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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 쿤 취스테르 교수 발표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왜 조선이 이 회담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이는 조약이 처음부터 오염됐기 때문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소식지

더 쿠리에 드 라 콘페랑세 드 라 파

1907년 6월30일자 1면 이위종 인터뷰)









100년전인 1907년 6월25일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 고종의 특사가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헤이그에 모인 만국의 대표와 150여 명에 달한

각국의 취재기자들은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온

이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왜 조선이 이 회담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이는 조약이 처음부터

오염됐기 때문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소식지

더 쿠리에 드 라 콘페랑세 드 라 파

1907년 6월30일자 1면 이위종 인터뷰)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양반 나으리(?)께서는,

기자양반께서 스스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소식지

더 쿠리에 드 라 콘페랑세 드 라 파

1907년 6월30일자 1면 이위종 인터뷰)    



라는 소식지에서

발췌하여 올렸을 것인데,...

과연 그 소식지에서조차도  







[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 ]라는

표현이 나오는지!!!...

기자의 눈탱이(?)로 확인도 안하고

올려놓은 것인지?  반문을 하고 싶고,





과연,그 당시에도 극동(極東)이라는

지금의 지정학적(地政學的)용어의

사용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용어인지?  





[ 2차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이러한 지정학적이라는

용어가 생성되어

외교정치가의 주요한

용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음. ]  





용어의 시공간적(時空間的) 의미로서

그 시대상황하에서 제대로

개념정의가 되어진

용어로 사용된 것인지?  

확인도 하지않고,  

기자라는 신분으로  아무렇게나 ~~~  







기자 나으리의

고견(?)을  휘갈겨놓는 것이,

기자의 고유권한이며,

기자의 무한한

사적자유(私的自由)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그 당시에 보편적인 용어의 의미로써

사용하지도 않았던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극동이며, 자그마한 조선이라는 표현은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이 있는 자가

올린 글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이와 같은 기자라는 나으리들(?)의

역사적 소양의 현주소가

비단 [ 연합뉴스 ] 뿐만이 아니며,  

아래와 같이  동아일보의

[ 금동근 기자 ] 라는 나으리(?)께서도  

반도식민사관학자들이 애용하여 쓰는

<한반도>나, [ 동방의 작은나라 ] 라는~~

  



무슨 어린이 동화책에 나오는 제목처럼 ,

일점의 역사적 안목과 생각도 없이

조선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애용(?)하는

작태들의  숨은 의도는 과연 무엇인지?





대부분 조.중.동 [조선.중앙.동아일보]에 게재되는

기자원고내용 내지는~ 역사적 조명이라는

컬럼들을 통해 동원되는 대표적 수식어들이 한결같이~





현재의 한반도의 어디어디 /

지금의 한반도

북쪽의 북만주 어디어디 /



중국의 중세사와

고대사를 지칭하는 용어에서조차도~



중국이 결코

나라명칭이 아니건만,





중국 명나라/ 중국 청나라/

중국 송나라/ 중국 한나라/

중국 원나라 등등  

도대체가 중국이라는

명칭의 개념도 모르는

역사적 금치산자(禁治産者)들이





위와 같이 언어사용에 있어서

시공간적 의미로 인지한

구분의식도 없는 자들이

중국이라는 명칭과

변방 화하제후국들의 명칭을

같은 개념으로 휘갈겨 써 놓으면,



  

수나라(581∼618)  /

당나라(618∼907)  /

오대십국(907∼979)  /

송나라 (960∼1277) /

원나라 (1271∼1368) /  

명나라(1368∼1644)  /

청나라 (1636∼1912) 代의

역사들을 기술한  

사마천의 사기나

좀 뒤적거려보고 난 후에,  





과연 그 위서(僞書)인

사기(史記?!=私記?!=詐記??!!)속에서 조차도

중국이라는 명칭이 나오는지,

최소한의 역사적 소양은 갖추고서~

펜대를 놀려야 하는것이

전문기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직무적 책무에

속하는 것은 아닐런지?    





기자나으리(?)분들께  

정중하게 묻고자 한다.

  



한반도라는 용어조차도

쪽바리개새끼들이

명명해준 용어이지만,

  

지금의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반도인들이



바로 코 옆에 존재하고 있는

화하족 떼놈이 강탈한





대륙조선이  

중국[ 中央朝廷國 = 中國 ]임을 몰라서,

한반도(?)인 전체가

지리적인 맹인으로 생각되어져~

배려차원에서 그렇게

친절하게, 계속해서~~~~

  

중국 명나라/ 중국 청나라/

중국 송나라/ 중국 한나라/ 중국 원나라

등등의  중국 Song을 들려주시는 것인지?...!!

  

참으로 기자들의 기본적 소양이

이 정도의 수준이었나?  라는  

실망감과 아울러서~

의구심마저 일으키게하는

대목이 아닐수가 없다......





朝.中.東은 이미



네티즌들에 의해 지적되어 온



3대 친미/친일의 우파적 색채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않고,



그들만의 고유한 색깔을 자랑이라도 하는듯~





이렇게 거침없이(?) 반도사관적 용어의 남용속에



담겨져 있는 은밀(?)하고도 음흉(?)스러운 의도들을~  





신문매체를 대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용어의 사용에 대한 적정성, 보편타당성,



역사성등의 관점에서, 매우 조심스럽고,



예리한 눈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언어와 말은 단순히 편리성에 의해서

자의적, 임의적 개념의 설정등

언어의 고유적인 기능을 우회적 편법으로  

해석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상당히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에서도 나타났듯이,



< 나랏말싸미 중귁에 달아 > 에서



[ 중귁에 달아 ]는 대조선 사이(四夷)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대조선대륙의 중앙에  



지금의 통치기구로 비유한다면, 국무회의의



기능을 수행하는 중앙조정국(中央朝廷國)



內의 백성들조차도 표준어로 구사되는 말과



대다수의 일반대중들이 사용하는



여러가지의 다양한 방언들로 인해



의사소통의 곤란함과 그 심각성들이



고려해야 할만한 상황에 이르렀기에~~





실담어를 근원으로해서~



일상생활속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쉽게 발음할 수 있도록 그 기준을 통일한 것이며,



그것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화하족 떼놈들 조차도  성(省)에 따라서는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말귀를 알아듣지를 못하는 상황인지라~~~  

  

백성들이

실 생활에서 쓰는 말들의 발음을

표준화 한 것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인 것이다......!!!

  

또한,   아울러서 언급하면,

훈민정음 창제당시~~~

이성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도도히 흘렀었던 당시에는~



명나라가 존재한 기간인데,

이 당시에도 중국(中國)이라는~

국가명칭(?)으로서의 용어가 사용되어졌을까?

