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대예언가 격암 남사고 (한국설화)


남사고(南師古)는 조선 명종 때(서기 1509∼1571년)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아이를 신동(神童)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렇다고 성장하여 장원급제를 하거나 벼슬을 탐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한때 그가 일종의 천문학 교수인 종6품의 관상감(觀象監)이란 벼슬을 하게 된 것도

역학(易學)·복서(卜筮)·상법(相法)·천문(天文) 등에 남다른 박식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1

선생이 어린 시절에 불영사(佛影寺)란 절을 갔을 때 일이다.

스님 한 분이 선생을 보고 깜짝 놀라며 천기(天氣)를 받아 눈에 광채가 번뜩이고 있음을 보자

"아! 그놈 참 영특하게 생겼구나." 스님의 이 같은 말을 듣고 있던 선생이,

"그럼, 스님 저하고 바둑 한 판 두지 않겠습니까?" 하고 청하자.

스님은 마음 속으로,

'바둑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운하다 할 정도인 내가……어린 네가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나를 감히 이길 수 있겠느냐?'

이런 마음으로 어린 남사고에게 쾌히 응락을 했다.

두 사람은 절 근처에 있는 부용봉(芙蓉峯)에서도 기암절벽이 수려한 노송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태고 때부터 아름다운 산세에 몇 백년동안 만고풍상을 다 겪으면서 꼬불꼬불하게 자라난

큰 노송 밑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스님과 어린 나이인 남사고선생이 마주하여

바둑을 두는 모습은 참으로 돋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처음에는 이내 승부가 날 것으로 생각했던 노스님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수가 남사고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서 점점 불안해졌다.

남사고는 웃음을 띄면서 장난하듯이 쉽게 두고 있어도 승세를 계속 유지하게 되자

노스님은 망신스럽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결국 바둑은 나이 어린 남사고가 이겼다.

화가 난 노스님은 갑자기 산천이 떠나 갈 정도로 큰 소리를 치며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땅 속에서 머리와 콧등을 먼저 보이며 큰 황소처럼 변장하여 나타나면서

남사고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나타나도 무섭지 않느냐?" 고 하자 남사고는 태연한 모습으로,

"뭐가 무섭습니까? 본래 모습은 스님이었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노스님은 자신이 어린 남사고와 힘을 겨루는 못난이었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그 후 노스님은 남사고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자신이 사부로부터 전수를 받은

천문지리에 관한 각종 비록(秘錄)을 남사고에게 전해주었다.

내용2.

천하의 유명한 남사고가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 묘 하나도 제대로 명당에 묻지 못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명당을 구해 장사 지냈는데

다음에 와서 보니 명당이 아니었다.

다시 명당을 구해 이장하고 다음에 와보면 역시 명당이 아니었다.

이러기를 아홉 차례나 반복하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 대지를 구해 어머니 유골을 안장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밭을 갈던 한 농부가 노래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째 장사한 구천십장(九遷十葬) 남사고(南師古)야!

용이 하늘을 날 듯이 올라가는 형국인 비룡상천(飛龍上天) 좋아하지 마라.

죽은 뱀을 나무에 걸쳐놓은 형국인 고사괘수(枯蛇掛樹)가 아닌가 하거늘."

남사고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산형(山形)을 자세히 보니 과연 사룡(死龍)이었다.

급히 밭을 갈던 농부를 찾으니 그는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남사고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대지(大地)는 필히 그 주인이 있는 법이니 평소 덕을 쌓지 않은 어머니를

억지로 명당에 모시려고 해도 아무나 얻는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무해지지(無害之地)를 찾아 이장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명당 대지는 천장지비(天藏地秘)하는 것으로

유덕지인(有德之人)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며

풍수 술법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남사고는 본관이 영양(英陽)이고 호는 격암(格庵)이다.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났으며,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의 비결에 도통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는데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명종 말년에는 동서분당(선조 8년, 1575년)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진왜란을 예언했는데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한테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특히 그는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문집에는 격암일고(格庵逸槁)가 있다.

남사고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 이유 없이 자꾸 야위어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훈장이 까닭을 물어보니

서당에 올 때마다 여우목 고개에 예쁜 여자가 나타나

입맞춤을 하자면서 자신을 희롱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묘령의 여자는 입맞춤을 할 때마다 입 속에 구슬을 가지고 논다고 하였다.

훈장은 여우가 여자로 둔갑한 것임을 알고 다시 입맞춤을 할 때

여자 입 속의 구슬을 빼앗아 삼키고 도망치라고 일러주었다.

다음날 서당에 오는데 또 예쁜 여자가 입맞춤을 하자면서 따라오자

남사고는 스승이 시킨 대로 얼른 여자의 입 속에 있는 구슬을 삼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처녀가 구슬을 내놓으라고 뒤쫓아오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처녀는 늙은 여우로 변하면서 슬피 울다가 되돌아갔다.

허겁지겁 서당에 온 남사고를 보고 훈장은 넘어질 때

어디를 제일 먼저 보았냐고 묻자 땅을 제일 먼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훈장은 탄식을 하면서

"아깝도다! 넘어질 때 하늘을 먼저 보았으면 천문에 능했을 텐데

땅을 보아 지관에 머물겠구나"하였다 한다.

남사고가 젊었을 때.

경북 울진 불영사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둘은 같이 유람하다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는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힘써 보라"하면서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는 이로부터 명지관이 되었고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을 하여 지금도 '남사고결록' '격암유록'등이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이 실재로 남사고가 쓴 책인지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 남사고의 이름을 도용하여 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 무량님 글입니다 양해부탁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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