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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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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우르국의 발자취


시베리아 대륙과 만주 강역, 그리고 중원의 대륙에서 어지러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을 무렵, 12연방의 하나인 우르국도 가시밭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왕검시대 이전에 티벳으로 자리를 옮겨갔던 우르인들..... 우르국의 종족은 같은 종족이나 그 파는 세 파로 나누어졌다. 그 첫째가 가이야와 샤카파, 그리고 우르그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들 이 세 파로 나뉘어지게 된 것은 한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느날 우르국의 어느 스승 집에서 3남매가 탄생하였다. 그들은 성장하였고 셋은 모두 20세 이전에 어느덧 영혼의 스승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 우르인들은 큰 도시의 형태로 셋으로 나뉘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 3 남매는 우르인들의 추앙 속에 있었고 급기야는 3남매 각 도시의 스승으로 가게 되었다.
첫째가 가이야로서 북내 마을로 갔다. 둘째가 샤카로서 여인이었는데, 검은 머릿결과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녀는 어느 곳보다도 여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남내 마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막내 우르그는 붉은 빛이 도는 머릿결을 갖고 태어난 예쁜 모습의 남아로 서내 마을로 가게 되었다. 셋은 우르인의 스승이 되었 다. 이 세 사람은 우르인들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에 한웅시대가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우르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웅시대가 시작되면서 스승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주: 우르국 뿐아니라 한인 12연방의 그 많은 스승들이 이 시기에 모습을 감추게 된다.) 우르인들은 매우 슬펐다.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스승이 그들 곁에서 사라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우르인들은 더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 종족보다 우루국인들은 스승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웅시대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기댈 수 있는 영혼의 스승이 그들 곁을 떠나자 모두들 가슴 아파했다. 우르인들은 진리가 화현된 모습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아, 영혼의 스승이여! . 그들은 영혼의 스승을 바라는 것 못지않게 우르의 피와 전통을 먼먼 후세에까지 지켜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 종족이었다. 그리하여 먼 대륙으로 이동하여 그들만의 은둔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르의 민족들이 헤어져야 했던 것은 '안부련' 한웅 천황 때에 시작되었다. 우르민족이 있는 터전에서 처음으로 샤카족이 지금의 티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가이야족이 뒤따라 티벳으로 옮겨왔다. 우르그족만이 그 터전에서 머문 채 옛 조상의 땅을 지키면서 살아갔다.
한웅시대에 12연방국 전체에 스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인시대 때처럼 스승이 많지 않았고,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분위기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느 연방국보다도 우르인들의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크고 깊었다. 그 중에서도 샤카족은 더욱 그러하였다. 한인시대에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불타의 모습 그리고 그 자비를 우르인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샤카인들은 옛 불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티벳의 고원속에 머물면서 샤카족과 가이야족은 전통을 지키면서 스승의 모습을 기다리면서 연방국을 멀리한 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종족이 모여 산 것은 불과 70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세월이었다. 가이야족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일에 더욱 비중을 두는 종족이었다. 가이야인들은 한인시대의 전통을 지키고 싶어했다.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우르의 문화, 우르의 것만을 고집하여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은 숭고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샤카족은 모든 문화전통이란 한낱 물거품일 뿐, 잘못하였다가는 물질욕에 사로잡히고 만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우르그족들은 두 민족과는 반대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먼 곳의 이민족들에게까지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르국에서는 우르그, 샤카, 가이야인들의 생각하는 바가 서로가 달랐다. 이들의 생각이 이렇게 틀려진 것은 한인시대 때의 세분의 스승이 얼을 심어 놓기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우르그족을 남겨둔 채 티벳으로 이동한 샤카족과 가이야족 사이에는 같은 민족이요 같은 형제라 할지라도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이 같지 않았기에 깊은 조화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티벳고원에서 이들은 불과 70년 만에 또다시 헤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티벳 고원에 가이야인들을 남겨둔 채 14만의 샤카족은 높은 히말라야를 넘어 천축국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인도에 이르러 푸른 초원이 드넓게 깔려 있는 기름진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수메르인들이 찾아오고 또 양운국인들도 찾아들었다.