  

사마천의 날조된 사기(史記)에서조차도  

明史에는 언급되지 않았었고,

중국 25사의 사기 중에서도  

중국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청나라 건륭43년 1778년에

천여명의 석학자급 인재들을 동원하여

방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지었다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五代史 黑水靺鞨本號勿吉[ 흑수/말갈/본호/물길  ]
當後魏時見中國 其國東至海南界高麗,
西接突厥, 北隣室韋 蓋肅愼氏之地也.

[서접돌궐, 북린지위 개숙신씨지지야 ]
[『滿洲源流考』(乾隆43 1778) ]의 내용중에서

  

(當後魏時見中國)라고 기술하였는데,
(當後)마땅히 뒤에는
(魏時見中國) 위나라 때에 중국이 나타나니,

여기서 위(魏)라고 하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221년~589년]에
후한(後漢)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隋)의 문제(文帝)가 진(陳)을 멸망시키기까지
368년 동안의 魏晉의 시대를 일컫는 것인데,  




(위나라를 구분하면,北魏:後魏·元魏 / 東魏, 西魏로 구분)
위(魏)나라는 왜 나오는 것이며,
위나라가 존재했던, 이 당시에도
과연 중국이라는 국가명을 사용한
나라가 있었는지?...!!!




게다가, 계속하여 언급되는 내용이

(其國東至海南界高麗)
그 나라(中國)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해남(海南)이 고려와 경계를 하고 있다.
그러면, 해남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도무지 무슨 말을
뜻하는 것인지?......!!!  




지금 支那 [ CHINA ]의 지도상

광동성[ 廣東省 ] 아래에 있는
해남성(海南省)을 뜻하는 것인지?
그러면, 중국의 동쪽 끝에는
고려와의 경계인 해남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또 무슨 내용인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중국의 동쪽끝이 고려(918~1392)와의 경계이며,
그 경계선상에 위치한 국가가 고려라고 하였다면,


그러면, 과연 위에 언급된 중국(中國)이라는 용어가
1770년대에도 중국(국가의 명칭이 아님)이라는
국가명(?)이 언급되었는데,




과연, 1770년대에 중국이
국가(나라)를 칭하는 용어였다면,
청나라 [ 1636∼1912 ]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신기루인가?  




위의 글들은 아마도, 발해사와 관련해서  

이상한 짓거리(?)를 시도해 보려다가~,



앞뒤의 지리적 비정 상황이 너무나도 동떨어져진 내용인지라~

중국이라는 단어만 슬그머니 삽입(?)해 놓은 것은 역시,

구린내나는 왜곡(歪曲)작업을 시도하려다가~~~  

똥을 싼 흔적만을 남겨 놓은 것이고,

역사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의 입장이라면,

최소한 기자의 중요한 직무를 고려하여

역사에 대한 진솔하게 접근하는 자세와,

기자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올바르고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전달자로서~ 언어가 담긴 역사성에 대해~



최소한의 개념정의와  언어사용의 측면에서



좀더, 신중하게 사용되어져야 함은 당연지사이며,





더군다나, 서양놈들의 식민지 개척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동양을 대표한 대조선을 능멸하고,  

부위별로 도륙을 당한 의미로서 재단(裁斷)되어진~

특유의 지정학적(地政學的?)인 용어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거침없이~~~~  



컬럼부스의 대륙이 아닌, 정화(鄭和)에 의해 발견된

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들을 포함하여,

중남미의 원주민들을 선교라는

위선적 악마의 탈을 쓰고,

수천만명을 노예화하고,

이들을 짐승이하로 취급을 하며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그 가치가 상실된 노예들은 가차없이

생매장을 하거나~ 무참하게 도륙시킨,  



도저히 인류가 저지른 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광란의 인간사냥터화한 것처럼~~~





무참하게 서양놈들이 동양을 대표하는



대조선의 마지막 황제국이었던,



조선왕조 500년의 이성계조선의 대륙영토와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고 뭉게버린 후~,

  

그들만의 제국주의적 잣대의

편이성(便易性)을 기준으로,

상당히 작위적인 의도로

재단되고 사용되었던~~~~~  



극동/ 동북아  / 동아시아/

中近東 / 중동 / 서남아 / 동남아  등등의 용어는





대조선의 실체자체를 완전히 소멸시켜,

대조선의 존재 자체를 증거인멸(證據湮滅)하려는

고도의 지정학적이고도, 정치외교학적인......~  

지리학적인 도륙재단(屠戮裁斷)을 통하여

대조선을 일거에 도살하여, 분리해체시킬 수 있는 ~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음흉한  흉계작업을 거쳐,

최종적인 대조선의 사망을 확인하는

전범자의 승리한 노획물들로서,





극동/ 동북아  / 동아시아/

中近東 / 중동 / 서남아 / 동남아등등의

제2의 대조선의 살해된 피상체들을

그들만의 망원경을 통해~

음흉하고 싸늘한  미소를 짓고 감상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반도상황인 것이며,  





다시금 새롭게 각인되어 다가오는

제2의 구한말 상황으로 읽혀지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정신착란적(精神錯亂的) 몽상(夢想)인것일까?





지금의 한반도인(?)들은 이러한 대조선의

어마어마한 CONTINENTAL적인 대륙 영토의 실체와

본 모습을 아마도 꿈에서조차 꾸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제도교육화되었고, 도륙되고, 포장되고,

왜곡돼고, 축소돼고, 패배주의적 자괴감이 들도록 사육되고,

우리들의 역사정신은 피폐화될 정도로 강간당한 상태로

여전히 흐느적 거리고 있으며,

  



1945년 미국놈들에 의해 주어진 대한민국이라는

그 원적지와 본적지가 의심되는

급조된 국가인  한반도 대한민국은  



반도사학자들과 친미/친일세력들에 의해

여전히 삼류 뮤지컬 드라마로 심심하면~,  

어느지역에서 삼국시대의 유물이

대대적으로 발견이 되었다는 둥~  



이것을 근거로 하여, 삼국시대의 지리적 비정을

일본놈들의 충실한 지도를 통해, 양복재단하듯,

조선사를 농단(弄斷)하고,

능멸(凌滅)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국민의 혈세들을 낭비하는 작태들을

모종의 배후세력(?)들에 의해

철저하게 효과적으로 기획.각본.연출되고 있으며,



한반도(?) 조선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3.1운동이니, 동학혁명이니, 물산장려운동이니

