 우리는 '선제'라고 불렀다.


한웅시대에는 영혼의 스승이 물질세계까지 정치했었다. 어느 선군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이때에도 소도에는 또 다른 영혼의 스승이 존재하였다. 다만 어느 선군부터가 영혼의 스승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도에서 선제에 의해 깨우침을 받은 제자는 선군의 곁에 머물며 선군의 정치를 돕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제 곁에서 깨우침을 받고 인가가 난 제자는 조선 관경의 어느 곳이든 영혼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곳에는 그들의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스승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은 어느 곳을 가든 수행자라기 보다는 세속에서 세속인과 함께 언제나 움직였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언제나 깨우친 자가 있었고 어느 누구라도 깨우친 자의 가피 속에 살아갔다. 부락, 그리고 부족, 나라 모두가 깨우친 자를 따르는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영혼들, 그러나 깨우친 자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존재이다. 우리 영혼이 깨우친 자와 함께 산다는 것, 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멋진 일인가? 그래서였을까, 한인들의 마음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풍요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부락마다 깨우친 존재가 있었으니 그 곁에 따르는 제자가 있었고,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때였다.


소도란 거기에 있다. 그곳에 바로 영혼의 스승이 머물고 있다.
영혼의 스승은 자재신이었다. 선제는 언제나 침묵 속에 있었지만 선군 모두를 제도하고 있었다. 선제는 조선의 한인은 물론 인간 모두의 정신적 영혼의 스승이었기에 선군이라는 공간의 황제라 하여도 선제의 감화 속에 살게 되었다. 선군은 죄인을 용서할 때나 부득이 침략을 행할 때에 말하기를 '선제의 이름으로'라는 말과 함께 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자재신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소도의 관경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자재신自在神이란 상징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자재신이 육체를 지니고 있을 때 그 후광을 곧 소도의 관경이라 말할 수 있는데, 자재신은 남김없이 사라져 진공이 된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블랙홀의 모습과도 흡사한 것이다. 블랙홀의 힘이 미치는 곳에는 공간도 사라지고 시간마저도 사라졌다. 자재신의 곁에서는 우리의 업장마저 녹아들어가는 것이다. 자재신은 육체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의 작용이 이루어지나, 그것은 이 우주 전체를 놓고 볼 때에 그런 것이다. 육체를 지니고 있는 동안 육체라는 세포를 통하여 나타내는 불멸의 자비의 기운이 후광으로 나타나는 그 거리를 곧 소도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재신의 후광은 육체인간의 업장을 직접적으로 녹이기 시작하는 거리인 지름 50킬로미터의 둘레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인 거리요 자재신에 대한 믿음이 내재된 거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소도#1)란 자재신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1) 현세의 법당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 자재신이 사라지던 날 소도는 말뿐이었고 깨우친 자는 그 수가 줄어만
갔다. 따라서 소도의 맥이 사라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3천 년#2) 전이었으니 그때부터 한인
의 역사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앞으로 3천 년 대운(大運)이 한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소도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했었다. 이제 옛 기억을 더듬기만 한다면 그대 앞에 옛 소도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우울한 그대에게 기쁨을 줄 것이고 소경에게 빛을 줄 것이다.

선군 두홀도 바이칼호에서 피습을 당하여 죽음을 당했다. 그 뒤를 달음이 이었지만 그로부터 다시 뒤로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애수의 강에서 보내고 있음을 안 스키타이와 키르키즈, 그리고 투르판인들은 선조들이 당했던 한을 갚기 위하여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서운 싸움이 전개되었다. 그 사이에 애수의 강에서 머물렀던 민족들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이칼호을 중심으로 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목표는 한인 전체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조선을 섬멸키 위하여 연합국이 되었고 연합군이 되어 있었다.