샤카인 개개인의 마음 속에 불타를 향한 믿음과 기다림이란 너무도 간절하였다. 그 그리움이란 풀한 포기 없는 열사의 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심정이나 매한가지였다. 샤카족은 새로운 불타가 찾아오길 간절하게 기다렸다.(주:샤카족의 마지막 성자가 '석가모니'이시다.) 그러나 티벳의 우르그족과 가이야족은 샤카족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가이야의 나이 먹은 이들은 새로 태어나는 어린 가이야들에게 전통을 계승시키며 또한 이방민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우르그인들은 서아시아로 떠난 수메르인의 뒤를 쫓아 따라 나섰다. 이것은 모험이었다. 한인의 피가, 우르인의 피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를 미지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보다도 영혼의 불멸성을 믿으며 후세에 불타의 존재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모험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르국의 우르그인들의 뒤를 이어서 소수의 선비족인들도 따라갔었다. 수메르인이 이동하여 머물던 곳이 바빌론이었다. 우르인 그리고 선비인까지 찾아와 바빌로니아 시대가 이루어졌고, 서아시아 민족들의 정신과 문화를 일깨우게 되었다. 우르국인들이 셋으로 분열되었듯, 수메르인들도 한인들의 터전 위에서 살아갈 적에 셋으로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는 바빌로니아로 이동케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인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군시대(단군시대)까지 히브리족을 수호하며 지내게 되었다. 어쩌면 히브리인들이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수메르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를 위하여 수메르인들이 행했던 그 많은 노력을 히브리인들은 모르리라.
(이 때의 히브리인들이 과거 무우인과 백성여성에서 태어난 반신반인들이다. 또한 이들은 전생의 잘못으로 인하여 2천여년 동안 자기 나라를 가지지 못한채 노예계급으로 이 나라 저나라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세월이 흘렀다. 모든 이들의 마음은 바람결에 따라 갈대가 춤을 추듯 흔들리며 분열과 전쟁과 탐욕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웅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소도의 세계도 조금씩 변모했다. 그러나 소도의 세계는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소도의 세계였다. 한인들 모두의 마음에 영혼의 스승이 존재하기를 원했기에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샤카인이 바라는 영혼의 스승은 그것이 아니었다. 같은 스승이라 하여도 색깔이 다르다고나 할까? 한인시대의 영혼의 스승은 알게 모르게 정치에 이르기까지 유도하는 스승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샤카인이 바라는 영혼의 스승은 인종과 이념 사상은 물론 우리 모두의 것을 초월한 오직 자비의 숨결만이 흘러 넘치는 그와 같은 스승이 오심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샤카의 존재는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우르인의 마음에 자비를 심어 주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샤카의 존재가 육체의 모습이 사라진 후 우르인들은 얼마나 스승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렸던가 ...?
한편, 티벳의 가이야인들은 샤카인들이 떠난 이후 쓸쓸히 홀로 남아 전통계승에 힘을 기울였다, 이들이 청구인의 도움으로 중화 민족을 물리칠 때까지 가이야인들과 샤카인들은 서로간에 잦은 왕래를 하면서 외롭지 않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숫자의 중화인들의 기습을 받은 후 가이야족은 두 패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샤카족이 있는 천축땅으로 가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남으로 이동하여 고요한 밀림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가이야인들 중에 샤카인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는 쪽에서는 한인 사회에 살면서 어리석은 무리들과 어룰려 싸워야 하는 일은 더이상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동하여 밀림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쪽에서는 아직도 오랜 전통을 이어가야 된다는 강한 주장이었다.


이들 가이야족이 이같은 일을 겪는 것은, 중화인들의 기습으로 인해 어이없게도 38만여의 순수 가이야족이 22만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희생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억울한 죽음이었을 뿐이다. 결국 청구의 싸움 이후 10만여의 가이야족은 히말라야를 넘어 샤카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고, 6만여 명은 지금의 라오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가이야족의 수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가이야족은 오랜 세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시간은 이루어졌다. 그들은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오랜 세월동안 피를 흘렸다. 눈물겨운 가이야족의 역사, 그들은 무엇을 지키기 위하여 그토록 한을 품으며 보내야 했는가? 고통도 그들에게는 고통이 아니었다. 다만 전통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피가 이민족과 섞이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그들은 다행으로 여겼었다. 그들에게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값진 문화를, 그리고 온갖 진귀한 기록을 보존한다면 그들은 그것으로써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그것 속에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눈부신 값진 보석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은 기록은 하지 않았다. 물건이라면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정확히 전하여 계승하였고, 글이라면 모두 외워 버려 암기하였고, 수리라면 모두 풀어 이해시키며 전하였다. 가이야족은 밀림 속으로 이동하면서부터 더 이상 어질게만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고,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계승자들은 그 맥이 끊어질까 매우 우려를 했다. 샤카인들처럼 가이야인들도 스승의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샤카인들처럼 그렇게 간절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그들 가이야족은 전통을 계승키 위하여 지금의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미얀마로, 그리고 다시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이동하는 매우 고생스럽고 고난스러운 세월을 이어갔다. 가이야족이 밀림 속에서 이렇게 자주 이동한 이유는 밀림 속에까지 중화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중화족을 만나 농경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지만,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같이 사는 것을 피했다. 결코 중화족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싸움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희생당하기 싫어서였다.
가이야인들은 이렇듯 무엇보다도 고생을 자처한 종족이었다. 이들의 마음이 지극히 낮아서 이토록 간절히 전통을 이어가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이야족은 어느 종족보다도 부처의 길을 알고 있었고, 그 깊은 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옛 모습 그대로, 가이야의 피를 그대로 간직한 채 머나먼 미래에까지 계승시키자는 것뿐이었다.


선군의 시작과 함께 북방의 세력들이 이동을 하면서 살아가듯 밀림 속을 다니면서 여러 곳을 개척해 나갔다. 야수들이 숨을 쉬며 독충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르의 피를 지키며 전통을 계승하려는 저 가이야인들의 노력.....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이야인들이 밀림 속에서 이루어 놓은 농경의 모습을 지켜보던 중화족들은 차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을 피할 수만은 없었다.