조선사에서 등장하는 각종 인물들을 근거로

한반도에서는 꿈속에서조차도 존재하지않았던 존재들로

한반도 전역에다  누구누구 생가이니~, 누구누구 열사이니

독립기념관이니, 항일투쟁지이니 운운하면서,

총체적인 효과음을 연출하며~~~





각종 날조된 역사의 현장으로 도배질을 하며 둔갑시키고 있는,

총연출자와 극단들의 구성멤버들의 심리적 뇌리적 상황을

뚜껑을 열고 그 내막을  한번 시술하여 훑어보고 싶은 심정이

심장구석에서 벌떡~벌떡~ 펌프질하며,

치밀어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으며,  





그 묵시적 조력행위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견인차로서의 충실한 역할들이

체계적이고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는 현주소가

다름아닌, 작금의 한반도(?)이며,





이러한 한반도라는 용어자체도, 대륙조선을 파괴시켜,

지금의 한반도가 바로  조선임을 규정화하고 인식화시키는~

아주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각인화(刻印化)시키고 있는~  





중국 한나라/ 중국 당나라/ 중국 청나라   청

중국 송나라/ 중국 명나라/ 중국 원나라  

등등의  줄줄이사탕 (?) 중국 Song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유포/유행시키고자 하는~

뇌량과 뇌세포의 돌이킬 수 없는 흠결이 있는

화하성(華夏性) 족속들은?~,  

  



더 이상 요상한 짓거리(!)를 남발하지 마시기를

간곡(?)한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언론매체의 모든 기자분들에게~

삼가 정중하게 청원(請願)하는  바이올시다......!!!



  




서토(西土) 화하족(華夏族)들이 그들의 일천한

역사성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의 고구려사까지도 그들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사마천의 사기(詐欺)수법을 이어받아

감히, 서토의 변방 이었던 화하족속들이 ~~~

본토의 주인이었던, 우리의 고대사와 대조선의 역사를

겁도없이 난도질을 하는 것이고,  







이것은 마치 양자로 들어온 새끼들이

광활한 영토에 눈이 멀어~

애비 / 애미 / 형제들을 도살하고,

뻐젓이  그 대륙의 본적지와 원적지를 차지하고서는

호적 자체를 뜯어고치려는 수작에 동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규정하겠으며







내용면에서 실질적으로 규명이 가능하고,

중국 고대사의 역사적 사실들 중 ,

漢나라를 포함한 사마천의 사기 25사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변방국들의 실체는~~







사실상, 내용적으로는

고구려/ 신라 / 백제 / 발해 / 부여 등의 고대사와

대조선[ 四夷: 東夷 / 서융(西戎) /

남만(南蠻) / 북적(北狄) ]의 한  갈래들이며,







이 사이(四夷)를 지칭하는 용어자체도,  

과연 화하족 떼놈(?)들의 입장에서

명명한 용어임에 틀림이 없건만,  





그들의 사기 25사에 무수히 등장하는

이 사이의 실체가 조선임을 알고 있는

양심있는 화하족 [支那]의 역사학자들은

사마천의 사기 25사의 대부분이

한국의 고대사와 사이의 역사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이라는 토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국이라는 용어를  

왜? 무엇때문에?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렇게~

중국을 = 그 당시의 명나라로  

희한한 상황비정(狀況比定)을 하여

대입하는 것인지?......









지금의 한반도 전체는

대륙조선사의 위치상

강화도(江華道)였음을

강력하게 선언하는 바이다...!!!





1900년 이후,  한글학회를 비롯한



어용 친일 매국노들의 수많은 집단들을 포함하여~





훈민정음을 그렇게 왜곡시켜,

중국을 明으로 비교해석하려는  

해괴한 집단들의 음흉한 흉계(?)를~

지금은 역사적 매국노 새끼인 이병도도  

염라대왕의 초청장을 들고

먼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 마당에~  

이제는 일말의 양심선언을 해야 함이 옳지 않은가?











그 구한말 당시, 1910년 이후,

한글보급확대의 전면에 나선

한글학회를 비롯한 관련 친일어용학회들은

스스로 민족앞에 벌거벗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훈민정음에서 언급된



[ 중귁에 달아 ]의 " 에" 를 놓고서

비교격 조사인 " 과 " 로 작위적 해석을 하여

중국에서조차도 라고 해석되어져야 맞는 것이며,

1443년에 만들어~











[ 사실 이 부분도 세종대왕이하

집현전 학자들이

시종일관 작업하여 만든 것이 아님 ]



그 후, 3년이 지나서야  반포를 한 이후,  













그렇게나 백성들이

서로 다른 무수한 방언들로 인해

말들조차도 통하지 않음을

궁휼(窮恤: 불쌍하게생각함)이 여겨





이런 전차로 이글을 맹그노니하면서~~~~  

눈병까지 앓아가며, 안경을 써 가면서까지  

집현전학자들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해 만들어진  

그 글들이 한글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게다가 아울러서,

구한말의 1910년 경술치욕이후부터

줄기차게 주시경이라는 인물(?)이  

열심히 뒤늦게~~이미, 훈민정음 창제이후 무려~

장장 460여년이나 흘러가 버린 세월을 뒤안길로 하고,













한글보급운동이라는 요상스러운 활동(?)까지 해가며,

한글교육에 열을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륙조선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도

한반도에서 사용한 말이 아닌,











[ 1960년대 후반까지도 한반도(?)는 여전히

한글의 문맹율이 50%를 훨씬 초과했던 사실을

인지하시기를 바람 ]









여전히 그 방언속에서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이는 실담어를 평생의 연구분야로 설정하여,



십수년간을 연구해 오고계신 실담어의 대가이신



강상원박사님의 연구논문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명확하게 실담어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여



만들어낸 발음체계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훈민정음의 창제과정도  집현전의 주도적 역할이 아닌,



그 당시 실담어의 대가이셨던 '혜각존자 신미대사’의 학식이



상당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셨음.  









<훈민정음>에서 본 <중국>!!!과

우리가 쓰는 말의 근본과 그 정체성(?)에 대해서...!!!  

이라는 대륙조선사의 카테고리에 게재된

두 가지 제목의 내용을 확인하시기 바람.  

  





[ 훈민정음의 어원 ]

“우리말의 뿌리는
실담(범어의 음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도 범어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
일등 공신은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신미 스님인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속리산 법주사에서 개최한 특별강연회에서
한국세종한림원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집현전 학자도
세종대왕도 아닌
신미 스님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한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 해제본에 나와 있는
초기 표기법을 검토하면
실담에서 유래한 흔적이 매우 많다”며,

  





“이는 분명, 훈민정음이 실담을 기초로 제작됐고
따라서, 그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에 의해
훈민정음이 제작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박사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범어의 음가인 실담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훈민정음도 이런 범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 했던 사람은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바로 집현전 학자였던
신미 스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
신미 스님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강 박사님은  “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정치적이고, 복합적인 이유로서
고의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 ”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상원 박사는 “영산 김 씨의 족보와,
『복천보장』에 등장하는 기록에 의하면,
신미 스님은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되어,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박사는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한 학자적인 노력을
경주(傾注)한 것은 10여년 전부터다.





