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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전법륜 중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물질불멸(物質不滅)을 말하지 않는가? 어떤 특정한 공간 중에서, 사람들이 이 일을 마치면, 즉 사람이 손을 한번 휘둘러 어떤 일을 하면 모두 물질로 존재하며,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영상과 정보가 남을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그것은 불멸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그곳에 존재할 것이며, 공능이 있는 사람은 과거에 존재했던 광경을 보기만 하면 곧 알 수 있다. 장래에 당신이 숙명통공능이 있게 된 후, 당신이 오늘 우리가 여기서 강의하고 있는 그런 형식을 보려 하면 그것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이미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날(降生) 때에 하나의 특수하고 시간개념이 없는 공간 중에 사람의 일생이 이미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일생뿐만이 아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개인분투, 자아개조는 필요 없는가?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개인분투는 인생의 작은 것을 개변할 수 있으며 일부 작은 것들은 개인분투를 통해 일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바로 당신이 개변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업을 짓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일을 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이렇게 하면 그는 곧 다른 사람의 이익을 점유하여, 그는 나쁜 짓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련에서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라고 거듭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이치다. 왜냐하면 당신이 노력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당신의 생명 중에 이것이 없는데 사회 중에서 본래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당신이 얻는다면, 당신은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큰 일은 그가 움직이려고 해도 속인으로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 사람이 나쁜 일만 하고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을 모두 한다면, 그는 그의 인생을 개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직면하는 것은 철저한 훼멸이다. 우리가 고층차에서 볼 때, 사람이 죽어도 元神(왠선)은 불멸(不滅)한다. 元神(왠선)은 어찌하여 불멸하는가? 사실 우리가 사람이 죽은 후에 영안실에 놓인 그 사람을 보면, 그것은 단지 우리 이 공간 중의 인체 세포에 불과하다. 내장(內臟), 신체 속의 각 세포 조직, 온 인체는 이 공간 중의 세포가 탈락된 것일 뿐, 다른 공간의 분자원자양성자 등의 성분보다 더욱 작은 물질 미립자로 된 신체는 전혀 죽지 않았으며, 그것은 다른 공간 속에, 미시하의 공간 중에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다 한 사람이 직면하는 것은 바로 모든 세포가 전부 해체되는 것인데, 불교 중에서는 형신전멸(形神全滅)이라 한다.

    

사람이 그의 일생을 개변시킬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유일한 방법으로서, 바로 이 사람이 이후부터 한 갈래 수련(修煉)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련의 길을 걸으면 그의 인생을 개변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누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 사람이 수련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하는, 이 의념(意念)이 움직이기만 하면 마치 금과 같이 빛나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하기 때문이다. 불가의 우주에 대한 개념은 시방세계 학설이다. 왜냐하면 고급 생명이 볼 때 사람의 생명은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생명은 우주 공간 중에서 생겨난 것이며, 우주와 동일한 성질이고 선량한 것으로서, ()()(), 이런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여긴다."

      

"우리는 또 이런 정황을 보게 된다: 한 사람이 태어날(降生) , 특정한 공간 중에는 그의 일생의 존재형식이 모두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명이 어느 한 부분에 와서는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모두 그 속에 있다. 누가 그의 일생을 안배하는가? 아주 분명한데, 바로 더욱 고급적인 생명이 이런 일을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속인사회 중에서 그가 출생한 후, 이 집에 그가 있고, 학교에 그가 있으며, 또는 성장하여 직장에 그가 있어, 그의 일을 통해 사회와 다방면으로 연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전반 사회의 구성은 모두 이렇게 배치가 잘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생명체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원래 특정한 안배를 따르지 못하고 변화가 일어났다. 그럼 누가 이 일을 혼란시켰다면 그 고급생명마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고층차로 수련하려 하는데, 그 고층차 중의 생명마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말해 보라. 그가 여전히 수련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부는 이런 일을 안배한 고급생명보다 층차가 높지 않으므로 그의 사부까지도 따라서 재앙을 당할 것인데, 그러면 모두 떨어져 내려와야 한다. 당신이 생각해 보라. 이것이 보통 문제인가? 그러므로 일단 이런 일을 했다면 수련하기가 아주 어렵다.