가이야인들은 밀림 속에서 중화족에게 농경법을 전해주고 되도록이면 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들과 가까이 지내려 한다는 것은 가이야의 전통과 매우 깊은 관계가 되는 일이므로 가이야는 부득이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가이야인들이 밀림 속에서 나오려고 하던 때는 히브리인들인 수메르인들과 헤어지면서 인도로 들어가던 선군 한울 시대와 비슷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동이 문제였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어디로 이동을 해야할 것인가? 그것이 가이야인들의 숙제였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었다. 티벳에서 밀림으로 들어온 지 1천년이 지나도록 인구는 제자리 걸음이었다. 더 늘어남도 줄어듬도 없이 그대로 6만여를 유지한 채 지금껏 이어갔다. 가이야인들은 매우 신비하고 오묘한 존재들이었기에 밀림 속을 이동하면서도 이렇게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이야인들이 알고 있었던 고도의 지혜, 그 속에는 남아와 여아를 가려 임신하는 법과 인구가 늘고 줄어드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이미 그 이론을 정립시켜놓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수를 알맞게 조절하여 태어나게 하였다. 부족함도 더함도 없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법칙에 위배됨을 알고 있었지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행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훗날 가이야인들이 암울진 역사를 이어 가는 업이 되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할 법칙의 흐름을 위배하였으니, 이것은 곧 업이었다. 가이야인들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머나먼 미래를 알고 있었다. 미래에 한인들의 아름다운 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푸른 숲을 열며 살아가는 샤카족, 그들은 갠지스강을 사랑하였다. 그것은 모성이 깃들인 어머니의 젖줄이었다. 샤카족이 갠지스강을 사랑하듯 가이야족들도 메콩강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습한 밀림 속을 말없이 흐르는 아름다운 메콩강, 식물은 우거지고 그 속에 동물들이 뛰어 놀았다. 인간을 해치는 독충들이 있어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고, 범과 사자 그리고 뱀과 같은 무리들이 있다 하여도 그것마저 함께 공존하는 자연의 부분이었다. 갠지스강은 말없이 그리고 고요하게 흐른다. 그러기에 그 강을 '어머니의 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갠지스강을 어머니의 강이라 한다면 메콩강은 바로 '여인의 강'이었다. 순결한 여인의 모습처럼 우거진 밀림 속을 흐르는 메콩강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가이야족은 이 아름다운 메콩강을 이제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과도 같은 가이야인들, 그들은 남아 있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곳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나 떠나야 했다. 우르의 피를 먼 후세에까지 지키기 위해서는 이민족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 가이야인만이 살아갈 수 있는 더욱더 울창한 숲속으로 떠나야 했다.



가이야인들은 머나먼 미래을 예견하였다. 자신들이 들어가 살아야 할 터전이 동쪽의 끝(한반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미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한인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다. 아니 그곳은 가이야인뿐만이 아니라 한인들 모두가 살아가야 할 터전이었다. 산과 계곡이 많으며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그곳은 한인들의 맥을 이을 수가 있는 곳이었다. 산이 많기에 끝없는 地氣지기가 한인의 몸을 감쌀 것이며 '기'가 머문 곳이기에 오랜 세월 한인들을 보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여인의 기가 흐르고 남인의 정기가 머물고 있기에 시련이 찾아와도 먼 미래에까지 한인의 맥을 이을 수가 있을 것이고, 가이야의 맥을 이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이야의 장로들은 한인들의 맥이 동쪽의 끝으로 옮겨지기 전에 먼저 도착하려고 장구한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이렇게 전통을 지키자는 쪽과 예언서를 따라는 몇 몇 소수인들(주: 소도= 삼신시대에는 각 나라마다 정신적인 스승들이 있었으며 그 스승들이 거처하는 곳을 소도라 한다. 또한 정신적인 스승을 일컬어 '선재'라고 하였다. 또한 스승을 따르는 몇 몇 제자들은 위의 전통을 지키는 부류와 같이 먼저 한반도로 내려와서 그들 나름대로 미래를 위해서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행했었다.)


가이야의 인구는 모두가 6만여 명이었다. 6만여의 가이야인들은 모두 여섯 파로 나뉘어 앞으로 1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기간 동안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여 어느 방향으로든 동쪽 끝으로 가자고 약속했다. 어느 경로를 거치든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만나 함께 가이야국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여섯으로 분열하여 1천년의 기간이 흐른다 하여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어렵고도 모험적인 이 계획.... 그것은 가이야인들을 절벽 사이로 걷게 하는 계획이었다.


이들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마침내 여섯 파로 나뉘어 떠나게 된 것은 선군 '고불'시대였다. 이것이 훗날 6가이야가 된 원인이었다. 여섯 파의 이름은 장로들의 이름을 따서 '뉴릉파', '소파' , '시아파', '차요나파' , '수르파' , '금파' 로 나누었고, 각 파마다 1만명의 인원이었다.
가이야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간에 약속을 하였다. 마치 보물지도를 6장으로 나누어 보관하였다가 후세에 만나 다시 짜맞추자는 것과 같은 약속이었다. 가이야인들만의 전통이었던 깊은 학문, 그것은 주역의 다른 모습이었고 천부경의 다른 모습이었다. 인간의 모습이 서로 다르듯 이같은 수리에 있어서도 그 색깔을 달리 하였다. 본래의 뜻은 같을지라도 가이야인들만의 전통이 있었다. 심오한 비전들, 그것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가이야인들만이 그 심오한 '맥'을 6등분하였다.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는 여섯 파 모두가 가이야 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하기를, 헤어진 후 각 파는 그들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갈 때 정해 놓은 것만을 가르치자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1천년 후에 가이야인들이 동쪽 끝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면 그때 여섯 파들은 조상 때부터 이어 내려온 맥을 각자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6등분의 맥이 하나로 완성되면 비로소 가이야는 머나먼 미래에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들은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군 고불에 이르러 헤어졌다.