1994년 동국대에서 ‘원효의 중도사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경전을 영문화하는 작업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존 영문 경전 곳곳에서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범어본 경전을 직접 번역해야겠다는
발원(發願)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범어를 공부하게 됐다.





범어 사전을 통독한 것도 15회 이상,
범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는 한글과 범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동국정운』에 나타난
한글 고어 표기법이 실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그는 훈민정음이
실담에서 나왔고,
따라서, 범어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강 박사는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범어 관련설 이외에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능엄경』,『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이
제일 먼저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신미 스님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blog.daum.net/j2030/6373770에서  스크랩이 되지않아,

그대로 올려진 글을기재하고자 한다.  





이글은 조선일보 정권현 도쿄특파원이라는 사람이

조선일보 6월 6일자에 올린 글을

위의 네티진이 스크랩한 내용이다.







올해는 '헤이그 밀사사건' 이 있은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일본 외무성이 발행하는 외교전문지

'외교포럼'이 6월호와 7월호에 걸쳐서,

헤이그밀사사건 100주년 특집 논문을 실었다.

조지(上智) 대학 교수가  그 당시의

외무성 전문(電文) 등 미공개 자료를 발굴해

을사늑약체결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노력을

새로운 각도에서 추적, 조명했다.    

  



헤이그 회의가 개회된 것은

1907년 6월 15일 이었다.  



그로부터, 10일 후인 6월 25일,

고종황제의 밀명을 띤

3명의 사절이 헤이그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대법원) 예심 판사 이준(李儁),

전 駐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이위종(李瑋鐘) 등이다.









그들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전권위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이들의 시도는 처음부터 성공전망이 없었다.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승리가 결정되자,

곧 바로 가쓰라.테프트밀약(1905년 7월 29일)을 맺어

왜(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했고,

영국(1905년 8월 12일),

프랑스(1907년 6월 10일)가 뒤를 이었다.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였다.





사절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건 나라가 러시아였다.



헤이그로 가는 도중에,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면서,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미 미.러 / 또는 영.러/의 전쟁으로



전개되어야 할 상황임에도

以夷制夷의 전략으로

일본을 그 대리전쟁자로 내세워

러시아는 그 러.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대일 협상방침으로 돌아선 러시아 외상은 오히려

  



"한국(? 그 당시 한국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



조선이라고 표현해야 명확한 표현은 아닐런지?)의



비상식을  질타했다"고 한다.

  

희망과 절망,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가운데,

헤이그에 도착한 사절들은 투숙한 호텔 앞에  

태극기를 내 걸고, 필사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우선 회의의  의장격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 개입할 입장이 아니다. " 하며,

면회조차 거절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및

중국(?: 청나라?)대표도

개별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했지만,

모두 문전에서 박대를 하였다.

  



이때부터 이위종의 장외외교가 시작된다.

당시 그는 20살이었다.

외교관인 아버지 (주러대사 이범진)를 따라,

7살 때부터 구미 각국에서 생활하면서

프랑스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했다.

  



유창한 외국어실력으로

일본의 비도(非道)를 낱낱이 고발했다.







" 이것이 당신네

기독교 국가의 정의인가? "  라고 규탄하면서~



만장한 청중 앞에서

불어로 1 시간동안 웅변조로,  

격렬하게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 고 보도했다.  



청중은 깊이 감동했다. 연설이 끝나자



몇몇이 일어나 지지발언을 했고,



'한국을 돕자'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그때, 현지에서 '밀사 (密使)들과

대화를 나눴던 유일한 일본인이

나중에 마이니치 신문회장을 지낸

다카이시 신고로(高石眞五郞)기자였다.

그는 일본정부입장을 옹호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기사로 남겼다.





" 그들 3명은 진실로

애국의 지사(志士)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살펴 본다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서 임무를 떠안은것 같았다. "  

그런 일이 있은 후에,

3년 뒤 한국은 일본에 완전히 흡수된다.





그 망국(亡國)의 과정에서

이들 3인 열사(烈士)의

움직임마저 없었다면,

우리역사는 얼마나 더

쓸쓸할까를 한번 생각해 봤다.

6월은 나라(?)를 생각하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바로, 그 나라를 해체시킨

주요 공동범죄집단이 미.영.러.일이며,

동조내지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방조한 집단들이 유럽제국들인 것이며,





푸춧간의 부위별로

도살되어 널려진, 그 나라가 바로

구한말까지도 장장

500년간을 면면하게 이어 온

이성계의 대륙조선인 것이다.





[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은 국가명칭이 아니며,

지금의 영어식

CHINA[支那]국명을 쓰고 있는

그 명칭조차도 대조선의 곁가지였던

수많은 제후(諸候)국들이 썼던 ~~~ ]





그들이 주장하는

한(漢)帝國의 역사도 사실은~

떼놈 서토(華夏)족속들이

주장하는 그 漢帝國조차도

전한/후한으로 갈라져서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멸망의 길을 걸었었고~

그나마,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해 온 그들이 주장하는

위대하고 찬란했다는,

떼 놈들의 역사적 국가존속기간은





수나라(581∼618)  / 당나라(618∼907)  /

오대십국(907∼979)  /

송나라 (960∼1277)  / 원나라 (1271∼1368) /  

명나라 (1368∼1644)  / 청나라 (1636∼1912) 중에서





그나마, 당/송/명/청이 나라다운

존속기간을 유지한 것이며,

실제로 支那[CHINA]의 의미는,

곧 나라라는 의미인것이며,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와

대조선등의황제국의 지배그늘하에서

조공을 받치던 제후국(諸侯國)을 지칭한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이 한나라/당나라/

송나라/명나라/청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제후국들의 존속기간은~

화하(華夏)족의 역사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하기 짝이 없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이성계조선등의  

역사적 존속기간에 비교한다면,

이성계조선의 500년과 비교해도  

찬란했던 중국(?)역사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의 조소(嘲笑)거리가 될 것이며,



  

사마천 자신이 태어나기도 천 년전의

화하(華夏)족의 역사를

얼기설기해서 지었다는~~  

支那(대륙변방의 모퉁이

제후족속에 불과했던 변방서토족)의

史記의 내용들을 실상 살펴보면,







정말로 그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들의 나열인지조차

의심스럽기가 짝이 없다......!!!





오히려, 아래의

미국놈들의 시각에서  

한국의 고대사를 정리했다는

역사적인 시각이 더욱

그 신빙성이 있는 대목이 많다.

