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墨子)


* BC 470(?)~BC 391(?). 중국의 철학자.
본명은 묵적(墨翟).
보편적 사랑, 즉 겸애(兼愛)를 기본 이념으로 삼는 그의 철학은 수백 년 동안
유학과 맞섰고 묵가(墨家)라고 부르는 종교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생애
공자가 죽은 지 몇 년 뒤에 태어난 묵자는
주(周:BC 111~256/255) 초기에 제정된 봉건적 계급제도가 급속히 무너지고,
중국이 작은 봉건국가들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성장했다.
따라서 그는 BC 5세기의 중국 사상가들이 당면한 문제, 즉
어떻게 하면 혼란 속에서 정치·사회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묵자는 원래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던 유학자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교는 부담스러운 의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종교적 가르침을 너무 소홀히 한다고 확신하게 되어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공자는 모든 점에서 볼 때 귀족적인 기질과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화려하고 웅장한 주나라 초기의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반면에 묵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끌렸고, 주나라보다 훨씬 오래된 원시시대의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과 솔직한 인간관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묵자의 인생은 중요한 부분에서는 대부분 공자의 인생과 비슷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고, 중국 고전의 전통에 따라 시를 잘 지었다.
또한 잠시 벼슬에 나섰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군주를 만나기 위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인생을 보냈다.
그러나 각국을 돌아다녀도 그가 찾는 군주는 없었기 때문에,
학교를 운영하면서 제자들을 관직에 추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고 자신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스승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공격적인 전쟁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곤 했다.

〈묵자〉는 묵자와 그의 제자들이 남긴 주요저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묵자의 정치·윤리·종교적인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묵자〉는 총 53편인데,
이는 다시 5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에서 10가지 주요덕목을 개괄하고 있는 2번째 부분이 바로 〈묵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그 10가지 덕목은
상현(尙賢:어진 사람을 존경함)·
상동(尙同:윗사람의 뜻에 동조함)·
겸애(兼愛:보편적 인류애)·
비공(非攻:침략 전쟁에 대한 비난)·
절용(節用:근검 절약)·
절장(節葬:장례의 간소화)·
천지(天志:하늘의 뜻과 그에 따른 상벌)·
명귀(明鬼:상벌을 내리는 귀신을 섬김)·
비악(非樂:낭비적 활동인 음악에 대한 비난)·
비명(非命:숙명론에 대한 반대) 등을 말한다.

〈묵자〉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묵자의 가르침에 대한 요약·발췌,
② 논리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논의,
③ 묵자의 언행에 대한 기록,
④ 군사적 방어술 교본 등이다.

가르침
and the way of God.  
사상가로서 묵자는 방법론을 강조한 점이 독특하다 (→ 색인 : 묵변).
그는 판단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판단기준은 3가지 검증(三表)과 4가지 기준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말한 3가지 검증이란 사상가들이 어떤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명제의 근거(本之),
입증 가능성(原之),
적용 가능성(用之)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4가지 기준은 사상가들이 어떤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명제가 나라와 백성에게 가져올 수 있는 이익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익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는 것(富),
인구를 늘리는 것(象),
위험을 제거하는 것(安),
혼란을 통제하는 것(治)이다.
그에게 있어 이런 검증과 기준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무엇을 좋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것이 무엇에 좋은가를 분명히 입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묵자의 철학체계를 지탱하고 있는 토대는 보편적 사랑이다.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편애 때문이고, 따라서 이런 혼란을 없앨 수 있는 치료법은
'편파성을 보편성으로 바꾸는 것'(이것은 그리스도의 박애사상과 놀랄 만큼 비슷함)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남의 나라와 도시를 자신의 나라와 도시로 생각하면 아무도 남의 나라를 공격하거나 남의 도시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개인의 행복에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세계 평화와 인간의 행복은 보편적 사랑의 실천에 달려 있다.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실현 불가능하다거나 부모의 특수한 권리를 무시한다는 등의 수많은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그는 보편적 사랑의 원리가 실용적인 정당성과 신성한 구속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보편적 사랑과 상호이익'을 함께 이야기했으며,

이 원칙이야말로 인간의 길인 동시에 신(神)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묵자의 종교관은 다른 중국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것이다.
그는 선조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가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를 인격 신에 대한 신앙의 종교적 정통성을 옹호하는 신앙부흥운동가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하늘이 있고 하늘에는 뜻(天意)이 있으며,
인간은 이 하늘의 뜻에 복종해야 하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는 통일된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묵자는 생각했다.
"우리가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하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이다.

" 하늘은 '정의를 원하고 불의를 싫어할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상이나 벌을 준다.

묵자의 철학체계는 그가 자신의 삶에서 모범을 보였듯이

보편적 사랑과 금욕을 신조로 삼았으며,

그가 죽은 후 거자(鉅子:묵가 집단의 총우두머리)들의 지도하에
상당히 많은 신자를 거느린 체계적인 종교로 구현되었다.
이 종교는 여러 세대에 걸쳐 번창하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묵자의 가르침은 수백 년 동안 계속 많은 존경을 받았다.
BC 2세기초까지 학자들은 유교와 묵가를 2개의 주요한 사상 학파로 함께 언급했다.
그러나 BC 2세기초부터 묵가는 지식인의 무대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그의 고귀한 인격은 존경하면서도, 그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엄격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묵자가 재발견되고 그의 가르침이 재평가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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