아름다운 여인의 강 메콩강을 멀리한 채 가이야의 여섯 파는 차례대로 떠나갔다. 그들은 참으로 지혜로웠다. 여섯 파들은 헤어졌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을 뿐 실제로는 메콩강을 떠나지 않았다. 인구를 급격히 줄여 떠나려는 것이었다. 이른바 산아제한을 하여 한 파에 1만명의 인원을 10분의 1로 줄이고, 그것을 다시 10분의 1로 줄여 불과 100여 명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최소규모가 되었을 때에 이동하는 것이었다. 6부족 모두가 100여 명으로 축소되어 실제로 메콩강을 떠날 때까지는 정착하여 1천년이 되는 해에 또다시 1만여의 불어난 인구가 되어 만나려는 것이었다. 가이야인들이 인구를 축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인구가 적어야 이동이 용이하며, 언제, 어느 때라도 빠르게 도적들로 부터 숨어 버릴 수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가이야인들은 이렇게 스스로의 운명을 시험과 모험 속에서 오직 전통계승의 목표만을 위하여 움직였다. 이제 100여명이라는 극소의 인원으로 축소된 가이야인들은 길을 떠났다. 6가이야 모두가 100여 명씩으로 변하였으니 전원이 600여 명이었다.


동쪽 끝(한반도)을 향하여 바람따라 물결따라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삶을 영위해 가면서 이동민족들처럼 이동하여 갔다. 6가이야이들의 이동경로를 보면, 뉴릉파와 소파는 해상경로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차요나파,시아파,수르파는 티벳을 거쳐 옛 우르국을 지나 시베리아로까지 이동하여 바이칼호 북쪽 너머로 길을 택해 떠났다. 그리고 금파만이 티벳으로부터 동으로 이동하여 중화대륙을 통과하여 조선국에 이르고, 또다시 만주에 이른 후에 백두산을 거쳐 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금파는 어느 파보다도 일찍 들어오게 되었고, 1천 년 후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인구가 5천이 더 추가되어 1만 5천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파는 순수 우르인의 피를 보존하질 못하였다. 금파는 훗날 금관 가이야가 되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머지 5가이야들은 이를 인정치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우르의 것을 지키려 하였건만 정말 애석하였다. 금파를 제외한 다섯 파 모두는 장구한 1천년이라는 세월 동안을 한치도 어김없이 우르의 맥을 지켰었다. 그런데 금파만이 지키질 못한 것이다. 이것이 가이야가 오늘날까지 순수하게 남아 있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된다.






                                   위: 가이야족의 이동,   아래 : 가이야의 이동경로




                                


그렇다면 과연 가이야의 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이야의 맥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도 가이야의 맥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방법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인간의 삶, 과거 현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수리로 이루어진 신비의 학문, 그것은 가이야인들만의 학문이었다. 이미 12연방에서 9나라가 된 지금 가이야만이 갖고 있는 이같은 전통은 변질되었다. 순수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고, 깨달은 이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실세계에서 모두 없애버린지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가이야인들만이 비기로써 이를 지키기 위하여 헌신의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6가이야인들은 헤어지기 전 서로간에 약속하기를, 피를 지키지 못한다면 가이야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굳게 약속하였던 것이다.


아---- 아 --- 가이야인이여 ! 가이야인이여 ! 그들이 우르국에서부터 티벳을 거친 후 메콩강에서의 삶, 그리고 또다시 나뉘어 1천년 동안을 이동하면서 고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겪어야 했던 그 어려운 삶의 투쟁들..... 이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가이야의 정신,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던 우르의 맥! 과연 그들의 행위는 옳은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일일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지키려 하는 것일까? 그 험난한 길..... 그것은 한마디로 피 흘리는 삶의 투쟁사였다.
우르의 영혼들이여! 아루좌의 영혼들이여! 찬란한 그 빛, 그리고 그들의 사랑, 비록 육체인의 모습을 취하고는 있어도 그들은 분명 아루좌의 여신들이었다.


1천 년의 세월은 그들의 투쟁어린 삶과 함께 어우러졌다. 저 드넓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그리고 바다를 낀 섬과 해안에서, 또한 소수의 집단을 이루며 국경 사이에서 온갖 고생을 사서 하며 살아가는 가이야인의 서글픈 삶..... 드넓은, 그리고 매서운 추위의 강풍이 몰아치는 시베리아에서 이민족들에게 몇 번이나 멸망당할 뻔했던 그 아슬아슬한 순간들.....