  



미국은 바로 영국을 비롯한

일본과 러시아와 함께

대륙조선을 강간(强姦)하고 윤간(輪姦)한  

공동범죄자(共同犯罪者)이자,

공동교사자(敎唆者)인것이며,~  

대조선의 실체를 역사적,

실체적으로 분해시킨,

해체현장속의 현행범들이었기에,

  



그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수많은 미국놈들의 눈에 비쳐진

바로 그 현존했던 대조선의

실체들을 낱낱이 알고 있는 것이며,  



그것들은 바로, 서양놈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조선의 모습들이라는 견문기 등등의~~



수 많은 대조선 관련 서적속에서



그 한반도의 조선이 곧 대륙조선임을~





그들의  눈과 글로서 묘사하는 내용들이

한결같이 한반도 조선에서는 결코

관찰할 수 없는, 동.식물과 여행경로를 통한

지리적 설명과 배경들은  한반도가 조선임을

결정적으로 반증[反證]하는

귀중한(?) 사료들인 것이다...!!!

  



아래의 도서에서 명백하고도 적나라하게



한반도조선이 아닌, 대륙조선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현장의 모습들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 조선을 내용으로 지은 책 ]

1. 한국천주교회사 - 류홍렬 : 카톨릭출판사 1962


2. 한국천주교회사 -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최석우 역주


3. 조선견문기 - 필립프란CM 폰 시볼트 지음


▶ 류상희 譯 : 조선견문기 박영사 1987


4. 세스 뻬데스 : 박철 著 : 카톨릭 변천사



1987년 초판, 1993편 재판


5.6 한국기독교의 역사1,2 : 한국 기독교사 연구회(1989)


     한국기독교사 역사연구소(1993)


7. 구한말 격동기 비사(秘史) 알렌의 일기 :



김원모 완역 -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8. 100년전의 여행, 100년후의 교훈 : 조지 나다니엘커즌 著


▶ 라종일 譯 : 비봉출판사 1996


9. < 조선왕국 이야기 - 100년 전 유럽인이 유럽에 전한 >



김영자 編著 서문당 1997


10.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 백성현. 이한우 (새날: 1999)


11.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 권혁희 (민음사 2005)


12.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아손크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책과 함께 2005년)


13. 내가 본 조선, 朝鮮人 : A 이르게바예츠 / 김정화 옮김




14. 양자강(揚子江)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 : 이사벨라 버드비숍


     (김태성. 박종욱 옮김) : ( 효형출판사 2005년 )




15. 조선 기행 <샤를바라 / 샤이에 롱 지음>

성귀수 옮김 <눈빛 2001>


16. 코레야 1903년 가을 :



바츨라프 세로세프스키 지음 / 김진영 외 옮김


     (개마고원 2006년)  



아래의 내용은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고대사를 다루어 책을 펴낸

내용의 일부들을 발췌하여 기재한 것이다.





Rise of Nations [Memorable Ancient Kingdoms

and their history] 부록



Korea was on-ce the Roman Empire of Asia.
Koreans today claim that they are pure-blooded race.
However, the root of Koreans come from Northeast Mongolia
and Manchuria, and from the Siberians.


The Kaoli tribes, one of the Mongol"s
horse-riding tribes moved to the Korean peninsula
and were intimidated by the Natives living
in Mahahn, Byunhahn, Jinhahn.
They shared almost the same culture and language.


한국은 고대에는 동양의 로마 제국과도 같았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단일민족이라 주장하지만
한국인의 기원은 동북아의 몽골고원과 만주
( 우리가 알고 있는 북간도가 아니며, 또한,
중국놈들이 동북공정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주의 위치를
동북삼성으로 비정한 그 만주가 아님 ),
시베리아 일대에서 시작된다.
  

몽골계 기마민족 중 하나인 카올리(고을리) 부족은
한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의 원주민과 교류가 잦았다.
그들은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구사해 공통점이 많았다.
  

Later on Koreans built the mighty Koguryo Empire
which was a big threat to the Chinese and
the Huns and even Japan was on-ce under Korea"s dominance.
This strong Empire lasted for 907 years
followed by three native Korean kingdoms
(Baekjae, Shilla, and Kaya).

  
후에 한국인들은 거대한 고구려 제국을 건설하는데,
이 나라는 지나인들과 훈족에게 크나큰 위협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조차도 고대 한국인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한다.
907년동안 지속된 이 강대한 제국은
고대 한국의 또다른 세 왕국
(백제, 신라, 가야)과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These days the Chinese insist that Koguryo was
one of their ancient countries but
the way historians and archaeologists see it,
there are so many evidence that Koguryo was a Korean Empire.
The following lists are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최근에 지나(支那)는 고구려가
자신들의 고대국가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나[#$%^&* ^_^ ]~~~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이 보기엔
고구려가 한국 제국이었다는 증거가 무수히 많다고 한다.
다음은 한국의 고대사를 연별로 나열한 것이다.


*Ancient Chosun (BD 2333)
- Dangoon becomes the first king of Korea.

*고조선 (기원전 2333년)
-한국의 첫 고대국가로 단군왕검이 세웠다.

*Buyeo (BD 453)
- Dangoon"s dynasty is over.
Ancient Chosun"s territory is taken by
the Han forces of China and
Koreans build Buyeo in Manchuria.

*부여 (기원전 453)
- 단군왕조는 무너진다. 고조선의 영토는
기원전 108년에 지나의 한사군에게
상당수 빼앗기고 한국인들은 만주
( 동북삼성의 만주가 아님)에 자리잡아 부여를 세운다.
  

*The Rise of Koguryo (BD 277)
- At BD 37, Gho Ju Mong of Buyeo leads
many Yemek people from Kaoli to
Guryo(Jolbon Buyeo, BD 277) and
succeeds the throne. Guryo is upgraded to
"Koguryo(The great Guryo)".  

*고구려의 건국 (기원전 277년)
-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고주몽이
카올리의 예맥족을 상당수 이끌고
기원전 277년에 세워진 졸본 부여에 자리잡은
구려국으로 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구려는 "고구려(위대한 구려)"로 새롭게 시작된다.

  
*The growth of Baekjae federal Kingdom. (AD 268)
-At BD 18, the son of Ju Mong moves down
with his supporting forces to Korean peninsula
and founds Baekjae. Baekjae colonizes Japan and
Shandung peninsula in AD 268.

*백제 연방국의 성장 (서기 268년)
-주몽의 아들이 그의 추종세력과 함께
한반도 쪽으로 남진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백제는 서기 268년에 당시 미개하던
일본과 산둥반도를 식민지로 삼는다.
  

*Shilla"s birth(BD 57) and Kaya"s submission to Shilla(AD 532).
-The herds in Mongolia search for a fertile land and move to
the Korean peninsula and
establish a multitude-like nation called Seorabal.
Few centuries later the Korean Indian Kingdom
Kaya is submitted to Shilla.