선군 달음 역시 고비사막의 싸움에서 모래바람을 등지고 달려오는 저돌적인 스키타이 병사의 창에 맞아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음차(금차)가 즉위하였고,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싸운다는 목표였고 진한은 싸움을 중지하기 위하여 끝없이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듣지 않았다. 오직 공격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 하여도 연합군 두셋을 죽일 때 제군들도 하나씩 죽었다.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양측 모두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슬픔과 쓰라린 참상을 겪으면서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전쟁은 어느 누구도 중지시킬 수가 없었다. 어느 한쪽이 패자여야만 했다. 그래서 음차는 타라마 대군이 모여 있던 몽고고원으로 기습작전을 전개했다. 그곳에서 그도 죽었지만 타라마 대군 또한 엄청난 희생과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 뒤를 이어 을무지가 즉위하자마자 타라마가 총공세를 펼쳤다. 타라마의 총대장 '야리야린'이 이끄는 300만의 병사들은 툰황에 진을 치고 있는 100만의 제군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공격 직전에 정보를 입수한 제군들은 이미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어느 지점에서 반격할 계획까지 짜놓고 있었다. 야리야린의 공격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의 방향은 더욱 남으로 내려와 청구국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청구의 양민들을 죽이고 약탈과 강간…… 청군인의 마음에 모진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그들이 북으로 향할 때에 제군은 을무지의 명에 따라 기습 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타라마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을무지는 야리야린에게 생포되어 청동마차에 갇혔다. 선군 을무지는 손발이 묶여 청동마차 속에 갇혀 있으면서 그나마 위신을 지키려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야리야린은 채찍으로 호수(칭하이호)를 향해 있는 말의 엉덩이를 세차게 후려쳤다. 청동마차는 물 속에 가라앉았고 선군은 익사했다.


그 뒤를 선군 물리가 이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상처 자국들뿐이었다. 육탄공세로 쳐들어오는 북방의 타라마를 막아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물밀 듯 내려오는 저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없었다. 아니 마음대로만 한다면야 저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군대가 어찌 오합지졸들과 싸울 수가 있겠는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선군 물리는 더 이상의 싸움을 원치 않았기에 즉위한 직후 타라마 대군에게 고하기를, "선군의 이름으로 제군들을 해체하며, 대신 지상군만으로 이 땅을 지킬 것이노라…… 그대들에 대하여 이제 선군의 나라는 일체 간섭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며, 또한 오랫동안 그대들과 조선의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장대한 합동제사를 지내야 할 것을 말하노라.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상처만 날 뿐 아무런 득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후로 우리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여 그대들에게도 조선의 오랜 전통과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때에 야리야린은 이미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병사들뿐 아니라 북방의 세력 전부를 통솔하였던 인물이었다. 선군과 야리야린은 한자리에서 만나 드디어 합의를 이루었다. 타라마들 역시도 더 이상 싸움을 지속시킬 수 없을 정도로 굶주려 있던 터였다. 실로 오랜만에 평화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선군과 늙은 장수 야리야린은 서로간에 약속을 하였다. 선제는 불가침조약과 함께 제군을 해체시키고 대신 지상군으로 바꾸며, 북방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할 것을 약속하였고, 장군은 선제에게 다시는 쳐들어가지 않겠다는 것과 타라마대군을 반으로 줄여버리겠다는 약속이었다. 예상 외로 두 존재는 너무나 뜻이 잘 통하였다. 선군은 이때에 야리야린의 약속을 지켜주었고, 장군 역시 선군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평화가 시작되었다. 선군은 북방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해마다 곡식을 전해 주었고, 장군은 그 보답으로 곰의 가죽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선군 물리가 즉위한 지 30년경 북방의 야리야린은 부하에게 살해를 당하게 되었다.


바로 그 일이 있기 직전 야리야린은 선군 물리에게 북방의 여러 민족 모두를 조선인으로 인정하며, 앞으로 역사를 기록할 때에도 북방의 역사를 완전히 조선의 역사로서 간주해 줄 것을 요청하였었다. 이에 물리는 서한으로 다음해에 조선 9족이 모이는 화백회의에 귀국의 문제를 가장 큰 비중으로 논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적어 보냈다. 이때에 구려와 남국만이 별반응이 없었고 나머지 모두가 찬성을 하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야리야린이 평화를 지켰고, 선군의 나라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월지인의 후예로 알려진 우장충이란 자가 있었다. 이자의 꾀는 따를 자가 없었고 권모술수가 남달리 능하였다. 이 우화충이 어느 날 야리야린의 심복들을 꾀어내어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우화충의 계획은 전조선을 섬멸한 후에 자신이 선군이 되어 조선 삼한을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심복들은 우화충의 꼬임에 빠져 야리야린을 살해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평화스런 북방의 대륙부터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이들은 반란군으로서 우화충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야리야린을 따르던 병사들은 너무나 갑작스런 봉변에 그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에 선군 물리는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선군의 병력이라 하여도 이들은 제군들이 아니었다. 돕기 위해 들어간 병사들은 희생만 치르고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에서 승리를 한 우화충은 기고만장했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이 시작되면서 물밀 듯 쳐들어왔다. 선군은 몸을 피했지만 이미 서장은 점령당한 상태였고, 우화충이 선군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 선군임을 만방에 선포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북부여의 욕살 구물이 북부여가 자랑하는 투창부대를 앞세우고 서장으로 향했다. 이에 남국과 구려만을 제외한 조선군 모두가 그들만이 자랑하는 특수부대를 보내게 되었다. 일단 해체되었던 특수부대가 규합되니 그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중앙에는 부여가 자랑하는 저 무서운 전차부대가 물밀 듯 들어갔다. 비오듯이 쏟아지는 숙신의 화살에 무수히 쓰러지는 우화충의 무리들…… 결국 우화충은 북부여 병사의 투창에 찔려 쓰러졌다. 제군들은 정말 잘 싸웠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오직 승리만이 나부꼈다.