언제였던가 수르파에서의 일이었다. 부족 전원이 투르크 인에게 전멸당하고 어느 한 가족만 남게 되는 일도 겪었다. 아버지와 두 딸만이 남아 그 핏줄을 이어야만 하였다. 시아파에서는 어느 어머니와 아들만이 스키타이족에게서 탈출에 성공하여 핏줄이 이어진 때도 있었다. 차요나파에서는 어린 미소년 하나에 이미 수태를 할 수 없는 여인들만 남아 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극적인 임신으로 차요나의 핏줄은 이어질 수 있었다. 육상경로에서 살아가던 이들 못지 않게 해상경로에서 살아가던 뉴릉파와 소파 역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살아왔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이들의 아픔, 그 순간들.....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전멸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 남았던 수많은 일들, 그리고 떠돌이 해적선과의 쫓고 쫓기는 아슬아슬한 순간들..... 그러나 가이야인이라는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고난의 연속이 그들을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가이야인들은 더욱 강인해졌다. 가이야인들은 어느 곳이든 오랫동안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위치가 외부에 알려지면 언제고 그 즉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동으로 동으로 이동햐여 가이야인 전원이 반도에 도착한것은 200여 년 후의 일이었으니, 어느덧 종족간의 헤어짐이 있은 지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드디어 가이야인들은 미래를 위한 한인들의 터전에 도착하였다. 대륙에서는 선군 아흘시대가 열리고 있을 때에 6가야이들은 모두 한반도로 들어가 깊은 숲속으로 잠적해 버렸다. 뉴릉파와 소파는 반도의 남해안으로 상륙하였는데. 이는 부족국의 시조 용장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었다. 그러나 뉴릉가이야, 소가이야보다 먼저 들어온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금관 가이야인들이었다. 시아 가이야는 지금의 황해도에 숨어 살았고, 차요나 가이야는 함경도에, 그리고 수르 가이야는 강원도의 깊은 숲속을 골라서 잠적해 버렸다. 해상을 통하여 들어온 뉴릉 가이야와 소 가이야는 금관 가이야가 머문 김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간에 왕래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1천년이 흐르지 않았고 인구도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이야인들은 숨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미래를 위한 터전이랄 수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강산 위에는 언제부터인가 도적들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이야인들이 반도로 들어오기 전 선군 색불우가 진한의 병사들로 하여금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게 한 적이 있다. 도적떼로 인하여 지기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한 조치기도 하지만, 우선은 가이야인들보다 먼저 들어와 살던 이들의 요청이 있어서 진한의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순수한 12연방의 후예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선국의 고로들은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천부경의 수리를 풀어서 스스로 모두가 알고 있었다. 12연방의 맥이 조선으로 이루어지고, 조선의 맥은 이어져서 어느 날 보잘 것없이 변할 것이며 그리고 모두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나라는 어느 때 흥함과 망함이 이루어지며 어느 날 그들의 후예가 반도로 들어와 어느 위치에 정착하리라는 것도 일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이미 수리의 법칙 속에 나와 있지 않는가?


그런 뜻에서 가이야인들이 머물러야 하는 곳은 바로 지금의 경남지역이였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었다. 그 옛날 모든 고로들은 이렇게 철리가 깊었고 하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 얼마나 비좁은 땅인가? 그러나 이 땅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든 토지와 그 맥이 이어진 곳이요, 지기의 중심인 것이다. 그렇기에 12연방의 후예들, 그리고 조선 9나라가 망하면서 그들의 숨은 맥이 모두 이 땅으로 모인 것이다. 12연방 때부터 각 나라에서 그 나라만이 지니고 있던 수리 속에 이미 아득한 세월의 좌표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한인들은 이를 어김없이 지키며 살아갔다. 지금 이 장에서 가이야인들이 들어와 살아가던 지금의 경남지역 외의 다른 곳은 밝힐 수 없다. 아마도 현실세계에서는 그것을 확실히 밝힐 수 없으리라. 그대들 모두가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장에서는 조선의 9나라와 한반도의 지역과 함께 나타냄을 피하기로하는 것이다.


이렇게 6가이야인들은 그들이 약속한 것보다 500여 년을 먼저 들어와 고요한 숲속에서 아무도 누치 챌 수없는 가운데 조용히 살아갔다. 어느 땅보다도 풍부한 지기로 감싸여 있는 땅 위에서 서서히 인구를 늘려 가며 조상들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은 문화유산을 키우면서 보존해 나갔다. 이 땅은 지구라는 둥근 모습의 생명체의 중심이었다. 지맥의 흐름도 하늘의 기운도 이곳으로 부터 시작되고, 운명의 열쇠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사계절이 어느 곳보다도 뚜렷한 곳이었고 험준하며 생명체의 골격을 갖춘 듯한 이 땅은 분명 끝없는 인맥(주: 앞으로 인류를 사랑으로써 이끌어 갈 많은 인재가 배출되리라 믿으며, 백두산 천지를 되찾을 때 옛 '한인'의 의식이 드러날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이렇게 흘러가고 있으며,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계획된 것이 또한 역사이다.)이 이어지기에 충분한 땅이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던가! 그대는 이 아름다운 강산을 아는가?
(주: 동: 알라스카는 용머리의 형상으로 북에서 남으로 힘차게 내려오다 끊어질 듯 다시 득수( 得水: 파나마 운하)하여 남으로 길게, 뻗어내려 좌청룡左靑龍을 만들고,
서 : 북극지방을 중심으로 일진광풍을 일으키며 달리는 비호의 모습으로 소련과 아프리카를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며,
남 : 중국과 일본은 봉황의 깃털로 감싸는 듯하니 주작朱雀이요,
북 : 백두산을 주봉으로 만주대륙은 거북등의 형상이라 현무玄武에 해당한다.)


산이 많다 불평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보배로운 이 땅이 있었기에 한인의 맥은 이렇게 견딜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의 역사 속에서 우리 한인들처럼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강성한 역사를 이룩한 것부터 최고의 약소국으로 전락한 순간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민족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 반도는 산이 많기에 그 어느 나라보다도 산신들이 많다. 인간이 전쟁을 할 때 신들도 함께 춤을 추게 되는 것, 산이 많은 반도에 머문 한인들은 많은 산신들의 가호속에서 살아 숨쉬었던 것이다. 망함이 있으면 흥함이 있고, 흥함이 있으면 망함이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법, 그러나 아직 우리 한인들은 망해 본 일은 없었다.