*신라의 건국(기원전 57년)과 가야의 신라 귀순(서기 532년)
-몽골에서 떠돌던 유목민족은 비옥한 땅을 찾아다니다
한반도로 이주하여 서라벌이라는 서민적인 국가를 세운다.
몇 백년 후에는 한국과 인도 혼혈국가(이상하군요?...!!!)인
가야가 신라와 병합된다.  



*Han"s colony Lolang is destroyed by Koguryo.(AD 313)
-Lolang has been the bridge of culture trade
between China and Korea.
However, when Koguryo has finally restored most of
the lost lands of Ancient Chosun(AD 125),
Lolang becomes useless and gets overtaken by Koguryo.


*한사군의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멸망됨.(서기 313년)
-낙랑은 지나와 한국의 문화교류를 잇는 다리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서기 125년에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했을 때
(93년동안 왕위에 있던 태조왕이시죠^~"b)
낙랑을 지키던 지나 관할병의 역할은
쓸모없어져 고구려에게 넘어갔다.

*Koguryo Empire, the primary nation of East Asia. (AD 412)
-Koguryo becomes the strongest nation of East Asia
  

[ 서양놈들의 시각에서
아시아를 동아시아로 표현한 것이며,
그들의 현재의 시각은 광활했던 대조선이 영토를  
중동/중근동/동북아/동아시아 /
동남아시아/극동아시아/서남아시아 등등으로




푸춧간의 고기썰듯이
갈라놓는 정치외교사적으로
교묘하게 분산시켜, 아시아의
개념정의 자체를 매우 혼란스럽고
기준이 애매모호하게 지리적인 개념으로도
분산시켜 만들어 놓은
음흉한 역작(力作?)인 것이지요!!!
원래부터 아시아전체가
하나의 제국인것이데 말이죠!]

and the emperor Gwang Geto extends Koguryo"s
territory to its climax and helps Shilla defeat Baekjae.
Koguryo conquers Baekjae and takes over its federal colonies.

*고구려 제국,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다. (서기 412년)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절정으로 넓히고
신라의 부탁으로 백제를 격파한다.
고구려는 백제를 점령하며 백제의 모든 식민지를 강탈한다.
(이 때 일본열도의 북부의 실효권이 고구려에 넘어갔다죠)




*The war between Sui Empire and Koguryo. (AD 600~622)
-This uncovered history would probably be one of
the the most massive war in mankind history.
Over 1 million Chinese were killed by the Koreans in this war,
and Sui Empire of China has fallen by continuous attacks
from Koguryo Empire of Korea.


*수나라와 고구려와의 전쟁 (서기 600~622)
-이 풀리지 않는 역사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대규모의 전쟁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전쟁에서 100만명 이상의 지나인이 고구려인들에게 사살당했으며,
지나의 수나라는 결국 한국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했다.


*The fall of Baekjae federal kingdom and
Shilla"s betrayal. (AD 660)
-Shilla shakes hands with
the new Chinese empire Tang and destroys Baekjae.
After taking over Baekjae, Shilla betrays Koguryo and
become allies with Tang and wage a war against Koguryo.

*백제 연방국의 멸망과 신라의 배신. (서기 660년)
-신라는 새롭게 일어난 지나 제국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킨다.
백제를 정벌한 뒤에 신라는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와 손잡아 고구려를 쳐부수려 한다.



*The fall of Koguryo Empire. (AD 668)
-Due to General Yeon Gae Sho Moon"s autocracy,
Koguryo"s inner conflict becomes worse and worse.
And Tang, Shilla alliance finally destroys Koguryo Empire.

*고구려 제국의 멸망. (서기 668년)
-연개소문 장군의 독재로 인해,
고구려의 내정은 날로 쇠해갔고 이 틈을 타서
나, 당 연합군은 마침내 고구려 제국을 무너뜨린다.



*Great Shilla and Balhae"s establishment. (AD 698)
-Shilla takes total control of the Korean peninsula.
After Koguryo"s fall, people of Koguryo have been fighting against
Tang"s imperialism for 30 years
not to lose Koguryo"s territory from China.
With the help of Malgal clans, Tae Cho young,
the general of Koguryo defeat
the forces of Tang and establishes Balhae.




*통일신라와 발해의 건국. (서기 698년)
-신라는 한반도의 대부분 영토를 소유하게 된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 고구려 사람들은 30여년동안을
고구려의 남은 영토를 뺏기지 않기 위해
당나라의 영토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왔다.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은 말갈족의 도움으로
당을 격파하고 발해를 세운다.  



*Balhae"s revenge and Tang"s destruction. (AD 908)
-Balhae continues to restore the lost territory of Koguryo
and keeps on facing Tang.
This leads Tang dynasty to its end due to continuous battles
and weakened  Internal affairs.

*발해의 복수와 당의 멸망. (서기 908년)
-발해는 계속해서 당나라와 싸워가며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려 한다.
이것은 당나라의 국력을 극도로 소모하여 계속된
전쟁과 내정의 불안으로 당나라는 멸망한다.


*The fall of Balhae and Koryo"s establishment. (AD 920)
-Balhae too lost pretty much most of
its strenght for fighting Tang and while Balhae got weakened,
the Georan tribe from Western Manchuria
invaded Balhae and took over its territory.
Balhae people immigrated to Great Shilla.  
Later on, Wang Geon won the throne of Shilla
and establishes Koryo,
the first united nation of Korea since ancient Chosun.  


*발해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 (서기 920년)
-당나라와 싸우느라 발해 역시 싸울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발해가 약해진 틈을 타 서만주에 있던
거란족이 쳐들어와 발해를 정벌한다.
후에 발해 사람들은 통일신라로 귀순하였다.




후에 왕건이 신라의 왕위를 찬탈하여
고려 왕조를 세우는데,
이것은 고조선 이래로 한국 최초의 통일국가이다.



※출처: Rise of Nations
[Memorable Ancient Kingdoms and their history] 부록

(참고로 부록에 고대사가 실린 국가들로는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 한국,
파키스탄, 포르투칼이 있습니다.)
지금은 책이 품절되어 구할 수 가 없습니다.  
교보문고의 외국서적코너
담당 직원에게 별도로 주문을 하여야
구하실 수가 있습니다.  




물론 원본도 여타의 외국놈들의 시각에서 본
조선의 실상에 관한 책들 중
대부분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반도가
조선임을 위장허위기술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이 책 또한, 그러한 왜곡된 부분이 많지만,
  

지금의 한반도(?)에 존재하는
반도식민지사관 강단사학자들과 같은
조두과(鳥斗科) 의 견공(犬公)들보다는 그나마 ,
역사에 대한 시각이 그런대로
괜찮은 놈들이 만든 서적이군요!!!
  