구물은 선군 물리에게 새로운 정치를 펼 것을 간청하였으나 물리는 이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선군 을무지가 죽었던 호숫가에 머물며 조용히 살아가게 되었다.




원출처 : 행림출판 발간 여인왕국  

[참고]



                    - 글 목차 -



1. 북두칠성에서 온 존재들

2. 12 별나라에서 온 존재로 이루어진 12 환국

3. 중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 치우, 신농, 복희, 여와  

4. 선조들의 숨결이 배여 있는 시베리아 강토

5. "천상의 시간으로 사흘동안 그대들이 역사의 맥을 잇도록 하라."

6. 우르국 샤카족의 마지막 성자 석가모니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13 00:02)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13 00:07)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15 11:36)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15 11:36)
분류 :
우주
조회 수 :
4059
등록일 :
2007.12.06
23:21:28 (*.15.192.85)
엮인글 :
http://www.lightearth.net/history/67059/361/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www.lightearth.net/67059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지구 적을 바로 보지 못하면 적의 하수인으로 춤추게 됩니다 아트만 2022-01-13 2867
공지 우주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실시간 전달되는 중요한 정보를 금일부터 올립니다. 아트만 2020-05-14 8070
공지 지구 지구/ 조선의 역사와 현재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대조선삼한역사학회 아트만 2019-01-26 13149
공지 지구 유엔 각국대표부에 보내는 제안서 [2018. 8. 29.] 아트만 2018-09-06 8848
공지 우주 우리가 지금 이곳 지구에 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트만 2015-08-17 12713
공지 한민족 정치포탈 서프라이즈 - 제정신 가지고 사는 이들이 모인곳 아트만 2014-07-12 26474
공지 한민족 뉴스타파 - 시민의 회비로 운영되는 / 믿을 수 있는 언론 아트만 2014-07-12 14418
공지 지구 한민족의 맥에 올려지는 현실 정보에 대하여 아트만 2013-08-03 24140
41 한민족 산해경과 발해의 위치와 역사의 허구성 조강래 2007-12-29 4792
40 한민족 기자들의 일천한 역사의식 [1] 조강래 2007-12-28 4207
39 한민족 동국여지승람은 한반도를 가르키는가 ? 조강래 2007-12-27 4941
38 한민족 중국대륙의 18성과 28성, 그곳을 다스린 원래의 주인공은? 조강래 2007-12-26 5065
37 한민족 조선을 다녀간 유럽인들의 증언이 한반도 인가 ? [5] 조강래 2007-12-25 5911
36 우주 6. 우르국 샤카족의 마지막 성자 석가모니 [3] 굴뚝청소부 2007-12-06 4913
35 우주 5. " 천상의 시간으로 사흘동안 그대들이 역사의 맥을 잇도록 하라." [1] 굴뚝청소부 2007-12-06 4641
» 우주 4. 선조들의 숨결이 배여 있는 시베리아 강토 굴뚝청소부 2007-12-06 4059
33 우주 3. 중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 치우, 신농, 복희, 여와 굴뚝청소부 2007-12-06 4611
32 우주 2. 12 별나라에서 온 존재들로 이루어진 12 환국 [1] 굴뚝청소부 2007-12-06 4810
31 우주 1. 天神의 후예들 굴뚝청소부 2007-12-06 4644
30 우주 한민족 9천년 역사 강준민 2002-09-11 10267
29 우주 그리스도의 사명 [1] file 지영근 2002-09-05 7938
28 우주 또 하나의 성서(Bible) 지영근 2002-09-01 7837
27 우주 하늘의 심판자 지영근 2002-08-30 7092
26 우주 예언자의 시대. [1] 지영근 2002-08-28 6719
25 우주 대홍수의 여파. [1] 지영근 2002-08-26 6322
24 우주 아틀란티스의 멸망 지영근 2002-08-22 9283
23 우주 성서의 예언자가 말하는 진실. 지영근 2002-08-20 8066
22 우주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지영근 2002-08-20 7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