우리 한인의 역사는 흥망의 삶이 아니었다. 초월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한인들 모두는 그 옛날 이미 한의 의식에 까지 이르렀던 존재였기에 감히, 그리고 떳떳이 힘있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깊고 깊은 그윽한 애정이 없었다면 지구성의 맥이 연결된 아름다운 이 강산 속에서 수없는 눈물의 삶이 이어질 수가 있었겠는가? 그대들은 이제 한인들의 옛 의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받아야 했던 값진 희생의 역사, 눈물의 역사에서 이제 깨어나야만 할 것이다. 한 없이 움츠려야만 했던 지난 세월의 역사, 그것은 정말 값진 희생의 역사였다. 이 순간 한인들 모두는 불타가 돼 있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불타의 순간을 포기한 채 또다시 중생의 삶 속에 뛰어들어야 했던 우리 한인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라. 가이야는 이렇게 미래를 위하여, 희생의 역사를 치르기 위하여 이 땅에 들어온 것이다( 주: 가이야 뿐만이 아니라 12연방의 한인들, 전세계 모든 이민족들의 영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애쓴 모든 의로운 이들의 목적은 미래세에 오실 부처님-미륵 부처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신은 분명 가이야인들에게 축복의 빛을 보낼 것이다.



세월은 말없이 흘렀다. 5백여 년의 세월은 이렇게 말없이 흘렀다. 맑고 드높은 저 푸른 하늘에는 산새가 울며 날아가고, 들에는 곡식이 춤을 추며 맑은 시냇물 소리는 정겨운 소리로 흐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산하 어디에나 가이야인들의 숫자는 늘어가고 있었고, 어느덧 만나야 할 세월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고생스러웠던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6 가이야의 세월들.... 그러나 그들은 견디어 냈고 이제 만나야 할 순간이 임박해 옴에 따라서 모두가 서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1천 년 만의 재회, 보고픈 얼굴들, 얼마나 서로들 변해 있을까? 가이야인들은 부푼 꿈을 안고서 숲을 거닐고 있었다. 그간에 가이야인들도 많이 변하였다. 이동민족이 살아 남기 위해 공격적으로 변하고 용맹스럽게 변할 수 밖에 없듯, 그간에 가이야들도 살아남기 위하여 변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이야의 심성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변치 않는 그들의 심성, 그것은 고귀한 것이었다. 아직도 가이야의 변치 않는 맥의 흐름 속에서 만남은 이루어졌다. 이때가 선군 사벌 때였으니 한인의 역사의 흐름이 피를 나타내는 시기였다. 1 천년 만의 재회.... 모두가 끌어안고 재회의 기쁨을 통곡과 오열 속에서 나누었다. 이 기쁨. 반가움... 무엇으로 말해야 하나.


가이야는 드디어 모였다. 기나긴 방랑의 세월, 전멸 직전까지 갔던 그 순간들. 그러나 가이야는 멸망치 않았고 이어져 왔다. 비록 금 가이야만 변질되어 있었지만 전부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금가이야 내에서 순수 혈통과 피가 섞인 사람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대륙의 중앙으로 통과하였던 금 가이야, 이들도 어느 가이야 못지 않게 시련의 세월을 겪으며 보냈었다. 설사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였더라도 그 맥은 지켜지고 있었다. 금 가이야로 인하여 5 가이야는 재회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얼마나 안타까워 하였던가?


그로 인해 가이야의 사회에서는 실로 오랜 세월 동안을 금 가이야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서 고심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인정은 하게 되었지만 가이야인들은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나 그들의 피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던가? 하지만 피는 지키지 못하였어도 가이야의 맥은 이어질 수가 있었다. 여섯으로 나뉘었던 맥이 하나가 되었으니 가이야는 비로서 완성이 되었고, 완성된 즉시 어디엔가 모를 깊은 곳에 가이야의 맥을 감추게 되었다.


머나먼 미래를 위하여 그 값지고 고귀한 가이야이 맥은 잠시 현실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가이야인들은 절규 속에서 순수 혈통을 지켜야 하는 일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슬픔의 선언과 함게 가이야의 사회는 시작되었다.


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여..... 가이야의 세월이여! 이들의 기나긴 삶의 투쟁사여! 정말 슬프고 안타까웠다. 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무엇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오랜 세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역경의 세월을 믿음과 사랑을 지닌 채 지켜왔던 기난 긴 가이야의 역사들... 그러나 지키지 못한 것, 어쩌면 그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지키려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며 살아 왔지만 결국 지키지 못하고 말았던 것은 머나먼 미래를 위하여 신의 흐름은 그렇게 흘러갔던 것이다. 머나먼 미래... 가이야인들이 혈통을 지켰고 그래서 한인들 모두가 대륙에서 반도로 들어와 역사적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삶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가이야인들이 거대한 그리고 강력한 순수 혈통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형성되어 완벽하게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다면 이 곳 반도의 역사는 예상 밖의 흐름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늘의 뜻이 가이야인을 버리건 버리지 않건, 또한 그것이 하늘의 뜻이건 아니건 어쨋든 가이야인들만의 힘의 왕국이 이루어진다면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가이야의 값진 전통은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었기 대문이었다. 그 어느 병법가들도 가이야인들을 이길 수 없으리라. 그 어떤 주술인들도 가이야인들을 능가할 수 없었고 가장 앞선 예술인이라 하여도 가이야인들 보다는 더 뛰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이야인들은 금 가이야로 인하여 선언했던 그 슬픔의 선언.... 이를 그 옛날 <모가에테> 의식처럼 <모지스> 선언이라 부르게 되었다. 모지스 선언, 가이야인들은 이를 슬픔의 선언이라 부르고 있었다. 한인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 엄청나게 값진 고서들이 모두가 소각되어졌고 값진 예술품들도 필요치 않은 것은 더 이상 만들지 않기로 하였다. 실로 눈부신 가이야사가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가이야사가 사라져 갈 때에 가장 값진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가이야의 예언서일 것이다.