▼“정의를 찾아왔건만 여기도 정의란 없단 말인가”▼




1907년 당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세 열사의 활약을 상세히 소개한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고종황제의 밀명을 품고 서울을 떠난

이준 열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열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 열사와 각각 합류한 뒤

시베리아를 횡단해 독일 베를린,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르는 장구한 여정에 올랐다.

  



당시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조차

할 수 없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27일 다시 회의장을 찾아

‘독립 호소문’을 각국 대표에게 배포했다.



마침내 현지 언론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만국평화회의보’는 6월 30일자에서 ‘왜 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제목으로호소문 내용을 전했다.

7월 5일자에서는 열사들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다음은 당시 보도된 일문일답.



―여기서 무얼 하나.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나.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나?

    

  


“우리는 이 조약(을사늑약)이

국제법상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요청하고자 한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 상태로 몰아넣고서

우리의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그렇다면 이 세상에 정의란 없다는 얘기인가?,

  

  

여기 헤이그에서조차도….”



열사들은 7월 8일 국제기자클럽에 초청받았고,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 열사가

‘한국의 호소’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대표의 연설에 각국 언론은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인도네시아의 로코모티브지 기자는

“서명을 해서 한국을 지지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던 중 7월 14일 드용 호텔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만다.

이준 열사의 시신 운구를 위해서는

당시 일본 영사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일본 영사는 끝내 허가증에 사인해 주지 않았다.

일행은 할 수 없이 9월 5일 장례식을 치르고

이준 열사를 차가운 이국땅에 묻었다.




헤이그=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의 쿤 취스테르 교수는

고려대 BK21 한국사학교육연구단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기념해

15일 고려대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서

조선 사절단에 대한 각국 대표와

언론의 반응을 살핀 논문을 발표한다.

  






취스테르 교수는 만국평화회의

부총재이자 네덜란드 외교관인 드 보포트가

고종의 특사를 대하는 태도,

만국평화회의를 취재한 각국

언론의 보도 등을 분석했다.







드 보포트는 조선

사절단의 도착 소식을 듣고

호텔로 가서 그들을 만났다.

특사를 만난 드 보포트의 첫번째 질문은

"당신들이 조선 황제가

친히 보낸 사절이 맞소?"였다.

  



고종의 특사는 황제의

칙령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고

드 보포트는 그들이 거짓 밀사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사절단의 활동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이었다.






드 보포트는 일기에 '일본이

조선과 만주 모두를 지배할 때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일본은 앞으로 우리의

동인도 제도에 눈길을 돌릴 것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썼다.


  


다른 열강의 대표나 주요 언론

역시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더 데일리 뉴스(the Daily News)'는

헤이그 특사 파견사실을 전하면서

'영국 국회의원 대부분이

1905년 조약(을사늑약)을 위반한

조선 황제에게 관대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보도했다.

  



고종의 특사에게 관심을 보인 곳은 시민 단체였다.

평화운동가 윌리엄 토머스 스테드는 회의기간 동안

회담 소식지인 '더 쿠리에 드 라

콘페랑세 드 라 파'를 발행했다.



스테드는 6월30일과 7월9일 이위종의 인터뷰를

'더 쿠리에'의 1면에 싣는 등

특사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한 특사들도

'더 쿠리에 '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이위종은 '더 쿠리에'와의 7월5일자 인터뷰에서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현재까지 우리가 헤이그의 법과

정의의 전당에 요청한 것은

그 조약(을사조약)이 국제법 상으로

유효한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최고중재재판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불만을 어디에 제기하고

이런 불법행위를 규탄할 장소는

과연 어디란 말입니까?"







취스테르 교수는 제한된 여건에도 불구하고 "

이위종이 언론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뤘다"고 평가했다.







이준의 분사(憤死)와

위종의 적극적인 언론활동은

마침내 주요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로이터 통신은 헤이그를 떠나

미국으로 가는 이위종을 인터뷰했다.




"본인은 우리의 임무가

실패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에 동의했거나

독립을 포기한 사실이 결코 없음을

헤이그 회담 뿐 아니라 유럽의 모든 정부와

미국에 알리기 위해 황제의 밀사로 임명됐다"

  



로이터 통신이 취재한

이위종의 인터뷰는

'더 데일리 뉴스'에 실렸다.

취스테르 교수는 "언론의 기사를 통해

본 조선 사절단은 여론을 잘 활용했고,

국제적 법률절차 역시 잘 습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결론을 맺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그동안 우리의 사료만으로

설명하려했던 고조선의 역사가

역사공정을 진행중인 중국측과

우리의 역사마저도 의심하며

배척하려는 일부 대한민국인들에게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가 수 있도록

그 역사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사료들로

고조선의 실체를 증명하고

알리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신동아 2004년 2월호에 실린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님의 글을 개재하였으니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적,

문화적인 뿌리와 그 범위를 재확인하시어

우리 개개인 하나하나가 역사적 자긍심으로

정수(精髓)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 이래 중국에 살았다
-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1.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

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

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2.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

(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禹夷))·회이(淮夷)·

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모두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延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3.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底)이다(夷者底也).”







여기서 이(夷)를 저(底;)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底;)란 과연 무엇인가. 저(底)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

(深根固底)’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底)근본(根本)·

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底)의 의미를 다시 저지底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

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 底地)의 저(& 底;)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底;)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4.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

(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

(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

(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

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

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었는가?....!!!





이런 각도에서 관찰해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5.‘書經’의 ‘우이(禹夷)’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禹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 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

현토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

(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禹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禹夷)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

(禹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6.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

(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

(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

(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
분류 :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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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7.12.28
09:38:10 (*.205.14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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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래

2007.12.28
09:51:46
(*.205.149.190)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

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7.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이 허구와 날조라는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낙랑·

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8.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

(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포함되는 광활한 지역이 바로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서,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그 어떤 왜곡되고 각색된

위서들을 들이댈지라도

결론은 바로 동양사가 동이족의 찬란했던

역사의 본 무대~~

동양사역사의 主役 그 자체인 것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1.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이정기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의 후손 이다.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며,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 부장이 되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평로에서 산동으로 건너온 그는

치청의 절도사 ' 우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가 된다.







서기 765년 당은 유화정책으로

이정기를 치청의

절도사로 임명하지만,

그는 반당세력으로서

독립노선을 추구한다.







서기 778년에 그는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계속적으로 당에 대항 하는데,

이 당시 치청의 인구는 약500만,

넓이는 18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

군대는 10만이었다고 전 한다.