    

法輪大法(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수련생 중에는 아마 전쟁년대(戰爭年代)에 싸움을 했던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전쟁은 전반적인, 큰 천상(天象) 변화가 가져온 일종 상태로서, 당신은 다만 그런 상태 중의 한 분자에 불과하다. 천상변화는 만약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속인사회에 어떤 상태도 가져다줄 수 없으며, 그것을 천상변화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한 일은 큰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서, 그 일을 완전히 당신 몸에 떠넘길 수 없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을 도모하기 위해서거나, 개인의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거나, 또는 자신의 그 무엇이 영향 받을까 봐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서 가져오는 업력이다. 무릇 전체 큰 공간의 변화와 사회적인 큰 형세의 변화에 관련되는 이것은 모두 당신의 문제에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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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신이 배치하는 것으로 다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으며 우주의 법에 부합하게 작업을 해야합니다. 운명은 그저 신들의 배치, 계획이며 이것은 우주특성에 따라 가라고 만들어 놓은 일종의 답안지입니다. 즉 가장 수승하고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나서 자유의지에 따라 좋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것이며 신이 정해준 범위 속에서 자유의지로 선택을 하는 것이며 대다수의 경우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있는 경우는 우주의 법리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분과 위덕이 있다면 배치를 부정하고 바꿀 수 있으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법에 일체 모든 생명은 부합해야하는 것으로 우주의 법리에 더 부합하면 그 배치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명분이 있는 것으로 이 명분이 우주의 법에 부합해야하며 우주의 법을 실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의 성품을 실현하는 것도 이에 속하며 이는 개인 수련의 범주를 넘어선 것입니다. 이때는 신도 그를 위해 배치할 수 있지만 본인도 명분에 따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길을 배치하고 작업할 수 있습니다.

 

또 벗어날 수 있는 경우는 수련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법에 부합해가는 것, 신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며 개인 수련범주 내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며 이것 역시 신이 새롭게 배치하여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줍니다.

 

자유의지와 운명은 서로 배리적이고 반대적인 관계가 아니며 이분법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자유의지와 운명은 상호충돌하는 것이 아니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서 중요한 핵심은 승화가 되게 하며 이타심, 자비심 등의 고귀한 가치들을 실현하면서 우주의 법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도 우주의 법에 부합해야하고 운명도 우주의 법에 부합해야하는 것으로 사람은 생명이 아닙니까? 또 신도 생명이 아닙니까? 사람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선택을 설계하고 신은 범위내의 선택권을 주고 범위를 크게 설계하여 주는 것으로 서로 양자가 다 우주의 법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생명의 승화를 위한 것이고 또한 신들로서도 자신의 위덕인 것이며 생명도 승화되고, 신도 승화되고 모두 함께 득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서로 윈윈하는 것이며 자유의지와 운명은 승화라는 같은 목적을 향해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유의지, 신의 입장에서는 운명을 서로 배치하는 것이며 이것을 더욱 크게 본다면 층차상으로 낮은 신은 선택을 통해 우주의 법에 동화되고, 더욱 큰 신은 아래 신에게 범위를 배치해주면서 우주의 법에 동화되는 것이고 양자가 다 이득인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운명은 우주의 법을 수호하는 서로 상호보완적이며 협력하는 개념이고 배리적이고 이분법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만약 신의 배치가 어긋난다면 그에 대해서 명분과 위덕이 충분히 운명을 배치한 신을 초월하는 경우에는 그 운명을 배치한 신의 배치가 무효화될 수 있으며 운명을 배치한 신이 되려 그 명분과 위덕등에 의해서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반면 충분치 않다면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것이며 그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습니다. 어긋날 지라도 역시 우주의 법을 수호해야하기 때문에 다시 현 사정에 맞게 배치를 할 것인데 몇 가지 과정이 좀 더 늘어나거나 복잡해질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주의 법이 지켜질 수 있도록 생명의 선택권을 다시 유도하고 배치해준다는 것입니다. 즉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 태도표시를 하여 우주의 법에 동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신들은 간절히 생명들이 승화되어 신들의 세계로 생명들이 되돌아오며 진정한 행복을 되찾길 바라고 계십니다.

 

승화라는 목적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이는 희망을 위해서 우주가 움직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부터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도 희망이 될 수 있고 자신이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노력등을 조금씩이라도 한다면 우주는 반드시 그에 화답할 것이며, 우주의 법에 동화된 자는 신들에게 가장 축복된 자로서 천국세계에 갈 수도 있으며 자신이 직접 신으로 성취될 수도 있습니다. 무릇 겸손한자라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심성과 성품을 갈고 닦아, 신들의 간절한 바램대로 노심초사 그 마음 그대로 자신의 가장 수승하고 완미한 길을 창조할 것입니다. 모두 좋은 방향으로 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