가이야의 예언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세월의 흐름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그러기에 그들은 소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가이야의 예언서야말로 혀를 찰 기가 막힐 것이었다. 그것은 한 순간도 틀림이 없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속에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한인들의 머나 먼 미래사를 말한 것이리라. < 이 세상 어느 민족도 치를 수 없는 인고의 진통을 한인과 함께 하며 미래는 이렇게 슬픔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옛 12연방의 한인의 영혼은 춤을 추며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으리라. 옛 12나라의 스승은 한인의 영혼을 달래려고 강림하실 것이니 아 -- 아 -- .이 축복의 빛은 눈부시어라. 그리고 가이야인들은 행복한 나날을 이룰 것이며 뿌렸던 씨앗은 이제 열매를 맺나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느 구절엔가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한인의 가슴속에는 이렇게 스승을 향한 믿음이 깊이 있었던 것이다. 샤카인들의 간절한 바램이 이루어져 어느 날 스승이 내려오신 것과 같이 히브린인들도 간절한 희망과 바람 속에 스승이 강림하셨던 것이었다. (주: 히브리인의 성자가 예수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들은 미래를 위하여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참아 왔다. 간절하게 찾았지만 한인들은 미래를 위하여 이렇게 참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인들은 가이야인들은  미래를 위하여 잠시동안 망각해야만 하였다.


이제 모지스 선언 이후 가이야인들은 슬픔을 안고서 순수 혈통마져 사라진 채 가이야사는 남해를 바라보며 깊은 산중을 이룬 반도의 남쪽에서 그렇게 이루저지기 시작하였다. 고귀한 문화를 간직한 채 살아 숨쉬는 역사도 망각한 채 이렇게 숨어 살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아름다운 춤도 이제는 추는 일도 사라져 갔다. 가이야인이 머물러야 할 곳, 그곳은 인간의 척추였다. 매우 중요하며 자칫 잘못하였다가는 영영 한인의 맥이 끊어지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힘의 근원점에 가이야인들은 살아가려 했다.


가이야인들은 알고 있었다. 미래의 저 현란한 불빛을 알고 있었기에 가이야인들은 아름다운 이 강산을 그리고 저 지맥을 더욱 견고히 다져 나갔다. 선군 사벌 시대에 들어와 가이야인의 희생의 노력... 어찌 말로 글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몇 세대를 거치면서 가이야인들이 행했던 고귀한 일들... 가이야인들의 이 같은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 한인들은 수도 없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 이미 나라가 사라졌을 것이다. 이 때 가이야인들은 산세와 지세의 형상을 보면서 그 값진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이 장에서 가이야인들이 행한 일을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인들을 위하여 값진 일을 하였다. 한인들의 허리에는 힘이 차있다. 그리하여 가이야인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터전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척추는 지금 힘에 충전되어 있다. 아니 그것은 신비스런 모습 그대로 간직한 채 아직도 건재한 모습 그대로이다. 척추의 힘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흘러야 했던 가이야인의 눈물, 가이야인이 행하였던 알 수 없는 지맥의 역사는, 정성스런 노력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후 3백년이 지속되었다.


바로 그 시대에 가이야인들은 아름다운 이 강산, 아름다운 여인의 앉아 있는 모습의 척추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숨은 노력을 하고 있을 때에 저 드넓은 마한의 관경에서는 북방의 이동민족과 진한과의 치열한 싸움은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싸움, 말로는 설명을 할 수 없는 싸움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도에서 한인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일어설 수 없는 역사였다. 바로 허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어서지 못하게 하였고 미래를 위한 힘을 축적했던 것이다.


하루하루 수많은 나날을 보내면서 여인들은 앉아서 당하기만 하였다. 앉아 있는 여인은 당하는 법, 그러나 허리와 다리의 힘은 충전되어 있는 법. 가이야인들은 이렇게 여인의 허리에 영혼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로 여인의 허리를 바닥에 묶어 버렸다. 미래를 위하여 함부로 일어 설 수 없도록 그렇게 묶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가이야인만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모든 나라에는 예언서가 있었고 예언서를 추종하던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들어와서 가이야인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적인 일을 하였다. 어느 민족이 들어와 짓밟는다 하여도 짓밟히지 않는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여인은 아직까지 더럽혀진 적이 없었다. 영원히 맥이 끊어질 수 없는 역사이리라. 앉아 있었기에 순결할 수 있었고 어느 민족도 여인을 더럽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인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사내의 근성이 아닌가? 사랑이 충만된 여인, 아픔을 씻어 줄 수 있는 여인은 미래를 위하여 잠시 잠을 청했다. 잠자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 허리가 묶인 채 잠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도취되어 수많은 세력들은 앞은 다투어 여인을 취하려 하였지만 성공할 수가 없었다. 여인은 아름답다. 모습도 아름답고 영혼도 아름답다. 여인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부처가 되어 보살이 되어 일어나 진리의 칼을 들고 일어설 것이다. 그 때 가이야인들은 태어나 허리의 끊을 풀어 버릴 것이다.


가이야는 알고 있었다. 미래의 일들을 바라보면서 6가이야는 사벌시대 이후 여러 지방을 전전하더니 선군 음차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정착되니 가이야의 새로운 삶은 이루어졌다. 가이야인들은 언제나 강을 끼고 살아갔다. 강은 곧 여인의 젓줄이기 때문이었다. 목마른 이에게 목을 젹줄 수 있는 곳이기에 가이야인들은 강을 여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여인의 젓줄을 끼고 시들어 가는 가이야의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작은 문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숨은 문명이요, 가이야인들만의 문명이었다. 이미 서쪽으로는 동백제의 전초가 되는 부족국들이 이미 살아가고 있었고, 북으로는 용장의 후예가 살아가고 있었다.