(당시에 신라의 넓이가 약 13만

평방킬로미터 정도 되었음을 볼 때,

상당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당의 인구는

5000만 정도 되었고

군대는 60 만 정도였음)

서기 781년 평로치청군은

제음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이때 이정기(732-781)는 사망하고

서기 782년 그의 아들 이납이 제왕에 오른다.

서기 813년 이납이 죽고 이사고가 즉위한다.





서기 815년 이사고가 죽고

동생인 이사도가 즉위한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치청을

칠 목적으로 하음전운원에 있는

150간의 창고에 200만석의

군량 미를 비축하지만

이사도의 공격으로 불타게 된다.





서기 817년 당나라 헌종은 당군, 선무군,

위박군, 무령군(장보고의 군대)을 동원하여

치청을 공격하는데,







이사도가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

부관인 유오에게 시해당하여 사망함으로써,

서기 818년에 4대 58년간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평로치청왕국은 멸망한다.


다음은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 씨아밍차이씨의 말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찾아 올 줄 알았다....

이정기는 당신들 한국인의 선조다.

이정기의 나라는 형식상 당나라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조세,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산동성 전체 와 하북, 하남,

안휘성을 다스린 독립왕국이었다......"


아직도 청주 범공사에

이정기가 심었다는

당추(唐楸)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의 나라

평로치청왕국"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3
<수와 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이유>


수나라가 612년에 고구려를 침공할 때부터

668년 당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끈질긴 침공 기사를 읽으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수와 당은 고구려와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처럼 집요하게 고구려를 공격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제시했는데 이곳에서는

임용한 박사님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진시황제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한족과 북방기마민족(흉노)이다.

한족의 왕조가 쇠퇴하면

북방기마민족이 치고 들어와

영토를 점거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진시황 이후 중원 패권

북방기마민족이 차지


그 시작이 오호십육국

(1五胡十六國)이었고

이를 회복하고

중국을 통합한 나라가

수와 당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매우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시대를

'혼란기' 혹은 '암흑기'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시기에 서진이 흉노족에게 점령당한 후

한족이 대거 강남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위나라를 이어받은

서진이 단명하자,

사마예가 강남땅에서

동진을 일으키고 화북지역에는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라 해서

갈, 저, 흉노, 선비, 강족 등

많은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저족 출신의

부견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전진왕조를 세우고

강남의 동진과 대치한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한족은

외래문명에 대해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민족인 다수의

기마민족 왕조가 세워지자

자연적으로 한족도 외래 문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불교수용도 그 중 하나로 설명된다.








후한 말에 들어온

불교가 이때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됐는데

이는 북방의 소위 ‘오랑캐 왕조' 즉

기마유목민족 계열이 들어선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이 중국사에서 이 시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번한잡거'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이민족과 한족이 같은

화북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

민족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국의 통치를 사실상 흉노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할 결과로 볼 수 있다.





북조 중에서도 북위 효문제 시대에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폈는데

그는 선비족이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과 결혼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수문제 · 당고조 모두

한족아닌 이민족 출신


그런데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와 당나라도

족보를 따진다면

모두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이라는 점이다.





수문제는 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 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도 한족 출신이 아니다.

이연도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연은 당 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노자의 성은 이씨임)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









학자들은 이연이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이 이씨 성을

하사하는 관례에 따라

이씨 성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당태종의 충복으로 볼 수 있는

장손무기는 당고조 이연과 같은 척발씨로

북위 때 전공을 많이 세워 성씨를

장손(長孫)으로 바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북주의 표기대장군이고

아버지는 수나라의 우효위장군이며

그의 여동생이 태종의 처 문덕황후다.

그는 혈통이 척발씨이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세민과 절친하게 지냈다.


태종의 또 다른 충복인

우지녕도 선비족의 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동주총관을 지냈고

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내사사인을 지내는 등

정통적인 북방기마민족 가문이다.


중국을 사실상 통치한

오호십육국들의 원래 시발점은

고구려처럼 북방기마민족으로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이었다.

그 정도의 작은 집단도 경우에 따라서는

통일왕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기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북방기마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중국의 역사는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 중국 선제공격 사실 잘 알려져!!!


요동방어선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국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중국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기말고사 시험이 끝나고,

좀 더 체계적으로

강간당하고 윤간당한

우리의 대조선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테마별로

하나하나 공부해보도록 합시다......!!!



心淸事達 이 병 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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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한민족 정치포탈 서프라이즈 - 제정신 가지고 사는 이들이 모인곳 아트만 2014-07-12 26474
공지 한민족 뉴스타파 - 시민의 회비로 운영되는 / 믿을 수 있는 언론 아트만 2014-07-12 14418
공지 지구 한민족의 맥에 올려지는 현실 정보에 대하여 아트만 2013-08-03 24140
41 한민족 산해경과 발해의 위치와 역사의 허구성 조강래 2007-12-29 4791
» 한민족 기자들의 일천한 역사의식 [1] 조강래 2007-12-28 4207
39 한민족 동국여지승람은 한반도를 가르키는가 ? 조강래 2007-12-27 4941
38 한민족 중국대륙의 18성과 28성, 그곳을 다스린 원래의 주인공은? 조강래 2007-12-26 5064
37 한민족 조선을 다녀간 유럽인들의 증언이 한반도 인가 ? [5] 조강래 2007-12-25 5911
36 우주 6. 우르국 샤카족의 마지막 성자 석가모니 [3] 굴뚝청소부 2007-12-06 4912
35 우주 5. " 천상의 시간으로 사흘동안 그대들이 역사의 맥을 잇도록 하라." [1] 굴뚝청소부 2007-12-06 4641
34 우주 4. 선조들의 숨결이 배여 있는 시베리아 강토 굴뚝청소부 2007-12-06 4058
33 우주 3. 중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 치우, 신농, 복희, 여와 굴뚝청소부 2007-12-06 4610
32 우주 2. 12 별나라에서 온 존재들로 이루어진 12 환국 [1] 굴뚝청소부 2007-12-06 4809
31 우주 1. 天神의 후예들 굴뚝청소부 2007-12-06 4643
30 우주 한민족 9천년 역사 강준민 2002-09-11 10267
29 우주 그리스도의 사명 [1] file 지영근 2002-09-05 7938
28 우주 또 하나의 성서(Bible) 지영근 2002-09-01 7837
27 우주 하늘의 심판자 지영근 2002-08-30 7092
26 우주 예언자의 시대. [1] 지영근 2002-08-28 6719
25 우주 대홍수의 여파. [1] 지영근 2002-08-26 6322
24 우주 아틀란티스의 멸망 지영근 2002-08-22 9283
23 우주 성서의 예언자가 말하는 진실. 지영근 2002-08-20 8066
22 우주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지영근 2002-08-20 7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