조용한 문명은 시작되었다. 금관 가이야인들은 갯벌과 바다가 교차되는 낙동강 하류에서 쇠물을 다루는 문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남으로는 바다와 동으로는 금관 가이야외 인접해 있는 고령 가이야는 학문의 꽃을 피웠다.  고령에서는 강 유역의 기름지진 옥토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산인들은 가이야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믿었고 성스런 산이라 하였다. 미래에 만날 수 있다고 여기며 가이야인들이 늘 제사를 지내던 산이었다. 가이야인들은 산을 바라보면서 천문. 지리. 의술을 비롯하여 주술 등 주로 영적 차원의 삶을 추구하는 곳이었다.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펼쳐 살았던 아라인들, 그들은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남으로 삼천포를 중심으로 여러 섬으로 나뉘어 살았던 소 가이야인들은 유일하게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섬들을 제후국으로 하였고 고성의 장로를 황제로 여기며 살아갔다. 대 가이야는 지리산을 끼고 동백제를 견제하면서 무술과 무예를 단련하며 살아갔다. 이것이 최초로 선군 음차시대에 정착한 모습이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가이야인들은 욕심이 없었다. 쓸데없이 침범하는 그런 민족이 아니었다. 조용한 침묵을 지키면서 가이야인들은 작은 사회를 이루며 꽃피워 갔다. 서로가 부족한 것은 배워 나갔고 서로간에 유학을 하는 아름다운 가이야의 사회는 이루어졌다.( 주; 천(天: 힘)에도 음과 양이 있으니, 양은 고구려이며 음이 발해이다. 지(地: 지혜)에도 음양이 있으니 양이 동백제요 음이 서백제이다. 인(人: 사랑)에도 음양이 있으니 신라가 양이요 가이야가 음이다. 이제까지 음적인 역사는 땅속에 깊이 묻혀 사라져야 했으니, 앞으로는 인재가 나타나 이들의 역사를 밝혀 낼 것이며, 특히나 위대한 가이야의 문화유산이 점차 고증이 되어 갈 것이다.)



원출처 : 행림출판 발간 여인왕국  




[참고]



                - 글 목차 -



1. 북두칠성에서 온 존재들

2. 12 별나라에서 온 존재로 이루어진 12 환국

3. 중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 치우, 신농, 복희, 여와  

4. 선조들의 숨결이 배여 있는 시베리아 강토

5. "천상의 시간으로 사흘동안 그대들이 역사의 맥을 잇도록 하라."

6. 우르국 샤카족의 마지막 성자 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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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6
23:24:08 (*.15.19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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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2007.12.13
14:26:56
(*.85.62.73)
하지만, 그 스승들이란 자들도 되게 위선자들입니다.얼마나 자만이 극에 달했으면,물질욕에 물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는지..경고만 주고 돌아다니는 외계인들도 무책임한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네이버

2007.12.14
13:32:57
(*.122.21.120)
글 감사^^

.

2007.12.15
11:05:49
(*.255.65.34)
이글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간에 http://cafe.daum.net/mrdd 를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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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지구 한민족의 맥에 올려지는 현실 정보에 대하여 아트만 2013-08-03 24140
41 한민족 산해경과 발해의 위치와 역사의 허구성 조강래 2007-12-29 4792
40 한민족 기자들의 일천한 역사의식 [1] 조강래 2007-12-28 4207
39 한민족 동국여지승람은 한반도를 가르키는가 ? 조강래 2007-12-27 4941
38 한민족 중국대륙의 18성과 28성, 그곳을 다스린 원래의 주인공은? 조강래 2007-12-26 5065
37 한민족 조선을 다녀간 유럽인들의 증언이 한반도 인가 ? [5] 조강래 2007-12-25 5911
» 우주 6. 우르국 샤카족의 마지막 성자 석가모니 [3] 굴뚝청소부 2007-12-06 4913
35 우주 5. " 천상의 시간으로 사흘동안 그대들이 역사의 맥을 잇도록 하라." [1] 굴뚝청소부 2007-12-06 4641
34 우주 4. 선조들의 숨결이 배여 있는 시베리아 강토 굴뚝청소부 2007-12-06 4058
33 우주 3. 중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 치우, 신농, 복희, 여와 굴뚝청소부 2007-12-06 4611
32 우주 2. 12 별나라에서 온 존재들로 이루어진 12 환국 [1] 굴뚝청소부 2007-12-06 4809
31 우주 1. 天神의 후예들 굴뚝청소부 2007-12-06 4644
30 우주 한민족 9천년 역사 강준민 2002-09-11 10267
29 우주 그리스도의 사명 [1] file 지영근 2002-09-05 7938
28 우주 또 하나의 성서(Bible) 지영근 2002-09-01 7837
27 우주 하늘의 심판자 지영근 2002-08-30 7092
26 우주 예언자의 시대. [1] 지영근 2002-08-28 6719
25 우주 대홍수의 여파. [1] 지영근 2002-08-26 6322
24 우주 아틀란티스의 멸망 지영근 2002-08-22 9283
23 우주 성서의 예언자가 말하는 진실. 지영근 2002-08-20 8066
22 우주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지영근 2002-08-20 7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